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순흥안씨(安)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순흥안씨)

 

본관(本貫): 순흥(順興)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

유래(由來):

 

순흥 안씨(順興安氏)의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傑)의 후손으로, 고려 신종(神宗:20대 왕, 재위기간:1197-1204) 때 흥위위 보승별장을 역임하고 신호위 상장군에 추증되었으며 순흥현(順興縣)에 정착 세거(定着世居) 하면서 후손들이 광주 안씨(廣州安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관향(貫鄕)을 순흥(順興)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안향(安珦)

1243(고종 30) 1306(충렬왕 32). 고려시대의 명신(名臣) · 학자. 본관은 순흥 ( 順興 ). 초명은 유()였으나 뒤에 향()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이를 피해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해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밀직부사 부()의 아들로 흥주(興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강주 우씨(剛州禹氏)로 예빈승(禮賓丞) 성윤(成允)의 딸이다.

1260(원종 1) 문과에 급제해 교서랑 ( 校書郎 )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해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다. 그 뒤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 · 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 ( 同知貢擧 )가 되었다.

고려는 충렬왕대에 와서는 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변경되었다. 원나라는 정동행성 ( 征東行省 )을 고려에 두었는데, 1289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의 원외랑 ( 員外郎 )을 제수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이듬해 돌아왔다.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 ( 合浦 )에 출진했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 해 12월에 지밀직사사,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 ( 精舍 )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해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해 그는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 (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다.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 ( 壁上三韓三重大匡 )이 되었다.

1303년 국학학정 (國學學正) 김문정 ( 金文鼎 )을 중국 강남(江南 :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 ( 祭器 ) · 악기 ( 樂器 ) 및 육경(六經) · 제자(諸子) · 사서(史書) · 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한 왕에게 청해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 7품 이하는 포()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 ( 養賢庫 )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 ( 贍學錢 )을 마련해 박사 ( 博士 )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했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같은 해 6월에 대성전 ( 大成殿 )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 紐 ) · 이진(李 山 )을 천거해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306912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1318(충숙왕 5)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해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 ( 周世鵬 )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 ( 祠宇 )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 ( 白鹿洞書院 )을 모방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곳에 세웠다. 1549(명종 4) 풍기군수 이황 ( 李滉 )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 ( 紹修書院 ) ’ 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43(인조 21)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이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의 주자학의 보편화와 주자서의 유포 등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오가며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제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유학이 크게 일어난 것으로 보아도, 그를 우리 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한번은 그가 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문묘에 참배할 때에, 그곳의 학관(學官)동국 ( 東國 )에도 성묘(聖廟 : 文廟)가 있소? ” 하고 묻자, 그는 우리 나라도 중국과 똑같은 성묘가 있소. ” 하고 답했다 한다. 또한 그들과 문답하는 가운데 그가 주자학에 밝은 것을 안 그곳의 학관들이 동방의 주자 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주자학이 성행한 당시 남송(南宋)의 사정이 원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던 때라면, 당시 고려 후기의 시대 상황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무신 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때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의 정신, 그리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 ( 修養論 ) 등의 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학교 재건과 인재 양성을 통해 이룩하려 하였다. 그가 당시 고려의 시대 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 · 역사적 배경을 의식, 당시 고려의 위기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제반 교육적 활동을 전개했다면, 그를 단순하고 소극적 의미의 주자학 전래자로 보기보다는, 적극적 의미에서 주자학 수용자 로 유학사(儒學史) 내지는 교육사적인 위치 설정을 해도 좋을 것이다.

조선조의 주세붕도 죽계지서 竹溪志序 에서 고려의 사신(史臣)은 주자학에서 말하는 도()라든가 이() 따위의 말을 몰랐기 때문에 그의 공적은 말할 수 있어도 그의 학문을 밝혀낼 줄은 몰랐다. 그리하여 나는 고려사 를 읽을 때마다 안문성공전(安文成公傳)에 이르면 탄식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 … (중략) … … 역사는 그가 섬학전을 설치하고, 사후 문묘에 배향된 사실만을 들먹이는데, 식견의 비루함이 이와 같다. ” 고 말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안우기(安于器)

1265(원흥6)1329(충숙왕 16).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허중(虛中), 호는 죽옥(竹屋). 아버지는 첨의중찬 ( 僉議中贊 )을 지낸 향()이다.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1301(충렬왕 27)에 국학좨주(國學祭酒)로 최응 ( 崔凝 )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다.

1304년 우부승지, 이듬해 밀직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314(충숙왕 1) 지밀직(知密直)으로 박사 유연(柳衍) 등이 새로 구입한 경적(經籍) 1800권을 검열하였다. 1316년 밀직부사 겸 대사헌에서 파직되고, 후임으로 조후(趙珝)가 임명되었다.

그는 공망(公望)은 있었으나 안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식자들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일찍이 합포 ( 合浦 )에 출진(出鎭)하였을 때 청렴과 재간으로 칭찬이 있었다. 1329년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로 별세하였다. 순흥의 용연사(龍淵祠)에 봉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안원(安瑗)

1346(충목왕 2)1411(태종 1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순흥 ( 順興 ). 초명은 정(). 고려 말의 유학자 향()5대손이며, 아버지는 정당문학 원숭(元崇)이다. 1374(공민왕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공조전서를 지냈다.

1390(공양왕 2) 국왕이 천도하려고 하자 이는 술사(術士)들의 망령된 행위라고 반대하여 중지시켰다. 이성계 ( 李成桂 )가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건국 후에는 정치 참여를 거부하니, 이로써 반대파의 사람들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강제로 구도(舊都)의 관리를 맡기니 유후(留後)의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그 뒤 태조가 형조전서를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즉위하여 몸소 찾아가 간청하여 벼슬에 나아가니, 1401(태종 1)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서 사은사 ( 謝恩使 )가 되어 명나라에 건너가서 대학연의 大學衍義·통감집람 通鑑集覽등의 서책을 구해왔다.

그 뒤 1404년 경상도도관찰사를 지내고 1407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태종의 밀명을 받고 외척으로서 횡포를 부리던 민무구 ( 閔無咎 ) 형제를 탄핵하여 외방으로 유배시켰다. 이어서 판한성부사·개성유후를 역임하고 병사하였다. 위인이 근면성실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였다. 시호는 경질 ( 景質 )이다.

 

안축(安軸)

1287(충렬왕 13) 1348(충목왕 4). 고려 말의 문신.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할아버지는 호장 희서(希 償 ), 아버지는 석()이며, 어머니는 검교 군기감 안성기(安成器)의 딸이다.

