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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양씨(楊)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楊(청주양씨)

 

본관(本貫): 청주(淸州)

시조(始祖): 양기(楊起)

유래(由來):

 

청주 양씨(淸州楊氏)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나라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른 양기(楊起)가 황제(皇帝)의 명()을 받고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 충령왕비)를 배종(陪從)하여 고려(高麗) 원종(元宗) 때에 들어와서 정착(定着)하게 된 것이 우리나라 양씨(楊氏)의 시조(始祖)가 된다.

그 후 삼한창국공신(三韓昌國功臣)으로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졌고 관적(貫籍)을 하사(下賜) 받음으로서 후손들이 본관을 청주(淸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양지수(楊之壽)

()의 아들 지수(之壽)가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라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양백연(楊伯淵)

?1379(우왕 5). 고려 후기의 무신. 공민왕 초에 판각문사(判閣門事)가 되었다. 뒤에 상호군 ( 上護軍 ) 최영 ( 崔瑩 ) 휘하에서 종군, 1363(공민왕 12)에 김용 ( 金鏞 )이 일으킨 흥왕사 ( 興王寺 )의 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1등공신에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이 되었으며, 개성윤(開城尹)에 임명되었다가 극성방어사(棘城防禦使)가 되었다.

1365년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원나라에 가서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죽음을 알리고 돌아와 서북면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가 되었다. 1370년에는 서북면부원수(西北面副元帥)로서 지용수 ( 池龍壽 이성계 ( 李成桂 임견미 ( 林堅味 ) 등과 함께 동녕부 ( 東寧府 )를 쳐서 공을 세웠다.

이듬 해 전라도도순문사가 되었다가 동강도지휘사(東江都指揮使)가 되어 예성강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 1373년에 서북면도순찰사가 되었고, 이듬 해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었다. 1375(우왕 1)에 심왕 ( 瀋王 ) ()가 반적(叛賊) 김의 ( 金義 )를 거느리고 들어온다는 소문이 있자, 문하평리상의(門下評理商議)로서 안주상원수(安州上元帥)가 되어 이에 대비하였다.

1377년에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이성계 등과 함께 왜구를 격파했으며, 그 해에 찬성사 ( 贊成事 )가 되어 제조정방(提調政房)을 겸하였다.

그 뒤 왜구의 침입이 심해지자 이에 대비하다가, 진주 반성현(班城縣)에서 왜구를 크게 쳐부수고 개선하였다. 이 때부터 전공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인임 ( 李仁任 임견미 등의 미움을 받아 합주(陜州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로 귀양 갔다가 살해당하였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양영수(楊英秀)

기의 증손 영수(英秀)가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중흥시켰다.

 

양정(楊汀)

?1466(세조 12).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청주라고 알려져 있지만, 자세하지 않다. 무예가 뛰어난 무인으로서 내금위 ( 內禁衛 )의 무사로 발탁되었으나 유명하게 된 것은 단종대에 수양대군에게 발탁되면서부터였다. 당시에 수양대군은 상당한 수의 무사들을 불러모았는데, 그도 한명회 ( 韓明澮 )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이 당시의 집정대신이며 그의 반대파였던 김종서 ( 金宗瑞 황보 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을 때, 적극적으로 그 일에 관여한 공로로 정난공신 ( 靖難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청원군(淸原君)에 봉해졌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좌익공신 ( 佐翼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양산군(楊山君)에 봉하여졌다.

