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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파주염씨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파주염씨)

 

 

본관(本貫): 파주(坡州)

시조(始祖): 염형명(廉邢明)

유래(由來):

 

파주 염씨(坡州廉氏)는 중국(中國) 교목세가(喬木世家)의 후손(後孫) 염형명(廉邢明)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며, 그는 후당(後唐)의 국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신라(新羅)에 들어와 봉성(峰城)에 자리 잡은 뒤 대사도(大司徒)를 지내면서 뿌리를 내렸다.

염씨(廉氏)의 본관(本貫)은 파주(坡州)를 포함하여 광주(廣州개성(開城순창(淳昌담양(潭陽) 83()까지朝鮮氏族統譜)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모두가 파주 염씨(坡州廉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염한(廉漢)

고려(高麗)때 와서 후손 염한()이 문종(文宗)때 무신(武臣)으로 동해(東海)에 침입해 온 해구(海寇)를 격퇴하였고, 북변(北邊)을 침범한 동번족(東蕃族)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병부 상서(兵部尙書상주국을 역임하였다.

 

염신약(廉信若)

1118(예종 13) 1192(명종 22).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서원(瑞原 : 지금의 경기도 파주).자는 공가(公可). 아버지는 우습유 ( 右拾遺 ) ()이다.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장서기(廣州掌書記)가 되었는데, 정직하고 공무에 충실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여막 ( 廬幕 )에 살아 마을에 효자정문이 세워졌으며, 첨사부녹사(僉事府錄事)가 되었다. 1170년에 명종이 즉위하자 잠저 때 입힌 은혜로 국자좨주 한림시강학사(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며, 뒤이어 판대부사(判大府事)가 되었다.

1177년에 동지공거 ( 同知貢擧 )가 되어 진사 35인과 명경(明經) 4인을 뽑았다. 그해 그의 종이 정중부 ( 鄭仲夫 )의 종과 다투다가 정중부에게 잡혀 죽고 그는 파면되었다.

1178년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앞서 조위총(趙位寵)이 허위사실을 풀어 금나라에 지원을 요청한 데 대하여, 사람을 보내어 그것이 허위임을 밝히고 조위총의 사자로 금나라에 갔던 자를 영청현(永淸縣:龍川)에서 잡아 죽였다.

그 이듬해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고, 1183년에 추밀원부사 한림학사 승지(樞密院副使翰林學士承旨)가 되었으며, 1192년에 정당문학 ( 政堂文學 )으로 치사하였다.

그는 몸은 작으나 담이 커서 세상사람들이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안영(晏 叛 )에게 비하였다. 박학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특히 후한서 後漢書 에 능하였고 한때 고문대책(高文大冊)이 그에게서 나왔다고 한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염제신(廉悌臣)

1304(충렬왕 30)1382(우왕 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서원(瑞原 : 지금의 경기도 파주). 아명은 불노(佛奴). 자는 개숙(愷叔). 첨의중찬 ( 僉議中贊 )을 지낸 승익(承益)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 세충(世忠)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원나라에 가서 평장사 ( 平章事 )로 있던 고모부인 말길(末吉)의 집에서 자랐다. 원나라의 태정황제(泰定皇帝)를 시종해 총애를 받다가 고려에 들어와 어머니를 만나보고, 다시 원나라에 건너가서 상의사(尙衣使)가 되었다. 뒤에 다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귀국을 요청해 정동성낭중(征東省郎中)에 임명되어 돌아왔다.

그는 동료들의 횡포를 억제하는 한편, 토지와 노비의 소송은 모두 관계당국에서 처리하도록 하여 충숙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다시 원나라에 건너가서 익정사승(翊正司丞)이 되었다.

뒤 이어 저장성(浙江省)에 나가 중정원(中政院)의 전화(錢貨)를 회계하게 되었다. 이 때 관기들이 뇌물을 주어 매수하려 하는 것을 모두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은 원나라 순제(順帝)가 특별히 등용하려 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다시 귀국하였다.

충목왕 때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수성익대공신(輸誠翊戴功臣)으로 봉해졌다. 뒤 이어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가 되었고, 1349(충정왕 1)에 찬성사가 되었으며 이듬 해 하정사 ( 賀正使 )로 원나라에 갔다.

1354(공민왕 3)에 좌정승이 되었다가 곧 우정승이 되었다.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에 봉해지고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이 되었다.

그 때 원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나 고려에 구원을 청하자, 유탁 ( 柳濯 ) 등과 함께 군사 2,000명을 이끌고 원나라에 갔다가 그 해 10월에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였다. 1356년에 친원파(親元派) 기철 ( 奇轍 )일당을 숙청한 뒤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원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 해 수문하시중 ( 守門下侍中 )을 겸하였다.