안축은 고향 순흥의 죽계(竹溪 : 지금의 豊基)에서 세력기반을 가지고 중앙에 진출한 신흥유학자층의 한 사람으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금주사록(金州司錄) · 사헌규정(司憲糾正) · 단양부주부(丹陽府注簿)를 지내고, 1324(충숙왕 11)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그곳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서 성균악정(成均樂正) ·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를 거쳐,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존무사(江原道存撫使)로 파견되었다. 이 때 관동와주 關東瓦注 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충군애민(忠君愛民)의 뜻이 담겨 있다.

1332(충숙왕 복위 1)에 판전교지전법사(判典校知典法事)에서 파면당하였다가 전법판서(典法判書)로 복직되었으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판서 · 감찰대부(監察大夫) 등에 등용되고, 이어 교검교평리(校檢校評理)로서 상주목사를 지냈다.

1344(충목왕 즉위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정당문학 ( 政堂文學 )을 거쳐 다음해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차례로 지냈다. 1347년에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 ( 量田 ) 행정에 참여하였다.

이 때 안축은 감춘추관사 ( 監春秋館事 )로 민지 ( 閔漬 )가 지은 편년강목 編年綱目 을 이제현 ( 李齊賢 ) 등과 개찬(改撰)하였고, 또 충렬 · 충선 · 충숙 3()의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한편, 경기체가인 관동별곡 關東別曲 죽계별곡 竹溪別曲 을 지어 문명이 높았다. 1347년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졌다. 순흥의 소수서원 ( 紹修書院 )에 제향(祭享)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근재집 謹齋集 이 있다.

 

안보(安輔)

1302(충렬왕 28)1357(공민왕 6).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흥녕(興寧 : 順興), 자는 원지(員之). ()의 아들이며,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의 아우이다.

1320(충숙왕 7) 문과에 급제, 광주사록(廣州司錄)에 임명되고, 다시 춘추관수찬(春秋館修撰)을 거쳐 편수관 ( 編修官 )을 역임하였다.

1344(충목왕 즉위년)에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요양행중서성조마 겸 승발가각고(遼陽行中書省照磨兼承發架閣庫)로 있다가 노모를 위해 귀국하였다. 이해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이듬해 교주도안렴사(交州道按廉使)를 역임하였다.

그 뒤 우대언 겸 집의(右代言兼執義)를 거쳐 충정왕 때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352년 밀직제학이 되고, 이어 감찰대부제조전선사(監察大夫提調銓選事)를 지냈다. 1355년 밀직제학으로 동지공거 ( 同知貢擧 )가 되어 지공거 이공수 ( 李公遂 )와 함께 진사를 시취하였으며, 이해 정당문학 ( 政堂文學 )에 올랐다.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사직하고자 하자 고향인 흥녕에 가까운 동경유수(東京留守)를 제수받았다. 항상 청렴한 생활을 하였으며, 형인 축과 함께 안향 ( 安珦 )을 제향한 소수서원 ( 紹修書院 )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안종원(安宗源)

1325(충숙왕 12)1394(태조 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사청(嗣淸), 호는 쌍청당(雙淸堂). 아버지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이다. 1341(충혜왕 2) 과거에 급제, 충목왕 때 사한(史翰)으로 선임되었다. 임기가 차서 승진, 전보될 즈음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고 직위가 낮아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안축은 이 소식을 듣고 가문에 인물이 났다며 기뻐하였다. 1년 뒤에 삼사도사에 임명되었고, 공민왕 초에 전법정랑이 되었다. 이 때 많은 소송사건을 법에 따라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시어사 ( 侍御史 )를 거쳐 양광도안렴사로 있을 때 홍건적의 난을 피해 내려온 공민왕을 충주에서 맞았다.

왕이 다시 음죽 ( 陰竹 )으로 옮기자 관리와 백성이 다 도망을 가 왕을 접대할 수 없게 되자, 문책을 당해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전법총랑(典法摠郎)에 승진되었다. 그 무렵 신돈 ( 辛旽 )에게 아부하는 사대부가 많았는데,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참소를 당해 강릉부사로 좌천되었지만 그 곳에서 선정을 펼쳐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제사지냈다.

78년을 한거한 뒤 신돈이 주살된 후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우왕 초에 좌사의대부 유순(柳珣) 외에 다섯 사람과 도당 ( 都堂 )에 글을 올려 환관의 폐단을 논했으나, 재상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균관대사성·우상시(右常侍)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했다가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된 뒤, 흥녕군(興寧君)에 피봉되었다. 이 무렵 공민왕 때부터 환관으로 있던 김현 ( 金玄 )이 내사(內事)를 잘 정돈하지 못한다고 논박해, 김현은 회덕현에 유배되었다. 또한 환관의 수를 10명 내로 줄여서 국정의 문란을 막아야 한다고 소 올렸다.

또 명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사행(使行)을 기화로 금··말 또는 포목들을 밀반출해 장사하는 것을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 1382(우왕 8) 순흥군(順興君)으로 개봉(改封)되고 다시 공신호를 받았으며 정당문학 ( 政堂文學 )이 되었다.

최영 ( 崔瑩 )이 탐관과 권신들을 숙청할 즈음에, 청렴근직한 그를 문하찬성사로 기용, 관리의 인사권을 맡겼으나 곧 사임하였다. 그 뒤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이 되고, 조선조에 와서는 판문하부사가 되었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안경공(安景恭)

1347(충목왕 3) 1421(세종 3). 고려 말 조선 초의 관인.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손보(遜甫). 할아버지는 충목왕 때 찬성사 ( 贊成事 )를 지낸 축()이고, 아버지는 조선 건국에 참여해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오른 종원(宗源)이며, 어머니는 우상시(右常侍) 김휘남(金輝南)의 딸이다.

1365(공민왕 14) 국자감시 ( 國子監試 )에 합격하고 산원 ( 散員 ) · 낭장 겸 사헌규정(郎將兼司憲糾正)을 거친 뒤 1376(우왕 2)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로서 문과에 급제하였다. 계속해서 전리좌랑(典理佐郎) · 전법좌랑(典法佐郎) · 사헌지평(司憲持平) · 예의정랑(禮儀正郎)을 역임했으며, 1382년에는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로 있으면서 합주 ( 陜州 )에서 사노(私奴)들이 검대장군(劍大將軍) · 초군장군(抄軍將軍) · 산군장군(散軍將軍) 등을 칭하며 일으킨 난을 진압하였다.

삼사좌사(三司左使) · 판통례문사 진현관제학(判通禮門事進賢館提學) · 판전교시사 지제교 예의판서(判典校寺事知制敎禮儀判書)를 거쳐 전법판서가 되었고, 1390(공양왕 2) 정몽주 ( 鄭夢周 )가 윤이 ( 尹彛 ) · 이초(李初)의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을 두둔했다고 해 탄핵했다가 오히려 좌천되었다. 이듬 해에 예문관제학에 보임되고, 1392년 좌부대언 ( 左副代言 )을 거쳐 좌대언에 올랐다.

