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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윤씨(尹)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해평윤씨)

 

 

본관(本貫): 해평(海平)

시조(始祖): 윤군정(尹君正)

유래(由來):

 

해평 윤씨(海平尹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고종(高宗)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수사 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판공부사(判工部事) 등을 역임한 윤군정(尹君正)이다. 군정(君正)의 아들 만비(萬庇)가 충렬왕(忠烈王) 때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와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후에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손자(孫子) ()은 충숙왕(忠肅王) 때 충근절의동덕찬화보정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으로 우정승(右政丞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고려 도원수(高麗都元帥)의 직위(職位)를 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해평(海平)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윤지표(尹之彪)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재상. 본관은 해평 ( 海平 ). 할아버지는 충렬왕 때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를 지낸 만비(萬庇)이며, 아버지는 충혜왕의 총애를 받아 좌정승에까지 오른 석()이다. 아들 보()는 대호군을 지냈다.

1332(충숙왕 복위 1) 충숙왕이 복위하여 충혜왕의 폐신(嬖臣)들을 처벌할 때 대호군으로 있으면서 이에 연루되어 순군 ( 巡軍 )에 갇혔다가 섬에 유배되었다. 1344(충목왕 즉위년) 서연 ( 書筵 )이 설치되자 상호군으로서 시독관 ( 侍讀官 )이 되었다.

그 뒤 평양윤을 거쳐 1347년에는 서북면존무사(西北面存撫使)로 나아갔다. 1355(공민왕 4) 밀직부사로서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공민왕 비 노국대장공주 ( 魯國大長公主 )에게 승의(承懿)의 호를 내려준 것을 사례하고 돌아왔다.

이 해에 해평군(海平君)에 봉하여졌으며, 이 후 관직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관후하여 모가 나지 않았고, 몽고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고 한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윤가관(尹可觀)

?1387(우왕 13).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충혜왕 때 좌정승에까지 오른 석()의 증손으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지표(之彪)의 손자이고, 대호군 보()의 아들이다.

공민왕 말년에 왕의 총애를 받아 근시(近侍)하였는데, 1373(공민왕 22) 공민왕이 한안 ( 韓安 홍륜 ( 洪倫 ) 등으로 하여금 모든 비빈(妃嬪)들을 욕보이게 하면서 익비(益妃)를 범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이때문에 왕의 미움을 받아 서인(庶人)으로 폐하여졌으나 곧 풀려났다. 우왕 때 밀직부사에 올랐으며, 1383(우왕 9)에는 경상도부원수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다가 안동·예안 등지에서 패하고 부상을 입었다.

이해 12월에는 경상도도순문사로서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에 진수(鎭守)하였고, 다음해에 함양에서 진주목사 박자안 ( 朴子安 )과 함께 왜구와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 왜구가 축산도(丑山島)를 거점으로 자주 침구하므로 선졸(船卒)을 두어 이를 방비하도록 하여 이후 왜구의 침략이 약하여지게 되었다.

또한, 못쓰게 된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게 하고, 둔전 ( 屯田 )을 개척하여 군량을 넉넉히 하였다. 무략(武略)이 있고 성품이 청렴하여 염리(廉吏)의 표본이 되기도 하였다. 관직은 판밀직사사에까지 이르렀다.

 

윤창(尹彰)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역임했다.

 

윤은보(尹殷輔)

1468(세조 14) 1544(중종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상경(商卿). 수원부사 처성(處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 ()이고, 아버지는 첨정 훤()이며, 어머니는 현감 김모(金模)의 딸이다.

1494(성종 2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사관 ( 史官 )에 선발되고, 이듬해 승문원검교(承文院檢校)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 성종실록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7(연산군 3) 예관 ( 禮官 )으로 문소전(文昭殿)의 추석 제향을 지낼 때 제4실의 신위판(神位版)을 떨어뜨려 파손한 죄로 장()을 맞고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정언에 서용되었고, 이후 지평 · 집의를 거쳐, 1506(중종 1) 춘추관편수관으로 연산군일기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9년 대마도 경차관 ( 敬差官 )으로 임명되어, 당시 계해조약을 어기고 삼포 ( 三浦 )에서 작폐를 일삼던 일본 거류민들로 하여금 조약을 준수하도록 대마도주에게 국서(國書)를 전달하였다.

1513년 경상도 암행어사로 나가 삼포왜란 이후 경상도의 방수(防戍) 문제를 점검하였다. 이어 직제학 · 부제학 · 대사간을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1519년에 이조참판으로서 반정공신의 녹훈 개정을 주청했고, 1521년에는 대사헌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공조판서로서 강원도 양전순찰사(量田巡察使)로 파견되었고, 이어 예조판서 · 대사헌 · 이조판서 ·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529년 지중추부사로 주청사 ( 奏請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대사헌 · 병조판서 ·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33년 좌찬성에 오르고 그 뒤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을 역임하고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1543년 영의정에 재직시 왕명에 의해 대전후속록 大典後續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 연산군 · 중종 등 3대에 걸쳐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계속된 사화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연루된 적이 없었으므로 사림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의 사평(史評)에 의하면 학술은 뛰어나지 않았으나 이사(吏事)에는 연달(練達 : 익숙하게 단련되어 막힘 없이 환히 통함)하고 상세하다. ” 고 하였다. 시호는 정성(靖成)이다.

 

윤은필(尹殷弼)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상로(商老). 수원부사 처성(處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 ()이고, 아버지는 첨정 훤()이며, 어머니는 현감 김모(金模)의 딸이다. 영의정 은보(殷輔)의 동생이다.

1496(연산군 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04(연산군 10) 진사로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08(중종 3) 부교리, 1511년 장령 ( 掌令 ), 이듬해 부응교 등을 거쳐 1517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을 거쳐 1519년 예조참의·승지가 되었다.

