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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복오씨(吳)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동복오씨)

 

 

본관(本貫): 동복(同福)

시조(始祖): 오녕(吳寧)

유래(由來):

 

동복오씨(同福吳氏)는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거란을 토평(討平)한 공()으로 동복군(同福君)에 봉해진 오녕(吳寧)을 시조(始祖)로 하고 동복(同福)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오대승

그후 녕()의 손자 대승이 원종(元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시중(侍中)에 이르렀다.

 

오광찰(吳光札)

녕의 증손 광찰(光札)이 대장군을 역임하였다.

 

오선(吳璇)

5세손 선()이 판판도낭사(判版圖郎事)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다.

 

오잠(吳潛)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간신(姦臣). 본관은 동복 ( 同福 ). 초명은 기(). 아버지는 찬성사 선()이다.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승지에 이르렀다.

간신 김원상 ( 金元祥 ) · 석천보 ( 石天補 ) 등과 함께 왕이 연락(宴樂)을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전국에서 명기들을 뽑아들이고, 삼장사 三藏寺 사룡 蛇龍 등의 노래를 지어 가무를 관람하게 하는 등으로 환심을 샀다.

그 뒤 지신사 ( 知申事 ) · 지밀직사사 · 감찰대부 등을 거쳐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올랐으나, 항상 충렬 · 충선 부자를 모함하여 이간시켰고, 어진 신하들을 모함하고 살해하여 많은 원망을 샀으나 화가 두려워 말하는 자가 없었다.

원나라의 사신인 단사관(斷事官) 티므르부카(帖木不花)가 왔을 때 전 호군 원충갑(元 食 甲) 50인과 김심 ( 金深 ) 등 군관 ( 軍官 ) 150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죄를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원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무사하였다.

뒤에 김심 · 오감량(吳監良) 등에 의하여 원나라에 압송되어 안서(安西)에 유배되었다. 충선왕 때 다시 등용되어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1313(충숙왕 즉위년)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 ·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에 올랐으며, 그 이듬해에는 삼사사(三司使)가 되었다. 1320년 찬성사가 되고 이어 구성군 ( 龜城君 )에 봉해졌다.

1321년 왕이 원나라에 갈 때 따라가서 유청신 ( 柳淸臣 ) · 양안길(楊安吉) 등과 함께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일당이 되어 왕을 모함하였고, 1323년에는 원제(元帝)에게 고려에 행성(行省)을 설치, 국호를 폐하고 원나라의 직속령으로 할 것을 청하는 등 나라에 많은 해를 끼쳤다.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오억령(吳億齡)

1552(명종 7)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동복 ( 同福 ). 자는 대년(大年), 호는 만취(晩翠). 참봉 원몽(元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상서원직장(常瑞院直長) 극권(克權)이고, 아버지는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 세현(世賢)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참봉 근()의 딸이다. 이조참판 백령(百齡)의 형이다.

1570(선조 3) 사마시를 거쳐 158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예문관검열과 호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그 뒤 이조정랑을 거쳐 경상도안무사로 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집의 ( 執義 전한 ( 典翰 ) 등을 역임하였다.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가 왔을 때 선위사 ( 宣慰使 )가 되어 접대하였다. 이 때 왜군이 대거 침입할 것을 예감하고 선조에게 치계(馳啓 : 말을 달려 계문을 올림)하였다. 조정에서는 일을 만들어 세상을 소란하게 한다고 하여 그를 해임시켰으나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 뒤 다시 검상 ( 檢詳 ) 등을 거쳐, 성균관사성에 임명되었다. 1591년 진주사 ( 陳奏使 ) 질정관 ( 質正官 )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는 도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개성에서 선조를 호종(扈從)하였다. 의주에서 직제학 ( 直提學 )에 임명되고, 그 뒤 이조참의 우부승지가 되고 대사성을 거쳤다.

접반사 ( 接伴使 ) 윤근수 ( 尹根壽 ) 밑에서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만나 전쟁의 여파로 발생하는 양국간의 마찰을 해결하는 데 진력하였다. 1593년 환도한 뒤 대사간·도승지·대사헌·이조참판을 두루 역임했는데, 승진을 방해하는 자가 많았다. 조정에서 그를 접반사로 명나라에 보내려 하자, 선조는 그를 돕기 위해 늙은 아버지가 있으니 다른 인물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황해관찰사로 있을 때 해서(海西)에 머물던 의인왕후 ( 懿仁王后 )를 위한 물자 징수가 과도해 폐단이 심하므로 이를 해결하였다. 1601년에는 부제학으로 청백리에 뽑혔고, 1608년 선조가 죽자 고부청시청승습부사(告訃請諡請承襲副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귀국해 한 때 파직되었다. 그 뒤 병조참판·부판윤·대사헌·형조판서·우참찬·개성유수를 역임하였다.