그 해에 조선 건국에 참여했으며, 곧 중추원도승지에 제수되고 개국 공신이 책봉될 때 3등공신이 되었다. 1393(태조 2)에는 사헌부대사헌 겸 도평의사사 보문각학사(司憲府大司憲兼都評議使司寶文閣學士)에 올랐고, 같은 해에 전라도관찰출척사(全羅道觀察黜陟使)로 나아갔으며 이듬 해에 흥녕군(興寧君)으로 봉해졌다.

1406(태종 6)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에 임명되었다가 곧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옮겼으며, 1410년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가 되었다. 이듬 해에 정탁 ( 鄭擢 ) · 유창 ( 劉敞 ) · 조견(趙 羌 ) · 한상경 ( 韓尙敬 ) · 조온 ( 趙溫 ) 등 개국 공신들과 더불어 1398(태조 7)의 왕자의 난 때 주살된 정도전 ( 鄭道傳 )과 남은 ( 南誾 )의 죄를 감해 줄 것을 요청했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1416년 보국숭록대부 집현전대제학(輔國崇祿大夫集賢殿大提學)에 특별 임명되고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으로 봉작되었다.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안순(安純)

1371(공민왕 20) 1440(세종 2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현지(顯之). 고려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역임한 종원(宗源)이고, 아버지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경공(景恭)이며, 어머니는 정당문학 ( 政堂文學 ) 정사도 ( 鄭思道 )의 딸이고, 부인은 정당문학 정공권 ( 鄭公權 )의 딸이다.

1380(우왕 6) 10세의 나이에 음보로 행랑도감판관(行廊都監判官)에 임명되었으며, 1383년 진사시에, 138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389년에는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390(공양왕 2)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었으며, 1392(태조 1) 조선이 건국되자 사재주부(司宰注簿)로 발탁되었다.

1393년에 사헌감찰, 이듬해에 좌습유 겸 지제교(左拾遺兼知製敎)로 승진하였다. 1396년 김해판관으로 좌천된 적도 있으나 1397년에 예조좌랑 세자우시직(世子右侍直)으로서 중앙 관리로 복귀하였다. 1398년 여름에 강원도도사가 되었다가 이 해 가을에 사헌잡단(司憲雜端)으로 다시 중앙에 복귀하였다.

그가 사헌잡단으로 재직할 때 궁녀 한 명이 죄를 범하자, 태조는 당시 대사헌이던 조박 ( 趙璞 )에게 그 궁녀를 처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조박은 안순에게 곧 처형할 것을 명했으나, 그는 사헌부는 형관이 아니며, 더구나 그 사람의 죄가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처형할 수는 없다. ” 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조박은 그에게 명령대로 할 것을 요구했으나, “ 사람은 한번 죽으면 그만인데 극형으로 처리할 수 없으니 우선 유사 ( 有司 )에 명해 심문부터 해야한다. ” 고 주장하였다. 이 일화가 암시하듯이 그는 강직한 인물이었다.

1401(태종 1) 병조정랑 겸형조도관, 1403년 겸사평부경력(兼司平府經歷) · 장령 ( 掌令 )을 거쳐, 1407년 우부대언 ( 右副代言 ), 1409년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 경상도관찰사, 1411년 좌군총제(左軍摠制) · 집현전제학, 1414년 충청도관찰사, 1419(세종 1) 호조참판으로서 정조사 ( 正朝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1420년 공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423년 함길도도관찰사에 이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 해 호조판서, 1432년 판중추원사 겸판호조사(判中樞院事兼判戶曹事), 1435년 의정부찬성사를 거쳐, 1437년 충청도의 기근을 수습하기 위한 도순문진휼사(都巡問賑恤使)로 임명되어 잘 수습한 공로로 숭정대부에 올랐다.

그는 오랫동안 호조판서 또는 판호조사를 겸하면서 국가의 전곡(錢穀)을 관장했는데, 경비 출납에서 추호도 틀림없이 정확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수많은 관직을 역임했지만 특히 국가의 재정을 책임 맡은 직에서 가장 공로를 쌓았던 것이다.

1439년에 신병으로 금천별서(衿川別墅)에 은퇴했다가 이듬해에 죽었다. 저술로는 근재집 謹齋集 부록에 유고가 실려 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안숭선(安崇善)

1392(태조 1) 1452(문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중지(仲止), 호는 옹재(雍齋). 고조부는 도첨의찬성사 축()으로, 증조부는 판문하부사 종원(宗源)이고, 할아버지는 조선의 개국공신 경공(景恭), 아버지는 판중추원사 순()이고, 어머니는 정추 ( 鄭樞 )의 딸이다. 부인은 송씨로 판전농시사 천우(千祐)의 딸이다.

1411(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5년 음보로 계성전직(啓聖殿直)에 임명되었으며, 1418년 사헌감찰에 이르렀다. 1420(세종 2)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지평 ( 持平 )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이조전랑, 1426년 장령 ( 掌令 )이 되었다.

이 때 사헌부에서 예조참판 이명덕 ( 李明德 )을 몇 차례에 걸쳐 탄핵했는데 그가 앞장을 섰다. 이 일로 세종의 뜻에 거슬려 좌천되었다가 곧 집의 ( 執義 )에 임명되었다. 1429년 대호군으로 승진해 함녕군 인( 歟 寧君 婢 : 세종의 동생으로 처음 받은 봉군호는 景寧君)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사행은 명나라에서 과다하게 요구하는 금은(金銀)의 양을 감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귀국해 곧 동부대언(同副代言)에 발탁되었고, 1433년에 지신사 ( 知申事 )가 되었다. 그 뒤 14373월 대사헌으로 승진할 때까지 승지로 있었다.

1433년 파저강(婆猪江)의 야인 정벌 때 세종의 정책을 적극 추진, 이로 인해 세종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그 뒤 그는 조정의 인사 행정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 사관의 평에 "겸판이조사(兼判吏曹事) 맹사성 ( 孟思誠 )은 착하기는 하지만 결단성이 없고 이조판서 신개 ( 申槪 )는 그저 남의 의견을 따르기만 해 모든 인사 행정을 안숭선이 좌우하였다."고 한 것은 당시의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인사 행정에 승지의 법제외적 권한이 크게 작용하자 비판이 일어났다. 이러한 비판은 자연히 안숭선 개인에게 집중되었으며, 나아가 승지의 인사 행정과 관계되는 업무를 규제하려는 방향으로까지 전개되었다. 결국 14373월 안숭선은 대사헌으로 전보되고, 5개월 후에는 승지들의 전주권(銓注權)을 크게 제약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1443년 형조판서, 1444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지중추원사 · 집현전대제학, 1445년 병조판서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 수찬에 참여했고, 1448년 병조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이 때 정실 인사가 문제되어 진천현에 부처되었다가 풀려 나왔다.

