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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남원양씨(楊)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남원양씨)

 

본관(本貫): 남원(南原)

시조(始祖): 양경문(楊敬文)

유래(由來):

 

남원양씨(南原楊氏)의 시조(始祖)는 양경문(楊敬文)인데,남원양씨족보(南原楊氏族譜)에 의하면 경문(敬文)은 고려(高麗)에서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를 역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손들은 조상(祖上)들의 토착세거지(土着世居地)인 남원(南原)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양자유(楊子由)

조선(朝鮮)때 집의(執義)를 역임했다.

 

양공준(楊公俊)

중종(中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양공말

산림은일(山林隱逸)로 당대의 명사들과 이름을 나란히 한 백운거사(白雲居士) 공말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양홍(楊洪)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館)을 거쳐 부사(府使)를 역임.

 

양사형(楊士衡)

1547(명종 2) 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평 (季平), 호는 영하정(暎霞亭) 또는 어은(漁隱).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준(公俊)이고, 아버지는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극함(克 歟 )의 딸이다.

노진(盧 貰 ) · 유희춘 ( 柳希春 )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79(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군자감 ( 軍資監 )의 봉사 ( 奉事 ) · 직장 (直長)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벼슬을 사임하고 남원에 낙향하였는데, 그 해 여름에 왜적이 침범하자 이대윤(李大胤) · 최상중 ( 崔尙重 ) 등과 군량을 모아 금산의 전지로 보냈다. 1594년 윤두수 ( 尹斗壽 )가 체찰사로 삼남지방을 순시할 때 그를 참좌하였다.

또 변사정 ( 邊士貞 ) · 정염(丁焰) 등과 의병으로 활동한 공로가 평가되어 병조정랑에 오르고, 이어서 춘추관기사관 · 경기도사 · 남평현감(南平縣監) · 예조정랑을 거쳐 1599년 영광군수(靈光郡守)로 임지에서 죽었다. 승정원도승지의 증직이 내리고, 원종공신 ( 原從功臣 ) 2등에 책봉되었으며, 남원 화산사(華山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어은유집 이 있다.

 

양회형(楊會榮)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양영(楊泳)

의병활동을 하다가 옥사(獄死)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남원 양씨(南原楊氏)는 남한(南韓) 9,703가구, 40,9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해거(楊海擧) 선생의 일화

 

효자 양해거(楊海擧): 순창군(淳昌郡)

공의 본관은 남원(南原)이요 자는 초로(楚老)이고 호는 장육당(藏六堂)이다. 1622년 (光海君 14년 )에 진사(進士 ) 여매(汝梅 )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 일찍이 경사(經史 )에 통달하고 과거에 응하면 능히 급제할 재질이 있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계를 단념하고 효도로써 수신제가(修身齊家)에 전념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 일어 나 인조(仁祖)는 남한산성(南漢山城 )에서 적에게 포위가 되고 일반 백성은 적의 총검 아래 공포에 떠는 판국에 어머니가 병 이 들어 위독하였다.

공은 전란으로 혼돈한 난세인데도 좋은 의원만 있다면. 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찾아가서 약을 가지고 와 달이고 복약(服藥) 하는데 모든 정 성을 다하였다. 어머니가 병에 신음한지 3개월이 지나도록 한번도 자리에 누어 본적 없이 열심히 간호하었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하여 끝내는 세상을 떠나니 땅을 치며 호곡(號哭)하는 정상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고 한다.

예절에 맞도록 초상을 마치고 평생을 두고여름이나 겨울이나  비바람이 치고 눈이 쌓여도 성묘를 하루도 쉬는 일이 없었고 철에 따라 새로 나오는 음식은 먼저 선영(先塋)에 제사지내지 아니하고는 절대 입에 대는 일이 없었다.

침모에게 뿐만아니라 계모에도 지극한 효도를 했는데, 계모  신씨(申氏)가 공의 이복 막내아우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공의 집에서 한참 떨어진 거리에 있고 또 강을 건너야 갈 수 있는 데도 하루 세 번 씩 꼭 문안을 드리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가지고 가서 손수 봉양하고, 계모의 몸이 불편하면 하던 일을 모두 중지하고 시중 드리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고을에서는 효자로써 여러 번 천거하였으나 공은 효도 한 일이 없다하고 극력 상 받기를 반대하였다고 한다.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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