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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양씨(梁)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남원양씨)

 

본관(本貫): 남원(南原)

시조(始祖): 양을나(梁乙那)

유래(由來):

 

남원양씨(南原梁氏)의 시조(始祖)는 양을나(良乙那)이니 태초(太初)에 제주도 한라산(漢羅山)의 북록(北麓) 모흥혈(毛興穴)[세칭 삼성혈(三姓穴)이라 함]에서 종지용출(從地湧出)하여 탐라국(耽羅國)을 창업(創業)하시었으니 단군(檀君)과 같은 시대였다.뒤에 양 탕(良宕)이 광순사(廣巡使)로 신라(新羅)에 입조(入朝)하여 중상의관(重賞衣冠)하고 사작 성주왕자(賜爵星主王子)하고 개 양성위량(改良姓爲梁)하였으며 후예(後裔)양우량(梁友諒)이 신라(新羅) 경덕왕조(景德王朝)에 왕실(王室)에 공훈(功勳)을 세워 남원부백(南原府伯)에 책봉되어 이로부터 남원(南原)으로 분적(分籍)하였다.

그러나 문헌(文獻)의 실전(失傳)으로 그 이하의 선계(先系)를 상고 할 수 없고 다만 능양(能讓)으로 부터계대(系代)하는 병부공파(兵部公派)와 주운(朱雲)으로 부터 계대(系代)하는 용성군파(龍城君派)가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양견(梁堅)

병부공파(兵部公派)에 고려(高麗)때 양견()은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역임하였다.

 

양우(梁祐)

동국(東國)의 백이숙제(伯夷叔齊)라고 불리는 양우()는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에 올라 가문(家門)을 빛냈다.

 

양성지(梁誠之)

1415(태종 15) 1482(성종 13). 조선 전기의 학자 ·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또는 송파(松坡).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석융(碩隆)이고, 아버지는 증 좌찬성(贈左贊成) 구주(九疇)이며, 어머니는 전주부윤 권담(權湛)의 딸이다.

6세에 독서를 시작해 9세에 글을 짓고, 1441(세종 23) 진사 · 생원 두 시험에 이어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경창부승(慶昌府丞)과 성균주부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 ( 副修撰 ) · 교리 ( 校理 ) 등을 지내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춘추관기주관으로 고려사 수사관을 겸직해 고려사 의 개찬(改撰)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직제학에 승진, 이듬해 집현전이 폐지되자 좌보덕(左輔德)에 전임,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제학으로 취임하였다.

이듬해 구현시(求賢試)에 급제, 이조판서에 오르고, 대사헌에 재직 중 오륜론 五倫論 을 지어 바쳤다. 1466(세조 12) 발영시 ( 拔英試 )2등으로 급제했으며, 1469(예종 1) 지중추부사 · 홍문관제학 · 춘추관사를 겸직해 세종실록 예종실록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공조판서를 거쳐 1471(성종 2) 좌리공신 ( 佐理功臣 )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77년 대사헌에 재임하다가 지춘추관사가 되었고, 1481년 홍문관대제학으로 승진했으며 이 해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였다.

세종조부터 성종조까지 6조에 걸쳐 역임하는 동안에 문교(文敎)에 끼친 공로는 제외하고라도, 정치 의견과 언론 어느 것이나 다 당시를 일깨우고 후세의 거울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조는 그를 해동의 제갈량(諸葛亮) ’ 이라고까지 하였다.

항상 역사의 현실에 착안해 나라를 위하는 긴요한 도리를 꿋꿋이 주장했고, 당시에 사리를 가장 똑바로 이해한 경륜가였다. 중국 고대의 요순(堯舜)만을 유일한 이상적 군주로 떠받드는 시절에 단군을 국조로 모셔 받들기를 주장했으며, 중국의 역사만을 일반 교과서로 사용하던 시절에 우리의 동국사(東國史)도 배울 것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온 세상이 중국의 풍속에 휩쓸리는 때에 나라의 고유한 풍속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뿐 아니라 문신이면서도 군비에 대한 관심 또한 컸다. 우리 나라에는 문묘는 있으나 무묘(武廟)가 없으니 마땅히 무묘를 세워 역대의 명장을 모시자고 주장하였다.

