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玉(의령옥씨)
본관(本貫): 의령(宜寧)
시조(始祖): 옥진서(玉眞瑞)
유래(由來):
옥씨(玉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우리나라 옥씨(玉氏)의 연원(淵源)은 고구려(高句麗)의 요청에 의해 당(唐) 나라에서 파견된 8재사(八才士) 중의 한 사람인 옥진서(玉眞瑞)가 신라(新羅)에서 국학 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고, 의춘(宜春 : 의령의 별칭) 군(君)에 봉해져 의령(宜寧)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를 상고(詳考) 할 수 없어 후손들이 고려(高麗) 때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과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옥여(玉汝)를 일세조로 하는 계통과 갈라져서 본관(本貫)을 의령(宜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 나타난 옥씨(玉氏)의 본관(本貫)은 17본으로 전하나 이는 세거지명(世居地名)을 나타낸 것에 불과한 것이며, 현재는 의령(宜寧) 단본(單本)으로 전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옥규(玉珪)
규(珪)가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옥고(玉沽)
1382(우왕 8) ∼ 1436(세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대수(待 魔 ), 호는 응계(凝溪). 증조는 전백(全伯)이고, 할아버지는 안덕 ( 安德 )이며, 아버지는 사미(斯美)이다. 길재 ( 吉再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생원시를 거쳐 1399년(정종 1) 식년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하였다.
그 뒤 성균관의 학유 ( 學諭 ) · 학정 ( 學正 ) · 박사 · 전적 ( 典籍 )과 안동부통판(安東府通判) 등을 거쳐 1408년 (태종 8)경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로 파견되었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의 설치와 함께 재행이 있다 하여 교리 ( 校理 )에 선보(選補 : 선발되어 제수됨)되었으며, 정언 ( 正言 ) · 예조정랑, 황해도문민질고사(黃海道問民疾苦使),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 장령 ( 掌令 ) 등을 역임하고 대구에 은거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할 뿐만 아니라, 총명한 자질로 학문에 힘써 명망이 높았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안동의 묵계서원 ( 默溪書院 )에 祭享(제향)되었다
표 출전<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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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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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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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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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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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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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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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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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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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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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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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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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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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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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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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득),炳(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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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의령 옥씨(宜寧玉氏)는 남한(南韓)에 총 4,622가구, 18,9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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