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고성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고성이씨)

 

 

본관(本貫): 고성(固城)

시조(始祖): 이황(李璜)

유래(由來):

 

<이씨추원록(李氏追遠錄)>에 의하면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한()나라 문제(文帝) 때 사람인 이반(李槃)24세손 이황(李璜)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는 고려 덕종(德宗 : 9대 왕, 재위기간: 1031 1034) 초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고, 1033(덕종 2) 거란(契丹)이 침입했을 때 공()을 세워 문종(文宗) 때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올라 철령군(鐵嶺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고성(固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존비(李尊庇)

1233(고종 20) 1287(충렬왕 1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인성(仁成), 자는 지정(持正). 부인은 좌복야 한림학사(左僕射翰林學士) 이주일(李湊一)의 딸이며, 아들은 우() · () · ()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 백문절 ( 白文節 )에게 글을 배워 문장과 예서(隷書)에 능하였으며, 유경 ( 柳璥 )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유학에 밝았다.

1260(원종 1) 과거에 급제한 이후 내시 ( 內侍 )에 입적되었으며, 이어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郎) ·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 ·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호부 ( 戶部 ) · 병부 ( 兵部 ) · 이부 ( 吏部 )의 시랑을 역임하고 1275(충렬왕 1) 상서우승(尙書右丞) · 예빈경(禮賓卿)을 거쳐 좌승지에 올랐으며, 이 때 필도치(必 斤 赤 : 政序의 서기직)의 일원이 되었다.

1279년 밀직부사로서 장군 정인경 ( 鄭仁卿 )과 함께 성절사 ( 聖節使 )가 되어 원나라에 사행하였으며, 이듬해 지밀직사사 · 세자원빈(世子元賓)에 오르고, 1282년 지공거 ( 知貢擧 )를 역임하였다.

1284년 감찰대부(監察大夫), 1287년에는 경상도 · 충청도 · 전라도의 도순문사가 되어 여몽군(麗蒙軍)의 일본정벌을 위한 병량(兵糧) 및 군선(軍船)의 조달을 담당하였는데 제반조치가 적의하여 민원을 사지 않았다.

그 뒤 벼슬이 판밀직사사에 이르러 별세하자, 그의 죽음에 대하여 특히 세자가 울면서 심히 애석해하였다고 한다. 묘지명이 현재 전하며 회당화상(晦堂和尙)에게 보낸 칠언율시가 동문선 에 실려 있다.

 

이우(李瑀)

()는 충숙왕(忠肅王) 때 전주(全州)와 진주(晋州)의 목사(牧使)를 지냈고,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높아 공신(功臣)에 녹훈(錄勳)되었던 그는 뒤에 벼슬이 상서병부(尙書兵部)의 판사(判事)와 경령전(景靈殿)의 서장관사(書掌觀事)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공을 세워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었다.

 

이암

1297(충렬왕 23) 1364(공민왕 1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군해(君 嶺 ).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 판밀직사사 감찰대부 세자원빈(判密直司事監察大夫世子元賓)인 존비(尊庇)의 손자이며, 철원군 우(鐵原君瑀)의 아들이다.

1313(충선왕 5)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충선왕이 그의 재주를 아껴 부인(符印)을 맡겨서 비성교감( 煉 省校勘)에 임명된 뒤 여러 번 자리를 옮겨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충혜왕 초 밀직대언 겸 감찰집의(密直代言兼監察執義)에 올랐으나,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해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섬으로 유배되었다.

1340년 충혜왕의 복위로 돌아와 지신사 ( 知申事 ) ·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 정당문학 ( 政堂文學 ) · 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 충혜왕이 전교부령(典校副令)에 무인 한용규(韓用規)를 임명하자 이를 반대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충목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로 제수되어 제학 ( 提學 ) 정사도 ( 鄭思度 )와 함께 정방 ( 政房 )의 제조 ( 提調 )가 되었지만,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인사행정을 공평하지 않게 처리한다고 왕에게 진언했으나 이로 인해 밀성(密城 : 밀양)에 유배되었다.

충목왕이 죽자 서자 저( : 뒤의 충정왕)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원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정방의 제조에 임명되는 한편,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이라는 호가 하사되었으며, 그 뒤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에 올랐다.

공민왕 초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으나 사직하고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문하시중 ( 守門下侍中 )에 제수되었다. 1359(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문하시중으로서 서북면도원수가 되었으나 얼마 뒤 겁이 많아 도원수로서 군사를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장사 ( 平章事 ) 이승경 ( 李承慶 )으로 교체되었다.

1361년 홍건적이 개경에 쳐들어오자 왕을 따라 남행 ( 南行 )했고, 이듬해 3월 좌정승에서 사퇴하였다. 1363년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한 공로로 1등공신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이라는 호가 하사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 ( 東國 )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했다. 필법은 조맹부(趙孟 琅 )와 대적할 만하며, 지금도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있다. 그림으로는 묵죽에 뛰어났다. 우왕 때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교(李嶠)

?1361(공민왕 10).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모지(慕之), 호는 도촌(桃村). 판밀직사사감찰대부(判密直司事監察大夫) 존비(尊庇)의 손자다.

원나라의 금부(金符)를 받고 만부장(萬府將)이 된 판삼사사(判三司事) 박지량 ( 朴之亮 )의 외손이고, 철원군 우(鐵原君瑀)의 아들이며, 충혜왕의 배향공신인 정당문학 이조년 ( 李兆年 )의 사위이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1357년 형부상서로서 천추사 ( 千秋使 )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0년 어사대부로서 전선(銓選 : 인사행정)을 관장하였다.

그의 가문은 누대공신재상지종(累代功臣宰相之種: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문벌세가)일 뿐 아니라 조선건국과 함께 중추적 세력으로 영입된 세력가로서 조선의 명족이 되었다.

 

이인(李寅)

행촌(杏村) 암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인()은 고성군(固城君)에 봉해졌다.

 

이숭(李崇)

()은 공민왕(恭愍王) 때 궁술(弓術)로 무명(武名)을 떨치고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태조(太祖) 때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올라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이강(李岡)

1333(충숙왕 2) 1368(공민왕 17). 고려 후기의 문신. 공민왕 때에 수문하시중 ( 守門下侍中 )을 지낸 암( )의 아들이다.

원송수 ( 元松壽 )의 추천으로 지신사 ( 知申事 )가 된 뒤, 1356년에는 이부낭중(吏部郎中)의 직에 있으면서 왕으로부터, “ 네가 전선(銓選 : 인사행정)에 참가하였으니 대간으로 직책을 다하지 못한 자는 내치고, 현재(賢才)로 유일(遺逸 : 유능한 자가 등용되지않아 세상에 나타나지 않음.)된 자는 이를 올리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 복제를 마친 자는 또한 반드시 이를 탁용(擢用)하라. ” 는 말을 들었다.

밀직제학으로 죽으니 왕이 심히 애도하고 후하게 부의를 하사하였으며, 관례상 추밀(樞密)은 시호를 내리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문경(文敬)이라고 특별히 시호를 내렸다.

죽을 때의 관직이 고려사 세가에는 밀직제학으로 되어 있고, 예지(禮志)에는 밀직부사로 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전자는 추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李原)

1368(공민왕 17) 1430(세종 12).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문하시중 ( 守門下侍中 ) ( )이고, 아버지는 밀직부사 강()이다. 정몽주 ( 鄭夢周 )의 문인이다.

1382(우왕 8) 진사가 되고, 1385년 문과에 급제, 사복시승(司僕寺丞)을 거쳐 예조좌랑과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지평이 되었고, 1400(정종 2) 좌승지 때 방원(芳遠)이 그의 동복형인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태종 1) 좌명공신 ( 佐命功臣 ) 4등에 책록되었다.

그 해 철성군(鐵城君)에 봉작되었고, 같은 해 공안부소윤(恭安府少尹)을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순군 ( 巡軍 ) 윤종(尹琮)을 구타한 죄로 한 때 파직되었다. 이듬 해 복직되어 경기좌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左右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고, 1403년 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으로 있으면서 고명부사(誥命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평양부윤으로 있으면서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를 겸하고, 1406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와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겸직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판한성부윤을 거쳐, 1408년 태조가 죽자 국장을 주관하는 빈전도감판사(殯殿都監判事)가 되었고, 이듬 해 경상도관찰사로 영상주목사를 겸직하였다. 이 해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1414년 영길도도순문사(永吉道都巡問使)를 거쳐, 이듬 해 6월 예조판서로 있다가 12월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참찬을 거쳐 14163월 판한성부사, 5월 병조판서, 1417년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와 찬성을 거쳐 이듬 해 우의정에 올랐다. 1419(세종 1) 영경연사 ( 領經筵事 )를 겸했고, 14211월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1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우의정 정탁 ( 鄭擢 )과 함께 도성수축도감도제조가 되어 8도의 정부(丁夫) 325000여 명을 징발, 14221월부터 두 달에 걸쳐 토성이던 도성 성곽을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1425년 등극사 ( 登極使 )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 해 많은 노비를 불법으로 차지했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공신녹권(功臣錄券 : 공신에게 주는 공훈사령장)을 박탈당하고 여산 ( 礪山 )에 안치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세조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고려 말기부터 문명이 알려져 조선 초기에 국기를 다지고 제도를 확립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중신이다. 그러나 말년에 부귀가 모이자 지나친 위세를 부려 사람들의 지탄을 받아, 급기야 공신녹권까지 박탈당하고 고독한 귀양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저서로는 용헌집 · 철성연방집 鐵城聯芳集 이 있다. 시호는 양헌(襄憲)이다.

 

이칙(李則)

1438(세종 20) 1496(연산군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숙도(叔度).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원()이고, 아버지는 한성부소윤 질( )이며,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장령 ( 掌令 ) 지당(之唐)의 딸이다.

1456(세조 2) 진사가 되고, 1462(세조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장흥고직장(長興庫直長) · 병조좌랑 · 이조정랑을 지내고, 의정부검상 · 사인, 봉상시부정을 역임하였다.

1477(성종 8) 사헌부집의를 거쳐 주청사 ( 奏請使 )의 서장관 ( 書狀官 )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군자감정 · 형조참의로 등용되었다. 1480년 대사성이 되어 교학(敎學)에 힘쓰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전임되자 유생들이 여러 차례 그의 유임을 상소하였다.

그 뒤 형조 · 이조 참의를 지내고 1486년 승정원동부승지 · 좌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488년 대사헌의 재임시 임사홍 ( 任士洪 )을 등용하려는 성종에게 지파(支派)로 대통을 잇고서 종묘사직의 중함을 생각지 않는다고 복합(伏閤) 상소하였다가 한때 큰 노여움을 샀으나 기지로 위기를 넘겼다.

다음해 대사성을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고, 1491년 동지중추부사, 1493년 평안도관찰사, 이듬해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선견과 직언 · 덕망 등이 당시 사표가 되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이육(李陸)

성종(成宗) 때 대사헌(大司憲)과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낸 육()<청파극담(靑坡劇談)>의 저자(著者)로도 유명했다. 그가 충청 감사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 지가 괴산 군수(槐山郡守)로 있어서, 임금이 난처하게 생각하여 전지(傳旨)를 내려 그의 아버지를 내직(內職)으로 전임시켜 주었다.

 

이백(李陌)

육의 아우 백()은 대사간(大司諫)에 있으면서 연산군(燕山君)의 총녀(寵女) 장숙용(張淑容)의 사제(私第)가 외람되게 화려하다고 간()했다가 유배당했다.

 

이주(李胄)

1468(세조 14) 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주지(胄之), 호는 망헌(忘軒). 좌의정 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증()이고, 아버지는 현감 평( )이며, 어머니는 허추(許樞)의 딸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인이다.

