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기계유씨(兪)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기계유씨)

 

 

본관(本貫): 기계(杞溪)

시조(始祖): 유삼재(兪三宰)

유래(由來):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신라 때 아찬을 역임한 유삼재(兪三宰)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그의 후손 유의신(兪義臣)이 신라가 망하자 고려조(高麗朝)에 불복하므로 태조(太祖)가 기계 호장(杞溪戶長)을 삼으니 후손들이 기계(杞溪)를 본관(本貫)으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그 후 기계 유씨는 의신(義臣)의 종파인 동정공파(同正公派)를 비롯하여 월성군(月城君) 승추(承樞)의 계통인 월성군파(月城君派)와 동정(同正) 진적(晉迪)의 계통인 장사랑공파(將士郞公派) 등 크게 열 다섯 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유효통(兪孝通)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의학자(醫學者).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행원(行源). 1408(태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었다.

1427(세종 9)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거쳐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는데, 문장에 능하고 의학에 정통하였다. 1431년 전의감정(典醫監正) 노중례 ( 盧重禮 ) 등과 같이 향약채취월령 鄕藥採取月令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을 편찬하였다

 

유응부(兪應孚)

? 1456(세조 2).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기계(杞溪, 혹은 川寧).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 포천 출신. 키가 남보다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해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이 모두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세종 30)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1449년 경원도호부사 · 경원절제사, 1452(단종 즉위년) 의주목사를 거쳐 1453년 평안좌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 해 윤6월에 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단족 복위의 도모1456(세조 2) 성삼문 ( 成三問 ) · 박팽년 ( 朴彭年 ) 등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유응부와 성승(成勝 : 성삼문의 아버지) 등을 별운검(別雲劒 : 2품 이상의 武官이 칼을 차고서 임금 옆에서 호위하던 임시 벼슬)으로 선정해 그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왕이 운검(雲劒)을 세우지 말도록 명령했고, 세자도 질병 때문에 왕을 따라 연회장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하려고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가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 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羽翼 : 보좌하는 신하)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千載一時)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말려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 때 동모자(同謀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 銷 )이 일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서 급히 달려가 장인인 정창손 ( 鄭昌孫 )에게 알리고 함께 반역을 고발해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 ” 는 세조의 국문에 그는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足下 : 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세조를 가리켜 부른 말)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김질을 가리킴)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하겠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 ” 하니 세조가 노해 꾸짖었다.

너는 상왕(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핑계하고서 사직 ( 社稷 )을 도모하려고 한 짓이지. ” 하고 즉시 무사를 시켜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서 정상(情狀)을 신문했으나 자복(自服)하지 않았으며,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초청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성이 나서 달군 쇠를 가져와서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성품과 사후 추숭효성이 지극해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생활은 지극히 청렴해 벼슬이 재상급(宰相級)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웠고 고기 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

또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니 처자가 이를 원망했는데, 그가 죽던 날 그 아내가 울면서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도 남에게 의지함이 없었는데 죽을 때는 큰 화를 입었구나. ” 고 하였다.

남효온 ( 南孝溫 )추강집 육신전 六臣傳 을 지으면서 단종복위의 거사 주모역은 성삼문 · 박팽년이고, 행동책은 유응부로서, 이 세 사람이 한 일을 삼주역(三主役)으로 부각시켰다.

사육신이라는 명칭은 남효온의 육신전 이 세상에 공포된 뒤 그대로 확정되어, 1691(숙종 17)에 사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공인해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河緯地 ) · 이개 ( 李塏 ) · 유성원 ( 柳誠源 ) · 유응부 등 6인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 뒤 1791(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적에도 사육신으로 재차 확정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의 충곡서원 ( 忠谷書院 ), 영월의 창절사 ( 彰節祠 ), 대구의 낙빈서원 ( 洛濱書院 ), 의성의 충렬사 ( 忠烈祠 ), 강령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유기창(兪起昌)

1437(세종 19)1514(중종 9).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자성(子盛), 호는 서호산인(西湖山人). 아버지는 참판 해()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1496(연산군 2)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고 뒤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504년 좌의정 성준 ( 成俊 )이 왕의 난정(亂政)을 극간하다가 교살될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며, 그뒤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506(중종 1) 중종반정으로 석방되어 병조참지에 임명되었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비인현(庇仁縣)에 은거하면서 사냥으로 나날을 지냈다.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근엄하며 9()을 역사(歷仕 : 차례로 벼슬을 함)할 때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유여림(兪汝霖)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했다.

 

유여주(兪汝舟)

기창의 아들 여림(汝霖)과 여주(汝舟)는 신진 사류인 조광조(趙光祖)의 기묘현량(己卯賢良)으로, 여주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한산(韓山)에 임벽당(林碧堂)을 짓고 독서와 서예(書藝)로 일생을 마쳤으며 글씨에 뛰어나 명필(名筆)로 일컬어졌다.

 

유강(兪絳)

1510(중종 5)1570(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강지(絳之). 증참판 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기창(起昌)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여림(汝霖)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증판서에 담명(聃命)의 딸이다.

1531(중종 26) 사마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41(중종 3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고, 주서 ( 注書 )를 거쳐 1551(명종 6) 집의 ( 執義 )가 되었다.

