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경주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경주이씨)

 

 

본관(本貫): 경주(慶州)

시조(始祖): 이알평(李謁平)

유래(由來):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신라 건국(新羅建國)의 모체(母體)인 사로(斯盧)6(六部)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을 다스렸던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신라 말에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진골(眞骨) 출신의 이거명(李居明)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우리나라 대다수 이씨(李氏)의 조종(祖宗)으로 알려진 경주 이씨는 대체로 고려 초기(高麗初期)에서부터 훌륭한 인맥(人脈)을 형성하여 벌족(閥族)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조선조에 와서도 수많은 명현(名賢)과 학자를 배출시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지위를 굳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총섬(李寵暹)

소판공 거명의 9세손 총섬(寵暹)이 고려 성종(成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오인유(吳仁裕남궁 원청(南宮元淸이윤관(李允貫) 등과 더불어 오묘(五廟 : 제후의 묘)와 사직(社稷)을 건립하였으며, 국자감(國子監)에 과거제도(科擧制度)를 설립함으로써 면학의 기풍을 고취시켰다.

 

이인정(李仁挺)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충숙왕 때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오른 진( )의 형이며, 제현(齊賢)의 큰아버지이다. 아들은 부( )와 규( )로 각각 사인과 헌납에 이르렀다.

1276(충렬왕 2)에 우정언으로 있으면서 당시 내수(內竪 : 內僚)들이 친종행리(親從行李)의 공으로 허통 ( 許通 )되어 조정의 반열을 어지럽히는 것을 첨의부 ( 僉議府 )의 낭사 ( 郎舍 )들과 더불어 간쟁하였는데, 충렬왕이 노하여 듣지 않고 오히려 일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이 때 100여 인과 공모하여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죽이려 하였다는 익명의 투서 때문에 다루가치에 의하여 구금되었다가, 무고임이 밝혀져 곧 풀려났다.

1278년 사간으로 있을 때에도 능력이나 공로가 없고 오히려 흠이 있는 사람들이 관직에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낭사로서 고신 ( 告身 )에 서명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왕의 노여움을 사 사의대부 ( 司議大夫 ) 백문절 ( 白文節 ) · 김서(金 笭 ), 전서(典書) 최수황 ( 崔守璜 ) 등과 함께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광주판관(廣州判官)을 거쳐 1280(충렬왕 6)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으며, 기거사인 ( 起居舍人 )에까지 올랐다. 성품이 강직하여 첨의부의 낭사로서 고신에 서명할 때에는 반드시 공적과 허물을 따졌으므로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진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검교첨의정승(檢校僉議政丞)으로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진 진은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시문(詩文)에 뛰어나 아들 3형제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이제현(李霽賢)

1287(충렬왕 14) 1367(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학자 · 정치가. 본관은 경주 ( 慶州 ).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 역옹( 饑 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 ( 三韓功臣 ) 금서(金書)의 후예이지만, 아버지 진( )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가문이 비로소 떨치기 시작했는데, 진은 검교시중(檢校侍中)에까지 올랐다.

[생애] 어려서부터 남달리 숙성해, 글을 짓는 데 이미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1301(충렬왕 27)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 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 ( 權溥 )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충선왕 3)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충숙왕 1) 상왕인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 ( 萬卷堂 )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재원(在元) 생애가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 ( 書史 )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 · 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 · 염복(閻復) · 원명선(元明善) · 조맹부(趙孟 琅 )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재원 생애와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에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하는 데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충숙왕 10)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320(충숙왕 7)은 그의 생애를 통해 또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해, 성균좨주(成均祭酒) ·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 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 ( 知貢擧 )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그의 재원 생애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로 인한 정세변화는 고려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뒤이어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입성책동 ( 立省策動 )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또한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고(瀋王暠)와 그 일파의 준동이 격화되었다.

그는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이배된 데에는 그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 · 정당문학 ( 政堂文學 )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과 충혜왕 부자가 중조(重祚)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해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1339년 조적(曹 使 )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해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했는데, 그 동안 역옹패설 饑 翁稗說 을 저술하였다.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 뒤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 ( 李穡 )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공민왕 5) 기철 ( 奇轍 )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는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활동]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해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학자로서의 그는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 · 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 蓬 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 四書集註 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 ( 李穀 ) · 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 · 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 ( 格物致知 )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 또한, ()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편,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 ( 史學 )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 ( 閔漬 )본조편년강목 本朝編年綱目 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 國史 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 ( 白文寶 ) · 이달충 ( 李達衷 )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저술]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 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 이라 한다. 그는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 ” 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고, 경주의 구강서원 ( 龜岡書院 )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 ( 道山書院 )에 제향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익재

익재는 우리나라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나라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이를 널리 유행시켰고, 그의 저서(著書) <익재난고(益齋亂藁)>의 소악부(小樂部)에 칠언절구 한시(漢詩)로 번역하여 실은 17()의 민간가요는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지대(李之帶)

조선조에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다정한 문우(文友)였던 지대(之帶 : 한성판윤을 지냄)가 유명했다.

 

이철견(李鐵堅)

세조(世祖)때 좌리3등공신(佐理三等功臣)으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이을규(李乙奎)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문경(文卿), 호는 호계 ( 虎溪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구산 ( 龜山 )이고, 아버지는 한주(漢柱)이며, 어머니는 조계량(曺繼亮)의 딸이다.

1531(중종 26)에 진사가 되고, 1535년에 문과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형조좌랑을 거쳐 승문원교리에 이르렀다. 1537(중종 30)에 사은사 겸 진하사(謝恩使兼進賀使) 남세웅(南世雄)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것을 비롯하여 모두 3차에 걸친 중국사행을 수행하였다

 

이공린(李公麟)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제현(齊賢)6대손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윤인(尹仁)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고 포부가 원대하였다. 그러나 장인 박팽년 ( 朴彭年 )의 죄에 연좌되어 몇년간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뒤 사면되어 무반의 직을 잠시 가졌다가 천거로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가 되고, 한성부참군을 겸하였다. 이어 흥덕현감 · 함열현감 · 창평현감을 역임하면서 향리를 잘 통솔하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그의 아들 원( )의 죄에 연좌되어 해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에 의하여 풀려났다. 여러 번 자신의 죄가 아닌 일에 연좌되었고, 또 나이가 많아 관직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청주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이원

?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낭옹(浪翁), 호는 재사당(再思堂). 제현(齊賢)7세손이며, 계번(繼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인(尹仁)이고, 아버지는 현령 공린(公麟)이며, 어머니는 증이조판서 박팽년 ( 朴彭年 )의 딸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인이다.

1480(성종 11)에 진사가 되고, 1489(성종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으며 1495(연산군 1)에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하여 젊고 유능한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하였다. 그 뒤 호조좌랑을 거쳐 봉상시에 재직하면서 김종직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줄 것을 제안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 이로 인하여 곽산에 장류(杖流)되었다가 4년만에 다시 나주로 이배되었는데, 1504년 갑자사화로 참형당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특히 행의(行義)로 추앙받았다. 나주의 영강사(榮江祠), 곽산의 월포사(月浦祠)에 제향되었으며, 1506(중종 1)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금강록 金剛錄·재사당집등이 있다.

 

이별(李鼈)

()은 형인 원과 작별하고 과거의 뜻을 단념한 채 평산(平山)으로 내려가 그가 사는 집을 <장육당(藏六堂)>이라 하며 호()를 삼았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의하면, 그는 늘 소를 타고 술을 싣고 다니면서 고을의 노인들과 더불어 낚시질과 사냥을 하였으며, 또한 시()를 읊고 술을 따르면 해가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몰랐다고 한다.

 

이정보

고려조에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경중(敬中)의 손자 정보가 고려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한 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이정암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병이 서해(西海)에 몰려들었을 때, 정암은 원근(遠近)에 격문을 띄워 의병(義兵)을 모아 김덕함·조정견(趙廷堅) 등 의병장의 호응을 받아 연안성(延安城)을 사수하기로 하고, 대장기(大將旗)<분충토적(奮忠討賊)>이라고 쓴 기를 세우고 왜적과 대치한 후 사기가 침체되어 응전할 용기를 상실한 의병들에게 유명한 <독전연설(督戰演設)>을 하고 더 저항할 수 없는 사람은 떠나가라고 하면서 성문(城門)을 열어 주었다.

천여 명이 넘던 의병 중에 생명을 정암에게 맡기겠다는 나머지 2백여 명과 5일 동안에 주야로 접전한 끝에 마침내 적을 물리쳤다.

 

이정형(李廷馨)

1549(명종 4) 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 또는 동각(東閣).

헌납 ( 獻納 )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달존(達尊)이고, 아버지는 사직서영(社稷署令) ()이며,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 김응진(金應辰)의 딸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암()의 아우이다. 정윤희(丁允禧)의 문인이다.

