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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유씨(劉)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강릉유씨)

 

 

본관(本貫): 강릉(江陵)

시조(始祖): 유승비(劉承備)

유래(由來):

 

강릉 유씨(江陵劉氏)는 거창유씨(巨昌劉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도시조(都始祖) 유전(劉筌)9세손 유승비(劉承備)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그는 벼슬이 누진하여 좌복야(左僕射)로 치사(致仕)했고, 그의 증손(曾孫) ()이 조선개국2등공신(朝鮮開國二等功臣)에 책록되어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강릉(江陵)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유창(劉敞)

? 1421(세종 3).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 개국공신. 강릉 유씨(江陵劉氏)의 시조. 초명은 경(). 자는 맹의(孟義), 호는 선암(仙庵). 강릉부 우계현(羽溪縣) 출신. 아버지는 지군사(知郡事) 천봉(天鳳)이다.

1371(공민왕 20) 문과에 급제, 성균학유(成均學諭)가 되고, 박사 ( 博士 )와 문하주서 ( 門下注書 )를 역임하였다. 1375(우왕 1)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가 되고, 전공좌랑(典工佐郎) · 예의정랑(禮儀正郎) · 군부정랑(軍簿正郎)을 거쳐, 1389(공양왕 1) 성균사예, 이어 호조의랑(戶曹議郎) · 성균좨주를 역임하였다.

13927월 태조가 조선을 세울 때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으로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이어 좌산기상시 ( 左散騎常侍 )로 옮겼다. 1393(태조 2) 중추원좌부승지, 다음해 중추원부사를 지내고 옥성군(玉城君)에 봉해졌으며,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가 되었다.

1401(태종 1) 승녕부윤(承寧府尹)으로 소요산에 들어간 태조를 찾아가 귀경을 권유했으며, 예문관대제학 ·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등을 지냈다. 1408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태조가 죽자 수묘관(守墓官)이 되어 3년 간 능을 지켰다.

1410년 길주도찰리사(吉州道察理使)로 나갔다가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 등을 지낸 뒤 1413년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고, 1416년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1421(세종 3) 궤장( 廓 杖)을 상으로 받았다.

이성계 ( 李成桂 )와 일찍부터 사귀어 그에게 경사(經史)를 강론했으며, 특히 송나라 진덕수(眞德秀)대학연의 大學衍義 를 즐겨 강론해 세도 ( 世道 )를 만회할 뜻을 품게 하였다. 개국 후에도 대사성에 있으면서 대학연의 를 여러 차례 강의해 올렸다.

1393년에 좌산기상시로 있으면서 사직해 선술(仙術)을 공부하겠다고 요청하자, 태조는 ()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군부(君父)를 버리는데, 그대가 나를 버리면 불충이 되고, 어버이를 버리면 불효가 될 것이다. 그대가 선을 배우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 ” 하고 만류하였다.

성격이 온유돈후(溫柔敦厚)하고, 언행이 근독(謹篤)하며, 지위가 높을수록 마음이 겸손해 사람들이 당나라의 누사덕(婁師德)에 비유하였다. 저서로 선암집 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유한량(劉漢良)

창의 증손 한량(漢良 : 이조 좌랑 계주의 아들)은 임진왜란 때 무장 현감(茂長縣監)으로 창의(倡義)하여 진주성(晉州城) 방어에 참전, 왜적과 싸우다가 화살이 떨어지자 죽창(竹槍)으로 대전했으나 성()이 함락되자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유세분

창의 현손(玄孫) 세분()은 진원 현령(珍原縣令)으로 나가 청백(淸白)한 정사(政事)로 소문났었다.

