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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종어씨(魚)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함종어씨)

 

본관(本貫): 함종(咸從)

시조(始祖): 어화인(魚化仁)

유래(由來):

 

함종(咸從)은 평안남도(平安南道) 강서군에 위치한 지명(地名)이다.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중국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풍익현(馮翊縣) 출신인 어화인(魚化仁)이 남송(南宋) 때 난을 피하여 동래(東來)해 강원도 강릉부(江原道江陵府)에 뿌리를 내린 것이 시초이다.

그 후 다시 평안도 함종현(平安道咸從縣 : 지금의 강서군)으로 옮겨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고려 명종(明宗)때 인장 동정(仁長同正)을 지낸 어화인(魚化仁)을 시조로 하고 함종(咸從)을 본관(本貫)으로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어변갑(魚變甲)

1381(우왕 7)1435(세종 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함종 ( 咸從 ). 자는 자선(子先), 호는 면곡(綿谷). 득룡(得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백유(伯遊)이고, 아버지는 목사 연()이며, 어머니는 이운길(李云吉)의 딸이다.

1399(정종 1)에 생원이 되고, 1408(태종 8) 식년문과에 장원한 뒤 교서관부교리(校書館副校理성균관주부를 거쳐, 좌정언(左正言우헌납 ( 右獻納 )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충주판관일 때 아버지 연은 하양현감이었는데, 상소하여 부자의 직책을 바꿔달라 하여 태종은 연의 직급을 올려주었다.

1420년에 집현전이 발족되자 응교 ( 應敎 )로서 지제교 ( 知製敎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겸임하고 1424년에는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그는 늙은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관직을 버리고 함안으로 돌아갔는데, 조정에서 그의 행동과 의리를 아껴 김해부사·사간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마치었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고성의 면곡서원(綿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어효첨(魚孝瞻)

1405(태종 5) 1475(성종 6). 조선 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함종 ( 咸從 ). 자는 만종(萬從), 호는 구천(龜川). 백유(伯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사 연()이고, 아버지는 집현전직제학 변갑(變甲)이며, 어머니는 직제학 성사제(成思齊)의 딸이다. 좌의정 박은(朴 賻 )의 사위이다.

1423(세종 5)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9년 식년 문과에 급제, 이듬해 예문관검열에 선임되었다. 이어 대교가 되어 기사관으로서 태종실록 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문종이 동궁일 때 선발되어 좌정자, 좌우사경(左右司經), 문학 ( 文學 )을 거쳐, 1443년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가 되어 서연관으로 문명을 날렸다.

1446년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 1449년 직집현전(直集賢殿)을 역임하고, 예법 · 공법 ( 貢法 ) · 사창법(社倉法)에 관한 의견을 제시했으며, 고려사 의 체재를 기() · () · () · ()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 채택되었다.

1449년 집의 ( 執義 )가 되어 불교와 음사를 배척하는 소를 올리고, 부중(府中:중앙 정부 관청이 있는 곳)에 있는 음사를 철거하였다. 1453(단종 1) 판내자시사(判內資寺事)에 오르고, 전라도를 안찰해 폐정을 바로잡았으며, 이듬해 예조참의에 올랐다.

이 당시 당대의 실권자인 수양대군이 주장하는 납비(納妃) 문제를 적극 반대하고, 1455(세조 1) 세조가 왕권 강화를 꾀하기 위해 의정부의의제(議政府擬議制)를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로 변경할 때 하위지 ( 河緯地 ) · 이예장 ( 李禮長 ) 등과 함께 강력히 반대하는 등 세조의 정책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세조 즉위 후 원종공신 ( 原從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이듬해 이조참판으로 승진, 의금부제조를 겸해 이른바 사육신 사건을 다스리면서 점차 중용되었다.

그 뒤 호조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1458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중추원부사 · 한성부윤 · 형조참판을 거쳐 공조참판이 되고 1463년 이조판서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가을 지중추원사로 옮기고, 1467년 영중추부사, 1468(예종 즉위년) 동지중추부사, 1474(성종 5) 판중추부사로서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

아버지와 장인으로부터 가학(家學)에 영향을 받아 문명을 드날렸다. 성리학 특히 예학 ( 禮學 )에 깊어 세종 말년에는 집현전교리로서 서연관을 겸할 때 세자에게 예기 를 강하기 위해 예기 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중요 학설을 발췌해 주석을 단 예기일초 禮記日抄 를 지었다. 또한, 예법을 존중해 풍수지리설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세종조 후반에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義 고려사 의 편수에도 참여하였다. 큰아들 세겸(世謙)은 좌의정을, 둘째 아들 세공(世恭)은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어세겸(魚世謙)

1430(세종 12) 1500(연산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함종 ( 咸從 )이다. 자는 자익(子益)이다. 호는 서천 ( 西川 )이다. 목사 연()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직제학 변갑(變甲)이다.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효첨(孝瞻)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박은(朴 賻 )의 딸이다. 우참찬 세공(世恭)의 형이다.