1567(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 해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이 되었다. 1570(선조 3) 형조좌랑 · 전적, 이듬해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 · 형조정랑, 1574년 사간원정언 · 경성판관, 이듬 해 사간원헌납 · 예조정랑을 거쳐 1576년 개성부경력이 되었는데, 전곡(錢穀) · 사송(詞訟)의 처리를 잘해 부민(府民)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578년 하지사서장관(賀至使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장령 · 성균관사성 · 함경도순무어사 · 광주목사(廣州牧使) · 홍문관부수찬 · 의정부검상 · 승정원좌부승지 · 대사성을 거쳐 1589년 형조참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승지로 왕을 호종하였다.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의병을 모아 성거산(聖居山)을 거점으로 왜적과 항전했으며, 장단 · 삭녕 등지에서도 의병을 모집해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3년 장례원판결사가 되고 다음해 고급사(告急使)로 요동(遼東)에 다녀와 홍문관부제학 · 이조참판 · 승문원부제조 · 비변사당상을 역임하고, 1595년 대사헌에 이어 4도도체찰부사(四道都體察副使)가 되었다. 160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1602년 예조참판이 되어 성절사 ( 聖節使 )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북인이 정권을 잡고 정계가 어지럽자 양주 송산 두천리(松山杜川里)로 물러나 대사성 · 호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어도 나가지 않았다. 1606년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다음 해 임지에서 죽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 · 성력(星曆) · 복서 ( 卜筮 ) · 술수(術數)에도 통달했다 한다. 이원익 ( 李元翼 ) · 이호민(李好民) · 이수광(李 邈 光) 등과 가깝게 지냈다. 1617(광해군 9) 춘천의 문암서원 ( 文巖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동각잡기 · 황토기사 · 용사기사 龍蛇記事 · 수춘잡기 壽春雜記 · 지퇴당집 등이 있다.

 

이승상(李升商)

?1413(태종 1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할아버지는 문정공(文靖公) 달충(達衷)이다. 1382(우왕 8) 성균관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그 뒤 시행된 진사과에서도 합격하였다. 특히 성균시에서 방원(芳遠:태종)과 함께 합격하였으므로 그 뒤 태종의 특별한 후대를 받았다.

1400(정종 2)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1402년 좌대언(左代言 : 좌승지)이 되어 태종의 측근에서 왕명의 출납을 맡았다.

1407년 이조판서 남재번(南在潘)과 함께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124월 형조판서가 되었다. 시호는 처음에는 공정(恭靖)이라 하였으나 뒤에 공의(恭懿)로 개시(改諡)되었다.

 

이흥상(李興商)

?1465(세조 1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자연(子衍). 음직으로 행수(行首)에 보직,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에 이르렀다.

1453(단종 1) 계유정난 당시에 의금부진무(義禁府鎭撫)로서 수양대군의 지시를 받고 김종서 ( 金宗瑞 )의 집에 가서, 김종서와 그 아들 승벽(承璧)을 찾아내어 목을 베었다. 이 공으로 정난공신 ( 靖難功臣 ) 3등에 책정되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1454년에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고, 1455년 중추원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양희(襄僖)이다.

 

이개립(李介立)

1546(명종 1) 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대중(大中), 호는 성오대(省吾臺) · 역봉( 饑 峰). 대호군 ( 大護軍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호군 ( 副護軍 ) 선동(善童)이고, 아버지는 어모장군 ( 禦侮將軍 ) ()이며, 어머니는 예천권씨(醴泉權氏)로 공례(公禮)의 딸이다.

김성일 ( 金誠一 )의 문인이다. 1567(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586(선조 19)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퇴하고, 1591년 장현광 ( 張顯光 )과 함께 유일(遺逸 : 학문과 덕행이 높아서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중요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선비)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는데 부족한 식량과 군량의 조달에 공이 컸다. 이러한 공에 의하여 수령을 감당할 인재 30명이 천거된 중에 그도 포함되어 1594년에 자여찰방(自如察訪)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낭천현감(狼川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6년 산은현감(山隱縣監)에 임명되고, 다음해 정유재란 때 체찰사종사관(體察使從事官) 황여일 ( 黃汝一 )의 천거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이 되었으나 병마절도사 김경서 ( 金景瑞 )가 의병을 자기 휘하에 속하게 하지 않은 데에 사감을 품자 고향에 돌아가 오로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조경 ( 趙絅 )이 묘갈명을 지었다.

 

이수일(李守一)

1554(명종 9) 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충주 출신. 주부 ( 主簿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자침(自琛)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난()이며, 어머니는 참봉 우담령(禹聃齡)의 딸이다. 아들은 우의정 완()이다.

1583(선조 16) 무과에 급제, 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1586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이 되었다가 남병사 신각 ( 申恪 )의 막하로 들어갔다. 1590년 선전관이 되고, 다음 해 장기현감으로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분전했으나 예천 · 용궁에서 패전하였다. 다음 해 밀양부사로 승진, 이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되고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 뒤 회령부사에 이어 1597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지역의 중요성을 감안한 도체찰사 이원익 ( 李元翼 )의 요청으로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 ( 杖刑 )을 받고 종군하였다. 1599년 북도방어사가 되었다가 곧 북도병마절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변방을 침범하는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했으며, 다음 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창원에 있는 병영을 진주로 옮기도록 하였다. 1606년 길주목사로 방어사를 겸하고, 다음 해 수원부사에 이어 다시 북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611(광해군 3) 지중추부사로 지훈련포도대장 · 원유제조(園 捧 提調)를 겸하였다.

1612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614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616년 숭정대부에 올랐다. 1624(인조 2) 이괄 ( 李适 )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해 길마재 鞍峴 에서 반란군을 무찔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 ( 振武功臣 ) 2등에 책록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628년 형조판서가 되고, 1631년 남한수어사(南漢守禦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무 ( 忠武 )이다.

 

이완(李浣)

1602(선조 35) 1674(현종 1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징지(澄之), 호는 매죽헌(梅竹軒). 아버지는 인조반정 공신인 수일(守一)이며, 어머니는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귀년(貴年)의 딸이다.

1624(인조 2) 무과에 급제한 뒤 당시 인조반정 공신의 한 사람으로서 군사권을 장악하던 이서 ( 李曙 )의 추천으로 처음 만포첨사(滿浦僉使)가 되었다. 1627년 영유현령, 1629년 상원군수, 이듬해 숙천부사를 거쳐 1631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김자점 ( 金自點 )의 별장 ( 別將 )으로 출전해 정방산성 ( 正方山城 )을 지켰는데, 적을 동선령(洞仙嶺)으로 유인해 복병을 이용해 크게 무찔러 공을 세웠다.

1638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옮기고, 이듬 해 7월 최명길 ( 崔鳴吉 )의 추천으로 내직인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문신들의 반대가 많았다.

1640년 황해병사로 있을 때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주사대장(舟師大將) 임경업 ( 林慶業 )의 부장 ( 副將 )으로 명나라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명장에게 알려 종일토록 서로 싸웠으나 양쪽에 사상자가 나지 않았다 한다.

이듬해 8월에 돌아왔으나 청나라의 지탄을 받아 벼슬에 나가지 못하였다. 16434월 양주목사로 부임했다가 5월 경기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에 임명되어 수도 외곽의 방어에 전력하였다.

그 뒤 공청도병마절도사(公淸道兵馬節度使)로 부임했으나 내상을 당해 칩거하였다. 인조 말년에 다시 어영대장으로 조정에 돌아왔다. 효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650년에 우포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나 형조와의 알력으로 한성우윤(漢城右尹)으로 옮겼다가 다시 호군 ( 護軍 )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한편 한성우윤으로 재직할 당시, 인평대군 ( 麟坪大君 )의 종이 금리(禁吏)를 구타한 사건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효종은 그 해 8월 오히려 어영대장으로 기용하고 12월에는 김자점의 모반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오히려 포도대장을 겸하게 하였다.

효종은 인조 때 두 차례에 걸친 호란의 후유증을 수습하고 대청강경책을 표방하면서 북벌을 위한 군비확충을 추진하던 때이므로 그를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의 대장으로 임명한 것 같다.

이에 어영군의 분번숙위제(分番宿衛制)를 확립하고 보인체제(保人體制)를 확립해 어영청이 군영의 체모를 갖추게 했으며, 안산(安山) 덕물도(德勿島)를 개간해 둔전을 두고 강화도의 문호 방비에 진력하였다. 이듬해 11월 병조참판에 승진하였다.

1653(효종 4) 11월 종래 훈척(勳戚)으로만 임명되던 훈련대장이 되어 현종 때까지 근 16년 동안 다른 자리로 옮기면서도 훈련대장만은 겸하였다.

, 이듬해 7월에는 한성판윤, 1654년에는 공조판서로 승진해 한 때 천안군수 서변(徐 豆 )의 무고로 모역죄를 뒤집어쓸 뻔했으나, 그 해 7월 형조판서로 옮겨 앉는 등 판윤 · 판서 등의 문관직에 있으면서도 대개 효종대는 훈련대장직을 겸했던 것 같다. 16594월 효종이 죽었을 때에도 한성판윤이면서 훈련대장으로 도감병을 동원해 궁성을 호위하였다.

또한, 효종의 북벌계획에 깊이 관여해 신무기 제조, 성곽 개수 및 신축 등으로 전쟁에 필요한 여러 대책을 강구하고 특히 포대(布袋) 사용을 주장해 시행하도록 하였다.

즉 당시 효종은 우리 군사들이 투구와 갑주가 없어 갑자기 적을 만나면 시석(矢石)을 막기 어려우므로 목순(木楯 : 나무로 만든 방패)을 쓰자고 제안하였다. 이 때 그는 목순은 가지고 다니기가 어려우니, 차라리 군사들이 큰 포대를 가지고 다니면서 전쟁이 일어나면 여기에다 흙을 담아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주장한 것이다.

