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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개성왕씨(王)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개성왕씨)

 

 

본관(本貫): 개성(開城)

시조(始祖): 왕건(王建)

유래(由來):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누대(累代)에 걸쳐 송악(松嶽) 지방(地方)에 세거(世居)해 온 호족(豪族)의 집안으로서, 고려(高麗) 때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된 국조(國祖)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의 증손(曾孫)으로 후삼국(後三國)을 평정하고, 500년 고려왕조(高麗王朝)의 문호(門戶)를 연 태조(太祖) 왕 건(王 建)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질(資質)이 비범하였다. 그는 스무살 때 태봉국왕(泰封國王)인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역전의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정벌(征伐)한 지방의 구휼(救恤)에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왕 건은 궁예(弓裔)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얻어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는데, 궁예의 횡보가 나날의 심해져 민심(民心)이 어지러워지자 918(고려 태조 1) 신숭겸(申崇謙홍 유(洪 儒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 중신(重臣)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王位)에 올랐다. 그 후 34대왕조(王朝)에 걸쳐 475년동안 왕씨(王氏)의 찬란한 문화는 꽃을 피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희군으로 왕업(王業)이 무너지면서 잔인한 정치적인 보복에 멸족(滅族)의 참변을 당하여 전(((()씨 등으로 변성(變姓)하고 혈맥(血脈)을 유지하였으며, 조선 정조(正祖) 때 와서 왕씨(王氏)로 환성(還姓)하고 송악(松嶽)의 옛 지명인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왕건(王建)

877(헌강왕 3) 943(태조 26). 고려 제1대왕. 재위 918 943. 성은 왕(). 이름은 건().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岳 : 지금의 경기도 개성) 출생.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 ( 弓裔 )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 철원(鐵圓 : 지금의 강원도 鐵原)에 도읍을 정하자 그의 부하가 되었다. 900년에 궁예의 명령으로 광주 ( 廣州 ) · 충주 · 청주(靑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및 당성(唐城 : 지금의 화성군 남양) · 괴양(槐壤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 등의 군현을 쳐서 평정한 공으로 아찬(阿 樹 )이 되었다.

903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함락시켰다. 그리고 부근 10여 개 군현을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또한 양주수(良州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구해주었다. 그리하여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으며, 그 동안의 전공으로 알찬(閼 樹 )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 樹 )에 올라 시중 ( 侍中 )이 되었다.

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 ( 洪儒 ) · 배현경 ( 裵玄慶 ) · 신숭겸 ( 申崇謙 ) · 복지겸 ( 卜智謙 ) 등의 추대를 받아, 918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해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 ( 天授 )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환선길 ( 桓宣吉 ) · 이흔암 ( 伊昕巖 ) 등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해야 하였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후백제 견훤 ( 甄萱 )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하였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안정책이었다. 신라 말기 이래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取民有度)의 표방은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에 대해서는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했으며,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태조는 궁예나 견훤에게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고,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919(태조 2)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 · 후백제 · 고려의 후삼국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해 친화정책을 썼다. 이 해 10월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는데,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했던 것이다.

후백제와는 초기에 화전(和戰) 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 · 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새 왕조의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이 지역은 고려 역시 중요시했으므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왕실 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했으며, 같은 해 10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해졌다. 마침내,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 政誡 1권과 계백료서 誡百寮書 8편을 저술, 중외에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지켜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생각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 대광 ( 大匡 ) 박술희 ( 朴述熙 )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 訓要十條 를 친수(親授)해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부탁하였다. 훈요십조 는 그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 ( 顯陵 )이다.

 

왕미

교서감(校書監)을 역임하였다.

 

왕흥(王興)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관료. 1385(우왕 11) 딸을 우왕에게 바쳤는데, 실은 변안열 ( 邊安烈 )의 아들과 성혼시키려 하였으나 우왕의 강요에 의하여 납비(納妃)한 것이었다. 이 때의 직함은 전공판서(典工判書)였으며, 이로 인하여 우왕이 그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387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오르고 다음해에는 지밀직사사가 되었으며, 딸은 선비 ( 善妃 )에 봉해졌다. 그러나 같은해 위화도회군 ( 威化島回軍 )이 있고 우왕이 퇴위하자 다른 비부(妃父)들과 함께 유배되었다. 곧 사면되었으나 1391(공양왕 3) 간관 ( 諫官 ) 허응(許應) 등의 주장에 의하여 청주로 다시 유배되었다

 

왕방연(王邦衍)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충신.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단종복위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중인 노산군(魯山君 : 단종)에게 1457년 사약이 내려질 때 그 책임을 맡은 의금부도사였다.

