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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탐진안씨(安)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탐진안씨)

 

본관(本貫): 탐진(耽津)

시조(始祖): 안원린(安元璘)

유래(由來):

 

탐진 안씨(耽津安氏)는 순흥 안씨(順興安氏)에게 분적(分籍) 계통(系統)으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진 문숙공(文淑公) ()의 넷째 아들 안원린(安元璘)을 시조(始祖)로 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순흥(順興) ()씨에서 분적하고 탐진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고 한다.

 

가문의 중요 인물

 

안우(安祐)

? 1362(공민왕 11). 고려 후기의 장군. 본관은 탐진 ( 耽津 ).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지낸 원린(元璘)의 아들이다.

1352(공민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조일신 ( 趙日新 )의 난을 최영 ( 崔瑩 ) 등과 함께 평정하였다. 이듬 해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서 원나라에 방물과 황후 탄생일의 예물을 바치고 돌아왔다. 이어 전리판서(典理判書)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다.

1357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安州軍民萬戶府萬戶)를 겸임하였다. 이듬 해 원나라의 세력을 배후에 두고 세도를 부렸던 기철 ( 奇轍 )을 주살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홍건적이 침입해 의주 · 정주 등지가 함락되자 서북면부원수로서 이방실 ( 李芳實 ) 등과 함께 적을 대파하였다. 또한 소수의 기병으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철주에 이르러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1359년 홍건적의 잔여 무리를 쫓아 고선주(古宣州: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 이르러 수백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 추충절의정란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이어 참지정사를 거쳐, 다음 해 상원수가 되어 재차 침입해 온 홍건적을 박주 · 영변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가 되었으나 절령( 上 嶺)에서 패해 개성이 함락되었다. 1361년 총병관(摠兵官) 정세운 ( 鄭世雲 )의 지휘하에 이방실 · 김득배 ( 金得培 ) · 이성계 ( 李成桂 ) · 최영 · 안우경 ( 安遇慶 ) 등 여러 장수와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 참전했다.

적을 거의 섬멸하고 나머지 적까지 추격해 압록강 밖으로 몰아냈다. 이 때 재상 김용 ( 金鏞 )과 함께 전공을 세운 정세운을 시기해 죽였는데,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장군들을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소환하자 그곳으로 가던 중 중문 ( 中門 )에서 김용의 하수인에게 살해되었다.

 

안지(安止)

1377(우왕 3) 1464(세조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탐진(耽津 : 康津). 자는 자행 (子行), 호는 고은(皐隱). 아버지는 찬성 사종(士宗)이다. 1414(태종 14)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박사가 되고, 1416년 다시 문과중시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의 수찬 ( 修撰 ) · 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45(세종 27) 공조참판으로 권제(權 庶 ) · 정인지 ( 鄭麟趾 )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 를 지어 바쳤고,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정조사 ( 正朝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집현전부제학 · 이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필(史筆)의 일로 고신 ( 告身 )을 환수당하였다.

1455(세조 1)에 소환되어 지중추원사에 복관이 되고, 이어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세조가 즉위한 뒤 그를 불러 관작을 주니, 그 때 그의 나이 80세가 넘었는데도 강건하므로 세조가 기뻐하여 시를 지어 하사하였다.

그는 시를 지을 때 속된 말을 섞어서 빨리 잘 짓고, 짧은 서간에까지도 거의 시로 말뜻을 이끌어갔다. 그는 또 해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세종의 명으로 태종을 위하여 금자법화경 金字法華經 을 베꼈다. 뒤에 경산의 조곡서원(早谷書院)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안우(安遇)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탐진 ( 耽津 ). 자는 시숙(時叔), 호는 노계(蘆溪). 어려서 김종직 ( 金宗直 )에게 수업하였고, 김굉필 ( 金宏弼 ) · 남효온 ( 南孝溫 ) 등과 교제가 깊었다. 특히 남효온은 그의 절개와 지조를 높이 평가하여 동한(東漢)의 절의에 비기기도 하였다.

일찍이 향시 ( 鄕試 )에 뽑혀 회시(會試)에 응하려는데, 당시 사관(四館 : 성균관 · 예문관 · 승문원 · 교서관)에 있는 연소자들이 교만하고 방자하여 나이가 많은 자와 향생(鄕生)들을 매로 때리려고 하는 광경을 보고, 그가 이르기를 어찌 부모께 받은 몸을 지니고서 죄없이 스스로 훼손하면서 명리를 구하겠느냐. ” 하여 응시하지 않고 돌아섰다.