1451(문종 1)에 생원이 되고, 1456(세조 2)에 동생 세공과 동방(同榜)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 해에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 봉상시녹사(奉常寺錄事)를 거쳤다. 1459년에 천추사 ( 千秋使 ) 이극배 ( 李克培 )의 수행관인 이문학관(吏文學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문명(文名)을 드러내 예문관대교(禮文館待敎) ·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 · 성균관주부(成均館主簿) · 예문관봉교(禮文館奉敎) 등 요직을 거쳤다. 1461년 이조좌랑, 1464년 이조정랑에 임용되었다. 1466년에 김국광 ( 金國光 ) · 한계희 ( 韓繼禧 )의 천거로 종부시정(宗簿寺正)으로 예문관직제학을 겸하였다. 이듬 해 우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에 이르렀다.

1469(예종 1)에는 강순 ( 康純 ) · 남이 ( 南怡 )의 역모에 관한 옥사(獄事) 이후 익대공신 ( 翊戴功臣 ) 3등에 책록되고 함종군(咸從君)에 봉해졌다. 이듬 해에 평안도관찰사로 외보되었다. 성종이 즉위한 뒤, 경직인 동지성균관사 ( 同知成均館事 )가 되었다. 1471(성종 2) 예조참판에 올랐다.

1474년 겸오위도총부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냈다. 1479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당시 아우 세공이 병조판서로 재임하고 있어 상피법(相避法 : 친척이나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끼리는 같은 곳에서 벼슬을 서로 피하게 하던 제도)에 저촉되는 까닭에 한성부좌윤으로 옮겼다.

같은 해 말에 건주위(建州衛) 정벌 승전을 알리는 주문사 ( 奏聞使 )로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외교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명나라에서 귀국할 때 오륜서 五倫書 · 국자감통지 國子監通志 등 귀중한 서책을 들여왔다.

귀국 후 전라도관찰사 · 공조판서를 거쳤다. 그러다 대간 ( 臺諫 )의 탄핵을 받아 일시에 이조참판으로 좌천되었다. 1482년에 봉조하 ( 奉朝賀 )가 되었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형조판서 · 경기도관찰사 · 한성부판윤 · 호조판서 ·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88년 말에는 홍문관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좌참찬 · 우찬성 · 좌찬성을 거쳐 1495(연산군 1)에 우의정, 이듬 해에 좌의정에 올랐다. 1498년 무오사화 때는 사초 ( 史草 ) 문제로 탄핵을 받아 좌의정을 물러나면서 부원군 ( 府院君 )으로 진봉(進封)되고 궤장( 廓 杖)을 하사받았다.

그는 학식이 뛰어날 뿐 아니라 소절(小節 : 사소한 절개)에 얽매이지 않았다. 형조판서로 있을 때는 출퇴근 시간에 개의하지 않아 오고당상(午鼓堂上) ’ 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정치를 능률적으로 하여 결송(決訟 : 소송의 결정)이 지체되지 않았다 한다. 문무를 겸비하여 내외치(內外治)에 많은 업적이 있다.

특히 성종 말에는 권근 ( 權近 ) · 윤회 ( 尹淮 ) · 변계량 ( 卞季良 ) · 최항 ( 崔恒 )의 뒤를 이어 문형(文衡 : 대제학의 별칭)을 담당하였다. 1483년 서거정 ( 徐居正 ) · 노사신 ( 盧思愼 )과 함께 연주시격 聯珠詩格 황산곡시집 黃山谷詩集 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1490년 임원준 ( 任元濬 ) 등과 함께 쌍화점 雙花店 · 이상곡 履霜曲 등의 악사(樂詞)를 개찬(改撰)하였다.

