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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해남윤씨(尹)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해남윤씨)

 

 

본관(本貫): 해남(海南)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

유래(由來):

 

해남 윤씨(海南尹氏)의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는 고려 중기 때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출생과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다.

그후 7세손까지의 소목(昭穆)도 자세하지 아니하여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사온직장(四 直長)을 지내다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아들 단봉(丹鳳단학(丹鶴) 형제를 데리고 해남(海南)으로 은둔(隱遁)하여 그 곳에 정착세거(定着世居)8세손 광전(光典)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해남(海南)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윤구(尹衢)

1495(연산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형중(亨仲), 호는 귤정(橘亭). 할아버지는 경()이며, 아버지는 생원 효정 ( 孝貞 )이다.

1513(중종 8)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하였으며, 다음해 주서에 이어 홍문관의 수찬· 지제교 ( 知製敎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삭직되었다.

주서로 있을 때 왕에게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드러나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538년에 복직되었으며, 남해향사(南海鄕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귤정유고가 있다.

 

윤의중(尹毅中)

1524(중종 19)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치원(致遠), 호는 낙촌(駱村) 또는 태천( 軋 川).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정 ( 孝貞 )이고, 아버지는 정랑 구()이며, 어머니는 임휴(任畦)의 딸이다. 선도(善道)의 할아버지이다.

1543(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48(명종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정원주서 · 저작 등을 거쳐 1553년 부수찬이 되고, 이듬해 검토관을 역임하였다. 1555년 부교리로서 제주선로사(濟州宣勞使)가 되어 다녀왔으며, 이 해 사가독서 ( 賜暇讀書 )한 뒤 이조정랑에 올랐다.

1557년 의정부검상 · 사인을 거쳐, 집의 · 응교 · 직제학 · 형조참의 · 예조참의 ·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62년 성균관대사성 · 홍문관부제학 · 도승지에 이어 대사간 · 이조참의 ·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66년 호조참판에 올라 이듬해 안주영위사(安州迎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으며, 그 해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이조참판이 되어 동지춘추관사 ( 同知春秋館事 )를 겸직하였고, 아울러 명종실록 의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1572(선조 5) 평안도관찰사, 이듬해 병조참판 · 대사헌을 거쳐, 1574년 대사간 · 예조참판 · 대사헌 ·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81년 형조판서에 올랐는데, 재산을 많이 모아 호남에서 제일 가는 갑부라는 탄핵을 받았다.

1589년 정여립 ( 鄭汝立 )의 옥사가 일어나자 동인의 지도자로서 정여립과 친하고, 또 이발 ( 李潑 )의 외숙이라고 하여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가 축재를 비난하는 탄핵상소를 올리자, 이에 연좌되어 벼슬에서 삭출되었다가 1610(광해군 2) 복관되었다.

 

윤선도(尹善道)

부정(副正) 유심(惟深)의 아들로 관찰사 유기(惟機)에게 입양했던 고산(孤山) 선도(善道)는 혼초의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와 은거지에서 생활하며 시가(詩歌)의 미답지를 개척하고 유리말의 새로운 뜻을 창조하여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그의 시조(時調)는 정 철(鄭 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었고 우리나라 국문학사(國文學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1616(광해군 8) 유생(儒生)으로서 북인(北人)의 군신 이이첨(李爾瞻)과 영의정(領議政) 박승종(朴承宗)의 전횡을 고방하는 항소(抗訴)를 올려 지루한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특히 그는 시()를 읊기는 좋아했으나 쓰기는 싫어했다고 하며 일생을 경륜(經綸)과 절의(節義)로 살았으며, 울분은 문학으로 발산했다. 문학과 함께 인품으로도 명망을 받았던 고산은 그를 못살게 하였던 정적(政敵) 원두표(元斗杓)가 앓아누웠을 때 갖가지 비약(秘藥)을 써서 낫게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효종(孝宗)의 스승이기에 임금은 항상 고산을 가까이 두고 싶었으나, 당시 성세(盛勢)하였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등 집권자들에 의하여 가혹한 정치적인 보복을 받았다. 고산은 74세 때 최악의 유배지라는 삼수(三水 : 함경남도 벽지)에 귀양 갔다가 81세에 풀려나서 해남의 연동(連洞)에서 생을 마쳤다.

효종(孝宗)이 세자(世子)였을 때 수원(水原)에 살면서 고산을 항상 곁에 두고 싶어 집을 지어 주었는데, 효종이 작고한 뒤에 그 집을 뜯어 배로 고향인 해남 연동에 옮겨 지금도 남아 있다.