1450(문종 즉위년) 참찬을 거쳐, 좌참찬이 되고 이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근재집 謹齋集 부록에 유고가 전한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안천보(安天保)

1339(충숙왕 복위 8)1425(세종 7).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순흥 ( 順興 ). 순흥안씨의 시조인 보승별장 자미(子美)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대제학 문개(文凱)이고, 아버지는 순흥군(順興君) 천선(天善)이다. 세종 비 소헌왕후 ( 昭憲王后 )의 외조부가 된다. 소헌왕후는 어려서부터 외가인 그의 집에서 자라 왕비가 되었다.

그는 1362(공민왕 11)에 별장에 이어 전객부령(典客副令군기시윤(軍器寺尹판사복시사·의덕부좌사윤(懿德府左司尹판종부시사 ( 判宗簿寺事 )를 역임하였다. 그 뒤 공부전서에 올랐으나 곧 벼슬을 면직당하고 가야금과 책을 벗삼아 16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였다. 1408(태종 8)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에 등용되었다.

1409년 검교참찬(檢校參贊)이 되고 곧이어 검교찬성(檢校贊成)에 올랐다. 세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어 벼슬 길에 물러났으나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그는 마음이 충직하였으며 의친(懿親 : 소헌왕후의 외조부)이 되어서는 더욱 행실을 삼가고 신중히 하여 교만함이 없었다 한다. 세종이 예관 ( 禮官 )을 보내 제문과 제전 20결을 하사하였다. 시호는 소의(昭懿)이다.

 

안침(安琛)

1445(세종 27) 1515(중종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 ( 順興 )이다. 자는 자진(子珍)이다. 호는 죽창(竹窓) · 죽제(竹齊)이다. 종약(宗約)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증 이조참판 구()이다. 아버지는 부윤 지귀(知歸)이며, 어머니는 형조참판 박이창(朴以昌)의 딸이다.

1462(세조 8) 중형 선()과 함께 생원 ·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다 1466년 왕이 강원도에 행차해 시행한 고성별시문과(高城別試文科)2등으로 급제하였다 정자 ( 正字 ) · 사록 ( 司錄 ) ·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471(성종 2) 신설된 예문관에 당대의 명사로 뽑혀 등용되었다.

부수찬 ( 副修撰 ) · 정언 ( 正言 ) · 이조정랑 · 교리 ( 校理 ) · 응교 ( 應敎 ) · 장령 ( 掌令 ) 등을 거쳐, 1481년 성균관사성이 되었다. 한때 임사홍 ( 任士洪 )의 간사함을 폭로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임사홍이 물러난 뒤에 다시 등용되어 군기시정(軍器寺正) · 부제학 · 동부승지 · 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487년 양주목사로 나갔다가 1493년 이조참의를 거쳐, 지중추부사로서 천추사 ( 千秋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인 1494년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으로 부총관을 겸하였다. 이어서 동지춘추관사 ( 同知春秋館事 )가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8(연산군 4)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 해 한성부우윤 ·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500년 경상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1502년 호조참판 겸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506년 평안도관찰사로 있다가 중종반정으로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14(중종 9) 특별히 공조판서에 발탁되었다가 바로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필법은 송설체(松雪體)로서 해서에 뛰어났다. 영의정 유순 ( 柳洵 ) · 이손 ( 李蓀 ) 등과 교우가 깊었다. 그의 필적으로는 광주의 밀성군침비 密城君琛碑 · 좌찬성한계희비 左贊成韓繼禧碑 와 시흥의 월성군이철견비 月城君李鐵堅碑 가 있다. 시호는 공평(恭平)이다.

 

안당(安塘)

1461(세조 7) 1521(중종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언보(彦寶), 호는 영모당(永慕堂). 서울 출신. 해주목사 종약(從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찬성 경()이고, 아버지는 사예인 돈후(敦厚)이다. 어머니는 사예(司藝) 박융(朴融)의 딸이다. 처겸(處謙) · 처함(處 歟 ) · 처근(處謹) 형제의 아버지이다.

1480(성종 11)에 생원이 되고, 이듬해 1481(성종 12)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성 ( 司成 )을 거쳤다. 연산군 때는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96(연산군 2)에 장령 ( 掌令 ), 1506(중종 1)에 연산군이 폐지했던 사간원이 부활되면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507년 정난공신 ( 定難功臣 ) 3등에 책록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0812월에 순흥군(順興君)으로 봉작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을 거쳐 형조 · 병조참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1411월에 호조판서, 1515년에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구폐를 혁신하고 분경(奔競 : 세가 등에게 하는 이권 운동)을 금지시켰으며, 관리 등용에 있어 순자법(循資法 : 근무 기간에 따라 차례로 승진시키는 제도)에 따르지 말고 어진 인재를 발탁해서 쓸 것을 주장, 김안국 ( 金安國 ) · 김정국(金正國) · 김식 ( 金湜 ) · 조광조 ( 趙光祖 ) · 박훈 ( 朴薰 ) · 김대유(金大有) · 반석평(藩碩枰) · 송흠 ( 宋欽 ) 등을 탁용하거나 천거하였다.

같은 해 8월 박상 ( 朴祥 ) · 김정(金淨) 등이 중종의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다가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구언(求言) 해놓고, 죄를 주는 것은 언로를 막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극구 변호하였다. 이 일로 자신도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지만, 사림으로부터 높이 추앙받게 되었다.

1516년에 직을 바꾸어줄 것을 청해 윤허받았으나 다시 다음 해에 호조판서로 기용되고, 1518년에 우찬성이 되었다가 그 해 5월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 우의정 임명에서 김전 ( 金詮 )과 경합했으나 사림 계열의 지지로 그가 제수받게 되었다.

이 때 소격서의 혁파 등을 계청 (啓請)했고, 1519년 정국공신 ( 靖國功臣 )의 삭훈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극구 찬성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 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영의정 정광필 ( 鄭光弼 )과 함께 조광조 등을 변호하여 구원하고자 하다가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좌의정이 되었으나 대간으로부터 계속 탄핵받았으며, 더욱 현량과 ( 賢良科 ) 설치를 처음 주장한 사람으로서, 세 아들을 모두 천거되게 했다는 허물까지 쓰고 기묘당인의 우익으로 배척당하였다. 이 해 12월에 파직당했다가 곧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다시 대간으로부터 고신 ( 告身 )을 환수시킬 것을 요청하는 등의 탄핵을 받았다.

