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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죽산안씨-신(安)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죽산안씨-)

 

본관(本貫): 죽산(竹山)

시조(始祖): 안원형(安元衡)

유래(由來):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광주군(廣州君) 안방걸(安邦桀)17세손이며 순흥 안씨(順興安氏)의 시조(始祖) 안자미(安子美)7세손인 안원형(安元衡)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대 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진 목()의 셋째 아들로, 1341(충혜왕 복위 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밀직사사(密直司使)를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후 벽상삼한 삼중대광보국(壁上三韓三重大匡輔國)에 올라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하면서 나라에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순흥 안씨에게 분적하여 죽산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을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안면(安勉)

시조 원형(元衡)의 아들 안면()1353(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과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고 대승상(大丞相)에 올라 흥녕군(興寧君)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안노생(安魯生)

생몰년 미상.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죽산 ( 竹山 ). 아버지는 면()이다. 1391(공양왕 3) 4월 군자소윤(軍資少尹)으로 서북면찰방별감(西北面察訪別監)이 되어 국경에서 성행하던 원나라와의 밀무역을 철저히 단속하여 범금자(犯禁者)가 없도록 하였다.

6월에는 문하사인 ( 門下舍人 )이 되었다. 강직하고 결백한 성품이 왕에게도 인정을 받아 이해 9월 세자가 명나라에 갈 때 수행원에 대한 검찰의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당시 수행원들은 수행을 기화로 밀무역을 하며 사욕을 채우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4월 병조총랑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몽주 ( 鄭夢周 )가 이방원 ( 李芳遠 )에게 피살될 때 그 일파로 몰려 파직되고 유배되었다

 

안정생(安珽生)

면의 아들 정생(珽生)이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여 가통을 지켰다.

 

안철손(安哲孫)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죽산 ( 竹山 ). 원형(元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면()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노생(魯生)이며, 부인은 좌정언(左正言) 최유종(崔有悰)의 딸이다. 1441(세종 23)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1455(세조 1)에 소윤 ( 少尹 )으로 삼등공신에 녹봉되었다.

그러나 박팽년 ( 朴彭年 )의 막객(幕客 : 따라 다니는 관원)으로 의심을 받아 처벌되어야 한다고 탄핵을 받았다. 1460년 충청전라도조전경차관(忠淸全羅道漕轉敬差官)이 되어 조선(漕船) 만드는 일을 매우 훌륭하게 하여 교기(交綺 : 두 종류의 실을 섞어서 짠 비단마장목(馬裝木 : 말을 꾸미는 데 쓰이는 비용의 무명) 등을 하사받을 정도로 세조로부터 우대를 받았다.

그 뒤 호조참의로 충청도도체찰부사(忠淸道都體察副使)가 되고 호조참판 행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를 지낼 때 도민(道民) 중 불만자들의 무고를 받기도 하였다. 세조의 국휼(國恤 : 국가의 상())중에 관기 광한아(廣寒兒)와 동침한 것이 불충이므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비호로 내금위장(內禁衛將)이 되었다

 

안신손(安信孫)

단종(端宗) 때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지냄.

 

안추조(安追祖)

추조(追祖)는 군수(郡守)를 역임.

 

안승(安勝)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안구(安矩)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역임하였다.

 

안양보(安良輔)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안충달(安忠達)

중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충달(忠達)은 창평 현감(昌平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안여근(安汝謹)

여근(汝謹)은 명종 때 무과에 올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를 지냈으며 선조조(宣祖朝)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군(倭軍)과 싸우다가 진주(晉州)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안축

중종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수륜(秀崙)의 아들 축은 병조와 호조의 좌랑(佐郞), 정언(正言), 지평(持平) 등을 거쳐 영광 군수(靈光郡守)를 지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파직되었다가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다시 등용되어 춘추관(春秋館)의 편수관(編修官)을 지냈다.

 

안언룡(安彦龍)

감찰(監察) 양보(良輔)의 손자 언룡(彦龍)은 태천 현감(泰川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현민(縣民)들이 그의 치적(治績)을 칭송하여 비()를 세웠다.

 

안방준(安邦俊)

1573(선조 6) 1654(효종 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죽산 ( 竹山 ).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 · 우산(牛山) · 빙호(氷壺).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중관(重寬)이며, 처는 경주 정씨로서 판관 승복(承復)의 딸이다. 중돈(重敦)에게 입양되었다. 보성 출신. 박광전(朴光前) · 박종정(朴宗挺)에게서 수학, 1591(선조 24) 파산(坡山)에 가서 성혼 ( 成渾 )의 문인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 때 이이첨 ( 李爾瞻 )이 그 명성을 듣고 기용하려 했으나 거절하였다.

1614(광해군 6) 보성 북쪽 우산(牛山)에 들어가 후진을 교육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교유가 깊던 공신 김류(金 濫 )에게 글을 보내 당쟁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여 공사의 구별을 분명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앞서 서인계 정철 ( 鄭澈 ) · 조헌 ( 趙憲 )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일찍부터 서인편에 서게 되었다. 일찍이 성리학에 전념, 호남 지방에서 명성을 떨쳤다. 지기(志氣)가 강확하고 절의를 숭상하여 정몽주 ( 鄭夢周 ) · 조헌을 가장 숭배, 이들의 호를 한자씩 빌어 자기의 호를 은봉이라 하였다.

인조 초에 동몽교관 ( 童蒙敎官 ) ·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학문에 전념하면서 정묘 ·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켰다. 조헌을 추모하여 항의신편 抗義新編 을 편찬한 바 있고, 서인의 이귀 ( 李貴 )는 이를 인간(印刊), 중외에 반사(頒賜)할 것을 인조에게 건의하였다.

