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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광산이씨(李)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광산이씨)

 

 

본관(本貫): 광산(光山)

시조(始祖): 이종금(李宗金)

유래(由來):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신라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의 후예로, 송악(松嶽)에서 태봉국(泰封國)을 세웠던 궁예(弓裔)6세손 이종금(李宗金)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종금(宗金)1010(고려 현종 원년) 거란(契丹)40만 대군이 내침하여 송도(松都)와 주읍(州邑)이 허물어지고 왕이 남천(南遷)하는 혼란 속에서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대소전투(大小戰鬪)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1018(현종 9) 3차로 재침해 온 거란의 10만 정예군(精銳軍)을 맞아 휘하의 주군을 이끌고 강화성(江華城)을 굳게 지켜 나라의 귀중한 재화(財貨)를 보전(保全)시킨 공적으로 1032(덕종 2)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지고 이종금(李宗金)이라는 성명(姓名)을 하사(下賜)받아 그를 시조로 받들고 광산군(光山郡) 일원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을 광산(光山)으로 삼게 되었다.

 

그 후 시조 종금의 8세손 각()이 고려조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슬하에 아들 순백(珣白숙백(淑白승백(升白)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광산 이씨(光山李氏)3대 인맥을 형성하였다.

 

가문의 중요 인물

 

이순백(李珣白)

순백(珣白)1320(충숙왕 7) ()나라 환관(宦官) 빠이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참소로 토번(吐蕃)에 귀양 가는 충선왕(忠宣王)을 박인간(朴仁幹)등과 함께 호종(扈從)하였다가 3년 만에 돌아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르고 충장(忠莊)으로 추시(追諡)되었다.

 

이숙백(李淑白)

그의 아우 숙백(淑白)1328(충숙왕 1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 직제학(翰林院直提學)에 올랐다.

 

이승백(李升白)

승백(升白)은 등과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이기(李奇)

광산 이씨의 3대 인맥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상서공(尙書公) 순백의 아들 기()가 고려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다.

 

이선제(李先齊)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가보(家父).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밀직제학 홍길(弘吉)이고, 아버지는 일영(日英)이다.

1419(세종 1) 진사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이 예문관제학에 이르렀다. 1423고려사를 개수할 때 사관 (史官)으로서, 앞서 정도전 ( 鄭道傳 ) 등이 편찬한 고려사가 당시 이색 ( 李穡 이인복 ( 李仁復 )이 지은 금경록 金鏡錄에 의거함으로써 사실(史實)과 다른 점이 많다고 지적, 그 실상을 직서(直敍)하도록 하였다.

1431년에 집현전부교리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태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뒤 형조참의·첨지중추원사·병조참의를 거쳐 1444년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1446년 예조참의를 거쳐 한때 삼의사제조(三醫司提調)를 지냈다.

이듬해 호조참판에 오르고, 1448년 하정사 ( 賀正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고려사개찬을 감장(監掌)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이때 서북지방의 군제 ( 軍制 ) 정비, 야인의 객관 ( 客館 )을 별치(別置)할 것, 어염세(魚鹽稅)를 확보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단종이 즉위한 뒤 경창부윤(慶昌府尹)이 되어서는 전염병 방제에 노력하였다.

 

이시원(李始元)

선제의 장자(長子)인 시원(始元)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다.

 

이조원(李調元)

선제의 차자(次子)인 조원(調元)은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물러나 후학(後學)을 길러 많은 동량지재(棟樑之材)를 배출시켰다.

 

이한원(李翰元)

선제의 3(三子) 한원(翰元)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했다.

 

이찬원(李贊元)

선제의 4자 찬원(贊元)은 홍문관의 수찬(修撰)을 역임.

 

이형원(李亨元)

부제학(副提學)으로 일본 통신사가 되었던 선제의 막내 형원(亨元)는 이름을 떨쳐, 이들 5형제가 <광산 이씨 5원화족(光山李氏五元華族)>으로 일컬어졌다.

 

이복선(李復善)

양심당(瀁心堂) 시원(始元)의 아들 복선(復善)이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다.

 

이달선(李達善)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1489(성종 20)에 설서 ( 說書 전적 ( 典籍 )이 되어 경연에서 주역 周易을 강하는 데 막힘이 없이 하니, 왕과 여러 대신이 이 같은 자는 쉽게 얻을 수 없다고 칭찬하였다.

그 뒤 경학에 밝다 하여 성균관유생들을 가르치게 하고, 시독관 ( 侍讀官 )이 되어서는 도첩제 ( 度牒制 ) 개혁과 사족(士族) 천첩자손(賤妾子孫)의 종량(從良)으로 군액(軍額)을 확보할 것과 상평창 ( 常平倉 ) 설치의 목적이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에게 이익되게 해야한다는 것 등을 주장하였다.

1492(성종 23) 지평으로 있으면서는 국왕이 사면(赦免)을 함부로 내리는 것과, 지방 군사의 징발문제 및 수령들이 백성 돌볼 생각은 않고 연분(年分)을 등제(等制 : 차등있게 순서를 정함)하면서 그 등급 높이는 데에만 힘써 백성들의 원망이 크다는 등의 직언을 하였다.

1495(연산군 1)에 장령이 되어 왕이 공의(公議 : 여러 사람의 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혼자만의 편견을 고집하여 스스로 옳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며, 또 임금의 호령이 한결같지 않아 일을 어그러치고 있다고 하였다. 성종실록편찬시 편수관으로 참여하여 한 자급을 올려 받기도 하였다.