1615(광해군 7) 인목대비의 폐출에 반대하자 대북파 정인홍 ( 鄭仁弘 ) 등이 고부사 ( 告訃使 )의 일을 다시 들추며 탄핵해,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멀리 귀양을 보내자는 논의가 일어나자 4년 동안 처벌을 기다리다가 죽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배천의 문회서원 ( 文會書院 )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만취문집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오백령(吳百齡)

백령(百齡)도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광해군(光海君)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복천군(福川君)에 봉해지고 인조(仁祖) 때 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성(大司成)등을 역임하였다.

 

오익(吳翊 )

1574(선조 7)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 ( 同福 ). 자는 필보(弼甫), 호는 월강(月岡) 혹은 묵재(默齋). 상서원직장(常瑞院直長) 극군(克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 세현(世賢)이고, 아버지는 우참찬 억령(億齡)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일운(日雲)의 딸이다.

1603(선조 36)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예문관봉교(禮文館奉敎)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임진왜란 때 불탄 실록의 재간행에 참여하였다. 그뒤 검열· 대교 ( 待敎 주서 ( 注書 감찰· 전적 ( 典籍 ) 등을 거쳐 병조좌랑· 정언 ( 正言 수찬 ( 修撰 ) 등을 지냈다.

1609(광해군 1) 병조좌랑 겸 지제교(兵曹佐郞兼知製敎)로서 선조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검상 ( 檢詳 사인 ( 舍人 승지 등을 역임하고, 주청사 ( 奏請使 )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글씨에 능하여 함흥의 환조정릉신도비(桓祖定陵神道碑) 비문을 썼다.

 

오정(吳靖), 오전

억령(億齡)의 세아들 익(: 승지를 역임((교리와 지평을 역임)이 모두 문과(文科)에급제하여 문한가(文翰家)로 이름을 날렸다.

 

오준(吳竣)

1587(선조 20) 1666(현종7). 조선 후기의 문신 · 서예가. 본관은 동복 ( 同福 ). 자는 여완 (汝完), 호는 죽남(竹南). 극권(克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 세현(世賢)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백령(百齡)이며, 어머니는 증 참의(贈參議) 고경룡(高慶龍)의 딸이다.

1618(광해군 10)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주서 ( 注書 )를 거쳐 지평 ( 持平 ) · 장령 ( 掌令 ) · 필선 ( 弼善 ) · 수찬 ( 修撰 )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뒤인 1639(인조 17) 한성부판윤으로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심양(瀋陽)에 다녀왔고, 그 뒤 1643년 청나라 세조의 즉위에 즈음해 등극부사(登極副使), 1648년에는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0(효종 1) 예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형조판서 · 대사헌 · 우빈객 ( 右賓客 ) 등을 거쳐 1660(현종 1) 좌참찬이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왕가의 길흉책문(吉凶冊文)과 삼전도비 ( 三田渡碑 )의 비문을 비롯한 수많은 공사(公私)의 비명을 썼다. 특히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따라 단아한 모양의 해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죽남당집 이 있다. 글씨로는 아산의 충무공이순신비忠武公李舜臣碑 , 구례의 화엄사벽암대사비 華嚴寺碧巖大師碑 , 회양(淮陽)허백당명조대사비 虛白堂明照大師碑 · 이판이현영묘비吏判李顯英墓碑 , 광주(光州)의창군광묘비 義昌君珖墓碑 , 일본 닛코사(日光寺)닛코산조선등로명 日光山朝鮮燈爐銘 , 안성(安城)대동균역만세불망비 大同均役萬世不忘碑 , 죽산 ( 竹山 ) 칠장사 ( 七長寺 )벽응대사비 碧應大師碑 등의 비문이 있다.

 

오단(吳端)

1592(선조 25) 1640(인조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 ( 同福 ). 자는 여확(汝擴), 호는 동암(東巖) · 백암(白巖). 직장 극권(克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장 세현(世賢)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백령(百齡)이며, 어머니는 제주고씨(濟州高氏)로 경룡(景龍)의 딸이다.

