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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부계예씨: 의흥예씨(芮)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부계:의흥예씨)

 

 

본관(本貫): 부계(缶溪): 의흥(義興)

시조(始祖): 예락전(芮樂全)

유래(由來):

 

예씨(芮氏)는 중국(中國)에서 왔다고 하나 정확한 문헌(文獻)이 없어 선계(先系)를 알 수 없다.

의흥 예씨(義興芮氏)의 시조(始祖) 예락전(芮樂全)은 문장(文章)과 덕망이 뛰어난 석학(碩學)으로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으며, 부계(缶溪 : : 흥의 옛지명) ()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의흥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의 의하면 예씨(芮氏)의 본관(本貫)은 의흥(義興) 외에도 수원(水原), 남양(南洋), 청풍(淸風)18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의흥(義興) 단본으로 전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예승석(芮承錫)

? 1476(성종 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부계 ( 缶溪 ). 자는 주경(周卿). 할아버지는 악전(樂全)이고, 아버지는 예씨시조 사문(思文)이며, 어머니는 송전(宋 乷 )의 딸이다. 충청남도 면천 출신.

1447(세종 29)에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 뒤 이산현감(尼山縣監)으로 나가 누적된 민폐를 시정하고, 1458(세조 4)에 좌헌납 ( 左獻納 )을 거쳐 1466년에 변정원판결사(辨定院判決事) ·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468년에 대사간에 올라 인사체계의 확립, 국방력의 강화, 교육제도의 정비, 조세수납의 공정 등을 건의하다가 세조의 비위에 거슬려 체직되었다.

이듬해에 행대호군(行大護軍)으로 춘추관수찬관을 겸임하고, 이어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통정품계에 올라 병마 · 수군절도사를 겸임하여 역승 ( 驛丞 )의 우대책을 마련하였다.

1471(성종 2)에 동지성균관사 ( 同知成均館事 )로서 세조실록 , 이듬해에 예종실록 편찬에 각각 참여하였다. 1473년에 공조참판으로 하정사 ( 賀正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전라도관찰사, 1475년에는 한성부우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예충년(芮忠年)

승석의 아들 충년(忠年)1475(성종 6)에 문과(文科)에 올라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거쳐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예인상(芮仁祥)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을 역임하였다.

 

예몽진(芮夢辰)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하였다.

 

예흥래(芮興來)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芮大烈(예대열) 선생의 일화.

이름을 고치고 과거에 급제

선생이 초시를 십여 차례나 보았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열 몇 번까지 낙방을 한 선생은 한강 나루터에서 고향에 있는 가족은 물론 이웃들에 면목도 없고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고 또한 서운함을 원망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근처에서 빨래하던 여인이 곁에 다가와 말하기를

「선비님 무슨 일로 그렇게 슬피 울고 있어요?」하고 물었다.
선생은 대답하기를
「과거에 낙방하여 신세를 한탄하며 울었노라.」고 하였다.

여인은 다시 말하기를
「영남 선비 芮國烈(예국열)은 초시 열두 번을 낙방하여도 말없이 돌아가는데 선비께서는 어인 일이요.」라고 하였다. 芮國烈(예국열)은 선생의 초명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깜짝 놀라며
「내가 바로 芮國烈(예국열)이요.」 하였더니 여인이 한참 선생을 바라보다가 말하기를
「선비님은 이름이 너무 방대하여 급제를 하지 못하니 이름을 고쳐야만 급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선생도 기이하게 생각하고 이름 國烈(국열)를 大烈(대열)이라 고쳤다.

그리고 다음해에 과거를 보았더니 과연 그 여인의 말대로 장원급제 하였다고 한다.
                                                                                                        <출전: 내고장 전통문화(청도군 1981)>

 

 

芮祖學(예조학)의 효행.

 

눈물로 풀을 말리고

 

 

청도군 이서면 대전동 마을 한가운데 몇 그루의 소나무와 우거진 대밭 사 이에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서 있는 경암 선생의 효자 비각이 지나가는 이의 발걸음을 머추게 한다.

 

지금부터 154 년 전 서기 1830년 이 마을의 가난한 농가에 한 소년이 태어났다. 본관은 의흥 예씨이고 호는 경암이며 이름은 조학(祖學)이란 분이시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빼어나고 천성이 어질고 재질이 뛰어났으며 덕행과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다.

 

일곱 살 때 아버지께서 병세가 위독하여 백 가지 약을 다 써 보았으나 별 효험을 얻지 못하여 어머니와 아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병세가 점 점 악화되자 아버지께서는 경암 어머니에게 유언으로

아들을 올바르게 훌륭히 잘 길러라.”

는 말을 남기자, 어머니 백씨 부인이 슬픔에 잠기어

유언을 받들어 훌륭히 잘 기르겠다.”

