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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尹)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파평윤씨)

 

 

본관(本貫): 파평(坡平)

시조(始祖): 윤신달(尹莘達)

유래(由來):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시조(始祖) 윤신달(尹莘達)은 신라의 천년사직(千年社稷)이 기울고 후삼국(後三國)의 격동기에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운 명신(名臣)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용연보감(龍淵寶鑑)등의 문헌에 의하면 시조 신달은 경기도 파주 파평산(坡平山) 기슭에 있는 <용연지(龍淵池)> 라는 못 가운데 있던 옥함(玉函) 속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그가 옥함에서 나올 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과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을 윤()으로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특히 시조 신달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현신(賢臣)으로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기까지 항상 곁에서 <인의(仁義)와 도덕(道德)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충간(忠諫)했으며, 통일의 대업을 당성 하는데 결정적이 역할을 하여 벽상삼한익찬이등 공신(壁上三韓翊贊二等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작을 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파평(坡平)으로 삼아 명문세도(名門勢道)의 가문으로 기틀을 다져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윤관(尹瓘)

? 1111(예종 6).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동현(同玄).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 三韓功臣 ) 신달(莘達)의 현손이며,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낸 집형(執衡)의 아들이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 습유 ( 拾遺 ) · 보궐 ( 補闕 )을 지냈다. 1087(선종 4)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출추사(出推使)가 되어 광주 ( 廣州 ) · 충주 · 청주를 시찰하였다. 1095(숙종 1) 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형부시랑 임의 ( 任懿 )와 함께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8(숙종 3)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로서 조규 ( 趙珪 )와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를 통고하였다.

1099년에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右諫議大夫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대부 ( 左諫議大夫 ) 임의와 친척이어서 간원 ( 諫院 )인 어사대 ( 御史臺 )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 ( 中書省 )의 상서에 따라 해면되었다.

1101년에는 추밀원지주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이굉 ( 李宏 )과 함께 진사시를 주관했으며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1103년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吏部尙書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가 되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104(숙종 9) 2월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여진정벌의 임무를 맡을 때부터 1111(예종 6) 죽을 때까지의 약 7년간이다.

고려가 처음으로 동여진을 대규모로 정벌하기 시작한 것은 1080(문종 34)이었다. 이 때 여진의 세력을 크게 꺾었다. 그러나 새로 일어나는 동여진 완안부족(完顔部族)은 부족장 영가(盈歌) 때 더욱 성장해, 1103(숙종 8) 우야소(烏雅束)가 그 뒤를 이었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부근까지 미쳤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충돌 직전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定州關) 밖에 쳐들어오게 되었다.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시랑평장사 임간 ( 林幹 )에게 평정하게 했으나 여진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 때 윤관은 왕명을 받고 여진에 대한 북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 해 221일 당시 추밀원사로 있던 그는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3월에 여진과 싸웠다. 그러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부딪혀 그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을 당하였다. 이에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하였다.

적의 기병을 우리의 보병으로는 능히 감당할 수 없음을 간파한 그는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였다. 이에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확장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별무반 ( 別武班 )이라는 특수부대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1107(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지 않다는 변장(邊將)의 보고를 접하자 원수가 되어 부원수인 지추밀원사 오연총 ( 吳延寵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로 출발하였다. 한편, 여진 추장에게 거짓통보를 하여 고려가 앞서 잡아둔 허정(許貞) ·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낸다고 하자 여진족 400여 명을 보내왔다. 이 때 이들을 유인해 거의 섬멸시키고 사로잡았다.

53천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중군 ( 中軍 )은 김한충 ( 金漢忠 ), 좌군 ( 左軍 )은 문관 ( 文冠 ), 우군 ( 右軍 )은 김덕진(金德珍)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수군 ( 水軍 )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 摩 ) 등이 2,600명으로 도린포(都鱗浦)의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막강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이 동음성(冬音城)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다. 여진군이 숨은 석성 ( 石城 )은 척준경 ( 拓俊京 )을 시켜 패주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태반을 섬멸하였다.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무찌른 곳은 135개처, 적의 전사자 4,940, 생포 130명의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조정에 전승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남도지방의 이주민들이 이곳을 개척해 살게 되었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咸州)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 ( 英州 )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 ( 雄州 )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 ( 福州 )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吉州)에 성곽 670칸과 이주민 680가구, 공험진(公 年 鎭)에 이주민 532가구 였다.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崇寧) · 통태(通泰) · 진양(眞陽)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 ( 大都督府 )를 두어 이곳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이렇게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자 그곳에 웅거하던 우야소가 반발해 1108(예종 3) 초에 군사를 이끌고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가한촌(加漢村) 전투에서 포위당했으나 척준경 등의 역전으로 겨우 구출되었다. 영주성의 공방전에서는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기지로써 여진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또다시 여진군 수만명에게 웅주성이 포위되었을 때에도 척준경의 지략과 용기로써 적을 패주시켰다.

그 해 330일 포로 346, 96, 300두를 노획해 개경으로 개선해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봉해졌다.

서쪽에 강력한 요나라와 접경하고 있던 여진은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윤관의 9성 축조와 농업이주민으로 말미암아 농경지를 빼앗긴 토착여진족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길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아래 성을 돌려주기를 원하였다.

드디어 여진은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을 개시했으며,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 환부를 논의하였다. 평장사 최홍사 ( 崔弘嗣 ) 28명은 찬성하고, 예부낭중(禮部郎中) 한상(韓相)은 반대했으나 당시 조정은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이유는 여진을 공략함에 있어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그들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예측이 맞지 않았으며, 근거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고,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거리가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백성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 등이었다.

그리하여 1109(예종 4) 7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해 7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윤관이 장병들과 더불어 생명을 걸고 경략했던 9성 일대의 땅이 다시 여진에게 환부되었다. 뒤에 아쿠타(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워 강대한 국가가 된 데에는 그들이 9성을 다시 찾은 데 그 원인이 있었다.

9성의 환부로 여진 정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당하였다. 명분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했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못한 채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처벌을 주장했던 재상 · 대간들을 물리치며 비호한 예종의 덕으로 1110년 다시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1130(인종 8)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사적 제323)에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윤번(尹磻)

1384(우왕 10)1448(세종 3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온지(溫之). 이름을 번()으로 쓰기도 한다. 아버지는 고려 말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이다. 세조의 장인이다.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신천현감을 거쳐 1428(세종 10)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을 역임하였다. 딸이 수양대군의 부인이 되자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에 승진되고, 이어 공조참의가 되었다. 1434년 이조·호조의 참판,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1439년 경기도도관찰사·대사헌 등을 지냈다.

1440년 우참찬·공조판서에 이어 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풍병으로 사직하고, 1447년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윤사분(尹士昐)

1401(태종 1) 1471(성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계휘(繼輝).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판서 승례(承禮)이고, 아버지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 또는 )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이문화(李文和)의 딸이다.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 ( 貞熹王后 )의 오빠이다. 1426(세종 8) 문음으로 중부녹사(中部錄事)가 되고 세자익위사우위솔(世子翊衛司右衛率) · 사헌부감찰 · 형조좌랑 · 호조좌랑 · 한성부판관 · 형조정랑 등을 거쳐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지내고 이어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1455(세조 1)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첨지중추원사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봉하여졌다. 그 뒤 첨지돈녕부사(僉知敦寧府事) · 인수부윤(仁壽府尹) · 공조참판 · 중추원부사 · 중추원사 ·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하고, 1464년 우찬성에 올라 이어 좌찬성 · 지중추부사를 거쳐 1468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가 되었다.

이 해 예종이 즉위하자 우의정, 이듬해 판중추부사, 1470(성종 1)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이정(夷靖)이다.

1401(태종 1) 1471(성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계휘(繼輝).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판서 승례(承禮)이고, 아버지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 또는 )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이문화(李文和)의 딸이다.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 ( 貞熹王后 )의 오빠이다. 1426(세종 8) 문음으로 중부녹사(中部錄事)가 되고 세자익위사우위솔(世子翊衛司右衛率) · 사헌부감찰 · 형조좌랑 · 호조좌랑 · 한성부판관 · 형조정랑 등을 거쳐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지내고 이어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1455(세조 1)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첨지중추원사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봉하여졌다. 그 뒤 첨지돈녕부사(僉知敦寧府事) · 인수부윤(仁壽府尹) · 공조참판 · 중추원부사 · 중추원사 ·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하고, 1464년 우찬성에 올라 이어 좌찬성 · 지중추부사를 거쳐 1468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가 되었다.

이 해 예종이 즉위하자 우의정, 이듬해 판중추부사, 1470(성종 1)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이정(夷靖)이다.

 

윤사윤

번의 둘째 아들 사윤()은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영평군에 책봉되었다.

 

윤사흔(尹士昕)

? 1485(성종 1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필보(弼甫).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판서 승례(承禮)이고, 아버지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 또는 )이며, 어머니는 이문화 ( 李文和 )의 딸이다.

