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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오씨(吳)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해주오씨)

 

 

본관(本貫): 해주(海州)

시조(始祖): 오인유(吳仁裕)

유래(由來):

 

해주 오씨(海州吳氏)의 시조(始祖) 오인유(吳仁裕)는 본래 중국(中國) ()나라 때 이름 높았던 대학사(大學士), 984(성종 3) 고려(高麗)에 들어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하였고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에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해주(海州)를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오연총(吳延寵)

1055(문종 9) 1116(예종 11).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집안이 어려웠으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였다. 1096(숙종 1)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1098년 기거랑 ( 起居郎 )이 되고 뒤이어 병부낭중(兵部郎中)이 되었다. 1100년에는 시랑으로서 상서 왕하(王 燃 )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휘종(徽宗)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이듬 해 송나라에서 태평어람 太平御覽 1,000권을 구해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크게 칭찬을 받고 벼슬이 중서사인 ( 中書舍人 )에 올랐다. 그러나 외직을 원해 전주목사가 되었으며, 거기에서 치적을 쌓자 1104년 추밀원좌승선 형부시랑 지어사대사(樞密院左承宣刑部侍郎知御史臺事)가 되었다가 뒤이어 상서좌승 한림시강학사(尙書左承翰林侍講學士)가 되었다.

왕이 남경에 행차할 때 권지추밀원부사(權知樞密院副使)로 호종해 추밀원부사 한림학사(樞密院副使翰林學士)에 올랐다. 1105년 예종이 즉위하자 동지추밀원사 비서감 한림학사 승지(同知樞密院事秘書監翰林學士承旨)가 되고, 뒤이어 어사대부 ( 御史大夫 )가 되었으며, 다시 동북면병마사 겸 지행영병마사(東北面兵馬使兼知行營兵馬使)가 되었다가 동계행영병마사(東界行營兵馬使)에 올랐다.

1106(예종 1) 동계병마사로서 여진 정벌의 신기군 ( 神騎軍 ) 편성에 부모의 나이 70세 이상인 독자, 한 집에서 3, 4명이 군인이 되는 경우 그 중 한 사람, 재추(宰樞 : 宰臣樞臣의 통칭)의 아들 등은 징집을 면제하자고 청해 이를 허락받았다.

참설(讖說)에 근거해 서경에 용언궁(龍堰宮)을 세우고 왕이 순행(巡行)하자는 의론이 일자, 그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정만 손실하는 것이라 하면서 혼자 반대하였다. 그 해 윤관 ( 尹瓘 )과 강경 ( 講經 )을 잘해 의대(衣帶)를 하사받고 검교사도(檢校司徒)에 올랐다.

또한 1107년 부원수로 원수 윤관과 함께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뒤 개선하였다. 그 공으로 협모동덕치원공신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協謀同德致遠功臣尙書左僕射參知政事)가 되었다.

그 뒤 웅주성(雄州城 : 함경남도 길주)에 침입한 여진을 격퇴해 양구진국공신 수사도 연영전대학사(壤寇鎭國功臣守司徒延英殿大學士)가 되었다. 1109년 동계병마부원수(東界兵馬副元帥)로서 윤관과 더불어 길주성을 포위한 여진을 다시 치다가 실패해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이것으로 재상 최홍사 ( 崔弘嗣 ) 등의 탄핵을 받아 한때 관직과 공신의 자격을 박탈당했으나 다시 회복되어 1110년 중서시랑평장사 판삼사사(中書侍郎平章事判三司事), 1112년 수사도 판상서병부사 감수국사(守司徒判尙書兵部事監修國史), 이듬 해에 수태위 판예병부사 상주국(守太尉判禮兵部事上柱國)이 되고 이어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었다.

1114년 추충공신(推忠功臣)에 봉해졌으며, 1116년 수사도 수태위 감수국사 상주국(守司徒守太尉監修國史上柱國)이 되었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오한경(吳漢卿)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다.

 

오광정(吳光廷)

광정(光廷)이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여 가문(家 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오윤겸(吳允謙)

1559(명종 14) 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 또는 토당(土塘).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옥정(玉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경민(景閔)이고, 아버지는 선공감역 희문(希文)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군수 정수(廷秀)의 딸이다. 성혼 ( 成渾 )의 문인이다.

1582(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9년 전강에서 장원해 영릉참봉(英陵參奉) · 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 ( 鄭澈 )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감을 그만둔 뒤 한때 결성 ( 結城 )에 우거했다가 부수찬 ( 副修撰 ) · 이조좌랑 · 지제교 ( 知製敎 ) · 부교리 ( 副校理 )를 역임하였다. 1602년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출보(黜補)되었으며, 그 뒤 7, 8년간 안주목사 · 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안주성의 축조를 담당했으며, 북도순안어사(北道巡按御史)로서 함경도의 민폐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1610(광해군 2)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 · 우부승지 ·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의 권신인 정인홍 ( 鄭仁弘 )이 이언적 ( 李彦迪 )과 이황 ( 李滉 )의 문묘 종사를 반대,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년 남짓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기민(饑民)을 구제하는 한편,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를 수축해 제례 절차와 각 고을로부터의 제수 마련 법식을 제정해 이후 이를 준용하게 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발호로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계가 혼란해지자 늙은 어버이의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였다.