고 말을 하자,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아들 경암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장례를 치르게 되었으며 장례를 치른 후 빈소를 모시고 조석으로 통곡하고 삭망에 밥상을 드리는 범절 이 어른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정성을 다하였다.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하루도 눈물 마르는 날이 없었고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삭망 때는 빠짐없이 성묘를 하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극진히 섬겼다. 저녁에는 이부자리를 깔아 드리고 아침 일찍 문안 인사를 꼭 드렸으며 집에서 어디 갈 때는 꼭 알리고 돌아와서는 인사를 드려 항상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고 맛있는 음식이라도 있으면 어머니께서 드신 후가 아니면 먼 저 입에 대는 일이 없었다 한다.

 

16 세 때 어머니께서 병환으로 식사를 못 하시자 경암도 같이 먹지 않았으며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어머니의 병환이 낫기를 칠성님께 빌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기동이 어려워지자 그는 근심어린 얼굴로 항시 곁 을 떠나지 않았고 약을 달임에 전념하였으며 대소변을 손수 받아내는 등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다.

 

병세가 위독할 때는 대변을 맛보아 증세를 헤아리기도 하였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소생시킨 일도 있었다 한다.

세월이 흘러 38 세가 되던 해에 지극한 효성도 아랑곳없이 어머니는 다시 중병으로 병세가 위독하여 운명하려 할 때에는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어드려 이틀간 생명을 연장시킨 일도 있었다.

 

지극한 효성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 상을 당하게 되니 애통 망극함은 사람으로서 감히 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기벽산(지금 각북면 삼평동)에 장례를 치렀다. 집에서 산소까지 20여 리 떨어졌는 데도 3 년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성묘하였으며 호곡할 때 무릎을 꿇었던 자리가 구덩이가 되었고 눈물 흘린 자리에는 풀이 말랐다고 한다.

 

3 년상을 마치는 날에는 어머니의 묘 앞에 엎드려 일어나지 않았으며, 때마침 폭우가 쏟아지는지라 집안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기를 여러 차례 권했으나 듣지 아니하니 하는 수 없이 경암만을 남겨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는 6월의 장마철이라 밤이 지새도록 비가 내렸으므로 집안사람들이 걱정이 되어 우비를 가지고 새벽에 달려가 본즉 어머니의 묘 앞에 엎드려 온 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어머니, 비가 옵니다.”

라고, 통곡하고 있었다. 집안사람들이

효도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나, 너무 슬퍼하다가 몸을 상하게 되면 불효가 된다. ”

하고, 만류해도 듣지 않고

죽으면 지하에서 부모님을 섬길 것이고, 살면 집에 돌아갈 날이 있을 것 이다.”

라고 대답을 했다.

 

3 년 상을 지낸 후 어머니의 묘아래 토굴을 파고 움집을 지어 문 위에는 호천망극’(끝없는 하늘과 같이 부모의 은혜는 크다.) 넉 자를 써 붙이고 효경 책을 밤낮으로 외우는데 밤이 되면 호랑이가 와서 호위하며 집짐승처럼 호랑이가 따르고 있었다. 가끔 집에 제사가 드는 날 저녁이면 호랑이 등에 업혀 집으로 왔다가 제사를 마친 후에는 다시 호랑이 등에 업혀 돌아가곤 하였다고 한다.

 

시묘(부모의 거상 중에 묘 앞에 막을 짓고 지냄) 하는 동안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하루는 집안사람이 식량을 가지고 묘소 가까이에서 점심을 지어드리려고 물을 길으러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기겁을 하여 고함을 지르고 있던 중 선생이 알고 호랑이에게

사람을 놀라지 말게 하라. ”

하니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3 년을 토굴에서 시묘하고 43 세 되 던 해에 산에서 내려와 종신토록 부모를 애모하다 이듬해에 운명하였다.

선생이 운명하던 날 밤에 안산에서 호랑이가 울자 선생이 듣고,

나는 이제 죽는다. 내가 죽거든 부모님 묘아래 묻어라.”

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 때 선생의 춘추가 44 세였으니 서기1874년이었다.

 

선생이 운명한 지 50여 년 후에 청도 유림에서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칭송하여 19313월에 청도군 이서면 대전동에 비석과 비각을 세웠는데 비각 을 세우던 날 밤에 안산에서 호랑이가 오래도록 우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경암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 호랑이도 감동하여 울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그의 마을에는 가까운 후손들이 농사에 종사하며 선생의 비각을 지키고 있다. 후손들 가운데는 남달리 효자 효부들이 많이 나와 이웃 주민들로부터 효자마을이라 불리고 있으며 어른을 잘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이웃끼리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지내는 모범적인 마을을 이루고 있다.

 

출전청도군 대천초등학교 이 교감

참고 문헌 大韓忠義孝烈錄,道州誌, 孝烈行誌,

 

 

 

표 출전<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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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부계·의흥 예시(缶溪·義興芮氏)는 남한(南韓)에 총 2,424가구, 9,4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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