1521년 아들 처겸이 처가에서 종실 시산부정(詩山副正) 이정숙(李正叔), 권전(權 愈 ) 등과 함께 국왕의 측근에 있는 간신을 제거하여 국세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을 나눈 것이 그만 송사련 ( 宋祀連 )에 의해 고변당하였다.

이에 남곤 ( 南袞 ) · 심정 ( 沈貞 ) 등의 여러 대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는데, 그도 고하지 않은 죄목으로 연좌되어 교사형(絞死刑)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심정 등이 집의 ( 執義 ) 윤지형 ( 尹止衡 ) 등을 사주하여 일으킨 것으로 신사무옥이라 이른다. 1566(명종 21) 때 손자인 윤()의 상소에 의하여 누명이 벗겨지고 복관되었다.

행동이 신중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공정한 성품으로 옳은 일에 용감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사림을 정계에 등용시키고 그들을 옹호하여 사림에게 중망이 컸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안현(安玹)

1501(연산군 7)1560(명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중진(仲珍), 호는 설강(雪江). 병마절도사 인후(仁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습독관 ( 習讀官 ) ()이고, 아버지는 순필(舜弼)이며, 어머니는 군수 조강문(趙康門)의 딸이다.

1521(중종 16)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정자 ( 正字 )가 되고,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병조정랑을 거쳐 1533년 지평 ( 持平 )에 올랐다. 이로부터 삼사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언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민정을 순행하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의 직제학·부제학을 역임하면서 사필(史筆)의 공정과 사료 보관의 신중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의 사치 풍조를 엄히 단속하고 경비의 절감을 꾀해야 한다고 진언하기도 하였다.

1541년 진위사 ( 陳慰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우승지가 되고 중종이 말년에 숙환으로 고생할 때, 승지로서 의약에 밝아 항상 시종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이조참의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는데 항시 검약하고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아 청렴결백하기로 이름났다. 그 뒤 한성부우윤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을사사화 때는 윤원형 ( 尹元衡 ) 등에 협조해 그의 추천으로 1548(명종 3) 자헌대부 ( 資憲大夫 )에 오르고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곧이어 정헌대부 ( 正憲大夫 )로서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의 총책임을 맡았다. 이어 우참찬·호조판서를 거쳐 1553년에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 행정을 주관하였다.

한 때 인사 청탁을 들어주었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계속 승진해 다음 해 숭록대부 ( 崇祿大夫 )로서 우찬성에 올랐다. 이어 좌찬성·판돈녕부사를 지내고, 윤원형의 추천으로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을 겸하기도 하였다.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판중추부사를 거쳐 1558년 우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형제간에 우의가 돈독해 형을 마치 아버지처럼 공경하였다. 문장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여러 차례 당상 문신정시(堂上文臣庭試)에서 문명을 떨쳤고, 경연 ( 經筵 )에서의 강설은 세밀하고도 분명하였다.

중후하고 단정해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일을 맡으면 성심껏 수행하였다. 특히, 의술에 정통해 내외 의국(醫局)을 관리하였다. 뒤에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안처순(安處順)

1492(성종 23)1534(중종 2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순지(順之), 호는 기재(幾齋사재당(思齋堂). 남원 출신.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주부윤 지귀 (知歸)이고, 아버지는 전적 ( 典籍 ) ()이며, 어머니는 조양임씨(兆陽林氏) 능성현령(綾城縣令) 옥산 ( 玉山 )의 딸이다.

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부(仲父)인 판서 침()에게 의탁하여 성장하였다. 1513(중종 8)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정자 겸 경연전경(正字兼經筵典經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거쳐, 1517년 홍문관박사가 되었으나, 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하여 구례현감으로 제수되었다.

이 해 2월 구례현감으로 제수될 때 왕이 불러서 학교를 일으키라고 교시하자, 그는 근사록 近思錄을 간행, 보급하여 지방학교 진흥에 노력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에 이행 ( 李荇 )과 함께 연루되었다가 겨우 화를 면하고 은퇴하였다가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경성교수(鏡城敎授)를 지내고, 1533년 전적(典籍)으로 제배된 뒤 양현고주부(養賢庫主簿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에 이르렀다.

43세에 병을 얻어 남원부 흑성산 ( 黑城山 )에 안치됨으로써 일생을 마쳤다. 그의 성품은 암약(暗弱 : 소극적이고 약함)하여 강직성과 결단력이 부족하였으나 간특하지 않아 사화 때에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안정(安珽)

1494(성종 25) 1548(명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 서화가.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정연(挺然), 호는 죽창(竹窓). 전주부윤 지귀(知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판서 침()이고, 아버지는 병조좌랑 처선(處善)이고, 어머니는 최윤신(崔潤身)의 딸이다.

1516(중종 11)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19년에 현량과 ( 賢良科 )3등으로 급제하여 주서에 임명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 승지 공서린(孔瑞麟) · 윤자임 ( 尹自任 ), 한림 이구 ( 李構 )와 함께 입직을 하다 투옥, 이튿날 석방되었다. 뒤에 검열 · 주서 · 전적 · 양성현감(陽城縣監) 등을 지냈다. 1521년 신사무옥 때 송사련 ( 宋祀連 )이 바친 서기 ( 書記 )에 이름이 올라 있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곤양 ( 昆陽 )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에 사면되었고, 1545(인종 1) 천과(薦科)가 회복되어 전한에 제수되었다. 또다시 파과(罷科)된 뒤에 다시 양성현감을 제수받았으나 얼마 뒤 관직을 물러났다. 스스로 죽창이라 호하고 거문고와 글 · 화초 등을 즐겼다. 특히, 그림에 뛰어났으며 매화와 대나무를 잘 그렸다.

 

안자유(安自裕)

1517(중종 12)1588(선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계홍(季弘). 좌참찬 숭선(崇善)의 현손이며,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석(友晳)이고, 아버지는 임()이며, 어머니는 장령 ( 掌令 ) 김영수(金永銖)의 딸이다.

가장 친하였던 교우 안명세(安命世)가 을사사화로 처형당하자, 10년 동안 은거, 절조를 지켰다. 1556(명종 1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주서 ( 注書 )가 되고, 1561년에 호조좌랑, 이듬해 병조좌랑· 지평 ( 持平 ), 1563년에 세자시강원사서(世子寺講院司書경기도도사가 되었다.