현종 때에는 군비 축소를 단행해 북벌 의지가 좌절되었으나, 판윤, 공조 · 형조의 판서로 중용되면서 훈련대장만은 겸했으며 때로 포도대장까지도 겸하였다.

1666(현종 7) 8월에는 판의금(判義禁)에 올랐고, 그 해 12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위중하고 또한 병조와 훈련도감을 겸할 수 없다고 사양하며 나가지 않았다.

당시 사관은 이러한 사실을 사존사영(辭尊謝榮)하기란 옛 사람도 어려운데 무부(武夫)로서 능히 판단하였다. 권력을 탐하고 자격이 없으면서도 좋은 자리로 나가려고 하는 문사(文士)들을 어떻게 보았겠는가? ” 라고 기록하였다.

그 뒤에도 두 차례나 병조판서에 임명되었지만 끝내 나가지 않고 훈련대장으로만 있었다. 1667년 정월 급료병으로 편제된 훈련도감을 없애고 어영군과 같이 호() · ()로 된 군영을 신설하려는 논의가 있자, 그가 완강히 반대해 훈련별대(訓練別隊 : 금위영의 전신)의 설치에 그치고 훈련도감의 폐지는 면할 수 있었다.

또한 정부 일각에서 강화도의 수군을 폐지하자는 의논이 있을 때에도 실계(失計)라고 해 끝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 해 3월에는 왕이 온양에 가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도성을 지켰으나 성기(省記 : 궁성을 경비하는 장수에게 교부하는 군호) 문제로 병조와 다투어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다시 포도대장으로 복귀하고, 뒤에 판윤 · 형조판서 · 병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위중하다고 번번이 벼슬을 사양하였다. 16715월에 수어사 ( 守禦使 ), 16745월에는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그 해 6월 군역 변통에 대한 유소(遺疏)를 남기고 죽었다.

아버지 수일과 마찬가지로 무장으로서 입신해 효종 및 송시열 ( 宋時烈 ) 등과 함께 북벌에 집착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성품은 최명길의 말과 같이 강직하고 깨끗하며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어 매사에 시시비비가 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뜻이 옳다고 생각할 때에는 국왕 앞에 병부를 풀어놓고 대들었으며 공사가 분명하였다. 반면, 매사에 신중한 일면도 있었으니 군교(軍校)나 서리들이 자기에게 품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동료와 같이 와서 의논하게 하여 남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 했다 한다. 1685(숙종 11) 8월 정익(貞翼)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몽량(李夢亮)

1499(연산군 5)1564(명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언명(彦明). 숭수(崇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동판관 성무(成茂)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예신(禮臣)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다.

1522(중종 17) 생원시·진사시에 급제하고, 1528년 형 몽윤(夢尹)과 함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승정원주서·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1539년 국왕의 특명으로 경상도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그 뒤 명종이 즉위하자 동부승지로 발탁되면서 위사공신 ( 衛社功臣 ) 3등으로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고, 이어서 대사간으로서 학문에 입각한 도학정치를 제창하였다. 1547(명종 2)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도민의 진휼을 위하여 진력하였고, 이어서 예조참의·병조참지·대사간을 역임하고 1550년 도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조식(曺植) 등 재야사림을 천거하였고, 이어서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 뒤 대사간·병조참판·경기감사·예조참판·도승지를 역임하고, 1560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이어서 대사헌·형조판서를 지냈는데, 형조판서로서 형률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한 때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서용되어 동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을 거쳐 우참판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유하였고 형제 사이에 우의가 돈독하였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이항복(李恒福)

1556(명종 11) 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 · 백사(白沙) · 동강(東岡). 고려의 대학자 제현(齊賢)의 후손이며, 성무(成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신 ( 禮臣 )이고, 아버지는 참찬 몽량(夢亮)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全州崔氏)로 결성현감 윤()의 딸이다.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어 이항복이나 백사보다는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 이덕형 ( 李德馨 )과의 기지와 작희(作戱)에 얽힌 많은 이야기로 더욱 잘 알려진 인물이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소년시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열중했다 한다. 1571(선조 4) 어머니를 여의고, 삼년상을 마친 뒤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써 명성이 높았다.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인 권율 ( 權慄 )의 사위가 되었다.

1575년 진사 초시에 오르고 1580(선조 1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 해 예문관검열이 되었을 때 마침 선조의 강목 綱目 강연(講筵)이 있었는데, 고문을 천거하라는 왕명에 따라 이이(李珥)에 의해 이덕형 등과 함께 5명이 천거되어 한림에 오르고, 내장고(內藏庫)강목 한 질씩이 하사되고 옥당에 들어갔다. 1583년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그 뒤 옥당의 정자 · 저작 · 박사, 예문관봉교 · 성균관 전적과 사간원의 정언 겸 지제교 · 수찬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예조정랑 때 발생한 역모사건에 문사낭청 ( 問事郎廳 )으로 친국에 참여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신료 사이에 비난이나 분쟁이 있을 때 삼사에 출입해 이를 중재하고 시비를 공평히 판단, 무마해 덕을 입은 사람도 많았다.

한편, 파당을 조성하는 대사간 이발 ( 李潑 )을 공박하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했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게 한 적도 있었다. 그 뒤 응교 · 검상 · 사인 · 전한 · 직제학 · 우승지를 거쳐 1590년 호조참의가 되었고, 정여립 ( 鄭汝立 )의 모반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 ( 平難功臣 ) 3등에 녹훈되었다.

이듬 해 정철 ( 鄭澈 )의 논죄가 있자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찾아가 담화를 계속해 정철사건의 처리를 태만히 했다는 공격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고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 때 대간의 공격이 심했으나 대사헌 이원익 ( 李元翼 )의 적극적인 비호로 진정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무사히 호위하고, 또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그 동안 이조참판으로 오성군에 봉해졌고, 이어 형조판서로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다. 곧이어 대사헌 겸 홍문관제학 · 지경연사 · 지춘추관사 · 동지성균관사 · 세자좌부빈객 · 병조판서 겸 주사대장(舟師大將) ·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 예문관대제학 ·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의정부우참찬에 승진되었다.

이 동안 이덕형과 함께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했고 윤승훈 ( 尹承勳 )을 해로로 호남지방에 보내 근왕병을 일으켰다.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왜병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며 병부상서 석성(石星)이 황응양(黃應暘)을 조사차 보냈다. 이에 그가 일본이 보내온 문서를 내보여 의혹이 풀려 마침내 구원병이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만주 주둔군 조승훈(祖承訓) · 사유(史儒)3,000 병력이 왔으나 패전하자, 다시 중국에 사신을 보내 대병력으로 구원해줄 것을 청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이여송(李如松)의 대병력이 들어와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서울을 탈환, 환도하였다. 다음 해 선조가 세자를 남쪽에 보내 분조 ( 分朝 )를 설치해 경상도와 전라도의 군무를 맡아보게 했을 때 대사마(大司馬)로서 세자를 받들어 보필하였다.

1594년 봄 전라도에서 송유진 ( 宋儒眞 )의 반란이 일어나자 여러 관료들이 세자와 함께 환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반란군 진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상소해 이를 중단시키고 반란을 곧 진압하였다.

그는 병조판서 · 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며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楊邦亨)과 양호(楊鎬) 등도 존경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던 능란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1598년 우의정 겸 영경연사 · 감춘추관사 ( 監春秋館事 )에 올랐다. 이 때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가 동료 사신인 경략(經略) 양호를 무고한 사건이 발생하자, 우의정으로 진주변무사(陳奏辨誣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 ( 李廷龜 )와 함께 명나라에 가 소임을 마치고 돌아와 토지와 재물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 뒤 문홍도(文弘道)가 휴전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성룡 ( 柳成龍 )을 탄핵하자, 자신도 함께 휴전에 동조했다고 자진해 사의를 표명하고 병을 구실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조정에서 도원수 겸 체찰사에 임명하자, 남도 각지를 돌며 민심을 선무, 수습하고 안민방해책(安民防海策) 16조를 지어 올리기도 하였다.

1600년 영의정 겸 영경연 · 홍문관 · 예문관 · 춘추관사,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고 다음 해 호종1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다. 1602년 정인홍 ( 鄭仁弘 ) · 문경호(文景虎) 등이 최영경 ( 崔永慶 )을 모함, 살해하려 한 장본인이 성혼 ( 成渾 )이라고 발설하자 삼사에서 성혼을 공격하였다. 이에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자진사퇴하였다.

1608년 다시 좌의정 겸 도체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이 해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해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 ( 臨海君 )의 살해 음모에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그 뒤 성균관 유생들이 이언적 ( 李彦迪 )과 이황 ( 李滉 )의 문묘배향을 반대한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구금되어 권당(捲堂 : 동맹휴학)하는 사태가 생기자, 그가 겨우 광해군을 설득, 무마해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정인홍 일당의 원한과 공격을 더욱 받게 되었다.

곧이어 북인 세력이 선조의 장인 김제남 ( 金悌男 ) 일가의 멸문,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 ( 永昌大君 )의 살해 등 흉계를 자행하자 그의 항쟁 또한 극렬해 원망의 표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1613(광해군 5) 인재 천거를 잘못했다는 구실로 이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나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다. 이 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 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을 옮기게 하였다.