이듬해 전한 ( 典翰 )에 이어 직제학 ( 直提學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1554년 전라도관찰사, 1555년 대사간, 1557년 대사헌, 이듬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사은사 ( 謝恩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뒤 특진관 ( 特進官 병조참판을 거쳐 도승지·한성부판윤·공조판서·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인품이 관후하고 인자하였으나,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매우 엄하여 자연히 탐관오리들의 비행이 없어지게 되었다.

특히,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인재를 모아 가르쳐서 문풍(文風)을 크게 일으켜 관서지방의 유생들이 중앙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호조판서로 있을 때에는 국고의 절약에 힘써, 비록 권귀(權貴)라 할지라도 사정(私情)을 두지 않고 법대로 처리하였다. 묘는 양주 차유령 ( 車踰嶺 )에 있다. 시호는 숙민(肅敏)이다.

 

유홍(兪泓)

1524(중종 19) 1594(선조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지숙(止叔), 호는 송당(松塘).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기창(起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서 여림(汝霖)이고, 아버지는 생원 관( )이며, 어머니는 의령 남씨(宜寧南氏)로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 충세(忠世)의 딸이다.

1549(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 정자 · 전적 ( 典籍 ) · 지제교 · 지평 ( 持平 ) · 장령 ( 掌令 ) · 집의 등 문관 요직을 역임하였다. 1557년 강원도 암행어사로 나가 민심을 수습하고, 1563년 권신 이량 ( 李樑 )의 횡포를 탄핵하였다.

이듬해 시관 ( 試官 )으로 이이(李珥)를 뽑았으며, 1565년 문정왕후 ( 文定王后 ) 상사 때에는 산릉도감 ( 山陵都監 )으로 치산의 일을 맡았고, 춘천부사가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1573(선조 6) 함경도병마절도사로 회령부사를 겸했고, 그 뒤 개성부유수를 거쳐 충청 · 전라 · 경상 · 함경 · 평안도의 관찰사와 한성판윤 등을 지내면서 치적을 쌓았다.

1587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그동안 조선의 시조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 ( 李仁任 )의 아들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으며, 1589년 좌찬성으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해 정여립 ( 鄭汝立 )의 역옥(逆獄)을 다스렸다.

이러한 공으로 1590년 종계변무 ( 宗系辨誣 ) 1, 토역(討逆) 2등에 책훈(策勳)되어, 평난공신 ( 平難功臣 ) 호를 하사받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조판서 · 우의정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했고, 평양에서는 세자(뒤의 광해군)와 함께 종묘사직의 신위를 모시고 동북방면으로 가 도체찰사를 겸임하였다. 그리고 이천(伊川)에서 격문을 여러 도로 보내 각 도의 의병들을 격려, 지휘해 방수태세(防守態勢)를 갖추었다.

이듬해 왜적이 서울에서 물러나자, 먼저 서울에 들어와서 불탄 도성을 정리하고 전재민을 구호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594년 좌의정으로서 해주에 있는 왕비를 호종하다가 객사하였다. 성품이 중후관대하고, 의리를 위해 기개를 굽히지 않았으며, 시문에 뛰어났고 장서가 많았다. 유저로는 송당집 4권이 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유대수(兪大修)

1546(명종 1)1586(선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사영(思永). 예조판서 여림(汝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판서 강()이고, 아버지는 진사 함()이며, 어머니는 광주안씨(廣州安氏)로 안동도호부사 한준(漢俊)의 딸이다. 대경(大儆)의 형이다. 이황 ( 李滉 이중호 ( 李仲虎 )의 문인이다.

1564(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이듬해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9(선조 2)에 주서가 되고 전적에 이어 형조·호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10년간 외직을 지낸 뒤 정언이 되었다.

그 뒤 충주목사·사옹원정(司饔院正)을 거쳐 장령으로 내섬시정(內贍寺正)을 겸직하였다. 1584년 안동부사에 올랐으나 이듬해 남장(濫杖 : 장형을 지나치게 함)의 죄로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유대칭

대칭(: 강의 손자)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백증(兪伯曾)

1587(선조 20) 1646(인조 2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자선(子先), 호는 취헌(翠軒). 우의정 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 )이고, 아버지는 좌찬성 대일(大逸), 어머니는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麟)의 딸이다.

1612(광해군 4) 진사가 되고,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21년 병조좌랑이 되었다. 그러나 이이첨 ( 李爾瞻 ) 등 권신들에게 아부하지 않아 한직에 머물렀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해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 ( 靖社功臣 ) 3등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사간으로 김신국 ( 金藎國 ) · 조성(趙誠) · 박로() 등을 탄핵하고, 그 뒤 부응교로서 공서파(功西派)의 영수인 이조판서 김류(金 濫 )가 북인 남이공 ( 南以恭 )을 대사헌으로 삼으려는 데 반대하다가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7(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왕을 찾아가 사도시정(司 歸 寺正)에 임명된 뒤 후금(後金)과의 화의가 잘못되었음을 상소하였다. 1629년 박정() · 나만갑 ( 羅萬甲 ) 등과 노서(老西)로 지목되고 공서를 공격하다가 가평군수로 좌천되다.