1455(세조 1) 정희왕후 ( 貞熹王后 )의 동생으로 군기감정(軍器監正)으로 출사하였고, 이어 정랑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1458년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가 되었으며, 형조참의 · 이조참판을 거쳐 1460년 호조참판이 되었으나, 의정부전리(議政府典吏)를 마음대로 문책한 탓으로 탄액을 받고 관직이 박탈되었다가, 다음해에 다시 등용되어 인순부윤(仁順府尹)이 되었으며, 중추원사 ·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71(성종 2) 성종을 옹립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공으로 좌리공신 ( 佐理功臣 ) 2등에 녹훈되었다. 1473년 대사헌 서거정 ( 徐居正 )으로부터 훈척대신(勳戚大臣)으로 총병(摠兵)의 직에 있으면서 병권을 마음대로 천단하였다고 탄핵되었다. 1475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1483년 파천부원군(坡川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윤곤(尹坤)

?1422(세종 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아버지는 개성부사 승순(承順)이다.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아우 향()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1400(정종 2) 방원(芳遠 : 뒤의 태종)이 그의 동복형인 방간(芳幹)이 일으킨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고,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파평군(坡平君)에 봉작되었다.

1406년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 있을 때 다른 사건에 연루, 파직되어 파평현에 유배되었다가,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평안도관찰사로 기용되었다. 그가 학덕이 높은 것을 알고 있는 세종은 침전에서 환송연을 베풀어주는 등 크게 총애하였다. 이듬해 9월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그의 파격적인 출세는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기악(妓樂)을 폐지하여 풍속을 바로잡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 뒤 우참찬까지 지냈다. 성질이 관후(寬厚)하고 풍채가 매우 좋아 복옹(福翁)이라는 별칭을 받았다.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윤호(尹壕)

1424(세종 6) 1496(연산군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숙보(叔保). 승순(承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곤()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삼산(三山)이며, 어머니는 이원(李原)의 딸이다. 성종비인 정현왕후 ( 貞顯王后 )의 아버지이다.

1472(성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1480년 성종이 그의 딸을 왕비로 삼자 국구(國舅)로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공조참판으로 정조사 ( 正朝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8년 영돈녕부사에 이르고 이듬해 사복시제조(司僕寺提調)를 겸하였다.

1494년 우의정으로서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가 궤장( 廓 杖)을 하사받았다. 성품이 검소하고 무교(無驕)하며 외척으로서 세도는 추호도 찾을 수 없었다. 저서로는 파천집 坡川集 이 있다.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윤필상(尹筆商)

1427(세종 9) 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탕좌(湯佐) · 양경(陽卿). 삼한공신 신달(莘達)의 후예이며,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제(希齊)이고, 아버지는 경( )이며, 어머니는 이목(李 擔 )의 딸이다.

1447(세종 29) 사마시를 거쳐 1450년 추장 문과(秋場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1453(단종 1) 저작이 되었고, 1455(세조 1) 호조좌랑으로 원종공신 ( 原從功臣 ) 2등에 책록된 뒤 서연관 ( 書筵官 )이 되었다.

1457년에 중시에 급제했으며, 1463년 동부승지가 된 뒤 형방승지 · 도승지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의 측근에서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특히, 형방승지로 있을 때 날씨가 매우 춥자 서울과 지방에 있는 죄수들을 낱낱이 상고해 작은 책자에 기록해 두었다가 세조의 죄수 현황을 묻는 물음에 즉시 응답해 신임을 두터이 하였다.

이를 계기로 계속 승진했으며, 1467년 이시애 ( 李施愛 )의 난 때 도승지로 왕명을 신속히 처리해 우참찬에 특배되고, 적개공신 ( 敵愾功臣 ) 1등에 녹훈되어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강순 ( 康純 ) 등이 파저강(婆猪江) 주위의 야인을 토벌할 때 왕명을 받고 진군에 가서 개선군들을 위유(慰諭)하였다.

이듬해는 원접사 ( 遠接使 )인 안주선위사(安州宣慰使)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이 해에 세조가 죽자 수묘관(守墓官)으로 능을 3년간이나 지켰고, 좌리공신 ( 佐理功臣 )이 되었다.

1471(성종 2) 우찬성으로 재직시 경상도에 가뭄이 들어 기근이 심하자 진휼사(賑恤使)가 되어 기민을 구제했고, 다시 경상도관찰사를 겸해 이듬해까지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한 공으로 모의(毛衣) · 녹비화 鹿皮靴 를 하사받았다.

그 뒤 1474년에는 이조판서 · 의금부당상을 겸직하다가 한명회 ( 韓明澮 ) · 노사신 ( 盧思愼 ) 등 권신들이 전권을 오로지 하면서 이조의 권한인 인사권까지 침해하므로 이에 분개해 사직하였다. 그러나 곧 복직되어 1477년에는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사복을 채웠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이 해 다시 풀려 나와 좌찬성이 되고, 주청사 ( 奏請使 )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건주위(建州衛)의 야인들을 자세히 탐지, 보고했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479년 명나라에서 야인을 치려고 조선에 군사를 요청하자 어유소 ( 魚有沼 )를 도원수로 하여 정벌군을 보냈으나, 어유소의 군대가 얼음이 녹아 강을 건널 수 없다는 이유로 되돌아왔다.

일이 급박해지자 한명회 등이 다시 정벌군을 뽑아 보낼 것을 강력히 주장하자 그는 우의정으로 서정도원수(西征都元帥)로 뽑혀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건주위를 토벌, 큰 전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1481년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84년에는 영의정이 되어 부원군 ( 府院君 )에 봉해졌다.

그 뒤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으며, 1496(연산군 2)에는 궤장( 廓 杖)을 하사받는 영예를 누렸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지난 성종 때에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尹妃)의 폐위를 막지 않았다고 추죄(追罪 : 일이 마무리된 후에 다시 죄를 다스림.)되어 진원 ( 珍原 )의 유배지에서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 뒤 중종반정 때에 신원되었다. 그는 국사를 논하는 데에 임금의 뜻에만 영합했으므로 사림들이 천히 여겼다.

 

윤현(尹鉉)

1514(중종 9)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자용(子容) 또는 국간(菊磵). 좌의정 필상(弼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간()이고, 아버지는 승홍(承弘)이며, 어머니는 부안정(富安正) 이증(李增)의 딸이다.

1531(중종 26)에 생원이 되고, 1537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이 되고 수찬·교리 등을 역임한 뒤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하였다. 1550년 장악원정으로 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광주목사(廣州牧使), 황해도·충청도·경기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호조참판·우참찬·호조판서 등 중앙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72(선조 5)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그가 노년에 이르도록 관직에 있었던 것은 탁월한 행정수완 때문이었다.

특히 호조에서 근무할 때는 국가재정을 아끼고, 한편으로는 재정을 유족하게 만들어 국조 이래 제1인자로 칭송되었다. 명종 때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국간집 菊磵集이 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514(중종 9)1578(선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자용(子容) 또는 국간(菊磵). 좌의정 필상(弼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간()이고, 아버지는 승홍(承弘)이며, 어머니는 부안정(富安正) 이증(李增)의 딸이다.

1531(중종 26)에 생원이 되고, 1537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이 되고 수찬·교리 등을 역임한 뒤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하였다. 1550년 장악원정으로 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광주목사(廣州牧使), 황해도·충청도·경기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호조참판·우참찬·호조판서 등 중앙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72(선조 5)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그가 노년에 이르도록 관직에 있었던 것은 탁월한 행정수완 때문이었다.

특히 호조에서 근무할 때는 국가재정을 아끼고, 한편으로는 재정을 유족하게 만들어 국조 이래 제1인자로 칭송되었다. 명종 때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국간집 菊磵集이 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윤사로(尹師路)

1423(세종 5)1463(세조 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호는 과옹(果翁) 또는 주옹(周翁).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희제(希齊)이고, 아버지는 목사 은()이며, 어머니는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이수상(李守常)의 딸이다.

1436(세종 18) 14세의 나이로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하여 영천군(鈴川君)에 봉하여지고, 점차 승계하여 자의대부·통헌대부가 되었다. 1452(문종 2) 영천위(鈴川尉)로 개봉되었으며, 문종이 죽은 뒤에는 수릉관·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맡았다.

곧 이어 숭덕대부로 승계되었고, 1454(단종 2) 광덕대부 ( 光德大夫 )로서 과전 70결을 받았다. 이듬해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협조한 공로로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1456(세조 2) 의정부좌찬성으로 의금부제조를 겸하면서 세조의 찬탈에 반대하던 일파를 추국 ( 推鞫 )하여 벌하였고, 이어 성록대부로 승계하였으며,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가 되었다. 이듬해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에 봉하여지고, 1461년 간경도감도제조(刊經都監都提調)가 되었고, 이듬해에 충훈부당상(忠勳府堂上)으로서 죽었다.

세태파악에 밝고 사람의 심리를 잘 파악하여 현재에 유리한 쪽을 따르는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세조의 찬탈에 협조를 하였다. 또한, 그 공로로 작위가 올랐을 뿐만 아니라 사전도 많이 받았으며, 또 재물에 욕심이 있어 많은 재산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래 사람에게 교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많은 사람이 따랐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윤헌주(尹憲注)

1661(현종 2)1729(영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길보(吉甫), 호는 이지당(二知堂). 종복(宗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열(受說)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택()이며, 어머니는 안영달(安穎達)의 딸이다.

1683(숙종 9)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가 참봉·봉사를 역임한 뒤 1698년 춘당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곧 전적·황해도도사를 거쳐 이듬 해 정언이 되었다. 이어 헌납·지평·장령 등 언관을 역임하면서 궁장토 ( 宮庄土 )의 폐단을 지적하고 폐지를 주장하는 등의 언론 활동을 폈다.

