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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무송윤씨(尹)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무송윤씨)

 

 

본관(本貫): 무송(茂松)

시조(始祖): 윤양비(尹良庇)

유래(由來):

 

무송윤씨(茂松尹氏)의 선대는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미상(未詳)하다가 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윤양비(尹良庇)가 보승낭장(保勝郎將)에 올라 무장현호장(茂長縣戶長)을 역임하게 되자 양비를 시조(始祖)로 하고 무송(茂松)을 관향(貫鄕)으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윤택(尹澤)

1289(충렬왕 15)1370(공민왕 19).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 ( 茂松 ). 자는 중덕(仲德), 호는 율정(栗亭). 국학대사성 문한사학(國學大司成文翰司學)을 지낸 해()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수평(守平)이다. 일찍부터 글을 잘해 고모부 윤선좌 ( 尹宣佐 )를 따라 공부했고, 특히 춘추좌전 春秋左傳에 능통하였다.

1317(충숙왕 4)에 등제해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錄)에 선임되었다가 교감 ( 校勘 )을 거쳐 검열에 올랐다. 연경(燕京)에 머물던 충숙왕으로부터 강릉대군 기(江陵大君祺 : 뒤의 공민왕)를 뒷날 후계자로 추대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1338년 우부대언에 임명되어 전선(銓選 : 인사행정)을 관장했고, 우대언 ( 右代言 )을 거쳐 충목왕 초에 나주목사가 되었다. 충목왕이 돌아가자 밀직이었던 이승로 ( 李承老 )와 함께 중서성에 글을 올려 강릉대군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패하고 충정왕이 즉위하자 얼마 뒤 광양감무로 좌천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밀직제학에 임명되고, 이듬해 소를 올려 시사를 논했으나 윤허되지 않자 개성부윤으로 치사하였다. 향악 ( 鄕樂 )을 원나라에 보낼 것을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상소해 중지시켰다. 1357(공민왕 6) 공민왕이 중 보우 ( 普愚 )의 건의대로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이제현 ( 李齊賢 )에게 궁궐 터를 축조하도록 명했으나 간하여 이를 막았다.

한편 왕에게 상서 尙書의 무일편(無逸篇), 진덕수(眞德秀)대학연의 大學衍義, 최승로상서문 崔承老上書文을 강의하고 유학에 힘쓰도록 권하였다. 1361년 정당문학 ( 政堂文學 )을 더하여 치사하였으나 은퇴한 뒤에도 항상 치국의 길을 직언하였다.

1363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더했으나 이듬해 병이 나서 치사하고 금주(錦州 : 금산)로 은퇴하였다. 효성이 깊고 항상 정직하며 검소하게 지냈다. 공민왕이 손수 진용(眞容)을 그려주고 율정이라는 호 두 글자를 크게 써주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율정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윤소종(尹紹宗)

1345(충목왕 1) 1393(태조 2).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무송 ( 茂松 ).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 할아버지는 찬성사 택()이다.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해 20세 전에 시문에 능해 이제현 ( 李齊賢 )에게 특이하다고 보였다.

1360(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했고, 이색 ( 李穡 )의 문인으로 1365년 예부시에 을과 제1인으로 대책이 가장 뛰어나 춘추수찬(春秋修撰)을 배수받았다. 이어 좌정언에 있을 때 행신(幸臣) 김흥경 ( 金興慶 )과 내시 김사행 ( 金師幸 )이 병국해민(病國害民)한다고 극언하는 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379(우왕 5) 전교시승(典校寺丞) · 전의부령(典儀副令) · 예문응교 등을 지내고, 1381년 모친상으로 금주(錦州 : 錦山)에서 복상을 마치는 동안 남방의 학자들이 많이 와서 수학하였다.

1386년 성균사예로 기용되었으며, 1388년 이성계 ( 李成桂 )가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에 동문 밖에 나가 영접하고 곽광전( 涇 光傳)을 바쳤다. 그것은 우왕을 폐하고 다른 왕씨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전리총랑(典理摠郎)이 되었고 이어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승진하였다. 1389(창왕 1) 이인임 ( 李仁任 )의 죄를 논해 참관저택(斬棺 瀉 宅)을 청했으며, 이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이성계가 조준 ( 趙浚 ) 등과 함께 사전 ( 私田 )을 혁파하고자 했을 때, 정도전 ( 鄭道傳 )과 함께 힘써 협력하였다.

