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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부평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부평이씨)

 

 

본관(本貫): 부평(富平)

시조(始祖): 이희목(李希穆)

유래(由來):

 

부평 이씨(富平李氏)의 시조(始祖) 이희목(李希穆)은 고려에서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에 올랐고, 그의 증손(曾孫) 정공(靖恭)1062(문종 16) 시예부외랑(侍禮部外郞)으로 지남원부사(知南原府事)를 지낼 때 <삼례도(三禮圖)>·<손경자서(孫卿子書)>를 신조(新彫)하여 나라에서 포상을 받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판상서이부사(判上書吏部事)로 치사(致仕)하여 부평백(富平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부평(富平)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도

정공(靖恭)의 맏아들 도는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이위(李瑋)

정공의 차남 위()는 고려 선종(宣宗) 때 수태보(守太保문하시중(門下侍中

판상서이부사(判上書吏部事)에 오르고 계양군(桂陽郡) 개국백(開國伯)에 봉해져, 뒤에 광국공신(匡國功臣진정공신(鎭定功臣)의 호를 받아 계양공(桂陽公)에 봉해졌다.

 

이순(李珣)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공신. 1359(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대장군이 되어 적을 물리쳤으며, 또한 1361년에는 홍건적의 위평장(僞平章) · 반성(潘誠) 등이 20만 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경성(京城 : 개성)을 침입해올 때 예부상서로서 태주 ( 泰州 )에서 적을 격퇴하였고, 1362년 밀직사로서 서북면도병마사에 올랐다.

이어 1363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가 되었으며, 같은 해 전에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기해격주1등공신(己亥擊走一等功臣), 또 경성을 수복한 공을 인정받아 수복경성1등공신(收復京城一等功臣)에 서훈되었다.

, 이 해에 적신(賊臣) 최유 ( 崔濡 )가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 ( 德興君 )을 받들고 침입한다는 보고에 도체찰사로서 이성(泥城 : 지금의 평안북도 昌城)에 주둔하고 서북면을 방비하였다.

1364년 최유가 압록강을 건너 1만의 병력으로 침입해오자, 최영 ( 崔瑩 ) · 이성계 ( 李成桂 ) · 우제(禹 喪 ) 등과 함께 이를 격파하였다. 1365년 판개성부사에 서용되었고, 이듬해 강화도 교동 ( 喬桐 )에 왜구가 침입하자 이를 격퇴시켰다.

평리(評理)를 거쳐 1367년 신돈 ( 辛旽 )에 의하여 유배되었다가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귀양지에서 소환되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제수되었다. 이어 안주상만호가 되어 서경도만호 안우경 ( 安遇慶 )과 함께 원나라의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정벌하였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이세화(李世華)

1630(인조 8) 1701(숙종 2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부평 ( 富平 ).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栢堂) · 칠정(七井). 병조정랑 계록(繼祿)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이재(以載)이다. 큰아버지 장릉참봉 희재(熙載)의 양자로 들어갔다.

1652(효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5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정언 · 장령 등을 거쳐 황해도 · 평안도 ·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689(숙종 15)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서호 ( 西湖 )의 향리로 돌아갔다.

그 해 인현왕후 ( 仁顯王后 ) 폐비설을 듣고 반대소를 올렸다. 소에 판서 오두인 ( 吳斗寅 )과 그의 이름이 전면에 올라 있는지라, 숙종은 분노하여 밤중에 친국하였다.

그는 국문에서 국사로 인해 죽기를 원했는데 이제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 고 하고, “ 다만, 신의 죽음이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우며, 신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옥리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면 될 것을 밤새도록 친국하니 옥체를 상할까 두렵다. ” 고 형간(刑諫)하였다.

다음 날 정주로 유배가다 풀려나와 파산(坡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다. 갑술환국 후 16944월 대사간 · 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인현왕후복위도감제조로 차정한다는 말을 듣고 곧 상경하였다. 그 뒤 의금부사 겸 지경연사 · 세자빈객에 오르고,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그 뒤 공조 · 형조 · 병조 · 예조 · 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저서로는 쌍백당집 이 있다. 풍계(豊溪)의 충렬사 ( 忠烈祠 )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이정제(李廷濟)

1670(현종 11)1737(영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부평 ( 富平 ). 자는 중협(仲協), 호는 죽호(竹湖). 덕순(德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재(以載)이고, 아버지는 좌승지 세유(世維)이다.

1699(숙종 25)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소론으로서 정언·지평·사간 등을 거치면서 이유 ( 李濡 김창집 ( 金昌集 ) 등 노론계열의 중신을 탄핵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1721(경종 1) 충주목사를 거쳐 1723년 노론축출에 가담하였다가 1725(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1728년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어 대사헌·형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약관의 나이로 경사(經史)에 통하였으며 40여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오직 청렴함과 강직함으로써 왕을 보필하였다.

김일경 ( 金一鏡 )이 득세하자 그에게 많은 사대부가 아부하였으나 이를 경계하였다. 술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겼으나 호조판서 재직 때에 비용을 절약하여 국고를 충실하게 하는 행정적 수완을 보이기도 하였다. 시호는 효정 ( 孝貞 )이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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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부평 이씨(富平李氏)는 남한에 총 1,228가구, 5,0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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