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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신씨(申)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고령신씨)

본관(本貫): 고령(高靈)

시조(始祖): 신성용(申成用)

유래(由來):

 

고령 신()씨의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본래 신라 공족(公族)의 후예로 고려조에서 지방 향리인 호장이 되고 고종(高宗: 22대 왕, 재위기간: 1213 1259)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에 올랐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누대로 정착 세거해 온 고령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게 되었고,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영남 지방의 벌족으로 일컬어졌다.

 

가문의 중요 인물

 

신덕린(申德隣)

생몰년 미상. 고려말 조선초의 서화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불고(不孤), 호는 순은(醇隱).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성용(成用)4대손으로 벼슬은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냈다.

이색 ( 李穡 ) · 정몽주 ( 鄭夢周 ) 등과 친교가 있었고 고려가 망한 뒤에는 광주(光州)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해서 · 초서 · 예서에 모두 능하여 당대에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예서의 한 종류인 팔분체(八分體)로 많은 글을 썼다고 한다.

그의 필체는 독특하여 당시 사람들이 덕린체(德隣體)라고 불렀다. 그의 그림으로는 구덕수궁미술관 소장인 산수도 山水圖 가 있으나 양식면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남종화(南宗 怜 )와 유사점이 많이 보이는 작품이므로 그 진위여부를 알기 힘들다.

그의 서체의 모간(模刊)고금법첩 古今法帖 에 전한다.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고령의 영연서원(靈淵書院)에 배향되었다.

 

신포시(申包翅)

생몰년 미상.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검교군기감사(檢校軍器監事) 성용(成用)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경(思敬)이고, 아버지는 전서 덕린(德隣)이다. 1383(우왕 9)에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개국 후 좌사간 등 언관의 직임을 수행하면서 불교배척, 양천의 분별에 관한 주장을 펼치는 등 개국 초창기에 있어서 문물제도의 설행에 유교이념적 언론활동을 하였다. 뒤에 벼슬이 공조참의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는 찬성에 증직되었다

 

신장(申檣)

1382(우왕 8)1433(세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제부(濟夫), 호는 암헌(巖軒). 사경(思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고려 전의판서(典儀判書) 덕린(德隣)이고, 아버지는 고려 공조참의 포시(包翅)이며, 어머니는 김충한(金忠漢)의 딸이다. 아들에 숙주(叔舟말주(末舟)가 있다. 어머니는 함주지사(咸州知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1402(태종 2) 식년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하여 상서녹사(尙書錄事)가 되었다. 다음 예조정랑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춘추관동지사로서 정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뒤에 중군도총부총제(中軍都總府總制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거쳐 공조좌참판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래 대제학을 맡아 당시 유학에 통달한 권위 있는 학자로 추앙을 받았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평(申枰)

포시의 둘째 아들 신평()은 세종 때 충장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을 역임했다.

 

신제(申梯)

신제()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신맹주(申孟舟)

고령 신씨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인맥을 형성한 장의 아들 맹주(孟舟중주(仲舟숙주(叔舟말주(末舟) 5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가 그들의 후손에서 삼정승(三政承삼문형(三文衡)을 비롯한 91명의 대과 급제자를 낳았다.

 

신숙주(申叔舟)

1417(태종 17) 1475(성종 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 덕린(德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포시(包 仝 )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장()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1438(세종 20) 사마양시에 합격하여 동시에 생원 · 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이 되고,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442년 국가에서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게 되자 서장관으로 뽑혔다.

훈민정음 을 창제할 때 참가하여 공적이 많았다.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성삼문 ( 成三問 )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을 열세차례나 내왕하였는데, 언어학자인 황찬은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1447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응교가 되고, 1451(문종 1)에는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 등이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해 장령 ( 掌令 ) · 집의 ( 執義 )를 거쳐,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52(문종 2) 수양대군이 사은사 ( 謝恩使 )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수양대군과의 유대가 이때부터 특별하게 맺어졌다. 1453년 승정원동부승지에 오른 뒤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거쳤다.

같은 해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란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으며, 수충협책정난공신 2등에 책훈되고, 곧 도승지에 올랐다.

1455년 수양대군이 즉위한 뒤에는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받고 예문관대제학에 초배(超拜)되어 고령군(高靈君)에 봉하여졌다. 이어 주문사 ( 奏聞使 )로 명나라에 가서 새 왕의 고명(誥命 : 임명장)을 청하여 인준을 받아온 공으로 토전(土田) · 노비 · 안마(鞍馬) · 의복을 함께 받았다.

1456(세조 2)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을 전장하게 되었다. 곧이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하고, 우찬성이 되어서는 대사성까지 맡았다.

1457년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 무렵 동북방면에 야인(野人)의 침입이 잦았는데, 그는 강경론을 펴 1460년에 강원 · 함길도의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정벌을 위하여 출정하였다.

그는 군사를 몇 개 부대로 나누어 여러 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는 전략을 펼쳐 야인의 소굴을 크게 소탕하고 개선하였다. 1462년에 영의정부사가 되고, 1464년에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사직한 적이 있으며, 1467년에 다시 예조를 겸판하였다.

이듬해 예종이 즉위함에 유명(遺命 : 유언)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원상(院相 : 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원로대신)으로 서무를 참결(參決 : 참여하여 결정함.)하고, 같은 해 이른바 남이 ( 南怡 ) 옥사를 처리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겨울에 예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게 후사(後嗣)의 택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하여 대통 ( 大統 )의 승계에 공이 컸다.

