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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신씨(申)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평산신씨)

 

본관(本貫): 평산(平山)

시조(始祖): 신숭겸(申崇謙)

유래(由來):

 

평산(平山) ()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에 오른 신숭겸(申崇謙)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의 초명은 능산으로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춘천지방) 출신인데, 태봉(泰封: 신라 52대 효공왕 때 궁예가 송악에서 세운 나라)의 기장으로 있다가 918(고려 태조 원년) 배현경(裵玄慶홍 유(洪 儒복지겸(卜智謙) 등과 더불어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 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가 창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고려개국원훈으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그 후 927(태조 10) 공산 동수에서 견훤(甄萱) 군사와의 싸움에 태조(太祖)와 함께 출정하여 포위로 전세가 위급해지자 태조와 용모가 흡사한 숭겸이 태조를 피신시키고 대신 어차를 타고 출전하여 전사하였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태조는 시신을 잘 보살펴 춘천에 예장하고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삼중대광의경대광위이보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추봉하였으며, 숭겸의 아들 보장(甫藏)을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 경북 달성군 공산면 지묘동)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었다. 1120(예종 15) 왕이 서경(西京: 평양)에 행차하여 <팔관회>가 열렸을 때 <도이장가>를 지어 김 낙(金 樂)과 신숭겸의 공을 추도하였다.

 

가문의 중요 인물

 

신즙

도관(都官) 중명(仲明)의 아들 즙은 고려조에서 전리판서(典理判事)와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을 지냈다.

 

신군평(申君平)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관. 본관은 평산 ( 平山 ). 충숙왕대에 과거에 급제한 뒤 대관 ( 臺官 )이 되었다. 당시 권세 있는 자에게 뇌물을 주고 염치 없이 벼슬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고신에 서명하지 않아 미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1347(충목왕 3) 정치관(整治官)으로 백문보 ( 白文寶 ) 등과 함께 기황후 ( 奇皇后 )의 족제(族弟)인 기삼만 ( 奇三萬 )의 죄를 다스리다가 그가 죽은 것이 문제되어 원으로부터 파견된 승가노(僧家奴)에 의하여 곤장을 맞았다.

1352(공민왕 1) 나주목사에 제수되었지만 어머니가 연로하다 하여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355년 좌대언이 된 뒤 공민왕이 승직(僧職)을 제수하고자 불렀으나 나가지 않다가 어사대부에 제수되었다.

 

신현(申賢)

당세에 대학자로 추앙되었다.

 

신안(申晏)

대제학 집의 셋째 아들인 신안()은 고려 말에 봉선고 판관(奉先庫判官)을 거쳐 종부시령(宗簿寺令)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평산의 황의산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신개(申槪)

374(공민왕 23) 1446(세종 2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자격(子格), 호는 인재(寅齋) · 양졸당(養拙堂). 할아버지는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 )이고, 아버지는 종부시령(宗簿寺令) ()이다. 어머니는 문하찬성사 ( 門下贊成事 ) 임세정(任世正)의 딸이다.

1390(공양왕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393(태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로 발탁되었는데, 당시 태조가 실록을 보자고 할 때 그 불가함을 강력히 논하였다. 이어 감찰 · 문하습유(門下拾遺) · 좌정언(左正言) · 형조좌랑 · 호조좌랑을 거쳐 충청도도사로 나갔다가 다시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 이조정랑 · 사인 ( 舍人 ) · 예문관제학 · 판승문원사(判承文院使) 등을 역임하였다. 1413(태종 13)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로 발탁되는 동시에 춘추관편수관 · 지제교 ( 知製敎 )를 겸임하였다.