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로서 사행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쇄환했으며, 이 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1618년 북인들에 의해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 정청(庭請)에 불참하였다. 이로 인해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 아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1622년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하극사(賀極使)로 선발되어, 육로가 후금에 의해 폐쇄되었으므로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와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이듬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 · 형조 · 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 ( 南以恭 )의 등용 문제로 서인이 노서(老西) · 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류(金 濫 ) · 김상용 ( 金尙容 )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 · 북인의 고른 등용을 주장,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1624(인조 2)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예조판서 · 지중추부사를 거쳐 1626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자전(慈殿)과 중전을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피난했으며, 환도 뒤 좌의정을 거쳐 162870세로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 때 노서 · 소서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자 이의 중재에 힘썼으며, 특히 경연에서 정치 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에의 전념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 ( 元宗 )으로 추숭하고 또 부묘( 羅 廟 : 상을 마친 뒤 神主太廟에 모심.)하려는 논의가 일자 이에 반대해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가 1633년 좌의정에 재임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인열왕후(仁烈王后 : 仁祖妃)의 상에 총호사(摠護使)로서 과로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었다.

예론에 일가견을 가져, 특히 인조 생부의 추숭과 부묘론에 반대하는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요컨대, 선조의 왕통을 이어받은 인조는 선조가 비록 할아버지이기는 하나 예묘( 窟 廟 : 아버지의 사당)에 해당되므로, 왕이 아닌 대원군(大院君 : 仁祖 生父)을 예묘로 삼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는 의견이었다.

외직에 있으면서 평강현과 경성부의 민폐를 다스려 정치를 잘한 수령 ( 守令 )으로 명성을 얻었다. 중앙관으로는 온아단수(溫雅端粹)하고 공정한 자세를 견지,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 년 간 있을 때 백성의 편의를 위해 연해 공물(沿海貢物)의 작미(作米)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명분론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림을 아끼고 보호해 어진 재상이라 불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경제 ( 經濟 )의 재주가 부족하고, 시폐와 왕의 잘못을 직언하는 기개가 모자라 평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덕업의 수양에만 힘쓸 뿐 사장 ( 詞章 )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조리가 있고, 시는 맑으면서도 운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혼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귀 ( 李貴 ) · 정경세 ( 鄭經世 ) · 이준 ( 李埈 ) · 김류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이귀와는 동문수학에 외가로 인척 사이의 정의(情誼)가 있었고, 임진왜란 중에 친교가 두터웠다. 다만, 뒤에 노서 · 소서의 대립에 이귀가 소서의 영수가 되어 추숭을 적극 추진하자 틈이 벌어졌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조정에 시호를 청하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게 했으나, 1663(현종 4)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광주(廣州)의 구암서원 ( 龜巖書院 )에 배향되고,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과 소차를 모은 추탄문집 을 비롯해 동사일록 東 笑 日錄 · 해사조천일록 海 笑 朝天日錄 등이 전하고 있다.

 

오달제(吳達濟)

1609(광해군 1) 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 ( 秋潭 ). 경민(景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문(希文)이고, 아버지는 윤해(允諧)이며, 어머니는 최형록(崔亨綠)의 딸이다. 병자호란 때 삼학사 ( 三學士 )의 한 사람이다.

1627(인조 5) 사마시 ( 司馬試 )에 합격, 1634(인조 12) 26세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 ( 典籍 ) · 병조좌랑 ·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 정언 ( 正言 ) · 지평 ( 持平 ) · 수찬 ( 修撰 )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 ( 副校理 )가 되었다.

이 때 후금이 세력을 날로 키우며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쳐 조선을 무섭게 위협해왔다. 이에 화친을 위해 주화파 최명길 ( 崔鳴吉 )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임금을 속이고 삼사 ( 三司 )의 공의(公議)를 위협, 제지해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자, 청나라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윤집 ( 尹集 )과 더불어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갔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해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 · 홍익한 ( 洪翼漢 )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 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그는 묵매화(墨梅 怜 )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 ( 魚夢龍 ) · 조속 ( 趙涑 ) · 허목 ( 許穆 )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 화풍에 영향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 그림은 묵매도 墨梅圖 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운(趙之耘) · 홍수주(洪受疇) · 박동진(朴東晉) · 조희룡 ( 趙熙龍 ) · 이공우(李公愚) 등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좌승지 ·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 廣州 )의 현절사 ( 顯節祠 ),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 ( 鴻山 )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 ( 雲川書院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 忠烈公遺稿 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오도일(吳道一)

1645(인조 23)1703(숙종 2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 선공감역(繕工監役) 희문(希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윤겸(允謙)이고, 아버지는 달천(達天)이며, 어머니는 조간(趙幹)의 딸이다.

1673(현종 14)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 1680(숙종 6) 지평·부수찬, 1683년 지제교 ( 知製敎 )를 거쳐 1687년 승지가 되어 자파(自派)를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1694년 개성부유수를 거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간·부제학·강원도관찰사에 이어 다시 부제학을 거쳐 1696년 도승지·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다음해 예문관제학·사직·이조참판, 1698년 이조참판·공조참판을 지내고 양양부사로 좌천, 삭출(削黜)되었다가 1700년 대제학·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1702년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 장성에 유배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세칭 동인삼학사(東人三學士)라 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숙종으로부터 과음의 경계를 받았다. 죽은 뒤 복관되고 울산의 고산서원 ( 孤山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서파집이 있다.

