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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양씨(梁)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제주양씨)

 

본관(本貫): 제주(濟州)

시조(始祖): 양을나(梁乙那)

유래(由來):

 

제주 양씨(濟州梁氏)의 시조(始祖)<탐라개국설화(耽羅開國說話)>에 나오는 삼신인(三神人) 중의 한 사람인 양을나(梁乙那)이다.

영주지(瀛州誌)에 의하면 양을나는 아득한 옛날 제주도 한라산 북쪽기슭 모흥혈(毛興穴:삼성혈이라고도 함)에서 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와 함께 용출(湧出)하여 탐라개국군왕(耽羅開國郡王)이 되었고, 그의 자손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938(고려 태조28)까지 탐라를 통치해 왔다고 한다.

 

그후 양을나의 후손 양궁왕자(良宮王子)가 신라(新羅)에 사신으로 에방(禮訪)하니 내물왕(奈勿王:17대 왕, 재위기간 356-402)이 많은 상을 내리고 성()을 양()으로 하사(下賜)하였다고 하며, 그의 후손 순()682(신문왕2)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양을나를 시조로 받들고 관향(貫鄕)을 제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양진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이부시랑(吏部侍郞)과 중추부사를 지낸 진이 상서좌복야로 치사(致仕)했다.

 

양숙(梁淑)

녹사(錄事) 한신(漢臣)의 아들 양숙()은 명종(明宗)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양팽손(梁彭孫)

1488(성종 19)1545(인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능성 ( 綾城 ) 출신. 직장 사위(思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사복시정 담()이고, 아버지는 이하(以河)이며, 어머니는 해주 최씨(海州崔氏)로 증 조위사직 최혼(崔渾)의 딸이다.

1510(중종 5) 조광조 ( 趙光祖 )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또 현량과 ( 賢良科 )에 발탁되었다. 이후 정언 ( 正言 전랑· 수찬 ( 修撰 교리 ( 校理 ) 등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독서당을 고쳐 부른 이름)에 뽑혀 사가독서 ( 賜暇讀書 )하기도 하였다.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 김정 ( 金淨 )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는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519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 ( 奇遵 박세희(朴世熹최산두 ( 崔山斗 ) 등의 기묘명현들이었다. 특히, 능주로 유배되어온 조광조와는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냈다.

1539년에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4년 김안로 ( 金安老 )의 사사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다음해에 58세로 죽었다.

13세 때 송흠 ( 宋欽 )에게 나가 공부했으며 송순(宋純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항상 소학·근사록등으로 처신의 지침을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 ( 安堅 )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다.

1630(인조 8) 김장생 ( 金長生 ) 등의 청으로 능주 죽수서원 ( 竹樹書院 )에 배향되었으며, 1818(순조 18) 순천의 용강서원 ( 龍岡書院 )에 추향되었다. 작품으로는 산수도1점이 전하며, 저서로는 학포유집2책이 전한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양응정(梁應鼎)

1519(중종 14)1581(선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 ( 松川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하(以河)이고, 아버지는 교리 팽손(彭孫)이며, 어머니는 금산김씨(錦山金氏)로 화()의 딸이다. 동래부사 응태(應台)의 아우이다.

1540(중종 35)에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2(명종 7)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 ( 檢閱 )이 되고, 공조좌랑으로 1556년 중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 : 독서당의 다른 이름으로 신하들에게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독서할 수 있도록 만든 장소)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공조좌랑으로 있을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윤원형 ( 尹元衡 )에 의하여 김홍도 ( 金弘度 )와 함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가 1560년에 다시 복직되었다. 그 뒤 수찬 ( 修撰 진주목사를 거쳐 1574(선조 7) 경주부윤으로 재직 중, 진주목사로 있을 당시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1578년에 공조참판으로 기용,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으나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시 파직되었다가 대사성에 복직되었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송천집·용성창수록 龍城唱酬錄이 있다.

 

양응태(梁應台)

응정의 아우 응태(應台)는 동래 부사(東來府使)를 지냈다.

 

양산숙(梁山璹)

1561(명종 16)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회원(會元). 직장 ( 直長 ) 사위(思渭)의 후손이며, 이하(以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 팽손(彭孫)이며, 아버지는 대사성 응정(應鼎)이다.

