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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원씨(元)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원주원씨)

 

 

본관(本貫): 원주(原州)

시조(始祖): 원경(元鏡)

유래(由來):

 

 

원씨(元氏)는 중국 하남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나라 양왕(襄王 : 18대 왕, 재위기간 : 기원전 651619) 때 위대부(衛大夫)에 봉해진 원훰()의 후예(後裔)로 전한다.

우리나라 원씨(元氏)의 시조(始祖)643(고구려 보장왕 2) ()나라 태종(太宗 : 2대 왕 재위기간 : 627649)이 고구려에 문화사절로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인 원경(元鏡)이다.

원주(原州)를 단본(單本)으로 하는 원씨(元氏)는 동원(同源)이면서도 계보(系譜)를 달리하는 운곡공계(耘谷公系 : 원경을 시조로 함원성백계(原城伯系 : 원성백 원극유를 시조로 함시중공계(侍中公系 : 시중 원익겸을 시조로 함) 등 크게 세 계통으로 갈라져서 계대(繼代)하고 있으며,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원충갑(元沖甲)을 시조로 하는 충숙공계(忠肅公系)가 있었으나 최근에 그가 원성백계(原城伯系) 극유(克猷)11세손임이 밝혀져 합보(合譜)가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원천석(元天錫)

1330(충숙왕 17) ? 고려 말 조선 초의 은사(隱士).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두문동 ( 杜門洞 ) 72현의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정용별장(精勇別將) ()이며, 아버지는 종부시령(宗簿寺令) 윤적(允迪)이다.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어릴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있고 학문이 해박해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방원(芳遠 : 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그가 즉위하자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 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준 후 돌아가 아들 형()을 기천(基川 : 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 ( 太宗臺 )라 했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 ( 覺林寺 ) 곁에 있다. 그가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그가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 왕조를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 ” 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온다.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 耘谷詩史 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그 문집에 실린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있다.

대표적인 시의 제목을 보면, 우리 나라 2()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 ( 崔瑩 )을 기린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 前摠宰六道都統使崔瑩 과 우왕 · 창왕을 중 신돈 ( 辛旽 )의 자손이라 해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해 읊은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 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 이 있다.

여기서 그는 만일 왕씨의 혈통으로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느냐고 힐문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 ” 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원보륜(元甫崙)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수옹(壽翁). 고려 절신 천석(天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이며, 아버지는 정언 자돈(自敦)이다. 진사시를 거쳐 1462(세조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에 제수되었다.

14647월 세조가 여러 학문의 진흥을 위하여 연소하고 총민한 문신 6인씩을 천문문(天文門율려문(律呂門의학문(醫學門음양문(陰陽門사학문(史學門시학문(詩學門)에 각각 배속시켜 전념하게 한 조처로 율려문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1486(성종 17) 3월 통훈대부 행사헌부지평(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 이어 홍문관교리를 역임하고 퇴직하였다.

 

원황

6세손 황( )은 선조(宣祖) 때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올랐다.

 

원진해(元振海)

황의 아들 진해(振海)는 횡성 현감(橫城縣監)을 지내고 글씨에 뛰어나 필명(筆名)을 떨쳤다.

 

원극유(元克猷)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으로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다.

 

원부(元傅)

?1287(충렬왕 1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삼한공신 ( 三韓功臣 ) 극유(克猷)9대손이며, 아버지는 진()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사관 ( 直史館 )에 보직되고, 1269(원종 10) 추밀원부사가 되어 이듬해 세자 심()이 원나라에 갈 때 동행하였다.

1273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 ( 中書侍郎平章事 )가 되었다. 충렬왕 초에 찬성사·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 등을 지내고, 1277(충렬왕 3) 수국사 ( 修國史 )가 되어 유경 ( 柳璥 김구 ( 金坵 ) 등과 함께 고종실록찬수의 명을 받았다.