1617년 인목대비 김씨(仁穆大妃金氏)가 서궁(西宮 : 경운궁. 곧 덕수궁)에 유폐되고, 이어 폐위해 평민으로 만들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은 해에 관작이 회복되고 이 해 8월 고향 포천에 예장되었다.

죽은 뒤 포천과 북청에 사당을 세워 제향했으며 1659(효종 10)에는 화산서원 ( 花山書院 )이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746(영조 22)에는 승지 이종적 ( 李宗迪 )을 보내 영당(影堂)에 제사를 올리고 후손을 관직에 등용시키는 은전이 있었다. 1832(순조 32)에는 임진왜란 발발 네 번째 회갑을 맞아 제향이 베풀어졌다. 1838(헌종 4)에는 우의정 이지연 ( 李止淵 )의 요청으로 봉사손(奉祀孫)의 관리 등용이 결정되기도 하였다.

이정구는 그를 평하기를 그가 관작에 있기 40,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라면서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1622년에 간행된 사례훈몽 四禮訓蒙 1권과 주소계의 奏疏啓議 2, 노사영언 魯史零言 15권과 시문 등이 있으며, 이순신 ( 李舜臣 )충렬묘비문을 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세필(李世弼)

1642(인조 20) 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군보(君輔), 호는 구천(龜川).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다.

1674(현종 15) 2차 복상 문제로 송시열 (宋時烈)이 삭직당하자, 그를 적극 옹호하였다. 그는 평소에 송시열을 모르는 사이였지만, 분개하면서 선비들을 설득해 상소, 송시열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영광에 유배되었다.

그는 적소에 5년 동안이나 있으면서도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퇴계집 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1678(숙종 4) 귀양에서 풀려나오자 학행으로 천거되어 1680년 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동몽교관이 되었고, 1684년 형조좌랑을 거쳐 용안현감이 되었다가 진위령을 지내고 삭녕군수로 부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이(李珥) · 성혼 ( 成渾 )을 문묘로부터 출향(黜享)하려 하자 관직을 버리고 진위(振威)로 돌아왔다. 생활이 매우 곤궁했으나, 개의하지 않고 날마다 대학 · 중용 을 외우며 격물궁리(格物窮理) ’ 공부에 전심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자 다시 김제군수가 되고, 이어 사복시정 · 장악원정을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 · 형조참판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17년 상신 이이명(李 蓬 命)이 독대(獨對)를 전횡하자 상소해 그 잘못을 극론하였다.

그는 고향에 돌아온 뒤부터는 성리학에 전심했는데, 그 중에서도 대학 을 가장 깊이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예학에 힘을 쏟아 중국과 우리 나라의 고금 예설을 두루 연구하였다.

저술로는 경설을 논한 것과 예에 관하여 논답한 것 등 20여 권이 있다. 또한 악원고사 樂院故事 1책이 있는데, 이는 묘악(廟樂)의 전고(典故)를 설명하고, 악장 ( 樂章 )에 관한 여러 사람의 논의를 수집해 엮은 것이다.

1722(경종 2)에 아들인 호조판서 태좌(台佐)의 추은 (推恩)에 의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의정부좌찬성이 내려졌다. 영광의 백산서원 ( 柏山書院 )과 김제의 용암서원 ( 龍巖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광좌(李光佐)

1674(현종 15) 1740(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이다. 자는 상보(尙輔)이다. 호는 운곡(雲谷)이다. 항복(恒福)의 현손이다. 성남(星男)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시현(時顯)이다. 아버지는 장령 ( 掌令 ) 세구(世龜)이며, 어머니는 박장원(朴長遠)의 딸이다.

1694(숙종 2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1697년 부수찬이 되었다. 1703년 수찬 · 부교리 · 교리를 거쳐 사헌부헌납 ·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708년에는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이조참의가 되었다. 1712년 부제학 ·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다음 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715년에는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숙종이 소론을 배척해 윤선거 ( 尹宣擧 )의 문집을 훼판(毁板)하는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리자 이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1718년에는 예조참판에 등용되었다.

1721(경종 1) 호조참판을 거쳐 사직 ( 司直 )에 있으면서 왕세제인 연잉군 금(延 艀 君昑 : 뒤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적극 반대하여 경종이 이를 취소하게 하는 등 경종 보호에 명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1721년과 이듬 해에 각각 김일경 ( 金一鏡 ) 등의 소()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사건이 벌어진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이로써 노론이 제거되고 소론이 정권을 잡자 예조판서를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듬 해 좌부빈객 ( 左副賓客 )을 역임하고, 병조판서로 원접사 ( 遠接使 )가 되었다.

1723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725(영조 1)에는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노론의 등장으로 파직당하고 만다. 1728년에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다시 등장하자 영의정에 올랐다. 이 때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이 되어 경종실록 · 숙종실록 보유편의 편찬을 맡았다.

1728년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이 일어나자 노론측에서 김일경의 잔당이 난을 일으킨 것이라고 규탄했지만 영조는 끝내 소론정권으로 난을 평정하였다. 이 난이 평정된 뒤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 1등에 봉해졌다. 1729년에 벼슬을 그만두었다가 영중추부사로 복직하였다.

1730년에는 소론의 거두로서 영조에게 탕평책을 소하여 당쟁의 폐습을 막도록 건의했다. 이 때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노론 민진원 ( 閔鎭遠 )과 제휴하여, 노론과 소론의 연립정권을 세웠다. 이로써 재임 기간에는 비교적 격심한 당쟁이 없도록 하는 데 힘썼다. 1733년에는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1737년에는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740년 영의정으로 재직하던 중 박동준(朴東俊) 등이 중심이 되어 삼사의 합계(合啓)로 호역(護逆)한 죄를 들어 탄핵을 해오자 울분 끝에 단식하다가 죽었다. 1755년 나주벽서사건으로 소론의 준소계열이 무너질 때 관직이 추탈되었다. 글씨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종성(李宗城)

1692(숙종 18) 1759(영조 3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자고(子固), 호는 오천(梧川). 항복(恒福)5세손이며, 시술(時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필(世弼)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태좌(台佐)이며, 어머니는 홍득우 ( 洪得禹 )의 딸이다.

1711(숙종 37) 진사가 되고, 1727(영조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3일 만에 예문관설서가 되었다. 이듬 해 경연 ( 經筵 )의 전경 ( 典經 )으로 시독관 박문수 ( 朴文秀 )와 함께 붕당 200년의 폐를 논하였다. 그 해 경상도암행어사가 되어 민폐를 일소했으며, 이인좌 ( 李麟佐 )의 출가한 자매가 문경에 갇혀 있음을 보고 부당함을 상소해 석방하게 하였다.

그 뒤 부수찬 · 헌납 · 수찬 · 교리 등을 거쳐 1729년 불법 수령 적발의 사명을 띠고 다시 영남어사로 파견되었고, 함경남도에 이어 북도안집어사(北道按集御史)로 다녀와 응교가 되었다. 1731년 관서어사로 파견되어 양덕현감 남윤관(南胤寬)을 파직시키고, 개천군수 홍태평(洪泰平), 맹산현감 이희하(李喜夏), 황주목사 이성제(李誠 恕 )에게 포상할 것을 상소하였다.

1733년 승지 · 대사간 ·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고, 이듬 해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양역 ( 良役 )의 폐를 상소하였다. 1735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어 화폐 사용의 편리함을 논하고, 이듬 해 탕평책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 ·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1738년 이조참판, 1741년 부사직, 1742년 충청도관찰사, 1744년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 예조판서 · 형조판서 · 대사헌 · 개성부유수, 1749년 지돈녕부사 ( 知敦寧府事 ) · 우빈객 ( 右賓客 ), 1752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 해 세자의 처벌에 적극적이던 김상로 ( 金尙魯 ) 등의 간계로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753년 판중추부사을 거쳐 1757년 내의원봉상시도제조(內醫院奉常寺都提調) 때 인원대비(仁元大妃 : 숙종계비 김씨)의 상을 당해 의례의구조(疑禮儀九條)와 종묘 혼전 ( 魂殿 )의 예의칠조를 올려 이를 시행하게 하였다.

1758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잘 보살폈다. 장조 ( 莊祖 )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오천집 이 있다. 시호는 효강(孝剛), 뒤에 문충(文忠)으로 개시(改諡)되었다.

 

이유원(李裕元)

1814(순조 14) 1888(고종 2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 · 묵농(默農). 이조판서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1841(헌종 7) 정시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 · 규장각대교를 거쳐 1845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 ·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고종 초에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1865(고종 2)에 수원유수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해 말 다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어 대전회통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영의정이 되었고, 영중추부사로 서임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반목, 대립하였고, 세자책봉문제의 이면에서 일본과 결탁, 청나라 정부에 작용하였으며, 1875년 주청사 ( 奏請使 )의 정사로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李鴻章)을 방문, 회견하고 세자책봉을 공작하였다.

1879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으로부터 영국 · 프랑스 · 독일 · 미국과 통상수호하여 일본을 견제, 러시아를 방지하라는 요지의 서한을 받았다. 1880년 치사하여 봉조하가 되었으나 1881년 그의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申 糖 )의 강력한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학문에도 능하여 임하필기 林下筆記 · 가오고략 嘉梧藁略 · 귤산문고 를 남겼으며, 예서에 능하였다.