이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 趙光祖 ) 등이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그를 옹호하였다. 1522년 첨지중추부사를, 이듬해 황해도관찰사를, 1527년에는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30년에 도승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1532년 동지중추부사로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대사성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갔다. 벼슬은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헌간(憲簡)이다

 

윤두수(尹斗壽)

1533(중종 28) 1601(선조 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자앙(子 茫 ), 호는 오음(梧陰). 계정(繼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림(希琳)이고, 아버지는 군자감정 변( )이며, 어머니는 부사직 ( 副司直 )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근수(根壽)의 형이다.

이중호 ( 李仲虎 ) · 이황 ( 李滉 )의 문인으로, 1555(명종 10)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에 들어간 다음, 검열 ( 檢閱 ) · 정자 ( 正字 ) · 저작 ( 著作 )을 역임하였다.

1563년 이조정랑에 재임 중 권신(權臣) 이량 ( 李樑 )이 그의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박소립 ( 朴素立 ) · 기대승 ( 奇大升 ) 등과 함께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영의정 윤원형 ( 尹元衡 ), 우의정 심통원 ( 沈通源 )의 계문(啓文 : 왕에게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올리는 양식의 글)으로 무죄임이 밝혀져 수찬에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그 뒤 이조정랑 · 의정부검상 · 사인 · 사헌부장령 · 성균관사성 · 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내고, 1565년 문정왕후 ( 文定王后 )의 천거로 부응교에 임용된 뒤 동부승지 · 우승지를 거쳐 1576(선조 9)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듬해 사은사 ( 謝恩使 )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도승지가 되었으나, 이종동생 이수(李銖)의 옥사에 연좌, 아우 근수와 함께 파직되었으며, 대사간 김계휘 ( 金繼輝 )의 주청으로 복직되어 연안부사로 나갔다. 1581년 황해감사의 서장(書狀)에 의해 재령군수 최립(崔 凌 ) 등과 함께 구황(救荒)을 잘했다 하여 옷 한 벌이 하사되었다.

이 후 한성좌윤 · 오위부총관 ·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1587년 왜구가 전라도 지방을 침범해 지역 인심이 흉흉해지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해 수사 · 수령의 기강 쇄신과 범죄자 처벌에 노력하였다.

1589년 평안감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종계(宗系 : 명나라 태조실록 대명회전 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를 변무(辨誣 : 잘못된 것을 바로 잡도록 함)한 공으로 광국공신 ( 光國功臣 ) 2등이 되어 해원군 ( 海原君 )에 봉해졌다.

그 뒤 대사헌 ·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5915월 석강(夕講)에서 도요토미(農臣秀吉)의 답서를 명나라에 알려 진상을 보고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병조판서 황정욱 ( 黃廷彧 )과 함께 보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양사의 합계(合啓)로 정철 ( 鄭澈 )에게 당부(黨附)했다 하여 파면되었다.

그리고 건저문제(建儲問題 : 세자 책봉의 문제)로 정철이 화를 당할 때 같은 서인으로 연루되어 회령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뒤 그의 견해가 타당성이 있음을 안 선조는 공을 인정하는 뜻에서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다시 기용되어, 어영대장 ·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해 평양 행재소 ( 行在所 )에 임진강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고 우리의 힘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해 이조판서 이원익 ( 李元翼 ), 도원수 김명원 ( 金命元 ) 등과 함께 평양성을 지켰다. 이듬해 삼도체찰사 (三道體察使)를 겸했으며, 1595년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해원부원군(海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영의정 유성룡 ( 柳成龍 )과 함께 난국을 수습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올랐으나, 대간의 계속되는 탄핵으로 사직하고 남파(南坡)에 물러났다. 1605년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에 봉해졌다.

평소 온화하고 화평했으나, 큰 일을 당했을 때에는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 정유재란의 국가적 위기 때에는 적극적으로 극복에 나섰다. 저서로는 오음유고 · 기자지 箕子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윤근수(尹根壽)

1537(중종 32) 1616(광해군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장원 ( 掌苑 ) 계정(繼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용 ( 司勇 ) 희림(希林)이고,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 )이며, 어머니는 부사지(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영의정 두수(斗壽)의 동생이다.

김덕수(金德秀) · 이황 ( 李滉 )의 문인으로 1558(명종 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용된 뒤 승정원주서 · 춘추관기사관 · 연천군수 등을 거쳐 1562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 때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조광조 ( 趙光祖 )의 신원(伸寃)을 청했다가 과천현감으로 체직되었다.

이듬 해 8월 행신(倖臣) 이량 ( 李樑 )이 그의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하자 형 두수, 박소립 ( 朴素立 ), 기대승 ( 奇大升 ) 등이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이량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해 9월 영의정 윤원형 ( 尹元衡 ), 우의정 심통원 ( 沈通源 )의 계문(啓文 : 왕에게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올리는 글)으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승문원 검교에 서용되었으나, 형 두수가 이조전랑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

1565년 홍문관부교리로 다시 기용된 뒤 이조좌랑 · 정랑 ( 正郎 )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해 의정부사인 · 지제교 겸 교서관교리(知製敎兼校書館校理)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검상 · 사인 · 장령 · 집의 · 사예 · 부응교 등을 역임했으며, 1572(선조 5)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승진, 이듬 해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 태조실록 대명회전 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를 하였다.

그 뒤 경상도감사 · 부제학 · 개경유수 · 공조참판 등을 거쳐 1589년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귀국할 때 대명회전전서 大明會典全書 를 가져왔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 光國功臣 )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591년 우찬성으로 정철 ( 鄭澈 )이 건저(建儲 : 세자 책봉) 문제로 화를 입자, 그가 정철에게 당부했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형 두수와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문안사 ( 問安使 ) · 원접사 ( 遠接使 ) · 주청사 등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국난 극복에 노력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했고, 1604년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에 봉해졌다.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로 할 것을 주장해 실현시켰다.