전추밀부사(前樞密副使) 임목(任睦)이 사고(史藁)를 보니 공지(空紙)이므로 수찬관 ( 修撰官 ) 주열(朱悅)이 탄핵하려 하자, 그는 유경과 의논하여 저지하고 발설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고가 백지인 것은 그가 직사관으로 있으면서 사고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78년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행차하는 데 따라갔고, 1284년 감수국사 ( 監修國史 )로서 고금록 古今錄편찬에 참여하고, 첨의중찬 ( 僉議中贊 )으로 죽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원송수(元松壽)

1324(충숙왕 11)1366(공민왕 15).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충렬왕 때 중찬 ( 中贊 )을 지낸 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밀직사사 경()이고, 아버지는 첨의평리(僉議評理) 선지(善之)이다. 찬성사 권렴 ( 權廉 )의 딸과 혼인해 서()와 상() 두 아들을 두었다.

1339(충숙왕 복위 8) 국자감시 ( 國子監試 )에 합격하고 곧 문과에 급제해 춘추관수찬이 되었다. 1344(충목왕 즉위년)에는 안진 ( 安震 )과 이제현 ( 李齊賢 )의 천거로 서연 ( 書筵 )에 참여했으며, 얼마 뒤에 헌납 ( 獻納 )이 되었다.

이 때 찬성사 정천기 ( 鄭天起 )가 헌납 곽충수 ( 郭忠秀 )와 함께 고신(告身 : 직첩)을 받지 않은 채 곧바로 정방 ( 政房 )에 들어가 일을 보고 있다며 탄핵했다가 파직당하였다.

1351(충정왕 3)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로 나갔으며, 다음해에 공민왕에게 발탁되어 내서사인 겸 좌부대언(內書舍人兼左副代言)에 올랐다. 이후 왕의 신임을 받아 지주사 ( 知奏事 )로 옮기고 전주(銓注)에 참여했는데, 사사로운 정에 흐르지 않고 공정을 기하였다.

1363(공민왕 12) 홍건적의 난이 평정된 뒤 왕의 파천(播遷)을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이 해에 이강 ( 李岡 )을 천거해 기무(機務)를 관장하는 직임을 대신하게 한 뒤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오르고 충근찬화공신(忠勤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일찍이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정동행성 ( 征東行省 )의 도진무 ( 都鎭撫 )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365년 정당문학 ( 政堂文學 )에 올랐으나 곧 신돈 ( 辛旽 )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고, 다음해에 신돈이 더욱 권세를 부리자, 이에 근심하고 분해하다 병으로 죽었다. 왕명으로 장례를 지내고 가등(加等)되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원상(元庠)

생몰년 미상. 고려 말 ·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를 지낸 선지(善之)의 손자이며, 정당문학 ( 政堂文學 )을 지낸 송수(松壽)의 아들이다.

처음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내다가, 1389(창왕 1) 김저 ( 金佇 )의 옥사에 연루되어 다음해 광주(光州)로 유배되었다.

391(공양왕 3) 국대비의 생일을 맞아 하륜 ( 河崙 ) · 우인열 ( 禹仁烈 ) 등과 함께 특사로 풀려 나온 뒤 장단의 대덕산 ( 大德山 )에 은거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 태조가 그의 덕망을 아껴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1413(태종 13) 정월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검교한성부사(檢校漢城府事)를 거쳐 1435(세종 17) 판중추원사가 된 뒤, 이듬해 한창수(韓昌壽) · 오승 ( 吳陞 )과 함께 궤장( 廓 杖)이 하사되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원창명(元昌命)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증조는 첨의평리(僉議評理) 선지(善之)이고, 할아버지는 정당문학 ( 政堂文學 ) 송수(松壽)이며, 아버지는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다.