그 뒤 시강원에 들어가 제자를 가르쳤고, 장악원·군자감의 정을 거쳐, 외직에 나가 남양·양주 군수를 역임하였다. 1705년 사간에 올랐으며, 이어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여주목사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모함을 받아 국문을 받았지만 결백이 밝혀져 석방되어 다시 승지가 되었다.

1716년 성주목사로 나가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다 하여 품계가 올랐고, 돌아와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이어 충청감사로 나갔다가 임기를 마친 뒤 돌아와 한성부의 우윤 ( 右尹 ), 형조·병조·호조의 참판을 지냈고, 도승지를 여러 차례 역임한 뒤 1720(경종 즉위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북도(北道)의 풍속이 비루함을 보고 관혼상제의 예절을 보급하고, 사서삼경을 간행해 열읍(列邑)에 배포하는 등 북도 교화에 노력하였다. 또 진()과 보()를 증설하고 군사들의 훈련을 독려해 국방을 강화하는 등의 치적을 올렸다.

그 뒤 한성판윤으로 돌아왔으나 성주목사와 함경감사로 있을 때 청렴하지 못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용천부(龍川府)에 정배되었다. 그 뒤 영조가 즉위해 노론이 득세할 때에 석방되어 평안감사를 역임하였다.

다시 여러 판서를 거친 다음 파직당했다가 이인좌 ( 李麟佐 박필현 ( 朴弼顯 ) 등이 무신란 ( 戊申亂 )을 일으키자 북도안무사(北道安撫使)로 기용되어 평안도 일대에서 민심을 무마하고 돌아와 곧 죽었다. 1748(영조 24) 무신란을 토평한 공으로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추록되고 영의정을 추증받았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윤강(尹絳)

1597(선조 30) 1667(현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자준(子駿), 호는 무곡(無谷). 증참판 지함(之 歟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랑 엄()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민헌(民獻)이며, 어머니는 김찬선(金纘先)의 딸이다.

1624(인조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 예문관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626년 검열이 되었다. 같은 해 봉교 · 정언 · 교리를 거쳐, 1642년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승정원승지가 되고 이조참의를 지냈다.

효종 때 대사간으로 있다가 한때는 충원현감(忠原縣監)으로 나갔으며,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올라 이조참판 · 대사헌 · 도승지를 지내고,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657(효종 8)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1659년 효종의 상을 당하였을 때 예조판서로서 빈 · 장양도감(嬪葬兩都監)의 제조 ( 提調 )를 겸하여 힘껏 주선한 공으로 숭정대부 · 판의금부사에 오르고 이조판서가 되어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인조 · 효종 · 현종 3조에 역사하여 80여 벼슬을 지내면서 신명을 바쳐 일하였으며, 1664(현종 5) 민유중 ( 閔維重 )의 탄핵으로 사퇴하여 안산(安山) 옛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윤지미(尹趾微)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관(醫官). 본관은 파주(坡州). 1591(선조 24) 병오식년(丙午式年)에 의과등제하고, 1612(광해군 4)에 통훈대부 ( 通訓大夫 ) · 내의원직장(內醫院直長) · 부참군(副參軍) · 의서인출감교관(醫書印出監校官)을 역임하였고, 뒤에 내의정(內醫正)을 지냈다.

부경사(赴京使)에 수행하여 명나라의 왕응린(王應 虜 )과 의사문답(醫事問答)을 하였는데, 왕응린은 그 내용을 그의 저서 왕응린잡집 王應 虜 雜集 에 수록하였다.

그 뒤 이것을 초출(抄出)하여 일본에서 1716년에 답조선의문 答朝鮮醫門 (1)을 간행하였다. 그는 이희헌(李希憲)과 같이 동의보감 · 찬도맥 纂圖脈 · 신찬벽온방 新撰 陽 瘟方 · 벽역신방 陽 疫神方 의 감교관(監校官)이 되어 편찬에 참여하였다.

 

윤지선(尹趾善)

1627(인조 5)1704(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중린(仲麟), 호는 두포(杜浦).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현(民獻)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강()이며, 어머니는 정광성 ( 鄭廣成 )의 딸이다. 우의정 지완(趾完)의 형이다.

1660(현종 1) 진사가 되고, 1662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설서·사헌부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74년에 헌납·이조좌랑을 지내고, 이 해 숙종이 즉위한 뒤 이조정랑에 올랐으며, 이어 부수찬·종성부사·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81(숙종 7) 대사간을 지냈고, 공충도(公忠道 : 지금의 충청도)와 함경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83년에 도승지가 되고, 이듬해 형조참판·대사헌에 이어 이조참판·광주유수(廣州留守한성부좌윤을 지냈다. 1694년 병조판서로 지의금부사, 이듬해 판의금부사·지경연사(知經筵事) 등을 겸임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를 지내고, 1696년에 공조판서·좌참찬·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98년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고, 영중추부사를 거쳐,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에 이르러 77세로 죽었다.

성품이 온건하고 원만해 당쟁의 와중에 휩쓸리지 않았다. 복제설(服制說) 시비로 송시열 ( 宋時烈 )이 덕원으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도 모나지 않으면서 사리를 정확하게 판단한 소를 올려, 경직된 정국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숙종이 장희빈 ( 張禧嬪 )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려 하면서 여기에 반대하는 자는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고 할 때, "왕자가 태어난 지 겨우 몇 개월인데, 그 뒤 정궁에서 만일 아들이 없으면 세자가 저절로 정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여 숙종의 주장을 완곡하게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온건한 성품으로 숙종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다.

 

 

윤지완(尹趾完)

1635(인조 13) 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숙린(叔麟), 호는 동산(東山).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헌(民獻)이고, 아버지는 판서 강()이며, 어머니는 정광성 ( 鄭廣成 )의 딸이다. 좌의정 지선(趾善)의 아우이다.

1657(효종 8) 사마시를 거쳐, 1662(현종 3)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설서 · 헌납 · 부수찬 등을 지냈다. 1675(숙종 1) 지평으로 시독관 ( 侍讀官 )을 겸해 경연 ( 經筵 )에 나가 당쟁의 폐단을 통박하고, 덕원으로 유배된 송시열 ( 宋時烈 )의 신구(伸救)를 건의했다가 당시의 집권당인 남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1680년에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한 경신대출척으로 부교리에 등용되고, 부응교를 거쳐 경상도관찰사 · 함경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82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일행이 부사 이언강 ( 李彦綱 ) 475인이었다. 그 당시 일본측에서는 우리 나라를 상국(上國)이나 문화적 선진국으로 인식해 우리 사절을 맞이해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 정권의 권위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일본에 다녀온 이듬해 어영대장 ·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684년 경상도관찰사, 1688년 병조판서,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이 해 기사환국으로 송시열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관직을 잃고 유배되었다. 1694년에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과 관련된 갑술옥사를 계기로 민씨의 복위를 지지한 소론이 등용되자 다시 관직을 얻어 좌참찬 · 우의정 등을 지냈다.

1717년에 숙종이 좌의정 이이명(李 蓬 命)과 독대(獨對)를 하고, 세자(世子 : 景宗)에게 청정(聽政)의 어명이 있자, 80노구로 관()을 가지고 서울에 들어와 이이명의 독대를 통박하고 세자 청정이 시기상조임을 극언하였다. 또 이이명을 가리켜 대신은 국왕의 사신 ( 私臣 )이 아니다. ” 고 통박하였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영돈녕부사를 사직하고 귀향, 1703년에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윤지인(尹趾仁)

1656(효종 7) 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유린(幼麟), 호는 양강(楊江). 공조좌랑 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민헌(民獻)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강()이며, 어머니는 유익(柳 逢 )의 딸이다. 형제 정승을 지낸 지선(趾善) · 지완(趾完)의 아우이다. 부인은 판중추부사 이정영(李正英)의 딸이다.

1694(숙종 2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96년부터 세자시강원설서, 사헌부지평, 문학을 지냈다. 그 해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부수찬 · 교리, 시강원사서 등을 역임하고, 다음 해 충청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돌아와 사헌부지평, 교리 · 수찬 · 정언 · 헌납 · 이조정랑을 지냈다. 다시 홍문관교리가 되어 후궁의 수가 많고 은전이 과도하며, 궁중의 사치가 심한 것을 간쟁하였다.

1701년에는 단천의 폐광된 은광에 세금을 징수하는 폐단을 논해 시정하였다. 이 후 사간 · 집의 · 교리 · 사인 등을 거쳐 특명으로 당상관인 승지에 발탁되었다. 이 때 서원의 지나친 설립을 금지하도록 건의하였다.

그 해 9월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사약을 받을 때 숙종에게 명을 거둬들이도록 힘써 간쟁하고, 세자의 보호와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 ( 張希載 )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숙종의 노여움을 사 관직이 삭탈되고 문외출송(門外出送 : 4대문 밖으로 쫓겨남)되었다.

1703년에 다시 서용되고, 1706년 이후 부제학 · 승지 · 대사간 · 대사성 · 이조참의를 거쳐, 1708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710년 부제학 · 예조참판 · 평안도순무사 · 대사헌 · 이조참판 등을 지내고, 1712년 동지사 겸 사은사의 부사로 북경을 다녀왔다.