 

윤신(尹紳)

? 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사진(士縉), 호는 지석(支石). 아버지는 천문습독관(天文習讀官) 경우(景佑)이며, 어머니는 나주나씨(羅州羅氏)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아버지에게서 학업을 닦았고, 벼슬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의주로 파천하였다는 소식이 전하여지자, 그는 격문을 띄워서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가산(家産)과 자질(子姪)들의 사재를 털어서 병기를 만들고 군량을 마련하여 가동(家 妗 ) 수십명과 의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강진 동령리(東嶺里) 뒷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왜병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중형(仲兄) (), 아들 동철(東喆), 조카 치경(致敬)과 함께 재침하는 적을 무찔렀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그 뒤 그 격전지를 병치(兵峙) ’ 라 하며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 있다. 강진의 화암사(花巖祠)에 봉안하였다. 저서로는 지석일고 가 있다.

 

윤치경(尹致敬)

? 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일지(一之), 호는 경림(敬林). 아버지는 참봉 강()이고, 어머니는 광산이씨(光山李氏)로 판결사 변 ()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향천(鄕薦)이 있었으나 오직 제가(齊家)에만 힘썼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 (白衣)로서 창의(倡義)하여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인 계부(季父) (), 종제 동철(東喆)과 더불어 가동(家 妗 ) 수십명과 의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태안일대의 왜적을 크게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중부(仲父) (), 계부 신, 종제 동철과 다시 의병을 일으켜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대교야(大橋野)에서 어란진(於蘭鎭)에서부터 추격하여온 왜적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네 사람이 다같이 전사하였다. 강진군 화암사(花巖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경림유고 가 있다.

 

윤동철(尹東喆)

? 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길로(吉老), 호는 호산(壺山). 아버지는 군자감주부 신()이고, 어머니는 해주오씨(海州吳氏)로 문경(聞慶)의 딸이다. 중부(仲父)인 도사 약()에게 입양되었으며, 양모는 영광김씨(靈光金氏)로 진사 구명(龜命)의 딸이다.

가업을 이어받아 문장 · 절행(節行)이 일찍이 사림에 알려졌으며, 또한 활쏘기를 좋아하였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 ( 白衣 )로서 창의(倡義)하여 아버지 신과 종형 치경(致敬)과 함께 가동(家 妗 ) 수십명과 의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무수한 왜적을 무찔러 해안일대를 안정시켰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아버지 신과 중부 윤(), 종형 치경과 더불어 다시 의병을 일으켜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대교야(星山里大橋野)에서 적을 맞아 종일토록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강진 화암사(花巖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호산유집 이 있다.

 

윤두서(尹斗緖)

1668(현종 9) 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자 윤선도 ( 尹善道 )의 증손이다. 장남인 덕희(德熙)와 손자인 용( )도 화업(畵業)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정을 이루었다. 정선 ( 鄭敾 ) · 심사정 ( 沈師正 )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일컬어졌다.

1693(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남인 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1712년 이후 만년에는 해남 연동(蓮洞)으로 귀향하여 은거하였다. 죽은 뒤 1774(영조 50) 가선대부 ( 嘉善大夫 )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선 중기와 후기의 변환기에 활동한 그는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 산수화를 비롯해서 회화 작품은 대체로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지녔다. 그의 말 그림과 인물화는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보여 준다. 해남에 종손이 소장하고 있는 자화상 自畵像 이 대표작으로 지목된다.

해남의 종가에는 자화상 외에도 그의 유묵과 서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유작들은 보물 제4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가 소장 유작들 가운데에는 목기 깎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 旋車圖 와 나물 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 採艾圖 등 풍속화가 포함되어 주목된다.

이는 김홍도 ( 金弘道 ) 등에 의하여 유행하는 18세기 중 · 후반의 풍속화를 예시하여 준 것이다. 아들 덕희가 쓴 행장에도 나타나듯이 그의 실학적 태도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실학적 학문에 대한 취향은 그가 남긴 동국여지도 東國輿地圖 나 일본 지도(日本地圖),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서적 그리고 이잠 ( 李潛 ) · 이서(李 森 ) 등 이익 ( 李瀷 ) 형제들과의 교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유품에는 중국 남종 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수용에 중요한 지침서인 고씨역대명화보 顧氏歷代名畵譜 도 끼어 있어서 그가 남종화풍(南宗畵風 :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비직업적으로 수묵과 담채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현에 치중한 그림의 경향)과 접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종가 소장의 화첩에는 남종화풍의 산수화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중국적이거나 전통성이 강하지만 18세기 중 · 후반 이후의 화단을 풍미한 남종화풍과 풍속화의 선구적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와 손자인 용에게 계승되었다. 조선 말기의 허련 ( 許鍊 )도 해남의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에 와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전통 화풍을 익혔다. 그리고 그의 사실주의적 태도와 회화관은 정약용의 회화론 형성에 바탕이 된다. 학자로서의 뚜렷한 업적은 남기지 않았지만, 풍부한 지식과 실학적 태도는 이익 형제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품으로는 자화상 · 채애도 · 선차도 · 백마도 白馬圖 등이 해남윤씨가전고화첩 에 전하고 있다. 이 화첩은 산수(山水) · 산수 인물(山水人物) · 영모(翎毛) · 화조(花鳥) · 초충(草蟲) · 도석 인물(道釋人物) · 화훼도(花卉圖) 60여 점의 소품으로 꾸며져 있다. 노승도 老僧圖 · 심득경초상 沈得經肖像 · 출렵도 出獵圖 · 우마도권 牛馬圖卷 · 심산지록도 深山芝鹿圖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는 기졸 記拙 화단 畵斷 이 있다.