벼슬은 예조참의·인수부윤(仁壽府尹중추원부사 등을 거쳐 1439(세종 21)에는 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성품이 준엄하고 강직하였으니, 세종조에 불교를 존숭하고 내전에서 불우(佛宇)에 기도하는 것을 다른 중신들은 직간하지 못하였으나, 그는 홀로 이를 배척하였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원호(元昊)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재(觀瀾齋무항(霧巷).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원주 출신. 광붕(廣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량(仲良)이고, 아버지는 별장 헌()이며, 어머니는 원천상(元天常)의 딸이다.

1423(세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 여러 청관·현직(淸官顯職)을 차례로 지내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다. 1453(단종 1) 수양대군이 황보 인(皇甫仁김종서 ( 金宗瑞 )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병을 핑계로 향리 원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457(세조 3)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집을 지어 이름을 관란재(觀瀾齋)라 하고 강가에 나가서 시가를 읊기도 하고 혹은 집에서 글을 짓기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멀리서 영월 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사모하였다.

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입었고, 삼년상을 마친 뒤 고향인 원주에 돌아와 문 밖을 나가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앉을 때 반드시 동쪽을 향해 앉고, 누울 때는 반드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는데, 단종의 장릉 ( 莊陵 )이 자기 집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조카인 판서 효연(孝然)이 수행하는 종들을 물리치고 문 밖에 와서 보기를 청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에 임명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한평생 단종을 그리다가 죽었다.

손자인 숙강(叔康)이 사관이 되어 직필로 화를 당하자, 자기의 저술과 소장(疏章)을 모두 꺼내어 불태운 후 아들들에게 다시는 글을 읽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경력과 행적도 전하는 것이 없다.

1699(숙종 25) 판부사(判府事) 최석정 ( 崔錫鼎 )의 건의로 고향에 정려가 세워지고, 1703년 원천석 ( 元天錫 )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1782(정조 6) 김시습 ( 金時習 남효온 ( 南孝溫 성담수 成聃壽)와 함께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함안의 서산서원 ( 西山書院 ), 원주의 칠봉서원 ( 七峰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원호(元豪)

1533(중종 28) 1592(선조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중영(仲英).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송수(松壽)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생원 순()의 딸이다. 김덕수(金德秀)에게 글을 배워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촉망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의 증조부 김이진(金 蓬 眞)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을 버리고 무()를 택해서 1567(명종 22)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에 이어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경원부사로 있을 때에는 이탕개(尼湯介)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587(선조 20)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재직중 전라좌도에 침입한 왜구를 막지 못하여 인책, 유배되었다. 얼마 뒤에 풀려나와 몇몇 관직을 역임하고 고향에 은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조방장(江原道助防將)으로서 패잔병과 의병을 규합, 여주의 신륵사에서 적병을 크게 무찔렀으며, 패주하는 적병을 구미포(龜尾浦)에서 섬멸하였다.

그 공으로 경기 · 강원방어사 겸 여주목사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 강원감사 유영길 ( 柳永吉 )의 격문을 보고, 병을 이끌고 가다가 김화에 이르러 적의 복병을 맞아 분전하다가 전사하였다. 병조판서 ·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김화의 충장사 ( 忠壯祠 ) · 충렬사 ( 忠烈祠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원유남(元裕男)

1561(명종 16)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관보(寬甫).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송수(松壽)이고, 아버지는 수군절도사 호()이며, 어머니는 상주김씨(尙州金氏)로 승훈랑 ( 承訓郎 ) 광후(光厚)의 딸이다.

1583(선조 16) 무과에, 1586년 무과중시에 각각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 ( 權慄 )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1596년 강원·충청·강로(江路) 등의 조방장(助防將)을 지냈다. 이듬해 정유왜란이 일어나자, 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의 장령(將領)으로 활약하였다.