다음해 특명으로 판윤으로 승진하고, 1715년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 때 궐문에 괘서가 붙어 그와 최석항 ( 崔錫恒 ) 9인이 모반했다고 무고되었으나 왕이 불문에 부쳤다.

다음해 제도민호군역구관당상(諸道民戶軍役句管堂上)에 임명되어 전국의 군역 변통을 담당하였다. 그 해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안산에 다녀온 일로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었다. 청백으로 이름이 있었고 소탈했으나 소론 명문 출신으로 자주 노론측과 갈등을 빚었다 한다.

 

윤비경(尹飛卿)

1607(선조 40) 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충거(沖擧). 고조는 첨정 응규(應奎)이며, 형조참판 인함(仁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적 홍립(弘立)이고, 아버지는 유건(惟健)이며, 어머니는 직장 ( 直長 ) 권역(權役)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후에 참판 이민구 ( 李敏求 )의 문인이 되었다. 1633(인조 11)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 재임(齋任)이 되었다. 1650(효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와 전적을 거쳐 정언이 되었다.

이후 벼슬이 대개 양사 사이에 거의 머물렀는데, 각 아문의 둔전과 여러 궁가(宮家)의 절수(折受)를 파할 것을 요청하였다.

1660(현종 1) 장령으로 있을 때 효종 사후 대왕대비의 복제문제를 놓고 송시열 ( 宋時烈 ) 등 서인의 1년설과 윤선도 ( 尹善道 ) 등 남인의 3년설이 대립하였을 때 윤선도의 상소를 예론에 거짓으로 의탁한 흉계라고 극론하며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그 뒤 효종대왕 부묘( 羅 廟) 때에 독축관(讀祝官)이 된 예에 따라서 당상관에 오르고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그 직을 사양하고 지방관으로 나갔다. 통진현감으로 있으면서는 양전 ( 量田 )을 하는 데나 부역을 부과하는 데도 백성들의 편한 것을 따라 실정대로 하였다.

1667년 우승지가 되고 병조참의 · 공조참의가 되었다. 이어서 경주부윤 · 회양부사에 제수되었다. 1680(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추방되고 숙종이 회맹(會盟)할 적에 그가 인함의 적장손이라 하여 호조참판에 제수되어 가선대부에 오르고 파평군(坡平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윤봉구(尹鳳九)

1683(숙종 9) 1768(영조 44).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 유건(惟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비경 (飛卿)이고, 아버지는 명운(明運)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우참찬 봉오(鳳五)의 형이다.

권상하 ( 權尙夏 )의 문인으로, 1714(숙종 40) 진사가 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25(영조 1) 청도군수가 되었다. 1733년 사헌부지평, 이듬해 장령 ( 掌令 )이 되었고, 1739년 집의 ( 執義 )에 이르렀다.

1741년 부호군이 되었을 때 주자(朱子)를 보은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 ( 宋時烈 )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군자감정이 되었다.

1743년 사과, 1749년 진선, 1754년 서연관 ( 書筵官 ), 이듬 해 찬선을 거쳐 1760년 대사헌에 특별 임명되었으며, 1763년 지돈녕(知敦寧)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 한원진 ( 韓元震 ) · 이간 ( 李柬 ) · 현상벽 ( 玄尙璧 ) · 채지홍 ( 蔡之洪 ) 등과 더불어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호락논쟁 ( 湖洛論爭 )의 중심 인물로 꼽힌다.

호락논의 분파는 이간과 한원진에게서 심화되어 심성론 ( 心性論 )의 한 줄기를 형성하는데,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같다는 이간의 학설은 뒤에 이재 ( 李縡 )와 박필주(朴弼周)에 이어져 낙론(洛論) ’ 이라 불리고,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은 윤봉구와 최징후(崔徵厚)로 연결되어 호론(湖論) ’ 으로 지칭되었다.

윤봉구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간추리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하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 즉 성()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는 사회적 · 현실적 활동보다 심성론을 주로 한 성리학자로서의 입론(立論)에 치중했으며, 저술의 내용도 경전의 강의나 주석 및 성리설이 주를 이룬다. 저서로 병계집 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윤봉오(尹鳳五)

1688(숙종 14)1769(영조 4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계장(季章), 호는 석문(石門). 유건(惟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비경(飛卿)이고, 아버지는 명운(明運)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판서 봉구(鳳九)의 아우이다.

1714(숙종 40)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일찍이 왕세제(王世弟 : 영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고, 1746(영조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필선이 되고, 부수찬·교리를 역임하고 이듬해 홍천현감으로 나갔다가 1759년 동지의금부사·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63년 특진관 ( 特進官 )으로 판돈녕부사를 겸하고 1768년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석문집8권이 있다.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윤봉조(尹鳳朝)

1680(숙종 6)1761(영조 3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명숙(鳴叔), 호는 포암(圃巖). 유건(惟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비경(飛卿)이며, 아버지는 직장 ( 直長 ) 명원(明遠)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1699(숙종 25) 생원이 되고, 1705(숙종 3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 ( 持平 사서·정언·부수찬 등을 거쳐, 1713년 암행어사가 되었다. 이어 이조좌랑·부교리·사인·응교 등을 역임하고 승지가 되었다.

영조가 숙종 때의 구신을 등용하려 하므로 어느 벼슬에 누구를 쓰는 것이 옳다는 식의 말을 하여 영조에게 경박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이조참의 방만규(方萬規)의 상소사건에 관련되어 하옥되었다가 삭주에 귀양갔으나 곧 석방되었으며, 좌의정 민진원 ( 閔鎭遠 )에 의하여 홍문관대제학에 천거되었으나 영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광좌 ( 李光佐 )가 정권을 획득하자 정의현(旌義縣)에 귀양가서 오랫동안 안치되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에 실록도청당상을 겸하여 경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735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가 1741년 관직이 복구되어 공조참판이 되었다.

1743년 다시 부제학이 되고 이어 지중추부사로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으며, 1757년 우빈객 ( 右賓客 판돈녕부사를 거쳐 1758년에 대제학이 되었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소차(疏箚)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포암집이 있다.

 

윤심형(尹心衡)

1698(숙종 24) 1754(영조 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경평(景平), 호는 임재(臨齋). 참판 비경(飛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장 ( 直長 ) 명원(明遠)이고, 아버지는 부사 봉소(鳳韶)이며, 어머니는 이징하(李徵夏)의 딸이다.

1721(경종 1) 진사가 되고, 같은 해 정시 문과에 장원해 전적이 되었다. 이듬 해 정언에 재직 중, 소론의 과격파 김일경 ( 金一鏡 )이 환자(宦者) 박상검 ( 朴尙儉 ) · 문유도(文有道) 등을 시켜 왕세제(뒤에 영조)를 죽이려다 발각되자 이들 하수인들을 죽여 증거를 인멸시킨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재신(宰臣) 수십 인과 함께 사실을 밝힐 것을 상소했으나 소론 과격파의 방해로 묵살되었다.

신임사화로 노론이 추방당할 때 삭직되어 병계(屛溪)에 은퇴하였다. 1724(영조 즉위년) 노론의 집권으로 정언 · 교리 · 이조좌랑 · 헌납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소론 이광좌 ( 李光佐 ) · 조태억 ( 趙泰億 ) 등의 남은 죄를 추궁하다가 1728년 정미환국으로 작은아버지 봉조(鳳朝)가 귀양가고 노론의 영수인 영부사(領府事) 민진원 ( 閔鎭遠 ) 등 수십 인이 파직당할 때 같이 파직되었다.

이듬해 영조가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려 노론의 4대신 중에 조태채 ( 趙泰采 ) · 이건명 ( 李健命 )은 복관(復官)하도록 조치하자, 신설(伸雪)이 고르지 못하고 국시(國是)가 펴지지 못했음을 주장하고 시골로 가서 종신토록 절조를 지키고 벼슬하지 않았다.

이후 영조는 탕평(蕩平)을 실현해 보고자 삼사 ( 三司 )을 비롯한 승지 · 보성군수 · 양양부사 · 대사간 등 여러 벼슬을 수십 차례 내려 회유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부제학을 제수해도 상소로서 전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영조는 그가 당을 고수하는 마음이 굳셈을 알고 파하고 말았다.

그의 말년에 가서 당시 선비들이 지기(志氣)가 쇠퇴하고 이권과 벼슬자리를 좇는 풍조가 만연하자, 영조는 지조를 지킨 그의 일생을 기리기 위한 예우로 1752(영조 28)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이듬해 예조참판에 봉하였다. 다음 해에 죽으니 장단 ( 長湍 )에 장례할 때 그의 남긴 뜻을 따라 조복 ( 朝服 )을 쓰지 않고 염습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 가 한 점 전하며, 이 그림은 원말의 대표적 화가인 왕몽(王夢)의 화풍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저서로는 임재집 臨齋集 이 있다. 시호는 청헌(淸獻)이다.

 

윤증(尹拯)

1629(인조 7) 1714(숙종 40).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아버지는 선거(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장백(長白)의 딸이다. 선거가 성혼 ( 成渾 )의 외손이므로 가학(家學)이 성리학이었다. 이성(尼城 : 충청남도 논산군)의 유봉(酉峰) 아래 살았으므로 호를 유봉 이라고도 하였다.