 

오명항(吳命恒)

1673(현종 14)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사상(士常), 호는 모암(慕菴영모당(永慕堂). 영의정 윤겸(允謙)의 현손이며, 달천(達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융(道隆)이고, 아버지는 수량(遂良)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여성제(呂聖濟)의 딸이다.

1705(숙종 3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09년 교리 ( 校理 )를 거쳐 설서 ( 說書 사서 ( 司書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부수찬 ( 副修撰 ), 1713년에 겸필선 ( 兼弼善 ), 1715년 부응교 ( 副應敎 이조좌랑을 지냈다.

1716년 승지에 이어 경상도와 강원도·평안도의 관찰사 등을 거쳐 사직으로 있다가 1724(영조 즉위년)에 소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등용될 때 지중추부사로 기용되어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로 4도도순무사를 겸하여 난을 토평하여 분무공신 ( 奮武功臣 )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에 승진되었으나, 자신이 이인좌와 같은 소론이라는 것을 자책하고 상소하여 사퇴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오두인(吳斗寅)

1624(인조 2)1689(숙종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원징(元徵), 호는 양곡(陽谷). 병마절도사 정방(定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겸(士謙)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상()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효길(孝吉)의 딸이다. 숙부 숙()에게 입양되었다.

1648(인조 26)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1650(효종 1) 지평 ( 持平 )을 거쳐 1656년 장령 ( 掌令 ), 1661(현종 2) 헌납 ( 獻納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1667년 부교리 ( 副校理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679(숙종 5) 공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호조참판, 1682년에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1689년 형조판서로 재직중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자 지의금부사 ( 知義禁府事 )에 세번이나 임명되고도 나가지 아니하여 삭직당하였다.

이 해 사직 ( 司直 )을 지내고, 5월에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자 이세화 ( 李世華 박태보 ( 朴泰輔 )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국문을 받고 의주로 유배도중 파주에서 죽었으며, 그 해에 복관되었다.

1694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풍계사(豊溪祠), 광주(光州)의 의열사(義烈祠), 양성(陽城:지금의 경기도 안성)의 덕봉서원 ( 德峰書院 ), 의성(義城)의 충렬사 ( 忠烈祠 )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양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오태주(吳泰周)

1668(현종 9) 1716(숙종 42). 조선 후기의 문신 · 서예가.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도장(道長), 호는 취몽헌(醉夢軒). 종친부전적(宗親府典籍) 사겸(士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상()이며, 아버지는 판서 두인(斗寅)이다.

12세인 1679(숙종 5)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와 혼인하여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고, 명덕대부 ( 明德大夫 )의 위계를 받았다. 그뒤 광덕대부 ( 光德大夫 )로 품계가 올랐고,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 조지서제조(造紙署提調) · 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희빈장씨 ( 禧嬪張氏 ) 소생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과 남인에 대하여 노론의 송시열 ( 宋時烈 ) 등이 반대운동을 일으키자, 이에 찬동하여 책봉을 반대하는 의견을 상계했다가 일시 관작이 삭탈되었으며, 얼마 뒤 왕명에 의하여 직첩이 환급되기도 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예서에 능하였는데, 1712년에는 청나라 사신이 국왕과 대신의 시가 담긴 병풍을 원하자 그것을 서사(書寫 : 써서 베낌)하기도 하였고, 왕실의 옥책(玉冊 : 왕이나 왕후의 호를 올릴 때 덕을 칭송하는 글을 옥에 새겨 놓은 작은 책)과 신판(神板 : 神位를 새긴 판) · 유지(幽誌 : 남기는 글) 등을 많이 썼다.

또한 시문에도 능하여 숙종의 많은 총애를 받았다. 전하는 묵적으로는 행서체로 쓴 간찰이 다소 있으며, 금석문으로는 오두인석비 吳斗寅石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오원(吳瑗)

1700(숙종 26)1740(영조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月谷).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두인(斗寅)이고, 아버지는 진주(晋周)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태주(泰周)에게 입양되었다. 이재 ( 李縡 )의 처질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23(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영조 4)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문명(文名)이 높았다. 사서 ( 司書 )로 있을 때 영조에게 학문과 덕을 닦는 요령을 진언(進言)하여 받아들이게 하였고, 직언을 잘 하기로 이름이 났다.

1729년 정언으로 있으면서 탕평책을 적극 반대하다가 한때 삭직되었다. 1732년 동지사 ( 冬至使 )의 서장관 ( 書狀官 )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교리 ( 校理 검토관 ( 檢討官 이조좌랑· 응교 ( 應敎 )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736년 참찬관 ( 參贊官 )으로 민형수(閔亨洙)를 신구(伸救)하려다가 또 파직되었으나 곧 다시 기용되어 1739년 부제학 ( 副提學 )이 되고, 승지·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일찍이 영조에게 당나라 육지(陸贄)가 주의(奏議)한 양세법(兩稅法)의 여섯 가지 폐단을 강의하여 왕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고, 또 성학(聖學)의 긴요한 임무를 조목을 들어 밝히고 성덕(聖德)의 문제와 시정(時政)의 잘되고 못됨등을 거론하였다.

