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 juntonggahun@naver.com
>> 한국의 성씨


영월엄씨(嚴)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알아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영월엄씨)

 

 

본관(本貫): 영월(寧越)

시조(始祖): 엄임의(嚴林義)

유래(由來):

 

영월 엄씨(寧越嚴氏)의 시조(始祖) 엄임의(嚴林義)는 한()나라 시인(詩人) 부양(富陽 : 一名 嚴子 先生)의 후예이며 당()나라 상국(相國) 화음(華陰)의 일족(一族)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당()나라 현종(玄宗 : 6대 임금, 재위기간 : 712756)이 새로운 악장(樂章)을 만들어 이를 인근의 여러 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보낸 파락사(波樂使), 신라(新羅)에 도래(東來) 하였다가 본국(本國)에서 정변(政變)이 일어나자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영월(寧越) 땅인 내성군에 안주(安住)한 것이 우리나라 엄()씨의 시원(始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조에 와서 그를 내성군(奈城郡)에 추봉(追封)하고 후손들에게 영월(寧越)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자, 후손들이 그 곳에 살면서 영월(寧越)을 본관(本貫)으로 삼아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 후 대()를 거듭하면서 참봉공계(參奉公系교수공계(敎授公系)37계통으로 갈라져서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으며,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특히 충절(忠節)의 가문(家門)으로 일컬어졌다.

 

가문의 중요 인물

 

엄태인(嚴太仁)

시조의 장남 태인(太仁)이 고향을 지키며 군기공파(軍器公派)를 이루었다.

 

엄덕인(嚴德仁)

시조의 차남 덕인(德仁)은 한양(漢陽)으로 이주(移住)하여 복야공파조가 되었다.

 

엄처인(嚴處仁)

시조의 3남 처인(處仁)은 함경도(咸鏡道)로 이주하여 문과공파조(文科公派祖)가 되어 현재 그의 후손들이 북한에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유온(嚴有溫)

11세손 유온(有溫 : 장군 비의 증손, 준의 아들)이 조선창업(創業)의 개국공신(開國攻臣)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총제(同知總制)를 역임했다.

 

엄흥도(嚴興道)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지사(志士). 본관은 영월(寧越). 영월의 호장으로 단종이 세조에 의하여 상왕 ( 上王 )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안치되었다가 시해되자, 그는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수습하였다. 단종이 승하한 이튿날 옥가(獄街)를 오가며 통곡하고 관을 마련하여 아전과 백성들을 모아 영월의 북쪽 5리쯤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장사지냈다.

1585(선조 18) 종손인 정병 ( 正兵 ) 엄한례(嚴漢禮)에게 호역(戶役)을 면제하고 노산군의 묘역을 수호(守護)하게 하였고, 현종 때 송시열 ( 宋時烈 )의 주청으로 자손을 등용하게 하였다. 숙종 때 공조참의에 증직 ( 贈職 )되었고, 영조 때 정문 ( 旌門 )을 내렸다. 뒤에 공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사육신과 함께 영월의 창절사 ( 彰節祠 )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엄흔(嚴昕)

1508(중종 3) 1543(중종 3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계소(啓昭), 호는 십성당(十省堂). 산수(山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회()이고, 아버지는 부장 ( 部將 ) 용화(用和)이며, 어머니는 김중함(金仲 歟 )의 딸이다.

1525(중종 20)에 생원이 되고, 1528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자 ( 正字 )에 임명된 뒤 검열을 거쳐 호당 ( 湖堂 )에 들어갔다. 그 뒤 저작 ( 著作 ) · 부수찬 · 수찬(修撰) · 전한 ( 典翰 ) · 이조좌랑 · 사인 ( 舍人 ) 등을 역임하고, 1530년에는 지방관의 비행을 적발하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되었다.

1531년에는 언로의 개방과 언관의 탄압중지 등을 건의하였다. 1541년 홍문관전한으로 있을 때 대간이 대신의 뜻에 맞추기 위하여 서경 ( 署經 )을 마음대로 바꾸는 행위를 비판하였다. 시문에 능하여 시조 1수가 가곡원류 에 전하며, 유저인 십성당집 1권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엄집(嚴緝)

1635(인조 13) 1710(숙종 3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경지(敬止), 호는 만회(晩悔). 인술(仁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후( )이고, 아버지는 감찰 ( 監察 ) 성구(聖耉)이며, 어머니는 안몽상(安夢尙)의 딸이다.

