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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중화양씨(楊)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중화양씨)

 

본관(本貫): 중화(中和)

시조(始祖): 양포(楊浦)

유래(由來):

 

중화양씨(中和楊氏) 고려(高麗) 고종(高宗  : 23 , 재위가간  : 12131259) 때 정승(政丞)을 역임하고 당악(唐岳 : 중국의  옛 지명) ()에 봉해진 양포()를 시조(始祖)로 하고 중화(中和)를 본관(本貫)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양동무(楊東茂)

()의 아들  동무(東茂)가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양경무(楊慶茂)

경무(慶茂)가 문하시중(門下時中)을 역임하였다.

 

양견무(楊堅茂)

견무(堅茂)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다.

 

양원격(楊元格)

5세손 원격(元格)이 이조 판서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양희지(楊熙止)

1439(세종 21)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중화 ( 中和 ). 자는 가행(可行), 호는 대봉(大峰). 한 때 희지(稀枝)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미()이고, 아버지는 군수 맹순(孟淳)이며, 어머니는 직장 ( 直長 ) 정시교(鄭是僑)의 딸이다.

1462(세조 8)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1464년에 동료 유생들과 함께 세자가 추진하는 원각사 ( 圓覺寺 ) 개창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1474(성종 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편전에서 성종을 알현했을 때 왕으로부터 희지라는 이름과 정부(楨父)라는 자()를 받았다.

이 해 검열에 임용되었으며, 이듬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고, 1475년부터 3년간 사가독서 ( 賜暇讀書 )하였다. 1477년 저작 ( 著作 박사를 거쳐, 이듬해 부수찬 ( 副修撰 )에 올라 경연관을 겸직했고, 이어서 교리 ( 校理 문학·검상을 역임하였다. 1483년 정희왕후(貞喜王后)의 상을 당해 산릉도감낭첨(山陵都監郎廳)을 맡아 이를 잘 처리하였다.

이어 1487년 예조좌랑,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쳐 1489년 장령 ( 掌令 )이 되었다. 그 뒤 1494년 연산군 즉위 후 홍문관전한을 거쳐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서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1497년 직제학이 되었다. 1496년 좌부승지, 1498년 대사간으로 있다가 충청도관찰사로 나간 뒤 바로 사직하였다.

1500년에 다시 부총관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박림종(朴林宗) 등을 구하기 위해 소를 올렸다가 우의정 성준 ( 成俊 )의 배척을 받은 데다가, 왕으로부터 임상홍 (任士洪)의 당여로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어지럽히는 자로 지목받아 익산에 부처되었다. 1502년에 죄가 풀려 동지중추부사로 서용되고 겸세자우부빈객(兼世子右副賓客)이 되었다. 이듬해 동지성균관사를 거쳐 한성부우윤에 이르렀다.

문장에 뛰어나고 재주가 있었으나 임사홍· 유자광 ( 柳子光 노공필(盧公弼) 등과 친하고, 임금의 뜻만 맞추려 하는 등 출처(出處)에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대봉집이 있다. 대구 오천서원 ( 梧川書院 )에 제향되었다.

 

양덕록(楊德祿)

1553(명종 8)1635(인조 13).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본관은 중화 ( 中和 ). 자는 경유(景綏), 호는 회헌(悔軒). 어릴 때부터 용맹해 사냥을 즐겼으나, 어머니의 타이름을 듣고 학문에 힘썼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제자백가를 익혔으며, 특히 손자 ( 孫子 오기(吳起)의 병서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봉황대 ( 鳳凰臺 ) 밑에 강정(江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형 덕희(德禧덕조(德祚)와 함께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1588(선조 21) 윤두수 ( 尹斗壽 )가 평안도순찰사로 있으면서 주관한 평양지 平壤誌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평양까지 파천하자, 난에 대한 방책과 회복책을 건의해 선조의 칭찬을 들었다.

6월에 일본군이 평양으로 진격해오자, 평양을 사수할 것을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용봉촌(龍鳳村)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해 적개군(敵慨軍)이라 일컬었다. 이 때 인근에서 전 판관 장이덕(張以德)과 전 부장 ( 部將 ) 고충경(高忠敬) 등도 의병을 일으켰다.

용강(龍岡)에 들어가 있던 서윤 ( 庶尹 ) 남복흥(南復興)이 수천 명을 모아 대보산(大寶山) 서쪽에 진을 치자,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적교포(狄橋浦)에 진을 치고 지켜 적병이 대동강 서쪽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명군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종질 의직(懿直), 친우 이학정(李鶴禎)과 같이 3,000석의 군량을 모아 명나라의 원군에 조달한 공으로 이듬해 예빈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01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1610(광해군 2)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정묘호란 때에는 75세의 노령으로 유생들을 이끌고 문묘의 위패를 받들고 피난하였다. 서북인이 조정에 등용되지 못함을 잘못으로 여겨 1632(인조 10)에는 서북 출신의 등용을 역설하는 소를 올렸으며, 이후 평양 출신 황윤후 ( 黃胤後 )가 사헌부로 진출할 수 있었다.

또 이 상소로 전옥서참봉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에는 이원익 ( 李元翼 )에게 청해 홍범서원(洪範書院)을 중건했고, 그 뒤 1608년에 인현서원 ( 仁賢書院 )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양현망(楊顯望)

의직(懿直)의 증손 현망(顯望)은 현종(顯宗) 때 문과(文科) 급제하여 군수(郡守부사(府使) 등 외직을 역임하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망(名望)이 높았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중화 양씨(中和楊氏)는 남한(南韓)에 총 1,154가구, 4,7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사진 설명을 넣으세요.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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