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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아주신씨(申)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아주신씨)

 

본관(本貫): 아주(鵝州)

시조(始祖): 신익휴(申益休)

유래(由來):

 

아주(鵝州) ()씨의 시조 신익휴(申益休)는 평산 신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문하시랑(文下侍郞)에 오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아주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익휴(益休)를 시조로 받들고 평산(平山) 신씨에서 분적하여 아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하나, 조선 순조 때 사람인 도와(陶窩) 신정주(申鼎周)가 저술한 호서기행에 의하면 1817(순조 17) 공주의 김노정(金魯定)만성보를 만들 때 신익휴라는 가공적 인물을 평산 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과 연계시켜 위조했다고 하며, 영조 때 편찬된문헌비고1924년에 발행된 조선씨족통보를 비롯한 아주 신씨의 가첩에는 고려 때 아주현의 권지호장(權知戶長)인 신영미(申英美)가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보에는 아주신씨을해대동보에 기준하여 장절공(壯節公) 신숭겸의 12세손으로 기록된 익휴를 일세조로 하여 계대를 상고하였다.

 

가문의 중요 인물

 

신우(申祐)

호장(戶長) 영미(英美)의 현손(玄孫) 신우(: 판도판서 윤유의 아들)가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를 역임했고, 효행이 뛰어나 아버지가 죽자 여막에서 3년 간 조석으로 호곡하여 무덤 앞에 쌍 죽이 돋아났다고 하며,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지고 그가 살던 마을 이름을 효자리로 불렀으며 효행을 돌에 새기고 삼강행실록에 기록하였다.

특히 그는 이성계(李成桂)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의성군 다밀면 망경산으로 내려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으며, 옛 정을 생각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의 벼슬을 내려준 이성계의 부름에도 끝까지 불응했다.

 

신원록(申元祿)

한편 우()7세손 원록(元祿: 참봉 수의 아들)은 퇴계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교수(敎授)를 지냈으며,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紹修書院)을 설립하자 찾아가 문하생이 되고, 동료들과 장천에 서원을 세우고 김안국을 제향, 장천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효행이 지극한 그는 아버지가 병이 들자 수 백리를 걸어 팔공산에 가서 약초를 구하여 8년간이나 밤낮으로 간병했고, 어머니가 죽자 눈비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3년 동안 성묘를 하여 효행으로 나라에서 효자문이 내려졌으며, 그의 손자 적도(適道: 교수 홀의 아들), 달도(達道: 지평을 지내고 척화를 주장함), 열도(悅道: 울진 현감과 능주 목사를 지냄) 3형제가 모두 정묘호란에 공을 세워 가문을 더욱 빛냈다.

 

신희신(申希信)

군기시정(軍器寺正) 광귀(光貴)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희신(希信)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단양 군수(丹陽郡守)를 역임했다.

 

신희충(申希忠)

희충(希忠)은 하동 현감(河東縣監)을 역임하였다.

 

신희경(申喜敬)

희경(喜敬)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라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신개보(申介甫)

희신(希信)의 증손 개보(介甫: 부사용 서생의 아들)가 정략 장군(定略將軍)으로 충무위 사직(忠武衛司直)을 역임했다.

 

신지효(申之孝)

몽득(夢得)의 아들로 학명(學名)을 크게 떨쳤다.

 

신지제(申之悌)

광해군 때 창녕 부사(昌寧府使)로 나가 도적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정시켰던 지제(之悌)의 형제가 유명했다.

 

신홍망(申弘望)

1600(선조 33)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아주 ( 鵝洲 ). 자는 망구(望久), 호는 고송(孤松). 응규(應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몽득(夢得)이고, 아버지는 승지 지제(之悌)이며, 어머니는 조지(趙址)의 딸이다.

1627(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하고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3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 · 지평 · 정언 · 풍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652(효종 3)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도승지 이시매(李時 緞 )가 자못 패만(悖慢)한 것을 지평 이온발(李溫發)이 상주(上奏)하다가 탄핵을 당하였는데, 이 때 이시매는 자기의 밝음을 선현을 이끌어서 증명하려 하였다.

이를 듣고서 직접 그 소()를 보니 실로 모욕적이어서 이를 단독으로 왕에게 진달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당론을 타파하고자 하는 마당에 호당(護黨)한다 하여 탄핵을 받고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가 두달 뒤 풀려났다.

1659년 풍기군수로 나갈 때 읍재(邑宰)가 연달아 관청에서 죽자, “ 내가 그 자리에 나가지 않고서는 요망스러운 말을 없앨 수 없다. ” 하고 부임한 뒤, 학교를 일으키고 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고송집 이 있다.

 

신응태(申應泰)

1643(인조 21) 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아주(鵝州). 초명은 응개(應漑). 자는 길래(吉來), 호는 용애(龍崖). 충청북도 청주출생. ( )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주반씨(光州潘氏)로 봉익(鳳翼)의 딸이다. 송시열 ( 宋時烈 )의 문인이다.

5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홀로된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일찍이 향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과거에는 끝내 오르지 못하고, 그뒤 뜻을 달리하여 학문연구에 전심, 역학과 성리학에 깊이 들어갔으며 천문 · 역수에도 밝았다.

1689(숙종 15) 송시열이 사사되자 이에 항변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써서 대궐 앞에 나아가 시위하는 등, 스승의 신원을 위하여 힘썼으며, 명의 신종을 제사지내자는 유림의 운동에 앞장섰다. 만년에는 후진양성에 힘써 문하에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저서로 용애문집 41책이 있다.

 

 

출전 <한미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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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아주(鵝州) ()씨는 남한에 총 6,338가구, 26,2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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