이듬해 병조정랑 등을 거쳐 헌납 ( 獻納 검상 ( 檢詳 사인 ( 舍人 ) 등을 역임하였다. 1567(선조 즉위년) 집의 ( 執義 )가 되고, 1571년 홍문관직제학으로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知製敎兼經筵侍講官)이 되었으며,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574년 좌부승지가 되고,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종계(宗系) 개정을 약속받았음을 알리었다. 1576년 황해도관찰사, 1583년 대사헌, 이듬해 공조판서, 1588년 지돈녕부사를 역임하였다. 공사를 분명히 하였고 청렴결백하여 주위의 친척들이 관직에 천거될 때마다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안위(安衛)

1563(명종 18)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대훈(大勳). 정여립 ( 鄭汝立 )5촌 조카이다. 1589(선조 22) 기축옥사 때 평안도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 무과에 급제, 찰방이 되었으며 이듬해 이항복 ( 李恒福 )의 천거로 거제현령이 되었다.

1594년 제2차 당항포해전 때 이순신 ( 李舜臣 )의 휘하에서 전부장(前部將)으로 공을 세웠으며, 15971월 부산의 왜군 화약고에 불을 질러 이를 폭파시켰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통제사 이순신의 지휘하에 김억기(金億棋)와 함께 벽파정(碧波亭) 앞 바다에서 왜선 20여 척을 격파, 선조로부터 무경칠서 武經七書 를 상으로 받았다.

이듬해 전라우수사가 되고 1601년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역적 정여립의 조카라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603년 공신도감에서 임진왜란 때의 전공자로서 선무공신 ( 宣武功臣 )을 뽑을 때 20명 가운데 들었다. 그 해 전라좌수사가 되었는데 방군징포(放軍徵布 : 군역을 면해주는 대가로 포를 받음)했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다시 파직당하였다.

1605년 충청수사로 재기용되고 이듬해 경상좌수사, 1612(광해군 4) 포도가대장(捕盜假大將 : 임시 포도대장)이 되었다. 이듬해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있던 중 동향인 진사 조덕홍(趙德弘) · 조응직(趙應 循 ) 등의 역모를 고했다가 무고임이 드러나 반좌(反坐 : 무고로 입힌 죄만큼 죄가 부여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곧 재기용되어 평안도 강변별장이 되고 1619년 평안도방어사, 1624(인조 2) 행사용(行司勇)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74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왕을 호종하기 위해 상경하다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중에 돌아왔다. 김제의 학당사(學堂祠)에 제향되었다.

 

안영(安瑛)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열사.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원서(元瑞). 남원 출신. 교리 ( 校理 ) 처순(處順)의 증손이다. 임진왜란 때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光州)에 있던 고경명 ( 高敬命 )이 창의기병(倡義起兵)하니, 옥과 ( 玉果 )의 유팽로 ( 柳彭老 )가 호응하여 모여든 의병 6,000여명을 거느리고 전주를 지나 여산 ( 礪山 )에 머물렀다.

적을 멸하고 서울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 충효를 다하려고 양대박 ( 梁大樸 )과 더불어 고경명 휘하에 들어갔다. 전라감사 이광 ( 李洸 )은 관군을 거느리고 금강까지 왔다가 갑자기 회군하였으나 고경명은 계속 북진하고 아들 종후(從厚)와 의논하여 은진 ( 恩津 )을 거쳐 이산 ( 尼山 )으로 향하려 하였는데, 적이 금산에 이미 들어갔음을 듣고 금산성 밖 와은평(臥隱坪)에 진을 쳤다.

적은 관군이 취약함을 알고 먼저 관군을 향하여 진격하니 영암군수 김성헌(金成憲)이 도망하고 전군이 흩어지자 적은 고경명군을 포위하고 공격해왔다.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으나 결국 싸움에 패하여 전군이 흩어졌다. 그가 고경명에게 후퇴하여 후일에 재건할 것을 종용하자, 고경명은 내가 마땅히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니 군()은 속히 자리를 떠나라 대답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억지로 고경명을 말에 태웠으나 기마에 서투른 고경명이 말에서 떨어져 말을 놓치자 자기의 말에 태우고 자신은 도보로 뒤를 따랐다. 적병이 핍박하자 유팽로와 더불어 대장 고경명을 몸으로써 막고 적과 싸우다 고경명과 그의 아들 종후, 유팽로와 함께 순국하였다.

 

안대중(安大重)

임란 때 남원(南原)에서 외병과 싸우다가 순절하여 가문의 명예를 높였다.

 

안병찬(安秉瓚)

1854(철종 5) 1929. 조선 말기의 의병. 본관은 순흥 ( 順興 ). 자는 치규(穉圭), 호는 규당(規堂). 일명 병찬(炳燦) · 한일선(韓一善). 충청남도 청양 출신. 창식(昌植)의 아들이다. 1894년 홍주의 교임(校任)으로 재직 중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초토사 ( 招討使 ) 이승우 ( 李勝宇 )와 함께 민요(民擾)를 평정하는 데 일익을 맡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기치를 올린 홍성에서 아버지와 김복한 ( 金福漢 ) · 이설(李 律 ) · 임한주 ( 林翰周 ) · 이근주(李根周) 등과 함께 홍주의진을 형성하여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동학농민운동 평정의 공으로 관찰사로 승진해 와 있던 이승우를 의병장으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오히려 배신당해 그를 비롯한 홍주칠의사(洪州七義士)가 모두 잡혀 10년 유배형을 받았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석방 후 홍릉주사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자신은 대권이 모두 일인에게 넘어갔으니 천 장의 상소, 만 장의 공문서가 무슨 소용이랴. ” 하면서 수천 명의 군사를 모아 1906년 합천(合川)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이미 왜병의 병참소가 사방에 널려 있고 일진회원이 곳곳에 있어 패전하였다.

그 해 223일 박창로(朴昌魯) 40여 명과 함께 잡혔다가 412일 풀려났다. 다시 의병을 모아 416일 민종식 ( 閔宗植 )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역을 맡았다. 1만여 명으로 구성된 홍주의진은 그 해 윤49일 적의 포위공격으로 성이 함락되고 82명 사망, 145명이 잡히고 그 중 80명이 경성으로 압송되는 참패를 당하였다.

자신은 간신히 피신했으나, 1907101일 아우 병림(炳琳) · 윤난수(尹蘭秀) · 이필한(李弼漢) · 조광희(趙光熙) 5명과 함께 홍주의진과 관련된 인물을 조사할 때 공주로 압송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서명사건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안승우(安承禹)

1865(고종2)1896. 조선 말기의 의병장.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下沙). 경기도 지평 출신. 종응(鍾應)의 아들이다. 유중교 ( 柳重敎 )의 문인이다. 유중교가 죽은 뒤 그 유집간행사업의 주체가 되기도 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리자 지평 선비 이춘영 ( 李春永 )과 함께 거의하였다. 군사를 제천으로 이동시키고 대장에 유인석(柳麟錫), 중군장에 이춘영을 추대하였다.

