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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단양우씨(禹)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단양우씨)

 

본관(本貫): 단양(丹陽)

시조(始祖): 우현(禹玄)

유래(由來):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중국 계통으로 하()나라 우왕(禹王)의 후예(後裔)라 전한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선계(先系)는 상고(詳考)할 수 없다. 우리나라 우씨(禹氏)의 연원(淵源)은 우현(禹玄)이 고려 초 중국에서 건너와 단양(丹陽)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부터이다.

()은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냈고,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그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현()10세손 현보(玄寶)가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현()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단양(丹陽)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는 단양(丹陽) 외에도 예안(禮安영천(榮川강주(剛州) 40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세거지(世居地)에 불과하며 현재는 단양 우씨(丹陽禹氏) 단일 본으로 전해진다.

 

가문의 중요 인물

 

우중대(禹仲大)

()6세손인 중대(仲大)가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우천규(禹天珪)

중대(仲大)의 맏아들 천규(天珪)가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했다.

 

우천계(禹天啓)

중대의 둘째 아들 천계(天啓)가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우천석(禹天錫)

중대의 셋째 천석(天錫)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우탁(禹倬)

1263(원종 4) 1342(충혜왕 복위 3). 고려 말 정주학 수용 초기의 유학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 · 卓夫), 호는 백운(白雲) · 단암(丹巖).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 ’ 이라 일컬어졌다. 시조 현()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천규(天珪)의 아들이다.

1278(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름하는 신사 ( 神祠 )가 있었다.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으며, 자주 제사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했는데,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하였다.

1308(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 ( 淑昌院妃 )와 통간하자 백의 ( 白衣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 ( 禮安 )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 (程朱學)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정이(程 蓬 )가 주석한 역경 정전 程傳 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만에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 역학 ( 易學 )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 ( 卜筮 )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다. 또한 시조 2수와 몇 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조선조에 와서 이황 ( 李滉 )의 발의로 1570(선조 3) 예안에 역동서원 ( 易東書院 )이 창건되었으나, 1871(고종 8)에 훼철당했다가 1966년 복원되었다. 또 다른 서원인 구계서원 ( 龜溪書院 )은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우맹선(禹孟善)

1475(성종 6)1551(명종 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단양(丹陽).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로(恭老)이고, 아버지는 현령 종손(從孫)이며, 어머니는 사예 김영벽(金映璧)의 딸이다.

1501(연산군 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등용되었다. 중종초에 온성판관이 되고, 그뒤 군자감판관·초계군수·부령부사를 역임한 뒤 한때 병으로 사임하였다. 다시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으로 복직, 이어 충청도와 전라도의 수군절도사를 역임한 뒤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이어서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곧 평안도순찰사를 거쳐 병조판서로 임용되었으나 참판을 거치지 아니하고 특진되었다는 대간의 상소로 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그 뒤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나, 이때 서북면의 국경지대가 시끄러워지자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그곳의 치안을 회복하고 돌아와 도총관·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를 역임하였다. 뒤에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이 되었다

 

우성전(禹性傳)

1542(중종 37)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 의병장.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 · 연암(淵庵).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郞) 성윤(成允)이고, 아버지는 현령 언겸(彦謙)이며, 대사헌 허엽(許謙)의 사위이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61(명종 16) 진사가 되고, 1564년 성균관 유생들을 이끌고 요승 보우 ( 普雨 )의 주살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1568(선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 · 봉교 ( 奉敎 ), 수찬 ( 修撰 ) 등을 거쳐 1576년 수원현감으로 나가서는 명망이 높았다.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장령 ( 掌令 ) · 사옹원정을 거쳐 1583년에 응교 ( 應敎 )가 되고 뒤에 여러번 사인 ( 舍人 )을 지냈다.

동서분당 때 동인으로 분류되었고, 그 뒤 이발 ( 李潑 )과 틈이 생기자 그는 남산에 살아서 남인, 이발은 북악(北岳)에 살아서 북인으로 분당되었다. 남인의 거두로 앞장을 섰으며, 동서분당 때나 남북의 파쟁에 말려 미움도 사고 화를 당하기도 하였다. 1591년 서인인 정철 ( 鄭澈 )의 사건에 연좌되어 북인에게 배척되고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와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해 군호 ( 軍號 )추의군(秋義軍) ’ 이라 하고 소금과 식량을 조달해 난민을 구제하였다. 또한 강화도에 들어가서 김천일 ( 金千鎰 )과 합세해 전공을 세우고 강화도를 장악해 남북으로 통하게 하였다. 병선을 이끌어 적의 진격로를 차단했으며, 권율 ( 權慄 )이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행주에 이르자 의병을 이끌고 지원하였다.