공양왕 때 대사헌 조준의 천거로 좌상시경연강독관(左常侍經筵講讀官)이 되어 변안열 ( 邊安烈 )을 우왕 영립(迎立 : 맞아들여 임금으로 세움)의 죄로 극론해 살해하고, 승려 찬영 ( 粲英 )을 왕사로 맞이하려는 공양왕의 계획을 반대해 중지시켰다.

그 뒤 남을 비방하는 것으로 왕의 미움을 받아 금주로 유배되었다가 풀렸으며, 다시 정몽주 일파의 간관에게 탄핵을 당해 유배되었다가 1392(공양왕 4) 정몽주가 피살되자 비로소 유배에서 풀렸다.

조선이 개창되자 병조전서(兵曹典書)로 부름을 받아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수문관대제학(修文館大提學)을 지냈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했고, 성리학에 더욱 정밀하였다. 시문집으로 동정집 8권이 있다.

 

윤회(尹淮)

1380(우왕 6)1436(세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 ( 茂松 ). 자는 청경(淸卿), 호는 청향당(淸香堂). 고려말 찬성사 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구생(龜生)이고, 아버지는 동지춘추관사 ( 同知春秋館事 ) 소종(紹宗)이며, 어머니는 박경(朴瓊)의 딸이다.

특히, 그의 아버지 소종은 고려 말에 조준 ( 趙浚 ) 등과 더불어 이성계 ( 李成桂 )를 도와 조선왕조를 창건하는 데 깊이 관여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벌써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외울 정도로 총명하였다.

그리하여 1401(태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좌정언, 이조·병조 좌랑 등을 역임하고, 1417년에는 승정원의 대언 ( 代言 )이 되어 왕을 보좌하였다. 이 때에 태종은 그의 학문과 재질을 높이 평가하여, 병조참의로 승진시켰다.

1420(세종 2)에 집현전이 설치되자 1422년에 부제학으로 발탁되어 그곳의 학사들을 총괄하였다. 그 뒤로 한때 동지우군총제(同知右軍摠制)에 임명된 적도 있었지만, 주로 예문관제학·대제학과 같은 문한직(文翰職)을 역임하였다. 벼슬은 병조판서에 올랐다.

또한, 정도전 ( 鄭道傳 )이 편찬한 고려사를 다시 개정하는 일에도 깊이 관여하였고, 1432년에는 세종실록지리지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1434년에는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를 찬집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청경집이 있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윤자운(尹子雲)

()의 손자(孫子) 자운(子雲)은 병조와 형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했으며, 우의정(右議政)을 걸쳐 성종(成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지내고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졌다.

 

윤형(尹泂)

1549(명종 4)1614(광해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무송 ( 茂松 ). 자는 이원(而遠), 호는 퇴촌(退村). 화명(化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심()이고, 아버지는 별좌 ( 別坐 ) 언청(彦淸)이며, 어머니는 이찬(李瓚)의 딸이다. 김치원(金致遠)의 문인이다.

1576(선조 9) 진사시에 일등, 생원시에 2등으로 합격하고, 158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문관검열·승정원주서를 거쳐 1588년 정언에 이르렀다. 1589년 지평으로 있을 때, 정여립 ( 鄭汝立 )의 모반사건으로 빚어진 기축사화 뒤 시행한 논공행상에 불공평을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맹부도사(盟府都事)로 재기용되어 형조정랑·성균관사·종부시정·정언 등을 역임하고 1596년 헌납에 이르렀다. 이후 장령이 되어 관작으로 상을 주는 것은 공로에 대한 대가이므로 남발해서는 안 됨을 역설하였다. 1599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참찬관으로서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우리 나라는 궁시(弓矢)가 장기인데 지금의 성제(城制)는 발사에 불편하므로 고칠 것을 주장하는 한편, 접반사 ( 接伴使 )로서 활약하였다.

1599년 우부승지를 거듭 연임하고 접반사 때의 공로로 한 자급(資級)이 올랐다. 이듬해 의인왕후 ( 懿仁王后 )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이 되어 3년 간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결과 1602년 무성군(茂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공조판서에 임명된 이후 호조판서·판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판중추부사 재직시 임진왜란으로 불탄 실록을 다시 간행할 때에 지춘추관사로 참여하였다.