청백간손(淸白簡遜)하고 문장이 고아하며 필법이 주경( 楔 勁 : 그림이나 글씨 등에서 붓의 힘이 굳셈)해 예원(藝苑)의 종장(宗匠)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저서로는 사서토석 四書吐釋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윤방(尹昉)

1563(명종 18) 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가회(可晦), 호는 치천(稚川). 사용 ( 司勇 ) 희림(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국자감정 변( )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두수(斗壽)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황기 ( 黃琦 )의 손녀로 참봉 대용(大用)의 딸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2(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임명되고 이어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봉교 · 예조좌랑이 되었다.

곧 사헌부정언으로 옮겨 병조판서 이양원 ( 李陽元 )의 인사 부정을 탄핵하다가 성균관전적으로 체직되었다. 1591년 당쟁으로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아버지가 재상으로 다시 기용되자, 예조정랑으로 발탁되어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어 병조정랑을 거쳐 특명으로 곧 기복 ( 起復 )해 홍문관수찬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그 뒤 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응교에 올랐으며, 당시 왜적의 만행이 극심한 중에도 몰래 숨어서 어머니 빈소에 다녀오는 효성을 보였다.

곧 직강 · 사예가 되고 다시 당론이 일어나 아버지가 파직당하자 스스로 파직을 요청해 대각(臺閣)에서 물러났다가 곧 군기시첨정에 제수되었다. 이어 경상도순안어사(慶尙道巡按御史)로 나가 치적을 올리고, 군기감정(軍器監正) · 평산부사를 거쳐 이몽학 ( 李夢鶴 )의 난이 끝나자 추관(推官)으로 활약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순안독찰(巡按督察)이 되어 군량 운반을 담당하고, 곧 철원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동부승지로 승진되어 돌아오자 그 곳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1601년 부친상을 마친 뒤 동지사 ( 冬至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병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에 보임되었다가 도승지로 전직되었고, 다시 한성판윤 겸 지의금부사 ( 知義禁府事 )에 올랐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형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사은사 ( 謝恩使 )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경기도 · 경상도의 감사를 지냈다.

이어 겸지춘추관사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1615(광해군 7) 다시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해 폐모론이 있자 병을 핑계로 정청(政廳)에 불참해 탄핵을 받고 사직, 은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예조판서로 등용되고, 이어 우참판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곧 우의정에 올랐다.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 민심 수습에 공헌했으며, 1627(인조 5) 영의정이 되었다. 그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피난을 주장해 강화에 호종했고, 영의정에서 물러나 판중추부사를 역임한 후 1631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묘사제조(廟社提調)로서 40여 신주 ( 神主 )를 모시고 빈궁 ( 嬪宮 ) · 봉림대군 ( 鳳林大君 )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신주 봉안에 잘못이 있었다는 탄핵을 받고 1639년 연안에 유배되었다가, 2개월 후 풀려나 다시 영중추부사에 기용되었다. 인품이 중후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저서로는 치천집 이 있다. 시호는 문익 ( 文翼 )이다.

 

윤흔(尹昕)

1564(명종 19) 1638(인조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초명은 양(). 자는 시회(時晦), 호는 도재(陶齋) 또는 청강(晴江). 증좌찬성 희림(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영의정 변( )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두수(斗壽)이며, 어머니는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형이 영의정 방()이다. 성혼 ( 成渾 )의 문인이다.

1582(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공으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특진하였으며,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여 우승지에 이르렀다. 1613(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났을 때 첩의 남동생인 서양갑 ( 徐羊甲 )에게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

그 뒤 1620년 무관직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당시 대북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동지중추부사 · 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의 좌윤 · 우윤 등을 역임하였다.

1624(인조 2)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인조를 공주에 호종하였으며, 그 뒤 가의대부 ( 嘉義大夫 )에 올랐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로 호종(護從 : 호위하여 따름.)하였으며, 적과의 강화를 강력히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1632 · 1635년에는 예조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인목대비(仁穆大妃)와 인열왕후 ( 仁烈王后 )의 국장업무에 참여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였으며, 다음해 서울에 돌아와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저서로는 계음만필 溪陰漫筆 · 도재수필 · 도재집 등이 있다. 시호는 정민(靖敏)이다.

 

윤휘(尹暉)

1571(선조 4) 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정춘(靜春), 호는 장주(長洲) · 천상(川上). 증찬성 희림(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변( )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두수(斗壽)이며, 어머니는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성혼 ( 成渾 )의 문인이다.

1589(선조 22)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문과로 급제하여 사관 ( 史官 )이 되었다가 1596년 병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병조정랑이 되고 이어 사서 · 장령 · 필선 · 사간 등을 거쳐, 전라도 · 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1613(광해군 5) 계축옥사에 관련, 벼슬에서 쫓겨났다가 뒤에 다시 기용되었고, 1618년 동지 겸 진주사(冬至兼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공조 · 예조의 참판을 거쳐 1623(인조 1) 인조반정 때 장흥 · 아산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1627년 정묘호란 때 기용되어 한성부좌윤 · 청주목사, 호조와 형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고, 특명전권대사로 적진에 출입하면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후 도승지에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고, 한성부판윤 · 형조판서를 거쳐 1639년 우찬성으로서 주청사 ( 奏請使 )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1641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죽은 뒤 아들 면지(勉之)의 공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장익(章翼)이다. 저서로 장주집 이 있다.

 

윤훤(尹暄)

1573(선조 6) 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차야(次野), 호는 백사(白沙). 증찬성 희림(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변( )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두수(斗壽)이며, 어머니는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형인 영의정 방()을 비롯한 네 형제가 모두 높은 관직에 진출하였다. 성혼 ( 成渾 )의 문인이다.