생 애1642(인조 20) 14세 때 아버지 선거가 유계 ( 兪棨 )와 함께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 ( 道義 )를 강론하였는데, 그 때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9세에 권시(權 魅 )의 딸과 혼인하고, 그를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 전에 주자(朱子)에 관해 김집 ( 金集 )에게 배웠는데, 김집은 송시열 ( 宋時烈 )이 주자학에 정통하므로 그에게 배우라고 하였다. 당시 송시열은 회천(懷川)에 살고 있었는데, 29세 되던 해에 그에게서 사사하여 주자대전 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현종 4) 35세에 공경(公卿)과 삼사 ( 三司 )가 함께 그를 천거, 이듬해 내시교관 ( 內侍敎官 )에 제수되고 이로부터 공조랑 · 사헌부 지평에 계속하여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1682(숙종 8) 호조 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 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41(1699) 되던 해 아버지가 죽었는데,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 에 의거해 극진히 하였다.

사상 및 활동그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았는데, 그는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 朱子가 어머니 묘소 곁에 寒泉精舍를 세우고 학자들과 담론하기도 하며, 呂東萊와 함께 近思錄 을 편찬한 일을 말함)를 모방해 거상 중에 강학(講學)하기도 하였다. 거상이 끝나자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 종약(宗約)을 만들고 모임을 결성해 학사(學事)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1680년 상신(相臣) 김수항 ( 金壽恒 ) · 민정중 ( 閔鼎重 )이 숙종에게 상주해 그를 경연 ( 經筵 )에 부르도록 청했으며, 나중에는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기도 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 때 박세채 ( 朴世采 )가 그를 초치해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부제학 조지겸 ( 趙持謙 ) 역시 성의를 다해 올라오도록 권하였다. 이로부터 초치가 여러 번 있어 박세채가 몸소 내려와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 사정 이외에 나가서는 안 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옹(尤翁 :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되고, 삼척(三戚 : 金錫胄 · 金萬基 · 閔鼎重의 집안)의 문호(門戶)는 닫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조정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박세채는 이 말을 듣고 더 강권하지 못하였다.

최신 ( 崔愼 )이 송시열을 변무(辨誣)하는 것을 핑계로 그의 사서(私書)를 공개하면서 그가 스승을 배반했다고 하였으며, 또 상신 김수항 · 민정중 등도 그가 사감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상주하였다. 이로부터 선비간에 논의가 비등하게 일어나 서인이 노 · 소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송시열을 지지하는 자가 노론이 되고 그를 지지하는 자가 소론이 되었다.

그가 송시열을 사사할 때, 아버지 선거가 그에게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그의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다. 선거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송시열의 단점으로 보고, 여러 번 편지를 보내 깨우쳐 주려 하였다. 또 윤휴(尹 頊 )와 예송 문제(禮訟問題)로 원수지간이 되자 송시열과 화해시키려고 하였는데, 송시열은 선거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가진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선거가 죽고 1673(현종 14) 그는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에게 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 때 송시열은 강도 ( 江都 )의 일(병자호란 때 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胡兵이 입성하자 처자와 친구는 죽고 자기만 珍原君從者가 되어 성을 탈출한 사실)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짓는데 자기는 선거에 대해 잘 모르고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해 말할 뿐이라는 식으로 소홀히 하였다.

죽은 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고 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자구수정에 그쳤을 뿐 글 내용은 고쳐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지고 그는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송시열을 의리쌍행 왕패병용(義利雙行 王覇幷用) ’ 이라고 비난하였다. 또 그는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 아버지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초년에 불교에 입문한 사실을 인용,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생들이 궐기하여 선현을 모독했다고 그를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의 태반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교명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을 전후하여 사림과 간관 사이에는 비난과 변무의 상소가 계속되고, 양파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집의 김일기(金一夔) 등의 상소로 관작이 일시 삭탈되었다가 중전 복위를 즈음하여 숙종의 특명으로 이조 참판을 제수하고 군신간의 상면을 촉구하였다. 사간 정호 ( 鄭澔 ) 등이 다시 상소하여 그가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헐뜯었으나 숙종은 정호를 벌주며, “ 아버지와 스승 중 어느 쪽이 더 중한가. 그 아버지의 욕됨을 받는 그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 라고 꾸짖었다.

그는 83세에 학질을 앓아 이듬해 정월 죽었다. 그가 죽은 뒤 1년이 지나서, 유계가 저술한 가례원류 家禮源流 의 발문을 정호가 쓰면서 그를 비난하자 다시 노론 · 소론간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결국, 소론 일파가 거세되고 그와 그의 아버지의 관직이 추탈되었다.

1722(경종 2)에 소론파 유생 김수구(金壽龜) · 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해 복직되었다. 그 뒤 문성(文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지방 유림들의 합의로 홍주의 용계서원 ( 龍溪書院 ), 노성 ( 魯城 )의 노강서원 ( 魯岡書院 ), 영광의 용암서원 ( 龍巖書院 ) 등에 향사되었다.

 

윤인경(尹仁鏡)

1476(성종 7) 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경지(鏡之).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흥(繼興)이고, 아버지는 부사정 구( )이며, 어머니는 유종(柳琮)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했으며, 특히 문장에 능하였다. 1504(연산군 10) 생원 ·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1506년 별시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성균관학록에 선발되었고,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 뒤 봉교에 이어 다시 성균관전적에 올랐으며, 예조좌랑 · 병조좌랑 · 사간원정언을 거쳐 1511(중종 6) 장악원첨정에 이르렀다.

외직으로 나가 태안군수로 근무하는 동안, 아버지의 상을 당해 사직하고 양주의 여막에서 죽을 먹으며 3년 간 시묘하니, 효행이 널리 알려져 명망이 더욱 높았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 趙光祖 ) 등이 몰려난 직후인 1520년에 사간원사간으로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집의, 승정원의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역임하고 1529년 예조참의에 올랐다.

이어서 승정원의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을 때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국왕의 비호로 오히려 승진해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시 내직으로 옮겨 공조참판을 지내고, 1532년 예조참판으로서 동지사 ( 冬至使 )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 외교 활동을 펴고 돌아왔다.

그 해에 다시 외직인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당시 흉황이 심한 경상도 지방의 진휼(賑恤)을 주관하였다. 이듬해 병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라 예조 · 호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37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해에 김안로 ( 金安老 )가 사사되고 그 일당이 제거되었는데, 이조판서로서 기묘사화에 억울하게 죄를 입은 사람을 등용하였다.

다시 호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40년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5년 동안 우의정을 지내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어 명종이 즉위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소윤 ( 小尹 )에 가담해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1등에 책록되고 파성부원군(坡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사람의 의표(儀表 : 겉으로 드러난 자세나 표정)가 의연하고, 평생 나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하면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관용하였다. 좋은 일을 대하면 반드시 기뻐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힘쓰지 않았으니, 국사 처리에 있어 대체(大體)를 유지하였다. 시호는 효성(孝成)이다.

 

윤동도(尹東度)

1707(숙종 33)1768(영조 4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경중(敬仲), 호는 남애(南厓유당(柳塘). 장령 순거(舜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이고, 아버지는 판서 혜교(惠敎)이며, 어머니는 이익수(李益壽)의 딸이다.

1744(영조 20) 진사가 되고 이듬해 해주판관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745년 사서·부수찬·헌납·교리를 거쳐 1748년 부교리·수찬, 1750년 장령, 1751년 부응교·도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그 이듬해 병으로 인하여 체개(遞改)되고 1754년 대사성·대사간·부제학·승지를 거쳐 1758년 이후 대사헌·이조참판·부제학·청풍부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61년에 우의정에 올라 이듬해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윤구연(尹九淵)의 처벌에 반대, 용서를 청하였다가 파직되고 다시 3일만에 복직되었다. 1764년에 좌의정, 1766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그 뒤 한달 사이에 해직과 복직을 거듭하였고, 1768년 영중추부사로서 죽었다. 시호는 정문(靖文)이다.

 

윤정(尹鼎)

학자(學者)로 명망(名望) 높았다.

 

윤준희(尹俊熙)

1892(고종 29)1921. 독립운동가. 함경북도 회령 출신. 19193·1운동이 발발하자 조국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 만주로 건너가 이상설 ( 李相卨 )이 경영하는 서전서숙 ( 瑞甸書塾 )에 입학하였다.

그 뒤 용정(龍井)의 영신학교 (永新學校)에서 교원으로 봉직하다가 한상호 ( 韓相浩 임국정 ( 林國楨 ) 등과 항일단체인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북로군정서 ( 北路軍政署 )에 입단해 특파대장으로 한상호·임국정·최이붕(崔以鵬) 등과 더불어 간도 와룡동(臥龍洞) 김하석(金河錫)의 집에서 방책을 상의하였다.

그 때 김하석의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이 은행 용정출장소로 수시로 현금이 송금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탈취해 군자금으로 충당키로 하였다.

그리하여 정확한 송금 일시를 탐지하기 위해 조선은행 회령지점의 행원인 전홍섭 ( 全弘燮 )을 동지로 포섭하는 공작을 진행시키는 한편, 박웅세(朴雄世)와 김준 ( 金俊 )을 새로운 동지로 포섭하였다.