성종이 즉위함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다시 임명되었다. 노병(老病)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고, 1472(성종 3)에는 세조실록 · 예종실록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 동국통감 의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하여 그의 집에서 총관하였다. 또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을 받은 국조오례의 의 개찬 · 산정(刪定)을 위임받아 완성시켰다. 여러 나라의 음운 ( 音韻 )에 밝았던 그는 여러 역서(譯書)를 편찬하였으며, 또 일본 · 여진의 산천 요해(要害)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동제국기 海東諸國記 를 지어 일본의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異同), 사선(私船) 내왕의 절차, 우리측 관궤(館 灌 : 객사로 보내는 음식)의 형식 등을 모두 기록하여 일본과의 교빙(交聘)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75(성종 6)에 일생을 마쳤다. 세조는 일찍이 당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 라고 할 정도로 세조와의 관계가 깊었다. 이러한 관계는 사육신 · 생육신을 추앙하는 도학적(道學的)인 분위기에서는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나 당대에서의 그의 정치적 · 학문적 영향력은 큰 것이었다.

그를 좋게 평가하는 표현으로는 항상 대체(大體)를 생각하고 소절(小節 : 작은 절의)에는 구애되지 않았다. ’ 든가, ‘ 큰일에 처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강하(江河)를 자르듯 하였다. ’ 는 것과 같은 것이 있다.

과거시험의 시관 ( 試官 )을 열세 차례나 하여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고, 예조판서를 십 수년, 병조판서를 여러 해 동안 각각 겸임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이렇게 특별한 배려는 외교 · 국방면에서 그의 탁월한 능력에 따른 것으로서 저술 대부분이 이에 관계 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대교린의 외교문서는 거의가 그의 윤색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송설체에 뛰어났다고 한다. 전하는 필적으로는 송설체의 유려함을 보여 주는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의 찬문(贊文)과 진당풍(晉唐風)의 고아한 느낌을 주는 해서체의 화명사예겸시고 和明使倪謙詩稿 등이 전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보한재집 이 전하는데, 1644(인조 22)7세손 숙( )이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본 완질을 얻어 간행한 것이다.

 

신말주(申末舟)

1439(세종 21)1503(연산군 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자집(子楫), 호는 귀래정 ( 歸來亭 ). 서화가 덕린(德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포시(包翅)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장()이며, 어머니는 정유(鄭有)의 딸이다. 숙주(叔舟)의 동생이다.

1454(단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성격이 조용하고 담담하여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로 벼슬을 사임하고 물러나 순창에 살면서, 귀래정을 지어 산수를 즐겼다.

형 숙주가 강권하여 벼슬에 나오게 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가 1470(성종 1) 봄에 순창에 내려가 오래 귀경하지 않아 한때 파직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뒤 1476년 전주부윤, 1483년 창원도호부사, 1487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대사간, 이듬해 첨지중추부사·전라수군절도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신면(申沔)

숙주의 아홉 아들 가운데 둘째인 신면()은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전사 하였다.

 

신찬(申澯)

숙주의 셋째 신찬()은 관찰사를 지냈다.

 

신정(申瀞)

숙주의 넷째 신정()은 이조 참판을 거쳐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올랐다.

 

신준(申浚)

1444(세종 26)1509(중종 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언시(彦施), 호는 나헌(懶軒). 공조참의 포시(包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 장()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숙주(叔舟)이며, 어머니는 윤씨(尹氏)로 증영의정부사 경연(景淵)의 딸이다.

1470(성종 1)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병조참지에 특별히 발탁되고, 그뒤 병조참의를 거쳐 1477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로부터 성종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같은 해에 우승지·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하였다. 이듬해에 호조참판을 역임하고 1480년 고양군(高陽君)에 봉해졌다.

이어서 다시 이조참판이 되어 천추사 ( 千秋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뒤 예조참판을 거쳐 1486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이조판서가 되고 공조판서를 거쳐 그 뒤 우참찬·평안도관찰사·한성부판윤 등 내외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495(연산군 1)에 사은사 ( 謝恩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공조판서가 되고 이어 형조판서가 되어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그뒤 대사헌을 거쳐 세번째로 공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우참찬·좌참찬을 지내면서 언로의 개방 등 시무 10조를 진언하였다.

1506년 박원종 ( 朴元宗 성희안 ( 成希顔 ) 등이 중종반정을 단행하자 이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 靖國功臣 ) 3등에 책록되고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진봉되었으며, 품계가 숭록대부 ( 崇祿大夫 )에 오르고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소안(昭安)이다.

 

신형(申泂)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역임하였다.

 

신항(申沆)

1477(성종 8) 1507(중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용이(容耳).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숙주(叔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 ()이고, 아버지는 예조참판 종호(從濩)이며, 어머니는 의창군 ( 義昌君 ) ( )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7, 8세에 글을 읽은 지 몇 해 만에 시경 을 배우고, 황산곡집 黃山谷集 을 외우는 데 한자도 틀림이 없었다. 14세에 성종의 제1녀 혜숙옹주(惠淑翁主)를 아내로 맞아 순의대부 ( 順義大夫 )에 오르고 고원위(高原尉)에 봉해졌다.

부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탈복한 뒤 관직에 돌아와 1499(연산군 5)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였다. 1501년에 자의대부 ( 資義大夫 ), 뒤이어 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 통헌대부 ( 通憲大夫 )에 올랐다.

1504년에 풍원위( 淵 原尉) 임숭재 ( 任崇載 )의 참소(讒訴 : 간악한 말로 윗사람에게 고함)로 의금부에 하옥되었으며, 통헌대부가 거두어지고, 궁궐출입이 금지되었다.

이에 두문불출하고 빈객을 맞지 않으며 적막하게 스스로를 지켰다. 중종반정 후 반정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원종공신 ( 原從功臣 ) 1등에 책봉되고 봉헌대부 ( 奉憲大夫 )에 올랐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신잠(申潛)

1491(성종 22)1554(명종 9). 조선 전기의 화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 (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 숙주(叔舟)의 증손자이며, 종호(從護)의 아들이다.