1590(선조 23)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97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합격하여 사관이 되었다. 1599년 호조좌랑을 거쳐 1605년 동래부사를 역임하였다. 1611(광해군 3)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대북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는 죄명으로 압송되는 김직재 ( 金直哉 )를 후대하였다 하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복관되어 1617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1624(인조 2)에는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25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한 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副體察使)를 겸직하여 적과 싸웠다.

그러나 안주를 빼앗긴 뒤 평양에서 싸우고자 하였지만 병력과 장비의 부족으로 종사관 ( 從事官 ) 홍명구 ( 洪命耉 )의 건의를 받아들여 다시 성천으로 후퇴하였다. 이로 인하여 황해병사 정호서 ( 丁好恕 )도 싸우지 않고 황주를 포기하는 등, 전세를 불리하게 하였다는 죄로 체포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형 방을 비롯하여 조카 신지(新之)의 아내이며 인조의 고모인 정혜옹주(貞惠翁主)가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강화도에서 효수되었다.

 

윤우(尹旴)

()가 병마 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윤이지(尹履之)

1579(선조 12) 1668(현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중소(仲素), 호는 추봉(秋峯).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두수(斗壽)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방()이며, 어머니는 판관 한의(韓 憤 )의 딸이다.

1600(선조 33) 문음 ( 門蔭 )으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된 뒤, 양구 · 은산 · 적성 · 통진 · 용안현감을 역임하였다. 1616(광해군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공조 · 호조의 정랑을 거쳐, 사예에 이르렀다.

1618년 이이첨 ( 李爾瞻 )에 의하여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고 은퇴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여주목사로 재기용되어 크게 치적을 올리고,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특진되었다.

1625(인조 3) 승지를 거쳐, 병조참의에 오르고, 1627년 전라감사가 되어 문란한 군정(軍政)을 바로잡는 데 공헌하였으며, 이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총융사로서 남한산성을 수비하였다.

1629년 강원감사가 되어서는 도내의 신기전(新起田)을 수괄(搜括)하여 국가재정 확보에 이바지하였으며, 1632년 호조참판이 된 뒤 도승지 · 경기감사를 역임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 때에는 강화부사로 강화수비를 맡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승지로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 되어 국가기강 확립책을 건의한 바 있으며, 해창군(海昌君)에 습봉(襲封)되었다. 1645년 평안감사가 된 뒤 함경감사 · 한성판윤을 거쳐, 1650(효종 1)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형조판서를 두 차례나 역임한 뒤, 165880세에 정헌대부 ( 正憲大夫 )에 오르고, 1668(현종 9) 90세에 숭정대부 ( 崇政大夫 )에 올라 판돈녕부사로 죽었다. 저서로는 추봉집 이 있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윤신지(尹新之)

1582(선조 15) 1657(효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중우(仲又), 호는 연초재(燕超齋). 선조와 인빈김씨 ( 仁嬪金氏 )와의 소생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하여 해숭위(海嵩尉)에 봉하여졌다. 사람됨이 총명하였으므로 선조는 때때로 시를 지어 바치게 하여 사랑을 받았다.

인조 때에는 군덕(君德)을 극론(極論)하는 데 서슴지 않았으나 인조는 이것을 잘 받아들였으며, 능묘(陵廟)의 대사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감독하게 하여 마침내 정1품에 올라 위()가 재상과 같았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왕명을 받아 노병재신(老病宰臣)들과 함께 강화에 갔다.

그 때 묘사(廟社)를 지키고 있던 아버지 방()이 그를 소모대장(召募大將)으로 죽진(竹津)에 있게 하였다. 갑진(甲津)이 적군에게 점령되고 부성(府城)에 적이 육박해 오자 군사를 지휘하여 성을 나와 죽기를 결심하고 홀로 말을 달려 질주하다가 적병을 만나자 몸을 절벽에 던져 자살하려 하였으나 구조되었다.

널리 사람을 사귀었으나 이름을 나타내기를 꺼렸으며 오로지 내수(內修)에 힘썼고, 현호(玄湖)에 복거 ( 卜居 )하면서 스스로 현주산인(玄洲散人) ’ 이라고 불렀다. · () · ( )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현주집 玄洲集 · 파수잡기 破睡雜記 가 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윤순지(尹順之)

1591(선조 24) 1666(현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행명( 紮 溟).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두수(斗壽)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훤()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대사헌 의겸 ( 義謙 )의 딸이다.

1612(광해군 4) 사마시를 거쳐 162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 · 언관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 초에 경연관 ( 經筵官 )이 되고, 1627(인조 5) 정묘호란 때 아버지가 평안도관찰사로서 적의 침입을 막지 못한 죄로 사사(賜死)되자 10년 동안 은거하였다.

1629년 홍문관부교리에 다시 등용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잇길로 성중에 들어가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환도 후 형조참의가 되고 1643년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부사로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654(효종 5) 경기도관찰사로 재직할 때 소송사건을 빨리 처리하지 않아 민원을 사서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 1657년 실록수정청당상(實錄修正廳堂上)이 되어 선조수정실록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도승지 · 육조의 참판 · 개성유수 · 한성판윤 · 대제학을 거쳐, 1663년 공조판서 ·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종조(從祖) 근수(根壽)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 · () · () · ()에도 뛰어났다. 겸손하고 근면하였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돈후하여 아버지의 전화(前禍)를 항상 잊지 않았다. 왕의 잘못이 있더라도 직언은 하지 않았으며 조정에 있어서도 객처럼 처신하였다. 저서로는 행명집 이 있다.