1488(성종 1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 ( 正言 )을 지냈다. 1498(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갔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전에 궐내에 대간청을 설치할 것을 청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김굉필 ( 金宏弼 )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성품이 어질며 글을 잘하였고, 시에는 성당의 품격이 있었으며,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직언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주로 삼사 ( 三司 )에서 활약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원 ( 忠元 )이다

 

이여

주의 아우 여는 임금이나 조정에서 크게 촉망받다가 안질로 29세에 요절했다.

 

이명규(李名珪)

1497(연산군 3) 1560(명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광윤(光潤). 우의정 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의영고영(義盈庫令) ( )이며, 어머니는 하동정씨(河東鄭氏)로 문언(文彦)의 딸이다.

1519(중종 14) 생원 · 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대교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이어서 홍문관부수찬 · 수찬으로서 활발한 정계활동을 폈으나, 1531년 김안로 ( 金安老 )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에게 거슬려 벼슬길이 막혔다.

1537년 김안로가 제거되면서 사헌부장령에 다시 등용되었고, 이어서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동부승지 · 좌부승지 · 좌승지를 역임하고 1541년 한성부우윤에 올랐다.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귀국하면서 조맹부(趙孟 琅 )의 그림 빈풍칠월도 羚 風七月圖 를 구입, 국왕에게 진상하였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도승지에 발탁되었고, 명종 즉위 후 1547(명종 2) 함경도관찰사로 나가서 북도민의 민폐시정에 힘썼으며, 특히 도민의 큰 부담이었던 곤포(昆布) 진상을 중지시켰다.

그 뒤 지돈녕부사 · 대사헌 · 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551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을 다시 역임하고, 형조 · 예조의 판서를 거쳐 1554년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여 3년 동안 민정을 주관하였다.

1557년 주청사로 명나라에 다시 건너가 대비의 고명(誥命)을 받아 왔고, 그 공로로 숭정대부에 올랐으며, 판돈녕부사와 병조판서에 특채되었다. 행서 · 초서에 능하였으며, 사어(射御)에도 솜씨가 있었다. 시호는 안혜(安惠)이다.

 

이기(李沂)

1848(헌종 14) 1909. 조선 말기의 사상가 · 애국계몽운동가.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 · 질재(質齋) · 재곡(梓谷). 전라북도 김제(金堤, 萬頃) 출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재(文才)가 비범해 거의 독학으로 학문을 성취하였다.

초기에는 이정직(李定稷) · 최보열(崔輔烈) · 황현 ( 黃玹 ) 등 주로 도내의 명사들과, 중앙진출 후에는 남궁 억(南宮檍) · 이건창 ( 李建昌 ) · 김택영 ( 金澤榮 ) 등과 교유하였다.

 

활동 상황국운이 쇠퇴해 가는 속에서 적극적인 경세구국(經世救國)의 뜻을 세워, 1894(고종 31)에는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 전봉준 ( 全琫準 )에게, “ 군중(軍衆)을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가 국왕 주변의 간사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왕을 받들어 국헌(國憲)을 새롭게 하자. ” 고 제의하였다.

전봉준은 이에 찬동, 남원의 김개남(金開男)에게도 동의를 얻도록 그에게 종용하였다. 그러나 김개남이 면담조차 거절하고 도리어 그를 해하려 하자 구례로 돌아왔다. 여기서 동학군이 파괴행동으로 나오자 군민을 규합, 이를 방어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을 목격, 체험한 뒤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토지개혁이 최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1895년 중앙에 진출, 극도로 문란해진 전제(田制)를 개혁할 것을 주장해 전제망언 田制妄言 을 지어 탁지부대신 어윤중 ( 魚允中 )에게 건의하였다.

1896년에는 경상좌도관찰사 이남규 ( 李南珪 )의 막료로 초빙되어 모병과 조련(調鍊) 등 지방의 치안유지에 노력, 큰 성과를 거두었다. 1898년 양지아문 ( 量地衙門 )이 설치되자 양지위원에 임명되었다.

우선 아산지방에서 관계 시안(試案)을 실시, 지적(地積)과 세정(稅政)을 바로잡기에 힘썼다. 1900년 구국(救國)에 대한 방책을 중추원에 건의하는 한편, 국민들에게는 자강책(自强策)을 제창, 분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2년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러 · 일의 각축으로 국운이 더욱 위태롭게 되어가는 상황인데도 한가하게 산림에서 독서 · 시담(詩談)이나 하는 황현(黃玹)에게 일갈하였다.

자신은 비록 처사(處士)가 될지라도 부모 처자가 포로가 됨을 막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라면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민족적 대의를 중국 고대의 사례를 들어 천명하였다.

1904년 고종에게 상소해 시국에 관한 소신을 개진하였다. 특히 4차에 걸친 논일인소구진황지소 論日人所求陳荒地疏 를 통해 일제의 이른바 황무지개척권 강요의 부당성과 그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였다.

또한 홍필주 ( 洪弼周 ) · 이범창(李範昌) 등 수백인의 연합상소문으로써 일제에 동조한 이하영 ( 李夏榮 ) · 현영운(玄映運) 등의 매국적를 벨 것을 주장하였다.

같은 해에 올린 인근시상주봉서 因近侍上奏封書 에서는 러일전쟁의 종결 전에 우리의 옛 영토인 서북간도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각부의 당론자들인 어윤중 · 신기선 ( 申箕善 ) · 조병직(趙秉稷) · 김가진 ( 金嘉鎭 ) 등에게 제도개혁, 특히 일제의 침략에 대한 대처방안에 대한 글을 보내기도 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강화회의가 미국에서 열렸다. 이 강화회의에서 틀림없이 한국에 대한 모종의 결정이 내려질 것을 확신하고, 동지 나인영(羅寅永, ) · 오기호(吳基鎬, ) · 윤주찬 ( 尹柱瓚 ) 등과 함께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것을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건의했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직접 미국에 건너가 그 회의에 참관하려고 했지만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차선책으로 일본에서 활동하기로 결정하고 같은 해 9월 나인영 · 오기호 등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그들은 일본천황과 일본정계 요인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에서 세계와 동양의 형세에 대해 논하고, 일본은 마땅히 약속을 지켜 한국의 독립을 존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병탄의 침략책만을 논한다고 힐책하였다.

특히,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에게 일본의 배약행위와 러일전쟁 중에 체결된 한일의정서 ( 韓日議定書 )2차에 걸쳐 통박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귀국했고, 뒤이어 어머니의 상을 당해 귀향하였다.

그러나 위급한 시기에 상중(喪中)이라 하여 향리에 칩거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복을 벗어버렸다는 비난도 무릅쓰고 다시 상경하였다. 한성사범학교 ( 漢城師範學校 ) 교관으로 후진 양성에 진력하는 한편, 언론을 통해 국권수호와 제도개혁에 관한 주장을 펼쳤다.

1906년경에는 장지연 ( 張志淵 ) · 윤효정 ( 尹孝定 )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 ( 大韓自强會 )를 조직하였다. 그 회보와 호남학보 湖南學報 조양보 朝陽報 · 야뢰보 夜雷報 등에 서문과 논설을 통해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을사5조약이 체결된 뒤에는 나인영 · 오기호 · 윤주찬 · 김인식 ( 金寅植 ) 등과 함께 나라를 바로잡으려면 먼저 내부의 적부터 제거해야 한다며 을사오적을 주살(誅殺)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에 동지를 규합해 자신회 ( 自新會 )를 조직하였다. 그 취지서에서 거사의 대의와 단결의 필요성을 천명하고, 성사 후의 자현장(自現狀 : 자기의 거사 사실을 스스로 밝힌 문서장)까지 작성하였다.

19072월 거사에 착수해 권중현 ( 權重顯 )을 저격했으나 실패하고, 박제순 ( 朴齊純 ) 등에 대한 살해 계획도 실패하였다. 이렇게 되자 거사 사실을 스스로 밝히면서 매국노를 제거하려 한 그들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 겨울에 풀려났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 항일구국운동을 벌였다. 1968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학문 경향그의 학문은 한학에서 시작하기는 했지만 성리학을 버리고 실사구시 ( 實事求是 )와 이용후생 ( 利用厚生 )을 주로 하는 실학, 특히 유형원 ( 柳馨遠 )과 정약용(丁若鏞)을 조술(祖述)한 조선후기 실학에 사상적 연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열렬한 애국정신과 그에 따른 제도개혁안, 그리고 그가 제시한 구체적이고 진취적인 신교육방법 등은 모두 그의 실학적인 진취 사상에서 우러나왔다.

자신의 학문이 현시세에 부합될 수 없는 무용한 것이었다고 반성하면서, 재래 유가(儒家)가 옛날 문물을 숭상하고 현재를 천시하는 누습(陋習)을 비판하고, 시무(時務) · 진취(進取)에 사상적 초점을 두었다.

시대가 진전되는 것에 따라 알맞은 생활을 해야하고, 문적(文籍)도 새로이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정체(政體)에 있어서도 민권주의와 법치사상을 강조, 공화제(共和制)를 찬양하였다. 평등국을 내세워 국내에서 인민평등이 가능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도 우리를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국사관(國史觀)에 있어서도 재래 유학자들의 사대주의적 사관을 탈피하였다. 자아적인 역사의 주류 경향을 사실(史實)을 통해 정당하게 파악하려고 하였다.

기자주봉설(箕子周封說)의 부정, 이성계 ( 李成桂 )의 사대정책의 경위, 임란구원(壬亂救援) 및 대청외교(對淸外交)에서 파생된 존명(尊明)의 의의 등을 논해 우리 역사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자주독립정신의 주류를 파악하였다.

또한, 자신이 한학자이면서도 국문자(國文字)의 사용을 적극 주장해 한문 관용(漢文慣用)의 폐단을 타파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는 국문 사용이 국민생활에 편익이 되는 시대적 추세를긍정한 것으로서, 여기에도 자주독립 정신과 지식보급의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단지 문자를 배우는 것은 학문이 아니며, 학교에서 쉬운 국문으로 지식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해, 국문을 통한 교육을 주장하였다. 교육목표를 국권회복에 두었던 것은 당시가 일제의 침략에 대비해야 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온 그의 교육관이었다.

국운이 위급해진 원인이 국민교육의 결여와 그에 따른 무지에 있다고 모아 자강(自强)은 새로운 학문, 새로운 지식을 교육 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교육을 가정교육 · 학교교육 · 사회교육의 3종으로 구분하였는데 특히, 신지식 · 신사조와 내외소식을 소개하는 계몽적 역활로서 신문 · 잡지가 주가 되는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제도개혁에 있어서는 전제개혁에 가장 중점을 두어 두승제( 井 璪 制) · 척량(尺量) · 전세(田稅) 및 수리시책(水利施策) 등을 연구해서, 양지(量地) · 세제(稅制)의 합리화를 통해 국민생활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당시 상황에서 긴급하게 개선을 요하는 여덟 가지를 추려 각각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국제(國制) · 관제(官制) · 전선제(銓選制) · 지방제 · 전제(田制) · 호역제(戶役制) · 잡세제(雜稅制) · 학제(學制)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진취적 사상과 계몽적 역할, 그리고 개혁 주장은, 열강의 제국주의적 참략의 위기를 겪으면서 조선 후기 실학의 사회개혁이론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신 학문을 수용한 데서 가능한 일종의 변법자강론(變法自强論)이라고 하겠다. 저서로는 해학유서 海鶴遺書 가 있다.

 

이덕수(李德秀)

독립운동가로 이름났던 덕수(德秀)는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평북 독판(平北督辦)에 임명되었다.

 

이상의(李象義)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상의(象義상룡(相龍)과 함께 의절(義節)의 전통 가문인 고성(固城) ()씨를 더욱 빛냈다.