간관 ( 諫官 )으로 있으면서 주장한 의정부서사제도(議政府署事制度)의 폐지는 다음 해에 실현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 · 병조참의 · 충청도관찰사 ·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417년에 공조참판을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다. 그리고 이 해에 천추사 ( 千秋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세종 즉위 후 전라도 · 경상도 · 황해도의 도관찰사를 역임하고 형조참판 · 진주목사 · 우군총제 · 좌군총제 · 예문관대제학 · 전라도관찰사 ·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 ·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433(세종 15)에는 야인이 자주 변경을 침입, 큰 피해를 입히자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벌을 강력히 주장하여 야인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 해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이조판서로 사은사 ( 謝恩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에 올라 지춘추관사를 겸임하면서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6년에 찬성으로 승진하여 세자이사(世子貳師) · 집현전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439년에 우의정에 올랐으며, 1442년에는 감춘추관사로 권제(權 庶 ) 등과 더불어 편찬한 고려사 를 올렸다. 1444년에 궤장( 廓 杖)을 하사받고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공법 ( 貢法 ) · 축성(築城) 등에 있어서 백성들에게 불편한 것은 이를 건의, 시정하도록 하였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저서로 인재문집 이 있다.

 

신효(申曉)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호는 서호산인(西湖山人) · 효창(曉窓). 중명(仲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즙( )이고, 아버지는 고려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 ()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사 임세정(任世正)의 딸이고, 좌의정 개( )의 아우이다.

1402(태종 2)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404년 사간원우정언이 되어 노이(盧異) · 이양명(李陽明) 등과 궁중의 비밀을 발설하여 탄핵을 받아 연안에 유배되었다.

2년 만에 풀려났으나 행주에 은거하여 다시는 서울의 도성문을 밟는 일 없이 세조 중기에 81세로 죽었다. 세종 때 형 신개가 재상으로 있으면서 다시 관직에 나올 것을 권하고 천거하였으나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신영(申瑛)

1499(연산군 5) 1559(명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윤보(潤甫). 우정언 ( 右正言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자계(自 訣 )이고, 아버지는 증판서(贈判書) 세경(世卿)이며, 어머니는 증예조참판 박사란(朴思 襟 )의 딸이다.

김식 ( 金湜 )의 문인으로, 1516(중종 11) 진사시에 합격하고 1523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발탁되었다.

이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있을 때 화를 입은 스승 김식을 변호하다가 탄핵을 받았으나 뒤에 형조좌랑 · 함경도도사를 거쳐, 공조 · 형조 · 병조정랑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

권신에게 아부하지 않아 수원부사로 좌천되었으나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이어 한성부서윤을 지내고, 10여 년 동안 이조 · 호조 · 예조 · 병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명종이 즉위한 뒤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는 진휼정책(賑恤政策)에 각별히 힘써 공물 ( 貢物 )의 폐단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다.

1550(명종 5) 한성부우윤을 거쳐, 대사헌 · 대사간을 역임하면서 당시의 권신인 이기(李 咬 )를 맹렬히 탄핵하였다. 호조판서 · 한성부판윤 · 우참찬을 지냈으나, 박한종(朴漢宗) 사건에 연루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체직되었다. 시호는 이간(夷簡)이다.

1499(연산군 5) 1559(명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윤보(潤甫). 우정언 ( 右正言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자계(自 訣 )이고, 아버지는 증판서(贈判書) 세경(世卿)이며, 어머니는 증예조참판 박사란(朴思 襟 )의 딸이다.

김식 ( 金湜 )의 문인으로, 1516(중종 11) 진사시에 합격하고 1523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발탁되었다.

이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있을 때 화를 입은 스승 김식을 변호하다가 탄핵을 받았으나 뒤에 형조좌랑 · 함경도도사를 거쳐, 공조 · 형조 · 병조정랑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

권신에게 아부하지 않아 수원부사로 좌천되었으나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이어 한성부서윤을 지내고, 10여 년 동안 이조 · 호조 · 예조 · 병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명종이 즉위한 뒤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는 진휼정책(賑恤政策)에 각별히 힘써 공물 ( 貢物 )의 폐단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다.