 

윤유(尹游)

1674(현종 15)1737(영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백수(伯修), 호는 만하(晩霞). 의지(誼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연()이고, 아버지는 지평 세희(世喜)이며, 어머니는 이동규(李同揆)의 딸이다. 1702(숙종 28) 생원이 되고 음보로 찰방이 된 뒤 진천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71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언관직을 거쳐 1721(경종 1) 수찬·부교리, 1722년에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723년에 나라의 기강이 문란하여 국고의 세수입이 격감되므로, 왕에게 글을 올려 토지세제를 개혁, 각 영부(營府)의 둔전 ( 屯田 )을 정리하고 세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무장들의 탐학을 막고 민폐를 근절하도록 진언하였다.

1724(영조 즉위년) 동래부사를 역임하고 같은 해 영조가 즉위한 뒤 대사간에 오르고 부제학·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노론이 득세하자 앞서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삭출당하였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집권하자 대사간에 복직, 승지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대사헌·예조참판이 되고, 1730년에 병조참판으로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던 도중 병을 얻어 되돌아왔다.

이어 한성부판윤을 거쳐 1731년 형조판서에 오르고, 1733년 지의금부사·지경연사를 겸직하고, 이듬해 병조판서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공조·호조·이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윤순(尹淳)

1680(숙종 6) 1741(영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 서화가.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중화(仲和), 호는 백하(白下) · 학음(鶴陰). 만년에는 만옹(漫翁)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명신 두수(斗壽)5대 손으로, 지평 세희(世喜)의 아들이며 유()의 아우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승지 동규(同揆)의 딸이다.

1712(숙종 38)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에 등용되었다. 1723(경종 3) 응교로 사은사 서장관 ( 書狀官 )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7(영조 3) 이조참판으로 대제학을 겸임하고 이듬해 이인좌 ( 李麟佐 )의 난 때 감호제군사(監護諸軍使)가 되었으며, 1729년 공조판서가 되고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35년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1739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냈으며, 그 뒤 평안도관찰사로 관내를 순찰하던 중 벽동(碧潼)에서 객사하였다. 조선시대 양명학의 태두인 정제두 ( 鄭齊斗 )의 문인이며 정제두의 아우 제태(齊泰)의 사위이다. 그는 당시 조정과 산림에 있는 선비들의 허위와 타락을 논하면서 양심적 시정(施政)과 개혁을 주장하였다.

윤순은 시문은 물론 산수 · 인물 · 화조 등의 그림도 잘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글씨의 대가로 우리 나라의 역대서법과 중국서법을 아울러 익혀 한국적 서풍을 일으켰다. 그의 문하에서 이광사 ( 李匡師 ) 등이 배출되었다. 서풍은 왕희지(王羲之) · 미불(米 連 )의 영향이 많은데, 그의 필적을 보면 소식(蘇軾)체로 쓴 것도, 동기창(董其昌)체에 가까운 것도 있다.

또한, 김정희 ( 金正喜 )완당집 阮堂集 에서 백하의 글씨는 문징명 (文徵明)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이 그는 옛사람의 서풍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대가의 역량을 지녔다. 특히, 행서는 각가(各家)의 장점을 조화시켜 일가를 이루었다.

윤순이가 쓴 비갈로 경기도 강화의 고려산적석사비(高麗山積石寺碑), 장단의 참찬윤순지표(參贊尹順之表) · 예참서문유비(禮參徐文裕碑), 양주의 풍릉조문명표(豊陵趙文命表), 광주 ( 廣州 )의 판서이현석비(判書李玄錫碑), 이창발묘갈(李昌發墓碣), 영상홍서봉비(領相洪瑞鳳碑), 좌상이태좌표(左相李台佐表), 호참송징은비(戶參宋徵殷碑), 응교심유갈(應敎沈濡碣), 기백윤훤표(箕伯尹喧表) 등이 있다. 저서에 백하집 이 전한다.

 

윤급(尹汲)

1697(숙종 23) 1770(영조 4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경유(景孺), 호는 근암(近庵). 영의정 두수(斗壽)5대손이며, 면지(勉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 )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세수(世綏)이고, 어머니는 이하 ( 李夏 )의 딸이다. 이재 ( 李縡 ) · 박필주(朴弼周)의 문인이다.

1725(영조 1)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해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런데 이 때 시권 ( 試券 )의 비봉( 煉 封 : 시험지 끝에 응시자 본인의 관직 · 이름 · 본관 · 거주지 및 부 · · 증조의 관직 이름, 외조의 관직 이름과 본관 등을 다섯 줄로 쓴 뒤, 관원들이 응시자의 이름을 알아볼 수 없도록 그 위를 종이로 붙여 봉한 곳)에 나이와 본관을 쓰지 않아 격식 위배로 탈락하게 되었으나, 헌납 채응복 ( 蔡膺福 )의 상소로 구제되었다.

1727년 설서가 된 뒤 정언 · 지평 · 수찬 · 교리 등을 차례로 지냈다. 1734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전주권(銓注權)을 독점해 불법을 자행하는 이조판서 송인명 ( 宋寅明 )을 비난하다 파직되었다. 1736년 사간으로 다시 기용된 뒤 집의 · 검상 · 부응교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교리로서 문과 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우부승지 · 대사간 등을 지내고, 1741년 대사성이 되어 유생의 기강 쇄신과 학풍의 진작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유생들이 사원(祠院)의 훼철에 반대해 농성을 벌이자 그 책임으로 이조참의로 체직되었다. 1744년에는 인사 행정의 잘못으로 일신현감(一新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746년 부제학이 되어 동의금부사 · 한성좌윤을 역임하고,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호조참판이 되었다.