 

이상룡(李相龍)

1858(철종 9)1932.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상희(象羲).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11년 서간도(西間島)로 망명 후 계원(啓元)으로, 이어서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다. 승목(承穆)의 맏아들이며, 김흥락 ( 金興洛 )의 문인이다.

정치제도와 실용지학(實用之學)을 탐구했으며, 천문·지리·수학 등에 관심이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도곡선재(陶谷先齋)에 은신하면서 병학(兵學)에 몰두하였다. 1896년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가야산에 군사 진지를 구축하고 의병 항전을 시도하였다.

안동의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의 근대적 군사력에 대항하는 국내에서의 의병 항쟁은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뒤 유인식 ( 柳寅植 김동삼 ( 金東三 ) 등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 봄 의병과의 관련 혐의로 안동경찰서에 일시 구속되었으나 그를 지지하는 데모대의 압력으로 석방되었다. 3월에는 대한협회 ( 大韓協會 ) 안동지회를 결성, 회장에 선출되었다. 여기에서 매월 2회씩 시국강연을 개최해 민중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했으나,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협회도 해산당하였다.

191011월 주진수(朱鎭洙황만영 등으로부터 신민회의 독립운동기지 설정 계획을 전해 들었다. 19111월 양기탁 ( 梁起鐸 )과 협의한 뒤 2월 서간도 회인현 항도천(懷仁縣恒道川)에 도착, 심택진의 집에서 김대락(金大洛) 등과 약 2개월 간 머무르면서 한만관계사를 연구, 집필하였다.

19114월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으로 이동하고 산중에서 개최된 노천대회에서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방략과 진로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경학사 ( 耕學社 ) 설립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동시에 이동녕 ( 李東寧 이시영 ( 李始榮 이회영 ( 李會榮 김대락 등에 의해 경학사장에 추대되었다. 특히, 항일민족독립운동 방략에 있어서 산업·교육 우선주의와 군사 중심주의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35월 요령성(遼寧省) 의회에서 재만한인의 토지소유전매조차금지안(土地所有轉賣租借禁止案)이 가결되었다. 그는 유하현 지사를 상대로 교섭을 벌이고 중화민국 국회에 건의서를 보내 재만한인이 당면하고 있는 처지를 밝혀 귀화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재만한인이 지켜야 할 중국인과의 관계,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항일자세 등을 재만한인에게 호소하는 경고남만주교거동포 警告南滿洲僑居同胞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1914존화양이변 尊華壤夷辨을 발표해 종래의 화이관(華夷觀)을 비판하면서, 우리도 교육만 잘 받으면 문명인이 될 수 있다고 하여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7년에는 길림(吉林)의 총독과 재만한인의 권익 확보를 위한 교섭을 벌였다.

19193·1운동 뒤 한족회를 바탕으로 군정부가 조직되자 총재로 추대되었다. 5월에는 신흥강습소 ( 新興講習所 )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해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해외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따라, 11월 군정부를 서로군정서 ( 西路軍政署 )로 개칭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남북만주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19211월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해 관전현(寬甸縣) 삼도항(三道港)에서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개최, 서간도일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해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였다.

그 해 4월에는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상해·만주에서 독립군의 통합과 지휘권 문제, 앞으로의 방향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19228월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해 대한통의부 ( 大韓統義府 )를 수립하고, 그 산하에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192410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독판 ( 督辦 )에 선출되었다. 19259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의 사상적 대립과 파쟁으로 정치적 경륜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국무령을 사임하였다.

서간도 반석현(磐石縣) 호란하(呼蘭河)로 돌아와,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통합운동을 지도하였다. 19325월 병으로 길림성 서란(舒蘭) 소성자(小城子)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남한에 총 17,571가구, 71,9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李元美(이원미)선생의 일화.

 

李元美(이원미)(1690~1765)  임청각
선생의 자는 美卿(미경), 호는 永慕堂(영모당)으로 後植(후식)공의 손자이다. 報本(보본)追遠(추원)에 힘써 할아버지가 종택의 안채만 건축하고 타계하자 그 뒤를 이어 사랑채와 대청인 영모당을 완성시켰다.

 

 

李宏(이굉) 선새의 일화.


洛浦(낙포) 李宏(이굉)(1441~1512)   귀래정
선생의 자는 深愿(심원)이며 호는 洛浦(낙포) 또는 귀래정으로도 불린다.
선생은 고려 때 侍中(시중)을 역임한 杏村(행촌) 嵒(암) 공의 4대손이며, 세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容軒(용헌) 原(원) 공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영산현감을 지낸 增(증) 공이다.
선생은 효성과 우애가 두터웠으며, 沈重(침중)寡黙(과묵)하고 寬大(관대)후중하였으며, 詩文(시문)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25세인 1465년에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했으나, 文科(문과)는 늦어져 40세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연로한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조정에 나가지 않았는데, 그 해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치자 바로 典籍(전적)에 배명되었다. 모친의 나이가 60이 넘어 봉양코자 外職(외직)을 청해 군위현감에 제수되었고, 세자시강원문학, 사간원 헌납을 거쳐 사헌부 지평, 공조정랑,청도군수, 사재감 첨정, 승문원 판교 등을 지냈으며, 1503년에는 통정대부로 올라 상주목사로 부임하였다.
그 이듬해인 갑자년에는 조카인 망헌공이 士禍(사화)를 입게 되었는데, 이 때 선생도 김굉필 선생의 일당으로 몰려 삭탈관직 되어 영해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충청도 병마절도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09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상기를 다 마친 뒤 동지사에 배명되었고, 한성부 좌윤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선생은 1513년(중종 8)에 사직하고 풍광이 빼어난 곳에 정자를 지어 강호에 소요하면서 풍류로 만년을 즐겼다.  중종 11년에 돌아가시니 그 해 걱울 귀래정 남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李洺(이명) 선생의 일화

李洺(이명) 본관: 固城(고성)

李洺(이명)(생몰 미상)   임청각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성이며 자는 浩源(호원), 호는 臨淸翁(임청옹)이다. 영산현감을 지낸 李增(이증) 공의 삼자이며, 개성유수를 지낸 歸來亭(귀래정) 李宏(이굉)공의 아우이다. 1486년(성종 17)에 金馹孫(김일손)·權五福(권오복)선생 등과 同榜(동방)으로 사마시에 합격, 蔭補(음보)로 벼슬길에 나아가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1504년에 갑자사화에 조카인 忘軒(망헌) 李冑(이주)공이 처형되면서 온 집안이 화를 입었다. 1506년 중종이 즉위하자 풀려나 의흥현감이 되었으며, 1513년(중종 8) 이굉 공이 개성유수에서 사직하고 은퇴하자 선생도 함께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영남산 기슭에 정자를 짓고, 도연명의 歸去來辭(귀거래사)에서 당호를 취해 '臨淸閣(임청각)'이라 이름 하였다

 

 

李後植(이후식) 선생의 일화.

 

李後植(이후식) 본관: 固城(고성)

李後植(이후식)(1653~1714)    임청각
선생의 본관은 고성으로 자는 汝久(여구)이다. 臨淸閣(임청각)공의 현손인 適(적)공의 증손으로 臨淸閣(임청각)의 주손인 淸翁(청옹) 後榮(후영)공의 형이다.
선생은 臨淸閣(임청각)에서 출생하여 탑동 분파조의 증손으로 출사하였으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李宗周(이종주) 선생의 일화.

 

李宗周(이종주) 본관: 固城(고성)

李宗周(이종주)(17s3~1818) 임청각
선생은 조선후기의 학자로 자는 春柏(춘백)이요 호는 북정 또는 癡軒(치헌)이다. 時興(시흥)공의 玄孫(현손)이며, 弘直(홍직)공의 아들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성실하고 총명하여 10세에 이미 글을 붙일 줄 알았으며, 배움이 독실하여 大山(대산) 李象靖(이상정)선생의 문인이 되었다. 선생은 약관에 공부를 이루어 1780년(정조 4)에 司馬試(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집 가까운 낙동강 언덕에 두어 칸 정사인 북정을 얽고 학문에 전심하였다. 일찍이 대산 선생은 선생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淸濁(청탁)高低(고저)가 정확하며 音響(음향)이 수려하다. " 고 칭찬하였다. 문학과 행검으로 사우들의 敬仰(경앙)을 받았다. 시문에 뛰어나 시문집인 [북정집] 5권 2책을 남겼다.

 

 

李相龍(이상룡) 선생의 일화.

 

李相龍(이상룡) 본관: 固城(고성)

石州(석주) 李相龍(이상룡) (1858~1932)
선생의 본은 고성이고 호는 石州(석주)이며 安東(안동) 출생이다.
1905년 金東三(김동삼)· 柳仁植(류인식)선생 등과 大韓協會(대한협회)  안동지부를 조직, 회장이 되어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쓰며, 강연회 등을 통하여 국민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間道(간도)로 망명, 지린성 류허현에서 梁起鐸(양기탁) 李始榮(이시영)선생 등과 新興講習所(신흥강습소)를 열어 교포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1912년 계몽단체 扶民團(부민단)을 조직,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韓族會(한족회)를 조직, 동료들의 자치활동에 힘쓰는 한편, 西路軍政署(서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督瓣(독판)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후 1926년 임시정부 國務領(국무령)이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또한 석주 선생의 동생인 이상동 선생과 이봉희 선생은 각각1968년 건국훈장 애족장과, 1990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석주 선생의 당숙인 이승화 선생은 1968년 애족장, 석주 선생의 아들인 이준형 선생은 1990년에 애국장, 이상동 선생의 아들인 이형국 선생과이운형 선생은 각각 1968년에 애족장, 이봉희 선생의 아들인 이광민 선생은 1990년에 독립장, 석주 선생의 손자이자 이준형 선생의아들인 이병화 선생은 1990년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李增(이증)의 묘비명

 

李增(이증) 世宗 1年 己亥(1419)~ 成宗 11庚子(1480) 62.

字 子謙. 固城人. 左議政 容憲 原

 

공은 철성부원군 李原(이원)의 아들로서 영산현감을 지내다가 안동에 처음 정착 한 분이다. 성종 7년 군내에 耆德人(기덕인) 12명과 友鄕契(우향계)를 조직하여 사가 서거정이 長詩(장시)를 지어서 칭송했다.

공의 묘소는 월곡면 미질도 수다산에 丑坐(축좌) 未向(미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풍수설로 蝸牛形(와우형)이라 하여 우리나라 10대 명산으로 손꼽히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미질 들 앞산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이것이 소의 양식이 되는 등겨바위 형상이니 자손이 번성하고 科臣(과신)이 많이 배출되는 名局(명국)이라 한다. 과연 공의 묘가 들어선 뒤 후선이 고관대작으로 현달하여 4~5대 지나게 되니 많은 후손들이 공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하여 이곳을 왕래하게 되어, 인근 주민들은 고관들 접대하기에 고역이 되기 마련이었다.

주민들은 어떻게 하면 이 고역을 면 할 수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지나가는 도승에게 그 방도를 물으니, 앞산에 등겨바위를 깨어 버리면 고역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 하여 주민들이 힘을 모아 그 바위를 깨어 버리니 그 후부터 묘소를 참배하는 이가 차츰 줄고 후손으로 현달하는 자도 없게 되어 부역이 없어지게 되어 고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다.

이러한 사연을 알게 된 이씨들이 깨어진 바위를 다시 싸 모았다 하나 그 후로는 발복이 없었다고 하는 믿기 어려운 말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공의 행장을 기록한 신도비는 1970,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기사리로 옮겼는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재사 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으며 공의 묘소는 옛날 지명 수다산과 같이 안동댐의 담수로 인하여 앞들은 물바다로 변하고 만수 때는 계단 아래 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다.

그리고 공의 묘역인 수다산에는 아들 사온서령 (), 임청각 (), 손자 반구정 ()의 묘소도 함께 자리 잡고 있다.