고구려 유속을 본받아 봄에는 33, 가을에는 99일에 교외에서 사격 대회를 열어 사기를 드높이고 무풍(武風)을 장려하자고 했으니, 확실히 당시 사회로 보아 일대 경종이 아닐 수 없었다.

군정 10(軍政十策) 가운데서도 특히 군호 ( 軍戶 )의 중요성을 강조해, “ 신라의 풍속에는 전쟁에서 사망한 자는 벼슬을 한 등 올려주어 명예롭게 하고, 유가족들은 관록으로써 부양해 우대하였다. 그러니 위국진충(爲國盡忠 :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함.)의 용사들이 생겨남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 전사자에게는 특별한 은전이 없고 마땅히 주는 부미(賻米 : 賻儀로서 주는 쌀)까지도 받기가 어렵다. 이러고서야 어찌 군졸들의 모험심을 고취시킬 수 있으랴. ” 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군정의 여러 가지 결함을 명석하게 지적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의견도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무인을 멸시하는 폐풍이 교정되지 못한 채로 500년간을 내려왔다. 정병주의(精兵主義)를 주장해 양보다 질에 더욱 치중해 반드시 시험을 치러 우수한 군사를 뽑도록 하였다.

또 병역의 토대가 되는 호적의 정확성을 기할 것, 독자의 군복무 면제 등을 징병의 3대 원칙으로 삼은 것은 탁월한 의견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좋은 방안을 수립하였다. 그 중에서 비변10(備邊十策) 같은 것은 국방에 관한 근본 방침을 상술한 것이니, 이 또한 그의 대표적 의견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 팔도지리지 연변방수도 沿邊防戌圖 는 매우 정확해 실제로 측량한 지도가 없던 당시로서는 매우 위대한 공헌이라 할 수 있겠다. 또 농정에도 힘을 써서 농사의 근본은 지력(地力)을 잘 이용하는 데 있으므로 개간 사업을 일으켜서 해변과 강 · 육지에도 방축을 세워 수전(水田)을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직업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모아서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밖에 여가가 있을 때는 무예를 익히게 하면 일거양득이 된다고 건의하였다. 이상의 여러 가지 일이 이상에 치우친 듯하지만 전혀 현실을 외면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민생을 위해 소극적으로는 민폐를 제거하고, 적극적으로는 백성들의 복리를 증진시킬 여러 가지 건의를 했는데, 그 중에도 특히 각 도 · · 현에 의료 기관의 설치를 주장한 것은 참으로 감탄할만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질병은 백성들의 가장 큰 괴로움이었다.

그나마 서울에는 의원들이 있어 병을 진단하고 약을 주기도 하지만 지방에는 그렇지 못해 촌의 백성들이 한번 질병에 걸리면 그 괴로워함은 차마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방의 크기에 따라 의원의 수를 정해 전의감에 와서 의술을 연구한 뒤 각 지방에 돌아가 병을 돌보게 하고, 감사에게 그 성적을 보고하게 해 상벌을 주면 이처럼 좋은 방법은 없다고 하였다.

사회 정책에 대하여도 한층 진보적인 의견을 가졌다. 예컨대, 백정 ( 白丁 )에게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주며, 노비에게만 힘든 역을 치중하지 말고 균등하게 하자고 주장한 것 등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비의 폐지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은 당시 시대로 보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풍속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개혁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즉 혼례를 간단하게 하고 연찬(宴饌)도 절약하고 검소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과거 시험에 대하여도 과목을 현실에 맞게 개정할 것을 여러 번 제의하였다.

예술 방면에도 깊은 이해를 가져 아악을 잘 보호하자고 했으며, 우리 나라와 중국의 악부(樂部) 외에 또 번악부(藩樂部)란 것을 따로 설치해 일본악과 여진악을 아울러 채용하자고 주장하였다.