성혼 ( 成渾 )의 문하에서 수업했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경서(經書)에만 전심하였다. 천문 · 지리 · 병학에도 뛰어났다. 동서 분당시 서인으로 조헌 ( 趙憲 )과 함께 이이(李珥) · 성혼을 지지하며 동인 이산해 ( 李山海 ) · 유성룡 ( 柳成龍 )을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산룡(山龍)과 함께 나주에서 창의(倡義), 김천일 ( 金千鎰 )을 맹주(盟主)로 삼고 그는 부장이 되고 형은 운량장(運糧將)이 되었다. 향리에서 병사를 모집, 군량을 조달하며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봉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뒤 김천일과 함께 북상해 수원에 출진해 활약하다가 강화도로 진을 옮길 무렵, 곽현(郭賢)과 함께 주장의 밀서를 가지고 해로의 간도(間道 : 샛길)을 따라 의주 행궁(行宮 : 임시 궁궐)에 도착해 선조에게 호남 · 영남의 정세와 창의 활동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이 공으로 공조좌랑에 제수되었다.

돌아올 때 영남 · 호남에 보내는 교서를 받아서 남도에 하달하였다. 적이 남도로 퇴각하자 김천일과 함께 남하해 진주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침공하려는 왜의 대군 앞에 군사 부족으로, 홍함(洪 旅 )과 함께 명나라 장군 유정(劉綎)의 군진에 가서 원군을 강청했지만 실패하였다.

성에 다다르자 홍함마저 도피해 단신 입성, 적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김천일과 함께 남강에 투신해 자결했다고 한다.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 ( 彰烈祠 )에 제향되었다.

 

양산보(梁山甫)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산보(山甫)는 스승이 기묘사회에 화를 입자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가 은거(隱居)하며 학문으로 여생을 마쳤다.

 

양자징(梁子徵)

산보의 아들 자징(子徵)은 효행(孝行)으로 벼슬에 천거되어 거창(居昌)과 석성 현감(石城縣監)을 역임했고, 장인 김인후(金麟厚)하서집(河西集)에 행장(行狀)을 썼다.

 

양천운(梁千運)

1568(선조 1) 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사형(士亨), 호는 영주(瀛洲). 창평 출신. 아버지는 현감 자징(子 消 )이다. 성혼 ( 成渾 )의 문인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큰 뜻이 없어 대과를 치르지 않았다. 벼슬은 동몽교관 ( 童蒙敎官 ) · 감찰 ( 監察 ) 등을 거쳐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에 그친 뒤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조헌 ( 趙憲 )과 같은 이는 그를 장래 촉망되는 인물로 보기도 하였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명에 따라 분연히 일어나 의병장 고경명 ( 高敬命 )을 따르려 하였으나 두 형이 없음을 안 고경명이 큰 뜻은 이해하지만 부모의 봉양이 우선임을 들어 거절하였다.

한때 친구인 이이첨 ( 李爾瞻 )이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그와 절교하는 의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교우하는 이름있는 선비들이 많았는데, 특히 김상헌 ( 金尙憲 )과 교분이 두터웠다. 평소 자녀들에게도 엄하였으며 소학 · 삼강행실록 등으로 자녀들을 가르칠 것을 훈계하였다.

 

양회일(梁會一)

?1908.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해심(海心), 호는 행사(杏史). 전라남도 능주 출신. 시문에 능하였으며, 충성심이 두드러진 유생으로서, 그 명성과 덕망으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가산을 털고 의병을 모아 1907년에 기병하여, 전라남도의 능주·화순·동복 등지를 중심으로 왜적과 싸웠다. 의병장으로서 1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그해 422일 능주의 군아(郡衙)와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총 5자루를 빼앗았다.

이어 화순의 군아와 헌병분파소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광주를 치려다가 해가 저물어, 화순과 동복의 경계에 주둔할 때 왜적의 습격을 받아 격전 끝에 잡히고, 지도 ( 智島 )로 유배되었다.