그 공으로 봉상시정에서 대사성으로 서용되었다. 그 뒤 계속 활약, 용산의 왜적을 쳐서 양곡을 확보해 관군과 의군의 식량을 마련하였다. 그 뒤 퇴각하는 왜군을 경상우도 의령까지 쫓아갔으나 과로로 병을 얻어 경기도 부평에서 사망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계갑록 癸甲錄 · 역설 易說 · 이기설 理氣說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우창적(禹昌績)

1623(인조 1) 1693(숙종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자무(子懋). 준민(俊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빙고별검(氷庫別檢) 지신( 聖 身)이고, 아버지는 진사 숭검(崇儉)이며, 어머니는 판관 윤구(尹球)의 딸이다.

1648(인조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52년 사직서참봉, 광흥도사(廣興都事), 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그 뒤 1660(현종 1)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의성현령을 거쳐, 1662년 황해도도사가 되고, 이어 1664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정언 ( 正言 )이 되고, 지평 ( 持平 )을 역임하였다.

1669년 배천군수에 이어 1672년 장령 ( 掌令 ), 1675(숙종 1) 사간 · 집의 ( 執義 ) ·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고, 1679년 황해도관찰사, 1689년 동지의금부사 ·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그 뒤 1691년 호조참판 · 한서부윤을 거쳐, 이듬해 경기도관찰사 되었으며, 1693년에는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우동선(禹東鮮)

1870(고종 7)1908. 조선 말기의 의병장. 황해도 문화군(文化郡:지금의 황해도 신천군) 출신. 용상(鏞相)의 아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해도 구월산 ( 九月山 )에서 의병을 일으켜 신천·재령·안악·은율 등 관서일대에서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으로 추대되어 일본군을 습격하여 다수의 일본군을 살상하였다.

이 때 그의 휘하에는 소대장 조윤봉(趙允奉)과 경리 이진태(李振台)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사격의 명수로 크게 이름을 떨쳤다. 황제의 선유위원(宣諭委員) 서상륜 ( 徐相崙 )이 가져온 해산을 권고하는 칙서를 보고 황은(皇恩)이 망극하나 역적 이완용 ( 李完用 )과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서명하였으므로 역적에게 항복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계속 항전하였다.

그러나 적과 교전중 다리에 적탄을 맞아 체포, 감금되었는데, 감옥에서 감시병의 총을 빼앗아 일본군 8명을 사살하고 끝까지 교전하다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우덕순(禹德淳)

1880(고종 17)? 독립운동가. 일명 연준(連俊). 서울 출신. 동대문부근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다가 1904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연초행상을 하였다. 여기에서 안중근 ( 安重根 이범윤 ( 李範允 )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하기로 하고, 그곳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 大東公報의 모금인 역할을 하면서 국내외정세에 눈뜨게 되었다.

일본이 한국을 침탈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특히 이토(伊藤博文)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안중근· 조도선 ( 曺道先 )과 더불어 이토의 저격을 모의하였다. 동지 안중근이 거사에 성공하고 잡히자, 그도 조도선·유동하(劉東夏)와 같이 잡혀 3년형을 언도받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우재룡(禹在龍)

1884(고종 21)1955. 독립운동가. 본관은 단양(丹陽). 일명 경옥(景玉김재수(金在洙김재서(金在瑞김상호(金尙浩김한조(金漢朝). 자는 이현(利見), 호는 백산 ( 白山 ). 1903년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참교 ( 參校 )로 근무하였다.

1906년 의병이 되기 위해 탈영, 영천의 정용기(鄭龍基)와 함께 산남의진 ( 山南義陣 )을 일으킨 뒤 연습장(練習將)으로 활약하면서 영일의 입암전투(立巖戰鬪) 등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정용기가 죽은 뒤에는 그를 계승한 그의 아버지 정환직 ( 鄭煥直 ) 진영의 선봉장으로서 영일·경주·청송·영천·대구 근방에서 용맹을 떨쳤다.