1673(현종 1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78(숙종 4) 정언 ( 正言 )이 되고, 부교리 ( 副校理 ) · 사간 · 집의 ( 執義 ) · 승지 등 주로 삼사 ( 三司 ) 청화직(淸華職)에 출입하였다. 1696년 개성부 유수에 승진되었다가 도승지로 전임되었다.

1701년 공조판서 때에 장희빈 ( 張禧嬪 )을 논죄하였고, 다음해 의정부좌참찬 · 예조판서를 역임한 뒤 우참찬으로 있을 때 병으로 치사하고 기사소(耆社所 : 기로소)에 들었다.

기개가 있고 청렴하였으며, 권문을 멀리하고 당쟁을 싫어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만년에 궁핍한 가운데 와병 사실이 상신(相臣 : 영의정 · 좌의정 · 우의정의 총칭) 서종태(徐宗泰)에게 알려지자 임금이 약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정헌(貞憲)이다.

 

엄성(嚴惺)

1575(선조 8)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경보(敬甫), 호는 동강(桐江). 증 통례 용화(用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공감정 서()이고, 아버지는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 인달(仁達)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 사복시정 진()의 딸이다.

1612(광해군 4) 사마시를 거쳐, 이 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 承文院 )에 보직되어 설서 ( 說書 )를 겸임하다가, 검열이 되었다. 1613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그것을 주장한 이위경 ( 李偉卿 ) 등을 성균관을 비롯한 사관(四館 : 성균관·예문관·승문원·교서관의 통칭)에서 정거(停擧 : 과거의 응시를 일정기간 정지시킴)시키는 처벌을 하도록 유생들을 주도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당한 뒤 양산에 퇴거하였다.

그 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검열로 등용되었다. 1625(인조 3) 사간을 거쳐 부교리 ( 副校理 전적 ( 典籍 집의 ( 執義 ) 등을 역임하고, 1627년 부응교 ( 副應敎 )에 이르렀다.

 

엄황(嚴愰)

1580(선조 13)1653(효종 4).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명보(明甫). 좌부장(左副將) 용화(用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이고, 아버지는 직장 ( 直長 ) 인달(仁達)이며, 어머니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 첨정 ( 僉正 ) ()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글을 배웠으나 붓을 꺾고, 1603(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로 등용되고, 1606(선조 39) 남해현령이 되었다. 이듬해 도총부도사가 되면서 비변사낭관을 겸임하였다. 이어서 안동판관을 거쳐 함안군수 등을 지내면서 청렴한 수령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청량산 ( 淸凉山 )을 수축해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곤양군수(昆陽郡守)로 있을 때에 시기하는 자들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정에 감동한 읍민들이 조정에 올라가 유임을 청원해 마침내 누명을 벗고, 그 곳 군수로 다시 부임하였다. 1618(광해군 10) 경상좌수사가 되면서 절충장군 ( 折衝將軍 )으로 승진하였다.

1624(인조 2) 경상우수사로 재직하던 중 관의 곡식을 빼돌렸다 하여 국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어 북쪽 여진족이 강성해지자, 이듬해 평산부사를 거쳐 의주부윤이 되어 변경의 방어에 힘을 기울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주부윤으로서 병사들을 정비해 끝까지 국경을 사수했으며, 그 공으로 가선(嘉善)으로 품계가 올랐다. 1631년에 훈련원도정이 되었다가 파주목사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봄에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고 이어 수안·영암·평해의 군수를 거쳐 충청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48(인조 26) 내직인 동지중추부사로 부총관을 겸하였다. 1652(효종 3) 영흥부사로 나갔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춘천지 春川誌가 있다.

 

엄정구(嚴鼎耉)

1605(선조 38) 1670(현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중숙(重叔), 호는 창랑(滄浪). 선공감정 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 인달(仁達)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황()이며, 어머니는 응교 ( 應敎 ) 이길(李 矯 )의 딸이다.