 

 

參判公墓碣銘

前面大字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通訓大夫靈山縣監鐵城李公諱增之墓

 

碑 文

維安東治北水多之山 有枕癸而封者 莊陵貞臣李公之藏也 旣有阡表 且有大碑 墓儀備矣 而阡銘 歲久而泐 字漫不可讀 將易石而新之後孫承傑氏 大耋過余 謀所以不朽 不佞年襄無文 不足以發潛闡幽而不能藏人之善 素性也 乃力疾據其狀 公姓李氏 諱增 字子謙 固城人 以 世宗元年己亥生 自少風姿瀟爽 絶俗一切芬華 泊然不留於心惟呻佔是好 端宗元年癸酉 中進士試 尋以蔭補 出宰鎭海靈山二縣淸愼慈惠 以治最聞 迨丙子 上王之遜于越也 公在靈山 未及瓜矣遂投紱歸隱于安東 生理冷淡簞瓢屢空晏如也 與鄕之耆德十餘人 修稧事 杖屢逍遙 矢心自靖 至 成宗十一年庚子九月己亥考終 乃後亞銓之贈 以次子貴也 公之解任也 適値危疑之際 故初不明言其故雖有知公之志者 亦爲公諱之 則後之人 只知公之薄於宦情 高蹈長往實不知公之大節 在於斯焉 於乎其在春秋諱尊之義 勢不得不然 而光廟旣以成朴諸公之死 爲後世忠臣 大哉王言 炳如日月 然則爲 莊陵盡節之臣 生死雖殊 其爲貞忠則一也 於是乎 公之棄官一節 始可以明言之矣 鼻祖璜 戶部尙書鐵嶺君 自是玄冕赤舃 世襲封君 大顯于麗朝 至諱原 世宗朝左議政諡襄憲錄淸白號曰容軒 寔公考也 前妣辰韓國夫人陽川許氏 妣弁韓國夫人全州崔氏軍簿摠郞丁智之女也 配貞夫人慶州李氏父監司暿後公三十年而卒 壽八十八 墓于公之塋左麓 育五男二女 男長泙司醞署令 贈都承旨 次浤文科留守 次洺佐郞 贈吏曹參議 次沼留守 次淸生進俱中 女壻趙銅虎郡守 黃頊禦侮 上係旣載大碑可按也 孫曾以下 振振不勝書 而世尙名節 公之遺風愈久而愈章 曷不韙歟銘 曰

奕舃家聲 首屈一指 獨擧鴻冥 坦其素履 山南福地 永矢考槃 風雲萬變 身名俱完 優游卒歲 知幾如神 何以㫌之 莊陵貞臣

參判 金寗漢 撰

<>

참판공 묘갈명

안동의 치소 북쪽 수다산에 계좌 등성의 봉분이 있으니, 장릉(莊陵단종 능호)의 정신(貞臣) 이공의 무덤이다. 이미 묘표가 있고 또 대비(大碑)가 있어 묘도의 전의가 갖추어졌으나 묘갈명이 세월이 오래됨에 글자가 만멸(漫滅)되어 읽을 수가 없었다. 장차 비석을 바꾸어 새롭게 하려 하면서 후손 승걸(承傑)씨가 대질(大耋)의 연세에 나를 방문하여 영원히 전해질 수 있는 방도를 의논하였다. 불영(不佞)은 나이가 많고 문장에 능하지 못하므로 감추어진 그윽한 덕을 드러내어 밝힐 수 없으나 또한 남의 선행을 그대로 숨겨둘 수 없는 것이 본래의 성격이기에 병든 몸을 참고서 그 행장에 의거하여 기술한다.

공의 성은 이씨, 휘는 증(), 자는 자겸(子謙), 관향은 고성이고, 세종 원년 기해(1419)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풍모와 자태가 깨끗하고 시원스러워서 세속의 일체 분화(芬華)를 끊고서 담박히 마음에 남겨두지 않았고, 오직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단종 원년 계유(1453)년에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얼마 후 음보로 진해 영산 두 고을의 원으로 나갔는데, 청렴하고 신중하며 자애롭고 은혜로워서 치적이 최고로 보고되었다. 병자(1456)년에 상왕(上王)이 영월로 귀양갈 때에 공이 영산에 있었는데 임기가 끝나기 전에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돌아와서 은거하였다.

생활이 어려워서 밥그릇이 자주 비었으나 편안하게 여겼고, 향중의 나이 많고 덕이 있는 10여 명 인사와 계를 맺고서 산수 간을 소요하면서 은둔하기를 마음에 맹세하였다. 성종 11년 경자(1480)9월 기해일에 별세하였고, 그 뒤에 차자의 현귀함으로 인해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이 벼슬을 그만둔 때는 마침 위태롭고 혐의로운 시기였기 때문에 애초에 그 까닭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니, 비록 공의 뜻을 아는 사람이 있었더라도 또한 공을 위하여 숨겼을 것인 즉, 뒷날 사람이 단지 공이 벼슬에 뜻이 적어서 세상을 떠나 은둔한 줄만 알고, 실재 공의 큰 절개를 알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아! 춘추(春秋)임금을 위해 숨겨주는 의리에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였다. 광묘(光廟)에서 이미 성삼문박팽년 제공의 죽음을 후세의 충신으로 여겼으니, 위대한 왕언(王言)이 일월처럼 밝은 것이다. 그렇다면 장릉을 위하여 충절을 다한 신하는 삶과 죽음은 비록 다르지만 그 정충(貞忠)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에 공이 벼슬을 버린 한 절개를 비로소 분명히 말할 수 있도다.

비조(鼻祖) 휘 황()은 호부상서로 철령군이다. 이로부터 고관대작이 대대로 이어지고 군()에 봉해져서 크게 고려조에 드러났다. 휘 원()은 세종 조에 벼슬이 좌의정이고, 시호가 양헌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호가 용헌이니, 이 분이 공의 부친이다. 전비(前妣)는 진한국부인 양천허씨이고, ()는 변한국부인 전주최씨이니, 군부총랑 정지(丁智)의 따님이다. 배위는 정부인 경주이씨이니, 부친은 감사 희()이고, 공보다 30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수명이 88세이고 공의 무덤 왼쪽 기슭에 묘소를 정하였다.

52녀를 두었다. 맏아들 평()은 벼슬이 사온서령으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다음 굉()은 문과에 급제하여 유수가 되었고, 다음 명()은 좌랑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다음 소()는 유수이고, 다음 청()은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사위 조동호(趙銅虎)는 군수이고, 황욱(黃頊)은 어모이다.

상계(上系)는 이미 대비에 실려 있기에 이를 통해 살필 수 있고, 증손 이하는 수가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세상이 명분과 절의를 숭상하여 공이 남긴 풍절은 오래될수록 더욱 빛나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이에 명()을 짓는다.

 

대대로 벼슬한 가문의 명성 세상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다네

홀로 솟아 큰 바다로 날아가 자신의 본분을 편안히 행했네

산남의 복지 안동에 은거하기를 길이 맹세했네

세상의 풍운 천만번 변해도 몸과 이름 모두 온전하였네

유유히 노닐며 세월을 보내니 기미를 앎이 귀신과 같았네

무슨 말로 공의 덕을 드러낼까 장릉의 정신(貞臣)이라 하리라.

 

 

 

李汯(이굉)의 묘갈명

 

 

李汯(이굉) 世宗 23 辛酉(1442)~ 中宗 11丙子(1516) 76.

字 深遠. 號 洛浦. 固城人 容軒 原孫子

 

공의 묘는 현 안동시 정상동에 있다. 묘 앞에는 상석이나 비석을 안치하지 않고 산록 아래에 설치하였는데 이는 풍수설 떼문에 그렇게 했는데, 중종 때는 민간에서도 풍수설을 신봉하였다 한다.

공은 25세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40세에 급제 하였다. 내직으로는 시강원 문학, 헌납, 지평을 거쳤으며, 외직으로는 군위, 청도, 상주, 및 충주, 경상수군절도사를 역임하고 개성 유수에 이르렀으나 중종 8(1513)73세로 사직하여 낙동강 변에 정자를 짓고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뜻을 따라 歸來亭(귀래정)이라 하여 호유하였다 한다. 그리고 공의 아버지가 창설한 友鄕契(우향계)를 계승하여 그 후손들 15명과 眞率會(진솔회)를 만들어 친목을 도모하고 함께 즐기니 이로 인하여 지금까지도 매년 우향계 모임이 이어지고 있다.

공이 지은 귀래정은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으며, 黃孤山(황고산)이 쓴 현판 외에도 많은 詩板(시판)이 걸려 잇으며 지금까지도 잘 조존되어 있다.

 

前面大字嘉善大夫開城留守洛浦李公神道碑

碑文

公諱汯字深遠固城人 高麗侍中文貞公杏村先生喦之四代孫也 年二十五中 乙酉進士 先父君辭職居安東 田舍聚鄕中 耆老名其契 曰友鄕 日與遊遨 公侍左右專務爲供其稱爲賢子弟嘗屢擧不中 士林恨其抱屈之久至强仕捷 庚子丙科錦還鄕里 以老不赴 朝是歲遭外艱服関拜典籍母年逾六十乞外便養銓曹有所避不擭願俄而朝議用降授無嫌軍威縣監辛亥遞拜司圃遷 世子侍講院文學司諫院獻納司憲府持平尋以言事除 工曹正郞又求補外除 淸道郡守己未考菡拜 司宰監僉正遷奉常寺副正司憲府執義禮賓寺正承文院判校 癸亥陞通政就拜尙州牧使 甲子以猶子冑正言時言事加罪謫寧海 丙寅秋蒙靖國恩宥拜僉知事移拜兵曹參議知尋授參議 丁卯特陞嘉善忠淸道兵馬節度使歸養辭職 恩許換慶尙銼刀水軍節度使 己巳丁內憂喪畢拜同知事漢城府左尹開城府留守 癸酉以老致仕換拜同知事卽移病歸安東農庄屢乞骸不得慇乃 許遂作亭洛水之上流扁以歸來日偃臥其中而奇傲焉湖山景致實興 映湖樓 相日其蕭散之相亭殆過之先父君嘗卜此欲置別墅而未就 公用就之是肯構之一端也 公天資英發深沈寡言寬厚爲長者 孝於父母友於兄弟待友接人各盡情禮咸得歡心焉 爲詩文平淡爲儕輩所推嘗作二律題其亭寓其懷詩曰 乾坤納納卽爲家 七十堂堂奈老何 猶喜世間醒日少 莫言身外悶時多 長林隱映烟籠水 古寺微茫月印沙 便覺五勞閒是藥 一竿漁艇足生涯 孤亭兀兀隔人家 短棹輕舟興若何 江上香冥靑霞合 山中怡悅白雲多 誰將蒻笠衝殘照 獨把漁竿弄晩沙 富貴倘來吾已退 芒鞋日日傍江涯 公之在京師也 文城柳領相洵漢山邇貳相蓀安判書琛金參判瑄十餘公與公少時南學舊儕至是俱逾七十結爲耆老會 佳辰今郞輪聚諸第談飮講歡 士大夫咸咨嗟景慕指爲盛事以此 洛中耆英會焉其退去也 大夫之去而巷處者 及鄕中醇謹老上舍等約爲 眞率會花朝月夕輒會樂飮居家蕭然 不問有無客至則 但趣供具 罄慇懃窮朝燻以爲常 公生於正統辛酉年 七十六以病卒于第 是正德內子四月初六日也 其冬窆于歸來亭南麓乾坐之原 考諱增縣監 增吏參 王考容軒諱原左議政鐵城府院君 曾王考平齊諱岡大提學 諱文敬卽杏村之子也 妣李氏觀察使暿之女 益齋齋賢之後亦鷄林望族也 公聚僉知宋衣之女 生一女 謫咸陽郡守 安㥠聚僉知張籍之女 生一男二女 男孝則奉事恭勤有操行能詩詞 女適卞亨孫領議政成希顔孝則男曰奉事命貞銘曰

鐵城李世顯隆能自約業 已通先行實取科遲 奉檄官無卑職所履見聲績都 嘉善位云奕雅恬淡乞骸勇身 逾寧名逾重亭洛涘形勝檀奇居然諸遺終天年七十六永安宅無感恧

嘉善大夫吏曹參判 黃孝獻 謹撰

傍後孫 濬衡 謹書

 

<>

가선대부개성유수낙포이공신도비

 

공의 휘는 () 이요 자는 深原(심원)으로 관향은 固城(고성)이다. 고려 시중 문정공 杏村(행촌) 선생 ()4대손이다.