1908년 무기조달 관계로 대구에 숨어들었다가 잡혀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1911년에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출옥하였다.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 ( 朴尙鎭 채기중 ( 蔡基中 )과 함께 대한광복회 ( 大韓光復會 )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경상북도·충청남도·전라남도·황해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뻗어나가 1910년대 독립운동을 하는 국내 조직 중 가장 큰 규모로 발전하였다.

이때 국내와 국외의 연락책임을 맡아 국내에서는 광주·목포 등지에서 독립군연락기지건설과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활약하였고, 만주에서는 안동에 상주하면서 대한광복회와 재만독립군기지인 서간도의 부민단 ( 扶民團 ), 신흥학교와의 연락업무를 맡았다. 또한 국내로 보내는 무기 조달과 격문 발송 등의 일을 맡아 보았다.

1917년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송달되어 화제가 되었던 대한광복회 격문은 거의 그의 주선에 의하여 배포된 것이다. 191711월에 처단된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19181월에 처단된 아산의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에 대한 암살 투쟁과 무기 공급 등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1918년 대한광복회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거의 파괴당하자, 남아 있는 한훈 ( 韓焄 권영만(權寧萬)과 함께 대한광복회의 조직 회복에 주력하였다. 1920년 군산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무기징역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 뒤 감형되어 1937년 풀려나왔다.

출옥 후 옥중에서 얻은 병이 깊어 권영만 등의 지원을 받아 살아가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그 뒤 권영만·이관구(李觀求, 일명 海量)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재건하여 독립운동 유적지를 정화하는 사업에 전념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우장춘(禹長春)

18981959. 육종학자. 아버지는 조선 말기의 무신 범선(範善)이며, 어머니는 일본인이다. 그는 일본에서 출생하여 극심한 빈곤과 주위의 학대 속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히로시마(廣島)에서 마치고, 1916년 동경제국대학실과(東京帝國大學實科전문대학)에 들어가 1919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하여 1937년 퇴직할 때까지 18년간 육종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한국인이라는 것과 정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진이 되지 않다가, 퇴임 직전에 기사(技師)로 승진하면서 퇴임하였다. 그는 1950년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사망하던 1959년까지 만 95개월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중앙원예기술원장·원예시험장장을 역임하였다.

연구 업적은 1926종자 ( 種子 )로써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대하여를 비롯하여 모두 19편의 논문이 있는데, 초기에는 나팔꽃이나 피튜니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다가 드디어 겹꽃이 피는 피튜니아 계통을 육성해 냈다.

그는 이어서 유채 ( 油菜 )의 유전과 육종연구에 들어가 1931유채품종의 특성조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하던 중 1935년 십자화과속의 식물에 관한 게놈분석을 시도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하여 연구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논문의 중요성은 현존종(現存種)을 재료로 하여 또 다른 종을 실험적으로 합성해 냈다는 데 있다. 이것을 종의 합성이라고 하며, 세계적으로 이 방면 연구의 새 길을 터놓은 것이다. , 염색체 수 10개의 일본 재래종 유채와 염색체 9개의 양배추를 교배해서 염색체 19개의 고유 유채를 만들어 우리의 주위에 이러한 종간잡종(種間雜種)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 이 연구에서 학리적으로 밝힌 점은 다윈의 진화론에 나오는 종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성립된다.”는 설에 수정과 보충을 가한 것이다. , 종은 기존의 종간 교잡으로 새로운 종을 낳고 이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세포 내 염색체의 배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1945년에 발표된 채소의 육종기술은 그의 오랜 연구와 경험을 체계적으로 확립한 결론이며, 이 논문에서 말한 예언이 현재 성공적으로 대부분 실용화되고 있다.

그는 19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한 뒤 그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를 국내에서 완전히 자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우리 나라 육종학도와 종묘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의 국내 업적으로 큰 것을 들면, 채소 종자의 국내 자급 해결 외에 무균종서(無菌種薯) 생산으로 6·25전쟁 이후의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사망 전에는 수도이기작(水稻二期作)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그가 1959811일 사망하자 정부는 부산시문화상에 이어 두번째의 문화포장을 수여하였고, 전국민의 애도 속에 윤일선 ( 尹日善 )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유해는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麗妓山)에 안장하였다. 매년 810일이면 그가 양성한 제자들과 전국의 원예인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올리고 있다.