1630(인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의 권지 ( 權知 )에 보직되고 예절이 밝아 인조의 사랑을 받았다. 정언 ( 正言 )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설서 ( 說書 )로 남한산성에 왕을 호종하였다. 이듬해 돌아와 지평 ( 持平 )이 되고 1638년 충청도염문사(忠淸道廉問使)를 거쳐, 수찬 · 평안도도사에 이어 다시 수찬(修撰) · 의성현령 · 부교리 ( 副校理 ) · 지평 · 교리 · 헌납 ( 獻納 ) 등을 역임한 뒤 1647년 이조좌랑에 올랐다.

1649(효종 즉위년) 응교(應敎)를 거쳐, 집의 ( 執義 )로 있을 때 붕당조성을 비호하였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서용되었다. 1651(효종 2) 좌승지로 재직 중 김자점 ( 金自點 )이 처형되고 그 일당이 제거될 때 평소 그와 안면이 있다 하여 극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좌의정 한흥일 ( 韓興一 )이 과거 전랑 ( 銓郎 )으로 있을 때 김자점 일당의 천거를 거부한 사실을 들어 구명을 호소하여 면천에 중도부처(中道付處 : 유배지로 가도 도중에 정상을 참작하여 일정한 장소에 머물게 하던 죄형)되는 것으로 그쳤다. 그 뒤 등용되어 태복시정(太僕寺正) · 홍문관교리를 거쳐, 승지에 오르고 한성부좌윤에 이르렀다.

 

엄한명(嚴漢明)

한호(韓濩) 이후의 명필로 이름났던 한명(漢明)은 고금의 서법(대성한 집고첩(集古帖)만향제시초(晩香齊詩抄)등의 명저(名著)를 남겨 엄눈(嚴門)을 대표했다.

 

엄경수(嚴慶遂)

1672(현종 13) 1718(숙종 4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성중(成仲), 호는 부재(孚齋). 증조는 후( )이고, 할아버지는 성구(聖耉)이며, 아버지는 예조판서 집()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1705(숙종 3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벼슬길에 나갔다. 1716년 부제학 유봉휘 ( 柳鳳輝 )가 홍문록 ( 弘文錄 )을 작성할 때 서명균(徐明均) 16인과 함께 선발되어 기록되었으며, 곧 김재로 ( 金在魯 ) · 이진망 ( 李眞望 ) 등과 더불어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 해에 수찬 ( 修撰 )에 보임되었는데, 윤선거 ( 尹宣擧 ) · 윤증 ( 尹拯 ) 부자를 규탄하는 향유(鄕儒) 신구 ( 申球 )의 소가 있자, 이를 조의제문 弔義帝文 을 주석한 유자광 ( 柳子光 )의 음모와 같다고 통박하면서 윤증을 두둔하고 신구에게 죄줄 것을 계문(戒文)을 올렸다가 영의정 김재로 등이 사화를 일으킬 언동을 함부로 한다고 탄핵하여 삭출당하였다.

 

엄숙(嚴琡)

1716(숙종 42)1786(정조1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초명은 인(). 자는 유문(孺文), 호는 오서(梧西). 성구(聖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집()이고, 아버지는 수찬 ( 修撰 ) 경수(慶遂)이며, 어머니는 임순원 ( 任舜元 )의 딸이다.

1753(영조 29)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75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교리 ( 校理 )와 승지 등을 지냈고, 1771년 형조참판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때 그는 부당하게 업무처리를 하여 관원으로서의 위신을 추락시킨 지평 ( 持平 ) 이득화(李得華)와 좌참찬 신회 ( 申晦 ) 등을 파직하도록 하였으며, 그로부터 3년 뒤에는 전국의 한전(旱田)에 급재(給災 : 재해를 입은 논·밭에 대하여 세를 면제함)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평소에 늘 책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러한 것과는 달리 성격이 단호한 일면도 지니고 있어 한번 그가 상주(上奏 : 임금에게 아룀)할 때는 상하의 관원들이 모두 경청하였다. 더욱이 그가 일찍 예문관에서 봉직하고 있을 때 대신 김상로 ( 金尙魯 )가 체통에 어긋나는 행동을 취하자 신랄하게 규탄함으로써 시정하도록 하였다.