서적12사상소문 書籍十二事上疏文 은 도서의 보존 및 간행에 실효를 꾀하자는 내용으로서 현대적 의의를 함축한 주장이었다. 언제나 그렇겠지만 문화가 담긴 서적의 보존은 사회 문화의 존속을 위한 중대 사명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서적은 비록 흩어져 없어진다 해도 구할 수 있지만, 우리 나라의 문사(文史)는 한번 유실되면 다시는 얻을 수 없으니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책은 반드시 여러 권을 만들어 여러 사고 ( 史庫 )에 보관해 두자고 하였다.

사실 조선 500년을 통해 학자와 문인이 많았고 정략가(政略家)와 모신(謀臣)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개는 정주(程朱)의 학설과 반고(班固) · 사마천(司馬遷)의 문장을 모방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대의명분을 구실로 강경 외교를 부르짖거나 인의 ( 仁義 )만으로 국방의 근본을 삼으려고 하는 사람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자국의 현실을 바로 보고 백년대계는 세우지 못할망정 한 나라의 정치를 마음 굳게 먹고 잘 해가자는 실제적 경륜가는 매우 드물었다. 그는 조선이 한창 번성할 때에 배출한 인물 중 현실적 경륜가로서 색다른 존재라 하겠다.

저서로는 눌재집 訥齋集 외에 주의(奏議)에 관한 10전과 어명으로 엮은 해동성씨록 海東姓氏錄 · 동국도경 東國圖經 · 농잠서 農蠶書 · 목축서 牧蓄書 · 유선서 諭善書 · 황극치평도 黃極治平圖 · 팔도지도 八道地圖 · 양계방수도 兩界防戍圖 등이 있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양찬(梁瓚)

성지의 아들 양찬()은 무과(武科)에 올라 사부일목(四府一牧)을 거쳐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올랐다.

 

양연(梁淵)

? 1542(중종 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거원(巨源), 호는 설옹(雪翁). 증 좌찬성 구주(九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 성지(誠之)이며, 아버지는 현령 호()이며, 어머니는 유인로(柳仁老)의 딸이다. 음직으로 진출하여 충의위 ( 忠義衛 )에 소속되었다가 1524(중종 1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 ( 掌令 ) · 집의 ( 執義 ) ·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535년에는 공조참판으로 성절사 ( 聖節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536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537년 대사헌으로 왕의 밀지를 받아 김안로 ( 金安老 ) · 채무택 ( 蔡無擇 ) · 허항 ( 許沆 ) 등을 탄핵하여 처형시켰다.

그 뒤 좌승지 · 병조판서 · 이조판서 · 우찬성 · 좌찬성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판중추부사 ( 判中樞府事 )에 이르렀다. 사무에 밝았으며, 특히 병사(兵事)에 능하였다. 재상 윤임 ( 尹任 )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훈구파 ( 勳舊派 )의 중심인물로 사림파를 배척하는 활동을 많이 하였다.

 

양윤신(梁允信)

윤신(允信)은 학행(學行)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올라 명종조(明宗朝)의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걸리어 유배되었다가 방면되어 사천현감(泗川縣監)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아들 사원(思遠)과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우고 부자(父子)가 순절()하였다.

 

양헌수(梁憲洙)

1816(순조 16)1888(고종 25).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경보(敬甫). 부사정 종임(鍾任)의 아들이다. 이항로 ( 李恒老 )의 문인으로 무예를 익혔다. 1848(헌종 14)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 참상관 ( 參上官 )에 올랐다.

1865(고종 2) 제주목사로 부임된 후 전판관 백기호(白基虎)의 탐학을 징계할 것을 보고해 제주 도민의 칭송을 받았다. 이 해 가을 극심한 태풍 피해를 복구하는 한편, 진휼을 요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한 해를 더 제주도에서 보냈다. 1866년 어영청의 천총 ( 千摠 )으로 준천사 ( 濬川司 )의 도청 ( 都廳 )을 겸하다가 병인양요를 당해 정족산성 ( 鼎足山城 )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

순무중군(巡撫中軍) 이용희 ( 李容熙 )의 명령에 따라 별군관 ( 別軍官 ) 이현규(李鉉奎)와 함께 17명의 초관 ( 哨官 )과 경초군(京哨軍) 121, 표하군(標下軍) 38, 포수 367명을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의 손돌(孫乭)목을 건너 정족산성을 지켰다.