25세 을유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선부군께서 사직한 뒤 안동 田舍(전사)에 살았는데 향중의 나이 많고 어진 사람들과 友鄕契(우향계)를 맺고 날마다 즐겁게 만났다. 공은 곁에서 모시면서 오로지 봉양에 힘써서 어진 자제라는 칭찬이 있었다. 일찍이 여러 번 과거에 응시 했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공이 오랫동안 뜻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한스럽게 여겨 억지로 벼슬하게 하려 했으나 경자년에 병과에 급제하여 금의환양한 뒤 어버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해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상을 마치자 典籍(전적)에 배명되었다. 모친의 나이가 60이 넘어 외직을 청해 봉양고자 했으나 이조에서는 혐의하는 내용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조정의 의논이 직급보다 하급직을 주는 것이 협의스럽지 않다고 하여 군위현감에 제수 되었다.

 

신해년에 체직되어 사포서에 배명되고 세자시강원 문학,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으며 이어서 언사로 공조정랑에 제수되었다. 또 다시 외직을 구해 청도 군수가 되었고 기미년에 임기가 차자 사재감 첨정이 되었고 봉상시 부정, 사헌부 집의, 예빈시 정, 승문원 판교 등 직으로 옮겼다.

계해년에 통정대부로 승계하여 상주목사에 배명되었다. 갑자년에 조카가 이조 정언시에 언사로 죄를 입어 영해로 귀양 갔다. 병인년 가을 국은을 입어 용서받고 첨지에 배명되었다. 다시 병조참지에 배명되었다가 참의가 되고 정묘 년에 특명으로 가선대부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모친 봉양을 위해 사직을 청하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바꾸어 주는 은혜를 입었다.

기사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상기를 다 마친 뒤 동지사에 배명되었고 한성부 좌윤,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계유년에 연로함으로 벼슬에서 은퇴할 것을 청하자 동지사로 바꾸어 주었고 그리하여 즉시 병 때문에 안동 농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누차 은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더욱 간절히 청함으로 비로소 윤허를 받았다.

 

드디어 낙동강 상류에 정자를 짓고 歸來亭(귀래정) 이라고 이름을 달아 두고 날마다 그 곳에 거처하며 편안하게 지냈다. 정자 주위의 경치는 실제로 映湖樓(영호루) 와 서로 다룰만 하였으나 소산한 기상은 더욱 뛰어난 감이 있었다. 선부군께서 일찍이 터를 잡아 별장을 만들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공께서 이 정자를 만들었으니 이 역시 조상의 유업을 잇는 한 가지 일이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영특하고 심후하고 침중하게 말씀이 적으셨고 관대하고 후중하여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벗과 사귀고 남과 상대할 때 각각 마음과 예법을 다하여 어른들로부터 모두 환심을 얻었다.

시와 글을 지을 때는 평담하여 동료들의 추중을 받았다. 일찍이 두 수의 율시로 귀래정을 노래했는데 그 회포를 적은 것이다.

시는 이러하다.

 

하늘과 땅에 붙여 집을 삼으니

칠십이라 당당한 늙음을 어이하리

그래도 세상일은 깬 날이 적으니

몸 밖에 번민할 때가 많다고 하지 말게나

빽빽한 숲은 물안개 위로 조금 보이고

옛 절의 그림자 달빛이 비치네

문득 한가롭게 거처함이 오리여 약 됨을 알아

배 띄워 낚시 드리우니 이내 생애 만족하네

우뚝하게 외로운 정자는 속세와 떨어졌는데

짦은 노에 작은 배는 그 흥이 어떠한가

강 가엔 아득하게 물안개 피어있고

산 속엔 상쾌하게 흰 구름도 많아라

삿갓 쓰고 노을에 있는 이 누구인가

홀로 낚시대 드리우고 강 가에서 즐긴다네

부귀는 내 이미 물러나 버렸거니

헤진 짚신 신고 날마다 강 가를 찾는다네.

 

공께서 서울에 계실 때 文城(문성) 柳領相(류영상) ()漢山(한산) 李貳相(이이상) (), 安判書(안판서) (), 김참판 () 등 십여 공은 공과 더불어 모두 어린 시절부터 남학의 옛 동료였는데 이때를 이르러 모두 70이 넘어 기로회를 결성 하였다.

그리하여 좋은 시절을 만나면 서로 모여 순번대로 집들을 방문하여 담소와 강론하여 즐겼는데, 당시의 사대부들이 모두 감탄하고 경모하여 참 좋은 일로 여기며, 낙중의 기영회에 비견할 정도였다.

공께서 물러나서는 자리에서 물러나 고을에 살고 있는 대부를 및 향중의 점잖은 진사나 원생들과 眞率會(진솔회)를 결성하고 화조월석이면 문득 모여 즐겁게 술잔을 나누곤 했다.

사는 집이 소연하였지만 있고 없음을 괘념치 않고 손님이 오면 얼른 대접을 하여 쌀독이 모두 비더라도 늘 상 기쁜 기색을 가시지 않았다.

공은 정통 신유년 (1441, 세종23)에 태어나 76세를 일기로 병이 들어 돌아가시니 정덕 병자년(1516, 중종11) 4월 초 6일이었다. 그해 겨울 귀래정 남록 곤좌 둔덕에다 장사 지냈다.

고의 휘는 ()이니 현감으로 이참에 증직 되었고 조부는 容軒(용헌) ()인데 좌의정으로 철성부원군에 증직 되었으며 증조부는 平齋(평재) ()이니 대제학으로 문경공의 시호를 받은 杏村(행촌)의 아들이다.

() 이씨는 관찰사 희의 따님으로 益齋(익재) 李齊賢(이제현)의 후손인데 역시 경주의 명망이 높던 성씨이다.

공은 첨지 宋衣(송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아 함양군수 安㥠(안서)에게 시집보냈다.

첨지 張籍(장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2녀를 낳았는데 孝則(효칙)은 봉사로서 공근하고 조행이 있었으며 글을 잘 지을 줄 알았다. 딸은 봉사 卞亨孫(변형손)과 영의정 成希顔(성희안)에게 시집갔다.

효칙의 아들은 봉사 命貞(명정)이다.

()은 이러하다.

 

 

철성 이씨는

대대로 현달한 성씨

스스로 요약하여

업을 이미 통달했네

행실은 갈고 닦느라

과거엔 늦어졌네

왕의 교서 받으니

관직은 낮지 않았네

맡은 바 직무를 수행해

칭찬이 자자했네

가선대부에 올랐으니

지위도 혁혁하다 할 만하네

평소 恬談(염담)함을 즐겨

벼슬을 그만 두고자 청했다네

몸이 편안 할수록

명망은 더욱 무거워졌지

낙동강 가의 저 정자여

그 모습 제일일레라

소연히 몸을 맡겨

온갖 소희 펼쳤다네

천수를 누리시니

칠십 하고도 여섯해라

안택에 길이 누우시니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으셔라.

 

 

가선대부이조참판 황효헌 근찬

방후손 준형 근서

 

 

 

李股(이고) 묘갈명

 

李股(이고) ?~ 明宗 6年 辛亥(1551)

字 子輔. 號 無禁亭. 固城人 刑曹佐郞 洺

 

공의 묘소는 안동시 일직면 명진동에 있다. 공은 후사가 없어 외손 藥峯(약봉) 徐渻(서성)의 후손이 봉제사하고 있다. 영가지 기록에 청풍군수를 역임하다가 돌아와 留鄕所(유향소)의 수좌로 추대되어 향리의 三壇案(삼을단안)考定(고정)하였다 하며 秃川(독천) 가에 정자를 지여 학을 기르고 만년을 自適(자적)하면서 自號(자호)無禁亭(무금정)이라 하였다 한다. 嘉靖(가정) 34(명종 10, 1555)에 세운 短碣(단갈)이 있었으나 타인이 훼손하여 순조 32(1831)에 외10대손 徐俊輔(서준보)가 찬문울 홍문관 수찬 姜必魯(강필로)가 쓴 비가 서 있다.

전면의 큰 글씨는 홍문관 수찬 李家淳(이가순) 글씨인데 특이하게도 안동지방에서는 자획을 평각한 비는 이것뿐이다.

 

墓碣銘

安東府南四十里 八郞洞 而睪如者枕子 而午卽 我八代祖 忠肅公 外王考 李公 衣履之藏也 謹按系 高祖諱岡 年十五 擢第官至 進賢館提學 諡 文敬 曾祖諱原 年十八 擢第官至 左議政 鐵城府院君 諡 憲祖 祖諱增 官縣監 考諱洺 官佐郞 妣 南平文氏 諱長壽女 公諱股 字子輔 號無禁亭 官淸風郡守 配淑人漢陽趙氏 忠義衛讜之女 繼配淑人金氏未育趙氏擧一女 嘉靖癸丑歸于 我九代祖 涵齋公諱嶰寔生 忠肅公諱渻 擢第官至 判中樞府使爲穆陵朝名臣 盡事功昭載國乘世 稱藥峯先生 忠肅公遺藳中 有曰 不幸外祖無嗣 有側室二子而今皆不存 奉祭守墓終歸於不肖孫云 忠肅公有四男 右議政諱景雨 典籤諱景需 僉樞諱景䨬 達成尉諱景霌 尙 宣祖 長女貞愼翁主 自是各派繁衍 世襲簪組監 六世而毓慶發祥 貞聖聖母降焉 克配英廟庭膺坤化十世之間 冠者千餘人高官大爵 磊落相望豈不盛哉

嗚呼 外祖厚德厖休不食後嗣而 歲時香火寄於 自出此所 謂難堪者天耶也 世代寢遠 文獻無徵 生年月日 言行筆蹟 莫得而詳焉 公之旁裔 世居嶠南 蔚爲望族 墓前有表石 立柱 嘉靖三十三年而 無陰記 年前以階下 古塚被雙人 潛折 京鄕宗人合議竪碣 爲記陰 此實冢 孫秉淳時宰善山終始之

嗚呼 凡爲我忠肅公之 世世子孫者 能以忠肅公之心 爲心以盡奉祭守墓之 責則庶可爲 追先報本之一也 詩曰孝子不匱永錫爾類諸宗其勉之

崇政大夫 禮曹判書 徐俊輔 撰

通訓大夫 弘文館修撰 姜必魯 書

前面大字 弘文館修撰 李家淳 書

 

<>

묘갈명

안동시에서 남쪽 40리떨어진 팔랑동 따듯한 곳에 터를 잡고 있는 것은 나의 대조 忠肅公(충숙공)인 외조부 李公(이공)을 매장한 것이다.

삼가 가계를 살펴보면, 고조 휘 ()15세에 선발되어 관직이 進賢館提學(진현관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文敬(문경)이다.

증조부의 휘는 ()인데 18세에 뽑혀서 관직이 左議政(좌의정) 鐵城府院君(성부원군)이 되었으며 시호는 憲祖(헌조)이다. 조부의 휘는 ()이며 관직은 縣監(현감)이고 부친의 휘는 ()인데 벼슬은 佐郞(좌랑)이다. 모친은 南平文氏(남평문씨) 長壽(장수)의 따님이다.