그는 영월에 이르러 사약을 받들고 노산군 앞으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감히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나장 ( 羅將 )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재촉하자 하는 수없이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을 때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이때 단종을 항상 곁에서 모시던 공생(貢生 : 관가나 향교에서 심부름하던 통인과 같은 사람)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이때의 괴로운 심정을 읊은 시가 전한다.

장릉지 莊陵誌에는 금부도사(그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가 밤에 굽이치는 여울의 언덕 위에 앉아 슬퍼하면서 노래를 지었는데, 그뒤 1617년에 김지남 ( 金止男 )이 금강에 이르러 여자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한문으로 단가를 지었다고 전한다.

 

왕희걸(王希傑)

?1553(명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사웅(士雄). 일명 시걸 (時傑)이라고도 한다. 증조는 지덕(地德)이고, 할아버지는 종의(宗義)이며, 아버지는 경흥도호부사 무()이다. 1534(중종 29)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을 거쳐 1545(인종 1)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가 되었으며 1546(명조 1) 경성판관, 1550년 비변사낭관이 되었다. 이듬해 자산군수(慈山郡守)가 되었고, 사인 ( 舍人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을사사화가 일어나던 해에, 함경도어사로 나가 있으면서 장계를 올려 보우 ( 普雨 )가 안변 황룡사(黃龍寺석왕사 ( 釋王寺 )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계림군 ( 桂林君 )을 숨겨주었다고 하였다.

당시에는 조작한 말이라고 무시되었으나, 뒤에 문정왕후 ( 文定王后 )가 죽고 조정 내부에서 배불의 상소가 잇따라 있게 되자, 이 때의 그의 장계가 보우의 승직을 삭탈시키는 데 큰 구실이 되었다. 일찍이, 이황 ( 李滉 노수신 ( 盧守愼 홍섬 ( 洪暹 ) 등 당대의 명유와 교유하였으며, 문장·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다.

 

왕의성(王義成)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병. 자는 덕보(德甫), 호는 서강(西岡). 구례 출신으로 아버지는 득인(得仁)이다. 1597(선조 30)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아버지 득인과 동향인 의사 이정익(李廷翼한호성 ( 韓好誠 양응록 ( 梁應祿 고정철(高貞喆오종(吳宗) 등과 함께 왜군을 석주(石柱)에서 막았으나 공을 못 세우고 물러섰다.

1636(인조 14) 청나라가 침입하자 병사와 식량을 모아서 전투에 임하려하였으나, 청주에 도달하였을 때 강화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갔다. 1812(순조 12)에 아버지 득인과 함께 충신으로 표창되고 정문이 세워졌으며, 지평 ( 持平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왕재일(王在一)

한말(韓末)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재일(在一)은 광주고보(光州高普)에 다니면서 비밀단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王建(왕건) 의 일화.

 

1)

        夢灘(몽탄)

후삼국시대 왕건(王建)이 나주성에 웅거한 견훤과 한판 승부를 겨루기 위해 몽탄강 근처 동강면 옥정리 몽송(夢松)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견훤의 군대가 사방을 에워싸고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포위된 왕건군이 혈로를 뚫고 도망하려 했으나 몽탄강물이 범람해 빠져나갈 수가 없었고 견훤군의 공격은 왕강하였다. 시간이 지나 밤이 깊어서야 겨우 견훤군은 공격을 멈추었다.

이 때 군막에서 막 잠이 든 왕건의 꿈속에 백발노인이 현몽하여 지금 강물이 빠졌으니 어서 강을 건너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꿈에서 깨어 즉시 군사를 강 건너로 옮겨 파군천에 매복시켜 놓았다가 추적해 오는 견훤군을 크게 무찔러 대승을 하였다고 한다.
그 뒤 그 여울을 꿈에 현몽을 받아 건넌 여울이라 하여 몽탄(夢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2)

왕건이 오르던 건등산

건등산(建登山, 260m)은 문막읍에 있는 산이다.
옛날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부하로 있을 때 혁혁한 무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이 때 왕건은 이 산에 진을 치고 오르내리면서 견훤과 대적하였다. 즉, 왕건이 오른 산이라고 하여 ‘ 건등산 ’ 이라 했다는 전설이다.

 

 

표 출전<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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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남한(南韓)에 총 4,456가구, 18,7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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