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李(가평이씨)
본관(本貫): 가평(加平)
시조(始祖): 이인보(李仁輔)
유래(由來):
가평 이씨(加平李氏)는 신라(新羅) 때 완산 호장(完山戶長)을 지낸 이인보(李仁輔)를 시조(始祖)로 하고, 그의 8세손 기문(起文)이 조종(朝宗 : 가평의 옛 지명)에 이거(移居)하여 본관(本貫)을 조종(朝宗)으로 삼았다.
그 후 29세손인 춘계(椿桂)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그의 증손 형손(亨孫)이 조선 세조(世祖)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한 공(功)으로 가평군(嘉平君)에 봉해졌으며 지명의 변천으로 조종(朝宗)이 가평(加平)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本貫)을 가평(加平)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러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형손(亨孫)의 8대조(八代祖)로 호장(戶長)을 지낸 진수(珍守)를 시조(始祖)로 기록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다림(李多林)
다림(多林)은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부총관(副摠管)에 이르렀다.
이윤손(李允孫)
?∼1467(세조 13). 조선 전기의 문신. 1453년(단종 1) 경상좌도병마절제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첨지중추원사·호조참의를 거쳐 1455년(세조 1)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58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있던 중 진하사 ( 進賀使 )로 형조참판 송처관 ( 宋處寬 )과 같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중추원부사·한성부윤·경창부윤 겸 강원도도관찰사병마도절제사 등을 지냈다. 1459년 호조참판에 이어 공조참판·형조참판·동지중추원사를 역임하고, 1460년 행상호군을 지냈다. 1461년 평안도관찰사·충청도도절제사를 역임하고, 1467년 중추부지사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이형손(李亨孫)
1418(태종 18) ∼ 1496(연산군 2).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가평(加平). 자는 창백(昌伯). 판도판서(版圖判書) 춘계(椿 肋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평의사사 침( 甚 )이고, 아버지는 다림(多林)이며, 어머니는 지금주사(知錦州事) 송리(宋理)의 딸이다.
1455년(세조 1) 12월 판관으로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원종공신 ( 原從功臣 ) 2등에 녹훈되었다. 1467년 5월 이시애 ( 李施愛 )의 난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 敵愾功臣 ) 2등에 녹훈되고, 전라도절도부사로 전주부윤을 겸하였다. 처음에는 연산군(連山君)에 봉하여졌다가 곧이어 가평군(嘉平君)으로 개봉되었다.
1471년(성종 3) 윤2월 행공주목사를 거쳐, 1477년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전임되었다가 12월에 청주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청주목사로 도임할 때 너무 많은 물건과 수행원들을 거느렸다는 비판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1479년 정월 다시 서용되고, 1483년 10월 다시 가평군으로 봉하여졌으며, 옥구 · 무장 · 석성의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옥구현감 당시 체임된 적이 있으나 이는 그가 현명한 대처를 하지 못하였다기 보다는 그 지역 민심이 나빠서 잘 다스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체임된 이후 ‘ 30년 동안 옥구현에서 수령의 역할을 제대로 한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 는 승정원의 보고는 사실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1490년 윤9월 부총관에 임명되고, 1492년(성종 23) 서얼(庶孼)로써 우림위 ( 羽林衛 )를 설치할 때 그 장(將)이 되었으며, 전라도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는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시호는 평호(平湖)이다.
1418(태종 18) ∼ 1496(연산군 2).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가평(加平). 자는 창백(昌伯). 판도판서(版圖判書) 춘계(椿 肋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평의사사 침( 甚 )이고, 아버지는 다림(多林)이며, 어머니는 지금주사(知錦州事) 송리(宋理)의 딸이다.
1455년(세조 1) 12월 판관으로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원종공신 ( 原從功臣 ) 2등에 녹훈되었다. 1467년 5월 이시애 ( 李施愛 )의 난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 敵愾功臣 ) 2등에 녹훈되고, 전라도절도부사로 전주부윤을 겸하였다. 처음에는 연산군(連山君)에 봉하여졌다가 곧이어 가평군(嘉平君)으로 개봉되었다.
1471년(성종 3) 윤2월 행공주목사를 거쳐, 1477년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전임되었다가 12월에 청주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청주목사로 도임할 때 너무 많은 물건과 수행원들을 거느렸다는 비판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1479년 정월 다시 서용되고, 1483년 10월 다시 가평군으로 봉하여졌으며, 옥구 · 무장 · 석성의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옥구현감 당시 체임된 적이 있으나 이는 그가 현명한 대처를 하지 못하였다기 보다는 그 지역 민심이 나빠서 잘 다스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체임된 이후 ‘ 30년 동안 옥구현에서 수령의 역할을 제대로 한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 ’ 는 승정원의 보고는 사실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1490년 윤9월 부총관에 임명되고, 1492년(성종 23) 서얼(庶孼)로써 우림위 ( 羽林衛 )를 설치할 때 그 장(將)이 되었으며, 전라도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는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시호는 평호(平湖)이다.
이장생(李長生)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이장경(李長卿)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이명백(李命百)
임진왜란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이제태(李齊台)
경종(景宗) 때 학자로 이름이 남.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가평 이씨(加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066가구, 18,6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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