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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죽산안씨-구(安)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죽산안씨-)

 

본관(本貫): 죽산(竹山)

시조(始祖): 안방준(安邦俊)

유래(由來):

 

죽산 안씨(竹山安氏)의 시조(始祖) 안방준(安邦俊)은 당()나라에서 동래(東來)해 온 이 원(李 瑗)의 아들 3형제 중 장남으로, 본래의 이름은 이지춘(李枝春)이었으나 두 아우와 함께 모반을 평정(平定)하여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졌고 안씨(安氏)의 성()을 하사(下賜)받아 방준(邦俊)으로 개명(改名)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방준을 시조로 받들고 죽산(竹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을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안국보(安國輔)

시조의 맏아들 국보(國輔)가 고려조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안국필(安國弼)

시조의 둘째 국필(國弼)은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여 죽산 안씨의 양대 인맥(人脈)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들의 후대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어 가문(家門)의 중흥을 다졌다.

 

안한평(安漢平)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거쳐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졌던 한평(漢平: 국보의 10세손)이 유명하다.

 

안사경(安社卿)

벽상공신(壁上功臣)으로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판호조사(判戶曹事)에 올라 죽산부원군(竹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안극인(安克仁)

?1383(우왕 9).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주(竹州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공민왕비 정비(定妃)의 아버지로 죽성군(竹城君)으로 봉군 ( 封君 ) 되었다. 할아버지는 판호조사(判戶曹事) 한평(漢平)이고, 아버지는 수문하시중 ( 守門下侍中 ) 사경(社卿)이다.

1347(충목왕 3) 정치도감 ( 整治都監 )의 도감관 ( 都監官 )이 되어 부정을 바로잡으려 노력하였으나, 원나라의 압력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363(공민왕 12) 동경도병마사(東京道兵馬使)를 거쳐 우상시(右常侍)를 역임하였다.

1366년 둘째딸이 공민왕의 비로 정비에 책봉되었고, 곧이어 동지밀직으로 승진되었으나, 1368년 첨의시중(僉議侍中) 유탁 ( 柳濯 )과 함께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 축조의 중지를 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강제로 사제(私第)에 물리침을 당하였다.

그 뒤 중대광우문관대제학(重大匡右文館大提學)에 승진하여 죽성군에 봉해졌고, 1377(우왕 3) 지공거 ( 知貢擧 )로서 국자감시 ( 國子監試 )를 관장하였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안만생(安晩生)

문하시랑(門下侍郞) 국필(國弼)의 후손에서는 그의 손자 만생(晩生)이 중서령(中書令)을 역임했다.

 

안영의(安令儀)

8세손 영의(令儀)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했다.

 

안홍상(安洪祥)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했다.

 

안맹담(安孟聃)

조선조(朝鮮朝)에서 찰리사(察理使) 숙로(叔老)의 아들 맹담(孟聃)이 세종(世宗)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혼인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가 연창군(延昌君)에 이어 연창위(延昌尉)로 개봉(改封)되고 세조(世祖) 등극에 공()을 세워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안초

1420(세종 2)1483(성종 1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 ( 竹山 ). 자는 자이(自邇).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이고, 아버지는 지고성군사(知高城郡事) 계인(季仁)이며, 어머니는 지용생(池龍生)의 딸이다. 1441(세종 23)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447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정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박사 ( 博士 )가 되었다.

1456(세조 2) 이조좌랑으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고, 뒤이어 이조정랑·경기도암행어사를 거쳐, 1467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형조참의가 되었다. 1476(성종 7) 행안동부사로 나갔으며, 그 뒤 동지중추부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안방경(安方慶)

1513(중종 8) 1569(선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 ( 竹山 ). 자는 선응(善應), 호는 구배헌(灸背軒).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자함(子 歟 )이고, 아버지는 순()이며, 어머니는 홍문관부제학 유진 ( 兪鎭 )의 딸이다.

1540(중종 35)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 예문관검열 · 대교 ( 待敎 ) · 봉교 ( 奉敎 ) 등을 거쳐, 1545(명종 즉위년) 이후 사헌부감찰 · 예조좌랑 · 함경도도사 · 영서도찰방(迎署道察訪) · 형조정랑 ·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 등을 역임하고 1550년 사예 ( 司藝 )인종실록 을 찬수하였고, 지평 ( 持平 ) · 경기도도사 · 남원부사를 거쳐, 1557년 사간을 지냈다.

1561년 이후 병으로 벼슬을 떠나 있다가 1564년 교리 ( 校理 ) · 동부승지를 거쳐 1565년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이 해에 문정왕후 ( 文定王后 )와의 불화로 외직에 나가 청홍도관찰사를 지냈고, 1568년 장례원판결사 · 영흥부사를 역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용인에 기거하면서 거처를 남록구배헌(南麓灸背軒)이라 하였다

 

안윤행(安允行)

1692(숙종 18)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 ( 竹山 ). 자는 성지(性之). 정숙(廷 炤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순()이고, 아버지는 목사 상원(相元)이며, 어머니는 심익(沈翼)의 딸이다.