 

 

禹英鎭(우영진) 선생의 일화.

 

안동 예천 영주의 3개군의 경계이고 인근 고을에서 영산으로 널리 알려진 鶴駕山(학가산) 서편 보문산의 험준한 산줄기를 타고, 서남쪽으로 약 8km 가면 안동군 풍산명 신양동 [창마을]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李朝(이조) 仁祖(인조) 시대에 禹英鎭(우영진)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청빈을 생활의 신조로 삼는 가난한 선비라 마을 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생활해 오던 중 나이 50에 셋째 아들 英鎭(영진)을 분만하였다.
영진은 태어나자마자 걸어 다녔다고 하며 기골이 장대하고 영리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신동으로 4살 때 벌써 큰 아이 들이 책 읽는 것을 옆에서 듣고 그대로 따라 외웠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일은 7살 때 벌써 동 리 씨름판에서 당할 사람이 없었으니 날 때부터 장사의 기골을 타고 났던 모양이다.

때는 燕山君(연산군)의 폭정, 인조반정, 병자호란 등으로 나라가 매우 어지러울 때라 영진은 장차 훌륭한 壯士(장사)로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남모르게 무술을 수련하였다. 한편 영진의 부모 우홍구 내외는 아들의 비범한 재간을 보고 장차 커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여 집안에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늘 무술 수업을 중지하기를 권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을에서 8km나 되는 학가산을 단숨에 뛰어갔다 와서 아침을 먹었으며 밤이면 마을 앞 느티나무를 몇 번씩 뛰어 넘고 냇가에 가서 그 건너편으로 돌 던지기 연습을 하였다.
지금 영진이 태어난 마을 앞 냇가에 약 200m 거리를 두고 수레바퀴만한 바위 2개가 있으니 이 바위는 禹(우) 장군이 돌 던지기 연습을 하던 바위라 전해지며 이 바위를 우 장군이 공깃돌과 같이 가지고 놀았다하여 우 장군의 공깃돌이라고도 부른다.

영진이 나이 19세 되던 해 힘이나 무술의 재간이 비범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때마침 나라는 인조 임금이 청나라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영진은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없음과, 부모의 자기에 대한 장래의 두려움을 보다 못해, 나라 망함을 탄식한 나머지 원대한 포부를 이루지 못한 채 19세 의 꽃다운 나이로 자결하고 말았다.

그런데 天理(천리)인지 造化(조화)인지 예천군 보문면 작곡동 속칭 읍실 소에서 젊은 장수 우영진을 태우고 천하를 호령하는 용마가 솟아나 우영진이 거주하는 마을을 향해 오던 중 지금 예천군 보문면 속칭 오치마을 앞에 와서 자기 주인인 영진의 자결 비보를 듣고 용마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게 세 번을 울부짖다 그 자리에서 숨졌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우장군과 용마는 하늘이 내리신 것인데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이 용마의 시체를 오치 마을 뒷산에 장사 지내니 지금도 이 무덤 터를 [말무덤]이라 부르고 있다.

 

 

禹倬(우탁) 선생의 일화.

 

1)

미신타파

우탁이 영해사록(寧海司錄)으로 부임하였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이 팔령신(八鈴神)이라는 이상한 귀신을 섬기는 미신에 젖어 폐단이 큰것을 보고, 팔령신의 방울을 부수어서 바다에 빠뜨려 버렸다.
그리고 그러한 미신에 빠지지 말라고 백성들을 잘 깨우쳤다.

 

2)

팔령신

우탁이 그 고을에 서 설치던 팔령신 중에서 일곱을 없애자 나머지 하나는 살려 달라고 빌어서 남겨 두었는데, 그 신이 지금 당고개 서낭이라고 한다.
팔령신 모두를 모조리 죽이려 하였으나  여덟 번째 신은 눈이 멀어서 우탁의 동정을 얻었다고 하고, 눈이 멀었을 뿐만 아니라 신세가 가련한 할미라고 한다. 그래서 우탁이 살려 두었다고 한다.

 

3)

개구리를 버릇 드림

우탁은 ≪ 주역 ≫ 의 이치를 깊이 공부하여 도술을 지녔다고 한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자, 계속 그러면 멸종을 시키겠다고 글로 써서 보내니 개구리들이 동헌에 모여들어 살려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호랑이가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할 때에도 같은 방법을 썼다고 한다.