공의 휘는 ()이고 자는 子輔(자보) 호는 無禁亭(무금정)이며 괸직은 淸風郡守(청풍군수)였다. ()는 숙인 漢陽趙氏(한양조씨) 忠義衛(충의위) ()의 딸이며, 繼配(계배)는 숙인 김씨 자식을 낳지 못했다.조씨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가정 계축년에 시집을 갔다.

나의 구대조 涵齋公(함재공) 嶰寔(해식)忠肅公(충숙공) ()을 낳았는데 과거에 뽑혀 관직은 判中樞府事(판중추부사)가되어 穆陵朝(목릉조)의 명신이며 나라 일을 정성을 다해 밝게 하여 사람들이 藥峯先生(약봉선생)이라 부르는데, 忠肅公(충숙공)이 남긴 유고 중에 이르기를 불행하게도 외조부에게는 후사가 없고 측실에 두 아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다. 봉제사와 守墓(수묘)는 결국 불초 이 ()에게 돌아 왔다.하였다.

충숙공에겐 아들 젯이 있는데, 右議政(우의정) 景雨(경우), 典籤(전첨) 景需(경수), 僉樞(첨추) 景䨬(), 達成尉(달성위) 景霌()이고 宣祖(선조)長女 貞愼翁主(정신옹주)를 받들었다.

이때부터 강파가 번성하고 관직을 세습하는 자가 많았으며 6세에 이르러 경사가 발생하여 貞聖聖母(정성성모)가 나와 英廟庭(영묘정) 배향되니 坤化(곤화) 10세 사이에 冠者(관자)와 고관대작이 천여명이나 쏟아져 나와 서로 바라보니 어찌 가문이 성하다고 아니 할 손가.

오호! 외조부는 크게 후덕하나 後嗣(후사)가 없어, 절기에 따라 향불을 켜는 것은 여기서 나가며 참 어려운 일이다. 세대개 멀어 지고, 무헌에 증거 할 일들이 없어, 생년월일과 언행과 필적은 상세하게 얻을 수가 없다. 공의 방계 후손이 嶠南(교남)에 사는데 성하고 명망이 있는 집안이다.

묘 앞에 表石(표석)을 가정 33년에 세웠는데 陰記(음기)가 없다. 작년 階下(계하)의 고분을 두 사람이 몰래 꺾으니 京鄕(경향)의 종인들이 합의하여 竪碣(수갈)하기를 결의하고 陰記(음기)를 하기 위해 이 실기를 무덤에 () 맡아, 선산에서 벼슬 할 때 시말을 쓰게 되었다.

오호! 우리 忠肅公(충숙공)께서는 모든 일을 하셨으니 대대로 자손 된 자는 능이 충무공의 마음으로 제사를 잘 모시고 묘역을 지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 일이며 선조를 추모해서 자신의 근본을 알게 되는 한가지 길이다. 시에 이르기를

효자는 다함이 없고, 길이 모든 이에게 주대, 많은 종인은 그렇게 하기 힘쓸 것이다.

 

숭정대부 예조판서 徐俊輔(서준보)

통훈대부 홍문관수찬 姜必魯(강필로)

전면대자 홍문관수찬 李家淳(이가순)

 

 

 

李周禎(이주정) 墓碣銘(묘갈명)

 

碑 文

公諱周禎字翰伯初諱宗洛字景詹姓李氏貫固城文貞公杏村諱嵒文敬公平齋諱岡顯於麗代襄憲公容軒諱原又顯 本朝爲左議政三世文章德業俱載史乘生諱增縣監退老于永嘉子孫遂爲永之人屢世官蔭塗八世而有諱時沆文科郡守公曾大父也祖諱元馥考諱弘輔妣永川李氏德龍女參判民寏后也公生 元陵庚午 健陵丁酉上庠乙卯登文科 純宗甲子陞典籍冬遷禮曹佐郞尋知結城縣事戊辰罷歸癸酉除持平丙子复 除皆以在外遞秋 除開城府經歷戊寅卒于官歸葬于府東十里勿冶艮坐之原 公三歲喪母弱不能步日匍匐哭於殯門見者涕下甫嬉遊就屋後隙地築小壇名先聖位得苽果之屬俯伏祗薦之爲拜揖進退狀稍長日問寢外端坐通讀竈不煬者或數日愈不懈丙申請業于大山李先生自言初見先生歸有不履生草之心旣小成以親命居泮齋不喜逐隊獨閉門肄業宰結城有老媼愬其子不孝子隨而號泣公諭之曰看爾隨泣非惡子無乃爾婦是過與母子俱感服有兄弟訟奴婢卽判曰兄弟與奴婢孰重官則媿淸河太守汝等婢乙普明兄弟湖之大夫士傳誦之羞曲意事上官使關徵漁船運先碣公以妨漁農靳之上司亦謝之後使至其墓戶席勢訟民田公執不與使憾之罷公職在松京俗以貨賂相高凡有訟率以幣交公惟視曲直與可者取市廛錦帛雜物準時高下不用謬定從省直上司易亦屈已以聽卽板揭之以杜後歡聲載路時與士子行鄕飮禮講經旨士皆感奮旣卒皆悲之如親戚公旣薄取無以爲喪廛民爭獻錦段士爭致賻襚以歛以歸及練相與記居職善事遺儒生致奠又琢石爲去思臺可見其惠之入人深也公雅意柔術常以薄宦喪志爲恨衣帶整飭讀書有程課語子弟以飭身謹行動志業簿嗜欲循循有規度文章贍敏識解博雅亦以騰里爲戒不輕以語人配完山柳氏府尹榰後象源女不育繼配咸安趙氏漁溪旅後運昌女生三男一女男梓秀敬秀應秀女李喬相梓秀二男庭蓂庭鏞敬秀四男庭揚庭寧庭鳳庭鴻應秀三男庭德庭錫一幼曾玄以下不盡錄銘曰

士常恨不見用及用也常媿不以道大者如此小者可考觀公存心於愛物蓋非有勉而爲惜也枳棘之林無能展其所施一見先生便有不履生草之心出而不負斯語吾知感之也深

上之十二年丙午淸明節 通訓大夫前行司諫院大司諫知製 敎完山柳致明謹撰

 

지평공 묘갈명

공의 휘는 주정(周禎)이고 자는 한백(翰伯)인데, 초휘(初諱)는 종락(宗洛)이고 자는 경첨(景詹)이며, 성은 이씨로 본관이 고성(固城)이다. 문정공 행촌(杏村) 휘 암()과 문경공 평재(平齋) 휘 강()이 여대(麗代)에 현달하였으므로 그리고 양헌공 용헌(容軒) 휘 원()이 또 본조에서 영현하여 좌의정을 지냈는데, 삼세(三世)의 문장과 덕업이 모두 사승에 기록되어 있다. 이 분이 휘 증()을 낳았는데 현감을 지낸 뒤 영가(永嘉)에 퇴로하여 드디어 자손들이 안동 사람이 되었다. 여러 대를 음도의 벼슬을 지낸 뒤 8세에 이르러 휘 시항(時沆)이 문과하여 군수를 지냈는데 공의 증조이시다. 할아버지는 휘가 원복(元馥)이고, 아버지는 휘가 홍보(弘輔)이며, 어머니는 영천이씨(永川李氏)로 덕룡(德龍)의 딸인데 참판 민환(民寏)의 후손이다.

공이 원릉 경오(1750)년에 태어나서 건릉 정유(1777)년에 상상(성균관 생원)에 오르고 을묘(1795)년에 문과에 올랐다. 순종 갑자(1804)년에 전적에 올랐다가 겨울에 예조좌랑으로 옮겼으며, 곧 결성현감으로 나갔다가 무진(1808)년에 파귀하였다. 계유(1813)년에 지평에 제수되었으며, 병자(1816)년에 또 다시 제수되었다가 재외(지방에 있는 것)로 인하여 체면되었다. 가을에 개성부의 경력에 제배되었다가 무인(1818)년에 임소에서 서거하였는데 부동 10리 물야의 간좌(艮坐)의 언덕에 귀장하였다.

공이 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체약하여 걸음을 걸을 수가 없어 매일같이 기어서 빈소를 찾아가서 울었다. 사람들이 보고 눈물을 흘렸다. 겨우 소꿉장난할 나이가 되자 집 뒤의 빈 땅에다 자그만 단을 쌓고는 선성(先聖)의 신위(神位)라고 이름을 붙이고 오이, 과일, 등속을 구해다가 부복하여 올린 뒤 배읍하고 진퇴하는 흉내를 내었다.

차츰 자라자 매일같이 침실 밖에 와 문안하고 돌아가서는 단정히 앉아 글을 읽었는데, 더러 부엌에 불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여러 날이 되어도 전혀 이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병신(1776)년에 대산(大山) 이 선생(李先生)에게 수업을 청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처음에 선생님을 뵙고 돌아올 때 살아있는 풀을 밟아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였다. 소성(소과 급제)을 이룬 뒤에 친명으로 반재(성균관의 재실)생활을 하였는데 남들과 떼 지어 어울리는 것이 싫어서 홀로 문 닫고 들어앉아 공부를 하였다.

결성현감으로 나갔을 때 어떤 노파가 자신의 불효를 호소하여 왔는데 그 아들이 울면서 따라 들어왔다. 이에 공이 타이르기를 네가 울면서 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니 그렇게 나쁜 자식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이 너의 아내가 저지른 죄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모자가 모두 감복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또 어떤 형제가 노비 문제로 송사를 일으켰다. 공이 즉시 판결하기를 형제와 노비 중에 어느 쪽이 더 중한가? 관은 청하태수(淸河太守)에게 부끄럽고 너희들은 을보명(乙普明) 형제에게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하였다. 호중(충청도)의 사대부들이 듣고 이를 서로 전송하였다고 한다.

뜻을 굽혀서 상관을 섬기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관찰사가 관문을 내려 어선을 징발해서 선산의 빗돌을 운반하려고 하였으나 공은 어농에 방해가 된다 하여 응하지 않았으며, 상사 또한 사례하였다. 그리고 후임 관찰사가 왔는데, 그 묘호(묘지기)가 세력을 믿고 백성들의 땅에 송사를 걸어왔으나 공이 단호하게 부결시켰다. 관찰사가 앙심을 품고 공을 파직시켰다. 송경에 있을 때의 일이다. 풍속이 뇌물을 숭상해서 송사가 있으면 모두 돈으로 교제하였다. 그러나 공은 오로지 그 곡직만을 따져서 올바른 자의 편을 들어주었다. 시전의 비단이나 명주, 기타 잡물 등을 취용할 때는 시가의 고하를 따라 하였으며 잘못 정해진 규례를 따르지 않았다. 이처럼 공정하게 처리하니 상사 또한 자기 뜻을 굽혀서 청종하였다. 이에 즉시 이를 게판하여 후래의 잘못을 예방하니 기뻐서 환호하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하였다. 가끔씩 사자(士子)들과 함께 향음주례를 행하고 경문의 뜻을 강론하니 선비들이 모두 감분하였다.