1773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중국에 들어가 크게 활약한 결과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이듬해 귀국하였는데, 돌아와서는 그간에 기록한 일기를 간행하였으며, 늙어서는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연행록 燕行錄이 있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엄도(嚴燾)

1777(정조 1)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진여(晉汝). 수찬 ( 修撰 ) 경수(慶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숙()이고, 아버지는 사헌(思憲)이며, 어머니는 임준(任 舌 )의 딸이다. 사면(思勉)에게 입양되었다.

1813(순조 1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821년에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수찬(修撰) · 교리 등을 선임하는 기록)에 오르고, 이듬해 도당록(都堂錄 : 홍문관의 수찬(修撰) · 교리 등을 선임하기 위한 의정부의 제2차 기록)에 오름으로써 교리(校理)가 되었다. 같은 해 교리로서 전년에 죽은 효의왕후 ( 孝懿王后 )의 빈궁을 옮겨야 한다고 직언하였다가 삼수로 유배되었다.

1823년에 석방되어 암행어사가 되었으며, 이듬해는 부시관(副試官)이 되었는데 시험의 관리에 소홀하였다고 하여 견책을 받고 파직당하기도 하였다. 1827년 다시 부수찬 ( 副修撰 )이 되었으며 1835(헌종 1)에 예방승지를 거쳐서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편저로는 엄도일록 이 있다.

 

엄석정(嚴錫鼎)

(순조 1)1875(고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대우(大友), 호는 가당(稼堂). 참판 기()의 아들이다. 1828년에 진사가 되었고, 헌종 때 당진현감을 거쳐 1844년에는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철종 때 김해부사를 거쳐 1864년 예방승지, 1865년 이조참판을 지냈다. 1869년에는 한성부판윤과 형조판서·의정부좌참찬을 지냈으며, 1872년 이조판서와 홍문관제학, 1874년 사헌부대사헌 등을 지내고, 뒤에 대호군이 되었다.

 

엄세영(嚴世永)

1831(순조 31) 190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윤익(允翼), 호는 범재(凡齋). 석우(錫愚)의 아들이다. 186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정원가주서 · 부사정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주서가 되었다.

1866년에는 홍문관부수찬 · 남학교수(南學敎授) · 부사과로 선전관 ·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10월부터 18674월까지 동지사 ( 冬至使 ) 이풍익(李 淵 翼)의 서장관 ( 書狀官 )으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부교리 · 교리 · 부수찬 · 부응교 · 사헌부집의 · 장악원정, 1868년에는 종친부정(宗親府正) · 분승지(分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6년만에 발탁되어 전라우도암행어사로 임명되었고, 1875년과 1878년에 이조참의를지냈다. 18812월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수행원으로 엄석주(嚴錫周) · 최성대 ( 崔成大 ), 통사로 서문두(徐文斗) 등을 대동하였다.

이 때 그가 시찰을 담당한 부서는 사법성(司法省)이었고, 이러한 일본 시찰이 토대가 되어 귀국 후 경리통리기무아문사 ( 經理統理機務衙門事 )로서 율례사당상(律例司堂上)이 되었다.

1882년에는 병조참판 · 한성부우윤, 임오군란 때에는 청군영접관(淸軍迎接官) · 한성부좌윤 · 성균관대사성, 1883년에는 한성부우윤 · 이조참판 · 예조참판 · 호군으로 정부당상(政府堂上), 1884년에는 한성부좌윤 · 반접관(伴接官)을 역임하였다.

1885년에는 정부유사당상(政府有司堂上)으로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묄렌도르프(M€[llendorf, 穆麟德)와 함께 거문도를 조사하였다. 1886년에는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 · 인천부사, 1888년에는 행호군(行護軍)으로 정부당상, 1890년에는 사헌부대사헌 · 한성부우윤, 1891년에는 형조참판 · 한성부좌윤 · 병조참판, 1893년에는 사헌부대사헌 · 병조참판 ·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행호군으로 삼남염찰사(三南廉察使)와 호남선무사로 임명되어 동학교도의 귀향을 주관하였다. 김홍집 ( 金弘集 ) 내각 성립 후 두 차례에 걸쳐 농상아문대신(農商衙門大臣) ·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1895년부터 1900년까지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 경상북도관찰사 · 종일품관으로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편찬서로는 일본문견록 日本聞見錄 · 일본문견별단초 日本聞見別單草 · 일본사법성시찰기 日本司法省視察記 등이 있다. 시호는 숙민(肅敏)이다.