그 해 12월에 풀려나자 재기를 하였으나, 1908년에 이르러 일본헌병에게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장흥에서 옥고를 치를 때 적을 크게 꾸짖고 단식 7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양한묵(梁漢默)

1862(철종 13)1919. 독립운동가.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길중(吉仲), 호는 지강(芝江). 전라남도 해남 출신.상태(相泰)의 아들이다. 1894년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가 되어 능주세무관(綾州稅務官)으로 근무하다, 1897년 사직하였다. 그 뒤 북경(北京) 등지를 유람하고, 이듬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국정과 세계 대세를 살폈다.

1902년 일본 나라(奈良)에서 망명중인 손병희 ( 孫秉熙 권동진 ( 權東鎭 오세창 ( 吳世昌 ) 등의 권유로 동학 ( 東學 )에 입교하였다. 진보회 ( 進步會 )를 결성하여 구국민중운동을 지도하던 중, 1905년 이용구 ( 李容九 ) 등이 친일파로 변절하자 이에 대항하여 이준 ( 李儁 윤효정 ( 尹孝定 )과 헌정연구회 ( 憲政硏究會 )를 조직하였다.

이듬해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이 귀국하여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두고 대헌을 발표하여 제도와 기관을 설립하자 집강진리과장(執綱眞理課長우봉도(右奉道법도사(法道師)를 지냈고, 또 윤효정· 장지연 ( 張志淵 ) 등과 헌정연구회의 후신인 대한자강회 ( 大韓自强會 )를 조직하여 일진회와 적극 투쟁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교육 진흥을 위하여 서울에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개설하는 한편, 보성전문학교 ( 普成專門學校 보성중학교·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 등의 경영에 참여하였다.

1911년 직무도사(職務道師)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교리강습소를 개설, 천도교인 500여 명을 수련시키면서 강습과 집회를 통해 극렬한 배일사상을 고취, 함양시켰다.

교주 손병희를 보좌하여 국권 회복을 꾀하면서 안으로는 자체의 실력을 양성하고 밖으로는 국제 동향을 살피던 중, 19193·1운동을 일으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 일로 붙잡혀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동경연의 東經演義·무체법경 無體法經이 있다.

 

양기탁(梁起鐸)

1871(고종 8) 1938. 독립운동가 · 언론인. 초명은 의종(宜鍾), 호는 우강(雩岡). 평안남도 평양 출신. 시영(時英)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이다. 어린 시절에는 한학을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동학당 및 유림 ( 儒林 )의 명망가이며 우국지사인 나현태(羅鉉泰)를 만나 시야를 넓혔다.

1895년 미국인 선교사 게일(Gale,J.S., 奇一) 및 아버지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한영자전 韓英字典 을 편수하고, 이듬해 독립협회에 가입했으며, 1898년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00년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게일의 알선으로 3년간 일본과 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1902년 이상재 ( 李商在 ) · 민영환 ( 閔泳煥 ) · 이준 ( 李儁 ) · 이상설 ( 李相卨 ) · 이동휘 ( 李東輝 ) 등과 개혁당 조직 운동에 가담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기간에 일제가 조선에게 삼림 ·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保安會) 운동에 참가하였다.

보안회가 일제의 방해 책동으로 해산되자, 후속단체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고 지방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718일 영국인 기자 배설(Bethell,E.T., 裵說)과 제휴, 국한문 혼용체의 일간 신문 대한매일신보 를 발행하였다. 그때 신문사의 총무 겸 주필로 근무하면서, 다음해 8코리아 데일리 뉴스 Korea Daily News 라는 제호의영문판을 별도로 발행하였다.

1905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제와 이토(伊藤博文)를 공격하고 배일 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의 신문 사설을 썼다. 또한 장지연 ( 張志淵 )황성신문 에 쓴 시일야 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이라는 논설을 즉각 게재하였다. 그리고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코리아 데일리 뉴스 지에 실어 전세계에 알렸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사들이 일제의 신문지법 에 의해 애국계몽운동 및 의병운동을 보도하지 못하는 등의 제약을 받고 있을 당시, 대한매일신보 는 형식상 사장이 외국인이어서 법의 저촉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대한매일신보 는 모든 한말 국권 회복 운동의 대변지로 발전되어 갔다.

그래서 대한매일신보 는 일제 통감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그는 국채 보상금 횡령(國債報償金橫領)이라는 누명을 쓰고 구속되었다. 그 뒤 사장 배설이 공소 사실의 허위 조작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자 무죄로 출감하였다.