성품은 정직하고 성실하였고, 온후(溫厚)하였으며 총명함이 남보다 훨씬 뛰어나고, 문장 또한 깨끗한 절개를 지녔다 하여 진정한 유신(儒臣)이라는 평을 들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오재순(吳載純)

1727(영조 3) 1792(정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문경(文卿), 호는 순암(醇庵) 또는 우불급재(愚不及齋). 공조판서 두인(斗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주(晋周)이고, 아버지는 대제학 원()이며, 어머니는 강릉최씨로 석()의 딸이다.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세자익위사세마를 지냈으며, 1755(영조 31) 할머니인 명안공주(明安公主 : 현종의 딸)의 손자라는 배려를 받아 특명으로 6품에 올랐다. 도사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177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지를 거쳐, 부제학 ( 副提學 ) ·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783(정조 7) 문안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직제학 ( 直提學 )이 되었다. 이어 홍문관 ·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냈으며, 1790년에는 이조판서에 올랐다. 그뒤 홍문관대제학 · 예문관제학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1793년에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같은 해 이조판서로 홍문관제학을 겸하였으며, 임시 수어사로 유진(留陣 : 진지에 머무름)하기도 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로 옮겨 재직중 죽었다. 그는 학문에 뛰어나 제자백가에 두루 통하였고, 특히 주역 에 뛰어났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오랫동안 문형(文衡 : 대제학)과 전조(銓曹 : 吏曹兵曹의 통칭)를 맡았고, 왕은 그의 겸손하고 과묵함을 가상히 여겨 우불급재란 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저서로는 주역회지 周易會旨 · 완역수언 玩易隨言 · 성학도 聖學圖 · 순암집 醇庵集 등이 있다.

 

오경석(吳慶錫)

1831(순조 31) 1879(고종 16).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의 비조이며, 역관 · 서화가 · 금석학자.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원거(元 橄 ), 호는 역매(亦梅) · 진재(鎭齋) · 천죽재(天竹齋). 서울 출신.

당상역관이며 지중추부사인 응현(膺賢)의 아들이고, 3 · 1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세창(世昌)의 아버지이다. 이상적 ( 李尙迪 )의 문하에서 한어(漢語)와 서화를 공부하였다. 가학(家學)으로 박제가 ( 朴齊家 )의 실학을 공부하였다. 1846(헌종 12) 역과 ( 譯科 )에 합격하였다.

 

최초의 개화사상 형성1853(철종 4) 4월 북경행 사신의 역관으로 청나라의 수도 북경에 가서 이듬 해 3월까지 머무르며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중국을 관찰하였다.

그 뒤 13차례나 역관으로 중국을 내왕하면서 해국도지 海國圖志 · 영환지략 瀛環志略 · 박물신편 博物新編 등을 비롯한 다수의 신서(新書)들을 구입해서 연구, 1853 1859년 경에 최초로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1860년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 사건 때, 서양 열강의 근대적 무력과 경제력 앞에 붕괴되고 있는 중국의 참상을 보았다. 조선에도 곧 서양 열강의 침입에 의한 위기가 도래하고 있음을 절감한 그는, 구입한 신서들을 친우 유홍기 ( 劉鴻基 )에게 주어 읽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개화사상을 개진하여 유홍기의 개화사상 형성에 결정적 역활을 하였다.

박규수 ( 朴珪壽 )가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 사건에 대한 조선 조정의 위문사(慰問使)의 부사로 중국에 갔다가 큰 충격과 위기의식을 안고 돌아왔다. 이 때 박규수의 개화사상 형성에도 그는 큰 도움을 주었다.

1866(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대원군에 의해 북경에 긴급히 파견되어 양요에 대한 중국측과의 연락 및 대책 수립의 자료를 수집하고자 하였다. 그는 북경에서 친교를 맺었던 청나라 조정의 실무 관료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해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 자료를 토대로, 조선을 침공한 프랑스 동양 함대는 재정이 부족해 무역상들로부터 군비를 차입했고, 함대에도 군량을 3개월분 밖에 적재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기의 정면 결전을 하지 말고 지구전을 전개해 3개월만 싸우면 프랑스 침공 함대는 패퇴할 것이라는 건의안을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다. 이 건의안은 프랑스 침공 함대를 격퇴하는 전략 수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밖에도 프랑스 동양함대의 조선 침공 직전의 주청(駐淸) 프랑스공사관과 청나라 총리아문(總理衙門) 사이의 왕복 문서를 중국인 친구를 통해 필사해서 본국에 보냈다. 또한 청나라의 실무급 관료들을 만나 병인양요에 대한 의견과 대처 방안들을 수집해 대원군에게 제출하기도 하였다.

초기 개화파 형성1866년 병인양요와 제너럴셔먼호 사건(General Sherman號事件)을 겪은 뒤 조선의 위기가 더욱 급박해졌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그는 유홍기에게 서울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뽑아서 그가 중국으로부터 구입해 온 신서들과 그들의 개화사상을 교육하여 개화파를 형성해 나라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자고 제의하였다.

1869년 박규수가 평안도관찰사로부터 한성판윤으로 전임되어 상경하였다. 박규수에게도 북촌의 양반자제들을 발탁해 개화사상을 교육해서 개화파를 형성해 자주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서양 열강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할 것을 제안하였다.