1519(중종 14) 현량과 ( 賢良科 )에 급제하였으나, 같은해에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방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 때 안처겸 ( 安處謙 ) 사건에 연루되어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가 양주 ( 楊州 )로 이배되었으며, 뒤에 풀려났다.

그 뒤 20여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다가, 인종 때에 다시 복직되어 태인과 간성의 목사를 역임하고 상주목사로 재임중 죽었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으며, 패관잡기 稗官雜記에는 특히 묵죽 ( 墨竹 )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였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심매도 尋梅圖화조도가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다.

 

신용개(申用漑)

1463(세조 9) 1519(중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개지(漑之), 호는 이요정(二樂亭) · 송계(松溪) · 수옹(睡翁). 대제학 장()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숙주(叔舟), 아버지는 관찰사 면( )이다. 어머니는 우군사용(右君司勇) 정호(丁湖)의 딸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인이다.

1483(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8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해 처음으로 승문원정자에 등용되었다. 그 뒤 수찬 · 교리를 역임, 1492년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하였다. 1494년 지평 ( 持平 )이 되었으나, 간언(諫言)으로 문제가 되어 평시서령(平市署令)으로 좌천되었다. 곧이어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1497년에는 검상 ( 檢詳 )이 되었다.

이듬해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한때 투옥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직제학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1502년 왕을 기피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 영광에 유배되었다.

1506(중종 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으로 서용되었으며, 이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성희안 ( 成希顔 )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고명(誥命)을 받아온 공으로 원종공신 ( 原從功臣 )이 되었다. 그 뒤 대제학 · 우참찬과 대사헌을 거쳐서 이조 · 병조 · 예조의 판서를 역임, 우찬성이 되었다.

1516년에 우의정에 오르고, 1518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기품이 높고 총명하여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하였다. 인품 또한 꿋꿋하여 범하지 못할 점이 있어 당시 선비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성종은 그의 높은 학덕을 사랑하여 어의(御衣 : 임금의 옷)를 벗어 입혀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저서로 이요정집 이 있고, 편서로 속동문선 · 속삼강행실도 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신광한(申光漢)

1484(성종 15) 1555(명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 또는 시회(時晦), 호는 낙봉(駱峰) · 기재(企齋) · 석선재(石仙齋) · 청성동주(靑城洞主). 공조참판 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숙주(叔舟)이며,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이다. 어머니는 사포 ( 司圃 ) 정보(鄭溥)의 딸이다.

1507(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0년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호당 ( 湖堂 )에서 사가독서의 특혜를 받았다. 1513년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부수찬 · 교리 · 정언 ( 正言 ) · 공조정랑을 역임하고,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으로 경연의 시강관 ( 侍講官 )을 겸임하였다.

이 때 중종이 학문을 장려하며 유학자를 우대하고 주야로 경연을 열어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조광조 ( 趙光祖 ) 등과 함께 고금의 시무(時務)를 논하여 채택되는 바가 매우 많았으며, 1518년 특명으로 대사성에 올랐다. 이듬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 삼척부사로 좌천되고, 이듬해에 파직되었다.

이어서 다시 여주로 추방, 18년 동안 칩거하였다. 1538년 윤인경 ( 尹仁鏡 )이 이조판서가 되어 기묘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람들을 서용하자 대사성으로 복직되었다. 대사간을 거쳐, 경기도관찰사 · 한성부우윤 ·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1540년 대사헌이 되어 관리들의 기강을 엄히 하였다.

1542년 세자시강원의 우부빈객 (右副賓客)을 겸임하고, 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이듬해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1544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인종 때 대제학을 거쳐, 명종 즉위와 함께 우참찬이 되었으며 윤원형 ( 尹元衡 )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소윤 ( 小尹 )에 가담,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 (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정헌대부 ( 正憲大夫 )에 올라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으며, 지의금부사 ( 知義禁府事 ) · 대제학 ·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 춘추관동지사(春秋館同知事)를 겸임하였다.

뒤에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이어 좌참찬 ·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548(명종 3)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좌찬성이 되어 지성균관사와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1553년에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가고 궤장( 廓 杖)을 하사받았다. 1554년에 사직하고 그 이듬해에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시문을 많이 지었으며, 학문을 숭상하여 대사성이 되었을 때에는 학도들이 그에게 운집하였다. 또한, 청렴하여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인사를 공정히 하고, 유일(遺逸 :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사는 학덕이 높은 선비)을 많이 등용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맹자와 한유(韓愈)를 기준으로 했고, 시문에 있어서는 두보(杜甫)를 본받았다. 저서로 기재집 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신식(申湜)

1551(명종 6) 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숙지(叔止), 호는 용졸재(用拙齋). 신숙주 ( 申叔舟 )5대손이며, 광윤(光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 )이고, 아버지는 현령을 지낸 중엄(仲淹)이며, 어머니는 유엄(柳 螟 )의 딸이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76(선조 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있을 때 정여립 ( 鄭汝立 )의 일파로 탄핵되어 유배당하였다가 1592년 다시 집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경상도안무어사(慶尙道按撫御史)로 활약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 · 좌부승지 · 좌승지 등을 역임하고 대사간과 부제학을 거쳐 도승지 · 동지중추부사 ·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1599년에 사은사 ( 謝恩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호조참판 · 대사헌이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고는 충청도관찰사 · 동지중추부사 ·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다가 또 다시 사은사로 명에 가서 왜의 실정을 알렸다.

말년에는 지중추부사로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청주의 쌍천서원(雙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의례고증 疑禮攷證 · 가례언해 家禮諺解 등이 있다.