192014일 전홍섭에게서 현금 수송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동지들과 길에 매복했다가 무장경찰 3명의 호송을 받으며 두 필의 말잔등에 현금을 싣고 오자, 박웅세·김준과 같이 권총 10여 발을 연달아 쏘아 호송경찰 2명을 사살하고 현금 탈취에 성공하였다.

15만원의 거금을 탈취한 뒤 동료 최이붕과 같이 15일 의란구(依蘭溝)에서 김하석과 만났다. 9일에 임국정이 도착하자 10일에 현금을 가지고 해삼위(海蔘威 :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 新韓村 )으로 들어가서 체코슬로바키아제 무기를 다량 구입해 북로군정서에 제공해 청산리전투를 대첩으로 이끌게 하였다.

그러나 12월 일본경찰의 밀정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헌병에게 임국정·한상호 등과 같이 잡혀 19214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윤기섭(尹琦燮)

1881(고종 18)1959. 독립운동가·정치가. 별명은 중규(仲珪). 경기도 장단 출신.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동안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1년에는 간도에서 이시영 ( 李始榮 이동녕 ( 李東寧 김동삼 ( 金東三 이광 ( 李光 ) 등과 군관양성을 위한 경학사 ( 耕學社 )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여 이후 신흥학교의 교사로 10여 년간을 재직하였다.

1920년에는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213월 임시정부의 개조 및 재조직을 주장하는 국민대표회에 반대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236월에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24년에는 보병조전 步兵操典이라는 군사교육서를 발간하였다.

1926년 김구 내각에 이규홍(李圭洪김철 ( 金澈 ) 등과 입각하여 선전을 책임지고 활동하였으며, 1927년에는 개헌안 기초위원, 1930년 군사위원회 위원장, 1933년 군무차장을 역임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중책을 맡아 활약하였다. 한편, 1929년에는 난징(南京)에서 민병길(閔丙吉성주식(成周寔신익희 ( 申翼熙 ) 등과 한국혁명당을 조직하였다.

1933년 홍진 ( 洪震 ) 등이 제휴하여 신한독립당 ( 新韓獨立黨 )을 결성하자 김상덕(金尙德) 등과 상무위원을 맡았으며, 1934년에는 김두봉(金枓奉김규식 ( 金奎植 ) 등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 민족연합세력 구축에 노력하였고,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맡는 등 대일투쟁에 전력하였다.

광복 직전인 1944년에는 김원봉 ( 金元鳳 )이 주임을 맡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학편찬위원 부주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광복 후 19462월 귀국하여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당기관지인 앞길의 사장을 역임하였다.

1946215일 좌익세력의 연합체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의장단의 부의장 및 상임위원을 역임하고 194612월에 결성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로 관선의원에 선출되어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국학대학 학장을 역임하였으나, 19506·25전쟁 때 납북되어 19567월 안재홍(安在鴻엄항섭 ( 嚴恒燮 오하영(吳夏榮) 등 납북인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59년 반혁명분자혐의로 구속되어 숙청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윤해(尹海)

1883(고종 20)? 독립운동가. 함경북도 출신. 1910년 일제가 주권을 강탈하자 연해주 (沿海州)로 망명, 니콜스크를 근거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전로한족중앙회(全露韓族中央會)를 결성하고 부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회의 기관지인 청구신문 靑邱新聞의 주필로서 민족의식함양에 노력하였다.

19193·1운동 직후 국내에서 결성된 한성정부 ( 漢城政府 )의 평정관(評定官)으로 선임되었고, 노령(露領)에서 조직된 국민의회(國民議會)의 대표로 고창일 ( 高昌一 )과 같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파리로 향하였다.

2월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하였으나 소련의 국내사정이 혼란하여 이를 피해 시베리아와 소련의 북부, 노르웨이·영국을 거쳐감으로써 강화회의가 끝난 9월에야 프랑스에 도착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1922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에 참가하여 안창호 ( 安昌浩 )와 함께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윤현진(尹顯振)

1892(고종 29)1921. 독립운동가. 본관은 파평 ( 坡平 ). 자는 명구(明九), 호는 우산(右山). 경상남도 양산 출신.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한 뒤 북경(北京난징(南京) 등지를 왕래하며 국제 정세를 관찰하였다.

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 법률 공부를 계속하면서 신익희 ( 申翼熙 김성수(金性洙장덕수(張德秀송진우 ( 宋鎭禹 ) 등과 조국광복동맹결사단(祖國光復同盟決死團)을 조직,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안희제 ( 安熙濟 )와 비밀 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서 활동하는 한편, 고향 양산에 의춘학원(宜春學院)을 설립하여 후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3·1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유하면서, 그 곳에서 이시영 ( 李始榮 이동녕 ( 李東寧 김구 ( 金九 이회영(李會榮노백린 ( 盧伯麟 여운형 ( 呂運亨 신익희 등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정 문제 해결에 힘썼으며, 미국 선교사를 통해 고향에 있던 사유재산 30만 원을 임시정부에 헌납, 재정 압박을 다소 완화시켰다. 그 뒤 임시정부 재무위원장과 내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상해 정안사(靜安寺) 외인묘지(지금의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윤봉길(尹奉吉)

1908 1932. 독립운동가 · 의사(義士). 본관은 파평 ( 坡平 ). 본명은 우의(禹儀). 호는 매헌(梅軒). 충청남도 예산 출신. 아버지는 황()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원상(元祥)이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와 한학을 공부했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치고 농민계몽 · 농촌부흥운동 ·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 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 해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농민독본 農民讀本 을 저술하고, 야학회를 조직해 향리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해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했으며, 그 해 1월 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해 218일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촌극 토끼와 여우 를 공연해 성황리에 마치게 되자 일제 당국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구애받지 않고 지방 농민들을 규합해 자활적 농촌진흥을 위해 월진회(月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 바탕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1930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 ” 라는 신념이 가득찬 편지를 남기고 채 36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 그 곳에서 김태식(金泰植) · 한일진(韓一眞) 등의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해 12월에 단신으로 다롄(大連)을 거쳐 중국 칭다오(靑島)로 건너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다. 이 곳에서 세탁소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모은 돈을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8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보다 큰 일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상해로로 갔다.

상해 프랑스조계 샤비루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蒲石路) 19호 안공근 ( 安恭根 )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우선 생계를 위해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해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 해 겨울에 임시정부의 김구 ( 金九 )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 李奉昌 )18일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 일대는 복잡한 상황에 빠졌다. 더욱이 일제는 1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 때 일본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윤봉길은 이 해 봄 야채상으로 가장해서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였다. 4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해 김구의 주관 하에 이동녕 ( 李東寧 ) · 이시영 ( 李始榮 ) · 조소앙 ( 趙素昻 ) 등의 협의와 동의 아래 4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식장에 참석해 왕웅(王雄, 본명은 金弘一)이 만들어 폭발시험까지 했던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이 때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상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 등은 즉사하고, 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이 중상을 입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해 1118일 일본에 호송되어 20일 오사카(大阪)위수형무소에 수감, 가나자와(金澤)에서 1219일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尹拯(윤증)  선생의 일화.

 

사직상소 가장 많이 올린 관원

어느 날 마을에 사슴이 나타나 아이들이 구경하느라 마구 떠들었다.
하지만 윤증은 혼자 방안에서 글을 읽으면서 나오지 않았다. 미리 정한 횟수를 다 읽고 나서 할머니에게 사슴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할머니께서 딸하기를
「사슴이 네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리겠느냐.」고 하였다는 것이다.

윤증은 그 후 관계에 진출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왕으로부터의 신임도 두터웠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이 사직 상소를 올린 선비로서도 유명하다.

 

 

 

尹瓘(윤관)

사돈의 유래

 

고려 예종여진을 함께 정벌한 도원수 尹瓘(윤관)부원수 吳延寵(오연총)은 아들과 딸의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어느 봄날 술이 잘 빚어진 것을 본 윤관은 하인에게 술동이를 지게하고 오연총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일 밤에 내린 소낙비로 물이 불어나 개울을 건널 수가 없었다.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고 있는데 개울 건너편을 바라보니 오연총도 술통을 옆에 두고 발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등걸나무 조각을 구해 걸터앉았다.

먼저 윤관이 술잔을 비운 뒤 개울 건너 오연총에게 잔 권하는 시늉을 했다. 오연총도 머리를 숙여 술잔을 받는 예를 표시한 뒤 스스로 채운 술잔을 비웠다.

이렇게 둘은 등걸나무()에 걸터앉아 서로 머리를 숙이며 술잔을 주고받는 흉내를 내며 거나하게 마셨다.

이때부터 자식 사이의 혼인을 제안할 때는 '사돈 하자'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한다. 사돈의 뜻은 등걸나무()에 머리를 숙인다는 뜻의 돈수(頓首)의 합성으로 등걸나무에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출전: 위키백과_

 

 

尹瓘(윤관)

 

윤관 장군 묘를 둘러싼 산송.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에 위치한 윤관 장군 묘역(사적 제323)조선시대부터 400여 년 동안 계속된 山訟(산송)으로도 유명하다.

