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韋(강화위씨)
본관(本貫): 강화(江華)
시조(始祖): 위수여(韋壽餘)
유래(由來):
위씨(韋氏)는 중국(中國) 경조(京兆)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서 팽조(彭祖)의 손자가 위(韋)땅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고을 이름을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始初)가 된다.
우리나라 위씨(韋氏)는 중원(中原) 출신인 위수여(韋壽餘)가 960년(고려 광종 11) 동래(東來)하여 사선관(司膳官)을 거쳐 목종(穆宗)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현종(顯宗) 초에 치사(致仕)를 상소했으나 허락(許諾)되지 않고 궤장( 杖)을 하사(下賜) 받은 후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으로 강화백(江華伯)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강화(江華)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위근영(韋瑾英)
시조의 후손 근영(瑾英)이 고려 인종(仁宗) 때 소감(少監)을 역임했다.
위원(韋元)
원(元)은 몽고(蒙古)의 내침으로 강화에 천도하는 왕(王)을 호종하여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위조(韋組)
조선조에 의령현감(宜寧縣監)과 인동 현감(仁同縣監)을 거쳐 인천 부사(仁川府事)를 역임한 조(組)가 간신(奸臣)들의 모략으로 평안도 영유(平安道永柔)에 유배(流配)되었다가 그 곳에 정착(定着)하여 살면서 후손들이 번성하자 그를 낙향시조(落鄕始祖)로 삼고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위관(韋觀)
일세조 조(組)의 9세손 관(觀)이 1689년(숙종 1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찰방(察訪)과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낸 후 홍성 군수(洪城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상소문(辭退上疏文)을 올리자 왕명(王命)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이건창(李建昌)과 함께 고군도(古郡島)에 유배되었다.
그후 풀려나와 영유(永柔)에서 일생을 마치자 후손들은 위촌(韋村) 뒷산 주마현(走馬峴)에 솟대를 세우고 그의 영광(榮光)된 유업(遺業)을 영원히 기렸다.
위응표(韋應豹)
효행(孝行)이 뛰어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위관식(韋觀植)
「백석창화집(白石唱和集)」을 남겨 문명(文名)을 떨쳤다.
위병식(韋秉植), 위달식(韋達植)
병식(秉植)과 달식(達植)은 광복운동(光復運動)에 신명(身命)을 바쳐 강화 위씨를 더욱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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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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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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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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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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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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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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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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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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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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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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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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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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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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棟(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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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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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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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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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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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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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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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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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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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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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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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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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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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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炳(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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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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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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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강화 위씨(江華韋氏)는 남한(南韓)에 총 351가구, 1,4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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