그러다가 공이 죽자 다들 모두 친척처럼 슬퍼하였다. 그러나 공이 이미 모은 재산이 없어 상사를 치를 길이 없었다. 그러자 시전의 백성들이 다투어 비단 필을 바치고 선비들이 다투어 부의금을 내어서 드디어 수의와 염습을 갖추어서 귀장하였다. 그리고 연상이 되자 거직할 때의 훌륭한 일들을 서로 기록해서 유생에게 주어 치전하였다. 그리고는 또 돌을 깎아서 거사대를 만들었다. 그 은혜가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음을 알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공이 유술에 뜻이 있어 박환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함을 항상 안타깝게 여겼다. 의대를 정칙하고 글을 읽음에 정과가 있었다. 자제들에게 타이르기를, 몸을 단속하고 행동을 조심하여 지업(志業)에 열중하고 기욕을 멀리 하라고 했는데 모두가 하나 같이 법도가 있었다. 문장이 부섬하고 명민하고, 지식과 이해가 광박하고 우아하였다. 그러나 또한 말만 앞세우는 것을 경계하여 함부로 남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배위 완산류씨(完山柳氏)는 부윤 지()의 후예로 상원(象源)의 딸인데 자녀가 없다. 계배 함안조씨(咸安趙氏)는 어계(漁溪) ()의 후손으로 운창(運昌)의 딸이다. 3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재수(梓秀)경수(敬秀)응수(應秀)이고 딸은 이교상(李喬相)에게 출가하였다. 재수의 두 아들은 정명(庭蓂)정용(庭鏞)이고, 경수의 네 아들은 정양(庭揚)정녕庭寧)정봉(庭鳳)정흥(庭鴻)이며, 응수의 세 아들은 정덕(庭德)정석(庭錫)이고 하나는 어리다. 증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선비가 항상 쓰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다.

그러나 쓰이고 나면

도리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또 항상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큰 자가 이와 같으니

작은 자는 가히 상고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공이 백성의 사랑에다 그 마음을 둔 것을 볼 때

이것이 모두 애를 써서 억지로 한 것들이 아니다.

애석하구나

비좁은 가시나무 수풀에서는

그 포부를 모두 펼칠 수가 없었거니

한번 선생을 보고는

살아있는 풀을 밟아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일었는데

벼슬에 나가서 이 말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그 감동이 깊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금상 12(1846) 병오의 청명절에 통정대부 전행 사간원 지제교 완산(完山) 류치명이 삼가 짓다.

 

 

 

李時沆(이시항) 通訓大夫行兵曹正郞李公墓碣銘

(통훈대부행병조정랑이공묘갈명)
【前面大字】通訓大夫行兵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固城李公時沆之墓
               淑人昌寧成氏祔

【碑 文】
公諱時沆字一初姓李氏固城人杏村文貞公嵒大提學文敬公岡仍父子顯於麗季子原入 本朝官左議政封鐵城府院君子增以靈山縣監投紱而歸始居于安東子洺與其兄浤棄官歸臥作臨淸歸來以寄老數世至諱遲同知中樞寔爲高祖曾祖諱宗培祖諱蕡考諱後植 贈左承旨同樞公有弟諱適參奉生諱克培生諱灮以承旨公爲嗣娶弘文校理金公璁之女有八子公第居六 資性溫雅聰敏辛丑以明經登第壬寅選補槐院癸卯除長寧殿別檢未幾遞丁未陞成均典籍遷殿中戊申受暇還鄕湖西賊稱亂道塗梗塞公從間道奔 問關東伯李衡佐見而歎曰嶺外微官冒死勤 王忠義可感遂發文護行得抵京師 上嘉奬命別加調用自工禮郞遷騎省一日朝參脚澀失儀遂就理大臣白其道路窘步狀 上命還本職參原從勳推 恩先公秋陞郞中兼右史進讀商書衍義諸篇應對詳明 上亟加稱賞冬請假歸營子婚曹吏以故事白婚具公却之曰本司所儲 皆軍國之需何敢私用未幾 除麻田郡守邑殘民疲重以兵荒公捐廩設賑所全活甚衆一日出待首相侍直李公浹以職事謁首相欲與公俱公辭以義無私謁李公歎其雅操郡素乏文獻公設六條以勸士行數年士風稍振庚戌棄官歸屛居田里與門族修伴鷗先亭攜弟姪招朋舊婆娑以寄興乙丑復典籍陞騎曹郞中丁卯佐湖幕仍兼春秋戊辰管海運私賂不行却例進竣事卽歸臥于家己巳三月七日卒距庚午六月十三日享年六十五月十二日葬于鷗亭南麓向癸原公端厚謙謹事親孝與兄弟友晩年取孔懷之義名其堂以八懷座右手書守拙忍性四字以自省公莅官廉公接物平和大臣有籍公名姓將薦用而不果金員外聖鎔每歎其廉潔不可及公性謙不以文詞自居有時遣興之作多爲詞宗所歎賞配昌寧成氏弘文應敎以性之孫參奉 贈吏曹參判文夏之女配君子無違德生丁卯卒乙亥葬與公同塋異封生六男一女男元馥元出后元馨元馝出后元元女適士人洪錫疇元馥子弘輔弘載弘轍弘輅出后女適權慶達元子弘道弘魯女適柳鳳休申宗烈元馨子弘正弘聖弘格出后女適趙載喆元馝子弘毅女適金龍翰柳思文元子弘大女適金廣運南景默元子幼女適沈海澤弘輔子宗洛生員弘載子宗周進士入承承旨公祀曾玄以下多不盡載其孤元屬象靖曰先君之墓木已拱而尙闕顯刻敢以銘詩請 象靖自惟吾先祖牧隱實銘杏村父子之墓今以荒蕪之辭得相玆役亦私自幸焉遂不敢辭銘曰
鐵城之世休官高退水邊亭閣無恙物外公爲其後嗣德銜訓薄仕于朝旋試之郡民憂縱切久非吾志歸褎翩然閑臥故里俛仰嘯咏宛宛遺風亦豈忘世急 君孤忠方伯嗟歎 至尊嘉賞勳參原從恩賁竆壤鷗亭之陽冠履攸藏某水某邱魂魄倘徉
韓山 李象靖撰

■ 통훈대부 행 병조정랑 이공 묘갈명
공의 휘는 시항(時沆), 자는 일초(一初), 성은 이씨(李氏)로 고성인(固城人)이다.
행촌 문정공 암(嵒), 대제학 문정공 강(岡) 부자 분께서 고려 때 현달하였다. 자 원(原)이 본조에 들어와 좌의정으로 철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자 증(增)은 영산현감으로 재직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서 처음으로 안동에 살게 되었다. 자 명(洺)은 그의 형 굉(浤)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임청․귀래 등의 정자를 지어 여생을 보냈다.
수세를 지나 휘는 지(遲), 동지중추인데 고조가 되시고 증조의 휘는 종배(宗培), 조의 휘는 분(蕡), 고의 휘는 후식(後植), 증좌승지인데 동지중추공의 아우인 휘 적(適), 참봉 자 휘 극배(克培), 자 휘 광(灮)으로 승지공이 후사를 이었다. 공은 홍문교리 김공(金公) 총(璁)의 딸에게 장가들어 팔형제를 낳았는데 공이 여섯 번째가 된다.
천성이 온아하고 영특하여 신축(1721)년에 명경과에 급제하여 임인(1722)년에 괴원에 임명되었다가 계묘(1723)년에 장령전 별검으로 있다가 정미(1727)년에 성균 전적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전중으로 임명되었다. 무신(1728)년에 휴가를 받아 집에 와서 쉬고 있던 중 호서(湖西)의 적이 반란을 일으켜 도처에 길이 막혀 사람이 내왕할 수 없었는데 공은 사이길을 이용하여 서울로 가던 중 관동백 이형좌(李衡佐)가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영남의 미관(微官)이 죽음을 무릅쓰고 국왕을 위해 달려가는 충성심에 참으로 감격했다.”라고 하면서 통지문을 발행하여 서울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다.
임금님은 그 경위를 들으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특별히 공․예랑(工禮郞)으로 임명하여 기성으로 발탁하였다. 하루는 조참에 걸음걸이가 불편하여 실수를 하여 벌을  받게 됨에 대신이 나아가 먼 길을 걸어오느라 걸음걸이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아뢰었더니, 임금님은 본직에 임명하도록 하고 원종공신에 참여토록 하였다. 가을에 낭중으로 승진시킨 뒤에 우사를 겸하도록 하여 상서와 연의의 각 편을 강독할 때 임금의 물음에 소상하게 대답하였더니 임금님은 매우 칭찬하였다. 겨울을 맞이하여 아들의 혼사로 휴가를 받아 잠시 귀향하려던 중, 조리(曺吏)가 고사를 들어 혼수를 마련하여 줄 것을 청함에 공은 물리치며, “본사(本司)에 비축하고 있는 모든 물건은 군국에 필요한 물건인데 어찌 사용(私用)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받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마전군수로 임명되었는데, 고을이 너무 피폐하여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공금을 내어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였더니 그 혜택을 입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하루는 수상(首相)을 맞이하러 나갔을 때 시직으로 있던 이공(李公) 래(淶)이 공무로 인하여 수상을 배알하게 되었는데 공에게 함께 가서 인사하길 청하자 공은 “의리상 사적으로는 배알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이공은 그의 아조에 탄식하였다. 마전군이 본래부터 학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 모든 예절이 없기에 공은 선비가 되는 방법 여섯 가지 조항을 만들어 익히도록 하였더니 두어 해 사이에 선비의 풍토가 일기 시작하였다.
경술(1730)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반구정을 수리하여 여러 친지들과 함께 소일하게 되었는데, 을축(1745)년에 새로이 전적으로 복직되어 기조 낭중으로 승진, 정묘에 좌호막이 되었는데 춘추의 직은 그대로 겸하였다. 무진(1748)년 해운사에 임명되어 뇌물이 행하지 못하도록 하고 묵은 폐습의 조례를 철폐토록 하였다. 이어 고향으로 돌아와 기사(1749)년 3월 7일 세상을 떠났는데, 경오(1690)년 6월 13일로부터 향년이 60세이다. 5월 12일 반구정의 남쪽 기슭 계향으로 안장하였다.
공은 단정하고 겸손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였다. 만년에 공회(孔懷)의 의의를 취하여 그 집을 팔회당이라 하면서 좌우에 수졸인성(守拙忍性)이란 네 글자를 써서 붙여 놓고 스스로 성찰하였다. 벼슬길에 있어서는 매사에 청렴하고 외물에 접할 때는 공평하고 따뜻하게 하였기에 대신이 공의 이름을 문서에 적어두고 크게 쓰려고 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김원외(金員外) 성용(聖鎔)은 공의 청렴함을 따라갈 수 없다고 언제나 극찬하였다. 공은 성격이 겸손하여 문사(文詞)로 자부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공이 평소에 지은 시가 모두가 세인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배(配)는 창녕성씨(昌寧成氏) 홍문응교 이성(以性)의 손(孫)이며, 참봉 증 이조참판 문하(文夏)의 따님으로 군자의 배필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정묘(1687)년에 태어나 을해(175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공의 묘소와 같은 곳에 있으나 봉분을 따로 하여 안장하였다. 6남 1녀를 낳았는데 남에 원복(元馥)․원하(元)는 출후하였고 원형(元馨)․원필(元馝)도 출후하였으며 원담(元)․원집(元)이다. 딸은 홍석주(洪錫疇)에게 출가시켰다. 원복의 아들은 홍보(弘輔)․홍재(弘載)․홍철(弘轍)․홍로(弘輅)는 출후하였다. 딸은 권경달(權慶達)에게 출가시켰다. 원하의 아들은 홍도(弘道)․홍로(弘魯)이고, 딸은 류봉휴(柳鳳休)․신종열(申宗烈)에게 출가시켰고, 원형의 아들은 홍정(弘正)․홍성(弘聖)․홍격(弘格)은 출후하였고, 딸은 조재철(趙載喆)에게 출가 시켰고, 원필의 아들은 홍의(弘毅)이고 딸은 김용한(金龍翰)․류사문(柳思文)에게 출가시켰다. 원담의 아들은 홍대(弘大)이고 딸은 김광운(金廣運)․남경묵(南景黙)에게 출가시켰다. 원집의 아들은 어리다. 딸은 심해택(沈海澤)에게 출가시켰다. 홍보의 아들은 종락(宗洛:周禎)인데 생원이고 홍재의 아들은 종주(宗周)이니 진사인데 승지공의 봉사를 하게 되었다. 증현(曾玄) 이하는 모두 기록할 수 없다. 공의 아들 원담이 나에게 청하기를 “선군(先君)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수년이 경과되었으나 아직까지 명시(銘詩)를 받지 못하였기에 청을 드리옵니다.”라고 하였다. 상정(象靖)은 삼가 생각해 보건데 나의 선조 목은공[李穡]께서 행촌공[李嵒] 부자의 묘비에 명(銘)을 하셨다. 이제 변변치 못한 글로 이 일에 참여하게 됨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명(銘)하기를,

 

철성(鐵城)의 세대에 벼슬길 물러나
강가에 정자를 지어 한가로이 보냈도다.
공은 그의 자손으로 덕망이 높았고
벼슬길에 있어서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었네.
벼슬살이 미련없이 떨쳐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나의 취향 즐겼다네.
대대로 지켜오던 유풍을
세월따라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임금님의 위급함에 의로운 충정을
당시의 방백들 놀라고 감탄했지.
임금님의 더없는 칭찬으로
훈신(勳臣)의 반열로 원종공신록에 올랐네.
임금님의 은혜 사후에도 내려질제
반구정(伴鷗亭)의 남쪽이라지.
평소 입던 의복가지 함께 안장할제
자연과 함께 노니는 혼백이라지.