1614 영의정을 지낸 沈之源(심지원)이 윤관 장군 묘를 파헤치고 부친 등 일가의 묘를 잇따라 조성하자, 이에 반발한 파평 윤씨가 1763에 심지원의 묘 일부를 파헤치고 청송 심씨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다툼이 발생한 고양 지역의 군수는 명문가의 다툼에 개입하기를 꺼려 이 문제를 조정에 넘겼다.

결국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尹瓘(윤관)의 묘와 沈之源(심지원)의 묘를 그대로 두고 양 가문이 합의하도록 종용했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가 조선시대에 왕비를 각각 4, 3명씩 배출한 외척 가문이었기 때문에 영조도 섣불리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평 윤씨 가문에서 이에 불복하여 심지원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오히려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 병사(病死)하는 등, 두 가문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노력이 있어 왔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2006 음력 410, 파평 윤씨 대종회와 청송 심씨 대종회는 파평 윤씨 측이 이장에 필요한 부지를 제공하고 청송 심씨 측이 윤관 장군 묘역에 조성된 청송 심씨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기로 합의하면서 조선시대부터 392년 동안 이어진 묘지 다툼을 끝내기로 하였다.

                                                        -출전: 위키백과_

 

尹鳳九(윤봉구)

 

병계는 조선조 학자, 자는 서응(瑞鷹), 호는 병계(屛溪구암(久菴), 본관은 파평(坡平), 참판 비경(飛卿)의 손자로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다. 숙종 40(1714) 진사시(進士試)에 입격, 유일(遺逸)에 천거되어 영조 1(1725) 청도군수(淸道郡守)를 거쳐 1738년 집의(執義)에 이르고, 영조 17(1741) 주자(朱子)를 송시열(宋時烈)의 영당(影堂)에 추봉(追奉)케 한 주창자로서 삭직(削職)되었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자의(諮議찬선(贊善) 등을 역임, 판서에 이르렀다. 한원진(韓元震)과 함께 호론(湖論)을 주장했으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사람이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붓바위(筆岩)의 전설

 

금성군 황룡면 맥동 입국에 있는 바위로 붓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河西(하서)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조, 영조 때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1 ~ 1767)의 글씨로 필암두자가 조각되어 있다.

 

이 붓 바위에 얽힌 전설이 있다. 아득하고 먼 옛날 김도령과 이도령이 글공부에 여념이 없는데 이곳에 사는 백여우는 신령님께 사람이 되어 사람을 돕고 살고 싶다고 애원을 하여 신령이 밤에만 사람이 되어 일하도록 하여 주었다.

 

김도령은 가난하고 마음이 착한데 이도령은 마음이 좋지 못하여 심술꾸러기이었다. 둘이다 과거를 보기 위하여 산속 암자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밤이 되면 백여우는 김도령을 찾아가 시종을 들어주고 새벽에 돌아가곤 하였다.

그러기를 3년이 지나 과거를 보러 가게 되었는데 백여우가

이걸 가지고 가시오. 이 붓은 여우 꼬리로 만든 붓이옵니다. 김도령님 부디 이 붓으로 장원급제하고 금의환향 하옵소서.하며 붓을 주었다.

 

김도령은 이 붓을 고이 간직하고 상경하였다.

 

이 내용을 안 이도령이 이를 시기하여 과거보는 전날 밤 김도령의 붓을 잘라 버렸다. 김도령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과거장에서 붓을 찾으니 붓이 망가져 쓰지 못하게 되어 내 붓! 내 붓! 하며 정신이 돌아버리고 말았다.

 

한편 백여우는 김도령이 돌아오기를 이 바위에 올라가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아 화김에 바위를 핥기 시작하였는데 이로서 지쳐서 백여우는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바위를 붓 바위(筆岩)라 하였다고 한다.

 

 

 

 

 

 

尹殷保(윤은보)의 효행 전설

 

세상에 효자가 많기는 하지만 스승을 위하여 친아들의 예()로써 정성을 다한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효자 윤은보(尹殷保)는 본관이 坡平(파평) 호는 철효(節孝)로 지례현 사람이다.

 

서질(徐隲)은 자를 덕이(德以), 호를 남계(南溪)라 하고 이천인(利川人) 아간(阿千) 신일(神逸)9세 손이다.

 

두 사람은 늘

우리를 낳아주신 분은 부모님이지만 사람답게 길러 주시는 분은 스승님 이사다. 아들이 없는 우리 스승님을 모시지 않으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하고, 두 사람은 다투어 스승을 모셨다.

맛있는 음식이 생기거나 좋은 일이 생기면 스승과 함께 나누며 지냈다. 이 두 분의 스승은 장지도(張志道)였는데 후일 스승이 돌아가시자 두 제자는 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친아들의 예로써 여묘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윤은보는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기별 이 와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온 공은 병든 아버지를 간호함에 잠시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온갖 정성을 다한 끝에 다행히 아버지 병환이 낫자 다시 스승의 묘소로 돌아가 여묘에 들어갔다.

 

몇 개월 후, 윤은보의 꿈에 아버지가 편찮아 누워 계셨다. 곧 집으로 달려가 보니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했다.

 

하늘이시여, 제발 저의 아버님의 병환을 낫게 해 주시고 대신 제 목숨을 가져가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기도했지만 결구 아버지는 운명하셨다.

윤은보는 아버지의 산소 옆에 막을 짓고 못다한 효도를 애통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돌풍이 불어 제삿상에 놓였던 향합이 날아가 버렸다. 윤 효자는

나의 정성 이 부족하여 향합이 날아갔구나. 이 불효를 어찌 할고

 

하며 지성을 다해 서묘를 계속했다.

캄캄한 밤이면 산에서 온갖 짐승들의 울음소리기 그치지 않았고 조그마한 운박 속에서 비바람을 이겨내기는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부모님을 향한 뜨거운 효심으로 살을 에는 겨울에도 사묘에 정성을 다했다.

 

수개월이 지난 후였다.

까마귀 한 마리가 묘 주변을 돌 다가 향합을 물어다가 묘 앞에 던져 주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효자의 지성에 까마귀 가 감동했구만. ”

 

하고, 감탄함고 윤 효자의 효심을 칭송했다.

서묘를 끝낸 그는 자신의 앞길을 밝혀 참삶의 길을 열어 준 스승을 잊지 못해 초하루 보름에는 꼭 스승의 묘를 찾아 예를 드렸다.

 

서질은 아들이 없는 스승을 위해 3 년 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시묘를 하였다. 그렌데, 大喪(대상) 날이 되자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승의 제삿상에 고기를 올리고자 눈길을 나섰으나 눈이 키를 넘게 쌓여 더 나갈 수가 없었다.

서질은 눈길에 막혀 스승의 제사상에 고기 한 점 드리지 뭇 함을 슬퍼하여 밤새도록 동곡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어 밖에서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눈길에 누구일까?’ 이상가게 생각하고 문을 열자, 커다란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 사라지고 있었다. 날이 새어 밖으로 나가 보니 묘 앞에 큰 노루 한 마리가 있었다.

새벽에 호랑이가 물어다 준 것이었다. 하늘에 닿은 효자의 지성에 감동되어 호랑이가 노루를 던져 줬으며 뒷사람 들이 그 곳을 정성현(精誠峴)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에도 스승의 묘를 극진히 보살피다 부모님이 벙환으로 앓아 눕자, 약을 구하기 위해 온갖 청성을 다했다. 마을 사람들은 연세가 많아서 힘들 것이니 농사나 지으며 임종을 기다려야지 살임만 버릴 뿐이라고 말렸으나, 그의 열성은 요지부동이었다.

 

병이 있으면 약이 있겠지살을 에이는 추운 겨울에도 약초를 찾아 눈쌓인 산을 수 심리씩 들어가 길을 잃고 해멘적 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시자, 눈 덮인 산을 닷새나 헤매다가 꿩을 잡아 드렸다. 갖은 정성에도 불구하고 노환이 깊어 돌아기시자, 그 에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모념 산소를 6년 동안이나 떠나지 않고 시묘하니, 세상 사람들이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칭송했다.

 

한번은 서질이 시묘 도중 병이 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집안사람이

“3년 시묘도 힘든 터에 어찌 6 년이나 시묘를 하느냐?”

 

라고 말하며,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만류하였다. 그르나, 그는

이 몸을 부모님이 물려주시었는데 무엇이 아까워 내 몸 생각만 하는 불 효를 저지를까.”

 

하며 죽는 날까지 집으로 돌이가지 않겠노라고 거절했다.

하루는 꿈에 부모님이 말씀 하시기를

 

네 장성은 가륵하나 6년 시묘 동안 네 몸이 허약할 대로 허약해 졌으니 내 마음이 아프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내려가서 살림을 돌보도록 하여라.” 고 하시며, 흘연히 사라졌다.

 

다음 날 서질이 얼어냐니 아프던 몸이 가쁜하게 나아 마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늘이 효자를 돌보았다고 칭찬했다.

 

천하의 모든 물건 중에서 내 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는데 이 소중한 몸 을 주신 부모남의 은해를 어찌 잠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어버이를 공경함은 으뜸가는 천륜 도리이니 세대가 다르다고 어찌 변할 수 있겠는가 !

 

서질과 윤은보의 가륙한 효성이 나라에까지 알려져 세종대왕이 두 사람에게 旌閭(정려)를 내려 지금도 그 정려각이 지례면 교리에 남아 있다.

