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장흥위씨(魏)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장흥위씨)

 

 

본관(本貫): 장흥(長興)

시조(始祖): 위경(魏鏡)

유래(由來):

 

위씨(魏氏)의 연원(淵源)은 중국 주()나라 혜왕(惠王) 때 진헌공(晉獻公)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당()나라 관서(關西) 홍농(弘農) 사람인 위경(魏 鏡)이 신라(新羅) 태종(太宗) 때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배종(陪從)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의 동래설(東來說)은 또 다른 설()이 있는데, 신라(新羅) ()이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했을 때 당()나라 태종(太宗)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 왔다고도 한다.

()은 신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拾非侯아찬() 상서시중(尙書侍中)을 역임하고 회주(懷州 : 장흥의 옛 지명)()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세계(世系)를 상고(詳考)할 수 없어 신라 말(新羅末)에 대각관기중(大覺官侍中)을 역임한 위창주(魏菖珠)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 나타난 위씨(魏氏)의 본관(本貫)13본이 전하나, 이는 모두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현재는 장흥(長興) 단본으로 전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위계정(魏繼廷)

?1107(예종 2). 고려 중기의 문신.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좌보궐지제고(左補闕知制誥)를 거쳐 선종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1085(선종 2) 왕의 동생인 후(: 大覺國師)가 송나라 상선을 타고 몰래 출국한 것을 왕명으로 추적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또 왕의 총희 만춘(萬春)이 집을 화려하고 크게 짓는 것을 규탄하였다. 1091년 예부시랑으로서 부사가 되어 사은 겸 진봉사(謝恩兼進奉使) 이자의 ( 李資義 )와 함께 송나라에 다녀왔다.

숙종 초에 예부와 이부의 상서가 되어서도 결백하고 지조있는 관료생활을 계속하여 칭송을 받았다. 이어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를 거쳐 1101(숙종 6)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으며, 1104년 문하시랑평장사 겸 태자소사(門下侍郎平章事兼太子少師), 이듬해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그 해 예종이 즉위하자 수태위 문하시중상주국(守太尉門下侍中上柱國)에 올라 여러 차례 퇴관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오히려 수태보(守太保)가 더하여졌다.

()를 올려서까지 퇴관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중사 ( 中使 )를 보내 위로하고 차와 약을 내리고 녹()의 반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작품 하천안절표 賀天安節表동문선에 전한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위원개(魏元凱)

원개(元凱)가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했다.

 

위온(魏溫)

10세손 온()이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증흥시켰다.

 

위덕의(魏德毅)

덕의(德毅)는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옮겨감)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석 달을 걸어 의주(義州)까지 찾아가 왕을 모시는 충성을 보여, ()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鐘)으로부터 "동국(東國)의 산은 오직 천관(天冠:장흥에 있는 산)이요, 사람은 덕의(德毅)가 있을 뿐이다."는 극찬을 받았다 한다.

 

위대용(魏大用)

또한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전공을 세우고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됨.

 

위대기(魏大器)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자용(子容). 고려 때 문하시중 계정(繼廷)의 후손이다. 무과에 급제한 다음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 李舜臣 )의 조전장(助戰將)으로 전공을 세웠다.

왜병이 금산에서 웅치(熊峙)를 넘어 전주지역으로 들어오려 할 때 이치(梨峙)에서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 ( 黃進 ), 장교 ( 將校 ) 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광주목사(光州牧使)였던 권율 ( 權慄 )을 도와 호남지역의 수호에 큰 공을 세웠다.

1594년 해남현감을 역임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고향에서 군사를 일으켜 전공을 세워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었으며, 이어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남원에 충량비(忠良碑)가 세워졌다

 

위창조(魏昌祖)

영조(英祖) 때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다.

 

위백규(魏伯圭)

1727(영조 3) 1798(정조 22). 조선 후기의 실학자.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 · 계항(桂巷) · 계항거사(桂巷居士). 장흥 출신. 할아버지는 세보(世 銅 )이며, 아버지는 진사 문덕(文德)이다.

처음에 증조부에게 수학했으나 유년기를 지난 뒤에는 자수면업(自修勉業)하였다. 어려서부터 제가서(諸家書)를 탐독해 학문적 자세를 굳힌 그는 향리의 장천재(長川齋 : 장흥의 관산면 방촌리)에 기거하면서 면학과 교화의 일익을 담당했고, 1750(영조 26) 학행으로 향천(鄕薦)을 받기도 하였다.

1751년 스승 윤봉구 ( 尹鳳九 )를 만나 그 뒤 1766년까지 경서 · 의례 ·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관한 논의를 통해 학문적 계도를 받았다.