이어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김류 · 윤방 ( 尹昉 ) 등 대신들의 무능과 안일을 비난하다가 수원부사로 또다시 좌천되었으며, 이어 1631년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판서 이귀 ( 李貴 )가 박지계 ( 朴知誡 )를 지평으로 추천하자, 대사간으로서 참판 이성구 ( 李聖求 ), 좌랑 구봉서 ( 具鳳瑞 )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였다. 1634년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의 추숭 논의가 분분할 때 추숭에 적극 찬성해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이어 병조참지를 역임한 뒤 1636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 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 화의를 주장한 윤방 · 김류 등의 처형을 주장하다 다시 파직되었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된 뒤 대사성으로 등용되고, 이어 동지경연사 ( 同知經筵事 )가 되어 다시 윤방 · 김류 등의 전후 무사안일하고 반성하지 않는 행실과 김경징 ( 金慶徵 ) · 이민구 ( 李敏求 )의 강도 ( 江都 ) 방어 실패의 죄를 탄핵하였다.

그 뒤 대사헌이 되어 윤방이 종묘의 신주를 모독한 죄를 탄핵하고 자강책 10여 조목을 상소하였다. 성품이 강직해 여러 번 직언을 하다가 화를 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계속해 밀고 나가 충직함이 인정되어 그 때마다 복직되기도 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저서로는 취헌소차 翠軒疏箚 33책이 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유계(兪棨)

1607(선조 40) 1664(현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 아버지는 참봉 양증(養曾)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병조참판 이신(以信)의 딸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정언 · 지평 · 수안 군수를 지낸 대경(大敬)이다.

김장생 ( 金長生 )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으며, 송시열 ( 宋時烈 ) · 송준길 ( 宋浚吉 ) · 윤선거 ( 尹宣擧 ) · 이유태 ( 李惟泰 )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1630(인조 8) 진사과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리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시강원설서로서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죄로 임천에 유배되었다.

1639년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 서실(書室)을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 때 가례집해 家禮集解 를 개작하여 가례원류 家禮源流 를 저작하였다.

1644년 주서로 기용되어 1646년 무안 현감이 되었고, 1649년 인조가 죽자 홍문관 부교리로서 왕의 장례 절차를 상소하여 예론에 따라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 ’ 자의 사용을 반대하고 () ’ 자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선왕을 욕되게 하였다는 죄로 온성과 영월에 유배되었다. 1652(효종 3)에 유배에서 풀려나 송시열 · 송준길 등의 추천으로 시강원의 문학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1659년에 병조 참지로서 비변사 부제조를 겸임하고, 이어서 대사간 · 공조 참의 · 대사성 · 부제학 · 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 해에 효종이 죽고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기년설(朞年說)을 지지, 3년설을 주장하는 윤휴(尹 頊 ) · 윤선도 ( 尹善道 ) 등의 남인을 논박하여 유배 또는 좌천시켰다. 1662(현종 3) 예문관 제학을 거쳐 1663년 대사헌 · 이조 참판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는 이이(李珥)와 김장생의 학통을 잇고, 예론의 입장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의 전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이이의 동호문답 東湖問答 을 본받아 고금의 치도(治道)를 논하고 자신의 정치 사상을 피력한 강거문답 江居問答 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이이의 학설을 요약하여 정치의 근본은 수기(修己)이고, 정치의 핵심은 임관(任官)이며, 정치의 급무는 구민(救民)이다 라고 보고 그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주자의 가례 의 본문을 기본으로 하고, 의례 儀禮 · 주례 周禮 · 대례 戴禮 등 여러 경전의 내용을 뽑고 주를 붙여 그것을 () ’ 이라 하고, 후대의 여러 유학자들의 예설을 조사하여 () ’ 라 하여 역사상의 예설들을 밝힌 가례원류 를 편찬하였다.

이는 김장생의 예설에 토대를 둔 학설로서, 훗날 윤선거와 공편했는지를 두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치열한 당쟁을 불러일으켰다.

말년에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 을 본받아 노론 정권하의 고려사에 대한 역사관을 대변해 주는 강목체 ( 綱目體 )여사제강 麗史提綱 을 편찬하였다.

임천의 칠산서원(七山書院), 무안의 송림서원(松林書院), 온성의 충곡서원 ( 忠谷書院 ) 등에 제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시남집 · 가례원류 · 여사제강 · 강거문답 등이 있다.

 

유하익(兪夏益)

1631(인조 9) 1699(숙종 2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사겸(士謙), 호는 백인당(百忍堂). 대정(大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필선 수증(守曾)이고, 아버지는 필( )이고, 어머니는 유시보(柳時輔)의 딸이다.

1651(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1660(현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 ( 持平 ) · 사서 · 정언 · 부교리 · 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에 황해도암행어사로 나가서는 수령들에게 신상필벌하여 관리들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그 뒤 이조정랑 ·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80(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숙청될 때 함께 파직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당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추방되자 풀려나와 도승지에 등용, 그뒤 이조참판 ·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면서 사고 ( 史庫 )의 보존에 대하여 소를 올려 사고의 보존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1690년 이후 한성부판윤 · 예조판서 · 대사헌 · 좌참찬 ·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정권에서 물러날 때 같이 삭출되었다가 2년 뒤에 풀려났다. 글씨를 잘 썼다.

 

유명일(兪命一)

1639(인조 17) 1690(숙종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만초(萬初). 군수 대경(大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봉 양증(養曾)이고, 아버지는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 )이며, 어머니는 이생인(李生寅)의 딸이다.

1660(현종 1) 진사 · 생원 양시에 합격하여 1669년 장릉참봉(莊陵參奉)이 되고, 이어 전옥서 ( 典獄署 )와 장흥고 ( 長興庫 )의 봉사를 거쳐 사도시직장(司 歸 寺直長) · 공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81(숙종 7)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정언 ( 正言 )을 거쳐 지평 ( 持平 )으로 재직중 남인 박태유 ( 朴泰維 )를 탄핵하고, 이어 남인인 장령 홍수주(洪需疇)를 논핵하여 파면하게 하였다.