이춘영이 전사한 뒤 그 뒤를 이어 중군장이 되어 제천일대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제천 남산성전투에서 날씨가 좋지 않아 화승총에 불을 붙일 수 없는 상황에서 접전하다가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창호(安昌浩)

1878(고종 15)1938. 독립운동가·교육자.

생애 및 활동호는 도산(島山). 평안남도 강서 출신. 흥국(興國)의 셋째아들이다. 선대는 대대로 평양 동촌(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대동강 하류의 도롱섬으로 옮겨왔다.

8세까지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9세에서 14세까지는 강서군 심정리에 머물며 김현진(金鉉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이 때 서당 선배인 필대은(畢大殷)과 알게 되어 그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았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국력배양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상경하여 언더우드(Underwood,H.G.)가 경영하는 구세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게 되었다. 이 때 평양지회 결성식이 열린 평양의 쾌재정(快哉亭)에서 감사 조민희 ( 趙民熙 )와 수백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18조목의 쾌재(快哉)18조목의 부재(不哉)를 들어 정부와 관리를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 ( 李商在 윤치호 ( 尹致昊 이승만(李承晩) 등과 만민공동회 ( 萬民共同會 )를 개최하였으며,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 ( 漸進學校 )를 설립하였다. 점진공부와 수양을 계속하여 민족의 힘을 기른다는 교육목표를 설정하였으며, 초등과정의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190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하였다. 여기에서 야학을 개설, 회원들을 교육시키고 공립신보 共立新報를 발행하여 교포들의 생활향상 및 의식계몽에 힘썼다.

1905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귀국길에 일본 동경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우리 나라 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 ( 太極學會 )의 청년들을 만나 국내정세에 대한 지식을 얻고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귀국 후 1907년에 이갑 ( 李甲 양기탁 ( 梁起鐸 신채호 ( 申采浩 )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동지를 찾고 단합하여 국민운동의 역량을 축적하며, 각지에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청소년의 교육을 진흥시키고, 각종 상공업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富力)을 증진하게 한다는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 ( 大成學校 )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회관(太極會館)을 건립하였으며,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또한, 1909년에는 박중화(朴重華최남선 ( 崔南善 김좌진 ( 金佐鎭 이동녕 ( 李東寧 )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 및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910월에 있었던 안중근 ( 安重根 )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동성(山東省)에서 민족지도자들과 청도회의(靑島會議)를 열었다.

청도회의는 북만주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만들어 영농과 군사양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자금관계와 급진파의 반대로 실패하였으며, 이에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 ( 大韓人國民會 )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초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신한민보 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913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흥사단을 창설하여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대성학교·신민회·청년학우회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19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독립운동방략 작성, 연통제 ( 聯通制 ) 수립,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해 소집 등을 실행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취임한 지 2년째인 1921년에 임시정부 내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 실패하여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어 부의장에 취임하게 되었으나 공산당의 전략에 의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1924년에는 북중국 만주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理想村) 후보지를 탐사하고 난징에 동명학원 ( 東明學院 )을 설립하였다. 192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1926년 중국에 돌아와서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여 이상촌사업을 추진하였다.

1927년 길림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大獨立黨)의 결성을 토의하던 중 동지 200여 명과 함께 중국경찰에 감금되었다가 중국 내 사회여론이 비등하게 되어 20일만에 석방되었다.

1928년 상해에서 이동녕·이시영·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하였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으로 만주에서의 이상촌 계획을 단념하고 난징에서 토지를 매입하였다.

1932년 일본의 중국본토침략정책에 대응하여 독립운동근거지 건설계획을 재검토하던 중, 같은 해 4월 윤봉길 ( 尹奉吉 )의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되었다.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26개월만에 가출옥하여 지방순회 후 평안남도 대보산(大寶山) 송태산장(松苔山莊)에서 은거하였다.

19376월 동우회사건 (同友會事件)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중, 같은 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졸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중장을 받았다. 죽은 뒤 망우리에 안장하였다가 197311월 미국에 있던 부인 김혜련(金惠鍊)의 유해와 함께 도산공원 (島山公園)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교육사상안창호의 교육사상은 교육을 통하여 민족혁신을 이룩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민족혁신은 자아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자아혁신은 바로 인격혁신이라 보았다.

따라서, 그는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격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로 연결되며, 자기개조는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4대정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무실역행을 강조하였는데, ‘무실이란 참되기를 힘쓰자는 것이며 역행이란 힘써 행하자는 것이다. 무실은 개조의 내용이고 역행은 그것의 행동으로, 무실과 역행이 없이는 자기개조가 불가능함을 주장하였다.

개개인의 인격혁명으로서의 자아혁신은 곧 자기개조이며 자기개조가 곧 민족개조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는 주인정신(主人精神)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대성학교의 교훈을 주인정신으로 설정한 것도, 주체·독립·책임을 의미하는 주인정신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자기개조와 민족개조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교육사상은 학교건설과 흥사단운동을 통해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안창호는 점진학교·대성학교·동명학원 등 3개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이 가운데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은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에 있었다. 이것은 곧 설립자인 안창호의 교육이념이었다.

또한, 흥사단 창립 당시의 약법(約法)에 표시된 단()의 설립목적 조문을 보면 본단의 목적은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층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하고 덕··지 삼육(三育)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육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 전도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음이라.”고 하여, 정의돈수를 통하여 인격을 육성한다는 교육목적이 제시되고 있다.

한편, 교육방법상의 원리로는 성실성과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인생관과 세계관의 근본원리 및 인간이 믿고 의지해야 할 진리의 등불은 곧 성실이라 하였으며, 거짓없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정성과 진실을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실이야말로 자아혁신과 민족개조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적 원리라 보았다.

또한, 그는 공부하는 정신과 태도로 점진성을 강조하였다. 점진공부는 학문과 실천의 기본적인 태도로서, 자신의 생활은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개척하여 향상을 기하자는 것으로 이는 성실성과 함께 주요한 교육방법의 원리가 된다.

그의 이러한 짐진주의적 사고는 학교설립의 순서에도 나타나는데, 점진학교 설립 이후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점진적으로 대성하는 인물을 기른다는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안중근(安重根)

1879(고종 16) 1910. 조선 말기의 교육가 · 의병장 · 의사(義士). 본관은 순흥 ( 順興 ). 황해도 해주 출신. 할아버지는 진해현감 인수, 아버지 진사 태훈(泰勳, 泰勛)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1녀 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金亞麗)이다. 어려서는 응칠(應七)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응칠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해 자가 되었다.