 

4)

최초로 周易(주역)을 가져온 선생

우탁 선생이 중국에 간 일이 있었다.
여러 가지 책을 살펴보니 周易(주역)이 너무 귀중한 책이므로 우리나라에 갖고 오고자 한 권을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선비들이
「그대 나라와 같은 작은 나라에 감이 주역을 줄 수 없어!」하고 거만하게 거절을 하였다.

우탁 선생은 화가 나서 그만 周易(주역) 全文(전문)을 깡그리 암송하고, 그 내용을 우리나라에 와 다시 써서 주역을 처음으로 들어오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의 號(호)도 「周易(주역)을 東(동) 쪽으로 갖어 왔다.」라는 뜻으로 易東(역동)이라고 했다 한다.

또한 설화로는, 선생이 압록강에서 배를 탔는데, 선생이 앉은 쪽으로 배가 기우러 저서, 사공이 선생이 무슨 무거운 짐을 갖고 가나 의심해서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물건도 없고, 오직 머릿속에 든 주역이 무거워 배가 한 쪽으로 쏠렸다고 한다.

 

 

우탁선생 묘비명

 

 

禹倬(우탁) 元宗 2年 壬戌(1262)~忠惠王 復位 3年 壬午(1342) 81

 

禹倬(우탁)은 단양촌 적성면 품달리에서 출생하여 17세에 진사 합격하고 충령왕 16(1390)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영해시록, 사인, 성균관제주, 집현전직제학을 역임한 후에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易書(역서)를 갖고 와서 모두 해석을 하니 세상 사람들이 易東(역동)선생이라 불렀다.

監察紏正(감찰두정)으로 충성왕이 숙창비를 ()하니, 지부간언 하였고, 만년에 예안현에 퇴거하여 여생을 마쳤는데 선생의 도학, 예학, 절조의 삼대 덕행을 기리어 선생이 살던 곳을 知三里(지삼리)라 하였으며 지금도 그 곳에 유허비가 있다.

선생의 묘소도 중간에 실전된 것을 후손이 찾아 비석을 세우고 鼎山齋(정산재)를 지어 수호하고 있다. 묘소는 예안면 정산리에 있다.

 

고려사절요 충렬왕 3410월 기축조에 충성왕이 숙창원비를 범하자, 다음날 감찰두정 禹倬(우탁)이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 위에 앉아 간하니, 근신들은 감히 상소문을 읽을 수 없었다. 우탁은 큰 소리로 경들이 왕을 경계하지 않는 것은 격에 맞지 아니하며, 이와 같이 나쁜 일을 만나면, 경들은 그것은 간해야 하는데 알고도 가만히 있는 죄를 알아야 한다.“ 하니 좌우가 모두 벌벌 떨고 왕은 부끄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고, 숙비를 멀리 하였다.

우탁은 단산 사람이며 등과 초 영해 사록이 되었는데, 군에 요사스러운 귀신이 있었고 그 사당의 이름을 八鈴(팔령)이라 하는데, 백성들은 미혹되어 섬기고 있었다. 우탁이 와서 즉시 팔령 방울을 부수고 바다에 던져 버리니 음흉한 미신은 드디어 단절되었다.

늙어서 안동 예안으로 물어났으나 충숙왕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재소환 하였으나 응하지 아니했다. 우탁은 經史(경사)에 통달하고, 주역을 깊이 연구해서 卜筮(복서)에도 통달했으며 程子(정자)의 학문을 동방에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우탁은 약 한 달 동안 문을 닫고 易學(역학)을 연구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의 학문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관직은 성균관제주 까지 올랐고 81세에 졸하였다. 라고 공의 행적에 관해 적혀 있다.

 

墓碣銘

前面大字高麗祭酒文僖公禹先生諱倬之墓

夫人永川李氏祔

 