1685년 장령(掌令)으로 경기도암행어사가 되고, 이듬해 사간에 전직, 1687년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언관으로 있으면서 서인 중 가장 과격한 문신으로 남인타도에 앞장섰다.

 

유명웅(兪命雄)

1653(효종 4) 1721(경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중영(仲英), 호는 만휴정(晩休亭). 대의(大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희증(希曾)이고, 아버지는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이며, 어머니는 이계(李 斌 )의 딸이다.

1678(숙종 4)에 사마시를 거쳐 1682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에 정언 · 지평 등을 지내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에 의하여 파직당하였다. 1694년에 갑술옥사로 서인들이 재집권하게 되자 장령으로 등용되었는데, 이 때 이돈()과 이사상(李師常)을 탄핵하여 이돈을 좌천시켰다.

그 뒤 사서를 거쳐 1696년 금성현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이로 말미암아 암행어사 여필용(呂必容)의 천거로 표리(表裏 : 속과 겉의 옷감)를 하사받았다. 이듬해 보덕 · 사간 · 집의 등을 역임하고, 1699년 사은 겸 동지사 동평군 항(東平君杭)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01년 형방승지로서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사사될 때 이를 반대한 소론을 숙청하였다. 1705년 우부승지를 거쳐 1707년 황해도관찰사 · 승지 등을 역임하고, 1713년 도승지가 되고, 1716년 강원도관찰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18년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 ·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1721(경종 1) 공조판서가 되었다. 당론의 폐를 꺼려 조론(朝論)의 파당에 초연하였고 번잡한 교제를 피하였다. 특히, 시문에 능하고 해서를 잘 썼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유명홍(兪命弘)

1655(효종 6) 1729(영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계의(季毅), 호는 죽리(竹里). 대의(大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희증(希曾)이고, 아버지는 석()이며, 어머니는 이계(李 斌 )의 딸이다.

1673(현종 14) 진사가 되고, 1682(숙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88년 지평이 되었으나 이듬해 기사환국으로 파직되고, 1692년 헌부(憲府)의 요청으로 형 명웅(命雄)과 같이 사판(仕版)이 삭거(削去)되었다.

이는 고() 참판 헌()의 질자라는 이유로 질시(嫉視)된 때문이다. 1694년 갑술옥사로 서인이 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장령 ( 掌令 ) · 정언 ( 正言 ) · 헌납 ( 獻納 )을 거쳐 양서지방(兩西地方)과 호서지방을 암행염찰(暗行廉察)하였다.

1702년 궁가절수(宮家折受)의 폐해를 상소하여 백성을 심히 괴롭히는 것을 모두 재감(裁減)시켜 백성들을 소생하게 할 것을 진언하였다. 1718년 도승지, 이듬해에 대사간이 되고, 1721(경종 1) 한성좌윤 · 전라감사가 되었다.

이 해 신임사화로 노론이 추방되자 파직되어 유배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 노론이 집권하자 이듬해 대사간 · 경기감사가 되고, 1726(영조 2) 한성판윤 · 예조판서, 1727년 우참찬이 되었다. 시호는 장헌(章憲)이다.

 

유최기(兪最基)

1689(숙종 15) 1768(영조 4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양보(良甫), 호는 자락헌(自樂軒) · 무수옹(無愁翁). 예조판서 성증(省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철( )이고, 아버지는 목사 명건(命健)이며, 어머니는 안후선(安後宣)의 딸이다.

1715(숙종 41) 사마시를 거쳐 1723(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당시 당쟁이 치열하여 세상이 어지러우므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1726(영조 2) 설서 ( 說書 )가 되었다.

이듬해 정미환국 때 소론의 거두 이광좌 ( 李光佐 )의 횡포에 분개하여 소를 올려 탄핵하다가 삭출당하였다. 3년 후 지평으로 다시 등용되자,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의 거두 김창집 ( 金昌集 ) · 이이명(李 蓬 命)의 신원(伸寃)과 소론의 음모사실을 논박하다가 다시 삭출당하였다.

곧 등용되어 부교리 · 부수찬을 거쳐 수찬 · 시독관 ( 侍讀官 ) 등을 역임하고, 1747년 병조참의에 올랐다. 그는 또 노론의 여러 언관들과 함께 신임사화의 전말을 상소하고 소론의 거두인 이광좌의 관작추탈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탕평책에 역행하는 자라고 지목되어 웅천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영조가 그의 강직함을 가상히 여겨 다시 기용함으로써 그뒤 동부승지 · 대사성 · 대사헌 ·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763년 노인직으로 정헌대부 ( 正憲大夫 )에 오르고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뒤에 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유척기(兪拓基)

1691(숙종 17) 1767(영조 4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성증(省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철( )이고, 아버지는 목사 명악(命岳)이며, 어머니는 이두악(李斗岳)의 딸이다. 김창집 ( 金昌集 )의 문인이다.

1714(숙종 40)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된 후 정언 ( 正言 ) · 수찬 · 이조정랑 ·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1(경종 1) 세제(世弟)를 책립하자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신임사화 때 소론의 언관 이거원 ( 李巨源 )의 탄핵을 받고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1725(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나서 이조참의 · 대사간을 역임하고 이듬해 승지로 참찬관을 겸하다가 경상도관찰사 · 양주목사 · 함경도관찰사 · 도승지 ·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 · 세자시강원빈객(世子侍講院賓客) · 평안도관찰사 · 호조판서 등을 두루 지냈다.