처는 청송군(靑松君) 심액(沈 魅 )의 딸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3(인조 1) 음보(蔭補)로 직장이 되었다가 이듬해 알성문과에 병과한 뒤 전적 ( 典籍 )이 되고, 형조와 공조의 좌랑이 되고 곧 뒤이어 병조정랑이 되었다.

1625년에 교리 ( 校理 )를 거쳐 1627년에 정언이 되었으며, 이듬해 지평 ( 持平 )을 역임하였다. 그뒤 1635년과 그 이듬해에 수찬 ( 修撰 ) · 장령 ( 掌令 ) 등 청환(淸宦)을 역임하였다. 1634년에 둘째 딸을 인평대군 ( 麟坪大君 )에게 출가시켰다.

이듬해 인렬왕후(仁烈王后)가 죽자 빈전도감도청(殯殿都監都廳)이 되어 상례 ( 喪禮 )를 잘 치렀다. 1637년 전주부윤을 거쳐 충청감사와 황해도감사를 역임하였다. 왕자의 장인으로서 죽은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성품이 겸손하여 진취를 좋아하지 않았고, 광해군의 폐모 정의(廷議 : 조정의 논의)에는 불참하였다. 내외요직을 지내면서 양차의 호란 때 근왕병동원과 군수조달에 진력하였다.

 

오정일(吳挺一)

1610(광해군 2) 1670(현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 ( 同福 ). 자는 두남(斗南), 호는 구사(龜沙). 직장 세현(世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백령(百齡)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단()이며, 어머니는 병조참판 심액(沈 魅 )의 딸이다.

1627(인조 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36,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이 이이(李珥)와 성혼 ( 成渾 )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추진하자, 성균관유생으로서 반대하는 상소를 주도하였다가 성균관에서 축출당하였다.

1639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43년부터 1646년 사이에 정언 ( 正言 ) · 헌납 ( 獻納 ) · 이조좌랑 · 사간 · 이조정랑 등을 거듭 역임하였다. 1645년 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164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집의 ( 執義 ) · 부응교 ( 副應敎 ) · 응교 등을 거쳐 1648년 승지에 이르렀다.

이어 황해도와 경기도의 관찰사 등을 지냈다. 1652(효종 3) 자기집에 매부인 인평대군 ( 麟坪大君 )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을 때의 일을 빌미로 일어난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무고임이 밝혀졌다.

1655년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도승지를 거쳐 1657년 이조참판 · 대사헌, 1659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660(현종 1) 도승지로서 효종실록 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663년 형조판서 · 판윤을 거쳐, 1670년 호조판서에 올랐다.

 

오정위(吳挺緯)

1616(광해군 8) 1692(숙종 1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 ( 同福 ). 자는 군서(君瑞) 또는 서장(瑞章), 호는 동사(東沙). 직장 ( 直長 ) 세현(世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백령(百齡)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단()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심액(沈 魅 )의 딸이다. 당숙 전( )에게 입양되었다.

일찍이 진사가 된 뒤 1645(인조 2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52(효종 3) 부교리 ( 副校理 ) · 수찬 ( 修撰 )을 지내고, 1659년 승지를 역임하였다. 1664(현종 5) 예조참의가 되었으며 그뒤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는데, 이때 공주의 옛성을 개축하고 두 곳에 절을 세워 성을 지키게 하는 등 크게 치적을 올렸다.

그 뒤 양주목사 · 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1672년 호조 · 형조 · 공조의 판서를 지냈다. 숙종초에 서인 송시열 ( 宋時烈 )에 대한 처벌문제로 남인이 온건파와 강경파로 분열될 때 청남(淸南)에 속하여 강경론을 지지하였고, 1677(숙종 3) 동지사 ( 冬至使 )로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판서 ·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무안에 유배되었다가 삭주 · 보성에 이배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풀려나와서 다시 공조판서에 등용되었고, 이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오정창(吳挺昌)

1634(인조 12) 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 ( 同福 ). 자는 계문(季文). 직장 ( 直長 ) 세현(世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백령(百齡)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단()이며, 어머니는 병조참판 심액(沈 魅 )의 딸이다.

1662(현종 3)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 ( 說書 ) · 정언 ( 正言 )을 거쳐 1672년 지평 ( 持平 )에 올랐다. 1674(숙종 즉위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왕대비 장씨(張氏)에 대한 상복논쟁에서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뒤 득세하여 헌납 ( 獻納 )에 특제되었다.