1869년 말 개화사상의 세 비조인 오경석 · 유홍기 · 박규수는 동지로 완전히 결합하였다. 1870년 초부터는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박영교(朴泳敎) · 김윤식 ( 金允植 ) · 김옥균 ( 金玉均 ) · 박영효 ( 朴泳孝 ) · 홍영식 ( 洪英植 ) · 유길준 ( 兪吉濬 ) · 서광범 ( 徐光範 ) 등 다수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교육하였다. 1874년부터는 이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당파로서의 초기 개화파 개화당 가 형성되었다.

오경석은 병인양요 이후에는 자주적 개국을 실현하고 자주개화정책을 실시해 근대국가로 건설해야 할 필요를 더욱 통감하였다. 그리고 민족주체성이 강한 대원군이 집권한 기간에 준비를 갖추어 개국을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하였다.

미국이 1871년 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개항을 요청해 왔을 때, 그는 개국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대원군에게 미국이 대통령의 국서를 가지고 와서 통상을 요청하는 이 기회에 개항을 단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거절당하고 오히려 개항가 라고 지목당하였다. 이후부터는 쇄국정책을 고수하는 대원군에게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원군과의 친근한 관계도 소원해졌다.

그러나 그는 미국 군함이 함포사격으로 무력 행사를 하면서 개국을 요구하는 신미양요를 일으키자 단호하게 대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신미양요의 뒤처리와 관련해 1872년 조선 조정이 박규수를 정사로 한 사절단을 파견할 때 수역(首譯)으로 지명되어 북경에 가서 신미양요의 수습과 관련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강화도조약 체결과정에서의 활동1875, 일본이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을 일으키고, 이어 18761월에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 앞바다에 무력 침공의 위협으로 개국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 조정[당시 민비집권]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의 외교활동의 업적에 의거해 그를 다시 발탁하여 문정관에 임명하였다.

조선 조정의 승낙 없이 강화에 상륙하려 하자 국제 관례에 없는 일이라고 일본측에 강경하게 항의하였다. 또한 조선 조정에 대해서도 이 문제에 강경하게 대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무력 위협에 대응할 능력이 없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줄 수 없었다.

일본측이 일방적으로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상륙하였다. 18762, 강화부의 연무당에서 근대 최초의 한일회담이 진행되었다. 일본측은 세 차례에 걸친 회담 도중에 간헐적으로 함포로 위협 사격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조작한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도리어 조선측에게 떠넘겨 심하게 추궁하면서 회담에 유리한 위치를 장악하려 하였다.

오경석은 조선측 정사 신헌 ( 申櫶 ), 부사 윤자승(尹滋承)의 막후에서 활동하면서 일본의 함포 위협을 즉각 중지하도록 항의하게 하였다. 일본측의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한 공격에는 중국 신문에 보도된 일본의 정한론(征韓論)을 들어 반격하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의 국기 사용에 대응해 조선의 국기 제작과 사용도 건의하였다.

당시 강화도에서 한일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에서는 개국 문제를 둘러싸고 세 가지 견해가 형성되었다. 첫째, 김병학 ( 金炳學 ) · 홍순목 ( 洪淳穆 ) 등 원로대신들과 대원군의 견해로서, 강경하게 척화론을 주장하고, 병인양요 · 신미양요 때와 마찬가지로 일전을 벌여서라도 일본의 요구를 강경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둘째, 민규호(閔奎鎬) · 민비(閔妃) 등의 주장으로서, 청국의 개국 권고에 따라 주견없이 개국을 주장하는 의견이다. 셋째, 박규수 · 오경석 등의 견해로서, 일본의 무력 위협으로 개국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나, 세계 대세로 보아 조만간 개국은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번의 승산 없는 전쟁을 피하고, 최대한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국을 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오경석은 당시의 민비정권으로서는 군함 5척을 끌고 온 일본과 무력으로 대결해 승리할 능력과 의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때문에 최대한 사태를 수습하면서 개국하고 나서 대응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판단, 그의 의견을 박규수에게 개진해 개국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대원군은 오경석을 운현궁에 불러들여 개국을 거절하고 일본과 일전을 벌일 것을 지시하였다. 또 강화도에 사람을 보내 그를 심하게 힐책하기도 하였다. 그는 민비정권으로서는 일본과 일전을 벌여 보아야 사태가 더욱 불리해질 것으로 보았고, 또 대원군의 쇄국정책도 결코 나라를 구하는 방책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결국, 1876226일 체결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는 그가 바란 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극악한 무력 위협 속에서도 사태가 전쟁으로 치달아 준비없는 조선이 더 큰 굴욕을 받지 않는 가운데 개국하게 하려고 노심초사하면서 사태 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에 과로해, 일본측이 군함을 이끌고 돌아간 직후인 18764월에 쓰러져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 사이 오경석은 외교활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1869년에는 통정대부, 1873년에는 가선대부, 1875년에는 자헌대부, 1877년에는 숭정대부를 거쳐 숭록대부의 직함을 받았다. 강화도조약 직후 병석에 누운 뒤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서화 수집에 취미를 가져 중국과 국내에서 방대하고 희귀한 서화들을 수집, 수장하였다. 매화를 잘 그려 일가를 이루었고, 예서(隷書)와 전자(篆字)를 잘 썼다. 금석학에도 일가를 이루어 삼한금석록 三韓金石錄 을 지었으며, 각지의 비석과 유적을 두루 답사하였다.