 

이규(李揆)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무신. 충선왕 때 대호군을 거쳐 1324(충숙왕 11) 우대언에 등용되고, 다음해 충숙왕의 비() 조국장공주(曺國長公主)가 용산행궁(龍山行宮)에서 죽자 원나라에 가서 공주의 상을 알렸다.

1327년 밀직부사로서 충숙왕이 13211325년까지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충성을 다하여 충숙왕을 섬긴 공으로 2등공신이 되고, 다음해 원나라에 가서 연호를 고친 것을 축하하였다. 1330(충혜왕 즉위년) 첨의참리(僉議參理)에 올랐다.

1341(충혜왕 복위 2) 충혜왕으로 다시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라는 충숙왕의 유명에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충혜왕의 복위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346(충목왕 2) 충혜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이종준(李宗準)

? 1498(연산군 4). 조선 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 弁 齋) · 용헌( 弁 軒) · 부휴자(浮休子) · 상우당(尙友堂) · 태정일민(太庭逸民) · 장육거사(藏六居士). 안동 출신.

만실(蔓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승직(繩直)이고, 아버지는 시민(時敏)이며, 어머니는 현감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홍준(弘準)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인이다.

1485(성종 16) 별시문과에 13인으로 급제하였고, 의성현령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지도 를 만들었다. 1493년에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서장관 ( 書狀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그는 풍류로 명성이 있어 일본호송관 또는 북평사(北評事)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1498(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다가,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 ( 李承健 )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 : 헐뜯고 농간함)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마침내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 국문 도중 죽었다. 홍귀달 ( 洪貴達 )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부제학으로 추증되었고, 안동의 경광서원 ( 鏡光書院 ) · 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용재유고 가 있다. · · 화에 능하였고, 그림은 매() · ()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유작은 없다. 현재 장식화풍으로 그려진 송학도 松鶴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점이 그의 전칭작품으로 전하고 있다.

 

이현직(李顯稷)

1797(정조 21) ?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백형(伯衡). 총관 ( 摠管 ) ()의 아들이며, 경상좌수사 학영(鶴榮)의 아버지이다.

1846(헌종 12) 경상좌도수군절도사 ·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1854(철종 5) 삼도수군통제사 · 함경북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1865(고종 2) 총융사가 되었고, 이듬해 어영대장과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경복궁 중건을 감독하였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뒤 전국에 암행어사를 보내 주로 변방 방비를 사찰하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통제사들의 죄가 드러나 중신인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특별히 임명하였다.

그러나 1869년 호포전(戶布錢)을 걷기 위하여 작성한 호적에 향리들의 부정이 있어 일어난 고성민란으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형조판서 · 판의금부사를 거쳤고, 신미양요가 거의 끝나갈 때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이유승(李裕承)

1835(헌종 1)?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경선(景先). 영의정 항복(恒福)9대손으로 계선(啓善)의 아들이며, 부통령 시영(始榮)의 아버지이다. 1864(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예문관검열·승정원주서를 거쳐 1866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

다음해에는 조만화(趙晩和)를 대신해 접위관(接慰官)이 되어 일본의 사신을 접대했고, 곧이어 1868년에는 평안남도암행어사가 되어 민정을 규찰하였다. 1869년 상호도감 ( 上號都監 )에서 도제조 이하를 시상할 때 우통례 ( 右通禮 )로 참가해 가자(加資)되었으며, 이듬해 승지를 지냈다.

그 뒤 1878년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881년 좌부승지로서 좌승지 박정양 ( 朴定陽 ) 등과 함께 고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려던 이재선(李載先)을 제주도로 유배보내는 데 반대하고 극형을 주장하는 계()를 올렸다.

1883년 이조참판, 1887년 시강원 겸 보덕을 지내고 1888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889년에는 영조대왕옥책문(英祖大王玉冊文) 작성시 서사관(書寫官)으로 참여하였다. 이듬해 대왕대비가 사망하자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예조판서에 임명되어 국장을 수행하다가 전례(典禮)의 절차에 대한 착오로 파직되었으나 곧 왕명에 의해 연임되었다.

다시 대호군으로서 중국의 사신을 호송하는 반송사(伴送使)를 맡았고, 이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91년 한성부판윤에 재임명되고, 다음 해에는 선조대왕옥책문(宣祖大王玉冊文)의 서사관이 되었다. 1883년 공조판서를 거쳐 1884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 해 국정을 개혁하기 위해 교정청을 설치했을 때 대호군으로 어윤중 ( 魚允中 ) 등과 함께 교정청당상에 임명되고, 곧 이조판서·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으로 칙임관 ( 勅任官 ) 4등에 서임되었고, 1898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어 칙임관 2등이 주어졌다.

이듬해 장례원경(掌禮院卿)에 보직되어 왕실의 의례 ( 儀禮 )와 관련해 여러 차례 상주하였다. 다시 궁내부특진관이 되었으며, 1900년에는 창덕궁선원전제1실상량문(昌德宮璿源殿第一室上樑文)의 서사관으로도 활약하였다.

1904년 태의원경(太醫院卿)을 지내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조약 반대의 소를 올려 매국노 박제순 ( 朴齊純 )이 의정서리(議政署理)가 되는 것은 불가(不可)하며, 조약을 배척해야만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10년 정헌(靖憲)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가 다시 효정 ( 孝貞 )으로 시호가 고쳐졌다.

 

이희수(李喜秀)

1836(헌종 2) 1909(순종 3). 조선 말기의 서화가.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지삼(芝三), 호는 소남(少南) · 경지당(景止堂). 상원 ( 祥原 )에서 살았다고 한다.

산수화와 난초 · 대나무 그림에 모두 능하였고 7세에 벌써 전() · () · () · ()을 모두 잘 썼으며, 칠흑 같은 밤에 글을 베껴 써도 모두 한결같이 규격에 맞았다고 한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문하에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 또는 서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성격이 단정하고 곧았으며, 강하고 기이한 화풍을 보였다.

유작 중 남종화풍에 토대를 두고 있는 설경산수도 雪景山水圖 (개인 소장)는 상단에 적힌 제시(題詩)와 함께 독특한 느낌을 주며, 눈덮인 강 언덕과 침엽수의 표현에서도 거친 독특한 필치를 보여준다.

 

이주영(李胄榮)

1837(헌종 3)1917.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순경(舜敬). 군수 유헌(裕憲)의 아들로, 어머니는 풍양조씨(豊壤趙氏)이다. 1874(고종 11) 5월 증광시에 급제한 뒤 부교리·부수찬을 거쳐, 그 해 8월 의정부 겸 문공사관(議政府兼文公事官)에 이르렀다.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1877년 대사성·병조참의로 빠르게 승진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 후 은거하였다. 1890년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94년 동학혁명 후 일본의 내정개혁 강요가 있자, 고종은 기강을 세우고 대경장(大更張)을 하겠다면서 그를 대사헌으로 임명하였다.

그 때 교정청당상도 겸임하였다. 광무연간에 장례원귀족사장(掌禮院貴族司長시강원첨사·궁내부특진관·태의원경(太醫院卿)등 궁내부 아문의 장을 역임하였다. 1910년 조선귀족령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이하영(李夏榮)

1858(철종 9) 1929.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치행(致行), 호는 금산(琴山). 1886(고종 23) 외아문주사(外衙門主事), 이듬해 사헌부감찰 · 전환국위원(典 珤 局委員)이 되었다.

이 해 9월 박정양 ( 朴定陽 )공사의 일행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겸임주차미국공사관 서기관이 되고, 다시 주차미국서리전권대신으로 미국에 주재하였다. 1889년 귀국할 때는 우리나라 철도건설에 관심을 보인 미국정부로부터 철도의 모형을 얻어오기도 하였다.

이어 기기국사사(機器局司事), 웅천 · 흥덕의 현감, 외아문참의 등을 거쳐 1895년 궁내부회계원장(宮內府會計院長)이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관찰사가 되었다가 주차일본국특명전권공사, 1897년 주차일본국특명전권대사로 일본에 주재중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그 뒤 중추원부의장 · 귀족원경(貴族院卿) · 중추원의장 등을 역임하고, 1899년에는 의정부찬정 · 주차일본국특명전권공사 겸 의정부찬정이 되었다. 이듬해 훈2등태극장(勳二等太極章)을 받았다.

1904년에 외부대신이 되었는데, 재임기간 동안 일본에 충청도 · 황해도 · 평안도의 어로권 부여, 일본의 황무지개척권요구, 1차한일협약, 메가다(目賀田種太郎)의 재정고문 취임, 일본헌병대의 경성치안권 장악, 마루야마(丸山重俊)의 경무고문 취임, 일본에 통신원 이양, 연해하천의 항해무역권 부여 등의 큰 사건들이 벌어졌고, 그때마다 각종 이권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1905년에는 훈18괘장(勳一等八卦章)을 받고 법부대신 · 형법교정총재가 되어 을사조약에는 반대의사를 표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계속 친일의 입장에 섰다. 1907년 중추원고문이 되었고, 한국병합 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을 지냈다.

 

이시영(李始榮)

1869(고종 6)1953. 독립운동가·정치가.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서울 출신. 이조판서 유승(裕承)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이다. 첫부인은 영의정 김홍집 ( 金弘集 )의 딸이며, 둘째부인은 반남박씨이다.