1739년 우의정에 오르자, 신임사화 때 세자 책봉 문제로 연좌되어 죽은 김창집(金昌集) · 이이명(李 蓬 命) 두 대신의 복관(復官)을 건의해 신원(伸寃)시켰다.

그러나 신임사화의 중심 인물인 유봉휘 ( 柳鳳輝 ) · 조태구 ( 趙泰耉 ) 등의 죄를 공정히 다스릴 것을 주청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그 때 평소 가깝게 지내던 당시의 명류(名流) 조관빈 ( 趙觀彬 ) · 김진상 ( 金鎭商 ) · 이기진 ( 李箕鎭 ) 등도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 뒤 몇 차례 임관(任官)에 불응해 마침내 삭직당해 전리(田里)에 방축되었다. 만년에 김상로 ( 金尙魯 ) · 홍계희 ( 洪啓禧 ) 등이 영조와 그 아들 사도세자 ( 思悼世子 ) 사이를 이간시키자 이를 깊이 우려했고, 이천보 ( 李天輔 )가 영의정에서 물러나자 영조에 의해 중용되어 영상으로 임명되었다.

벽파 김상로를 조정에서 대할 때 항상 싫어하는 기색이었으나 김상로는 감히 말을 못하였다. 1760년 영중추부사 ( 領中樞府事 )가 되었고, 이어서 봉조하 ( 奉朝賀 )를 받고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기국(器局)이 중후하고 고금의 일에 박통했으며, 대신의 기풍을 지닌 노론 중의 온건파에 속하였다. 당대의 명필가요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이기도 하였다. 글씨로는 경주의 신라시조왕비 新羅始祖王碑 , 청주의 만동묘비 萬東廟碑 등을 남겼고, 저서로는 지수재집 15권이 있다. 시호는 문익 ( 文翼 )이다.

 

유언술(兪彦述)

1703(숙종 29) 1773(영조 4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계지(繼之), 호는 송호(松湖) · 지족당(知足堂) · 서고(西皐).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 명일(命一)이고, 아버지는 진사 복기(復基)이며, 어머니는 김견(金堅)의 딸이다.

1729(영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736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림에 뽑혀 검열이 되었다. 17446품직에 올라 성균관전적에 제수되고 예조정랑을 거쳐 언관으로 활동하였다. 사간으로 있을 때 유봉휘 ( 柳鳳輝 ) · 조태구 ( 趙泰耉 ) · 이광좌 ( 李光佐 ) 등을 성토하였고, 1749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5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1772년 대사헌을 거쳐 지중추부사로 치사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직간을 잘하여 영조에게 인정되었고, 시문에 뛰어났으며, 산수를 좋아하여 족숙인 유척기 ( 兪拓基 )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다. 저서로 송호집 6권을 남겼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유언호(兪彦鎬)

1730(영조 6) 1796(정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사경(士京), 호는 칙지헌(則止軒).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명건(命健)이고, 아버지는 우윤 직기(直基)이며, 어머니는 김유경(金有慶)의 딸이다.

1761(영조 37)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다음 해 한림회권(翰林會圈)에 선발되었다. 이후 주로 사간원 및 홍문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771년에는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이라 공격해 이를 배척하는 엄제방유곤록 儼堤防裕昆錄 을 만들자, 권진응(權震應) · 김문순 ( 金文淳 ) 등과 함께 상소해 경상도 남해현에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 홍봉한 ( 洪鳳漢 ) 중심의 척신 정치의 제거가 청의(淸議)와 명분을 살리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정치적 동지들의 모임인 이른바 청명류(淸名流)사건에 연루되어, 붕당의 타파를 탕평으로 생각한 영조의 엄명으로 흑산도로 정배의 명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춘궁관(春宮官)으로서 열심히 보호했으므로 정조 등극 후에는 홍국영 ( 洪國榮 ) · 김종수 ( 金鍾秀 )와 함께 지극한 예우를 받았고, 명의록 名義錄 편찬을 주관하였다. 자신의 이름이 명의록 에 올라 있기도 하다.

그 뒤 이조참의 · 개성유수 · 규장각직제학 · 평안감사를 거쳐, 1787(정조 11)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경종과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옹호하고 영조를 비판한 남인 조덕린(趙德隣)이 복관되자 이를 신임의리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하였다.

이에 정조의 탕평을 부정한다는 죄목으로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이후 향리에 칩거했다가 1795년 잠시 좌의정으로 지낸 후 다음 해 사망하였다.

1802(순조 2) 김종수와 함께 정조묘(正祖廟)에 배향되었다. 정조 즉위년에 왕과의 대담에서 김구주 · 홍봉한 양 척신의 당을 모두 제거하려는 정조의 뜻을 잘 보좌하였다.

, 영조 때 탕평책 하에서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통청권(通淸權)을 혁파하고 개정한 한림회권법을 회천법(會薦法)으로 되돌리려는 논의에서도 소시법(召試法)의 중요성을 인정해 정조의 청의와 의리를 우선해 조제하는 탕평책을 옹호하였다.