 

 

신용(申湧)

식의 아우 신용()은 황해 감사(黃海監司)를 역임했다.

 

신득연(申得淵)

득연(得淵)은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신응구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좌부승지(左副承旨)와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춘천부사(春川府使)를 역임했다.

 

신득홍(申得洪)

경전(經典자사를 비롯한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정통했던 득홍(得洪: 관찰사 용이 아들)이 유명했다.

 

신익상(申翌相)

1634(인조 12) 1697(숙종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숙필(叔弼), 호는 성재(醒齋).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 응구(應 梏 )이고, 아버지는 정언 양( )이다.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이경(李坰)의 딸이다.

1660(현종 1)에 진사시를 거쳐 166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 ( 檢閱 ) · 봉교를 거쳐 오랫동안 사관 ( 史官 )으로 있으면서 사실을 곧게 기록하여 명성을 얻었다. 1672년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숙종 즉위 후 남인이 득세하자 충청도 아산에 은거했다가 1680(숙종 6) 경신환국 때 특지(特旨)로 도승지에 올랐다. 이어 이조참판 · 전라도관찰사 · 부제학 · 대사성을 거쳐, 1684년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재임시 주변 읍민을 동원하고 공명첩(空名帖 : 관청에서 부유층에게 곡식을 받고 관직은 써주나 이름을 적지 않던 임명장)을 발급하는 방법으로 영변의 철옹외성(鐵甕外城)을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뒤 대사헌 · 이조참판 ·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고 민비 ( 閔妃 )가 폐위되자 그 부당함을 논하고 양주로 퇴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 때 다시 기용되어 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교리로 있으면서 복창군 ( 福昌君 ) () 등의 방종을 형벌할 것과 시무(時務)를 논한 상소를 올려, 뒤에 숙종으로부터 선견지명을 인정받았다. 대사간 재임 때는 윤휴(尹 頊 )의 처자를 연좌하고 적몰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필법, 특히 전서(篆書)에 조예가 깊었다. 시문집으로 성재집 3권이 전한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신경준(申景濬)

1712(숙종 38) 1781(정조 5). 조선 영조 때 학자.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菴). 아버지는 신숙주 ( 申叔舟 )의 아우 말주(末舟)10대손인 진사 내( )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로 의홍(儀鴻)의 딸이다.

33세 때까지 여러 곳으로 옮겨다니며 살다가 33세부터 43세까지 고향에 묻혀 살면서 저술에 힘썼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운해훈민정음 韻解訓民正音 (세칭 훈민정음운해)을 꼽을 수 있다.

43세 되던 1754(영조 30) 비로소 향시에 합격했는데 당시의 시험관은 홍양호 ( 洪良浩 )였다. 그 해 여름 증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상경 후 홍양호와의 교분이 두터웠다. 과거합격 후 정언 · 장령 · 현감 등을 역임한 다음 1769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강화의 선원각(璿源閣)을 중수한 뒤 일단 고향에 돌아갔다.

그러나 곧 영조의 명으로 여지승람 輿地勝覽 을 감수하고, 1770년에는 문학지사(文學之士) 8인과 함께 문헌비고 를 편찬할 때 여지고 輿地考 를 담당하였으며, 이어서 그 해 66일부터 814일까지 동국여지도 東國輿地圖 의 감수를 맡았다.

이후 승지 · 북청부사 · 순천부사 ·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낸 다음 1781(정조 5) 70세로 일생을 마쳤다. 업적은 여러 문헌에 다음과 같은 논제(論題)나 책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운해훈민정음 (행장에는 五聲韻解) · 일본증운 日本證韻 · 언서음해 諺書音解 (유고목록과 서에는 東音解) · 평측운호거 平仄韻互擧 · 거제책 車制策 · 병선책 兵船策 · 수차도설 水車圖說 · 논선거비어 論船車備禦 · 의표도 儀表圖 · 부앙도 琅 仰圖 · 소사문답 素沙問答 · 직서 稷書 · 장자변해 莊子辨解 · 강계지 疆界志 (또는 疆界考) · 산수경 山水經 · 도로고 道路考 · 산수위 山水緯 (旅菴全書에는 山水考로 통합되어 있음.) · 사연고 四沿考 · 가람고 伽藍考 · 군현지제 郡縣之制 등이다.

이상에서 그가 문자학(文字學) · 성운학(聲韻學) · 지리학 ( 地理學 ) 등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걸쳐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운해훈민정음 은 송학(宋學)의 시조의 한 사람이라는 소옹(邵雍)황극경세성음도 皇極經世聲音圖 (正聲正音圖라고도 함.)를 본보기로 하여 일종의 운도 ( 韻圖 )를 만들려고 전개한 이론인데, 훈민정음 창제 이후 가장 깊이 문자론(文字論)을 전개한 학술적인 업적이었다.

 

신광수(申光洙)

1712(숙종 38) 1775(영조 51).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 또는 오악산인(五嶽山人).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 ()이며, 어머니는 통덕랑 ( 通德郎 ) 이휘 ( 李徽 )의 딸이다. 집안은 남인으로 초기에는 벼슬길이 막혀 향리에서 시작에 힘썼다.

채제공 ( 蔡濟恭 ) · 이헌경 ( 李獻慶 ) · 이동운(李東運)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윤두서 ( 尹斗緖 )의 딸과 혼인하여 실학파와 유대를 맺었다.

신광수는 39세 때에 진사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였다. 49세에 영릉참봉(寧陵參奉)이 되고, 53세에 금오랑(金吾郎)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표류하였다. 제주에 40여 일 머무르는 동안에 탐라록 耽羅錄 을 지었다. 그 뒤에 선공봉사(繕工奉事) · 돈녕주부(敦寧主簿) ·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냈다.