1550(명종 5) 한성부우윤을 거쳐, 대사헌 · 대사간을 역임하면서 당시의 권신인 이기(李 咬 )를 맹렬히 탄핵하였다. 호조판서 · 한성부판윤 · 우참찬을 지냈으나, 박한종(朴漢宗) 사건에 연루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체직되었다. 시호는 이간(夷簡)이다.

 

신호(申浩)

1539(중종 34)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언원(彦源). 장절공(壯節) 숭겸(崇謙)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희중(希仲)이며, 어머니는 창녕장씨(昌寧張氏)로 희령(希齡)의 딸이다.

선대 때부터 전라도 고부에 옮겨 살았다. 1567(명종 22) 무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역임하다가 무용이 뛰어나다 하여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에 임명되었다. 북방에서 변경을 지킨지 몇 년이 되자 왕은 너무 오래 고생이 많다 하여 도총부도사를 삼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 2년 전에 왕은 왜군이 혹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하여 무장들 중에 뛰어난 인물들을 발탁, 남쪽지방에 배치하였는데 낙안군수로 있던 그는 정읍의 이순신 ( 李舜臣 ), 순천의 권준 ( 權俊 ), 흥양의 배흥립 ( 裵興立 ), 광양의 어영담 ( 魚泳潭 ) 등과 함께 기용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전해에 전라좌수사로 발탁되었던 이순신을 도와 견내량(見乃梁안골포 ( 安骨浦 ) 등의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워 통정대부로 승진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교룡산성수어사(蛟龍山城守禦使)로 있다가 남원성 ( 南原城 )이 왜군에게 포위되자 이를 구원하러 갔다가 전사하였다. 원종공신 ( 原從功臣 )에 책록되고 형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남원의 충렬사 ( 忠烈祠 )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무장(武壯)이다.

 

신명인(申命仁)

1492(성종 2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영중(榮仲), 호는 구봉(龜峰송정(松亭풍류광객(風流狂客). 숭겸(崇謙)의 후손이며, 김식 ( 金湜 )의 문인이다.

1519(중종 14)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약수 ( 李若水 박광우(朴光祐) 등과 함께 성균관유생 등 1,000여 명을 이끌고 광화문에 집결하여 조광조 ( 趙光祖 ) 등 사림파의 구명을 위하여 상소하였고, 대궐에 돌입하였다.

그 다음해에 거창으로 피신하여 갔던 그의 스승 김식이 자결하자 그 시신을 충주로 모셔와 장사지냈고, 그를 애도하는 조송옥사 弔宋玉辭를 지었다. 이후 벼슬을 단념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이로 인한 무고를 두려워하여 과장(科場)에는 들어갔으나 술만 마시고 나왔다고 한다.

항상 윤수(尹壽목세평(睦世秤) 등과 함께 시문을 읊으며 세월을 보냈고, 만년에는 최수성(崔壽城) 등과 함께 풍속교정에 힘썼으며, 문장에도 탁월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정광필 ( 鄭光弼 안당(安塘이장곤 ( 李長坤 김정 ( 金淨 조광조·김식· 기준 ( 奇遵 ) 등과 함께 8(八賢)이라 불렸다고 한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청(貞淸)이다.

 

신익(申翌)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아버지는 명인(命仁)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으로 기용되었다가 1556(명종 11)에 직권남용으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함평현감으로 재임용되었는데, 이 때 왜구의 배를 나포한 공으로 6품직에서 4품직으로 특진되었다.

1571(선조 4)에는 함경남도병마절도사, 1573년에는 함경북도병마절도사, 1574년에는 제주목사, 1575년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 1583년에는 순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병사로서 3도의 근왕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던 중,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해 보고 대군이 흩어지자 나중에 패전의 허물을 쓰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완력뿐만 아니라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순천부사로 있을 때에는 기묘사화 때 희생된 8()을 추모하여 팔현전 八賢傳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신상

1480(성종 11) 1530(중종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대용(大用), 호는 위암(韋庵). 좌의정 개(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자준(自準)이고, 아버지는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말평(末平)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권람 ( 權擥 )의 딸이다.