김우진(金宇鎭) · 심환지 ( 沈煥之 ) · 김종수와 친하게 지내고, 홍봉한의 당을 공격함이 의리라는 김구주 당의 견해에 동조했으므로, 순조대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된 이후에는 시파 ( 時派 )로부터 정조에 대한 배신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으며, 외유내강의 인물로서 평가된다. 저서로는 칙지헌집 이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유한전

한전은 순조 때 백년(百年) 이래의 대 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유한지(兪漢芝)

1760(영조 36) ? 조선 후기의 문인 · 서예가.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덕휘(德輝), 호는 기원(綺園). 한준(漢雋)의 사촌동생으로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지냈다. 전서와 예서를 잘 써서 일대에 이름이 높았다.

신위 ( 申緯 )경수당집 警修堂集 에서 청풍군수 윤제홍 ( 尹濟弘 )의 산수화와 영춘현감 유한지의 전서 · 예서가 한때 뛰어났다. ” 고 하였고, 김정희 ( 金正喜 )완당집 阮堂集 에서 조윤형 ( 曺允亨 )과 유한지는 예서에 조예가 깊었으나 문자기(文字氣)가 적다. ” 라고 평하였다.

근역서휘 槿域書彙 · 근묵 槿墨 등에 전하는 그의 진적을 보면, 당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비첩(碑帖)을 본격적으로 익혀 고법(古法)을 충실히 토득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금석으로 영천의 은해사영파대사비 銀海寺影波大師碑 , 산청의 문익점신도비 文益漸神道碑 등의 전액(篆額)을 썼다.

 

유신환(兪莘煥)

1801(순조 1) 1859(철종 10).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경형(景衡), 호는 봉서(鳳棲). 아버지는 현감 성주(星柱)이며, 어머니는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덕보(德普)의 딸이다. 증조부는 대사헌을 지낸 언술(彦述)이고,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한순(漢純)이다.

김매순(金邁淳) · 홍석주 ( 洪奭周 ) · 오희상 ( 吳熙常 )을 스승으로 섬겼다. 1844(헌종 10) 학행으로 추천을 받아 선공감감역이 되고 감찰 · 사직서령 · 영희전령(永禧殿令)을 역임하였다.

전의현감으로 부임해서는 황구(黃口) · 백골(白骨) 등의 가렴주구의 민폐를 없애고 유학의 학풍을 일으키는 데 힘썼으나, 감찰사의 모함으로 홍천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진력하였다. 윤병정 (尹秉鼎) · 서응순 ( 徐應淳 ) · 김낙현(金洛鉉) · 윤치조(尹致祖) · 김윤식 ( 金允植 ) · 남정철 ( 南廷哲 ) 등의 학자를 길러냈다.

그는 이기신화론(理氣神化論)을 주장한 조선 말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유학의 여러 경전과 사서(史書)뿐만 아니라 율력 · 산수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학문에 정통했으며 정치 · 경제 · 군사 등의 분야에도 박학하였다.

당시 유림에서는 인물성동이론 ( 人物性同異論 )의 논쟁이 격화되었다. 호서의 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인 인물성부동론(人物性不同論)을 천명하기 위해 화양서원(華陽書院)의 묘정에다 송시열 ( 宋時烈 )의 말인 밀개성신(蜜豈性信) ’ 이라는 문장으로 비를 세우려 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이 문구가 반드시 인물성부동론의 논증이 될 수 없으며, 이 논쟁의 귀추가 확실히 밝혀진 것이 아님을 들어 비석의 건립을 반대해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봉서집 · 패동수언 浿東粹言 · 동유연원 東儒淵源 등이 있다. 대사헌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유치선(兪致善)

1813(순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자경(子慶). 한성 출신. 한갈(漢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주(民柱)이고, 아버지는 인환(仁煥)이며, 어머니는 이종인 ( 李鍾仁 )의 딸이다. 1831(순조 3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음사(蔭仕)로 판관의 직에 있으면서 1844(헌종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사과·대사성·부총관 등을 거쳐 1867(고종 4)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기계유씨세보 杞溪兪氏世譜를 중간하고, 1874년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참의·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유길준(兪吉濬)

1856(철종 7) 1914.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가 · 정치가. 본관은 기계 ( 杞溪 ).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 서울 출신. 진사 진수(鎭壽)의 아들.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이경직(李敬稙) 등에게 한학을 배웠다.

1870(고종 7) 박규수 ( 朴珪壽 )의 문하에서 김옥균 ( 金玉均 ) · 박영효 ( 朴泳孝 ) · 서광범 ( 徐光範 ) · 김윤식 ( 金允植 ) 등 개화 청년들과 실학 사상을 배우면서, 위원(魏源)해국도지 海國圖志 와 같은 서적을 통해 해외 문물을 습득하였다.

1881년 박규수의 권유로 어윤중 ( 魚允中 )의 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에 참가, 우리 나라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이 때 일본의 문명개화론자인 후쿠사와(福澤諭吉)가 경영하는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유정수(柳定秀)와 함께 수학하였다.

그는 한국 · 중국 · 일본 등 동양 삼국의 단결을 목적으로 조직된 흥아회(興亞會)에도 참가해 일본의 학자 및 정치가들과 교유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민영익 ( 閔泳翊 )의 권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18831월에 귀국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의 주사 ( 主事 )에 임명되어 한성판윤 박영효가 계획한 한성순보 발간 사업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민씨척족 세력의 견제로 신문 발간사업이 여의치 않자 주사직을 사임하였다.

그 해 7월 보빙사 ( 報聘使 ) 민영익의 수행원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일본 유학 때에 알게 된 생물학자이며 다윈(Darwin, C.)의 진화론을 처음으로 일본에 소개한 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의 피바디박물관장인 모스(Morse, E.S.)의 개인지도를 받았다.