신광수는 177261세 때에 기로과 ( 耆老科 )에 장원하여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에서는 문장의 신하를 얻었다고 하였다. 영조는 그를 대단히 대우하여 그가 서울에 거주할 집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집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그 뒤에 우승지 · 영월부사를 역임하였다.

신광수는 과시(科詩)에 능하여 시명이 세상에 떨쳤다. 그의 시인 등악양루탄관산융마 登岳陽樓歎關山戎馬 (關山戎馬로 약칭됨.)는 창()으로 널리 불렸다. 그는 사실적인 필치로 당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농촌의 피폐상과 관리의 부정과 횡포 및 하층민의 고난을 시의 소재로 택하였다.

악부체(樂府體)의 시로서는 관서악부 關西樂府 가 유명하다. 신광수의 시에 대하여 교우 채제공은 득의작(得意作)은 삼당(三唐)을 따를만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라도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을 능가하며 동인 ( 東人 )의 누습을 벗어났다. ” 고 평하였다. 그는 동방의 백낙천(白樂天)이라는 칭을 받기도 하였다.

신광수의 시는 그 시대의 현실을 담고 있거나 우리 나라의 신화나 역사를 소재로 하여 민요풍의 한시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한문학사상 의의가 매우 크다. 저서로 석북집 168책과 석북과시집 1책이 전한다.

 

신광여(申光淵), 신광하(申光河)

광수의 두 아우 광여(光淵광하(光河)와 여동생 부용당(芙蓉堂)도 문장에 뛰어나 4남매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신윤복(申潤福)

1758(영조 34)?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입부(笠父), 호는 혜원(蕙園). 화원(畵員)이었던 한평(漢枰)의 아들이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풍속화를 비롯하여 산수화와 영모화에도 능했다.

산수화에서 김홍도 ( 金弘道 )의 영향을 토대로 참신한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에서 특히 이름을 날렸다. 그의 풍속화 등은 소재의 선정이나 포착, 구성 방법, 인물들의 표현 방법과 설채법(設彩法) 등에서 김홍도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는 남녀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풍속화들은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살림과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등,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하여 준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짤막한 찬문(贊文)과 함께 자신의 관지 ( 款識 )와 도인(圖印)이 곁들여 있다. 하지만 한결같이 연기(年記)를 밝히고 있지 않아 그의 화풍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김홍도와 더불어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하였던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작가 미상의 풍속화와 민화 등에는 그의 화풍을 따른 작품들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풍속화첩이 있다. 풍속화첩에 수록된 주요 작품으로 단오도 端午圖·연당(蓮塘)의 여인(女人)·무무도 巫舞圖·산궁수진 山窮水盡·선유도 船遊圖등이 있다.

 

신규식(申奎植)

1879(고종 16) 1922. 독립운동가 · 대종교인. 본관은 고령(高靈). 별명은 성() · 목성(木聖), 호는 예관( 絆 觀) · 여서(余胥) · 일민(一民) · 청구 ( 靑丘 ) · 한인(恨人). 충청북도 청원 출신. 용우(龍雨)의 아들이다.

1895년 서울로 유학해 1898년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에 입학하였다. 2년 뒤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해 재학 중 학교당국의 부정에 반발하는 모의에 참여했다가 신병으로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에 모의가 실행되어 처벌을 면하였다.

졸업 뒤 임관되어 참위(參尉) · 부위 ( 副尉 )에까지 진급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지방 진위대와 연락해 거사를 계획하다가 실패한 뒤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 이 때 오른쪽 눈의 신경이 마비되어 흘려보는 상이 되므로 스스로 예관이라고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학회를 조직해 공업계 잡지도 발간하였다. 또 대한자강회 ( 大韓自强會 )와 대한협회 ( 大韓協會 ) 등 애국계몽단체에도 참가하였다. 중동학교 · 청동학교(淸東學校) · 문동학교(文東學校) 등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09년에는 대종교를 믿고 광산경영도 하였다. 1910년 망국조약의 소식을 듣고 다시 음독자살하려고 했으나 나철 ( 羅喆 )에 의해 구원되었다.

이듬 해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정()으로 개명하였다. 손문(孫文)이 이끄는 동맹회(同盟會)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가맹해 10월의 무창의거(武昌義擧)에 참가해 신해혁명에 공헌하였다.

당시 상해에서 혁명사상을 고취시키려고 호한민(胡漢民) 등이 민권보 民權報 발행을 준비하자 망명 때의 여비 2만원 가운데 잔액 1만원을 희사하였다. 이로 인해 청국정부와 일본영사경찰에게 현상수배되어 프랑스 조계로 피신하였다.

1912년에는 상해의 교민이 늘어나자 독립운동을 위한 교민단체로서 동제사 ( 同濟社 )를 조직해 이사장이 되었다. 동시에 중국국민당의 인사와 우호를 증진시키기 위해 신아동제사 ( 新亞同濟社 )를 발기하였다.

또한, 환구중국학생회( 渶 球中國學生會)에 가입해 이등휘(李登輝) · 여일장(余日章) · 주가화(朱家 映 ) 등의 명사와 교유하였다. 시인단체인 남사(南社)에 가입하여 장정강(張靜江) · 진과부(陳果夫) 등과도 사귀었다.

1913년 상해 프랑스 조계에 박달학원 ( 博達學院 )을 설립해 박은식 ( 朴殷植 ) · 신채호 ( 申采浩 ) 등과 중국혁명의 선구자 농죽(農竹) 및 미국화교 모대위(毛大衛) 등을 강사로 초빙, 3기에 걸쳐 졸업생 100여 명을 배출해 중국 각 대학 및 구미유학을 주선하였다.