1908년 미국에서 돌아온 안창호 ( 安昌浩 ) · 전덕기 ( 全德基 ) · 이회영 ( 李會榮 ) · 이동휘 · 이동녕 ( 李東寧 ) · 이갑 ( 李甲 ) 등과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 신민회 ( 新民會 )를 조직하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봄 그의 집에서 개최된 신민회 전국 간부 회의에서는 독립 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만주의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창건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뒤 19108월 자신이 직접 그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 만주를 답사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 이동녕과 이회영을 만주로 보내어 신흥무관학교 ( 新興武官學校 )와 독립군 기지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안명근 ( 安明根 )에 의한 군자금 모금 사건이 일어나자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111월 양기탁 등 16명을 체포, 구금하였다. , 그해 9월 일제는 신민회를 해체시키기 위한 이른바 데라우치 (寺內)암살음모사건 을 날조하여 신민회원 80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05인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때 양기탁은 최고형인 징역 10년을 언도받았으나 항소심에서 6년형으로 감형되어 4년간 복역하다가 19152월에 석방되었다. 이듬해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 규합에 노력하다가 톈진(天津)에서 또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국으로 압송되어 2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1920동아일보 가 창간될 때 유근 ( 柳瑾 )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그 해 봄 통천교(統天敎)라는 종교를 창교(創敎)하여 교리를 선포하였는데, 표면으로는 종교 운동을 펼치고 내면으로는 독립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1년 미국 의원단 36명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 진정서를 제출하여 투옥되었다가 어머니의 별세로 가출옥되었다. 이때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1923년 만주에서 편강렬 ( 片康烈 ) · 남정(南正) 등과 의성단 (義成團)을 조직하여, 국내의 친일파 암살 및 관공서 시설 파괴 등을 지휘하였다.

, 19251월 오동진 ( 吳東振 ) · 김동삼 ( 金東三 ) 등과 의성단 ·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 광정단 ( 匡正團 ) ·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통합하여 정의부 ( 正義府 )를 조직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하여 일제를 공격하였다. 19264월 주진수(朱鎭洙) · 김봉국(金鳳國) · 이동구(李東求) 등과 정의부의 무장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고려혁명당 ( 高麗革命黨 )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30년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국무령(國務領) 이상룡 ( 李相龍 )의 사임으로 임시정부 국무령에 추대되었으나 거절하였으나, 1934년 의정원 회의에서 법무 담당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22일 가흥 ( 嘉興 )에서 국무원이 개설될 때까지 재임하였다.

그 해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해 의열단 · 신한독립단(新韓獨立團) · 조선혁명당 · 한국독립당 · 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 등의 5당통일회의가 개최되고 이를 통합한 조선민족혁명당 ( 朝鮮民族革命黨 )이 조직되자, 김규식 ( 金奎植 ) · 조소앙 ( 趙素昻 ) · 최동오 ( 崔東旿 ) · 유동열 ( 柳東說 ) 등과 이에 가담하여 대일전선통일에 노력하였다.

1938년 장쑤성(江蘇省) 담양현(潭陽縣) 길당암(吉堂庵)에서 선도(仙道)를 닦다가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효부의 일화

 

독수리가 물어다 준 꿩

 

 

경산군 용성면 곡신동의 용산(龍山) 기슭에 효열각이라는 조그마한 정려가 하나 있어, 혼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 효와 열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 효열각은 1846(조선조 헌종 12)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늙으신 부모님께 극진히 효도하고 병약한 남편에게는 그 열행이 뚜렷하여 만고에 길이 빛날, 양씨를 기리기 위한 효열각이다.

 

이 효열각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전해지고 있다.

 

주인공인 양씨는 이곳에서 20여 리 떨어진 청도군 운문면 공암이 고향으로, 엄한 부친과 자상한 모친의 훌륭한 가르침으로 요조숙녀의 기품을 닦아, 어릴 적부터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는 일이 전혀 없었으며, 부모님을 섬기는 효성이나 동기간에 우애가 있기로 동네에서도 소문이 났었다. 또한 길쌈이며, 바느질이며, 살림살이며,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데에다 성품이 후덕하고 모든 예의 범절이 뛰어나 일가 친척간에도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양씨가 18 세 되던 해 이 곳 곡신동에 사는 순천인 박 덕윤(朴德閏)과 부모가 혼약을 맺어 주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양씨가 시집을 올 즈음에는 시집인 박씨 일가는 가세가 기울어 가정이 몹시도 가난하였으며, 홑 시아버지에 시동생까지 여럿이라 어려움이 한층 더하였다.