같은 해 가을에는 주례 周禮 를 개주(改註)하여 왕에게 올렸다. 1492년 유자광 ( 柳子光 ) 등과 함께 전하는 여러 진서(陣書)의 이동(異同)을 참작해 진법 陣法 을 편찬하였다. 저서로는 서천집 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어세공(魚世恭)

1432(세종 14) 1486(성종 1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함종 ( 咸從 ). 자는 자경(子敬), 호는 송서(松西). 목사 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제학 변갑(變甲)이고, 아버지는 판중추부사 효첨(孝瞻)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박은(朴 賻 )의 딸이다. 좌의정을 역임한 세겸(世謙)의 동생이다.

1456(세조 2) 식년 문과에 정과로 형 세겸과 함께 급제해, 이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 박사를 거쳐 1459년에 봉상시녹사(奉常寺錄事), 이듬해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1462년 승문원부교리(承文院副校理)가 되었다.

1465년 공조좌랑으로 재직 중 경국대전 형전의 교정을 담당했고, 이어 성균사예를 거쳐 1466년 승정원동부승지 · 우부승지가 되고, 평안도에 파견되어 유이민(流移民)을 추쇄(推刷 : 찾아내어 본고장으로 돌려보냄.)하였다. 1467년 이시애 ( 李施愛 )의 난이 일어나자 함길도관찰사에 부임, 난의 평정에 공을 크게 세우고 적개공신 ( 敵愾功臣 ) 2등으로 아성군(牙城君)에 봉해졌다.

1469(예종 1)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듬해에는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472(성종 3)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474년 공조 ·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479년 우참찬에 이르렀다. 이어 형조 · 호조의 판서를 거쳐 1484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경학과 역학 ( 易學 )에 능하고 율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노사신 ( 盧思愼 ) · 김국광 ( 金國光 ) 등과 세조가 저술한 역학계몽요해 易學啓蒙要解 를 증보해 찬진하였다.

또한 1464(세조 10) 천문문(天文門) · 풍수문(風水門) · 율려문(律呂門) · 의학문(醫學門) · 사학문(史學門) · 시학문(詩學門)7개 부문으로 나누어 연소한 문신들에게 해당 학문을 연구하도록 했는데, 그는 율려문에 배속되어 왕에게 율려신서 律呂新書 를 진강해 칭송을 받았다. 시호는 양숙(襄肅)이다.

 

어석정(魚錫定)

1731(영조 7)1793(정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종 ( 咸從 ). 자는 정보(精甫) 또는 인지(鱗之), 호는 신암(愼菴). 경기도관찰사 진익(震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윤 ( 右尹 ) 사형(史衡)이고,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 領敦寧府事 ) 유구(有龜)이며, 어머니는 김동열(金東說)의 딸이다. 당대 명망 있는 학자인 큰아버지 유봉(有鳳)으로부터 수학하였다.

1761(영조 37) 음보로 목릉참봉(穆陵參奉)에 임명되었다. 그 뒤 통천군수를 거쳐, 1767년 창평군수로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768년에 승지가 되고, 1771년에는 도승지에 올랐다. 그 뒤 병조참판·병조참의·부총관·도승지, 병조와 호조의 참판, 한성부의 좌윤과 우윤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청송·장단·월성·천안·성천 등지의 부사와 평안병우후(平安兵虞候)를 역임하였다.

1788(정조 12)에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1790년에는 안변부사로 재직 중 암행어사 서영보 ( 徐榮輔 )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재기용되었다. 1792년 도총관 ( 都摠管 )에 이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신암집2권이 있다

 

어재연(魚在淵)

1823(순조 23)1871(고종 8). 조선 후기의 무장. 본관은 함종 ( 咸從 ). 자는 성우(性于). 용인(用仁)의 아들이다. 1841(헌종 7) 무과에 급제,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66년 프랑스 로즈(Roze,P.G.)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병인양요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때 장시 ( 場市 )를 개설하는 등 변경 무역을 활성화하였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61일 손돌목孫乭項포격사건이 발생해,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하자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광성보 ( 廣城堡 )로 급파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 부임, 미군과 대치하였다.

610일 미군은 강화도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 ( 草芝鎭 )을 점거하였다. 611일 덕진진 ( 德津鎭 )을 함락한 미군은, 마지막으로 광성보공략에 나섰다. 이 때 광성보에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하고 침공해 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작전을 개시해서, 해상에서는 함포사격, 지상에서는 야포사격으로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어재연군 사이에는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는 임전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병조판서지삼군부사(兵曹判書知三軍府事)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어윤중(魚允中)

1848(헌종 14) 1896(건양 1). 조선 말기의 정치가. 본관은 함종 ( 咸從 ). 자는 성집(聖執), 호는 일재(一齋). 충청북도 보은 출신. 약우(若愚)의 아들로 태어나 9세에 어머니를,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을 하면서 밤에 독서하였다.