1358년에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1361년에 관직과 명망이 최고위에 이르자 사직하였다. 그 뒤 다시 기용되어 1363년에 우정승이 되었으나, 홍건적의 난 때 어머니를 버리고 피난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신(告身 : 任命狀)에 서경(署經 : 서명으로써 가부를 구하는 일)되지 못하고 파면되었다.

그 이듬 해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가 되었는데, 이 때 신돈 ( 辛旽 )에게 아부하지 않아 미움을 받았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1371년 오로산성(五老山城 : 元刺山城)을 정벌할 때 서북면도통사가 되어 이기고 돌아와서 곡성백(曲城伯)에 봉해졌다. 그 해 딸이 신비 ( 愼妃 )로 책봉되었다.

우왕이 즉위하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고, 곧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가 되었으며 충성수의동덕논도보리공신(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염국보(廉國寶)

? 1388(우왕 1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서원(瑞原). 아버지는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제신(悌臣)이다. 서성군(瑞城君) 흥방(興邦) · 정수(廷秀)는 아우로서 형제가 모두 급제하였다. 그는 이제현 ( 李齊賢 ) 안보(安輔)로 이어지는 좌주문생(座主門生) 관계였다.

학문적 경향은 성리학을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며 안렴사로 지방에 파견되어 폐단을 다스림으로써 개혁에 참여하였다. 서성군(瑞城君)에 봉하여졌으며 1385(우왕 11) 4월에 지공거 ( 知貢擧 )가 되어 동지공거 ( 同知貢擧 )인 정당문학 ( 政堂文學 ) 정몽주 ( 鄭夢周 )와 함께 진사를 뽑고 우홍명 ( 禹洪命 ) 33인에게 급제를 내렸다.

덕창부행수(德昌府行首) 문윤경(文允慶)은 본디 환관 ( 宦官 ) 이광(李匡)의 종자(從者 : 시중드는 사람)로 그 친구의 책문을 훔쳐 썼으므로 정몽주가 이를 내쫓았는데 염국보가 이를 취하였다.

이를 최영 ( 崔瑩 )이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말하기를 전달에 감시학사(監試學士) 윤취 ( 尹就 )는 빈한한 선비를 버리고 어리석은 아이를 취하였으므로 하늘이 큰 우박을 내려 내 삼 을 다 망쳤는데 이번에 동당학사(東堂學士)는 또 어떠한 천변을 가져오려는가. ” 라고 하였다.

13881월 최영 · 이성계 ( 李成桂 )에 의하여 아우 흥방 및 임견미 ( 林堅味 ) 등이 제거될 때 살해되었다.

 

염정수(廉廷秀)

?1388(우왕 1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서원(瑞原 : 지금의 경기도 파주). 자는 민망(民望), 호는 훤정(萱庭).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제신(悌臣)의 아들이며, 서성군(瑞城君) 흥방(興邦)의 아우이다.

1371(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고, 1383(우왕 9) 지신사 ( 知申事 )로서 한때 전주(銓注 : 인사행정)를 맡았으며, 정몽주 ( 鄭夢周 )와 함께 호복(胡服)을 폐지하고 중국의 제도를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뒤에 동지밀직(同知密直대제학에 이르렀으나, 최영 ( 崔瑩 이성계 ( 李成桂 )에 의해 형 흥방과 임견미 ( 林堅味 ) 등이 제거될 때 함께 살해되었다. 저서에 훤정집 萱庭集이 있다.

 

염증(廉憎)

조선조(朝鮮朝)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했다.

 

염상항(廉尙恒)

서산군수(瑞山郡守)와 단천 부사(端川府使)를 역임했다.

 

염종항(廉從恒)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염걸(廉傑)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히야 공()을 세우고 선무이등공신(宣武李等功臣)에 책록 되었다.

 

염세경(廉世慶)

세경(世慶)은 창의(倡義)하여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다.

 

염상렬(廉相烈)

효자(孝子)로 이름이 남.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파주염씨(坡州廉氏)는 남한(南韓)에 총 12,099가구. 51,1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염진사전설 廉進士傳說

 

() 진사는 조선시대 통영 지방에 살던 선비인데, 왜국의 배가 우리의 사정을 정탐하려고 오자, “ 당신은 처자가 있는가(君在妻子乎). ” 라고 써서 왜구에게 보냈다.

이에 왜구가 동방예의지국에서 부모의 안부를 묻지 않고 어떻게 먼저 처자를 묻는가(東方禮儀之國 不問父母候先問妻子乎). ” 라고 답하자 염진사는 부모가 계실 때는 먼 곳에 가서 머물지 않느니라(時於父母在 不留遠方). ” 하고 반격하였다.

그러자 왜구는 할 말을 잃고 ()진사에게 선생님이라 부르며 절을 하고는 뱃머리를 돌려 도망갔다 한다.

                                                                        <출전: 미족문화대백과사전>

 

 

여기에 사진 설명을 넣으세요.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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