군사교육도 장려하여 한국청년 100여 명을 중국 각지의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대종교의 포교를 통해 독립의식의 고양에도 힘썼다. 1915년 박은식과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만주와 노령지방의 독립운동가를 연결했으며, 잡지 진단 震壇 을 발행하였다.

19178월에는 스톡홀름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동제사를 개칭하여 조선사회당을 급조했으나 대회가 무산되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앞서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T. W.)14개조의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만주와 각지의 독립운동가와 연락하여 길림(吉林)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하였다. 이어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조직의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동제사의 지식인 청년그룹으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3 · 1운동 이후 정부수립운동이 일어나 3월에 해삼위(海蔘威)의 대한국민회의, 4월에 서울의 한성정부 ( 漢城政府 )가 수립되었을 때, 상해에서도 4월 제헌의정원회의(制憲議政院會議)에서 정부가 수립되고 10개조의 헌장이 채택되었으나 신병으로 참석하지 못해 각료 선출에는 빠졌다.

그 뒤 제1회 의정원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7월의 제2회 회의에서는 부의장과 아울러 의원직도 사퇴하였다.

9월에 3개 정부를 통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1월에 법무총장에 취임하였다. 이듬 해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국무총리대리를 겸임했고, 1921년에는 외무총장도 겸하였다.

이 해 10월 임시정부에서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그를 특사로 하여 부사 박찬익 ( 朴贊翊 ), 수행원 민필호 ( 閔弼鎬 ) 등을 광둥(廣東)의 중화민국정부에 파견하였다. 중화민국정부의 북벌서사식(北伐誓詞式)에 참여하고, 11월 대총통 손문을 만나 국서를 전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그 뒤 신병으로 사표를 제출했으나 처리되지 않았다.

1922년 임시정부의 내분이 표면화되어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불신임안이 그의 불참 속에서 통과되었다. 병상에서 25일간 절식을 하다가 독립을 기원하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상해 훙차오로(虹橋路) 만국공묘(萬國公墓)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한국혼 韓國魂 과 시집 아목루 兒目淚 가 있다.

 

신채호(申采浩)

1880(고종 17) 1936. 조선 말기 ·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 언론인 ·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 무애생(無涯生) · 열혈생(熱血生) · 한놈 · 검심(劍心) · 적심(赤心) · 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 ( 申叔舟 )의 후예로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문과에 급제해 정언 ( 正言 )을 지낸 할아버지 성우(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통감 通鑑 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 ( 申箕善 )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받았다.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 이남규 ( 李南珪 )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 · 변영만 ( 卞榮晩 ) · 이장식(李章植) · 유인식 ( 柳寅植 )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 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 ( 申圭植 )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25세 때에는 신규식 · 신백우 ( 申伯雨 )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905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 ( 張志淵 )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190511황성신문 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 ( 梁起鐸 )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 서호문답 西湖問答 · 영웅과 세계 · 학생계의 특색 · 한국자치제의 약사 ·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 이십세기 신국민 등의 논설을 실었다.

그리고 독사신론 讀史新論 ·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 동국거걸최도통전 東國巨傑崔都統傳 · 동국고대선교고 東國古代仙敎考 등의 역사관계 논문과 시론 천희당시화 天喜堂詩話 등을 연재하였다. 또한 대한협회월보 大韓協會月報 대한협회회보 대한의 희망 ·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등을 발표하였다.

그 밖에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 伊太利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 乙支文德傳 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고, 가정잡지 家庭雜誌 의 발행에도 관여하였다. 독사신론 은 그 뒤 내용의 일부가 가감, 수정되어 최남선 ( 崔南善 )이 발행하던, 소년 少年 3년 제8권에 국사사론 國史私論 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이미 단군 · 부여 · 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그가 집필한 동국거걸최도통전 이순신전 · 을지문덕전 등은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 영웅사관(英雄史觀)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던 그는 28세 무렵, 양기탁 · 이동녕 ( 李東寧 ) · 이회영 ( 李會榮 ) · 이동휘 ( 李東輝 ) · 안창호 ( 安昌浩 ) · 전덕기 ( 全德基 ) · 이갑 ( 李甲 ) · 이승훈 ( 李昇薰 )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 ( 新民會 )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 國債報償運動 )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30세 되던 해에는 윤치호 ( 尹致昊 ) · 안창호 · 최광옥 ( 崔光玉 ) · 최남선 · 박중화(朴重華) · 장응진(張膺震) 등과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 ( 靑年學友會 )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1910년 봄에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와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칭다오(靑島)에 도착,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 ( 尹世復 ) · 이동휘 · 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해조신문 海潮新聞 의 후신 대동공보 大東共報 에도 관여한 듯하며, 이 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 ( 勸業會 )에서 기관지 권업신문 勸業新聞 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년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 ( 同濟社 )에 참여, 활동하는 한편 문일평 ( 文一平 ) · 박은식 ( 朴殷植 ) · 정인보 ( 鄭寅普 ) · 조소앙 ( 趙素昻 ) 등과 박달학원 ( 博達學院 )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이듬해 윤세용(尹世茸) · 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 ( 東昌學校 )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 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아 부여 · 고구려 · 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중편소설 꿈하늘 夢天 을 집필했는데, 이는 일종의 환상적인 사상소설로서 그의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것이다. 1918년경부터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 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그 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 ( 漢城政府 )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 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다.

한편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 에 맞서 신대한 新大韓 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특히, 이승만 · 정한경 ( 鄭翰景 ) 등의 위임통치청원은 그 뒤에도 계속해서 신채호 등에 의해 반민족적인 행위로 규탄받았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 ( 金元鳳 )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 ( 朝鮮革命宣言 )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異族統治)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 · 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는 의미에서 그의 민족주의 이념의 폭과 질의 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19221월 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우거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북경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이석증(李石曾) · 이대교(李大釗)와 교유하게 되었다.

