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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칠원윤씨(尹)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칠원윤씨)

 

 

본관(本貫): 칠원(漆原)

시조(始祖): 시영(尹始榮)

유래(由來):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신라 무열왕(武烈王) 때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지낸 윤시영(尹始榮)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영(始榮)의 아들 황() 이후에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에서 호장(戶長)을 지낸 거부(鉅富)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 후 17세손 길보(吉甫)가 삼중대광 첨의찬성사(三重大匡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고 귀성군(龜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칠원(漆原)에 정착 세거하면서 본관(本貫)을 칠원(漆原)으로 하였다.

 

가문의 중요 인물

 

윤저(尹抵)

정경공(貞景公) ()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으며 제2차 왕자의 난(王子) 때 태종(太宗)을 도와 좌명삼등공신(佐命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칠원군(漆原君)에 봉()해졌다.

?1412(태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칠원 ( 漆原 ). 고려 말기부터 이성계 ( 李成桂 )에게 시종한 인연으로 조선왕조가 건국되자, 1392(태조 1) 상장군으로 등용되었다. 1395년 형조전서가 되어 고려왕족들을 강화나루에 잡아다가 수장(水葬)하는 데 앞장을 섰다. 1396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가 되었으며, 1397년 경상도절제사로 재직 중, 박자안 ( 朴子安 )의 옥사에 관련되어 한때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400(정종 2) 상진무(上鎭撫)가 되었으며, 다음해인 1401(태종 1)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같은 해 사평우사(司平右司)가 되고 칠원군(漆原君)에 봉하여졌다. 1402년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가 되었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1408년 찬성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윤석보(尹碩輔)

?1505(연산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칠원 ( 漆原 ). 자는 자임(子任). 천이(天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삼()이고, 아버지는 사()이며, 어머니는 김맹상(金孟常)의 딸이다. 1462(세조 8) 진사가 되고 1472(성종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480년 사간원정언이 되어 유자광 ( 柳子光 ) 등과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한 임사홍 ( 任士洪 )에게 극형에 처하지 않고 유배로써 그친 것을 비판하였다. 또 이듬해에는 의정부·육조·대간의 어느 곳에서도 천거를 받지 못한 신정 ( 申瀞 )이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자 이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풍기군수·성주목사 등 여러 곳의 수령을 거쳐 1495(연산군 1) 사간이 되었고, 그 뒤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1504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 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등 실정을 거듭하는 연산군에게 충언을 하다가 강음 ( 江陰 )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이듬해 죽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출된 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오랜 간관생활 중 직언을 잘 하였으며, 생전의 청렴결백한 공직생활로 1506(중종 1) 염근리(廉謹吏), 선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윤탁연(尹卓然)

1538(중종 33)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칠원 ( 漆原 ).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석보(碩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형(文亨)이고, 아버지는 우봉현령 이()이며, 어머니는 김윤선(金胤先)의 딸이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58(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5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승정원주서를 거쳐 1568(선조 1) 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천추사 ( 千秋使 )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홍문관수찬이 되어 지제교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임했으며 명종실록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574년 주청사 ( 奏請使 )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지평·장령·교리·검상·사인 등을 역임하고 이듬 해 외직으로 동래부사·상주목사를 지내면서 선정으로 치적을 남겼다. 1580년 좌승지·도승지·예조참판을 지내고, 1582년 영남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왕이 그의 재능을 믿고 경상도관찰사로 특채하였다.

이듬 해 형조참판으로 형조에서 죄인을 다스릴 때 임산부를 장형 ( 杖刑 )에 처해 낙태해 죽게 한 책임을 지고 좌천되었다가 1585년 경기도관찰사에 올랐다. 그 뒤 한성부판윤에 승진하고 세 차례의 형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냈다.

1591년 종계변무 ( 宗系辨誣 )의 공으로 광국공신 ( 光國功臣 ) 3등에 책록되고 칠계군(漆溪君)에 봉해졌으며, 특히 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북으로 가던 도중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었다.

그 때 함경도 지방에는 이미 적이 육박했으며, 함경도에 피난한 왕자 임해군 ( 臨海君 )과 순화군 ( 順和君 )이 회령에서 북변 반민(北邊叛民)과 적에게 아부한 무리들에 의해 적의 포로가 되자 조정은 근왕병(勤王兵)을 모아 적을 격퇴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왕의 특명으로 함경도도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에 대한 방어 계획 등 시국 타개에 노력하다가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송익필 ( 宋翼弼 이산해 ( 李山海 ) 등과 팔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함흥의 창의사(彰義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계사일록 癸巳日錄이 있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윤지술(尹志述)

1697(숙종 23) 1721(경종 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칠원 ( 漆原 ). 자는 노팽(老彭), 호는 북정(北汀). 상호군 ( 上護軍 ) ()의 후손이다.

1715(숙종 41) 유계(兪啓)의 저서인 가례원류 家禮源流 의 서문을 쓴 노론의 권상하 ( 權尙夏 )가 소론의 유규(柳奎) 800여 명의 상소로 삭직되자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가례원류 시비의 전말을 논하여 권상하의 신구(伸救)를 상소하였다.

1720(경종 즉위년)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서 이이명(李 蓬 命)이 편찬한 숙종의 지문(誌文)이 또한 편파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상소하고, 유생들을 선동하여 권당(捲堂 : 동맹휴학)하였다. 이듬해 신임사화에 김일경 ( 金一鏡 ) 등 소론의 탄핵으로 사형되었다.

당시 윤봉구 ( 尹鳳九 )가 문화현령으로 있으면서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에 연고없이 선비를 죽이면 사대부는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사대부는 못 되지만 떠나야 하겠다 하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윤지술 · 임창 ( 任敞 ) · 이의연 ( 李義淵 )을 가리켜 신임(辛壬)의 삼포의(三布衣)라고 불렀다. 1725(영조 1) 노론이 집권하자 신원되고, 1802(순조 2) 사현사 ( 四賢祠 )에 제향되었다. 1841(헌종 7)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민(正愍)이다.

 

윤사국(尹師國)

1728(영조 4) 1809(순조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칠원 ( 漆原 ). 자는 빈경(賓卿), 호는 직암(直庵). 증조는 서적( 怜 績)이고, 할아버지는 지순(志淳)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경룡(敬龍)이다. 진사 경종(敬宗)에게 입양되었다.

1759(영조 35)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곧 예문관에 들어가고, 이어 양호감운어사(兩湖監運御史) · 지평 · 경상도암행어사 · 정언 · 수찬 · 승지 ·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안동현감 · 동래부사가 되었다가 1783(정조 7)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대사헌 · 대사성을 거쳐 강원도감찰사가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공조 · 형조의 판서와 강화유수 · 한성판윤을 역임하고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나이 80세가 되자 숭록대부 ( 崇祿大夫 )의 관계에 승진하여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서예에 뛰어난 재주가 있어 조정의 금보(金寶) · 옥책 ( 玉冊 )과 당시 사찰 · 누관(樓觀)의 편액 ( 扁額 )을 많이 썼다.

 

윤형은(尹衡殷)

효자(孝子)로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음.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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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남한에 총 10,815가구, 44,8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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