1884년 가을 담머[대학예비]고등학교(Governer Dummer Academy)에서 수학, 우리 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12월에 학업을 중단하고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188512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 · 박영효 등과 친분관계가 있었다 하여 개화파의 일당으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 한규설 ( 韓圭卨 )의 도움으로 극형을 면하고 1892년까지 그의 집과 취운정에서 연금생활을 하면서 서유견문 西遊見聞 을 집필, 1895년에 출판하였다.

국한문혼용체로 서술된 이 책에서 서양의 근대 문명을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한편, 한국의 실정에 맞는 자주적인 개화, 실상개화(實狀開化) ’ 를 주장하였다. 개화를 인간사회가 지선극미(至善極美) ’ 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역사는 미개화 · 반개화 · 개화의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는 문명진보 사관(文明進步史觀)을 제시하였다. 그의 문명진보 사관은 종래의 상고주의 사관(尙古主義史觀)을 비판해 문명의 진보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그의 개화사상은 실학의 통상개국론(通商開國論), 중국의 양무(洋務) 및 변법론(變法論), 일본의 문명개화론, 서구의 천부인권론(天賦人權論) 및 사회계약론(社會契約論)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구체적 내용으로는 군민공치(君民共治), ’ 즉 입헌군주제의 도입, 상공업 및 무역의 진흥, 근대적인 화폐 및 조세제도의 수립, 근대적인 교육제도의 실시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개화사상에 나타난 이러한 개혁론은 갑오경장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한 청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수립된 친일내각에 참여, 외아문참의겸군국기무처회의원(外衙門參議兼軍國機務處會議員) · 의정부도헌(議政府都憲) · 내각총서(內閣總書) · 내무협판(內務協辦) 등의 요직을 지내면서 갑오경장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189510월에 을미사변 후 이 사건의 뒷수습을 위해 일본 공사 이노우에(井上馨)와 접촉하였다. 내부대신이 되어 단발령을 강행하여 보수적인 유림과 국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18962월 아관파천 ( 俄館播遷 )으로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친러내각이 수립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한국인 청년장교들이 조직한 일심회(一心會)와 연결,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음모가 양국간의 외교 분규로 비화되자 일본 정부에 의해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유폐되었다. 1907년 고종이 폐위된 뒤 귀국해 흥사단 부단장, 한성부민회(漢成府民會) 회장을 역임하였다.

계산학교(桂山學校) ·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 등을 설립해 국민 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국민경제회(國民經濟會) · 호남철도회사 · 한성직물주식회사 등을 조직해 민족산업의 발전에도 힘을 쏟았다. 1909년에는 국어문법서인 대한문전 大韓文典 을 저술, 간행하였다. 1910년에 훈일등태극대수장(勳一等太極大綬章)을 받았다.

일진회의 한일합방론에 정면으로 반대했으며, 국권상실 후 일제가 수여한 남작의 작위를 거부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서유견문 · 구당시초 矩堂詩抄 · 대한문전 · 노동야학독본 勞動夜學讀本 등이 있으며, 1971년에 유길준전서 편찬위원회가 구성되어 유길준전서 5권이 간행되었다.

 

유진오(兪鎭午)

19061987. 법학자·교육 행정가·정치인.

생 애본관은 기계 ( 杞溪 ). 호는 현민(玄民). 서울 출생. 아버지는 궁내부 제도국 참사관 치형(致衡)이다. 1914년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하였으며,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였고, 1926년 동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19294월부터 19333월까지 동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있으면서 예과에 강사로 나갔다.

19334월부터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어 19364월 교수가 되었다. 1945년 광복 후 잠시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를 겸하였으나 고려대학교에 남아 법정대학장(19461949)·대학원장(19491952)·총장(19521965)을 역임하였다.

한편, 법전편찬위원회 위원(19461950)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였고, 법제처장(19481949), 고등고시위원(19491955), 6·25전쟁 때 부산 전시연합대학 총장(1951), 한일회담 한국측 대표(19511952), 대한국제법학회장(19531968), 한국공법학회장(19571961), 한국법철학회장(19571965), 대한교육연합회장(19601965),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장(1961)을 역임하면서 교육·문화·사회의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4년부터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고려대학교 총장직을 은퇴하고 야당 정치활동에 투신하여 민중당 대통령후보(1966)가 되었고, 신민당 총재(19671970)와 국회의원(19671971)을 지냈다. 1983년부터 투병생활을 하다가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별세하였다.

저 술법학을 공부하고 일제강점기에는 문학가로서 필명을 날리기도 하였던 그는 광복 후 헌법학자로 헌법해의 憲法解義(1949)·헌정의 기초이론(1950)·헌법강의(1953)·헌법기초회고록(1981) 등의 저서와 민주정치에의 길(1963)·양호기 養虎記(1977)·미래를 향한 창(1978)·구름 위의 만상(漫想)등의 저서가 있다. 문학작품으로 창랑정기·김강사와 T교수등도 널리 알려졌다.

 

 

 

兪應孚(유응부) 선생의 일화.

 

단종복위의 거사가 사전에 발각되어 세조가 국문을 하며, 兪應孚(유응부)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하려 했느나?’

잔칫날 한칼로 나리(세조)를 폐하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더니, 불행히도 간사한 놈이 고발하여 이리 되었다. 나리는 빨리 나를 죽여라!”