1924년경부터 그가 쓴 평론과 논문들이 동아일보 · 조선일보 등에 발표되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1925년에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대만인 임병문(林炳文)의 소개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無政府主義東方聯盟)에 가입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1928년에 발표된 용과 용의 대격전 · 꿈하늘 등의 사상소설에서는 자유 · 평등 · 폭력 · 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1928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해 활동하는 등 점점 행동 투쟁에 나섰던 그는,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그러한 운동 못지않게 한국사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한말 대한매일신보 에 사론을 싣기도 하였고, 소년 국사사론 을 연재했으며, 최영 · 이순신 · 을지문덕 등 국난을 극복한 민족영웅에 관한 전기도 썼다.

이 무렵 그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보는 영웅중심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 해외에 망명한 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해,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 조선상고문화사 朝鮮上古文化史 · 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 등 주저(主著)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동아일보 · 조선일보 에 연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저서들에 보이는 그의 역사학은, 첫째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둘째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 연구 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셋째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나며, 넷째 역사를 () ’ 비아(非我) ’ 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게 되었다.

비아 의 투쟁으로서의 역사학의 인식은 변증법적 역사발전에 대한 인식으로 보인다. 그는 앞에서 열거한 한국고대사관계의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러한 논술들은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해 독자적인 경지를 내보인 것으로, 과거의 유교주의에 입각한 관학적 역사학과 재야(在野)에서 면면히 이어온 비유교적인 사학을 종합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사학은 한국사학사의 여러 흐름들을 종합한 것이다. 그의 한국사 기술은 거의 고대사에 국한되고 있는 바, 그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군 · 부여 · 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했고, 둘째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 · 만주 중심의 종래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遼西地方)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셋째 종래 한반도내에 존재했다는 한사군 ( 漢四郡 )을 반도 밖에 존재했거나 혹은 전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넷째 상고시대의 조선족과 삼국시대의 백제가 중국의 산둥반도 등에 진출했다는 것이며, 다섯째 삼한의 이동설 및 전후 삼한설 을 주장했고, 여섯째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것 등이라 하겠다.

이러한 그의 역사학은 우리 나라의 근대사학 및 민족주의사학의 출발로서 평가되기도 하나, 민족주의 사상의 역사 연구에의 지나친 투영이 그의 역사이론 및 한국 고대사 인식을 교조적(敎條的) · 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홍식(申洪植)

1872(고종 9)1937. 독립운동가·목사,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충청북도 청원 출신. 30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뒤, 1913년 협성신학교 ( 協成神學校 )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1917년에는 평양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에 전임으로 가서 포교와 교육사업에 정진하였다. 1919214일 당시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이었던 그는 평양의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동지규합을 위하여 평양에 온 이인환(李寅煥, 李昇薰의 본명)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20일 이인환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 등의 동지와 모여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협의하고, 이인환· 이필주 ( 李弼柱 ) 등의 동지와 함께 기독교측 대표 16명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28일 밤에는 서울 재동 손병희 ( 孫秉熙 )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백우(申伯雨)

1888(고종 25) 1962. 조선 말기의 계몽 ·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경부( 客 夫). 충청북도 청원(淸原) 출신. 어려서는 신채호 ( 申采浩 )와 함께 한학을 수학했으며, 서울의 측량학교 · 외국어학교와 보성전문학교 법학과를 수료하였다. 그 뒤 청주 측량학교와 서울 태극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한편 소년 少年 편집에 관여하고, 신민회 ( 新民會 )와 대동청년단 ( 大東靑年團 )에 가입,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국권 상실 뒤에는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만주에 성덕태상점(誠德泰商店)을 개설하는 등,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주력하였다.

3 · 1운동 후에는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는데, 신채호와 함께 이승만 노선(李承晩路線)에 반대하여 손을 떼었다. 그 뒤 만주의 서로군정서 ( 西路軍政署 )와 광한단 ( 光韓團 )에서 활약하다, 1921년 귀국하여 조선노동공제회 ( 朝鮮勞動共濟會 )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이어 무산자동지회 · 조선노동연맹회 · 신사상연구회 · 화요회 · 조선노농총동맹 ( 朝鮮勞農總同盟 )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이 때의 신백우는 사회주의자로서 1924년 공산주의운동 관계로 붙잡히기도 했는데, 1925년 출옥한 뒤에는 공산주의 계열과 손을 끊었다. 그 뒤 농촌운동과 고령신씨 문중 사업에만 열중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비롯해 대한독립촉성회 등을 통한 정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중반 이후부터는 대종교 사업(大倧敎事業)에 전심하였다. 1955년에 원로원참의에 뽑히기까지 교회 내의 많은 자리를 거치면서 포교에 공헌이 컸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申采浩(신채호)  선생의 일화.

 

 

부에 열중하여 모든 것을 잊은 申采浩(신채호) 

기숙사에서 밤늦도록 학생들이 함께 모여 책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모두들 코를 쥐고 문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하며 우왕좌왕하는데 유독 丹齋(단재) 만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골똘히 책만 응시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변고람! 누가 뒷간에 가지 않고 이방 안에다 실례를 했는가 말이야?]
학생들이 코를 움켜 쥔 채 방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아직도 책장 넘기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단재가 앉은 곳이 흥건히 젖어 있지 않은가.
「아니! 자네..」학생들은 어이가 없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이윽고 읽던 부분을 마저 다 읽은 신채호는 얼굴을 들고 흥분한 표정으로,
「여보게들! 이 신묘하고 깊은 뜻을 가진 이 글을 좀 보게나. 참으로 뛰어난 문장 아닌가!]하며 책을 들고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학생들은 저마다 「이크! 가까이 오지 말게!」 하고 도망하며, 「그보다는 자네 뒤를 먼저 보는 게 옳을 것 같아」 하며 놀렸다.