20세 때인 1868(고종 5) 지방 유생 50명을 뽑아 바로 전시 ( 殿試 )를 볼 수 있게 하는 칠석제(七夕製)라는 자격시험에 장원급제하였다. 이듬 해인 1869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정원의 주서로 임명되어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뒤이어 헌납 · 교리 · 지평 · 필선을 거쳐 양산군수를 역임하였다.

1877년 전라우도암행어사로 임명되어 만 9개월간 전라도 일대를 고을마다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지방행정을 정밀하게 조사해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돌아왔다. 이 때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아 국왕과 대신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때의 개혁안에서 전라도지방 농민의 참상 원인이 조세수탈에 있음을 지적하고, 구체적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잡세혁파, 지세제도(地稅制度) 개혁, 궁방전 · 아문둔전제도의 개혁, 환곡제도 폐지, 삼수포세(三手砲稅)의 폐지, 재결감세(災結減稅), 도량형의 통일, 지방수령의 5년 이상의 임기 보장, 조운선제도(漕運船制度) 개혁, 역로제도 개혁 등이다.

고종은 이 개혁안을 경청해 어윤중과 오랫동안 논의했으나, 개혁안은 결국 채택되지 못하였다. 그 뒤 갑오경장 때는 자신의 손으로 더욱 전진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가 정계의 주요인물로 등장해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881년에 일본 국정시찰단인 신사유람단 ( 紳士遊覽團 ) 60명을 일본에 파견할 때 조사(朝士)의 한 사람으로 선발된 이후이다. 박정양 ( 朴定陽 ) · 홍영식 ( 洪英植 ) 등과 함께 이 시찰단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재정 · 경제 부문을 담당하였다.

이 무렵에 국내에서는 수신사 김홍집 ( 金弘集 )이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조선책략 朝鮮策略 을 둘러싸고 유생들의 위정척사론이 비등하였다. 때문에 신사유람단의 파견은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며, 시찰단원의 조사들은 동래암행어사로 발령을 받아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어윤중은 18811월 동래암행어사의 발령을 받고 그의 수행원으로 유길준 ( 兪吉濬 ) · 유정수(柳定秀) · 윤치호 ( 尹致昊 ) · 김양한(金亮漢) 등과 통역 · 하인 등을 거느리고 4월 부산을 출항하였다. 나가사키(長崎) · 대판(大阪) · 경도(京都) · 고베(神戶) · 요코하마(橫濱)를 거쳐 동경 ( 東京 )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약 3개월간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시설 · 문물 · 제도 등 모든 부분을 상세히 시찰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다. 다른 조사들은 이 해 7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어윤중은 자기의 수행원인 유길준과 윤치호를 일본에서 더 공부하도록 남겨둔 뒤, 다른 수행원만 거느리고 한달 더 일본에 체류했다가 청나라 톈진(天津)에 가 있는 영선사 김윤식 ( 金允植 )과 합류하기 위해 청나라로 갔다.

이 해 9월 청나라에 도착한 그는 영선사 김윤식과 공학도를 만나보고 중국의 개화정책을 견문하였다.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 등과 회담한 다음 이 해 12월 귀국하였다. 그는 1년간의 일본 · 중국 시찰의 복명서를 국왕에게 제출하였다. 여기서 그는 견문한 사실과 조선의 개화정책을 위한 의견을 개진하여, 초기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82년 귀국한 지 두 달 뒤에 문의관(問議官)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시 파견되었다. 청나라의 이홍장이 조미수호조약의 체결을 강력히 권고하고 그 초안까지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조정에서 그에 대한 문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청나라에 파견되어 있는 공학도들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해 4월에 청나라에서 조미통상조약 문제를 심의하고 조미수호조규에 합의하였다. 영국대표와 만나 조영수호조규문제를 독일대표와 만나 조독수호조규문제를 협의하였다. 톈진에 머물러 있는 동안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므로 청군과 함께 귀국했다가 난이 평정된 뒤 다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이 때 이홍장 등이 이미 초안해 놓은 불평등조약인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 ( 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 )에 조인하는 굴욕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종래 청나라에 대하여 비교적 호의를 가지고 있던 그가 그 뒤 청나라에 대해 냉담하게 된 것은 이 때 청나라가 주장한 종주권의 부당성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1883년에는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임명되어, 조중수륙무역장정에 의거한 북방무역에서 조선측의 이익을 증진시키며 국경을 튼튼히 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18833월에 청나라측과 중강무역장정(中江貿易章程)을 협정하였다.