이듬해 도당록(都堂錄)에 들었으며, 그뒤 부사직 ( 副司直 ) · 부교리 ( 副校理 )를 거쳐, 동부승지에 특진되었고, 집의 ( 執義 ) · 부응교 ( 副應敎 ) · 부제학 · 대사간 등과 1676년에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숙종 초년, 현종에 대한 자의대비의 상복논의 등에서 윤휴(尹 頊 )의 설을 따라 예론을 주장하였다.

1678년경부터 남인의 논의가 준격한 청남(淸南)과 온건한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지자 탁남에 가담하여 송시열 ( 宋時烈 )의 처벌 등에 온건론을 주장하였다.

1679년 탁남이 중용되면서 대사간 · 부제학 · 한성부우윤 · 이조참판 ·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680년 예조판서로 재임중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이 몰락할 때 정원로(鄭元老)의 옥사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관작이 회복되었다.

 

오시만(吳始萬)

1647(인조 25)1700(숙종 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 ( 同福 ). 자는 영석(永錫), 호는 춘헌(春軒). 이조참판 백영(百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단()이고, 아버지는 호조판서 정일(挺一)이며, 어머니는 사인 ( 舍人 ) 정호선 ( 丁好善 )의 딸이다. 예조판서 정위(挺緯)에게 입양되었다.

1666(현종 7) 사마시에 합격, 1676(숙종 2)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이어 지평 ( 持平 )을 지내고, 1679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수찬 ( 修撰 부수찬· 부교리 ( 副校理 헌납 ( 獻納 교리 등을 역임하고, 다음해 이조좌랑을 거쳐 1689년 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부당하다 하여 다시 승지에 머물렀다. 지조가 깨끗하고, 겸허 담백하였으나, 1694년 당화(黨禍)를 입어 용천·강서 등지로 유배되니 전후 6여년간에 이른다. 유배중에도 경학(經學)에 힘썼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오시수(吳始壽)

1632(인조 10) 1680(숙종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 ( 同福 ). 자는 덕이(德而), 호는 수촌(水邨). 관찰사 백령(百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단()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정원(挺垣)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윤의립 ( 尹毅立 )의 딸이다.

1648(인조 26) 진사가 되었고, 1656(효종 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6품에 승품, 가주서 ( 假注書 )가 되었고, 정언 ( 正言 ) · 문학 ( 文學 ) · 지평 ( 持平 ) · 교리 ( 校理 ) ·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664(현종 5)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어 평안도암행어사로 다녀왔다. 이어 집의 ( 執義 )가 되어 낭선군 ( 朗善君 ) ( )의 강사영조(江舍營造 : 강가에 정사를 지음)와 각 사찰에 대한 횡포를 고발하기도 하였다. 이어 응교 ( 應敎 ) · 사인 ( 舍人 )을 거쳐 1666년 중시 문과에 장원하였다.

예빈시정 · 승지를 거쳐 1670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해 전라도 지방의 기근의 참상을 고발하였다. 그리고 구황책으로 조적( 夕 蛇 ) · 전결(田結) · 관노비 · 속오군 ( 束伍軍 )의 병기 · 염세목(鹽稅木) · 군사 문제 등 9개 항목을 개진하였다.

특히 가장 큰 민폐인 납육(臘肉 :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의 진상 문제를 건의해 해결했고, 당해 연도의 신역(身役)을 줄이도록 건의하였다.

그 뒤 전라도 지방에 괴탄설(怪誕說)이 나돌아 추고도 당했으나 벼슬은 승지 · 예조참의 · 이조참의 ·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674년 도승지가 되었다. 숙종이 즉위한 뒤 강화부유수를 거쳐 형조판서에 발탁되었다.

1675(숙종 1) 총융사 김만기 ( 金萬基 ) 등과 북한산성의 축성을 건의했고, 선왕 현종의 서거에 대한 청나라의 두 번 째 조제사(弔祭使)가 왔을 때 원접사 ( 遠接使 )가 되어 이들을 맞이하였다.

이어 이조판서로 발탁되었고, 청나라 조제사들의 반송사(伴送使)가 되었다. 그 뒤 대사헌 · 우참찬을 거쳐 1676년 호조판서로 발탁되어 농사의 흉황을 역설했고, 특히 새로이 개간한 전지(田地)2년에 한해 수세하지 말도록 조처하였다. 이듬해 다시 대사헌 · 판의금부사 · 이조판서 · 예조판서를 지냈다.

