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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창원유씨(兪)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창원유씨)

 

 

본관(本貫): 창원(昌原)

시조(始祖): 유섭(兪涉)

유래(由來):

 

창원 유씨(昌原兪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에서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역임한 유섭(兪涉)으로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상고할 수 없다. 그 후 후손들은 창원(昌原)에 정착 세거(定着世居) 하면서 본관(本貫)을 창원(昌原)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유경

()의 아들 경( )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유귀생(兪貴生)

섭의 증손 귀생(貴生)이 조선초(朝鮮初)에 공부전서(工部典書)를 역임했다.

 

유상지(兪尙智)

섭의 현손(玄孫) 상지(尙智)가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다.

 

유조(兪造)

상지의 아들 조()는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의 번성을 이루었다.

 

유언겸(兪彦謙)

명종(明宗) 때 효자(孝子)로 명성을 떨쳤던 언겸(彦謙)은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유창

호조참판(戶曹參判)과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역임했다.

 

유득일(兪得一)

창의 아들 득일(得一)은 대사헌(大司憲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유집일(兪集一)

1653(효종 4)1724(경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대숙(大叔).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해(汝諧)이며, 아버지는 현감 근()이다. 1680(숙종 6) 진사로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지평 ( 持平 )이 되었고, 1694년 김시걸 ( 金時傑 이인병(李寅炳유상재(柳尙載) 등과 함께 양사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장령 ( 掌令 )이 되었다. 장령으로 있을 때에 지평 김시걸과 함께 옥()의 사체(事體)를 분명히 할 것을 청하였다.

또한, 위접관(慰接官)으로 대마도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였고, 1696년 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뒤 부사직·경상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대사간 등을 거쳐, 1705년 예조참판이 되었다. 1718년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공조판서를 지내고, 1720년 숙종이 죽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를 지낸 뒤 기로소에 들어갔다

 

유신일(兪信一)

장령(掌令)을 거쳐 필선(弼善)을 역임하였다.

 

유숭(兪崇)

1661(현종 2) 1734(영조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원지(元之). 서윤 ( 庶尹 ) 여해(汝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 창( )이고, 아버지는 회일(晦一)이며, 어머니는 이준구(李俊耉)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별검으로서 1699(숙종 25)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정언 ( 正言 ) · 지평 ( 持平 ) · 문학 ( 文學 ) · 장령 ( 掌令 )을 역임하였다. 1713년 사간이 되어 호남의 연해 고을의 수령을 무신으로 임명하도록 청하였다. 또 편당(偏黨)의 폐를 없애기 위해 이조판서직을 윤번으로 임명할 것을 진언하였다.

1715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돌아올 때, 역관 김유기(金有基) 등이 궁각(弓角)을 몰래 사들여오다 청나라 관리에게 발각되자 그 책임으로 정사 진평군(晉平君) ()과 함께 파직당하였다. 곧 복직되어 집의 ( 執義 ) · 승지 등을 거쳐 1719년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대사간을 거쳐 1723(경종 3)에 함경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신임사화로 파직, 강진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영조의 즉위로 풀려나 1725(영조 1) 공조참의에 이어 다시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북변 고을의 수령을 누구나 기피하므로, 이 곳 수령으로서 허물이 있는 자는 파직대신 결장(決杖)으로 다스리도록 청해 실시하게 하였다.

이듬해 다시 대사간이 되고 도승지 · 호조참판 등을 거쳐 1727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정미환국으로 소론들이 등용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 문외송출(門外送黜)당하였다. 이듬해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이 일어나자 호서소모사(湖西召募使)로 기용되고 이어서 도승지 · 대사간 · 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시조 1수가 청구영언 에 전한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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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창원 유씨(昌原兪氏)는 남한(南韓)에 총 2,361가구, 9,971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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