1885(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홍문관교리·승정원부승지·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 ( 李會榮 이상설 ( 李相卨 )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1906년 재차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뒤 1907년 중추원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안창호 ( 安昌浩 전덕기 ( 全德基 이동녕 ( 李東寧 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 ( 新民會 )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피탈 후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의거하여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말 서간도(西間島)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로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였다.

1911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 ( 耕學社 )와 신흥강습소 ( 新興講習所 ) 설립을 주도하였다.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 ( 李相龍 ),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哈泥河)에 토지를 매입하여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 ( 新興武官學校 )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이전하였고, 합니하의 교사는 분교역할을 하는 등 1910년대 서간도지역 독립군양성의 총본산이 되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 때까지 재만항일독립군의 핵심 간부로 양성된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1920년대 국외독립전쟁의 골간으로 성장하였다.

19139월 북경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정부와 한·중연합전선의 결성을 도모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사망으로 중단되기도 하였다. 19191월 고종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북경에서 이동녕· 조성환 ( 曺成煥 이광 ( 李光 이회영 등과 국내 3·1운동에 호응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상해(上海)로부터 북경에 온 여운형 ( 呂運亨 현순 ( 玄楯 )과 논의하고, 이회영·이동녕·이광 등과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초대법무총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9월 재무총장을 거쳐 1926년 무렵까지 임시정부국무위원으로 재임하였다.

그 뒤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 ( 韓國獨立黨 ) 창당에 참여, 감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314월 윤봉길 ( 尹奉吉 )의거 때에는 미리 항저우(抗州)로 가서 임시정부요인들의 피신처를 마련하였다.

1933년 중엽 자싱(嘉興)에서 김구 ( 金九 이동녕· 송병조 ( 宋秉祚 차리석(車利錫조완구 ( 趙琬九 김붕준 ( 金朋濬 ) 등과 함께 임시정부 활동을 재건하고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1934감시만어 感時漫語를 저술하여 한국사의 주체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193510월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지원정당이 한국국민당 ( 韓國國民黨 )을 창당하여 감사를 맡았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재무부장·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 임정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5815일 조국광복과 함께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1946년 봄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大韓獨立促成國民會 ) 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종교 ( 大倧敎 )활동에 진력하여 사교교질(司敎敎秩원로원장·사교(司敎도형(道兄) 등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또한,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47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여,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2회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한편, 1947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19487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5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정부를 떠났다.

이어 195285일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 ( 民主國民黨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국민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다가 죽었다. 장례는 9일간의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서울 정릉묘소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 현 묘소로 이장하였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이상설(李相卨)

1870(고종 7) 1917.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충청북도 진천 출신. 행우(行雨)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다. 7세 때 용우(龍雨)에게 입양되었다.

이범세 ( 李範世 ) · 여규형 ( 呂圭亨 ) · 이시영 ( 李始榮 ) · 이회영 ( 李會榮 )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또 헐버트(Hulbert,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 · 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 물리 · 화학 · 경제학 ·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1894(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 煉 書監 煉 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 · 한성사범학교교관 · 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19046월 박승봉 ( 朴勝鳳 )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폭로하는 일인요구전국황무지개척권불가소 日人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 를 올렸다. 고종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본의 요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이 해 8월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1905년 학부협판(學部協辦)과 법부협판을 역임했으며, 11월 초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에 발탁되었다. 190511월 이완용 ( 李完用 ) · 박제순 ( 朴齊純 ) 5(五賊)의 찬성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당시, 그는 대신회의의 실무 책임자인 참찬이었지만 일본의 제지로 참석하지 못하였다. 이 조약이 고종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상소를 올려 고종은 사직 ( 社稷 )을 위해 죽을 결심으로 5적을 처단하고, 5조약을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조약체결 직후 조병세 ( 趙秉世 ) · 민영환 ( 閔泳煥 ) · 심상훈 ( 沈相薰 ) 등 원로대신들을 소수(疏首)로 백관의 반대 상소와 복합항쟁(伏閤抗爭)을 벌이도록 주선하였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봄 이동녕 ( 李東寧 ) · 정순만 ( 鄭淳萬 ) 등과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8월경 그 곳에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 ( 瑞甸書塾 )을 건립하고 숙장(塾長)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동녕 등과 역사 · 지리 · 수학 · 국제법 · 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6, 7월경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 李儁 ) · 이위종 ( 李瑋鍾 )과 함께 고종의 특사로 참석하였다. 여기서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고,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협상의 성격을 띤 회의였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해 6월 대한제국의 주장을 밝힌 공고사 控告詞 를 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냈다. , 헐버트와 이위종 · 송헌주 ( 宋憲澍 ) · 윤병구 ( 尹炳球 )를 대동하고 영국 · 프랑스 · 독일 · 미국 · 러시아 등지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 평화의 관건임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한국의 영세 중립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그 해 8월 본국 정부에서 재판에 회부되어 궐석 판결로 사형이 선고되기도 하였다.

1908년부터 미국에 1년여 동안 머무르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지원 호소를 계속하였다. 또한 각지의 교포를 설득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 또한, 19088월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승만(李承晩)과 연해주(沿海州) 대표로 참석하였다.

19094월 국민회 ( 國民會 ) 총회장 최정익(崔正益) 등과 국민회의 제1회 이사회를 열고 구체적 사업을 결정한 다음, 정재관 ( 鄭在寬 )과 연해주로 떠났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승희 ( 李承熙 ) · 김학만(金學萬) · 정순만 등과 항카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에 땅 45()을 사서 100여 가구의 한국 교포를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해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19106월 유인석 ( 柳麟錫 ) · 이범윤 ( 李範允 ) · 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해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유인석과 상의해 이 해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본국에 보내어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소를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였다.

8월에 국권이 상실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족을 규합,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 ( 聲明會 )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9월 일제와 교섭한 러시아에 의해 연해주 니콜리스크(雙城子)로 추방되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1911년 김학만 · 이종호 ( 李鍾浩 ) · 정재관 · 최재형 ( 崔在亨 ) 등과 권업회 ( 勸業會 )를 조직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권업신문 勸業新聞 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 1913년 이동휘 · 김립(金立) · 이종호 · 장기영 ( 張基永 )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1914년 이동휘 · 이동녕 · 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다. 19153월경 상해 영조계(英租界)에서 박은식 ( 朴殷植 ) · 신규식 ( 申圭植 ) · 조성환 ( 曺成煥 ) · 유동열 ( 柳東說 ) · 유홍렬(劉鴻烈) · 이춘일(李春日) 등의 민족운동자들이 화합해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해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다가 19173월 니콜리스크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정(李相定)

1897 1947. 독립운동가. 별명은 연호(然浩) · (). 호는 청남(晴南) · 산은(汕隱). 대구 출신. 시우(時雨)의 맏아들로서 상화(相和, 尙火) · 상백(相佰) · 상오(相旿)의 형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일우(一雨)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큰아버지가 경영하던 신학문과 민족정기의 요람이었던 강의원(講義院)에서 공부하였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성성중학교(成城中學校 : 육군유년학교)를 마치고 미술학교 · 상업학교를 거쳐 고쿠가쿠인대학(國學院大學)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1919년 귀국, 3년간 행동적 사도(師道)로서 오산(五山) · 경신(儆新) · 계성(啓聖) · 신명(信明) 등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조국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1923년 만주로 망명, 북만주에서 약 2년간 민족교육을 통한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뒤 유동열 ( 柳東說 ) · 최동오 ( 崔東旿 ) 등과 함께 중국 펑위샹(馮玉祥)장군의 서북국민부대의 장성참모로서, 장개석(蔣介石)군대와 통합된 후에도 국민정규군 소장참모로서 항일전선에 참전하였다.

그 뒤 상해와 난징(南京)을 중심으로 쑤저우(蘇州) · 항저우(杭州) · 우창(武昌) · 북경까지 독립 일념으로 중국의 군벌 · 학자들과 만나면서, 또 김구 ( 金九 ) · 김규식 ( 金奎植 ) 등의 독립지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윤봉길 ( 尹奉吉 )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했으며, 1932년 흥사단 ( 興士團 )에 가입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장개석 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충칭육군참모학교(重慶陸軍參謀學校)의 교관을 지냈다. 1938년 김구 · 김규식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및 외교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유동열 등과 신한민주혁명당(新韓民主革命黨)을 조직해 중앙위원 겸 군사부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중국 육군유격대훈련학교의 교수를 거쳐 1942년 화중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의 고급막료로 난징전(南京戰) · 한커우전(漢口戰)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태평양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육군중장으로 승진되어 일본국 북지나방면 최고사령관 및 그 장병들의 무장해제를 담당하였다.

연합군 동경 진주의 중국군사령부의 막료로 임명되었으나, 소망인 일본군 타도가 실현되었으므로 모든 지위를 사퇴하였다. 충칭에서 광복된 조국의 앞날을 신익희 ( 申翼熙 ) 등과 토론, 상해로부터 급히 와서 도와달라는 교민들의 요청으로 상해에서 중국인들의 한국인 박해로부터 교민 보호에 진력하였다.