6, 7세 때에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 곳의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사기류(史記類)를 읽었다. 또 틈만 나면 화승총을 메고 사냥해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6세가 되던 1894, 아버지가 감사 ( 監司 )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다음 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한때는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아서 많았다가 뒤에 만인계(萬人契 : 1,000명 이상이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 : 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교회 신자들과 함께 만인계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등 수완을 발휘하였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서 지면이 있는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1906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 곳에서 이범윤 ( 李範允 )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 · 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 · 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 ·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 ( 李相卨 ) · 이범석 ( 李範奭 )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 · 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32,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 · 엄인섭 · 황병길(黃丙吉)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 · 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 ( 李完用 )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 遠東報 대동공보 大東共報 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일명 連後) · 조도선 ( 曺道先 ) · 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1026,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관동도독부지방법원 원장 마나베(眞鎬十藏)의 주심으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자신을 일반 살인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했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郎)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과 태도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탄복하였다.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답변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적성(赤誠)에서 나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고 변론하였다.

언도 공판은 1910214일 오전 1030분에 개정되었고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정근(定根) · 공근(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 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 … …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라고 유언하였다.

326일 오전 10, 여순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되었으며,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

 

안익태(安益泰)

19061964. 지휘자·작곡가. 평양 출생. 6세 때 동리 예배당의 찬송가에 이끌려 음악수업을 시작하여 그 뒤 선교사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1914년 평양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트럼펫과 바이올린을 배우고, 1918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하여 첼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1919년에 3·1운동에 가담, 숭실중학교에서 퇴교당하고, 당시 교장인 마우리(Mowry,E.M.) 박사의 배려로 1921년 동경 세이소쿠중학교(正則中學校)에 음악 특기자로 입학하였다. 그 뒤 동경 구니다치음악학교(國立音樂學校)에서 첼로를 전공하여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계속하였는데, 당시 김원복(金元福홍성유(洪盛裕) 등과 함께 다녔다.

음악학교 예과에 입학한 뒤 여름방학 동안에는 국내에 돌아와 연주활동을 하는 등, 당시 국내 음악계에 서양음악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는 자극을 주었다. 평양에서 YMCA의 이상재 ( 李商在 조만식 ( 曺晩植 ) 등을 알게 되어 애국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1년 구니다치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서울 등지에서 독주회를 가졌는데, 이때의 연주 곡목은 하이든(Haydn,J.)의 첼로협주곡, 슈트라우스(Strauss,R.)의 첼로소나타 등이었다.

1932년 미국 신시내티음악학교로 유학하는 한편, 신시내티교향악단의 첼로주자로 입단하여 동양인 최초의 주자가 되었다. 그 뒤 필라델피아교향악단에도 입단하였으며, 신시내티·필라델피아 등지에서 첼로독주회를 가졌다. 1934년 유럽으로 가서 독일·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지휘 및 작곡을 공부하였으며, 헝가리 등지도 여행하며 수업하였다.

지금의 우리 애국가1936년에 작곡하였다. 2차세계대전 발발 후 독일·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며, 빈필·베를린필·로마교향악단·부다페스트교향악단을 지휘하고, 1945년 제2차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스페인 마요르카에 정착, 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런던·남미·미국 등의 교향악단에서 객원지휘하였다.

특히 1936년에 작곡한 애국가를 주제로 한 한국환상곡 韓國幻想曲등을 자작, 지휘하였다. 1959년에 귀국하여 KBS교향악단·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하고, 1962년에는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지휘하였으며, 그 뒤 제2회부터 제4회까지 국제음악제를 주도, 지휘하였다.

1964년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죽었다. 작품으로 강천성악 降天聲樂·한국환상곡, 첼로곡 한송이 흰백합화등을 남겼고, 작풍(作風)은 후기낭만주의적인 경향을 띠었다.

 

安昌浩(안창호) 선생의 일화.

 

800리 배움의 길

도산 안창호 선생이 젊을 때 배재학당에 입학하고자 면접시험을 보았는데, 그때 외국인 선교사가 물었다.
「자네는 어디서 왔는가?」
「평양에서 왔습니다.」
「여기서 평양까지 얼마쯤 되는가?」
「약 800리 쯤 됩니다.」

그러자 선교사는 이상하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럼 거기서 공부하지 왜 이렇게 먼 곳까지 왔는가?」
도산 안창호 선생은 선교사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선교사님은  교향에서 서울 까지 몇 리나 됩니까?」
「약 9만 리 쯤 되지.」
「9만 리 밖에서도 우리를 가르쳐 주시려 오셨는데, 겨우 800 리를 찾아오지 못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사는 그 말을 듣고 배우려는 열정으로 이글거리는 젊은 도산을 금방 좋아하게 되고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도산선생은 무사히 배재학당에 무난히 입학 할 수 있었다.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6

(),()

33

(),()

()

40

(),()

()

27

(),()

()

34

(),()

()

41

(),()

()

28

(),()

()

35

(),() ()

42

(),()

()

29

(),()

()

36

(),()

()

43

(),()

()

30

(),()

()

37

(),()

44

(),()

()

31

(),()

()

38

(),()

()

45

(),()

()

32

(),()

()

39

(),()

()

46

(),()

()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순흥안씨(順興安氏)는 남한(南韓)에 총 99,937가구, 417,5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385 함양 여.jpg 함양여씨(呂) 청남 14-08-29 3512
384 성주 여.jpg 성주여씨:성산여씨(呂) 청남 14-08-29 4050
383 영월 엄.jpg 영월엄씨(嚴) 청남 14-08-29 4907
382 함종 어.jpg 함종어씨(魚) 청남 14-08-29 3378
381 충주 어.jpg 충주어씨(魚) 청남 14-08-29 2438
380 태원양씨(襄) 청남 14-08-29 2025
379 천주 양.jpg 청주양씨(楊) 청남 14-08-29 3375
378 중화 양.jpg 중화양씨(楊) 청남 14-08-29 2670
377 안악 양.jpg 안악양씨(楊) 청남 14-08-29 2281
376 밀양 양.jpg 밀양양씨(楊) 청남 14-08-29 2589
375 남원 양.jpg 남원양씨(楊) 청남 14-08-29 3613
374 제주 양.jpg 제주양씨(梁) 청남 14-08-29 6193
373 남원 양.jpg 남원양씨(梁) 청남 14-08-29 4901
372 원평야씨(夜) 청남 14-08-29 2274
371 한양애씨(艾) 청남 14-08-29 2050
370 태원 안.jpg 태원안씨(安) 청남 14-08-29 2724
369 탐진 안.jpg 탐진안씨(安) 청남 14-08-29 3274
368 죽산 안신.jpg 죽산안씨-신(安) 청남 14-08-29 3773
367 죽산 안.jpg 죽산안씨-구(安) 청남 14-08-29 3610
순흥 안1.jpg 순흥안씨(安) 청남 14-08-29 5195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