너는 상왕을 팔아 사직을 도모하려 했구니?’

쓸데없는 말 지껄이지 말라 내가 사직을 도모하다니, 나리 같은 줄 아는가!”

여바라, 저놈의 살가죽을 벗겨라!”

兪應孚(유응부)는 살기죽이 벗기고도 태연했다.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서생들과는 일을 할 수 없다하더니, 과연 그 말이 옳도다. 내가 그 날 거시하지고 몹시 우겼건만, 성삼문 · 팽년 등이 굳이 말려 오늘 이런 화를 당하는구나. 비록 그들은 사람이라도 꾀가 없으니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입을 다물라!”

일았소. 알아볼 일이 있으면 선비들에게 물으시오

유응부는 입을 다문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세조가 더욱 화를 내며 쇠를 달구어 두 다리 사이에 넣어 지졌다. 유응부는 얼굴빛 하 나 변하지 않고 쇠가 식어 버리자 말했다.

쇠가 식었다달구어 오라!”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兪應孚(유응부) 선생의 일화.

 

유응부는 무과 출신으로 키가 매우 크고 용모가 근엄하며 몽이 날쌔었다. 활을 쏘고 세종과 문종의 사랑을 몹시 받았다.

성품이 효성스러워서, 어머나의 미음을 위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했다. 집이 매우가난하여 한 섬 곡식이 없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데에는 넉넉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우 응신과 함께 활 쏘고 사냥하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쳐, 새와 짐승을 쏘아서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고, 음식에 고기 없었으며, 때로는 끼니 걱정을 할 정도로 매우 청렴했다.

 

유응부가 형장으로 가던 날 그의 부인이 말했다.

영감, 살아서는 평안히 산 적이 없고, 죽을 때는 화를 얻었구.”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눈물을 뿌렸다. 조정에서 유응부의 가산을 몰수 했으나, 안에는 다 해어진 짚자리만 있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兪應孚(유응부) 선생의 일화.

 

性品(성품)至極(지극)孝誠(효성)스러워서 어머니의 마음을 慰勞(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였다.

아우 應信(응신)과 함께 활쏘기와 사냥으로 世上(세상)에 이름이 나서 새와 짐승을 만나면 쏘아서 맞추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한 섬 穀食(곡식)貯蓄(저축)도 없으나, 어머니를 奉養(봉양)하는 데는 넉넉히 갖추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이 抱川(포천) 農場(농장)往來(왕래)할 때,兄弟(형제)가 따라 가다가 말 위에서 몸을 돌려 기러기를 쏘매, 활시위 소리와 同時(동시)에 떨어지니, 어머니가 크게 기뻐하였다. 秋江集(추강집)

                                                [출처] 歷史人物-139 兪應孚(유응부)

 

 

兪應孚(유응부) 선생의 일화.

 

()은 벼슬이 宰相(재상)班列(반열)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房門(방문)을 가리고, 먹는 데는 고기 한 점 없었으며,때로 糧食(양식)이 떨어졌었다.죽던 날에 그 夫人(부인)이 울며 말하기를,“살아서는 平安히 산 적이 없고, 죽을 때는 큰 ()를 얻었다.” 하니,길가는 사람이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에서 그 家産(가산)沒收(몰수)하는데,()안에는 떨어진 짚자리만이 있었다.아들은 없고 딸이 둘 있었다. 東閣雜記(동각잡기) 秋江集(추강집)

                                                                  [출처] 歷史人物-139 兪應孚(유응부)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6

()

31

()

36

()

27

()

32

()

37

()

28

()

33

()

38

 

29

()

34

()

39

 

30

()

35

()

40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기계 유씨(杞溪兪氏)는 남한(南韓)에 총 23,437 가구, 97,382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

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445 예천 윤.jpg 예천윤씨(尹) 청남 14-08-29 2610
444 영천 윤.jpg 영천윤씨(尹) 청남 14-08-29 2674
443 양주 윤.jpg 양주윤씨(尹) 청남 14-08-29 2569
442 무송 윤.jpg 무송윤씨(尹) 청남 14-08-29 3498
441 남원 윤.jpg 남원윤씨(尹) 청남 14-08-29 4848
440 옥천 육.jpg 옥천육씨(陸) 청남 14-08-29 4613
439 무송 유.jpg 무송유씨(庾) 청남 14-08-29 5784
438 천녕 유.jpg 천녕유씨(兪) 청남 14-08-29 2891
437 창원 유.jpg 창원유씨(兪) 청남 14-08-29 6370
436 인동 유.jpg 인동유씨(兪) 청남 14-08-29 3201
435 무안 유.jpg 무안유씨(兪) 청남 14-08-29 3889
기계 유.jpg 기계유씨(兪) 청남 14-08-29 6823
433 고령 유.jpg 고령유씨(兪) 청남 14-08-29 2691
432 강진 유.jpg 강진유씨(兪) 청남 14-08-29 2758
431 배천 유.jpg 백천유씨: 배천유씨(劉) 청남 14-08-29 5382
430 거창 유.jpg 거창유씨(劉) 청남 14-08-29 3986
429 강릉 유.jpg 강릉유씨(劉) 청남 14-08-29 4607
428 장흥 위.jpg 장흥위씨(魏) 청남 14-08-29 3117
427 강화 위.jpg 강화위씨(韋) 청남 14-08-29 3002
426 비옥원씨(袁) 청남 14-08-29 2794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