1749년 이조판서 정우량 ( 鄭羽良 )이 그의 당()인 이창수(李昌壽)를 이조참의로 삼으려는 것을 반대하다 홍원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다시 부제학으로 기용된 뒤, 예문제학 · 형조판서 · 개성유수 ·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에 이르렀다. 이 때 문무식년회시(文武式年會試)에서 왕의 소패(召牌)를 어겨 도배(徒配)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63년 참찬이 된 뒤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영의정 신만 ( 申晩 )의 아들 광집(光輯)의 초사(初仕) 문제로 왕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가 곧 우참찬이 되었다. 이후 이조판서 · 판의금부사 · 한성판윤 · 예조판서 · 형조판서 · 좌참찬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준급한 언론으로 영조의 탕평책을 계속 반대, 자주 파직 혹은 좌천되었으나 의로운 주장이 많았기에 곧 서용되곤 하였다. 특히, 글씨에 뛰어나 독특한 서체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근암집 · 근암연행일기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윤기동(尹耆東)

정조(正祖) 때 여러 판서(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른 기동(耆東)은 가문(家門)을 한층 빛낸 인물이다.

 

윤근수(尹根壽)

1537(중종 32) 1616(광해군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장원 ( 掌苑 ) 계정(繼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용 ( 司勇 ) 희림(希林)이고,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 )이며, 어머니는 부사지(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영의정 두수(斗壽)의 동생이다.

김덕수(金德秀) · 이황 ( 李滉 )의 문인으로 1558(명종 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용된 뒤 승정원주서 · 춘추관기사관 · 연천군수 등을 거쳐 1562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 때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조광조 ( 趙光祖 )의 신원(伸寃)을 청했다가 과천현감으로 체직되었다.

이듬 해 8월 행신(倖臣) 이량 ( 李樑 )이 그의 아들 정빈(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하자 형 두수, 박소립 ( 朴素立 ), 기대승 ( 奇大升 ) 등이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이량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해 9월 영의정 윤원형 ( 尹元衡 ), 우의정 심통원 ( 沈通源 )의 계문(啓文 : 왕에게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올리는 글)으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승문원 검교에 서용되었으나, 형 두수가 이조전랑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

1565년 홍문관부교리로 다시 기용된 뒤 이조좌랑 · 정랑 ( 正郎 )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해 의정부사인 · 지제교 겸 교서관교리(知製敎兼校書館校理)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검상 · 사인 · 장령 · 집의 · 사예 · 부응교 등을 역임했으며, 1572(선조 5)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승진, 이듬 해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 태조실록 대명회전 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를 하였다.

그 뒤 경상도감사 · 부제학 · 개경유수 · 공조참판 등을 거쳐 1589년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귀국할 때 대명회전전서 大明會典全書 를 가져왔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 光國功臣 )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591년 우찬성으로 정철 ( 鄭澈 )이 건저(建儲 : 세자 책봉) 문제로 화를 입자, 그가 정철에게 당부했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형 두수와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문안사 ( 問安使 ) · 원접사 ( 遠接使 ) · 주청사 등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국난 극복에 노력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했고, 1604년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에 봉해졌다.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로 할 것을 주장해 실현시켰다.

청백간손(淸白簡遜)하고 문장이 고아하며 필법이 주경( 楔 勁 : 그림이나 글씨 등에서 붓의 힘이 굳셈)해 예원(藝苑)의 종장(宗匠)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저서로는 사서토석 四書吐釋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윤은보(尹殷輔)

1468(세조 14) 1544(중종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상경(商卿). 수원부사 처성(處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 ()이고, 아버지는 첨정 훤()이며, 어머니는 현감 김모(金模)의 딸이다.

1494(성종 2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사관 ( 史官 )에 선발되고, 이듬해 승문원검교(承文院檢校)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 성종실록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7(연산군 3) 예관 ( 禮官 )으로 문소전(文昭殿)의 추석 제향을 지낼 때 제4실의 신위판(神位版)을 떨어뜨려 파손한 죄로 장()을 맞고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정언에 서용되었고, 이후 지평 · 집의를 거쳐, 1506(중종 1) 춘추관편수관으로 연산군일기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9년 대마도 경차관 ( 敬差官 )으로 임명되어, 당시 계해조약을 어기고 삼포 ( 三浦 )에서 작폐를 일삼던 일본 거류민들로 하여금 조약을 준수하도록 대마도주에게 국서(國書)를 전달하였다.

1513년 경상도 암행어사로 나가 삼포왜란 이후 경상도의 방수(防戍) 문제를 점검하였다. 이어 직제학 · 부제학 · 대사간을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 1519년에 이조참판으로서 반정공신의 녹훈 개정을 주청했고, 1521년에는 대사헌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공조판서로서 강원도 양전순찰사(量田巡察使)로 파견되었고, 이어 예조판서 · 대사헌 · 이조판서 ·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529년 지중추부사로 주청사 ( 奏請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대사헌 · 병조판서 · 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33년 좌찬성에 오르고 그 뒤 우의정 · 좌의정 · 영의정을 역임하고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1543년 영의정에 재직시 왕명에 의해 대전후속록 大典後續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 연산군 · 중종 등 3대에 걸쳐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계속된 사화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연루된 적이 없었으므로 사림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의 사평(史評)에 의하면 학술은 뛰어나지 않았으나 이사(吏事)에는 연달(練達 : 익숙하게 단련되어 막힘 없이 환히 통함)하고 상세하다. ” 고 하였다. 시호는 정성(靖成)이다.

 

윤승길(尹承吉)

1540(중종 35) 1616(광해군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자일(子一), 호는 남악(南岳).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은필(殷弼)이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홍언(弘彦)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장림수(長臨壽) 순민(舜民)의 딸이다.

