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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남원윤씨(尹)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남원윤씨)

 

 

본관(本貫): 남원(南原)

시조(始祖): 윤위(尹威)

유래(由來):

 

남원 윤씨(南原尹氏)의 시조(始祖) 윤위(尹威)는 윤신달(尹莘達 : 파평 윤씨의 시조)8세손으로, 1176(고려 명종 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국자박사(國子博士)를 거쳐 기거랑(起居郞이부낭중(吏部郎中예빈소경(禮賓少卿) 등을 지냈고, 1200(신종 3)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안렴사(按廉使)가 되어 호남(湖南)에 갔을 때 남원(南原)에서 복기남(卜奇男)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군수(郡守)가 제압치 못하고 안렴사인 위()에게 고()하자 단기(單騎)로 적도(賊徒)를 해산시키고 난을 평정(平定)하여 그 공()으로 남원백(南原伯)에 봉해졌고 남원 땅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서 살면서 파평윤씨(坡平尹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남원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러나 백운거사(白雲居士)로 필명(筆名)이 높았던 이규보(李奎報)가 쓴 <국자사업윤공애사(國子司業尹公哀辭)>에 의하면, 윤위(尹威)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윤관(尹瓘)의 후손으로 덕()과 인품(人品)과 문장(文章)을 갖추었으며, 술을 몇 말씩 먹는 호주가인데도 허튼 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서경 유수(西京留守)로 있다가 죽었는데 남원 사람들이 그의 공을 생각하여 장례비를 모아 남원 땅에 묻히게 하여 후손들이 남원에 살면서 시적(始籍)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윤극민(尹克敏)

시조 위의 아들로 아성(牙城) 전란에 순절함.

 

윤돈(尹敦)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함안백(咸安伯)에 봉해짐.

 

윤황(尹璜)

시조(始祖)의 현손(玄孫)으로 평리(評理)를 지낸 수균(守均)의 아들 황()은 고려 말에 전서(典書)를 지냈으나 조선 개국(開國)에 두문불사(杜門不仕)하여 충절을 지켰다.

 

윤효손(尹孝孫)

1431(세종 13) 1503(연산군 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유경(有慶), 호는 추계(楸溪). 언재(彦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사감무(長沙監務) ()이고, 아버지는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처관(處寬)이며, 어머니는 감찰 정존(鄭存)의 딸이다. 관찰사 지형(止衡)의 아버지이다.

1453(단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보임되고, 1455(세조 1) 성균관저작이 되어 원종공신 ( 原從功臣 ) 2등에 책록되었다. 1457년 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우헌납과 예조정랑을 거쳐 의정부사인이 되었는데, 어버이 병 때문에 사직하자 장흥부사로 임명되었다.

1469(예종 1) 훈련원부정 당시 시정의 폐단을 간하다가 도리어 옥에 갇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1472(성종 3)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 옮겼고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그 때 경국대전 · 오례의주 五禮儀註 를 수찬했으며, 전사고(典祀庫) 설치에 주동이 되기도 하였다.

1473년 호조참의 · 예조참의를 역임하고 전주부윤에 제수되어 고원등제(庫員等第)의 실시를 건의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포상을 청하자 성종은 감탄해 당() 나라 옷감을 하사하였다. 1476년 공조참의로 승진되고,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옮겨졌다가 곧 경상도관찰사로 전직되었다.

1478년 한성좌윤 · 한성우윤을 거쳐 경상도감사를 역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감사로 있을 때 부정사건으로 한 자급(資級) 강등되어 동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1486년 나주목사를 거쳐, 3년 후에 동지중추부사에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였다.

1490년 정조사 ( 正朝使 )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활민대략 · 속자치통감 續資治通鑑 ·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 등의 책과 조맹부(趙孟 琅 )의 족자 ( 簇子 ) 1첩을 가지고 왔다. , 문묘의 찬탁 ( 饌卓 )을 창설하고, 세자의 관()과 도포의 제도를 정하였다.