 

윤덕희(尹德熙)

1685(숙종 11) 1776(영조 52).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경백(敬伯), 호는 낙서(駱西) · 연옹(蓮翁) · 연포(蓮圃) · 현옹(玄翁). 선도(善道)의 현손으로, 두서(斗緖)의 맏아들이며, ( )의 아버지이다.

1748년 화명(畵名)으로 삼성진전(三聖眞殿) 모사중수도감(摸寫重修都監)에 조영석(趙榮 例 ) · 심사정 ( 沈師正 )과 함께 감독격인 감동(監董)으로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6품으로 승진하여 정릉현감을 지냈다. 가선대부 ( 嘉善大夫 ) 동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두서의 영향으로 화업을 계승하였으며 아버지의 화풍을 전수하여 전통적이고 중국적인 소재의 도석인물(道釋人物) · 산수인물 · 말그림을 잘 그렸으나, 두서의 탁월한 필력과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산수화를 비롯한 그의 작품은 두서의 화풍보다는 당시 화단에 만연하였던 남종화풍(南宗畵風)을 비교적 깊게 수용한 면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따른 연유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느낌을 준다.

현재 해남의 연동 녹우당(綠雨堂)에 종손이 소장한 윤두서 작품 해남윤씨 가전고화첩 (보물 제481)은 그가 정리해서 꾸며놓은 것이며, 윤두서의 행장 역시 그에 의하여 쓰여졌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 월야송하관폭도 月夜松下觀瀑圖 (개인 소장), 산수도첩 山水圖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마상부인도 馬上婦人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마도 馬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송하인물도 松下人物圖 (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윤정기(尹廷琦)

1814(순조 14) 1879(고종 16).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경림(景林). 호는 방산(舫山). 아버지는 참봉 영희(榮喜)이며, 어머니는 나주정씨(羅州丁氏)로 약용(若鏞)의 딸이다.

어려서는 할아버지인 서유(書有)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장성하여서는 외할아버지 정약용으로부터 수업하였다. 정약용의 학문적 영향을 받아 당대에 문명을 날렸으며, 특히 그의 시는 연경(燕京)의 학자 주당(周棠)이 평하기를 백홍(白虹)의 기상이 있다. ” 고까지 극찬하였고 방산 이라는 호까지 지어 보낼 정도였다.

당시의 거경(巨卿) · 석학(碩學)들이 그와 종유하기를 원하였는데, 권돈인 ( 權敦仁 ) · 이명적(李明迪) · 한계원 ( 韓啓源 ) · 최우형 ( 崔遇亨 ) · 김병학 ( 金炳學 ) · 윤정현 ( 尹定鉉 ) 등이 모두 그의 문우이다. 주위에서 여러 차례 사진(仕進)을 권하였으나 이에 불응하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저서로는 역전익속 易傳翼續 · 시경강의속집 詩經講義續集 · 동환록 東 渶 錄 · 물명고 物名考 · 방산유고 등이 있다.

 

윤주찬(尹柱瓚)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관리. 농상공부의 주사 등을 지냈다. 을사조약의 체결에 반대하여 1907년 전라도 유생 나인영 ( 羅寅永 오기호 ( 吳基鎬 이기 ( 李沂 홍필주 ( 洪弼周 ) 등과 손잡고 자신회 ( 自新會 )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였는데, 이광수(李光秀)와 함께 정부와 일본통감부·군사령부 및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공함과 내외국민에게 포고하는 글을 짓는 역할을 맡았다.

한편, 그 해 3월 을사오적을 암살하기 위하여 결사대를 편성하고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백관이 모이는 기회를 이용, 저격하려는 계획에 참여하여 거사자금으로 2,000냥을 내었다.

이 계획에는 전 대신 이용태 ( 李容泰 ), 학부협판 민형식 ( 閔衡植 ), 궁중호위국회계과장 최익진(崔翼軫), 전 관리공사 서창보(徐彰輔), 전 군수 정인국(鄭寅國) 등도 가담하여 자금을 내었다.