 

이급(李汲)

전라 감사(全羅監司) 중호(仲虎)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급()은 사마시(司馬試)에 이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교리(校理)와 정읍 현감(井邑縣監) 등을 지냈으나, 1589(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謀叛)사건에 연루되어 아우 발(길과 함께 화()를 당했다.

 

이발(李潑)

1544(중종 39) 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巖) · 북산 ( 北山 ). 달선(達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인(公仁)이고, 아버지는 제학 중호(仲虎)이며, 어머니는 윤구 ( 尹衢 )의 딸이다.

김근공(金謹恭) · 민순(閔純)의 문인으로 1568(선조 1) 생원이 되고, 1573(선조 6) 알성문과에 장원, 이듬해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하고, 이조정랑으로 발탁되었다. 1579년 응교, 1581년 전한, 1583년 부제학을 역임하고 이듬해에 대사간에 이르렀다.

홍가신 ( 洪可臣 ) · 허당(許 規 ) · 박의(朴宜) · 윤기신(尹起莘) · 김영일(金榮一) · 김우옹(金宇 裵 ) 등과 교유하였으며, 특히 최영경 ( 崔永慶 )과 가장 친하였다. 조광조 ( 趙光祖 )의 지치주의 ( 至治主義 )를 이념으로 삼아 사론(士論)을 주도, 경연 ( 經筵 )에 출입하면서 왕도정치를 제창하여 기강을 학립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렸다.

, 이조전랑으로 있을 때에는 자파의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으며,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 ( 鄭澈 )의 처벌문제에 강경파를 영도하여 북인의 수령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이(李珥) · 성혼 ( 成渾 )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

1589년 동인 정여립 ( 鄭汝立 )의 모반사건이 일어남을 계기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교외에서 대죄(待罪)하던 중 잡혀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장살(杖殺)되었다.

그가 죽은 뒤 82세의 노모와 8세의 아들도 엄형(嚴刑)으로 죽었는데, 그 노모는 형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꾸짖으면서 끝내 역모에 관한 일을 승복하지 않았으며, 문생 · 노비도 모두 엄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는 자가 없었다.

 

이길

1547(명종 2)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경연(景淵), 호는 남계(南溪). 달선(達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인(公仁)이고, 아버지는 제학 중호(仲虎)이며, 어머니는 윤구 ( 尹衢 )의 딸이다. ()의 아우이다.

생원시에 올라 1577(선조 10) 태묘별시문과(太廟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사인을 거쳐 벼슬이 응교에 이르렀다.

발이 이이(李珥성혼 ( 成渾 )과 교분이 차츰 멀어지자 서인들이 미워하므로 시사(時事)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알고 고향으로 물러갈 때 함께 낙향하였다.

1589년 정여립 ( 鄭汝立 )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서인들이 집권하자 동인들에게 박해가 가하여져, 형 발·() 등은 모진 고문 끝에 장살되었고, 그도 희천으로 귀양갔다가 뒤에 불려와서 역시 죽음을 당하였다. 1694(숙종 20) 신원되고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이순(李順)

한림공(翰林公) 숙백(淑白)의 계통에서는 그의 아들 순()1374(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을 거쳐 풍해 안렴사(豊海按廉使)를 지냈다.

 

이초(李椒)

순의 맏아들 초()는 조선(朝鮮)이 개국한 후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이매(李枚)

순의 차남 매()는 영광 교도(靈光敎導)를 거쳐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이근생(李根生)

회령 판관(會寧判官)을 지낸 림()의 아들 형제 중 차남 근생(根生)은 단종(端宗)이 폐위되고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이 등극하자 이를 개탄하여 경북 고령군 성산면 고곡동(慶北高靈郡星山面高谷洞)으로 은거(隱居)하여 학문에 진력하다가 생을 마치니 그 후로 영남파조(嶺南派祖)가 되었다.

 

이서

임진왜란 때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김 면(金 沔)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우고 진천 현감(鎭川縣監)을 지낸 후 형 홍량(弘量)과 함께 <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유림(儒林)의 숭앙(崇仰)을 받았던 홍우(弘宇)의 아들 서는, 정 구 (鄭 逑)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특출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스승의 명을 받아 <오선생예설(五先生禮設)>을 편찬하였고, 1605(선조 3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난정이 계속되자 스승를 따라 벼슬의 뜻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후 거처(居處)를 승호(承湖 : 현 경북 달성군 논공면)에 옮기고 동호학당(東湖學堂)을 열어 스스로 호()를 야로(野老)라 칭하고 후학을 기르는데 정성을 다하여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으며, 1650(효종 원년)에 생을 마치니 유림(儒林)의 발의(發議)로 덕요선생(德耀先生)이라 사시(私諡)를 짓고, 선조(先祖)가 모셔진 회연서원 향현사에 배향하였다.

 

이두망(李斗望)

숙종(肅宗) 때 부령 부사(副寧府使)와 증산 현령(甑山縣令)을 거쳐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역임.

 

이태창(李泰昌)

서산현감(瑞山縣監)을 역임하였다.

 

이징하(李徵夏)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역임했다.

 

이중빈(李重彬)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이규일(李奎一)

규일(奎一)은 철종(哲宗) 때 무과에 급제하고 이원 현감(利原縣監) 겸 북청진관 병마절제도위를 역임.

 

이필현(李弼鉉)

고종(高宗)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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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광산 이씨는 남한(南韓)에 총 7,113가구, 31,11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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