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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곡산연씨(延)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곡산연씨)

 

 

본관(本貫): 곡산(谷山)

시조(始祖): 연계령(延繼笭)

유래(由來):

 

곡산 연씨(谷山延氏)는 본래 중국(中國) 남양(南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고려(高麗) 때 홍농(弘農) 출신인 연계령(延繼笭)7세손 연수창(延壽菖)이 제국대장 공주(齊國大長公主 : 고려 충렬왕비)를 배종(陪從)하고 고려에 들어와 곡산(谷山)에 정착(定着)하게 된 것이 우리나라 연씨(延氏)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계령(繼笭)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곡산(谷山)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는 연씨(延氏)의 본관(本貫)이 곡산(谷山)외에도개성(開城광주(廣州남양(南洋서원(西原 : 청주 별호충주(忠州) 36본이 전하나 이는 모두 곡산 연씨(谷山延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며 현재의 연씨(延氏)는 곡산(谷山) 단일본으로 전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연주(延柱)

11세손 연주()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라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곡성군(谷城君)에 봉해졌다.

 

연사종(延嗣宗)

1360(공민왕 9)1434(세종 16).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불비(不非). 금오위 ( 金吾衛 ) 상장군 단서(丹瑞)의 후손으로, 곡산 연씨의 실질적인 시조이다.

1388(우왕 14) 요동 정벌 때 우군도통수 이성계 ( 李成桂 )의 군진무(軍鎭撫)로 종군한 공으로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으며, 1393(태조 2) 회군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401(태종 1) 2차 왕자의 난 때 정안군파(定安君派)에 가담했고, 정안군이 세제로 책봉되고 등극하는 과정에서 공로가 많은 사람을 포상할 때 좌명공신 ( 佐命功臣 ) 4등에 책록되었다.

이 해에 태종은 갑사(甲士 : 中央侍衛軍)와 의용자(毅勇者) 300인을 차출해 친위대를 구성, 내갑사 ( 內甲士 )라 했는데, 그는 이숙번 ( 李叔蕃 조연 ( 趙涓 한규(韓圭) 등과 더불어 내갑사의 통수권자가 되었다.

1402년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임명되고, 1407년 판한성부사 겸 우군총제가 되었으며, 뒤에 상장군·호조전서 등을 역임하였다. 1410년 동북면병마도절제사로 야인의 침입을 방어했으며, 이 해에 길주도도안무찰리사가 되어 경원부(慶源府)와 경성(鏡城)을 수복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간룡성(干龍城) 싸움에서 패퇴해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함주(咸州)로 유배당하였다. 그러나 공신에 대한 예우로서 고신(告身 : 관원의 임명사령장)은 빼앗기지 않고 추방만 당하는 특혜를 누렸다.

1411년 각 위()에 절제사를 설치하는 군제 개혁이 있을 때 의흥시위사절제사에 보임되었다. 이 해 12월 아버지의 상으로 퇴임했고, 이듬해 기복해 동북면도순문사가 되었다. 이 때 함주군 일대에 있는 4조왕(四祖王 : 穆祖·翼祖·度祖·桓祖)과 비() 능의 경내 영역을 확정하고 정비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1413년 영흥부윤(永興府尹)을 겸직했으며, 위의 공로로 곡산군(谷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노모의 구환을 위해 사직을 요청했으나 허가받지 못하다가 왕으로부터 시연(侍宴)을 받고 휴가를 얻었다. 이와 같은 효행으로 말미암아 정려를 받았다. 모친상을 치르고, 1416년 등용되어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고, 이어 의정부참찬·중군총제(中軍摠制)를 역임하였다.

1418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오면서 의서(醫書)와 약재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1419(세종 1) 훈신에 대한 예우로서 판중군도총제부사에 오르고, 1422년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훈봉되었고, 이어 수릉관(守陵官)이 되었다. 14263월 김도련회뢰사건(金道練賄賂事件)에 연루되어 인제에 유배되었다가 공신의 은전을 입고 풀려나 직첩을 돌려받고 곡산부원군에 다시 봉해졌다. 그가 죽자 3일간 조례를 정지하고 예장(禮葬)하였다. 시호는 정후(靖厚)이다.

 

연경(延鏡)

수창(壽昌)의 아들 연경()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과 태사(太師)를 역임한 명신(名臣)이었으며, 당대의 문장가(文章家)로 이름을 날렸다.

 

연최적(延最績)

1663(현종 4)1693(숙종 1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무경(茂卿), 호는 치당(痴堂). 청주 출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택로(宅老)이다. 송시열 ( 宋時烈 )의 문인이다.

1682(숙종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배속되었다. 그 뒤 감찰에 올랐으나 시사(時事)의 급변으로 사직하고, 권상하 ( 權尙夏 )를 따라 학문을 닦았다. 그뒤 다시 기용되었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파직되었다.

1693년 숙종이 구언교(求言敎:국정에 대하여 신하나 士林들의 직언을 구하는 교시)를 내리자 이에 인현왕후 ( 仁顯王后 ) 폐위의 부당성과 당시 화를 입은 자들의 용서를 상소하여, 심한 국문을 당한 끝에 옥사하였다.

다음해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충신문이 세워지고 그뒤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연기우(延基羽)

?1914. 조선 말기의 의병장. 일명 봉렬(奉烈기호(基浩). 경기도 삭녕 출신.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강화진위대부교(江華鎭衛隊副校)로 있다가 19078월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덕물포(德物浦)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진위대 부교인 지홍윤(池弘允)이 갑곶(甲串)에서 일본군 1개중대를 깨뜨리고 합류하여 덕물포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나, 증원한 일본군의 강화부 공격으로 패하였다.

다시 의병 60여명을 소모(召募)한 뒤 동한창의대장(東韓倡義大將)이 되어 연천·적성·삭녕· 마전 ( 麻田 ) 등지에 출몰하며 양주·포천 방면의 강기동 ( 姜基東 ) 의병부대와 연결하여 여러 곳에서 일본군수비대와 경찰을 공격하였다.

1908년말 원수부13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인 이인영 ( 李麟榮 )의 휘하에 들어가 서울 공략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양주에서 패한 뒤 창의한북대장(倡義韓北大將)이 되어 다시 의병을 이끌고 고양·연천·마전·삭녕·강화·교동 방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2월에 삭녕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자 9명과 피금자 43명을 내고 많은 병기를 빼앗기는 패전을 당하였다. 그뒤 나머지 부하 수십명을 거느리고 안협 ( 安峽 )으로 들어가 철원·평강·이천 등지를 전전하다가 5월에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가 탈출하였다.

그뒤에도 활동을 계속하다가 국권상실 후 일본군에게 잡혀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연병호(延秉昊)

1892(고종 29)? 독립운동가. 일명 병호(炳昊). 충청북도 괴산 출신.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당하자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난징·상해 등지로 전전하며 활동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기로 하고 동지 송세호(宋世浩)와 함께 입국하여 이병철(李秉澈조용주(趙鏞周) 등을 포섭, 비밀항일운동단체인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설립목적은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여 임시정부에 제공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여 정부에 송금하는 것을 주요골자로 하였다. 이 목적을 위하여 여성들의 비밀결사인 대한애국부인회 ( 大韓愛國婦人會 )와 긴밀한 협조를 취하며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1920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언도되었다.

1922년 출옥하자 상해로 건너가 안창호 ( 安昌浩 여운형 ( 呂運亨 ) 등과 같이 시사책진회 ( 時事策進會 )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그 뒤 임시의정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표 출전<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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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곡산 연씨(谷山延氏)는 남한(南韓)에 총 6,300가구, 27,05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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