1717(숙종 43) 생원시에 합격하고, 1740(영조 16)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46년에 정언 ( 正言 ) · 지평 ( 持平 ) 등을 거쳐 1747년에 헌납 ( 獻納 )으로 재임시에,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수금된 윤급 ( 尹汲 ) · 송영중 ( 宋瑩中 )의 석방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다시 관에 복귀하여 수찬 ( 修撰 ) · 교리 ( 校理 ) 등을 지내면서 잦은 직언으로 왕의 미움을 사게 되어 1751년에 다시 파직되었다.

2년 뒤에 부교리로 재등용되어 승지 등을 역임하고 1760년에는 울산부사로 나갔다. 그 이듬해에 대사간이 되어 영조에게 사도세자 ( 思悼世子 )의 진현(進見)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하다가 또 삭출되었다. 그 뒤 다시 대사간에 복귀되었으며 형조참판과 판서를 거쳐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안표(安杓)

1710(숙종 36)1773(영조4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 ( 竹山 ). 자는 정숙(定叔). 상억(相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적(允迪)이고, 아버지는 목사 종해(宗海)이며, 어머니는 윤하교(尹夏敎)의 딸이다. 한원진 ( 韓元震 )의 문인이다. 1754(영조 3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봉직하다가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고, 1763년에 헌납 ( 獻納 )이 되어 장령 ( 掌令 )을 거친 뒤 1764년에 사은사 ( 謝恩使 )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65년에 사간· 집의 ( 執義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는데, 마침 제주도에 기근이 들어 양리(良吏)를 뽑아 보내야 할 형편이었는바, 그는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친히 어명을 받고 가서 그 폐()를 없애고 화합 정치를 잘 하였다.

그러나 옥사(獄事)에 위반된 점이 있어 파직당하고 중앙으로 돌아오려고 하자, 그곳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어 1767년에 형조참의·대사간이 되었는 바 왕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조참(朝參 : 매월 정기적으로 임금에게 백관들이 문안을 드리고 정사를 아뢰는 일)을 행할 때 이에 불참한 위율(違律)로 해남현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개월 뒤 다시 복직되어 대사간·병조참의 등을 거쳐 여주목사를 지냈다. 그의 인품은 자신에 대해서 몹시 엄하였기 때문에 당시 파당을 이루던 시파 ( 時派 벽파 ( 僻派 )들이 감히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였으며, 그의 깨끗하고 신중한 행동에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안억(安檍)

종조(正祖) 때 감찰(監察)과 형조 참판을 지냄.

 

안광직(安光直)

1775(영조 51)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 ( 竹山 ). 자는 주백(周伯 혹은 胄伯). 서울 출신. 참판 진()5대손이며, 윤겸(允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걸(宗傑)이고, 아버지는 구( )이며, 어머니는 의병 김광두(金光斗)의 딸이다.

1805(순조 5) 춘당대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25년에 홍문록 ( 弘文錄 )에 올랐으며, 1827년 부시관(副試官)으로 있으면서 시험관리 소홀로 견파(譴罷)당하기도 하였다. 1828년 도당록(都堂錄)에 올라 장령 ( 掌令 )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832년 대사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었다. 1835(헌종 1)에는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 부사 ( 副使 )로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1841년 대사간이 되고 이어 의정부 우참찬 · 판의금부사를 역임하고 1854(철종 5)에는 예조판서가 되었다.

 

안희수(安喜壽)

철종(哲宗)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했다.

 

안경수

1853(철종 4) 1900. 조선 말기의 관료 · 정치가. 본관은 죽산 ( 竹山 ). 자는 성재(聖哉). 출신은 분명하지 않으나 서자였다. 개화에 눈을 떠 일본을 왕래하다가 1887(고종 24)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의 주사로 발탁되어 최초의 주일공사 민영준(閔泳駿)의 통역관이 되었다.

그러나 민영준의 돌연한 사임으로 3개월 만에 귀국하여 별군직 ( 別軍職 ) · 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 · 전환국방판(典 珤 局幇辦) 등을 지냈다. 이 시기에 일본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화약 생산을 위한 제약소(製藥所) 설립과 신식 화폐 발행에 주력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핵심적인 친일개화파관료로 등장하였다. 1차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에서는 우포도대장 겸 군국기무처회의원(右捕盜大將兼軍國機務處會議員), 2차 김홍집내각에서는 탁지부협판(度支部協辦)을 지내면서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18954월의 삼국간섭 이후 일본을 배격하고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아 경무사 ( 警務使 )와 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군부대신직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 친미 · 친러파가 을미사변에 대한 반동으로 일으킨 춘생문 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18962월 국왕의 아관파천으로 특지사면되었고 경무사와 중추원 일등의관직에 임명되었다. 독립협회의 창립에 참여해 초대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정부의 식산흥업정책에 따라 설립된 대조선저마제사회사 ( 大朝鮮苧麻製絲會社 )의 사장을 지냈다.

18987월 경무사를 지낸 김재풍(金在豊) · 이충구 ( 李忠求 ) 등과 더불어 추진하던 황제양위음모가 발각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망명정객 박영효 ( 朴泳孝 ) 일파와 합세하여 독립협회와의 제휴를 통한 정계 복귀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주선으로 19001월에 귀국하여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자수하였다. 그러나 심한 고문을 받은 뒤 이준용 역모사건(李埈鎔逆謀事件, 1894)을 고하지 않은 죄 및 황제양위 미수사건(1898)에 관련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07년에 신원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毅愍)이다.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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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남한(南韓)에 총 12,471가구, 53,5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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