저서로는 삼한금석록 외에 삼한방비록 三韓訪碑錄 · 천죽재차록 天竹齋箚錄 · 양요기록 洋擾記錄 등이 있다.

 

오세창(吳世昌)

1864(고종 1) 1953. 서예가 · 언론인 · 독립운동가.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 · 乶 松 ). 서울 출생. 조선 말기 중국어 역관이며 서화가 · 수집가였던 경석(慶錫)의 장남이다. 20세에 역관이 되었다가, 1886년 박문국 주사로서 한성순보 기자를 겸하였다.

1894년에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이 되었고, 이어 농상공부 참서관, 통신원 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897년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교사로 1년간 체류하였다. 1902년 개화당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던 중에 손병희 ( 孫秉熙 )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6년 귀국 후 만세보 · 대한민보 사장을 역임하였고, 3 · 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8년에 근대적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될 때 13인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민족서화계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해방 후 서울신문사명예사장 · 민주의원 · 대한민국촉성국민회장 ·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 · 25동란 중 피난지 대구에서 죽어 사회장 ( 社會葬 )이 거행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한묵생활(翰墨生活)로 은거하며 오경석과 자신이 수집한 풍부한 문헌과 고서화를 토대로 근역서화징 槿域書 怜 徵 을 편술하였다.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사전이다.

그 밖에도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친 서화가 · 문인학자들의 날인(捺印)된 인장자료를 모아 근역인수 槿域印藪 를 집성하였으며, 수집한 소품 고서화들을 화첩으로 묶은 근역서휘 槿域書彙 · 근역화휘 槿域 怜 彙 등 한국서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글씨는 전서와 예서를 고격(高格:옛 격식)하게 즐겨 썼다.

특히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 ( 瓦當 ), 고전(古錢), 갑골문형태의 구성적인 작품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또한 고서화의 감식과 전각(篆刻)에 있어서도 당대의 일인자였다.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 慈通弘濟尊者四溟大師碑 의 두전(頭篆:빗몸의 머리에 돌려가며 쓴 전자)을 비롯한 기념비 글씨도 전국 곳곳에 많이 남겼다.

 

오동진(吳東辰)

1889(고종 26)? 독립운동가. 호는 송암(松菴). 평안북도 의주 출신. 의주의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한 뒤, 평양의 대성학교 ( 大成學校 )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뒤 고향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중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의 손길이 미치자 가족을 데리고 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하였다.

간도에 자리를 잡은 뒤, 안병찬 ( 安秉瓚 )과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하고 교육부원이 되어 만주와 국내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20년 광복군총영 ( 光復軍總營 )을 결성, 총영장(總營長)이 되어 독립군을 편성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이 때 미국 국회의원단이 우리 나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의 존재를 그들에게 확인시켜주기로 하였다.

그래서 소속 독립군 중에서 안경신 ( 安敬信 ) 3명은 평양으로, 정인복 ( 鄭仁福 ) 2명은 신의주로, 임용일(林龍日) 2명은 선천으로, 김영철 ( 金榮哲 ) 3명은 서울로 잠입시켜 각기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도록 하였다.

평양 잠입조는 평안남도 경찰부에, 신의주 잠입조는 신의주역 철도호텔에, 선천 잠입조는 선천경찰서와 선천군청에 각기 폭탄을 던져 폭파하였다. 그러나 서울 잠입조는 총독부 폭파를 계획하던 중 발각, 체포됨으로써 실패하였다.

1922년 재만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결성된 대한통의부 ( 大韓統義府 )의 교통부장·재무부장으로 임명되어 국내외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군사부장 겸 사령장(司令長)이 되어 소속 독립군을 지휘, 활발한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였다.

1925년 대한통의부· 의성단 ( 義成團 대한독립단 ( 大韓獨立團 광정단(光正團) 10여 개 단체를 규합하여 정의부 ( 正義府 )를 결성하고, 군사부위원장 겸 사령장으로 소속 독립군을 지휘하여 국경지방의 일본경찰관서를 습격, 파괴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평안북도 초산경찰서의 추목주재소(楸木駐在所외연주재소(外淵駐在所) 및 벽동경찰서 여해주재소(如海駐在所) 습격사건과 1925년 차련관주재소(車輦館駐在所) 습격사건 등이었다.

1926년 고려혁명당 ( 高麗革命黨 )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28년 일본경찰의 밀정인 김종원(金宗源)의 모략에 빠져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되어 신의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경성형무소와 공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193420년으로 감형되기도 하였으나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오긍선(吳兢善)

1879(고종 16)1963. 의학자·사회사업가.

생 애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중극(重克), 호는 해관(海觀). 아버지 인묵(仁默)과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8세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상경 후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지냈으나 개화의 물결로 1896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협성회 ( 協成會 독립협회·만국공동회 간부로 활약하였다. 일제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하면서 공주·논산·군산 등지에서 선교사와 개인교사를 하였다.

1902년 미국유학을 하여 센트럴대학 교양학부를 수료하고, 켄터키주 루이빌의과대학에서 수학하고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07년 루이빌시립병원 인턴으로 들어가 6개월간 피부과를 전공하였고, 같은 해 10월 미국남장로회선교부로부터 한국 파견 선교사 자격을 얻어 6년 만에 귀국, 전라북도 군산 야소병원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의료봉사사업을 시작하였다.