과거에 계속 응시했으나 떨어졌고, 그 뒤 1794(정조 18) 68세 때 서영보 ( 徐榮輔 )의 천거로 저술과 덕행이 정조에게 알려져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 기장 ( 機張 ) · 태인 · 옥과현감,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 경기전령(慶基殿令) 등을 차례로 지냈다.

학통은 이이(李珥) · 김장생 ( 金長生 ) · 송시열 ( 宋時烈 ) · 권상하 ( 權尙夏 ) · 윤봉구로 이어지는 노론계이나, 향촌 생활을 통해 형성된 강한 현실 비판 의식이 저술에 나타나고 있어 학문적 성격은 경세적 실학의 색채가 짙다.

경전의 이해나 심성론 · 이기론에서는 전통 성리학자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정현신보 政鉉新譜 나 봉사류(奉事類)에서 당시의 현실을 세세하고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어 실학자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의 주장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향촌사회 개선론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지방 교육 개선을 통해 향촌 질서의 유지와 교화뿐만 아니라 관리 선발, 지방 관리의 경제 기능까지도 담당할 것을 주장하였다.

둘째 정치 기강의 해이와 이에 따라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관제 축소, 향촌의 자율적 공평 부세론, 지방 관리 선도책 등을 구상하고, 셋째 견실한 향촌 방위 체제를 주장한 점이다.

이 향촌사회 개선론을 일관하는 기본 구상은 향촌의 자율성 모색과 공의(公議)의 구현으로 집약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향촌 사회의 지식인들이 자율성과 공의 창달의 주도자나 중간 계층으로서, 사회의 견제 및 비판과 민중 옹호라는 양면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경세론 외에도 경학 · 지리 · 역사 · 의학 등에 관한 저술이 문집 존재집 存齋集 22권 안에 망라되어 있어 학문 폭이 매우 넓고 다양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에 대한 후인의 인물평이나 저술과는 달리 교우 관계나 후학은 매우 소략하고 묘연해 밝히기가 힘들다. 이것은 그가 호남의 벽지에서 무명의 선비로 거의 전생애를 보냈기 때문이다.

1805(순조 5) 향리 유생들의 발의로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존재집 · 정현신보 · 사서차의 四書箚義 · 환영지 渶 瀛誌 · 본초강목 本草綱目 · 고금 古琴 · 격물설 格物說 · 원류 原類 · 연어 然語 등이 있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31

(),()

38

(),()

45

(),()

32

(),()

39

(),()

46

(),()

33

(),()

40

(),()

47

(),()

34

(),()

41

(),()

48

(),()

35

(),()

42

(),()

49

(),()

36

(),()

43

(),()

50

(),()

37

(),()

44

(),()

51

(),()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장흥 위씨(長興魏氏)는 남한(南韓)에 총 5,420가구, 22,724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445 예천 윤.jpg 예천윤씨(尹) 청남 14-08-29 2610
444 영천 윤.jpg 영천윤씨(尹) 청남 14-08-29 2674
443 양주 윤.jpg 양주윤씨(尹) 청남 14-08-29 2569
442 무송 윤.jpg 무송윤씨(尹) 청남 14-08-29 3498
441 남원 윤.jpg 남원윤씨(尹) 청남 14-08-29 4848
440 옥천 육.jpg 옥천육씨(陸) 청남 14-08-29 4614
439 무송 유.jpg 무송유씨(庾) 청남 14-08-29 5784
438 천녕 유.jpg 천녕유씨(兪) 청남 14-08-29 2891
437 창원 유.jpg 창원유씨(兪) 청남 14-08-29 6370
436 인동 유.jpg 인동유씨(兪) 청남 14-08-29 3201
435 무안 유.jpg 무안유씨(兪) 청남 14-08-29 3889
434 기계 유.jpg 기계유씨(兪) 청남 14-08-29 6824
433 고령 유.jpg 고령유씨(兪) 청남 14-08-29 2691
432 강진 유.jpg 강진유씨(兪) 청남 14-08-29 2758
431 배천 유.jpg 백천유씨: 배천유씨(劉) 청남 14-08-29 5383
430 거창 유.jpg 거창유씨(劉) 청남 14-08-29 3986
429 강릉 유.jpg 강릉유씨(劉) 청남 14-08-29 4607
장흥 위.jpg 장흥위씨(魏) 청남 14-08-29 3118
427 강화 위.jpg 강화위씨(韋) 청남 14-08-29 3002
426 비옥원씨(袁) 청남 14-08-29 2794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