1561(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 · 장령 등 여러 중요관직을 역임하였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구성부사로 있으면서 군량미조달과 군인모집 등에 공을 세우고,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전란에 시달려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고 장정을 뽑아 기효신법(紀 茸 新法)으로 훈련을 시켜 명나라 지휘관으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았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600년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해 그의 딸이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 공(仁城君珙)과 결혼하였다. 한성부우윤을 지내면서 동지의금부사 ( 同知義禁府事 )를 겸직하고, 관직은 의정부좌참찬으로 끝났다. 뒤에 해선군(海善君)에 봉하여졌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윤승훈(尹承勳)

1549(명종 4)1611(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평 ( 海平 ). 자는 자술(子述), 호는 청봉(晴峰).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판 은필(殷弼)이고, 아버지는 감찰 홍언(弘彦)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장림수(長臨壽) 순민(舜民)의 딸이다.

1573(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1년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 대사헌 이이(李珥), 장령 정인홍 ( 鄭仁弘 ) 등과 함께 심의겸 ( 沈義謙 )을 탄핵하였는데, 그 때 정철 ( 鄭澈 )의 탄핵문제까지 아울러 거론되자 이에 대하여서는 이이가 반대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를 논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신창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간원사간으로서 무유어사(撫諭御史선유사(宣諭使조도사(調度使) 등의 전시(戰時) 임직을 맡아 국난극복을 위하여 활약하였고, 1594년 충청도관찰사에 이어 형조참의·호조참판·대사헌 등을 거쳤다. 1597년 형조판서가 되어 사은사 ( 謝恩使 )로 명나라에 다녀온 다음 이조판서에 올랐다.

1599년 함경도관찰사 재직시 변방의 호족(胡族)이 쳐들어와 크게 난을 일으키자 병사 이수일 ( 李守一 )을 시켜 적의 소굴을 소탕함으로써, 어유간(魚游澗)에서 풍산보(豊山堡)에 이르는 함경도일대에 호족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하였다.

그 뒤 1601년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영의정에까지 승진하였다. 영의정으로 있을 때 선조의 존호제정문제로 좌의정 유영경 ( 柳永慶 )의 모함을 입고 파직당하였으나 곧 신원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윤비(尹妃)

근대 인물(人物)로 택영(澤榮)의 딸인 윤비(尹妃)가 방()의 후손이다.

 

윤치호(尹致昊)

1865(고종 2)1945. 대한제국 때의 정치가·민족운동가. 본관은 해평 ( 海平 ). 호는 좌옹(佐翁). 충청남도 아산 출신. 할아버지는 취동(取東)이다. 무관 출신으로 개화인사였던 웅렬(雄烈)의 아들로,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어려서는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전통적인 유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인 어윤중 ( 魚允中 )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시찰을 마치고 18834월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의 알선으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882년에는 동경대학 철학교수의 부인 밀레트(Millet,L.G.)와 동경대학 영어강사 간다(神田乃武)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또한, 체류 중 김옥균 ( 金玉均 서광범 ( 徐光範 박영효 ( 朴泳孝 ) 등 개화파 인물과 일본 개화의 선구자 후쿠자와(福澤諭吉나카무라(中村正直) 등과 교유하였다.

1883년 초대주한미국공사 푸트(Foote,L.H.)의 통역으로 귀국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가 되었다. 고종과 푸트와 개화당간의 교량적 역할을 하면서 조선의 자주권 확립과 정치 개혁에 힘썼다.

188412월의 갑신정변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정변의 주역인 김옥균·박영효 등과 각별히 친밀했기 때문에 정변 실패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18851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미국총영사 스탈(Stahl,G.)의 알선으로 중서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여 36개월 동안 보다 체계적인 근대교육을 받았다. 또한, 이 학교의 선교교육자 알렌(Allen,A.J.)학장과 본넬(Bonnel,W.B.)교수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인도되었다.

중서서원을 수료한 뒤 알렌과 본넬의 알선과 감리교회의 후원으로 미국 밴더빌트(Vanderbilt)대학 신학과 영어코스에서 3, 6학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여기서 틸레트(Tillet)교수의 영향을 받았다.

졸업 후 에모리(Emory)대학에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수강했고, 캔들러(Candler,W.A.)학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국에 유학하는 동안 교내외 각종 행사와 집회에 참석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일본유학 기간에는 메이지유신의 근대화과정과 자유민권운동을 체험하였다. 중국유학기간에는 중국과 조선의 낙후된 전통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기독교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유학 기간에는 기독교와 민주주의와 과학문명에 기초한 성숙한 근대사회를 체험하였다.

이처럼 전통사회와 근대화과정사회, 그리고 근대사회를 고루 체험함으로써, 전통사상·전통질서·전통체제를 철저히 부정하고 근대사상·근대질서·근대체제를 적극 수용하여 조국을 전통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전환시키려는 강력한 근대변혁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1895년 미국유학을 마치고 상해를 거쳐 귀국한 뒤 외부협판과 학부협판 등을 지냈다. 1896년에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Nicolai )의 대관식에 민영환 ( 閔泳煥 )의 수행원으로 참석하였다.

1897년 후반부터 독립협회에 가담해 서재필 ( 徐載弼 이상재 ( 李商在 ) 등과 독립협회운동을 이끌었다. 서재필이 추방당한 뒤 18988월 제2대 회장이 되어 이 해 101만여 명이 참석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대외적인 자주국권의 수호와 대내적인 자유민권의 보장 및 근대적인 자강체제의 수립을 포괄하는 헌의6(獻議六條)를 결의해 국정에 반영시켰다.

또한, 독립신문의 사장과 만민공동회 회장으로 자주국권운동과 자유민권운동 및 자강개혁운동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뒤 독립협회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테러에 의한 189812월 정부의 강제해산조처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자주민권운동이 좌절되었다. 민중운동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은신하고 있던 중, 1899년 덕원감리 겸 덕원부원으로 임명되었다.

