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吳(나주오씨)
본관(本貫): 나주(羅州)
시조(始祖): 오숙규(吳淑珪)
유래(由來):
「나주오씨세보(羅州吳氏世譜)」에 의하면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중엽에 진사(進士)를 지낸 오숙규(吳淑珪)로 전하며,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한 언(偃)을 일세조로하여 선조(先祖)들의 정착 세거지(定着世居地)인 나주(羅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오자치(吳自治)
언(偃)의 5세손인 자치(自治)는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467년(세조 13)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된 뒤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고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다.
오겸(吳謙)
1496(연산군 2) ∼ 1582(선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경부(敬夫), 호는 지족암 ( 知足庵 ) · 국재(菊齋). 신중(愼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자치(自治)이고, 아버지는 부사 ( 府使 ) 세훈(世勳)이며, 어머니는 전첨 ( 典籤 ) 신말평 ( 申末平 )의 딸이다.
유우(柳藕)의 문인으로, 1522년(중종 17)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3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의령현감으로 나갔다가, 예조좌랑을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다. 그 뒤 장령 ( 掌令 ) · 집의 ( 執義 ) · 교리 ( 校理 ) · 부응교 ( 副應敎 ) ·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을 거쳐, 남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550년(명종 5)에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고, 곧 담양부사 · 광주목사를 거쳐 호조참판 · 병조참판 ·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559년에 예조판서가 되고 뒤에 이조 · 병조 · 호조의 판서를 거쳐 지경연사가 되었다.
1564년에 좌찬성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궤장( 廓 杖)을 내려받고, 그뒤 기로소에 들어갔다. 지춘추관사가 되어 ≪ 명종실록 ≫ 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오희길(吳希吉)
1556(명종 11) ∼ 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길지(吉之), 호는 도암( 槿 庵). 할아버지는 좌찬성 겸종(謙從)이며, 아버지는 언기(彦麒)이다. 김인후 ( 金麟厚 ) · 정여립 ( 鄭汝立 )의 문인이다.
고창에 살았는데 스승 정여립이 이이(李珥)와 성혼 ( 成渾 )을 비방하는 말을 듣고 그 잘못된 점을 적어 정여립에게 주어 노여움을 샀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그의 편지를 정여립이 보관하고 있다가 나타남에 따라 석방되어 천거되었다.
후릉참봉(厚陵參奉)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의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서 태조의 어진 ( 御眞 )을 비롯한 제기 ( 祭器 )와 역대 실록을 내장산에 숨겨 보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위성공신 ( 衛聖功臣 )에 녹훈되었다. 그 뒤 전쟁의 참화를 수습할 쇄신책과 인심수습을 상소하였다.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과 태인현감을 지내고 68세에 죽었다. 고창의 월계정사(月溪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 도동연원록 道東淵源錄 ≫ 이 있다.
오효석(吳孝錫)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표 출전<하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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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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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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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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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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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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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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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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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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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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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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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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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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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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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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泳(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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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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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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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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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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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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秉(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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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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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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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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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열),燮(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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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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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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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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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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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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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교),均(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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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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均(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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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나주 오씨(羅州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6,003 가구, 26,2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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