 

엄정섭(嚴正燮)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한 후 군자금(軍資金)을 모아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嚴世永(엄세영) 선생의 일화.

 

186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정원가주서·부사정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주서가 되었다.

1866년에는 홍문관부수찬·남학교수(南學敎授부사과로 선전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10월부터 18674월까지 동지사(冬至使) 이풍익(李豐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부교리·교리·부수찬·부응교·사헌부집의·장악원정, 1868년에는 종친부정(宗親府正분승지(分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6년만에 발탁되어 전라우도암행어사로 임명되었고, 1875년과 1878년에 이조참의를지냈다. 18812월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수행원으로 엄석주(嚴錫周최성대(崔成大), 통사로 서문두(徐文斗) 등을 대동하였다.

이 때 그가 시찰을 담당한 부서는 사법성(司法省)이었고, 이러한 일본 시찰이 토대가 되어 귀국 후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서 율례사당상(律例司堂上)이 되었다.

1882년에는 병조참판·한성부우윤, 임오군란 때에는 청군영접관(淸軍迎接官한성부좌윤·성균관대사성, 1883년에는 한성부우윤·이조참판·예조참판·호군으로 정부당상(政府堂上), 1884년에는 한성부좌윤·반접관(伴接官)을 역임하였다.

1885년에는 정부유사당상(政府有司堂上)으로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묄렌도르프(Mollendorf, 穆麟德)와 함께 거문도를 조사하였다. 1886년에는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인천부사, 1888년에는 행호군(行護軍)으로 정부당상, 1890년에는 사헌부대사헌·한성부우윤, 1891년에는 형조참판·한성부좌윤·병조참판, 1893년에는 사헌부대사헌·병조참판·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행호군으로 삼남염찰사(三南廉察使)와 호남선무사로 임명되어 동학교도의 귀향을 주관하였다. 김홍집(金弘集) 내각 성립 후 두 차례에 걸쳐 농상아문대신(農商衙門大臣판중추부사를 지냈다. 1895년부터 1900년까지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경상북도관찰사·종일품관으로 궁내부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5

()

28

()

31

()

26

()

29

()

32

()

27

()

30

()

33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영월 엄씨(寧越嚴氏)는 남한(南韓) 에 총 27,216가구, 114,19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게시물 목록
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385 함양 여.jpg 함양여씨(呂) 청남 14-08-29 3512
384 성주 여.jpg 성주여씨:성산여씨(呂) 청남 14-08-29 4050
영월 엄.jpg 영월엄씨(嚴) 청남 14-08-29 4908
382 함종 어.jpg 함종어씨(魚) 청남 14-08-29 3378
381 충주 어.jpg 충주어씨(魚) 청남 14-08-29 2438
380 태원양씨(襄) 청남 14-08-29 2025
379 천주 양.jpg 청주양씨(楊) 청남 14-08-29 3375
378 중화 양.jpg 중화양씨(楊) 청남 14-08-29 2670
377 안악 양.jpg 안악양씨(楊) 청남 14-08-29 2281
376 밀양 양.jpg 밀양양씨(楊) 청남 14-08-29 2589
375 남원 양.jpg 남원양씨(楊) 청남 14-08-29 3613
374 제주 양.jpg 제주양씨(梁) 청남 14-08-29 6193
373 남원 양.jpg 남원양씨(梁) 청남 14-08-29 4901
372 원평야씨(夜) 청남 14-08-29 2274
371 한양애씨(艾) 청남 14-08-29 2050
370 태원 안.jpg 태원안씨(安) 청남 14-08-29 2724
369 탐진 안.jpg 탐진안씨(安) 청남 14-08-29 3274
368 죽산 안신.jpg 죽산안씨-신(安) 청남 14-08-29 3773
367 죽산 안.jpg 죽산안씨-구(安) 청남 14-08-29 3610
366 순흥 안1.jpg 순흥안씨(安) 청남 14-08-29 5195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