19006월 삼화감리 겸 삼화부윤, 19017월에는 다시 덕원감리 겸 덕원부윤에 복귀하였다. 19037월 천안군수, 19042월 무안감리로 발령받았다가 부임 3개월 전 외부협판에 임명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6년 장지연 ( 張志淵 윤효정 ( 尹孝定 )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추대되어 국민의 자주자강 정신과 능력을 기르는 데 힘썼다.

개성에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설립해 원장으로서, 그리고 안창호 ( 安昌浩 ) 등이 주도하는 신민회의 교육기관인 평양의 대성학교 ( 大成學校 ) 교장으로서 신교육 구국운동에 진력하였다. 한편,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을 맡고, 세계주일학교 한국지회의 회장에 선임되어 청소년 계몽운동을 통한 기독교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우리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된 뒤, 1912년에는 일제가 한국의 민족지도자를 말살하기 위해 날조한 이른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옥중생활을 하다가 1915년에 석방되었다.

출옥 이후 YMCA의 총무와 회장으로 활동했고,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의 이사와 송도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체육회 회장과 민족운동단체인 흥업구락부 ( 興業俱樂部 )의 회장으로 신교육운동과 기독교운동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의 실력양성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에는 교풍회(矯風會각도조선인대표자대회·조선인산업대회 등 일제의 통치정책에 이용된 친일단체와 모임에 깊이 관여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해 일제의 전시체제가 더욱 강화되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로 친일활동을 하였다. 1941년 친일세력을 총망라한 조선임전보국단의 고문과 1945년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저서로는 우스운 소리·영어문법첩경이 있고, 역술서로 찬미가, 번역서로 의회통화규칙·이솝우화 伊索寓話·걸리버여행기가 있다.

 

윤웅렬(尹雄烈)

1840(헌종 6)1911.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파평 ( 坡平 ). 충청남도 아산 출신. 한말 정치가 치호(致昊)의 아버지이다. 1856(철종 7) 무과에 급제한 뒤 1861년 충청감영중군 겸 공주중군으로, 이듬해 함경북도병마우후토포사(咸鏡北道兵馬虞侯討捕使)로 임명되었다.

1878(고종 15) 남양부사를 역임하였고, 1880년에는 2차수신사 김홍집 ( 金弘集 )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는데, 당시 직함은 군관전중군(軍官前中軍)이었다. 동경에서 흥아회(興亞會)의 초대를 받아 일본의 조야인사(朝野人士)들과 교유를 가졌다. 일본을 다녀온 이듬해에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881년에는 오영군문(五營軍門)으로부터 지원자 80명을 선발해 무위영 ( 武衛營 ) 소속으로 조직된 조선 최초의 신식 군대 별기군 ( 別技軍 )의 좌부령관(左副領官)에 임명되어 별기군 운영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별기군의 창설은 필연적으로 구군대와 마찰을 일으켰고, 누적되는 차별 대우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 공관에 정원(偵員) 이승모(李承謨)를 보내 군민들의 일본 공관 습격계획 정보를 일본 판리공사(辦理公使) 하나부사(花房義質)에게 통보,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였다.

군란이 점차 확대되면서 군민들이 그의 집과 친일 인사들의 가옥을 파괴하고 일본 공관을 습격하자 일본공사 일행과 함께 나가사키(長崎)로 피신하였다.

그 후 정국이 안정되자 귀국하여 개화당 ( 開化黨 )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개화당의 과격하고 혁신적인 행동 전개에 대해 신중론을 폈다. 1884년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혁을 단행할 때는 내각의 형조판서로 입각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능주 ( 綾州 )로 유배되었다.

그 뒤 청나라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이긴 일본이 대원군을 재등장시켜 새로운 정권 수립을 꾀하며, 문벌 타파 및 인재 등용과 아울러 정치 죄인의 석방을 요구할 때 함께 석방되었다. 1895년 제3차 김홍집(金弘集)내각의 경무사 ( 警務使 )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 ( 明成皇后 )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침략기운이 노골화되자, 친일정권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항일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에 편승한 일부 전직 고관 및 군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국상이 발표되기 3일 전인 1012, 국왕을 대궐 밖으로 모시어 국모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일으킨 춘생문사건 ( 春生門事件 )에 정동파인사(貞洞派人士)로서 호응, 배후에서 조정했으며, 이와 관련해 상해로 망명하였다.

1896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참장군부협판(參將軍部協辦)에 임명되고, 1898년 중추원 1등의관이 되었으며,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법부협판·의정부찬정을 겸임하였다.

또한, 법부대신 겸임 고등재판소재판장에 임명되고, 궁내부특진관·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독립협회 회원을 비호하였다는 논박을 받았으나 같은 해 귀족원경(貴族院卿)에 임명되었다.

1902년에 특진관으로서 임시서리평리원재판장사무(臨時署理平理院裁判長事務)를 맡았으며, 이듬해 다시 군부대신에 임명되었고, 이어 내장원경사무(內藏院卿事務)를 겸임하였다.

1903년에는 군부대신으로서 임시서리원수부검사국총장사무(臨時署理元帥府檢査局總長事務)를 겸임하였다. 19108월의 국권 상실 이후 일본 정부가 황실·황족에 대한 대우와 친일 인사들에 대한 행상을 실시할 때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尹斗壽(윤두수) 선생의 일화

 

수명연장
유명한 관상가 鄭北窓(정북창)이 윤두수에게 40세밖에 못 살 단명할 팔자이니 天上(천상)의 신선을 만나서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빌라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윤두수는 신선에게 수명연장을 간절히 빌었는데, 그랬더니 신선이 그렇다면 이 비밀을 누설해서 알려 준 정북창의 수명을 줄여서 윤두수의 수명을 연장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는 바람에 윤두수는 장수하고 정북창은 단명하였다 한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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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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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해평 윤씨(海平尹氏)는 남한에 총 5,489가구, 22,75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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