1606년 서천군수로 나갔다가 도총부도총관을 거쳐, 1608(광해군 즉위년) 판의금부사에 이르렀다. 이후 경기감사를 거쳐 1611년 광국공신 ( 光國功臣 ) 2등으로 무성부원군(茂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윤세복(尹世復)

1881(고종 18)1960. 대종교의 제3대 도사교(都司敎), 초대 총전교(總典敎). 교단에서의 호칭은 단애종사(檀崖宗師), 본명은 세린(世麟). 본관은 무송 ( 茂松 ). 자는 상원(庠元). 경상남도 밀양 출생. 한학을 공부한 다음 고향의 신창소학교(新昌小學校)와 대구의 협성중학교 ( 協成中學校 )에서 5년 동안 교편을 잡았으며, 1906년부터 3년 동안 대구에서 수학(數學)을 공부하였다.

191012월 서울에 올라와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다음 해 정월 시교사(施敎師)로 선임되자 가산 수천 석을 정리하여 남만주로 옮긴 뒤 사재를 들여 환인현(桓仁縣)에 교당을 설립하여 시교에 힘쓰는 한편, 환인현에 동창학교 ( 東昌學校 ), 무송현(撫松縣)에 백산학교(白山學校), 북만주 밀산당벽진(密山當壁鎭)에 대흥학교(大興學校),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대종학원 ( 大倧學園 )을 설립 또는 경영하며 5년 동안 교육에 진력하였다.

1916년 무송현 등 여러 곳에 교당을 설립하여 7,000여 명의 교인을 새로이 모으는 한편, 흥업단 ( 興業團 광정단(光正團독립단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4년 선종사(先宗師)인 무원종사(茂園宗師:金敎獻)의 유명을 받고 영안현 남관(南關)에서 교통(敎統)을 이어 제3대 도사교(敎主)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취임 후 4년 만인 1928년에 일본군부의 압력에 눌려 장쭤린(張作霖)이 체결한 이른바 삼시조약(三矢條約)의 부대조항에 의하여 대종교 금지령이 내려지자 부득이 총본사를 밀산 당벽진으로 옮기는 수난을 겪었다.

이 금지령은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요인 박찬익 ( 朴贊翊 )의 외교활동으로 1930년 난징(南京)의 국민정부가 봉천·길림·흑룡강·열하 등의 동북4성에 대한 대종교 해금령을 내림으로써 한번 해제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31년부터 일본군의 만주침략이 격심해지면서 교단활동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3개의 도본사(道本司)가 해체되었고, 1930년에는 서울에 있는 남도본사 ( 南道本司 )마저 폐쇄되는 등 극히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무릅쓰고 교세확장을 위하여 분기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1934년 영안현 동경성으로 총본사를 옮겨 단군영정을 모신 천진전(天眞殿)을 세웠다.

또한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하얼빈에 선도회(宣道會)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교적간행사업(敎籍刊行事業)을 추진하면서 단군천진궁의 건축을 서둘렀다.

이런 활동을 벌이던 중 1942년 교단간부들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혀 무기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사건을 교단내에서는 임오교변이라고 부른다.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여 이듬해인 1946년 귀국, 서울에 총본사를 설치하였다. 그뒤 교세확장을 위한 교당의 설치, 교단조직의 정비강화, 단군전의 봉안, 교적간행, 인재양성을 위한 홍익대학의 설립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교단체제를 민주화하여 전통적인 교통전수제(敎統傳授制)를 선거에 의한 총전교선임제(總典敎選任制)로 바꾸고 현대사회에 맞는 조직체제로 정비, 강화하여 초대 총전교에 취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윤세주(尹世胄)

19001942. 독립운동가. 일명 석정(石正소용(小用소룡(小龍). 경상남도 밀양 출신. 19193·1운동 때 밀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주 길림(吉林)으로 망명, 궐석재판에서 징역 16월을 선고받았다.

만주에서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 ( 義烈團 )에 입단한 뒤, 이해 10월 단원 곽재기 ( 郭在驥 황상규 ( 黃尙奎 이성우(李成宇) 등 수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성일보사 등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을 폭파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03월 중국인으로부터 3개의 폭탄을 구입한 뒤, 동지들과 폭탄과 무기의 국내반입 및 군자금모금, 폭파공작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협의한 다음 각기 별도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이해 6월 매일 숙소를 바꾸면서 비밀리에 거사시기와 지점을 물색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1년 경성지방법원에서 7년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협력하며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7년 김원봉 ( 金元鳳 )과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중앙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고, 그해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윤세주의 최후에 대하여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1942년 화북(華北)의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하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하였다는 것이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윤호(尹皓)

근대(近代)에 와서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앞장선 호()가 무송 윤씨(茂松尹氏)의 가문(家門)을 빛냈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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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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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무송 윤씨(茂松尹氏)는 남한(南韓)에 총 2,470 가구, 10,32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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