103일 프랑스함대의 로즈(Rose) 제독이 보낸 해군대령 올리비에(Ollibier) 부대 160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 6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자를 냈으며,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세워 프랑스군이 패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병사로 재직중이던 1871년에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설한 별위사제도(別衛士制度)의 격려 방안으로 매년 도시 ( 都試 )를 시행하여 성적에 따라 우대하고 곡식과 면포로 포상하였으며, 이와 같은 치적이 인정되어 특별히 1년 더 병사로 임직하였다. 이듬해에는 당시 황해도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 일당을 체포하여 효수하기도 하였다.

1873년 어영대장에 임명되었고, 1874년 좌변포도대장을 지냈다. 18752월 형조판서가 주어졌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8일 뒤 금위대장이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 ( 金炳學 홍순목 ( 洪淳穆 이용희 등과 함께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을 주장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집권한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상을 치르는 한편, 척족 세력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면서 삼군부 ( 三軍府 )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이 때 조영하 ( 趙寧夏 김병시 ( 金炳始 김기석 ( 金箕錫 ) 등과 함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에 임명되었다. 1884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1887년 독련사(督鍊使)가 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양한규(梁漢奎)

1844(헌종 10)1907.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남원(南原). 초명은 월서(月瑞). 자는 문찬(文贊), 호는 칙헌(則軒초계(初桂, 草溪). 전라북도 남원 출신. 증호조판서 맹석(孟錫)의 아들로,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

1882(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남원부사 심의두(沈宜斗)에게 청하여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상경하여 난군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심의두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91년 선략장군 부사과(宣略將軍副司果), 이듬해 통훈대부초계군사 겸내금위장(通訓大夫草溪郡事兼內禁衛將)에 제수되고 이어 통정대부가 가자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국권을 회복하고자 널리 우국지사와 연락하여 군사를 모으니 영남·호남에서 1,000여명이 호응하였다. 1907212(음력 1230) 남원 진위대 성내 장병이 연말연시를 맞아 휴가나간 틈을 이용하여 읍을 점령, 무기를 접수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휘하 100여명의 정예병을 비롯, 참봉 유병두(柳秉斗)의 군사 50명 및 진사 박재홍(朴在洪),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 많은 의병에 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뒤 13일 새벽 읍내로 진군, 남원성에 입성하였다.

광한루에 본진을 두고 있던 일본군과 진위대가 의병들의 급습에 놀라 무기를 둔 채 성밖으로 도주하자, 무기·군수품을 그대로 접수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던 중 유탄에 맞아 죽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남한(南韓)에 총 52,230가구, 219,9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梁相旭(양상욱) 본관: 남원

 

미어기 북

 

미어기 껍질로 만들어진 이 북은 직경이 50, 두께가 40의 크기로, 현재 남원군 주생면 (周生面) 상동리(上洞里) 양상욱(梁相旭)씨에 의해 보관되고 있다.

1589(宣祖22) 음력 4월에 만들어진 이 북은 임진왜란 시 승전고로 쓰여 졌다. 이 북이 만들어진 동기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의 남원출신 의병장 양대박(梁大樸)은 용두정 조대에 낚시를 즐겼다. 암소는 풀을 뜯고 송아지는 한가히 뛰놀고 있다. 주생면 지당리 용두정에는 지금도 조대(釣台)가 있다. 갈증이 난 송아지가 물을 째불째불 마시고 있다. 그 순간 어마어마하게 큰 미어기가 송아지를 물고 물속으로 잠기려 하니 소스라쳐 놀란 송아지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음매 음매하고 울부짖는다. 실로 아슬아슬한 위기일발이다. 조대위에 걸터앉아 낚시에 여념이 없던 양대박은 재빨리 활을 쏘아 미어기를 죽이고 송아지를 구출하였다.