1605년 창성부사(昌城府使)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고,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 ( 靖社功臣 ) 3등에 녹훈되고 원계군(原溪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을 받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재상 윤방 ( 尹昉 )과 더불어 서울을 지켰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원두표(元斗杓)

1593(선조 26) 1664(현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灘 馬 ) · 탄옹(灘翁). 첨지중추부사 송수(松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수군절도사 호()이며,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유남(裕男)이다. 박지계 ( 朴知誡 )의 문인이다.

광해군의 정치가 점점 문란하여지자 의사(義士)들과 인조반정 모의에 협찬하였고, 반정이 성공한 뒤에는 그 공으로 정사공신 ( 靖社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624(인조 2) 이괄 ( 李适 )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전주부윤이 되고, 나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어영부사로서 남한산성을 지키고, 1642년 형조판서로 승진되었으며, 뒤이어 강화부유수 ·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 동안에 있어서 그는 서인 중 공서(功西)에 속하여 청서(淸西)를 탄압하다가 같은 파에 속한 김자점 ( 金自點 )과의 정권다툼으로 분당하여 원당(原黨)의 영수가 되었다.

1649(효종 즉위년) 호조판서로서 한때 파직당하였고, 1651년에는 좌참찬 · 좌찬성을 지냈으며, 1654년 병조판서가 되어 김육 ( 金堉 )이 적극 추진하려는 대동법 ( 大同法 )의 실시를 반대하는 동시에, 역시 김육에 의하여 추진된 동전유통보급방법(銅錢流通普及方法)을 논의하는 데 참여하였다.

1656년 우의정을 거쳐 1662년에는 좌의정에 올라 내의원과 군기시의 도제조 ( 都提調 )를 겸직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원경하(元景夏)

1698(숙종 24) 1761(영조 3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화백(華伯), 호는 창하(蒼霞) · 비와(肥窩). 동부승지 만리(萬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몽익(夢翼)이고, 아버지는 명구(命龜)이며, 어머니는 형조좌랑 이세필(李世弼)의 딸이다.

1721(경종 1)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736(영조 12)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로 정시 문과에 장원하였다. 1739년에 영조의 뜻을 받들어 완소(緩少) 계열과 함께 정언 ( 正言 )으로 붕당이 나라를 그르치는 화근임과 탕평책을 진언하였다.

아울러 신임사화로 화를 입게 된 조태억 ( 趙泰億 ) · 조태구 ( 趙泰耉 ) 등을 신설(伸雪 : 억울하게 지은 죄를 풀어줌)하는 데에 앞장섰다.

1743년 예문관제학 · 봉상시제조를 거쳐 이 해 7월에 청나라 고종의 북순(北巡)으로 유언비어가 많이 생기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당상(備局堂上)들을 불러 자강책을 강론하게 할 때 폐사군(廢四郡)의 복설(復設)을 진언하였다.

이듬해에 이조참판으로서 판서 이기진 ( 李箕鎭 )과의 마찰로 이기진은 홍주목사로, 자신은 청풍부사로 전보되었다가 곧 중앙으로 복귀하였다.

1745년에 부제학으로 "호남의 크나큰 폐막(弊 壟 )은 전정(田政)만한 것이 없는데, 전정의 문란은 오로지 은결 ( 隱結 )이 토호 ( 土豪 )들에게 넘어가 이민(吏民)이 백지징세 ( 白地徵稅 )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에 호남 사정에 밝다고 해 호남진전개량사(湖南陳田改量使)가 되었다.

그가 임정 ( 任珽 ) · 정우량 ( 鄭羽良 ) · 오광운 ( 吳光運 ) · 윤유 ( 尹游 ) 등과 함께 조정에서 노론 · 소론만의 탕평인 소탕평(小蕩平)을 반대하고, 동서 · 남북을 다 포함한 대탕평(大蕩平)을 창도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옛 동료로 사감이 있던 이천보 ( 李天輔 )와 절교를 선언하니 이로부터 두 사람은 원수 같은 사이가 되었다.