325일 동지들과 함께 거사에 나섰으나 군부대신 권중현 ( 權重顯 )에 부상을 입힌 것 이외에는 모두 실패하였다. 거사에 참여하였던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평리원 ( 平理院 )에서 5년의 유배형을 선고받고 진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尹善道(윤선도) 선생의 일화.

 

보길도

모든 벼슬을 버리고 한가로이 살고자 원한 윤선도는 그 적지로 甫吉島(보길도)를 찾았다.
해남 땅 끝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는 이 섬에서 윤선도는 넉넉한 재산으로 자신의 이상향을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한문투성인 시가를 우리말로 고치는 대 역사를 한 것이다.

그런데 甫吉島(보길도)라는 글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보(甫)자는, 십(十) 용(用)이 되고, 길(吉)자는 십일구(十一口)가 된다. 즉 보길도에는 11개의 명당이 있는데 고산 윤선도가 지리에 밝아 10개를 사용하고 한 개만 남겨 두었다는 듯이 된다.
윤선도가 보길더에 정원을 꾸미고 정자를 짓고 원림(園林)을 꾸민 것이 모두 십용(十用)에 해단 된다는 것이다.

 

 

 

 

尹善道(윤선도) 선생의 일화.

 

고산 윤선도 선생은 1636년 당시 나이50세 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해남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강화도에 이르렀으나 강화도가 이미 함락된 후이었고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비통한 심정을 참지 못해 세상을 피해 제주도에서 살기로 결심한 제주도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보길도의 대풍구미에서 풍랑을 피하게 되는데, 보길도의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눌러 살기로 결심한 고산 윤선도 선생은 여러 곳을 돌아보던 중 산줄기의 모양이 마치 피어오르는 연꽃 모양을 한 부용동에 연못을 파고 세연정(洗然亭)을 세워 선유를 즐기며 불후의 명작인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남겼다.

<출전: 다움 토픽>

 

 

 

尹善道(윤선도) 선생의 일화.

 

163612월 병자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게 되자, 371월 병자호란 중에 그는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다. 그러나 그는 왕을 보호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강화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은거를 결심, 뱃길을 돌려서 제주도로 향하였다. 이후 그는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남해 바다를 항해하다가 보길도를 지나면서 그 섬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나머지, 그 곳에 머물러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낙서재라는 정자를 세워 산과 바다를 즐기면서 시를 벗 삼아 생활하였다. 본래는 심한 태풍을 피하기 위해 들렀으나 수려한 산수에 마음을 뺏겨 10여 년을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이때 피난 중이던 처녀 한 사람을 데리고 부용동에 갔던 것도 나중에 문제가 되었다.

 

대동 찰방(大同察訪) 윤선도(尹善道)는 일찍이 병란 때에 해로를 따라 강화도 근처까지 이르렀었는데, 경성을 지척에 두고서도 끝내 달려가 왕에게 문안하지 않았으며, 피난 중이던 처녀를 잡아 배에 싣고 돌아갔다.

그리고는 그 일이 남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섬으로 깊이 들어가 종적을 숨기려고 하였으니,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소서.”

 라고 고변을 당했다.

 

그는 보길도의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짓고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여기에서 시문과 술, 문객과 문인들, 동남동녀들을 데리고 풍류를 즐겼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 세연정(洗然亭), 회수당(回水堂), 석실(石室) 등을 지었다.

 

그러나 정축하성의 후유증이 수습된 뒤 한성부에 상경했다가, 한성에 돌아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당한다.

 

인조의 피난 행렬 근처에 있었으나 임금을 호종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서인 언관들의 탄핵을 받았으며, 그해 대동찰방에 임명되었다가 처음에 거부했었다는 이유로 16386월 경상북도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

영덕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그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거했다. 그 뒤 곳 전국의 아름다운 명산과 사연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그 무렵에 나온 작품이 산중신곡, 속 산중신곡등이다. 1643년에는 거금도 풍광에 대한 소문을 듣고 거금도를 찾아가 여러 날 머물면서 산중신곡을 펴냈다.

 

이후 그는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출전: 다움 토픽>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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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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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해남 윤씨(海南尹氏)는 남한에 총 11,518가구, 48,78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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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 은씨(恩) 청남 14-08-29 2536
451 행주 은.jpg 행주은씨(殷) [1] 청남 14-08-29 3927
450 해평 윤1.jpg 해평윤씨(尹) 청남 14-08-29 5597
해남 윤.jpg 해남윤씨(尹) 청남 14-08-29 3771
448 함안 윤.jpg 함안윤씨(尹) 청남 14-08-29 3561
447 파평윤씨(尹) 청남 14-08-29 8080
446 칠원 윤.jpg 칠원윤씨(尹) 청남 14-08-29 3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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