 

장정을 동원하여 미어기를 집으로 가져가니 구경꾼이 장을 이루었다. 황소만큼이나 큰 이 미어기는 가죽이 쇠가죽보다도 더 질기고 두터웠다.

 

고기는 몇 백 명이 먹어도 풍족하였으나 가죽은 질겨서 먹을 수 없기로 양대박은 그 가죽으로 커다란 북을 만드니 이것이 지금까지 전해 오는 미어기 북이다. 후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양대박이 우리고장 청장년 3,000여명을 이끌고 임실군 운암면에 왜적을 맞아 싸울 때 이 타고를 둥둥 울리며 사기를 돋우니 아군은 용기백배 되고 왜적은 크게 패하여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일이 있다.

 

그러나 이 싸움 끝에 금산 왜적을 토벌키 위해 진격 중 진중에서 괴질을 얻어 갑자기 운명하니 그 후로 북도 쓸 소용을 잃어 자손들이 대대로 보관중이란다.

 

 

梁源彦(양원언).

 

조선 말기 사람인 梁源彦(양원언)의 효자비는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에 있으며, 그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머니가 중병을 앓게 되자 梁源彦(양원언) 관청에서 환곡 100석을 빌려 약값으로 썼지만 어머니의 병환에는 아무 차도가 없었다.

 

그러다 어머니의 병에는 사람고기를 먹어야 낫는다는 말을 듣고 양씨는 자기의 허벅지살을 베어 어머니께 고아드렸다.

이런 정성으로 어머니의 병환은 나았지만 환곡을 갚지 못한 양씨는 관가에 끌려가 매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매를 때리려고 아랫도리를 벗겨 보니 허벅지살이 없어 이를 이상히 여긴 현감이 자초지종을 묻자 양씨가 그 이유를 말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현감은 환곡의 상환을 면제해 주고 효자비를 세워 그의 효행을 기리게 되었다고 한다.

                                                                                           <출전: 미족문화대백과사전>

 

 

梁誠之(양성지) 선생의 일화.

 

굳은 주체 의식을 지녔던 양성지

梁誠之(양성지)는 호가 눌재로 1441(세종 23)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을 거쳐 세자좌보덕으로 있었다. 양성지가 집현전에서 일할 때였다. 그는 걸핏하면 세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시급한 일이 아니리면 구태여 그렇게 자주 상소를 올릴 필요가 있겠는가. 앞으로는 꼭 필요한 일이 있을때만 상소를 올리도록 하게.” 보다 못한 동료가 충고를 했다.

송나라 광종 때 朱子(주자)겨우 46일 동안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수십 번도 넘게 상소를 올렸네. 그러나 나는 임금을 모신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처럼 많은 상소를 올리지 못했네. 상소를 올리는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잘못을 바로잡고 정사를 바르게 하자는 뜻인데, 어찌 상소를 자주 한다 해서 허물이 되겠는가?”

양성지가 대꾸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梁誠之(양성지) 선생의 일화.

 

양성지는 국방에 지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가 올린 상소 중 국방문제에 대한 중요한 것만을 열거해보면, 비변십책, 동서양계일체비어, 평안도편의십팔사, 위부형, 군정십책, 군국편의십사, 병사육책등이 있다.

그 가운데 비변십책평안도 편의십팔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디음과 같다.

비변십책은 국가의 국방정책을 확립할 것, 사졸을 골라 뽑을 것, 장수를 가릴 것, 군량을 축적할 것, 무기와 機才(기재)를 정비할 것, 성곽 보루를 수리할 것 등을 주장하고 있다.

 

펑안도편의십팔사는 평안도 출신의 군관을 우대하고 그곳의 백성을 특히 위로하고 달래고, 민폐를 제거하여 민생의 안정을 도모할 방법을 말했다.

양성지는 成三問(성삼문) · 彭年(박팽년) 등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려 했다.