 

<참고 문헌 내 고장 우리 향토, 효열행지

 

 

 

 

윤은보 서질 정려각.

 

 

 

 

尹莘達(윤신달) 장군의 일화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이 어느 날 어부에게 잡혀 온 큰 잉어를 이상히 여겨 돈을 주고 사서 집 앞마당에 연못을 파서 잉어를 놓아주자 천둥번개 소리와 함께 잉어가 용으로 변하여 하늘로 승천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몇 백 년이 지난 후 윤씨 후손이 왕을 모시고 피난을 가기 되었는데, 강물이 가로 막혀 더 이상 가지 못하자 잉어들이 나타나 다리를 놓아주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또 윤씨 조상은 양쪽 겨드랑이에 여든 한 개의 잉어 비늘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발에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별과 손에는 윤자 무늬가 있었다고 한다.

 

 

尹瓘(윤관) 장군의 전설.

 

尹瓘(윤관) 장군이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강가에 이르렀을 때 강에는 물이 많고 배도 없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아아! 하늘이시여! 하늘은 이 尹瓘(윤관)을 버리나이까?] 하니 갑자기 물속에 있던 잉어 떼의 나무 가지를 물고 와서 순식간에 다리를 놓아서 그 다리로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파평윤씨는 이러한 잉어가 고마워, 잉어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다대첨사 윤흥신

 

윤흥신은 파평인으로서 인종 때의 권세가인 윤임의 아들이라고 하며, 진천현감을 거쳐 1592년 임진난 때 다대포첨사로 부임하여 역전 끝에 순사하였다고 한다. 임진난 당시의 기록인 징비록다대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 죽었다고 하였고 재조번방지(再 造蕃邦志)"왜적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와 다대포를 함락시키니 다대 첨사 윤흥신이 힘써 싸우다가 피살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임진란이 끝난 선조 37(1604) 625일에 공표된 선무공신록권에도 원종 1등공신에 올라 있다.

 

그런데 윤흥신의 사적과 다대포의 사적이 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영조 때 동래부사 조엄의 윤공유사(尹公遺事), 동래부사 강필리의 윤공사절기 (尹公死節記)에 비롯된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다대포진에서는 선조 25(1592) 414일 적의 내습이 있었으나 첨사 윤흥신공을 비롯한 군, , 민은 성을 굳게 지켰으며, 15일 적군이 동래성을 공격할 때 한편으로는 적군의 공격을 다시 받고 첨사와 군, , 민은 끝까지 항전하여 첨사이하 많은 희생을 내고 성은 함락되었다. 윤흥신은 때마침 진에 와 있던 동생 흥제와 함께 순사하였다고 한다. 윤흥신공은 동래 충렬사에 영조 48(1772)에 배향되어 그의 충혼을 길이 추모하고 있다.

 

 

 

윤 재훈(尹載勳)선생의 효행

 

 

산삼과 미꾸라지

--눈밭 속에서 산삼 캔 효자---

 

사성당 윤 재훈(尹載勳)은 철종 4, 경북 달성군 논공면 하동에서, 고려 개국 공신 윤 신달 공의 30세 손, 향채(享采) 공과 광양 이씨 사이의 2 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병헌(炳憲) 자는 문로(文老) 호는 사성당으로 벼슬은 참봉을 하였으며, 성품이 온후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으니 5,6 세의 어린 나이 때에도, 밖에 나가 놀다가 홍시나 밤 등 과일을 주우면 반드시 품고 와서 부모님께 드리고 다 잡수신 후에야 물러났다. 집이 강가에 있어서 항상 아우 성훈과 함께 물고기를 잡아 부모님을 봉양하였으니 이는 부모님의 입맛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공은 점점 자랄수록, 살생과 싸움을 싫어하고 어른들의 말씀에 밝은 표정으로 순종하여, 부모님께 대한 깊은 애정과 공경심을 지님은 물론이거니와 주위 사람들을 항상 편안하고 기쁘게 해 드려서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장성하여 부인 합천 이씨를 맞아 슬하에 1 3 녀를 둔 가장이 되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가문의 첫째 자랑을 로 정하여 온 가족이 함께 효 행 가족이 되었다.

 

1886년에 공의 어머님께서 돌아가시자 그 슬픔이 극에 달했으나 너무 애통해 하면 아버님께서 염려하실까 보아 눈물을 숨기고, 아버님의 심기가 편안하도록 온갖 배려를 하였으며, 몇 년년 지나 아버님마저 가슴에 종기가 생기니, 주야로 간병에 최선을 다하였다.

 

당시의 병명으로는 흉창이라 해서 잘 치료되지 않는 고질병이었으니, 의학이 발달된 지금과는 달라 그 때의 치료 방법은 산약(山藥)-한약의 일종-뿐이었으므로 좋다고 하는 온갖 약은 다 구해 드렸으나 효과는 보이지 않고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비명 지르는 아버지의 신음소리에 공은 아버지 보다- 더 괴로와했다.

 

공음 아버지의 환부 고름을 자기의 입으로 빨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빨아낸 고름이 간장 종지에 가득 찼다. 그러자 공의 아버지께서

얘야, 이제 좀 시원하구나.”

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공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몹시 기뻐했다. 그러 나, 아버님의 흉창은 쉬 치유되지 않는 난치병이었다. 오랜 병고로 인한 탓인지 공의 아버님께서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걸핏하면 아들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추운 겨울철인데도

잉어를 구해 오너라.” , 벼락같은 소리로 호령을 하기도 하였지만 공은 얼굴빛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아버지께 대한 정성이 한결같았다.

 

‘3 년 우환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으나 3 년은커녕 부모님의 질병이 석 달만 계속되어도 그만 무심해지는 오늘의 인심에 깊은 가르침을 주는 산 교훈이 아닐 수가 없다.

 

공의 아버지께서는 수시로 당신의 환브를 아들의 입으로 빨아 주기를 원했고 그 때마다 공은 기꺼이 그렇게 하여 드렸다. 공의 혓바닥과 입술은 상 할 대로 상했다.

이같은 공의 지극한 간호로 흉창은 씻은 듯이 나았으나, 오랜 병석에서 몹시 쇠약해지신 아버님은 합병증이랄까 갑자기 다른 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였다.

만고의 효자인 공의 슬픔과 고동이 어떠했을까? 수 년간 계속된 아버님의 신고(辛苦)에 집안 살림은 바닥이 났으니 더 이상 약을 구할 수도 없었다.

조석으로 목욕 재계하고 천지 신명과 조성님께 지성으로기를 계속하던 중 기운이 진하여 쓰러진 상태에서 비몽사몽간에 신선이 나타났다.

 

회생의 방편을 알려주겠다. 산삼과 미꾸라지로 약을 만들어 정성껏 다려 복용하면 나으리라.”

라는 말을 듣고 잠이 깬 공은, 즉시 산삼과 미꾸라지를 구하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때는 엄동설한이라 산에는 눈이 가득하고 연못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래도 공은 단념하지 않고 낮에는 산과 강을 샅샅이 뒤져 산삼을 찾아 헤매고 밤에는 신께 기도하였다.

 

하루는 연못가에 다다라 두꺼운 얼음을 깨고 미꾸라지를 찾았으나 해가 지 고 사방이 어두워 져도 구하지 못하여 공이 자신의 불효를 한탄하며 통곡하자 커다란 미꾸라지 한 마리가 저절로 얼음 위로 솟아올랐으며, 산에 들어가또한 부르짖자 쌓인 눈 위에 산삼 줄기가 우뚝 솟아올랐다.

공이 엎드려 조심스레 캐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미꾸라지와 함께 성심껏 드리니 마침내 아버님의 병환이 완쾌되었다.

사성당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온고을 사람들이 함께 축하하며, 공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복한 것이라 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사성당 윤 재훈의 효행 사실은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삽시간에 메아리처 럼 번져 갔다· 공의 효행에 감탄한 뜻있는 사람들이 마음을 한데 모아 관찰사 앞으로 사성당의 효행에 포상을 내릴 것을 청원하니 고종 임금님이 1898 (고종 35)소릉참봉의 벼슬을 제수하사고 그 후 19223월에 국가 기관인 오륜 행실 중간소에서 효자 포상을 내리었다. 다시 1936년 에 그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는 지방 사림(地方士林)들이 모여 비를 세우고 집을 지어 그 이름을 백원각(百源閣)이라 하고 출입문을 유측문’(惟則門)이라 명하였다.

 

사성당 계회(稽會) 발기 총회를 열고 매년 음력 316일은 사성 당 계회 총회일로서 해마다 충효자상을 추종하는 많은 사림(士林)들이 모여 향사하고 그의 명복을 빌고 있다.

 

 

참고 문헌: 내 고장 진통 가꾸기>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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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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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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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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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파:학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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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언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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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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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파평 윤씨(坡平尹氏) 남한에 총 154,496가구, 646,6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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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해평 윤1.jpg 해평윤씨(尹) 청남 14-08-29 5597
449 해남 윤.jpg 해남윤씨(尹) 청남 14-08-29 3771
448 함안 윤.jpg 함안윤씨(尹) 청남 14-08-29 3561
파평윤씨(尹) 청남 14-08-29 8081
446 칠원 윤.jpg 칠원윤씨(尹) 청남 14-08-29 3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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