碑 文

我東自父師之敎 號稱文獻而羅麗以還 釋敎滔天 間有名世者 亦不過記誦詞章而已 及麗氏之季 有若祭酒 禹先生者出 得不傳之學於遺經 倡明義理 啓發關鍵 後二百有餘歲 得退陶夫子而先生之道 益著 旣以爲孔孟心學之徒 又爲之建院立祠 名以易東 於是寧之丹山 丹之丹巖 安之龜溪 杖屨所及 莫不立廟而崇報焉 惟其冠屨之藏 世遠失傳 先王 丙午 安東府北 鼎井里人 卜葬於村後古墓下 得埋碣 上下剝落而猶有先生姓諱及墓字 其人秘之旣數年而事遂發 訟于官 按驗得實 於是 敬修奉塋 禋享如儀 旣而後孫 龜協等 治石而致之墓 責銘於㙖 顧晩生末學 何敢當是役 蓋三辭而不獲命 謹按麗史而序之 曰先生 諱倬 字天章 丹陽人 父鄕貢進士 天珪 先生 以高麗 元宗壬戌 生 忠烈王 庚寅 登文科 初調寧海 司錄 郡有淫祠 名八鈴 惑民甚瀆 先生 至卽碎而沈之海 妖遂絶 忠宣王 初嗣位 有大失德先生 以監察糾正 白衣持斧上書 諫 近臣 展疏不敢讀 先生勵聲 曰卿 爲近臣 未能格非匡救 逢惡至此邪 左右震懾 王有慚色 後 退老于禮安縣 忠肅王 嘉其忠義 再召不起 先生 通經史 尤深於易 程傳 初來 無能知者 先生 閉門參究 得其旨 以敎授生徒 義理之學 始行 官至成均祭酒 進賢館 直提學致仕 忠惠王 後三年壬午卒 壽八十一 諡文僖 墓子坐 夫人永川李氏祔 二子元光元明 俱登文科 孫曾以下不盡錄 嗚呼 今距先生 四百六十有七年 事行本末 無從以得其詳 然良史 表章於前 大賢闡明於後 斯可以詔於無窮而堂斧之得之久遠又豈非天也耶 銘曰

天啓吾東 先生以生 有覺先生 昏衢日星 妖絶海邦 直震王庭 卷懷丘園 閉門學程 羲文妙諦 孔孟心學 發揮性理 中行獨復 進跲退貞 業廣功崇 寔闡洪荒 百世興風 熙我文猷 惠我光明 我受陶翁 不可改評 鼎井之阡 君子攸藏 旣晦復顯 愈久愈光 銘以昭之 山高水長

 

묘갈명 병서 - 이우

우리 동방은 부사 기자의 가르침으로부터 이름하여 문헌의 나라라고 칭하였는데 신라, 고려 이래로 석씨의 교가 도도히 성행하였으며 간혹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가 있었으나 그 또한 기억하고 외우는 것과 시가와 문장에 그쳤을 뿐이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좨주 우 선생 같은 분이 태어나시어 전하지 못하였던 학문을 남은 경서에서 얻어 의리를 제시 주창하여 밝히고 긴요한 비결을 얻어 깨우쳤으며 이백 여년 뒤에 퇴도 선생을 얻어 선생의 도가 더욱 밝게 나타났다.

이미 공맹심학의 무리로 추존하고 또 선생을 위하여 서원과 묘우를 세워 역동서원이라 이름하니 이에 영해의 단산, 단양의 단암, 안동의 구계 등 선생의 자취가 미친 곳은 사당을 세워 존경하고 승배하며 제사하지 아니함은 없었다.

오직 관과 신을 모신 묘지만은 세대가 멀어 전함을 잃었다가 선왕 병오(1786)년에 안동부 북쪽 정정리 사람이 마을 뒤 고묘 아래에 장사하고 묻혔던 묘갈을 얻으니 상하는 떨어졌으나 선생의 성휘와 묘자가 각자되어 있는 것을 그 사람이 감추었다가 몇 해가 지난 뒤에 일이 발각되어 관가에 호소하여 증거를 살펴 실지의 묘소를 찾게 되니 이에 공경하여 봉분을 보수하고 의례를 갖추어 제향하였다.

얼마 뒤에 후손 구협 등이 비를 다듬어 묘에 세울 때 우에게 비명을 맡기니 생각건대 뒤늦게 나서 배운 몸으로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하리요하며 재삼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삼가 고려사기를 살펴 서하오니 선생의 휘는 탁이요, 자는 천장이니 단양인이며 부는 향공진사인 천규이다.

선생이 고려 원종 임술(1262)년 에 나서 충렬왕 경인(12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영해고을 사록이 되었다. 본래 영해군에는 팔영이란 이름을 가진 무당의 신사가 있어 백성을 어지럽게 홀려 풍속을 더럽히는 것이 심하거늘 선생이 으르러서 부수어 바다에 던지니 드디어 요망한 것이 없어졌다.