 

유호인(劉好仁)

1445(세종 27) 1494(성종 25). 조선 전기의 문신 · 문장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 · 뇌계( 浙 溪). ()의 아들이며, 김종직 ( 金宗直 )의 문인이다.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1462(세조 8)에 생원이 되고, 1474(성종 5)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봉상시부봉사(奉常寺副奉事)를 거쳐, 1478년 사가독서 ( 賜暇讀書 )한 뒤 1480년에 거창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 뒤 공조좌랑을 지내고, 1486년에 검토관 ( 檢討官 )을 거쳐 이듬해 동국여지승람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홍문관교리로 있다가 1488년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1490유호인시고 兪好仁詩藁 를 편찬하여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본래 글을 좋아하는 성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군수로 재직 중 병사하였다. 장수의 창계서원(蒼溪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유덕문(劉德文)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투에 나갔다.

 

유경달(劉景達)

전주(全州)에서 <유효자(劉孝子)>로 유명했던 경달(景達)이 뛰어났다.

 

유기원(劉基源)

경달의 아들 기원(基源)은 가뭄 때 기민(飢民) 구휼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유동원(劉東源)

()와 충()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유병관(劉秉瓘)

<효도삼대(孝道三代)>의 정맥(旌脈)을 이어 강릉 유()씨의 전통을 이었다.

 

 

劉爾泰(유이태) 선생의 일화.

 

1)

조선 정조 때의 명의(名醫) 유이태에 관한 설화.

유이태가 어느 곳을 지나갈 때, 어떤 사람이 담장 밑에서 약을 달이는데 약봉지에 ‘ 유이태탕 ’ 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자기가 지어준 약이 아니데, 이상해서 그  까닭을 물은즉,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면 유이태를 만나야 되는데 유이태를 찾을 길이 없어 이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유이태가 그것을 보고 감동해서 그 집안으로 들어가 환자의 병을 진맥하고 고쳐 주었음은 물론이다.

 

2)

유이태의 별난 처방

유이태가 장기를 두고 있는데 이방의 부인이 난산이라며 처방을 물었다.
유이태는 종이에 글 석 자를 써서 주며 산모에게 달여 먹이도록 하였다.

이방의 부인은 그것을 먹고 순산하였는데, 그 종이에는 본관사또의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이방은 관속이기에 사또가 뱃속에 들어가면 그 자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3)

문고리

유이태는 난산하는 부인에게 문고리를 달여 먹이게 하였는데 순산을 하였다. 그런데 다른 부인이 난산 시 문고리를 달여 먹자 더욱 고생이 심하였다.

유이태에게 묻자 아침에는 대문을 열 때라서 문고리가 순산을 시키지만, 저녁에는 문을 닫을 때이므로 오히려 순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4)

삼인수

병도 알고 약도 알지만 약을 구할 수 없어서 못 고친다고 한 유이태의 이야기도 있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하자 유이태는 못 고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머니를 업고 헤매다가 어머니가 물을 급히 찾는 바람에 산속에서 어떤 낡은 바가지에 담긴 물을 먹였는데 병이 나았다.
유이태에게 물으니 그 병에는 천년두골(千年頭骨: 천년 묵은 해골)에 담긴 삼인수(三蚓水:지렁이가 빠저 죽은 물)가 약인데, 그 물이 해골에 괸 물로서 지렁이 세 마리가 빠져 있는 것을 모르고 어머니에게 준 것이 바로 유일한 약이 되었다는 것이다.

 

 

 

 

劉遇錫(유우석)의 효행.

 

은혜갚은 금곡 도사

 

유 우석(劉遇錫) 공은 1794(정조 18)에 지금의 칠곡군 북삼면 숭오동에 서 수성 (秀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은 남다른 효성을 타고나서 항상 부 모를 잊지 못하여 아무리 재미있게 놀다가도 반드시 돌아가서 부모 모시기를 잊지 않고, 혹 보기 드문 과일을 얻으면 아무리 멀어도 가지고 가서 드리고, 장성함에 따라 더욱 봉양에 힘썼다. 집이 가난하여 산에 가서 나무하고 물에 나가 고기 잡아 땔감과 반찬을 이어오매 동네 사람들이 유 효자(劉孝 子)라고 자자한 칭송을 보냈다.