이 후 공조판서·지중추원사 등 중앙의 주요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나, 주로 함경도·평안도 등 북방의 변경지대에서 근무하였다. , 그는 판경성부사를 거쳐, 1461(세조 7)에는 함길도·평안도의 도체찰사, 1463년에는 평안도도절제사 겸 영변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처럼 오랫동안 북방의 변경지대에서만 근무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1466년에 중앙에 소환되자 세조가 북방에서 오래 근무한 일로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세조에게 왕위를 선위 (禪位)하라고 진언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처형되고, 아들들은 성주의 관노가 되었다. 이러한 그의 언동이 기록된 세조실록에서 당시의 사관은 그가 훈구대신임에도 불구하고 변방에서만 근무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평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언동을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사언(楊士彦)

1517(중종 12) 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인 · 서예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 완구(完邱) · 창해(滄海) · 해객(海客). 주부인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형 사준(士俊), 아우 사기(士奇)와 함께 글에 능하여 그 이름이 중국의 미산삼소(眉山三蘇)에 견주어졌다. 아들 만고(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양사언은 1546(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 · 함흥 · 평창 · 강릉 · 회양 · 안변 · 철원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하였으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 ’ 이라 새겨진 그의 글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 군수로 있을 때는 선정으로 통정대부 ( 通政大夫 )의 품계(品階)를 받았고, 북변의 병란을 미리 예측하고 마초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함에 대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릉 ( 智陵 )에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로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양사언은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도 아니하였다. 그의 글씨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안평대군 ( 安平大君 ) · 김구 ( 金絿 ) · 한호(韓濠)와 함께 조선 전기 4대서가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한시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워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평을 받았다. 가사 ( 歌辭 )에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 美人別曲 과 을묘왜란 때 남정군(南征軍)을 따라 전쟁터에 나갔다가 지은 남정가 南征歌 가 있다. 이밖에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 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한편, 그는 남사고 ( 南師古 )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봉래집 蓬萊集 이 있고, 그가 지은 미인별곡 과 허강(許 艮 )이 지은 서호별곡 西湖別曲 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응춘(楊應春)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인경(仁卿), 호는 도곡(道谷). 아버지는 주부 충백(忠伯)이다.

온양현감(溫陽縣監)으로 재직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 ( 趙憲 )과 함께 청주성의 탈환전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이어서 금산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왜적을 베고, 조헌과 함께 진지에서 전사하였다.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은진의 갈산사(葛山祠)에 제향되었다.

 

양순민(楊舜民)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홍농군(弘農君)에 봉해짐.

 

양만고(楊萬古)

1574(선조 7) 1655(효종 6).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도일(道一), 호는 감호(鑑湖) · 돈호(遯湖) · 비로도인(毗盧道人). 강릉 출신. 증조는 제달(悌達)이고, 할아버지는 희수(希洙)이며, 아버지는 부사 사언(士彦)이다. 일찍이 생원이 되고, 1610(광해군 2)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39(인조 17)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어 시폐(時弊)를 논하는 조진설치4條陳雪恥四策 을 상소하고 이어서 통진부사를 지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서예와 문장에 두루 능하였다. 글씨로 포천의 장령정희등묘표 掌令鄭希登墓表 가 있다

 

 

楊士彦(양사언) 선생의 일화.

양사언과 소녀

안변 촌가 출신의 16세 소녀가 우연히 지나가던 한 늙은 양반 양공(楊公)을 만나 정성어린 한 끼니를 대접하였다. 양공은 그 보답으로 소녀에게 선물을 하나 주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수년 후 그 소녀는 양공이 준 선물을 혼례 때 받는 예폐(禮幣)라고 고집하고 그여이 양문(楊門)으로 들어가서 살게 된다.
양공은 소녀를 별로 돌보지 않았으나 소녀는 정성껏 양공을 섬기고 집안 살림에 성심으로 힘을 썼다. 양공은 소녀의 정성에 감동하고, 소녀는 양공의 사랑을 얻어 드디어 아들 둘을 낳는다.

아들들이 7, 8세 되자 여인은 자하동에 집을 짓고 아들을 대리고 나가서 살게 되었다.

어느 날 자하동에 놀러 나왔다가 소나기를 만난 성종은 우연히 이 집에 들리게 되는데, 총명한 두 아들을 본 성종이 두 아들을 발탁하여 대권로 입궐하게 하고 동궁과 친구가 되어 입신출세한다.

그 아들 중 하나가 바로 陽士彦(양사언)이 었다.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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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청주 양씨(淸州楊氏)는 남한(南韓)에 총 6,856가구, 27,83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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