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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오씨(吳)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고창오씨)

 

 

본관(本貫): 고창(高敞)

시조(始祖): 오학린(吳學麟)

유래(由來):

 

고창 오씨(高敞吳氏)의 시조(始祖) 오학린(吳學麟)은 고려(高麗) 정종(靖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한림원 학사(韓林學士)를 지냈으며 , 외적(外敵)을 토평한 공으로 고창(高敞)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고창(高敞)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오질(吳質)

학린의 아들 질() 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했다.

 

오세문(吳世文)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인. 고창 출신. 할아버지는 한림학사 학린(學麟)이며, 세공(世功)의 아우, 세재(世才)의 형이다. 집안대대로 유학을 본업으로 하여, 3형제가 모두 문장의 대수(大手)로 이름이 났다. 무신란 전인 의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형 세공과 함께 현달하였다고 하나, 그 구체적인 관력이나 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이규보 ( 李奎報 )동국이상국집 3자오랑중세문가방광명사문장로차운문공 自吳郎中世文家訪廣明寺文長老次韻文公 이라는 시를 통하여 낭중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규보가 1194(명종 24) 차운오동각세문정고원제학사삼백운시 次韻吳東閣世文呈誥院諸學士三百韻詩 를 지었는데, 이를 통하여 동각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첫머리에 있는 이규보의 서에 의하면, 오세문이 이규보에게 고금의 시집 가운데 300운이나 압운을 한 것이 없는데, 나는 302운을 지었다. ” 고 자랑하면서 시를 보여주어 이를 차운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그의 문학에 대한 자부와 세인의 추앙을 짐작할 수 있다. 평생에 지은 시가 산적해 있었다고 하였으나 산일되어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이밖에 이규보가 그의 조수론(潮水論)에 논평을 가한 논조수서 論潮水書 를 지은 것으로 보아 조수에 관한 저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삼국유사 에 의하면 역대가 歷代歌 를 지었다고 한다.

 

오세재(吳世才)

1133(인종 11) ? 고려 중기의 학자 · 문인.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덕전(德全). 한림학사 학린(學麟)의 손자이며, 세공(世功) · 세문(世文)의 아우이다.

명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성격이 소탈하여 구속함이 적어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친우 이인로 ( 李仁老 )가 세번이나 추천하였으나 끝내 벼슬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는 당시 18세였던 이규보 ( 李奎報 )에게 53세의 나이로 망년지교(忘年之交 : 나이에 구애됨이 없이 사귀는 벗)를 허락하였다. 이른바 해좌칠현(海左七賢 : 竹林高會)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 등과 시주(詩酒)로 즐겼다.

만년에는 외할아버지의 출생지인 동경(東京 : 지금의 慶州)으로 제고사(祭告使)의 축사(祝史)가 되어 역마를 타고 가 그곳에 살면서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고, 마침내 가난에 시달리다 죽고 말았다.

주역 을 암송하고 육경에 박통할 정도로 유학 경전에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시문은 한유(韓愈)와 두보(杜甫)의 체()를 체득하였다. 이규보는 그의 시를 주매경준( 楔 邁勁俊 : 힘차고 굳셈.) ’ 이라 평하였고, 최자 ( 崔滋 )풍섬혼후(豊贍渾厚 : 넉넉하고 원만함.) ’ 라고 평한 바 있다. 또한 글씨에도 뛰어났다.

경기체가 한림별곡 翰林別曲 3오생유생(吳生劉生) 양선생(兩先生)의 오생유생(吳生劉生) 양선생(兩先生)의 위 주필(走筆) ()긔엇더 니잇고(오생 유생 두 선생의 오생 유생 두선생의 아, 붓 놀리는 모습 그 어떠합니까?) ” 에서 오생은 바로 오세재를 가리킨다.

오세재는 명종시대 문신수난기를 당하여 현실에 타협 내지는 조화하지 못하고 문학과 시주에 탐닉함으로써 자신의 고민을 해소하려 한 것이다. 그러한 그에게 이규보는 나이를 떠난 진정한 벗이었다. 이규보 역시 그의 재주를 아끼고 삶을 애석히 여겨 오선생덕전애사 吳先生德全哀詞 를 지어 추모하였다.