활동상황1909년 군산에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직을 맡아가며 청소년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구암교회도 설립하였다. 1910년 봄, 군산을 떠나 전라남도 광주로 가서 광주야소교병원장에 취임하고, 1911년에는 목포야소교병원장으로 전임하여 목포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 교장직도 겸임하였다. 1912년에는 남장로회 선교부 대표자격으로 세브란스의학 전문학교 조교수 겸 진료의사로 취임하였는데, 이는 한국인 교수로는 첫 등용이었다.

19164월부터 1년간 일본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비뇨기과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피부과를 신설하여 과장 겸 주임교수로 피임되었다. 1919년에는 경성보육원(京城保育員)을 설립하여 고아양육사업을 시작하고, 19342월에 에비슨교장 후임으로 제2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교장취임을 축하하는 명예이학박사와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미국 센트럴대학과 루이빌대학에서 각각 받았다.

19421월 일제의 압력으로 교장직을 사임한 뒤로 보육사업에만 전념하였다. 광복 후에는 관계진출의 권유를 뿌리치고 안양기독보육원장으로서만 진력하였는데, 그간 조선피부비뇨기과학회 명예회장, 대한성서공회이사장, 기독청년회이사, 서울여자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지냈으며, 구황실재산관리총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울특별시 시민보건위생공로감사장, 민간사회 분야 사회사업공로표창, 대한의학협회 의학교육공로표창, 정부의 공익포장(公益褒章), 새싹회의 소파상(小波賞) 등을 수상하였다. 죽은 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증되었다.

 

오상순(吳相淳)

1894 1963. 시인. 본관은 해주 ( 海州 ). 호는 처음에는 선운(禪雲), 뒤에 공초(空超). 폐허 廢墟 창간호에서는 성해(星海)라는 필명을 쓰기도 하였다. 서울 출신. 아버지는 태연(泰 敏 )이다. 어의동학교(於義洞學校 : 지금의 孝悌國民學校)를 거쳐 190613세에 경신학교 ( 儆新學校 )를 졸업하였다.

그 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1918년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종교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원래 기독교 신자로서 1919년 교회 전도사로 있었으나 그 뒤 불교로 개종하여 1921년 조선중앙불교학교(朝鮮中央佛敎學校), 1923년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전국 여러 사찰을 전전하며, 참선과 방랑의 생활을 계속하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문학 활동은 1920년 폐허 동인에 가입하여, 김억 ( 金億 ) · 남궁 벽(南宮璧) · 황석우 ( 黃錫禹 ) 등과 친교를 맺으면서 폐허 창간호에 자신의 인생관과 문학관을 담은 수필 시대고와 그 희생 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폐허의식 이 새로운 생명의 창조와 결부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어 1921폐허 2호에 힘의 숭배 · 힘의 동경 · 힘의 비애 · 혁명 · 때때신 · 돌아! · 가위쇠 등 시 17편 및 평론 종교와 예술 을 발표함으로써 폐허 동인 중 폐허 지에 가장 많은 작품을 게재한 시인이 되었다. 이 밖에 1920개벽 開闢 11월호에 의문 · 어느 친구에게 〉 〈 나의 고통 등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보아 그의 시는 어휘 구사가 생경하고 언어의 감각적 사용에도 그리 능한 편은 아니다. 그러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방랑(放浪)의 마음 (조선문단, 1935) 등 몇몇 작품에서는 사물의 심상화(心象化)를 성공적으로 시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으로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 을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은 호흡이 길고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여러 사실을 차례로 제시하는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1956년에 예술원상, 1962년에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생전에 발간한 시집은 없고 1963년 제자들에 의하여 공초오상순시집 空超吳相淳詩集 이 간행되었다. 유해는 수유리에 안장되어 있고 1963년 여기에 방랑의 마음 첫머리를 새긴 시비가 건립되었다.

 

 

吳達濟(오달제)  선생의 일화.

 

병자호란 때 끝까지 화친과 항복을 반대하여 청나라로 끌려가 처형당한 삼학사 중의 한 사람인 오달제(吳達濟)가 출생한 곳이 원삼면 학일리 고초동이라 한다.

그가 태어날 적에 마을의 초목이 모두 말라죽었다 하여 마을의 이름이 ‘ 고초동(枯草洞) ’ 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1609(광해군 1) ∼ 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추담(秋潭) 경민(景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문(希文)이고, 아버지는 윤해(允諧)이며, 어머니는 최형록(崔亨綠)의 딸이다.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吳瑗(오원)의 정성

 

아버님을 속였어요

 

효는 백행의 근본이다.’라는 말과 같이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며 아름다운 전통으로 삼아 왔었 다. 여기에 그 좋은 본보기가 있으니 들어보기로 한다.

 

지금부터 180여 년 전에 오늘날의 성주군 용암면에 가난한 농부인 오 원 (吳瑗)의 집에 귀여운 딸이 태어났다.

부인은 남편에게 여보, 딸을 낳아 미안하오.”하고 말하자, 남편인 오 원 은 그 무슨 말이오.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하며 웃음을 잃지 않고 대답하였다.

 

비록 가난하기는 하나, 당시 해주 오씨하면 양반의 집안이라, 딸에게 도 삼강오륜을 지키는 체통과 풍습을 익히도록 일러 주며, “어진 아내, 훌 륭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 너의 가야할 길이다.”라고 가르쳤다.