 

15 세에 부친상을 당하니, 너무나 슬프고 애통하여 사흘을 굶고 통곡하였으 며, 성복(초상이 난 뒤에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일)하는 날에야 비로소 죽을 먹었으며, 초상을 예를 다하여 지냈었다. 부친 별세 후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여든이 넘는 조모를 봉양하게 되었다. 조모는 밤낮으로 천식으로 구미를 잃어 오직 잉어만을 먹고 싶다고 하였다. 강에 나가 얼음을 뚫고 하늘을 향해 지성으로 빌었더니 한 자 남짓한 잉어가 뛰어나왔다. 잉어를 잡아 드렸더니 조모의 병환이 쾌히 회복되었다. 예순 노모께서 오랫동안 병석에 누우신 채 신음하였는데, 꿈에 신인(神人)을 만나 약을 물었더니 비둘기 탕이 가장 좋다 하므로, 방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는데, 날이 환하게 새었고 난데없는 비둘기 한 쌍이 방에 날아 들어오므로 이를 잡아 고아 드렸더니 노모의 병환은 씻은듯이 완쾌되었다.

 

이리하여 보고 듣는 사람이 모두 칭송하며 이 효행 사실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함께 모여 통문을 내어 감사(監司)에게 보고하려는데, 공이 굳이 만류하기를 이것은 자식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남에게 알릴 것이 못 된다하였다. 모두들 그 마음씨를 장하게 여겨 그만두게 되었다.

 

여름철에 언덕 위의 나무 그늘 밑에 나갔을 때, 마침 늙은 중이 굶어 길가에 거꾸러져 있음을 보고, 동네 사람을 시켜 중을 업고 돌아와서 밥을 주어 소생하게 하였는데, 그 후 신묘년(辛卯年)에 조모상(祖母喪)을 당하여 장사할 곳이 없어서 밤낮으로 산을 구하던 차에 한 늙은이가 나타나서

 

금곡(金谷)에 도사가 있으나 곧 거기에 가서 보면 좋은 터를 얻으리라.” 했다. 그 말대로 거기에 가 보았더니 과연 늙은 중이 있었다. 그는 얼른 일 어나서 절을 하고 말하기를

오랫동안 문안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공이 의아하게 여겨

스님께서는 나에게 이처럼 반기시나 나는 실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니, 중이

어느 해 어느 날에 소승이 숭산(崇山)으로 가는 길가에서 굶주려서 넘어 졌을 때 은혜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하고 자기 소개를 했다. 그로 인하여 명산을 얻어 장사지내고, 여묘(廬墓 : 무덤 가까이에 움막을 짓고 산소를 돌보는 일)하여 3 년을 마친 후에도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성묘하였다.

 

공은 선영(先瑩)에 상장석을 놓고 태종 어필(太宗御倒筆)과 문희공(文僖公:공 의 14대조) 영정 (화상족자)을 봉안하기 위하여 집 옆에 사당(祠堂 : 신주를 모셔 놓은 집)을 세우고 문희공을 받들어 제사지낼 자강서원(紫岡書院)을 세웠으나 봉안(奉安 : 받들어 모심)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죽었으니 슬픈 일이었다.

 

공은 뛰어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다하여 고기와 새까지 감동하여 기적을 나타나게 함이 옛 중국 진()나라 효자 왕상(王祥)과 흡사하니, 이른 바 백행(百行)의 근원이 깊이 유래함이 있다고 하겠다.

당시 유림에서는 그의 효행을 포상하도록 관아에 여러 번 품신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고,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의당한 일이라.”

하면서 포상을 굳이 사양하였다고 한다.

 

사미헌(四未軒) 장 복추(張福樞) 선생이 지은 효행전(孝行傳)과 농산(農山) 장승택(張升澤)님이 지은 묘갈명(墓喝銘)에도 공의 지극한 효행이 기록되어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흠모하고 있다. 공의 저서로는 계정집(溪亭集: 계정은 공의 아호임)이 있다.

 

출전칠곡군 북삼초등학교 안 교장

참고 문헌 嶠南誌, 四未軒先生文集,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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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강릉 유씨(江陵劉氏)는 남한(南韓)에 총 38,844 가구, 161,634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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