그 뒤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했으며, 1493년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1494년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와 지의금부사로서 지춘추관사와 실록청당상을 겸해 성종실록 의 수찬(修撰)에 참여하였다.

1498(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의 사초 ( 史草 )를 봤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가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500년 도총부도총관, 이듬해 좌참찬을 거쳐 뒤에 숭정대부 ( 崇政大夫 )에 올랐다. 남원의 방산서원 ( 方山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윤결(尹潔)

1517(중종 12) 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장원(長源), 호는 취부(醉夫) · 성부(醒夫). 지득(之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언( )이고, 아버지는 정랑 시걸(時傑)이며, 어머니는 남순종(南順宗)의 딸이다.

1537(중종 32)에 진사가 되고, 154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하고, 1546(명종 1)에는 유구(琉球)에 표류하였던 박손(朴孫)의 경험담을 토대로 유구풍속기 琉球風俗記 를 저술하였다.

1548년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나, 시정기(時政記) 필화사건으로 참형된 안명세(安明世)의 정당함을 술자리에서 발설한 것이 빌미가 되어 진복창 ( 陳復昌 ), 능성군(綾城君) 구사안 ( 具思顔 ) 등의 밀고로 문정왕후 ( 文定王后 )의 수렴청정과 윤원형 ( 尹元衡 )의 세력확장을 비판하였다고 하여 국문을 받던 중 옥사하였다.

동생 준()도 윤원로 ( 尹元老 )의 죽음이 윤원형 형제의 싸움 때문이라고 말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1567(선조 즉위년)에 복관되었다.

 

윤섬(尹暹)

1561(명종 16)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여진(如進). 호는 과재(果齋). 목사 시영(時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영의정 징()이고, 아버지는 지사 ( 知事 ) 우신(又新)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文化柳氏)로 유문윤(柳文潤)의 딸이다.

1583(선조 1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검열·주서·정자·교리·정언·지평을 거쳐, 1587년 사은사 ( 謝恩使 )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 ( 李成桂 )의 조상이 이인임 ( 李仁任 )으로 오기된 명나라의 기록을 정정한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 ( 光國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교리로 있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 ( 巡邊使 ) 이일 ( 李鎰 )의 종사관이 되어 싸우다가 상주성(尙州城)에서 전사하였다. 유고로 시 22수와 대책 ( 對策 ) 1편이 삼절유고 三節遺稿에 전한다.

 

윤계(尹棨)

1583(선조 16)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신백(信伯), 호는 신곡(薪谷). 지중추부사 우신(又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교리 섬()이고, 아버지는 현감 형갑(衡甲)이며, 어머니는 창원황씨(昌原黃氏)로 관찰사 치경(致敬)의 딸이다.

1624(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상소하여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 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를 거쳐 전적·홍문관교리를 지냈다. 1629년 이조좌랑이 되었고, 1636년에 남양부사가 되었다.

이 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려다 청병에게 잡혀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몸에 난도질을 당하여 죽었다. 뒤에 이초참판에 추증되어 정문 ( 旌門 )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윤집(尹集)

1606(선조 39)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 ( 高山 ). 우신(又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교리 섬()이고, 아버지는 현감 형갑(衡甲)이며, 남양부사 계()의 아우이다.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을 따라 공부해 1627(인조 5) 생원이 되고, 1631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이듬해 설서가 되었다. 그 뒤 수찬 ( 修撰 교리(校理)에 오르고 헌납 ( 獻納 )을 역임한 뒤, 1636년 이조정랑·부교리를 거쳐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했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 ( 崔鳴吉 )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때 오달제 ( 吳達濟 ) 등과 함께 화친의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했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입대(入對)해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소를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옛날 화친을 주장해 사필(史筆)의 베임을 피할 수 없었던 진회(秦檜)와 같은 대간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했다고 극렬한 말로 규탄했으며, 국왕이 대간(臺諫)을 꺼리지 않고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뢰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 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섰다. 청병에 의해 북쪽으로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않아 청병이 오히려 감복해 존경했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그의 뜻을 돌리려 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자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 끌려가 사형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오달제· 홍익한 ( 洪翼漢 )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처음 부제학 ( 副提學 )에 추증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 廣州 )의 절현사(節顯祠), 강화의 충렬사 ( 忠烈祠 ),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 ( 雲川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윤유(尹柔)

집의 아우 유()도 두 형의 죽음에 뜻을 세워 청나라 입김이 스며든 조정에 불사(不仕)하고 효도(孝道)와 문행(文行)으로 여생을 마쳐 가장 강력한 척화가문(斥和家門)으로 절의(節義)를 세웠다.