여덟 살 때부터 빨래하기, 밥짓기, 집안 청소 등 어머니의 일손을 도와드리고, 아버지의 잠자리 돌보기, 신발 씻어 드리기 등을 하여, 효심이 지극한 소녀라고 칭찬을 들었다. 차차 나이가 들면서부터 베짜기, 바느질하기 등을배우면서 자라나 17 세 해 지금의 고령군 다산면 송곡동에 살고 있는 조 규 승(曺奎承)과 결혼하게 되어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다.

 

옛 말에 여자란 출가외인이라하여 시집을 가게 되면, 시댁의 가풍과 예법에 따라, 시부모를 정성껏 모시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남편을 받들며 살아가야 했다.

그런데, 시가도 또한 가난하기 짝이 없어 끼니조차 겨우 이어갈 정도라서, 식사 때가 되면, ‘조금이라도 좋은 음식을 시부모님께 차려 드려야 할텐데.’ 하는 걱정이 앞을 가렸다. 자기는 부엌에서 눌은밥과 숭늉으로 끼니를 때우는 둥 마는 둥 하면서도 시부모님께는 온갖 정성을 다해 나물 한 접시라도 더 맛있게 해 드리려는 가득한 마음으로 봉양하였다.

 

한편, 남편은 조그마한 밭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고, 자기는 밤을 낮삼아 부지런히 베를 짜서 시장에 내다 팔고 헐벗고 굶주리며 돈을 모아, 시집온 지 3 년 만에 문전옥답을 사모아 재미있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며 살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시아버님께서 지금의 달성군 논공장에 갔다 오시다가 갑자기 쓰러져 자리에 눕게 되고, 병환을 걱정하시던 시어머님마저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이런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길 줄이야 꿈엔들 생각하였으리요?

이 일로 단란하던 집안의 기운은 먹구름이 감돌고, 근심 걱정은 태산 같았 다. 그러나, 부부는 산지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좋다는 약은 모조리 구해 드 렸으나 별다른 효험이 없고, 날이 갈수록 병세는 점점 악화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애간장을 다 태우게 하였다.

 

며느리인 오 부인은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 약값을 마련하느라 얼굴이 붓고 다리가 부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베를 짜고 농삿일을 돌보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한편으로는 한밤중이 되면 뒤뜰에 있는 배나무 밑에 정화수를 떠 놓고, 천지신명께 시아버님 병환을 낫게 해 달라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무리 매서운 폭풍우가 몰아쳐도 한결같이 기도드리기를 수년간 계속하였다.

 

어느 날 하루는 여느 때와 같이 기도하고 있는데, 찬바람이 획 지나가고 갑자기 촛불이 꺼지더니, 한 선인(仙人)이 나타나 하는 말이, “시아버님의 병환이 곧 낫게 되리다.”하고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이 어찌된 일인가 꿈이 아닌가? 시아버님의 병환이 곧 낫게 되다니,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 , 꼭 그렇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몇 번이나 절을 하며 기도를 올렸다. 방에 들어와 베틀에 앉아서 기억 을 더듬었으나 꿈만 같이 아득하였다.

 

이튿날 아침상을 들고 시아버님 방에 들어가 식사 시중과 병 간호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스님의 목탁 소리가 들리기에 나가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약 간의 시주를 한 뒤 돌아서려는데,

부인, 걱정이 많겠읍니다.”하기에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하고 되묻자,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마는 시어른의 병은 인육(人肉)을 먹어야 나을 수 있는데....”

하고는 입맛을 다시며 사라져 버렸다. 그제서야 엊그제 밤 선인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이제는 영약을 얻는가 싶어서 ,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혼자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기회를 봐서 자기의 살을 드리려고 마음먹었다. 그 다음 날이 마침 논공의 장날이라 남편은 시장에 가고 없었다. 이 때다 하며 부엌에 들어가 칼날을 세워 어금니를 악물고 허벅지의 살을 세 점이나 베어 정성들여 고아서, “장에서 사 온 쇠고기 입니다. 드시고 기운을 차리십시오.”하며 찢어지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권하였더니, 시장에서 사 온 쇠고기인 줄 알고 맛있게 잡수셨다. 과연 스님의 말씀대로 3 일이 지난 뒤부터 병세는 점차로 회복되어 열흘만에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그 후 며느리의 다리도 새 살이 돋아나 완쾌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화목하게 살았다고 한다.

훗날 이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져서 인근 주민들까지도 크게 감동 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 암행어사 이 동련(李東蓮)이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이 사실을 알고 예조 판서인 김 정집(金鼎集)에게 전하니 크게 찬탄하고 호세를 면세하고 효부라 칭하였다 한다.

 

오 효부의 효행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려 전하기 위해 광복 후 창녕 조씨 문중에서 해주 오씨 숭효각을 고령군 다산면 송곡동 44번지에 목조 와가로 건립하여 1 년에 한 번씩 참배하고 그 공적을 되새기어, 경로 효친의 교훈을 오늘에도 일깨워 주고 있다.

 

출전고령군 벌지초등학교 조 교감

참고 문헌 高靈大觀, 大伽倻, 孝烈行誌

 

 

 

 

 

 

표 출전<하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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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해주 오씨(海州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90,842가구, 377,0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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