충선왕이 처음 왕위를 이어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선생이 감찰규정의 직책으로 흰 옷에 도끼를 가지고 소를 올려 간하니 근신들이 소를 펴들고도 감히 읽지 못하는 지라 선생이 크게 꾸짖어 가로되 경들은 근신이 되어서 임금의 잘못을 고쳐 바르게 구하지 못하고 악에 뜻을 맞추어 여기에 이르도록 하였느냐고 하니 좌우가 모두 떨고 임금도 무참한 빛이 있었다. 그 뒤 예안 땅에 물러와 노경을 보낼 때 충숙왕이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경서와 사기에 능통하고 더욱 역학에 조예가 깊었다. 정자가 지은 주역의 전문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니 능히 아는 자가 없었는지라 선생이 문을 닫고 연구하여 그 중요한 취지를 알아 생도들을 가르치니 의리의 학문이 비로서 동방에 행하여졌다. 벼슬이 성균좨주, 진현관직제학에 이르러 치사하고 충혜왕 후3년 임오(1342)년에 졸하니 향년 81세였고 시호를 문희공이라 하였으며 묘는 자좌로 부인 영천이씨와 합장하였다. 슬하에 2자가 있어 원광과 원명이니 모두 문과에 올랐으며 손자, 증손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 지금 선생과의 서로의 거리가 467년이라 일의 자취와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을 자세히는 알 길이 없으나 그러나 올바른 사기가 앞에서 표현되었으며 대현이 뒤에서 드러내 밝혔으니 이것이 가히 무궁한 가르침과 이끌어줌이 될 것이며 묘소를 오랜만에 찾았음이 또한 하늘의 조화가 아니겠는가. ()에 가로되

 

하늘이 우리 동방 열어주어

선생이 나셨도다.

깨달음이 있는 선생

어두운 거리의 해와 같고 별같았네.

해방에 요술이 없어지고

왕정에 곧음이 진동했네.

덕을 품고 구원에 묻혀 살면서

문을 닫고 정전을 배웠으니.

복희와 문왕의 오묘한 요결이요

공자와 맹자의 심성의 학문이라.

성리학을 발휘하고

중용을 행하여 홀로 회복했네.

나아가면 엎어지고 물러와서 바로 되어

업은 넓고 공은 높았도다.

너른 것을 천명하여

백세에 풍교 일으키니

우리 문헌 빛났으며

우리 광명 주셨도다.

내 도옹에게 받았으니

고쳐 말을 못하리라.

정정의 언덕은

군자의 유택이며.

지난날 숨겼다가 다시 새로 밝혔으니

더욱 오래도록 더욱더 빛나리라.

글을 새겨 밝히오니

산처럼 높으고 강처럼 깊으도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위 가계도가 잘못되었다고 단양우씨 가문에서 지적이 있어 바른 가계도를 부탁드렸더니

다음과 같이 회신이 와서 여기 함께 올립니다.

 

 

단양우씨 각파현황

1

 

 

 

 

 

 

 

 

 

2

 

 

 

 

 

 

 

 

 

3

인가

 

 

 

 

 

 

 

 

 

4

잉순

 

 

 

 

 

 

 

 

 

5

경절

 

 

 

 

 

 

 

 

 

6

중대

 

 

 

 

 

 

 

 

 

7

천규

8

文僖公派(문희공파)

천계

 

 

 

 

 

 

 

 

 

천석

8

9

길생

10

현보

11

홍수

大提學公派(대제학공파)

홍부

禮安君派(예안군파)

홍강

安靖公派(안정공파)

홍득

執義公派(집의공파)

홍명

判書公派(판서공파)

국진

文康公派(문강공파)

9

수생

 

 

 

 

 

덕생

 

 

 

 

 

복생

10

인열

靖平工派(정평공파)

 

숭열

 

 

 

 

희열

文肅公派(문숙공파)

소생

 

 

 

 

 

록생

 

 

 

 

 

천우

 

 

 

 

 

 

 

 

 

천성

 

 

 

 

 

 

 

 

 

 

 단양우씨카페에서도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하니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6

()

33

()

40

()

27

()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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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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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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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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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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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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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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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46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단양 우씨(丹陽禹氏)는 남한에 총 36,704 가구, 152,298명이 살고 있는 것

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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