그제야 단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례를 하였다는 것을 알고 슬그머니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고 한다..

1880(고종 17) ∼ 1936. 조선 말기 ·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 언론인 · 독립운동가. 본관은 高靈(고령). 호는 一片丹生(일편단생) · 丹生(단생) 혹은 丹齋(단재).

 

 

申濡(신유) 선생의 일화.

 

1653(효종 4) 申濡(신유)縣監(현감)으로 강진에 부임해 보니 아전들의 횡포가 너무나 심했고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천문지리에 도통한 신유가 강진의 地勢(지세)를 살펴보니, 아전의 횡포가 강진의 지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강진의 지세는 황소가 누워 있는 형국, 즉 와우형(臥牛形)이었다.

申濡(신유)

[황소는 코뚜레를 꿰어야 말을 잘 듣고 온순해 진다.]라 는 점에 착안해 코뚜레 자리에 연못을 파서 지세를 누르자, 아전들의 횡포가 사라지고 그때 부터 德治(덕치)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강진읍에는 그때 판 蓮池(연지) 라는 연못이 있다고 한다.

 

 

 

 

申叔舟(신숙주) 성생의 일화..

 

신숙주는 총명하여 학문에 전념하였고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 였다. 뒷날 세조와 각별한 사이가 되었으며, 세조가 왕위를 빼았을 적에는 가까웠던 성삼문과 멀어지게 되었다.

 

성삼문 등 사육신이 무자비하게 고문을 당할 때 신숙주는 그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숙주나물은 녹두로 만든다. 물은 매우 부패하기 쉬운데, 신숙주가 사육신을 배반히고 변했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때부터 녹두 나물을 숙주나물로 불렀다고 전한다.

 

 

申叔舟(신숙주) 성생의 일화.

 

신숙주는 세종·문종· 단종· 세조 · 예종· 성종등 여섯 임금을 모시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경국대전· 세조실록· 예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동국통감· 오례의는 왕명으로 그가 편찬 한 것이다.

 

어는 날 신숙주가 집현전에 숙직이었다.

이때 신숙주는 글을 읽고 있었다. 내관이 세종에게 보고했다.

전하, 신이 서너 번이나 기서 살펴보았으나 그는 글 읽기를 내지 않고 있사 옵나이다.”

 

어서 다시 가서 살펴보라.”

이른 새벽이었다. 내시는 곧장 집현전으로 달려갔다. 그제야 신 숭주는 춧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관의 보고를 받고 세종은 직접 집현전에 나아가, 자신이 입고 있던 갖옷을 벗어 신숙주를 덮어 주었다.

 

신숙주가 아침에 일어나 이 사실을 알고 세종께 갚은 감시를 드렸다.

이 소문을 들은 집현전 학사와 선비들은 학문에 더욱 정진했다.

 

 

 

 

申叔舟(신숙주) 선생의 일화.

 

申叔舟(신숙주)의 학문과 재주는 당대의 제일이었다.

그는 천성이 매우 고명하고 마음이 관대했다. 젊었을 때는 큰 뜻을 품고 결코 속된 일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늘 속의 절간에 머물며 읽기를 쉬지 않았으며, 집안일에는 결코 마음을 쓰지 않있다.

집현전에 들어가 고전을 연구했던 그는 통료들 대신 숙직을 하며 밤새도록 책을 읽었다.

 

어느 세종이 일본에 기는 통신사의 서장관을 뽑지 못해 고심 하고 있었다. 두세 사람을 추천받았으나 세종의 미음에 들지 않았다. 이때 신숙주가 거론되었다. 때마침 그가 병환 중이어서 세종은 그를 일단 만나보았다.

그대가 병환 중이라 과인이 피했거늘 서장관으로 마땅한 자가 없구려. 일본에 갈 수 있겠는가?’

신의 병은 다 나았사옵니다. 어찌 시양하겠사옵니까.”

 

그리하여 신숙주는 일본 사신의 서장관으로 바다를 건넸다.

일본에 이미 신숙주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그의 시를 청하는 자가 많았다. 이때 신숙주는 사양하지 않고 그들의 청에 응해 주었다. 일본인들이 그의 시를 보고 매우 감탄했다.

신숙주는 돌아오는 길에 포로가 된 남녀 수십 명을 데리고 왔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申叔舟(신숙주) 선생의 일화.

 

신숙주의 부인은 영의정 윤지운의 누이였다. 신숙주는 집현전 학사로 성삼문과 가장 친한 사이였다. 마침내 사육신의 옥사가 벌어졌다. 신숙주는 마음이 몹시 괴로워 술을 한잔 마시고 집으로 들어 왔다. 이때 중문이 활짝 열려 있었으나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안방을 살펴보았다.

이때 부인이 다락 위에 올라가 두어 자 되는 베를 들고 들보 밑에 앉아있었다.

부인, 무슨 일로 거기에 오른 것이오?’

영감, 성 학사들과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더니, 성 학사들의 옥사 소식을 듣고 영감도 그들과 함께 죽을 것으로 믿고 통지가 오기를 기다려서 자결하려고 하였소. 이렇게 영감이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소

신숙주는 몹시 부끄러워 술이 확 깨었다.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신숙주도 사육신들과 뜻을 같이할 줄로 알았다. 이때부터 신숙주의 학문과 재주는 빛이 바랬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출전 <한미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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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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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인구 조사 결과 총 27,324가구, 117,334명라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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