인조 후반에 전생서주부 · 찰방 · 좌랑 등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거듭 상소하여 시정(時政)을 논했으나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내용이 많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좌의정 조익 ( 趙翼 )이 천거하여 지평 ( 持平 ) · 장령 ( 掌令 ) ·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효종 초 지방의 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벼슬에 등용되는 학식과 명망이 있는 선비)을 초치 등용하려 했을 때, 선우협(鮮于浹) · 최온(崔蘊) · 조극선 ( 趙克善 ) · 권시(權 魅 ) · 이유태 ( 李惟泰 ) 등과 함께 천거되었다. 1652(효종 3) 지평으로 있을 때 김자점 ( 金自點 )에게 보낸 왕복 서찰이 있다 하여 변명하는 상소를 하였다.

그 해 5월 효종에게 상소하여 대동법 ( 大同法 )을 반대하면서 김육 ( 金堉 )을 선조대의 유성룡 ( 柳成龍 )과 비유, 그를 비난하였다. 80평생을 주로 초야에서 보내면서 시종 성리학에 침잠했으나 학문적 경향과 처세 · 처신에 있어서 상기(尙氣 : 기를 숭상함)의 병폐가 있었다. 일찍이 정철 · 조헌 · 성혼 등 서인계 인사를 추종한 데서 정치적 성향은 서인편에 섰다.

인조반정공신인 김류 · 이귀와 비공신계인 성문준 ( 成文濬 ) · 송준길 ( 宋浚吉 ) 등과 친교가 있어 서인집권 하에서는 호남 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거듭 천거되었다. 보성의 대계서원 ( 大溪書院 ), 동복의 도원서원(道原書院), 능주의 도산사(道山祠)에 제향되었다.

1691(숙종 17) 호남인 정무서(鄭武瑞) 등의 소청으로 그의 사우 ( 祠宇 )가 한때 철거되었다. 그리고 정철과 함께 서인과 남인정권의 소장(消長)에 따라 포폄되기도 하였다. 그의 시문은 은봉전서 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편저로 항의신편 · 이대원전 李大源傳 · 호남의병록 湖南義兵錄 · 삼원기사 三寃記事 · 사우감계록 師友鑑戒錄 · 혼정편록 混定編錄 · 매환문답 買還問答 · 기묘유적노랄수사 己卯遺蹟老辣 珹 辭 등이 있다. 이러한 편저는 의병사 · 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안여지(安汝止)

효종(孝宗) 때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역임.

 

안민유(安敏儒)

숙종조(肅宗朝)에 현령(縣令)과 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지냄.

 

안절(安節)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안규홍(安圭洪)

1879(고종 16)1909.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죽산 ( 竹山 ). 별명은 계홍(桂洪안담살이·안진사. 자는 제원(濟元), 호는 담산(澹山). 전라남도 보성 출신. 아버지는 달환(達煥)이다. 매우 가난하여 머슴살이(담살이)로 편모를 봉양하였다.

일본의 내정 간섭이 점차 심화되고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켜 응징하기 위해 담살이 동지들과 모의하는 한편, 주인에게 거사할 자금으로 전곡포백(錢穀布帛)을 요구하였다. 또한, 보성의 우국지사인 참봉 안극(安極)의 묵계 아래 안극의 집에 침입해 무기와 가재를 몰수하고 점차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82월 관북 출신 강성인(姜性仁)이 이끄는 무장한 의병 수 십 명과 합세해 병력은 70명으로 불어났다. 먼저 보성 동소산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강성인의 민폐가 매우 심하자 그를 참형하고 군기를 엄히 하였다.

이로써 대오를 정비하고 의진을 구성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을 부장·참모장·선봉·좌우익부장·유격장·좌우부 참모·서기·군수장(軍需將)으로 편제했으며, 휘하에 염재보 ( 廉在輔 송기휴(宋基休이관회 ( 李貫會 송경회 ( 宋敬會 ) 등의 용장이 활약하였다.

19082월 일본군이 보성군 조성에서 벌교·순천을 연결하는 토벌진을 구성해 수색작전을 전개하자, 평소 이 일대의 산악지리를 자세히 파악해두어 험한 곳에 복병을 매복시켜두었다.

미도(米戶)와 히라이(平井)2개 부대가 골짜기 안으로 들어닥치자, 일제히 맹사격을 가하여 적군을 괴멸시킨 뒤 적의 무기와 서류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여 대원산으로 들어가 호군하였다. 이것이 파청대첩이다. 이에 일본군은 복수하고자 대원산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적지 않은 인명 피해만 입었다.

한편, 장경선(張京善)을 참모로 임명하고 병력을 증강하여 1908824일 진산에서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대첩을 거두었다. , 화약과 군량을 준비해 태세를 갖춘 뒤 1909325일 원봉에 주둔하고 있던 적을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진산대첩과 원봉대첩으로서 파청대첩과 더불어 보성의진의 3대 대첩이다.

보성 병치에서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유격장 안택환(安宅煥), 서기 임준현(任準鉉)이 전사하는 등 그 뒤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장흥 백사정 (白沙停)으로 후퇴하였다. 이 때 패전의 원인을 분석한 결과, 적에게 의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토왜(土倭)의 제거가 시급함을 깨닫고, 복내시장과 호곡 등지에서 토왜섬멸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의병·혈족을 통한 회유·협박 및 기만책으로 점차 의진 이탈자가 늘자, 19097월 일단 의진을 해산하였다.

그런데 같은 해 925일 귀향하던 중,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부하 염재보·정기찬(鄭基贊)과 함께 토미이시(富石)부대에 붙잡혀 광주에 수감, 그 뒤 대구로 옮겨진 뒤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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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신죽산 안씨(新竹山安氏)는 남한(南韓)에 총 685가구, 3,1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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