세상에서는 이로 인해 원붕(元朋) · 이붕(李朋)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노론들은 원경하가 탕평으로 자임하지만, 송인명 ( 宋寅明 ) · 조현명 ( 趙顯命 ) 등에게 아부해 경반(卿班 : 경의 반열)에까지 올랐고, 남모르게 남인과 소북들과 결탁해 자기 세력을 도왔다고 하였다.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탕평 노력과 당인들을 고루 대하는 인품을 칭송하였다. 특히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고 그의 탕평책에 많은 귀를 기울였다. 판돈녕부사로 치사해 봉조하가 되었다.

그가 죽자 왕이 친히 제문을 지었으며, 해당 부서에 명을 내려 치제(致祭 :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내리어 죽은 신하를 제사하는 일)하게 하고 관재(棺材)를 관에서 지급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는 창하집 蒼霞集 10권이 있다.

 

원인손(元仁孫)

1721(경종 1)1774(영조 5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靜). 몽익(夢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사 명구(命龜)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경하(景夏)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신사철 ( 申思喆 )의 딸이다.

1750(영조 2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752(영조 28)에 세자익위사 ( 世子翊衛司 )의 세마 ( 洗馬 )가 되었다가 175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정언 ( 正言 사서 ( 司書 ) 등을 역임하였다.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 재임시 천의소감 闡義昭鑑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이조참판·이조판서 등을 거쳐 1772년에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아버지의 대탕평(大蕩平)의 뜻을 받아 편당에 기울어지지 않아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성격이 공평하고 정직하여 전주(銓注)나 고시(考試)를 공정하게 하였으며, 세자찬선(世子贊善) 송명흠(宋明欽)이 억울하게 관직이 추삭됨을 보고 임금에게 직간하여 그를 복구시켰다.

사장 ( 詞章 )에 능하여 1765년 이조참판으로 재직시 서명응 ( 徐命膺 )과 함께 어제독서록 御製讀書錄연대고 年代考를 왕명으로 교정하였으며, 1769(영조 45) 역시 왕명으로 울릉도의 지세와 물산을 그리고 조사하여 바쳤다.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원계손(元繼孫)

계손(繼孫)은 시(()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져 학문(學問)과 충절(忠節)을 지켜온 원주 원()씨의 전통을 지켰다.

 

 

元斗杓(원두표)  선생의 일화.

묏자리 잡기

원두표 형제가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지관은 세도 있고 돈 있는 사람만 좋은 묏자리를 보아주고 권력 없고 가난한 사람은 보아주지를 않자 지관을 데려오기 위해 꾀를 낸 이야기가 있다.

원두표의 동생이 지관을 데리고 오다가
「지관노릇을 하려면 빈부귀천을 가리지 말고 보아주어야지 부자만 보아주니 혼나봐라.」 하고 나무에 매달아 놓고 그냥 가버렸다.

무인지경에서 나무에 묶인채 어찌 할바를 모르는 지관에게, 조금 뒤 형 두표가 우연히 그 곳을 지나가다가 만난 척하고 지관을 나무에서 풀어 구해주고 좋은 묏자리를 얻었는데, 그 명당 덕분으로 원두표가 정승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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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운운곡계 경파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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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백계 극유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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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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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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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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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공계 익겸계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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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남한에 총 24,538 가구, 102,7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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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원1.jpg 원주원씨(元) 청남 14-08-29 4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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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단양 우.jpg 단양우씨(禹) [1] 청남 14-08-29 7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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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개성 왕.jpg 개성왕씨(王) 청남 14-08-29 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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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흥양 오.jpg 흥양오씨(吳) 청남 14-08-29 3593
410 화순 오.jpg 화순오씨(吳) 청남 14-08-29 3037
409 해주 오.jpg 해주오씨(吳) 청남 14-08-29 5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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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 함양 오.jpg 함양오씨(吳) 청남 14-08-29 4293
406 평해 오.jpg 평해오씨(吳) 청남 14-08-29 3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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