 

그러나, 양씨는 타고난 천성으로 근면 검소한 생활과 길쌈, 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으며, 시부와 남편과 가족들을 극진히 모시는 효성과 열행이 인근 마을에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시련은 끊이지 않아 시집온 지 3 년만에 집안의 기둥인 남편 박 덕윤이 이름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게 되어 그 고초가 또한 말이 아니었다. 좋다는 약은 다해 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고, 끝내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게도 하여 보았으나 며칠 못 가 남편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더구나 슬하에는 일점 혈육도 남기지 않고 남편을 여의었으니 그 슬픔은 말할 수 없어 남편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늙으신 시부를 봉양해야 한다는 자식된 도리로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남편 사후에는 시부 모시기를 더욱 더 극진히 하여 하늘도 알아 준 듯한 다음의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시아버지가 개고기를 먹고 싶어 하시면 용산의 호랑이가 쌀진 개를 물어다 주었고, 꿩고기가 먹고 싶다 하시면 매나 독수리가 꿩을 물어다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겨울에도 마을 앞 웅덩이에서 빨래를 하면 잉 어가 뛰어 올라와 시아버지를 봉양하게 한 기적들이 수없이 일어났으니, 이 는 실로 하늘이 알아 준 듯하다.

 

그러나, 양씨의 친청 아버지인 양 현룡(梁見龍)이 딸의 고생을 보다 못하여 개가 할 것을 자주 권하매, 양씨는 몇 번 이나 거절하고 친청에 발길을 끊었다. 몇 년 후 시부가 천수를 다하고 세상 을 떠나자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조용히 치르고, 새삼 생각하니 살아서는 친 정 아버지가 자기로 인해 노심 초사하시고 또 개가할 것을 종용하겠기에 동 구 밖에 있는 사량지(恩良池)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실로 죽은 남편 에 대해서는 지어미로서의 열행이 하늘에 닿았고, 가난한 가운데도 부모님께는 효행이 너무나 지극하였으므로, 나라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그의 효행과 열행을 크게 칭찬하고 정려를 세워 그 뜻을 기리게 된 것이다.

 

이 정려가 효열각이 된 것은, 양씨의 지극한 효와 열행이 겸했다 하여 효열각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인근의 많은 주민들이 그의 효와 열행을 기리며 자녀 교육의 본보기로 삼고 있다.

 

출전경산군 자인고등학교 이 교사

참고 문헌내 고장 전통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남한(南韓)에 총 26,699가구, 113,4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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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 충주 어.jpg 충주어씨(魚) 청남 14-08-29 2439
380 태원양씨(襄) 청남 14-08-29 2026
379 천주 양.jpg 청주양씨(楊) 청남 14-08-29 3375
378 중화 양.jpg 중화양씨(楊) 청남 14-08-29 2670
377 안악 양.jpg 안악양씨(楊) 청남 14-08-29 2281
376 밀양 양.jpg 밀양양씨(楊) 청남 14-08-29 2589
375 남원 양.jpg 남원양씨(楊) 청남 14-08-29 3614
제주 양.jpg 제주양씨(梁) 청남 14-08-29 6194
373 남원 양.jpg 남원양씨(梁) 청남 14-08-29 4901
372 원평야씨(夜) 청남 14-08-29 2274
371 한양애씨(艾) 청남 14-08-29 2050
370 태원 안.jpg 태원안씨(安) 청남 14-08-29 2724
369 탐진 안.jpg 탐진안씨(安) 청남 14-08-29 3274
368 죽산 안신.jpg 죽산안씨-신(安) 청남 14-08-29 3773
367 죽산 안.jpg 죽산안씨-구(安) 청남 14-08-29 3610
366 순흥 안1.jpg 순흥안씨(安) 청남 14-08-29 5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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