벼슬할 마음을 두지 않으면서부터 김종직과도 뜻이 맞지 않아 틈이 생겼다. 1518(중종 13) 경상도관찰사 김안국 ( 金安國 )의 천거를 받아 벼슬에 비로소 나아가 안음현감을 지냈다.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로서 중종에 인견되었을 때, 대학 의 성의(誠意) · 정심 ( 正心 )의 요체와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당시 지방사회의 교육문제와 관련해서, 지방의 교육이 불실한 이유에는 훈도의 자질이 깊이 관련되었음을 지적하여, 훈도에게도 사로계제(仕路階梯 : 벼슬길에 등용되는 순차)의 길을 마련하도록 건의하였다. 이미 연로한 까닭으로 경관(京官)에 제수되지 못하고 수령에 보임되었다. 효행으로 당대에 이름이 높았으며 초계 ( 草溪 )의 송원서원 ( 松原書院 )에 제향되었다.

 

안극가(安克家)

1547(명종 2) 1614(광해군 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탐진 ( 耽津 ). 자는 의지(宜之), 호는 뇌곡(磊谷). 아버지는 찰방 기()이며,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로 도사 지()의 딸이다. 이정 ( 李楨 )의 문인이다.

1591(선조 24) 45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9년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 1601년 선교랑 ( 宣敎郎 ) · 제용감 ( 濟用監 ) · 사옹원(司甕院) 등의 봉사, 1605년 삼가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권문세가와 파당에 치우침이 없이 충직과 실천을 지표로 삼아서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로 돌아와 호호정(浩浩亭)을 건립하여 경전을 연구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부형이 적병과 싸우다가 학살을 당함에 진중에 돌입하여 시신을 거두고 결사 대항하니 왜병이 그의 충효에 감복하여 마을 앞에 忠孝里(충효리) ’ 라는 세 글자를 써놓고 물러갔다고 한다. 초계 ( 草溪 )의 송원서원 ( 松原書院 )에 배향되었고, 저서인 뇌곡일고 탐진세고 에 수록되어 있다

 

안기종(安起宗)

1556(명종 11)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탐진 ( 耽津 ). 자는 응회(應會), 호는 지헌(止軒).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어 장사라는 칭찬을 들었다. 선비의 집안에 태어났으나 책을 읽는 것보다는 무술을 연마하는 데 주력하였다.

원래 총명한 기질인 데다가 한번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르는 끈기 때문에 문무가 겸전한 재목으로 성장하였다. 고을의 천거로 사옹원봉사에 제수되고 이어서 군자감판관이 되었다. 나라에 외환이 닥칠 것을 미리 내다보고 군수물자의 남용을 막고 경비를 절감하여 병기의 수선과 확보에 진력하였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병을 이끌고 홍의장군 곽재우 ( 郭再祐 )의 휘하로 들어가서 유곡(柳谷영천· 화왕산성 ( 火旺山城 ) 등지에서 적을 무찔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공행상 때 당쟁의 제물이 되어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원래 행상에는 뜻이 없었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진교육에만 힘썼다. 죽은 뒤에 논공행상에서 공적에 비하여 포상이 미약하다는 점이 인정되어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안용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다.

 

안효제(安孝濟)

효제(孝濟)는 한말(韓末)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안희제(安熙濟)

1885(고종 22) 1943. 독립운동가 · 실업가. 호는 백산 ( 白山 ). 경상남도 의령 출신. 21세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봄에 양정의숙 ( 養正義塾 ) 경제과로 전학해 24세에 졸업하였다.

1907년 동래의 구포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에 창남학교( 訟 南學校)를 창설하였다.

190910월 윤세복 ( 尹世復 ) · 서상일 ( 徐相日 ) · 신성모 ( 申性模 ) · 남형우 ( 南亨祐 ) · 박중화(朴重華) 80여 명의 동지들과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하며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였다.

1914년 부산에서 백산상회(白山商會)를 경영해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의 연락처를 제공하였다. 19193 ·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해서 각지에 배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 해에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 ( 白山貿易株式會社 )로 확대 개편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조달기관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해 다수의 애국청년학생들을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이러한 장학생들 중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5년에는 운영난에 빠진 중외일보를 인수해 중앙일보로 개칭하고 사장이 되어 일본의 총독정치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또한, 1927년 이시목(李時穆) 등과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해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뒤 다시 만주로 건너가 1931년 대종교 ( 大倧敎 )에 입교하였다.

1933년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에 발해농장을 세워 교포들의 생활 안정과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중국인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던 한국인 소작농 300여 호를 유치해 토지를 분배해주고 5년분할상환 조건으로 자작농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발해농장 안에 발해학교를 설립해 농민들과 그 자녀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해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대종교를 신봉해 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 · 교적간행회장(敎籍刊行會長)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 고유의 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다. 그러나 194211월 일제가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간주해 만주와 국내에서 윤세복 이하 대종교 지도자 21명을 일거에 체포한 임오교변사건이 일어났을 때 투옥되었다.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혐의로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9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듬해 목단강병원에서 순국하였다. 대종교에서는 순국십현(殉國十賢)의 한 사람으로 추존하였고, 19623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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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탐진 안씨(耽津安氏)는 남한(南韓)에 총2,399가구, 10,0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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