오선생덕전애사 吳先生德全哀詞 에서 이규보는 오세재를 복양선생( 洛 陽先生)이라 부르고, 친구 아닌 문하생의 입장에서, 도연명(陶淵明)이 죽자 그 문인들이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사시(私諡)한 예를 따라, 현정선생(玄靜先生)이라 사사로이 시호하여 영전에 바쳤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동문선 에 오언율시 2, 칠언율시 1수가 있다.

 

오계유(吳季濡)

세문(世文)의 중손인 계유(季濡)는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좌리공신(左理功臣)으로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모양군(牟陽君)에 봉해졌다.

 

오엄(吳淹)

계유(季濡)의 손자 오엄()이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경기도 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와 충청도 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오원찬(吳原纘)

()의 손자 원찬(原纘)은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오운(吳澐)

1540(중종 35) 1617(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 의병장. 본관은 고창(高敞). 함안 출생. 자는 태원(太源), 호는 죽유(竹 蓬 ) · 죽계(竹溪). 의령현감 석복(碩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의현감 언의(彦毅)이고, 아버지는 수정(守貞)이며, 어머니는 순흥 안씨(順興安氏)로 부호군 ( 副護軍 ) ()의 딸이다. 이황 ( 李滉 ) ·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명종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의 학유 ( 學諭 ) · 학정 · 박사 · 전적 ( 典籍 ) · 직강 ( 直講 ) 등을 역임하였다. 1583(선조 16) 경원부 아산보(阿山堡)의 추장 번호(藩胡)가 난을 일으키자 북도조전장(北道助戰將)으로 나가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주목사 겸 편수관 ( 編修官 )을 거쳐, 사성 ( 司成 )을 지낸 뒤 사재감정(司宰監正)이 되고, 1589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 ( 郭再祐 )의 휘하에서 소모관 ( 召募官 ) · 수병장(收兵將) 등으로 활약하였다.

그 때 백령(白嶺)에서 모집한 의병이 전후 2만여 명에 이르렀다. 특히 의령 부근의 전투와 현풍 전투에 군공이 뛰어났다. 1593년 상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합천군수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다시 합천 부근의 왜적을 쳐서 공을 세워 도원수 권율 ( 權慄 )의 추천으로 통정대부 ( 通政大夫 )에 오르고,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 제독의 접반사 ( 接伴使 )로 활약하였다.

1599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장례원판결사에 승진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8년 다시 기용되어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1616(광해군 8) 공조참의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 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진술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와 함께 분전한 17()의 한 사람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주의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는 죽유문집 이 있고, 편서는 동사찬요 東史纂要 가 있다.

 

오화영(吳華英)

1880(고종 17)1960. 목사·독립운동가·정치인. 별명은 화영(華永하영(夏英). 황해도 평산 출생. 3·1운동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다.

중앙기독교청년회 위원이면서 기독교남 감리파 목사로서, 19193·1운동 계획단계에서 이승훈(李昇薰)과 더불어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개성 방면으로의 독립선언서 배포를 담당하였다. 이로 인하여 투옥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26월의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11월 조선민흥회 ( 朝鮮民興會 )의 결성을 위한 준비위원, 19272월 신간회 ( 新幹會 )를 결성하면서 35명의 강사 가운데 1, 19291월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신간회 강화지회의 총무간사, 같은 해 1월 신간회 본부의 서무부장, 7월 신간회 경성지회 검사위원 등의 직책을 역임하면서 활동하였다.

, 1929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조병옥·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일제의 탄압을 규탄하는 결의를 하고, 각 신문사와 단체기관 등을 포함한 전국 각지에 결의문을 인쇄, 배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이어 19305월 물산장려회 총회에서 고문에 추대되어, 국민정신계몽과 국산품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8월 출범한 조선민족당을 거쳐 한국민주당에 참여하고, 19464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1차전국대표자회의에서 부회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 南朝鮮過渡立法議院 )의 입법의원, 1947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표로서 좌우합작 위원회 위원이 되어 좌우합작운동에 매진하였다.

1950530일에 실시한 제2대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서울 종로 을구)되었으나, 다음 달 6·25가 일어나 납북되었다.

195672일 평양에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조소앙 ( 趙素昻 안재홍(安在鴻)과 더불어 최고위원이 되었다.

19608월 평양의 남산에 있는 정부병원에서 병사하였고, 1970년대에 들어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고창 오씨(高敞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6,380가구, 27,77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표 출전<하민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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