 

윤이건(尹以健)

1640(인조 18) 1694(숙종 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체원( 橓 元), 호는 일소재(一笑齋). 아버지는 장령 ( 掌令 ) ()이며, 병자호란 때 3학사의 한 사람인 윤집 ( 尹集 )의 조카가 된다. 송시열 ( 宋時烈 )의 문인으로 1673(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하여 동궁세마(東宮洗馬)가 되었다.

일찍이 남인의 영수 윤휴(尹 頊 )는 종문(宗門)임을 내세워 그를 같은 당으로 맞아드리려고 하였으나 이에 따르지 않았다. 마침내 윤휴가 득세하여 송시열이 우두머리로 화를 입게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송시열의 문하에 있었던 것을 들어 옥에 가두고 국문하려고 하였으나, 이조의 반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1680(숙종 6) 경신출척이 일어나 윤휴가 사사(賜死)되고 그 당이 모두 쫓겨났으며 송시열이 환조하여 영부사가 되자 조신들의 천거로 사복시주부로 등용되었다. 이어 금성현령이 되어 나갔으며 공조좌랑 · 진산군수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공적을 쌓았다.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득세하면서 그는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1694년에 풀려나 귀경 중 청주성 밖에서 죽었다.

 

윤기(尹祁)

1535(중종 30) 1606(선조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기(), 자는 백열(伯說), 호는 간보(艮輔). 사심(思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이고,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강원(剛元)이며, 어머니는 이시영(李時榮)의 딸이다.

아버지가 1545(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대윤파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자 함께 따라가서 20여년 동안 모시고 시중을 들었다.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자 1568(선조 1) 사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유생의 소두(疏頭)가 되어 을사사화 때 책록된 공신호(功臣號)의 훈작을 삭탈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직언으로 명성을 떨쳤다.

1576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공조좌랑 · 사헌부감찰을 거쳐, 여러 군현을 다스려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원부사로서 무관을 대신하여 성천에 가서 세자를 시종하였다. 1602년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 仁穆王后 )의 가례 때 성용도감제조(成用都監提調)로 공이 인정되어 첨지중추부사에 승진하였다.

당시 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들은 더욱 총애를 받으려고 대비에게 휘호를 올릴 것을 의논하고, 백관을 이끌고 정청(庭請)하면서 반대하는 자는 처벌한다고 위협하여 모두 따랐으나, “ 신하된 자 임금을 섬김에 어찌 의심받거나 아첨하는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 하면서 홀로 나가지 않았다.

 

윤형지(尹衡之)

1604(선조 37) 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가(景可). 관찰사 세림(世臨)의 후손이며,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신(民新)이고, 아버지는 승지 길( )이며, 어머니는 이세량(李世良)의 딸이다. 김류(金 濫 )에게서 수학하였다.

1624(인조 2)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강화까지 호종하였으며, 청의 위협으로 조정에서 화의 하자는 주장이 강할 때 그는 척화의 소()를 올렸다.

이어서 윤황 ( 尹煌 ) · 윤지경 ( 尹知敬 )도 척화의 상소문을 올리니 삼윤(三尹)의 정기(正氣)라고 칭찬하였다. 1629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 · 승문원박사 · 봉상시직장을 역임하고, 1630년 사관 ( 史官 )으로 천거되었으나 반대파의 저지로 밀려났다

 

윤형준(尹衡俊)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척화로 절의(節義)를 세워 유명하였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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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남원 윤씨(南原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8,767가구, 37,8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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