6월에는 회령통상장정(會寧通商章程)을 협정했으며, 도문강(圖門江)과 두만강의 국경지대를 조사하였다. 그의 이러한 활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1884년에 서북경략사와 함께 처음에는 병조참판, 뒤에는 호조참판을 겸임하였다.

이 무렵의 활동은 매우 정열적이었으며 눈부신 바가 있었다. 그는 1883년에 20개조로 된 과감한 정부기구개혁안을 제출 하였는데, 이 개혁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그가 잠시 보은에 귀향해 있는 동안에 1884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그는 이 정변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민비정부는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1893년에 동학도들이 보은집회를 열고 교조신원(敎祖伸寃)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천명해 호서 · 호남지방이 동요하게 되자 양호순무사(兩湖巡撫使)로 임명, 파견되었다. 당시 관료들이 모두 동학도들을 비도(匪徒)라고 탄압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어윤중은 처음으로 동학도들을 대담하게 민당(民黨) ’ 이라고 하여 그들의 요구에 동정을 표시하였다. 이로 인해 동학농민들로부터는 지지를 얻고 관료들로부터는 빈축을 샀다. 하층농민들로 구성된 동학도들을 민당 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1894년에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김홍집 내각과 박정양 내각에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이 되어 재정 · 경제부문의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그의 잡세 혁파 및 무토궁방세 혁파와 조세법정주의에 의거한 조세제도의 개혁은 농민층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다.

어윤중은 온건개혁파에 속한 인물이었지만 개인적 성품은 매우 강직하고 담대하였다. 갑오경장 중에는 고종과 민비의 작은 요청도 법률에 어긋난 것은 모두 거절하였다. 일제측도 300만원의 차관을 일본화폐로 주려고 제의했다가 은()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당하였다.

갑오경장의 재정 · 경제부문의 전반적 대개혁은 그가 중심이 되어 단행되었다. 18962월 아관파천 ( 俄館播遷 )에 의해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되자 대부분의 각료들이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어윤중은 김홍집과 함께 일본으로의 망명을 거절하고 고향인 보은으로 피신하였다. 어윤중은 자신이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었으므로 고향으로의 피란이 안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경기도 용인을 지날 때 산송문제(山訟問題)로 원한을 품은 향반 무리가 머슴을 동원하여 기습, 189621749세의 나이로 피살되었다. 1910년에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로는 동래어사서계 東萊御史書啓 · 수문록 隨聞錄 · 서정기 西征記 · 간독요초 簡牘要抄 · 종정연표 從政年表 등이 있다. 1979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어윤중전집 이 간행되었다.

 

어윤희(魚允姬)

1877(고종 14)1961. 독립운동가·사회사업가. 본관은 함종 ( 咸從 ). 충청북도 충주 출생. 현중(玄仲)의 무남독녀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고, 16세에 결혼하여 3일 만에 남편이 동학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죽어 청상과부가 되었다. 새로운 삶을 위하여 개성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1910년에 북부교회 교인이 되었다.

1912년 개성 미리흠여학교(美理欽女學校) 기예과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전도사로 외딴섬의 전도와 독립정신계몽을 자원하였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수백장이 북부교회 목사 강조원(姜助遠)에게 전달되었으나 그가 소심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자, 어윤희가 보따리장사를 가장하고 대낮에 집집마다 독립선언서를 돌렸다.

이것을 본 호수돈여학교 사감 신관빈(申觀彬), 장님전도부인 심명철(沈明哲) 등이 합류하였다. 그 결과 개성의 만세시위운동은 여성들에 의하여 선도되었다. 만세시위 주모자로 잡혀 2년간 옥고를 치르는 가운데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고자 재감자들과 긴밀히 연락하여 일제히 옥중만세를 불렀다.

출감한 뒤에도 독립운동자들에게 비밀리에 여비를 마련하여주었으며, 육혈포탄환 등을 감추어 전달하기도 하였다. 노년에 개성에 유린보육원(有隣保育院)을 설립하여 고아사업을 하였으며, 6·25 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1952년 서강교회 장로로 10년간 시무하였으며, 1953년 나이팅게일기장, 1959년 인권옹호공로표창을 받았다.

그뒤 서울 마포에 서강유린보육원을 설립, 운영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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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함종 어씨(咸從魚氏)는 남한(南韓)에 총 2,687 가구, 10,9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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