194710월 어머니의 사망소식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40여 일만에 뇌일혈로 죽었다. 유고로 표박기 飄泊記 가 있고, () · () · ( )에 능하였으며,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규채(李圭彩)

1888(고종 25) 1947.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 ( 慶州 ). 일명 규보(圭輔). 자는 공삼(公三), 호는 경산(庚山) · 동아(東啞) · 우정(宇精). 경기도 포천 출신. 철영(喆榮)의 아들이다. 1908 1910년까지 청성학교(靑城學校)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3 · 1운동 이후 창신서화연구회(創新書 怜 硏究會)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남녀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여 1924년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의 정치부위원 겸 군사부참모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32년 총무위원장이 되었다.

1933년 중화민국 길림육군(吉林陸軍) 3군의 상교참모(上校參謀)가 되었으며, 1934년 신한독립당감찰위원장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다음해 925일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1940년에 가출옥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단군전봉건회(檀君殿奉建會) 부위원장을 비롯, 반탁국민연맹회 상무위원, 미소공동회의 대책국민연맹 대표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장, 대종교총본사 경의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李會榮)

1867(고종 4)1932.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 ( 慶州 ). 호는 우당(友堂). 서울 출신. 판서 유승(裕承)의 아들이다. 1906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한 안창호 ( 安昌浩 )를 중심으로 이갑 ( 李甲 전덕기 ( 全德基 양기탁 ( 梁起鐸 이동녕 ( 李東寧 신채호 ( 申采浩 )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 ( 新民會 )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 ( 瑞甸書塾 )을 설립하고 이상설 ( 李相卨 )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 ( 呂準 )을 만주로 파견하였다.

그 뒤 1908년 헤이그에서 돌아 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한 끝에 국외활동은 이상설이,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우선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에 진력하도록 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 ( 金九 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 ( 安泰國 이승훈 ( 李昇薰 )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전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 ( 耕學社 )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 뒤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W.)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오세창 ( 吳世昌 한용운 ( 韓龍雲 이상재 ( 李商在 )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상주하여 쾌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상해보다는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 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 )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하고,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그 해 11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하여, 주만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도중, 대련의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병철(李秉喆)

19101987. 실업가. 본관은 경주 ( 慶州 ). 호는 호암(湖巖). 경상남도 의령 출생. 아버지 찬우(纘雨)와 어머니 권재림(權在林)22녀 중 막내이다.

1922년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 같은 해 9월 서울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중동학교 속성과 1학년에 입학, 중학부에 들어갔다. 1929년 박두을(朴杜乙)과 혼인하였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하여 수학중 심한 각기병으로 귀국하게 되어 학업을 중단했다.

사업에 뜻을 두고 아버지로부터 300석 추수의 토지를 분재받았다. 1936년 첫사업으로 정현용(鄭鉉庸박정원(朴正源)과 동업으로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운영했다.

같은 해 6월 일본인 경영의 히노데자동차회사(日出自動車會社)를 인수했으며, 또한 토지에 투자하여 200만 평의 대지주로 등장했으나 실패하고, 협동정미소와 히노데자동차회사를 매각, 부채를 청산했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 청과류와 어물 등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였고, 1947년 상경하여 1948년 삼성물산공사(三星物産公司)를 창설, 무역업에 착수하였다. 1950년 일본경제시찰단원으로 업계를 시찰하였고, 6·25전쟁 때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환도 후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하였다.

1953년부터 상업자본에서 탈피하여 제조업에 투자함으로써 산업자본화하였다. 같은 해 제일제당주식회사를 설립하기 시작하여, 1954년 제일모직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그 뒤 동방생명·신세계백화점·안국화재보험·전주제지·성균관대학교 등을 인수, 경영하였고, 중앙개발·고려병원·한국비료·삼성전자·제일합섬·삼성중공업·동양방송·중앙일보사 등을 창설, 운영하였으며, 삼성문화재단·삼성사회복지재단 등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는 등 많은 회사를 설립, 인수 또는 합병하여 재벌기업을 형성하였다.

또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전국경제인협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했으며, 울산공업단지를 조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李裁(이재)  선생의 일화

 

벼슬을 다 버린 단종 그리는 절의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살았는데, 당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밤 북쪽을 향해 목 놓아 통곡하며 일체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농사일에만 힘쓰니 마을 사람들도 그가 判書(판서)였다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단종에 대한 충성심으로, 단종이 죽자 평소 자기가 쓴 글과 책을 모두 불 태워버리고 후세에 전하지 않았다.

단종을 그리며 늘 애송하는 戀君詩(연군시)가 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득한 동쪽 포구 비는 내리고
슬프다 오동 넘어 산허리 구름
두견새 옛 둥지 그리워 울고
기러기 쩍을 잃고 울부짖어라.
해 저물어 가을빛이 아득하거니
어디매서 고운 님을 바라보리오.

          漠漠涔陽浦(막막장양포)
          慘慘梧出雲(첨첨오출운)
          子規啼古棲(자규제고서)
          哀鴻呌失郡(애홍규실군)
          日暮秋色遠(일모추색원)
          何處望夫君(하처망부군)

 

 

 

 

李擢英(이탁영)의 충절과 효향.

 

엄동 설한에 돋아난 죽순

 

그는 1541(중종 36) 의성 고을 상리동에서 태어났다.

 

들판에 서서

일곱 살이 된 탁영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늦가을 들판 구경을 나갔다, 고운 단풍으로 몸치장한 서산에 막 피어 오른 저녁놀이 장관이었다.

탁영아 ! 이게 우리 논이다.”

. ”

올핸 풍년이구나. 누런 들판을 보노라니 저절로 배가 불러 오는 것 같구 나. 너도 그렇지 ?” 탁영이는 아버지께로 돌아섰다.

저는 다른 생각이 듭니다.”

어떤 생각?” 아버지는 궁금해서 다그쳐 물었다.

들판을 보는 순간 웬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

허허 그래 ? 그렇담 그 이유를 한번 들어보자꾸나?”

바람결에 흩날리는 벼이삭에서 지난여름, 삼복더위도 잊으시고 흘리신 아버님의 땀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더욱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 했지만 철부지 아들의 대견스러움에 콧등이 시큰했다.

탁영은 항상 밝고 명랑한 얼굴로 겸손하고 바르게 어른을 대했다. 남달리 명석하고 총명해서 학문이 뛰어나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적이 한두 번 이 아니었다. 탁영이 커가는 만큼이나 그에 대한 이웃의 칭찬도 자자했다.

 

검은 운명을 헤치고

탁영의 나이 17 세가 되던 해 겨울이었다. 관향이 경주인 까닭에 고향을 다녀오겠다며 집 나섰던 아버지께서 객사하셨다는 소식을 듣자 탁영은 금방 이라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다. 대성통곡을 하며 비통해 했지만 아무 소 용이 없다는 걸 알았던 그는, 혼자서 수백 리 길을 달려가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인 의성으로 모셔와 장례를 치루었다.

 

한편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달래 드리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괴로움에 지친 자기 육신은 돌볼 겨를도 없이 어머니를 위로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런데, 또 큰일이 생겼다.

1591(선조 25) 413일 일본의 대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북상해 왔던 임진 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왜놈의 침입에 격분하며 불타는 애국심을 자신도 억누르지 못했다. 물론 어머니를 봉양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자자손손 이어 온 이 나라 이 강토는 한 뼘도 왜놈에게 빼앗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그를 용감하게 진중으로 달려들게 했던 것이다. 비록 초로가 된 51세 였지만 젊은이 못지 않는 용기와 지혜를 지난 그는 서둘러 의병을 모집점, 군량 조달 등 어려운 일에 직접 가담하여 큰 몫을 거뜬히 해냈다. 평소, 옳은 일에는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의 성품이 전쟁터에서도 확연했다.

 

난이 평정되었던 1599년까지 7 년간 종군하면서 세운 그의 공을 높이 산 조정에서는 그에게 큰 벼슬자리를 내리려던 참이었다.

전쟁터로 나온 후로 잠시도 잊지 않았던 어머니의 소식을 인편으로 듣게 되었다. 그간 여든 살인 노모는 난을 피해 현재 옥산면 금학동 선골 산중에 피난해 있었다. 생사를 알 길 없는 아들 걱정에 노쇠가 겹쳐 자리 에 눕더니, 그만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탁영의 갈등은 한이 없었다.

 

여보게 노환은 어쩔 수 없네. 아무 생각 말고 벼슬을 맡게·”

주위 사람들의 권유는 계속되었다.

아니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네. 효는 먼저 부모를 섬기고 다음으로 임금을 섬기며 나아가 입신하는 것이니 말이네.”

탁영은 어린 시절 효경에서 읽은 이 말을 되새기기만 했다· 끝내 높은 벼 슬자리를 사양한 채 어머님이 계시는 고향인 의성으로 돌아왔다.

실명한 노모에게 새 광명을 드린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백방으로 약을 구해다가 간병했지만 효험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노모를 그 냥 바라보고만 있을 탁영은 아니었다.

 

물고기를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앞뜰에 손수 양어장을 만들어 사시사철 물고기를 반찬으로 해 드렸다· 그뿐 아니라 늘 즐겨 잡수시던 죽순을 대접하기 위하여 담장 너머 텃밭에 대나무를 심었더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엄동설한에도 파아란 죽순이 돋아났으니 말이다.