양성지는 비상한 사람이다. 그는 나랏일에 마음을 두어 말하지 는 것이 없으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

세조가 양성지를 칭찬했다. 마침내 양성지는 세조의 권유를 받아들여 동지중추원시에 오르고 이조판서, 대사헌, 지중추원사등을 지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梁誠之(양성지) 선생의 일화.

 

지도를 만들고자 하는 데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길 수 있을까?” 세조가 물었다.

梁誠之(양성지)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

鄭麟趾(정인지)가 양성지를 추천했다.

일찍이 고려사팔도지리지를 편찬했다 하여 양성지에게 맡기게 했던 것이다. 세종의 명에 의하여 편찬된 팔도지리지연변방수도는 실제 측량 지도가 없었던 그 시로서는 매우 정확했다.

 

한문으로 저작된 용비어천가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사람 중의 하나인 양성지는 학문에 뛰어나고 문장에 능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저서들은 유학을 위시하여 문학 · 사학 · 지리학 · 의학· 농학 · 군사학등에 관한것들이 었다.

그의 저서들의 중심 사상은 홍범사상이었다. 홍범이란 書經(서경)주서의 편명으로 ()나라의 우왕이 요임금과 임금 이래의 사상을 정리 집성한 것으로 ()나라의 기자를 거쳐 ()나라의 무왕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천하의 변하지 않는 도리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의 필요한 도리를 아홉 가지 범주로 제시했다.

梁誠之(양성지)홍범구주(하나라의 우왕이 정한 도덕정치의 아홉 가지 원칙)에서 나름의 체계를 세웠다.

위로 하늘을 섬기고, 아래로 백성을 사랑하고, 이웃과 친하고, 변방을 튼튼히 한다.

그리고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것, 몸을 닦는 것, 집안 을 다스리는 것, 나리를 다스리는 것을 말했다.

또한 사람을 제대로 명하고, 간하는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선행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 고, 나쁜 행위를 한 사람에게 벌을 주고 하면 결코 흥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梁誠之(양성지) 선생의 일화.

 

양성지는 왕에게 동국사략, 고려사절요를 늘 읽으라고 했으며, 우리나라 서적의 보관을 특히 소중히 것을 역설했다.

어떤 학지는 양성지를 평해 항상 역사의 현실에 착안하여 나라를 위하는 긴요한 도리를 꿋꿋이 주장함이 특색인 바 그 당시에 있어서 사리를 가장 똑 바로 이해하던 경륜가였다고 평가했다.

양성지가 남긴 저술인 눌제 집을 통해 그가 주장한 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국조를 단군으로 받들어야한다.

2) 중국의 역사 대신 우리나라 역사를 배워야 한다.

3) 우리나라 고유풍속을 존중해야 한다.

4) 武墓(무묘)세워 역대의 영장을 모셔야 한.

5) 봄과 가을에 사겨 대회를 열어 ()진작시켜야 한다.

6) 각도 · 현에 의료 기관 설치하여야 한다.

7) 깨간사업을 일으켜 水田(수전)을 만들어야 한다.

8) 정이 양민이 되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9) 노비에게만 노역을 치중하지 말고 균등하게 하여야 한다.

10) 과거시험의 과목을 현실에 맞게 개정해야한다.

11) 事大(사대)自主(자주)해치지 않는 것이라야 한.

이것은 중국을 事大(사대)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梁誠之(양성지)중국의 압력에 대해 자주적 자세를 확고하게 시했던 것이다. 그는 마음속에 굳은 주체 의식을 지녔던 현실적 경륜가로 색다른 존재라고 평가받고 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梁誠之(양성지) 선생의 일화.

 

正祖(정조)의 스승 梁誠之(양성지) 1776년 정조는 개혁정치를 추진하기 위해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세웠다. 그런데 규장각 설치를 건의한 사람은 정조보다 300년이나 앞선 시대를 살았던 양성지였다. 양성지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조정에서 간행한 모든 서책들을 비롯하여 선비들이 저술한 서책들도 모두 수집, 간행하여 보관케 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와 같은 건의가 300여 년이 흐른 후에 실현된 것이다.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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