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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공주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공주이씨)

 

 

본관(本貫): 공주(公州)

시조(始祖): 이천일(李天一)

유래(由來):

 

공주 이씨(公州李氏)의 시조(始祖)는 신라 때 사람인 이천일(李天一)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53(신라 박혁거세 5) 문명(文名)이 뛰어나 중국(中國) ()나라에 들어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흉노적(凶奴賊) 정벌(征伐)에 공()을 세워 요동백(遼東伯)에 봉군되어 신라로 돌아와 공산(公山: 공주)()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공주(公州)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공주 이씨의 세계(世系)는 사손(思孫)의 두 아들 엽()과 서()의 대()에서 7파로 갈리어, 전공 판서(典工判書) 엽의 여섯 아들은 경력공파(經歷公派: 명선어사공파(御史公派:명성공숙공파(恭肅公派: 명덕지평공파(持平公派:명보참의공파(參議公派: 명윤현감공파(縣監公派: 명의), 참지의정부사 서()의 아들은 강양공파(剛襄公派: )로 분파(分派) 하였는데 그중 경력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후손도 가장 많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저(李苧)

천일(天一)36세손 우(양호공)의 후손에서 크게 번창하여 우의 아들 저()가 고려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고 화성부원군(花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사손(李思孫)

저의 아들 사손(思孫)은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냈다.

 

이겸(李謙)

명선의 현손 겸()이 연산군(燕山君) 때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그곳에서 정착하였으므로, 경성을 중심으로 한 관북지방에 후손들이 집중 세거(世居)하고 있다.

 

이기수(李麒壽)

경력공파(經歷公派) 명선(明善)10세손 기수(麒壽)가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옥탑평(玉塔平) 싸움에서 순절하여 형은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이붕수(李鵬壽)

붕수(鵬壽)은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이원배(李元培)

1745(영조 21)1802(순조 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여달(汝達), 호는 구암(龜巖). 처사 구취(矩就)의 아들이다. 12대조인 선전관 겸()이 함경도 경성으로 유배가서 살게 된 뒤로 대대로 그곳에 거주하였다. 이재형(李載亨)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1798(정조 22) 전국의 경학에 밝은 선비들을 뽑아들일 때 함경도의 추천을 받았으며, 구경 ( 九經 )에 대한 정조의 친문(親問) 60여 조에 적절히 대답하여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병으로 나가지 않다가 함경도 분교관(分敎官)으로 임명되어 그 지방의 많은 선비들을 훈도하였다.

이 때 중앙에서 경학서적과 아송 雅誦·주서백선 朱書百選등 주자학 관계서적을 하사받았다. 1801(순조 1) 의금부도사를 거쳐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장릉령(莊陵令)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경학과 예학을 논하는 것이 평이하면서도 명백하였으며, 문장에도 능하여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는 생활태도를 지녔다. 제학 ( 提學 )에 추증되었으며, 함경도 경성의 도북서원 ( 道北書院 )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구암집168책을 남겼다. 조선 후기 함경도 유교 지식인의 생활양상이나 그들에 대한 중앙의 정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인물이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이명덕(李明德)

1373(공민왕 22) 1444(세종 2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 할아버지는 운증( 屛 曾)이며, 아버지는 엽()이다.

1396(태조 5)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에 보직되었으며, 사헌부감찰 · 사간원우헌납 · 장령 · 사인 · 집의 · 좌사간대부 · 형조참의 겸 지도관사(刑曹參議兼知都官事) 등을 역임하였다. 1415(태종 15)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이 되고 좌부대언에 승진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참판을 거쳐 병조참판으로 전임하였고, 그 뒤 강원도관찰사 · 예조참판 · 대사헌 · 동지총제를 역임하였다. 1430(세종 12)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1438년 중추원부사로 정조사 ( 正朝使 )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그 뒤 판한성부사 · 인순부윤(仁順府尹)을 지냈다. 144270세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지중추원사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판중추원사에 승진하여 궤장을 하사받았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공주의 명탄서원 ( 鳴灘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이정견(李廷堅), 이정헌(李庭憲)

명덕의 8세손 정견(廷堅정헌(庭憲) 형제가 선조(宣祖) 때 함께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무공을 세워 명성을 날렸다.

 

이부(李敷)

?1422(세종 4).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조선 개국공신. 본관은 공주(公州). 호는 일파(一派). 조영규 ( 趙英珪 )의 부하로서 13927월 이방원 ( 李芳遠 )의 지시를 받고, 조영규· 조영무 ( 趙英茂 고려(高呂) 등과 함께 정몽주 ( 鄭夢周 )를 추격하여 선죽교에서 살해하였다.

그 뒤 배극렴 ( 裵克廉 조준 ( 趙浚 남은 ( 南誾 ) 등을 따라 이성계 ( 李成桂 )의 사저로 찾아가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 공으로 개국공신에 책립되고 흥원군(興原君)에 봉하여졌다.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등을 역임하고, 태종 때는 총제(摠制)가 되어 외갑사(外甲士)를 지휘하는 등 건국 초기의 군사업무에 깊이 관여하였다. 시호는 강양(剛襄)이다

 

이도(李棹)

부의 11세손 도()가 숙종(肅宗) 때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이필주(李弼柱)

1869(고종 6)1942. 독립운동가. 경기도 고양 출신. 선천적인 무관성격으로 20세에 한국군대에 입대, 단시일에 승진하여 장교로 8년간 복무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군생활을 청산하고 남대문에 있는 상동예배당의 전덕기 ( 全德基 )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가입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하여 일주일간 단식하고 두문불출하였다. 종로청년회관(YMCA) 초대 체육교사로 재직하다가, 상동공옥소학교(尙洞攻玉小學校)의 체육교사로 전임하여 애국정신과 광복의 큰 뜻을 청소년에게 가르쳤다.

, 모범적인 기독교신자로서 미신타파와 계급차별의 배격 등 신생활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뒤 신학교를 마치고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에서 목자생활을 하며 조국독립에 대한 이상을 품고 이상재 ( 李商在 최병헌 ( 崔炳憲 ) 등과 친분을 두터이 하였다.

3·1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이 구체화되던 1919227일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 ( 李昇薰 박희도 ( 朴熙道 이갑성 ( 李甲成 ) 등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함태영 ( 咸台永 )이 최린 ( 崔麟 )으로부터 가져온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 초안을 회람하고, 기독교측 민족대표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같은 달 28일 밤 재동 손병희 ( 孫秉熙 )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전개에 따른 계획을 검토하였다. 3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종교활동과 육영사업에 힘썼으며, 말년에는 수원 남양교회를 맡아보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동발(李東發)

지평공파 명보(明保)의 후손으로 철종 때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했다.

 

이응거(李應擧)

참의공파 명윤(明尹)의 후손으로 정조 때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다.

 

이병덕(李秉德)

현감공파 명의(明義)의 후손인 병덕(秉德)은 순조(純祖)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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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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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공주이씨(公州李氏)는 남한에 총 6,809가구, 28,6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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