나는 죽는 날까지 내 어머니를 위해 모든 걸 바치리라·’

 

밤이면 노모의 침소를 돌봐 드린 후로 입버릇처럼 자신에게 일렀던 말이 다· 자식으로서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몸소 행했던 탁영의 효성도 아랑곳없이, 인명은 재천이라더니 몇 년 후 노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 가까이에서 더 오래 모시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침식조차 잊으며 나날을 보내던 탁영은 1610113일 향년 70 세로 일생을 마쳤다.

 

그에게는 화려한 꽃상여도 없었다. 그저 조촐한 장례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효행은 구전되어 마른 벌에 불붙듯 고을에서부터 나라 전체에 널리 퍼졌다· 늦게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께서 탁영의 후손에게 사곡 은전을 내리시고 통청대부 첨지중추부사라는 벼슬을 증직하였다· 또한 그 의 애국심과 편펀모 봉양에 지극했던떤 그의 뜻을 기거리기 위해 전사청 충효사가 순조 원년에 탁영의 집터에 세워졌다· 대원군에 와서 훼철되어 1923년 유림의 발기로 다시 재건되었으니 해마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지금도 의성읍 중리 3동 호현의 선영 하에 고이 잠들고 있는 탁영은 군민 의 가슴에 효심의 불을 당겨 주고 있다.

 

참고 문헌露城勝鑑(로성승감), 孝烈行誌(효렬행지)

 

 

 

李暿(이희)의 묘비

 

 

李暿(이희) 太宗 4年 甲申(1404)~世宗 30年 戊辰(1448) 45

字 明仲. 號 淸湖. 慶州人 益齋 齊賢玄孫

 

여가지 초고 총담조에 공이 일찍이 중국에 가서 점을 처 보았더니 花山芳草路 騎牛踏月中 可憐男子興 頭載一枝紅(화산방초로 기우답월중 가련남자흥 두재일지홍)라 하니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공은 세종 5(1424) 兩試(양시)에 모두 합격하고 지평, 장령, 집의, 남원, 경주 부윤, 우승지, 지이참의를 거쳐 경상감사에 특채되어 안동부를 순찰 할 때, 학질에 걸려 아무리 약을 써도 효험이 없는데, 미간 속담에 검둥소를 거꾸로 타면 낫는다 하니 밤에 영호루 아래서 검둥소를 거꾸로 타다가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누각에서 관기의 무릎을 베고 누워 신음하게 되었다.

공이 무심코 그 관기의 이름을 물으니 一枝紅(일지홍)이라 한다.

그때서야 중국에서의 점괘가 생각이 났는데 花山(화산)은 안동의 지명이며, 관기 일지홍의 무릎을 고 있으니 頭載一枝紅(두재일지홍)으로 중국의 점괘와 일치됨을 깨닫고 임종이 가까움을 알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공은 평소에도 자녀들에게 남자가 遠遊(원유)하다가 객사하더라도 고향으로 還葬(환장)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府南(부남) 낙타산에 매장하게 되어 묘소는 남선면 현내리에 있다.

고성 이씨로 안동에 정착한 영산현감 李增(이증)은 공의 사위가 된다.

공의 묘 앞에 세운 비는 18대손 비서성 相慶(상경)撰文(찬문)이다.

 

 

 

李弘準(이홍준)의 묘비명

 

李弘準(이홍준) 生卒(생졸)未詳(미상)

號 訥齋. 慶州人 庸齋

 

공은 庸齋(용재) 宋準(송준)의 동생인데 庸齋(용재)甲子士禍(갑자사화)에 연류 되어 화를 입으니, 관리 진출의 뜻을 버리고 안동 금계동에서 봉화로 이사하여 은둔하였다 한다. 봉화의 川城鄕約(천성향약)은 공의 주창이라 하는데 우리 지방에서는 가장 앞서 실시된 것이라 한다.

공의 묘는 봉화군 물야면 개단4리 운봉 아래 있다. 묘 앞에 自製銘(자재명)의 비가 서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글자를 판독하기 어려워 새로 개수하였으나 舊碑(구비)는 그대로 묘 옆에 보존하고 있다.

우리지방의 碑碣銘(비갈명)을 고찰하여 보니 연대가 오래된 것일수록 자구의 수식이 간명하고 허세과장이 적은 것 같다.

공의 묘갈에도 七擧不中(칠거불중)이라 하여, 일곱 번 과거에 급제하지 못함을 기록하였는데 당시 선비로서 등과하여 부모를 들어내지 못함을 자인하는 솔직함과 또 일차 실패 후에도 계속학문에 정진하였음을 긍지로 여기는 선비 정신을 표현하고 있어 참 아름답게 여겨진다. 후대의 비문에는 여러 번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어도, 과거에 뜻이 없다는 말로 바꾸어 사용한 것이 많이 있으니 이 또한 경계하여야 될 것이다.

순조 원년(1801) 4월 대사간 聞韶(문소) 金翰東(김한동)이 찬한 후대에 음기에 보면, 공은 15녀를 두었으나 3대에 내려와 손이 끊겨 외손이 공의 묘소에 제행을 이어오고 있다 한다,

 

墓碑

進士李弘準墓

在皆丹部曲雲峰山自制碣銘云 噫悅生惡死 人之常情以死爲 諱口不敢言 感之甚矣 有如漆園 叓之忘骸王楊孫之裸葬 世無人矣 其知生死之說而 不爲之懷者 有幾人哉 予嘗有詩曰 無生則無死 有生卽有死 生死兩悠悠 造物無終始 雖不及達觀 徒所見如斯而 已凡人觀化之後 爲子孫者 偵人碣辭 虛張逸筆以沒其實尢可笑也 此老平生以懶拙 自任農以給妻孥 七擧不中 優遊溪山以 是終焉 銘曰 旣無才又無德 人而已生無爵死無名 魂而已憂樂毁譽息止而已

 

<>

진사 李弘準(이홍준)의 묘

皆丹(개단) 部曲(부곡) 雲峰山(운봉산)에 나 자신의 묘갈명을 만들어 이르노라.

아아! 기뻐하며 나서 추하게 죽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죽음을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벅차 ()자를 감히 입에 못 담겠노라. 그러나 칠원에서 같이 일 때문에 해골을 잊는 다 던지 王楊(왕양)같이 裸葬(나장)을 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생사의 진의를 알고 말한다는 것은 사람마다 할 수 없는 일인데 몇 사람이나 그것을 할 수 있으리오. 내가 늘 감상하는 시가 있는데 태어나지 아니하면 죽지 아니하고, 생명 있는 것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 그래서 생사 모두에 유유 할 것이며, 지어진 사물은 끝도 시작도 없다. 비록 달관에 경지에 이루지 못해도....내 소견은 이와 같은 것인데 이미 모든 사람들이 단 관조한 바이다. 훗날을 위하여 자손들이 碣辭(갈사) 쓰기를 물어 오니, 허황되고 과장되게 붓을 놀리면 죽은 뒤에 실로 웃음꺼리가 된다. 이 늙은이는 평생토록 개으로고 졸렬해서 스스로 농사지어 처자를 먹여 사리고, 7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오직 溪山(계산)에 묻혀 한가롭게 살다가 이제 끝이 났네.

명에 이르기를

이미 재주 없고 덕이 없으니

사람으로 태어나 벼슬 없이 이름 없이 죽노라.

마음에는 이미 憂樂(우락)이 없고

명예 바라지 않는지 이미 오래 되었다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8

()

46

(),()

54

()

39

()

47

()

55

()

40

(),()

48

()

56

()

41

()

49

()

57

()

42

(),()

50

()

58

()

43

(),()

51

()

59

()

44

()

52

()

60

()

45

(),()

53

()

61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남한에 총 291,120가구, 1,217,27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465 광산 이.jpg 광산이씨(李) 청남 14-08-29 4166
464 공주 이.jpg 공주이씨(李) 청남 14-08-29 5739
463 고성 이.jpg 고성이씨(李) 청남 14-08-29 5817
462 고부 이.jpg 고부이씨(李) 청남 14-08-29 3033
461 고령 이.jpg 고령이씨(李) 청남 14-08-29 2617
경주 이1.jpg 경주이씨(李) [1] 청남 14-08-29 7707
459 경산 이.jpg 경산이씨(李) 청남 14-08-29 4483
458 결성 이.jpg 결성이씨(李) 청남 14-08-29 2406
457 개성 이.jpg 개성이씨(李) 청남 14-08-29 4030
456 강화 이.jpg 강화이씨(李) 청남 14-08-29 2659
455 가평 이.jpg 가평이씨(李) 청남 14-08-29 3353
454 응씨(應) 청남 14-08-29 2325
453 죽산 음.jpg 죽산음씨(陰) 청남 14-08-29 3043
452 은씨(恩) 청남 14-08-29 2537
451 행주 은.jpg 행주은씨(殷) [1] 청남 14-08-29 3928
450 해평 윤1.jpg 해평윤씨(尹) 청남 14-08-29 5597
449 해남 윤.jpg 해남윤씨(尹) 청남 14-08-29 3771
448 함안 윤.jpg 함안윤씨(尹) 청남 14-08-29 3563
447 파평윤씨(尹) 청남 14-08-29 8081
446 칠원 윤.jpg 칠원윤씨(尹) 청남 14-08-29 3728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