한산(韓山) 이상정 지음

 

 

李容(이용) 墓碣銘(묘갈명)

 

辛未~己卯  69
字 士寬.  號 漁隱

李滉(이황) 문인. 厚陵參奉(후릉참봉)이 되었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퇴계 이황 등과 교유하였다. 족보에 이황이 준 詩(시)가 전한다. 이용의 처 광산 김씨는 감사를 지낸 金緣(금연)의 딸이며, 진사를 지낸 曺致唐(조치당)의 외손이다. 이용과 그의 처 김씨의 묘는 안동부 동쪽 道谷(도곡)에 합폄되어 있다.
이황 선생 喪後(상후) 安東鄕儒(안동향유)의 共奠祭文(공전제문)을 지음.

【墓碣銘】
朝散大夫 厚陵參奉墓碣銘
【前面大字】朝散大夫行 厚陵參奉固城李公之墓
               淑人 光州金氏 祔

【碑 文】
公諱容字士寬鉄城之李爲東方大姓在麗季有文僖公諱尊庇文憲公諱瑀杏村文貞公諱嵒平齋文敬公諱岡文章德業輝映國棄文敬公子容軒襄憲公諱原 本朝左議政封鉄城君扵公爲高祖也曾祖 贈吏參諱增投靈山綬歸安東居焉祖 贈吏議諱洺投義興綬歸搆臨淸閣考禮賓別提諱肱亦掛冠歸搆伴鷗亭時人以三世歸一家名節稱之妣星州李氏司直明憂女以 中廟甲戌十二月十七日生公于府之南門外里茅幼器度異凡不爲淺狹之行及上學一遵別提公訓勵志不懈後從退溪李先生滉遊益致精約戊申丁外憂戚易備至仲父修撰公胖無子公侍養奉祀癸丑國內大饑朝廷議賑貸公傾貲助捐四境頼焉甲寅 除厚陵參奉自燕山戊申之後士禍連仍公心常戒懼無意仕進以母夫人命黽勉就職居數臘遂拂袂而歸時淑人年已六十朝夕不離側愉惋以致養退則湖山琴酒逍遙以忘世李先生贈詩云箇中自有風流伴浩蕩難馴萬里鷗盖公之學務宲地而崇自然不爲名利所牽不爲儀文所縛恬靜踈雅自成一家規範也 明庙癸亥十一月十七日卒享年五十葬于府東道谷負坎之阡遺文宲績有巾衍世藏不幸蕩入扵龍蛇兵燹配光州金氏監司緣女淑哲有婦德生辛未十月七日卒己卯正月十二日壽六十九合附公墓男復元司直贈判決事復初蚤夭女柳雲龍牧使 贈吏判謚文敬復元男遲工議陛同中樞遵參奉適參奉逈忠義衛僉正女高從厚縣監 贈左贊成 諡孝烈李根坤金克佺郡守曾孫以下不盡錄公墓舊有碣歲久頑泐距公世四百二十四年丙寅雲仍謀伐石易之以其陰命象羲眇玆孱孫何足以述先德謹錄世系生卒及改竪顚末如此繼之以銘銘曰
赫赫華冑棲心澹泊篤踐彛倫超脫禮縳德符旣充從遊大方時經戊甲餘焰孔颺陵署何官暫出旋藏濠魚知樂海鷗尋盟至今江閣月白風淸
紀元四千二百五十九年丙寅 十五代孫 象羲 謹撰

<해>
【묘갈명】
조산대부 후릉참봉 묘갈명


후릉참봉공 李容의 묘

공의 휘는 용(容)이요 자는 사관(士寬)이시다. 철성이씨는 우리나라의 대성으로 고려 말에 문희공(文僖公) 휘 존비(尊庇), 문헌공(文憲公) 휘 우(瑀), 행촌(杏村) 문정공(文貞公) 휘 암(嵒), 평재(平齋) 문경공(文敬公) 휘 강(岡)께서는 문장과 덕업으로 역사책을 빛냈고, 문경공의 아드님 용헌(容軒) 양헌공(襄憲公) 휘 원(原)은 본조에서 좌의정을 지내시고 철성군에 봉해지셨으니 공에게는 고조되시는 분이다. 증조는 이조참판에 증직되신 휘 증(增)이시니, 영산부사를 그만두고 돌아와 안동에서 사셨다. 조부는 증(贈) 이조참의 휘 명(洺)이시니 의흥현감을 그만두고 돌아와 임청각을 지으셨다. 아버지는 예빈시 별제를 지내신 휘 굉(肱)으로, 이 분도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반구정을 지으셨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3대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온 한 가문의 이름난 절개를 칭송하였다.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사직을 지낸 명우(明憂)의 따님이신데, 중종 갑술년 12월 17일 안동부의 남문 밖 마을의 자택에서 공을 낳으셨다.
공은 어려서는 그릇과 도량이 여느 아이들과 달라서 천박한 행동을 하지 않으셨는데, 학문할 나이가 되어서는 한결같이 별제공의 가르침을 따라 뜻을 기름에 게으르지 않더니, 뒤에 퇴계 이황(李滉) 선생을 종유하며 더욱 정밀함과 간략함을 이루시었다. 무신년에 부친상을 당하셨는데 슬픔과 격식을 다하였다. 중부(仲父) 수찬공 반(胖)께서 자식이 없자, 공이 모시며 봉양하고 제사를 받들었다. 계축년에 나라 안에 큰 흉년이 들어 조정에서 진대(賑貸)를 의논함에 공께서 재물을 내놓아 도우니 사방이 그 혜택을 입었다. 갑인년에 후릉참봉에 제수되셨다. 연산군 무신년 이후로 사화가 연달아 일어나자 공께서는 마음에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여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으셨으나, 어머니의 명으로 마지못해 관직에 나아가 수년간 관직에 계시다가 마침내 옷깃을 떨치고 돌아오셨다. 이때 숙인(淑人)의 연세가 이미 60이셨으므로 아침저녁으로 곁을 떠나지 않고 기쁜 얼굴로 봉양하고 물러나서는 호산(湖山)에서 거문고와 술로 소요함으로서 세상을 잊으셨다. 이때 퇴계 이선생께서 보낸 시에서, “그 속에 절로 풍류를 즐길 짝이 있으니, 호탕하여 길들일 수 없는 만 리를 나는 갈매기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공의 학문이 실지에 힘쓰고 자연을 힘쓰고 자연을 숭상하며, 명리에 얽매이지 않고 의문(儀文)에 속박되지 않으며 고요하고 우아하여 스스로 일가의 규범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명종 계해년 12월 7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이 50이었다. 부(府)의 동쪽 도곡 남향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남기신 글과 행적에 대한 글들은 불행히도 전란 중에 다 흩어졌다. 배위는 광주김씨(光州金氏) 감사 연(緣)의 따님으로, 현숙하고 총명해서 부덕(婦德)이 있으셨다. 신미년 12월 7일에 태어나시어 기묘년 정월 12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69세였고,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아들 복원(復元)은 사직을 지냈는데 판결사에 증직되었고, 복초(復初)는 어려서 죽었다. 딸은 류운룡(柳雲龍)에게 출가하셨는데, 류운룡은 목사로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복원의 아들로, 지(遲)는 공조참의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준(遵)과 적(適)은 참봉을, 형(逈)은 충의위를, 율()은 첨정을 지냈다. 따님은 고종후(高從厚)에게 출가하였으니 현감으로 좌찬성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효열(孝烈)이다. 이근곤(李根坤)ㆍ김극전(金克佺)은 군수를 지냈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산소에는 오래된 비석이 있는데 오랜 세월에 마멸되어 없어졌다. 공이 돌아가신지 424년이 지난 병인년(1924)년에 후손들이 새로 비석을 바꾸려고 하면서 그 음기를 나에게 지으라고 하였다. 아득한 뒤에 태어난 하찮은 후손이 어찌 족히 선조의 덕행을 기술할 수 있겠는가만, 삼가 세계(世系)와 생졸, 이 비석을 다시 고쳐 세우는 전말을 이와 같이 기록하고 이어 명(銘)하노니, 명은 다음과 같다.

 

혁혁하게 빛나는 가문의 주손으로
마음가짐은 담박하였네.
독실하게 행사니 이륜은
예에 얽매임을 초탈하였네.
덕이 쌓이고 연세가 드셔서는
큰 어른과 종유하셨네.
무오 갑자의 사화를 거치면서
남은 불꽃이 휘몰아치니
능참봉이 무슨 관직이던가
잠시 나가셨다가 도로 은둔하셨네.
호어의 즐거움을 알았고
갈매기와 함께 하기로 굳게 맹세하셨으니
지금도 강가 누각에는
달은 밝고 바람이 맑아라.

 

              단군기원 4259년(1926) 병인년에 15대손 상희(象羲)는 삼가 짓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465 광산 이.jpg 광산이씨(李) 청남 14-08-29 4163
464 공주 이.jpg 공주이씨(李) 청남 14-08-29 5738
고성 이.jpg 고성이씨(李) 청남 14-08-29 5817
462 고부 이.jpg 고부이씨(李) 청남 14-08-29 3033
461 고령 이.jpg 고령이씨(李) 청남 14-08-29 2617
460 경주 이1.jpg 경주이씨(李) [1] 청남 14-08-29 7706
459 경산 이.jpg 경산이씨(李) 청남 14-08-29 4483
458 결성 이.jpg 결성이씨(李) 청남 14-08-29 2406
457 개성 이.jpg 개성이씨(李) 청남 14-08-29 4030
456 강화 이.jpg 강화이씨(李) 청남 14-08-29 2659
455 가평 이.jpg 가평이씨(李) 청남 14-08-29 3353
454 응씨(應) 청남 14-08-29 2325
453 죽산 음.jpg 죽산음씨(陰) 청남 14-08-29 3043
452 은씨(恩) 청남 14-08-29 2537
451 행주 은.jpg 행주은씨(殷) [1] 청남 14-08-29 3928
450 해평 윤1.jpg 해평윤씨(尹) 청남 14-08-29 5597
449 해남 윤.jpg 해남윤씨(尹) 청남 14-08-29 3771
448 함안 윤.jpg 함안윤씨(尹) 청남 14-08-29 3563
447 파평윤씨(尹) 청남 14-08-29 8081
446 칠원 윤.jpg 칠원윤씨(尹) 청남 14-08-29 3728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