1679년 우의정에 올라 말속악습(末俗惡習)인 괘서 금지 방안을 제시했고, 허적 ( 許積 )과 같이 전문(錢文)의 변통사를 역설하였다. 또한 정몽주 ( 鄭夢周 )의 화상을 모시는 가묘 ( 家廟 )를 지어 봉사하도록 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 ( 庚申大黜陟 )으로 유배되었다가, 앞서 청나라 조제사가 왔을 때 왕에게 왕약신강설(王弱臣强說) 등 허위 보고를 했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사사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관직이 회복되고, 1694년 갑술옥사로 다시 관직을 추탈당했다가 1784(정조 8) 신원 요청으로 다시 관직이 회복되었다. 저서로는 수촌집 이 있다.

 

오시복(吳始復)

1637(인조 15)1716(숙종 4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 ( 同福 ). 자는 중초(仲初), 호는 휴곡(休谷). 우참찬 억령(億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이고, 아버지는 정규(挺奎)이며, 어머니는 이여황 ( 李如璜 )의 딸이다.

1662(현종 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어 수찬 ( 修撰 정언 ( 正言 지평 ( 持平 교리 ( 校理 이조정랑· 사인 ( 舍人 ) 등을 거쳐 1675(숙종 1) 승지·이조참판·개성유수를 역임하고, 강릉부사가 되었다가 부임 전에 허적 ( 許積 )에게 아첨하였다 하여 1680년 경신대출척 ( 庚申大黜陟 ) 때 파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조참판에 이어 한성판윤·호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그는 경비부족을 메우기 위해 각도, 각읍의 채은처(採銀處 : 은을 캐는 지역)를 호조에서 관장하여 수세하도록 하였고, 왜에 면포예급문제, 각 아문의 둔전경영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조판서 겸 수어사를, 이어 다시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갑술옥사로 하옥, 유배되었으며, 1697년 풀려나와 우부빈객을 지냈다.

1701년 무고(巫蠱)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정현(大靜縣 : 지금의 제주도)에 안치되었는데, 1712년 함평·강진 등지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영해부(寧海府 :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에 이배되어 1716년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특히 글씨에 능하였고, 뒤에 신원되었다.

 

오광운(吳光運)

1689(숙종 15) 1745(영조 2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동복 ( 同福 ). 자는 영백(永伯), 호는 약산 ( 藥山 ). 정한(挺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시봉(始鳳)이고, 아버지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상순(尙純)이며, 어머니는 광주 안씨(廣州安氏) 병조판서 후열(後說)의 딸이다.

1714(숙종 40) 사마시를 거쳐, 1719년 증광 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설서 ( 說書 )에 올라 연잉군(延 艀 君 : 뒤의 영조)의 서연관 ( 書筵官 )이 되었으며 승지를 지냈다. 1728(영조 4) 홍문관의 수찬 ( 修撰 ) · 교리 ( 校理 ) 및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이 해 3월에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이 일어나자 변을 아뢰고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 날 저녁 청주에서 이봉상 ( 李鳳祥 ) · 남정년(南廷年) 등이 적에게 살해되자 사람들은 그의 선견(先見)에 탐복하였다. 또 영조의 탕평책 ( 蕩平策 )하에서 청남(淸南) 세력의 정치적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1729년에 올린 상소에서 무릇 탕평의 근본은 전하가 일심 ( 一心 )으로 최상의 목표를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에서 행하는 모든 시책과 행위는 지극히 공적이어서 사사로움이 없고, 지극히 올바르므로 편벽됨이 없게 됩니다. ” 라고 하면서, () · (西) · () · ()를 막론하고 당인(黨人) 중에서 명류(名流)로 지칭되는 인물들을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해 영남안핵어사(嶺南按 逆 御史)가 되고, 이어 대사헌을 거쳐 1737년 대사간, 1740년 부사과 ( 副司果 )가 되었다. 이 때 소론인 원경하 ( 元景夏 ) · 정우량 ( 鄭羽良 ) 등과 함께 다시 대탕평론을 내세워 붕당(朋黨)을 없애되 명절(名節 : 명분과 절개)을 숭상해야 한다. ” 고 적극 주장하였다. 1743년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1744년 사직 ( 司直 )을 거쳐 개성유수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났으며, 유형원 ( 柳馨遠 )의 저서인 반계수록 磻溪隨錄 의 서문을 썼다. 저서로는 약산만고 藥山漫稿 가 있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章)이다.

 

오대익(吳大益)

대익(大益)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오덕영(吳德泳)

덕영(德泳)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내었다.

 

 

표 출전<하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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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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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동복오씨(同福吳氏)는 남한(南韓)에 총 11,977,가구, 50,64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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