1498(연산군 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03년 세자 책봉을 기념한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 곧 예문관검열을 거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춘추관편수관을 겸해 연산군일기 편찬에 최연소자로 참여하였다. 1508(중종 3)에 예조정랑이 되었고 사간원헌납 · 홍문관교리 ·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다음해 응교 · 지제교 ( 知製敎 )가 되었다. 이후 그의 승진은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사인 ( 舍人 ) · 사간 · 사복시정(司僕寺正) · 직제학 · 부제학 · 동부승지 · 도승지 ·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에 한성판윤이 되었으나 곧 이조판서에 발탁되었다.

이 때 이장곤 ( 李長坤 )과 함께 전선(銓選)을 맡아 조광조 ( 趙光祖 ) · 김식 ( 金湜 ) · 김정 ( 金淨 ) · 김구(金球) 등을 비롯한 사림파 학자들의 등용에 크게 노력하였다. , 이 시기 조광조 등의 사림파와 남곤 ( 南袞 ) 등 훈구세력의 대립이 첨예화되자 양파의 중재, 조절에 노력하였다. 이후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피죄되자 그들의 구명에 크게 노력하였다.

그러나 자신도 사화의 와중에 휩쓸려 파직되지는 않았지만. 요직에서 밀려나 산질(散秩)에 머물게 되었다. 그 뒤 경기 · 전라 ·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49년에 형조판서가 되었지만 병으로 사직하였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신립(申砬)

1546(명종 1)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입지(立之). ( )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상( )이고, 아버지는 생원 화국(華國)이다. 어머니는 첨정 윤회전(尹懷貞)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글읽기보다 무예 닦기를 좋아한 그는 22(=송자대전)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 · 도총관 · 도사 ( 都事 ) · 경력 ( 經歷 ) 등의 벼슬을 거쳐, 외직인 진주판관으로 나갔다. 이 때 문장가로 이름난 진주목사 양응정 (梁應鼎)으로부터 거친 성격을 고칠 것을 종용받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목사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기도 하였다.

1583(선조 16) 온성부사로 있을 때 이탕개(尼湯介)가 거느린 야인(野人)들이 침입하여 훈융진(訓戎鎭)을 공격, 첨사 신상절(申尙節)이 위급하게 되자 유원첨사(柔遠僉使) 이박 ( 李璞 ) 등과 합세하여 적병 50여 명을 목베고 이어 적군을 추격, 두만강을 건너가서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또 경원부(慶源府)와 안원보(安原堡)에 침입한 야인들 및 같은 해 5월 종성에 쳐들어온 이탕개의 1만여 군대를 물리쳤다. 평상시에 철기(鐵騎) 500여명을 정병으로 훈련시켜 그 민첩함이 귀신같아 야인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이 때 육진 ( 六鎭 )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용맹 때문이었다.

북방의 전승이 보고되자 조정에서는 15843월에 그를 함경도북병사로 임명하고, 남철릭(藍一 : 무관의 公服의 하나) · 환도(環刀 : 군복에 착용한는 군사용 칼) · 수은갑(水銀甲) · 두구(頭口) 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노모에게는 매일 고기와 술을 보내고 병이 나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15872월 왜선 18척이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 침입하자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임명되어 군관 30명을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들이 철수한 뒤라 돌아오던 중, 양가의 딸을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의 탄핵으로 파직되었으나 곧 함경도남병사로 다시 임명되었다. 1588년 고미포(古未浦)의 야인 부락에 출정, 적병 20명을 목베고, 말 세 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그러나 이 해 10월 보장(堡將)을 맞대놓고 욕한 갈파지보(乫波知堡)의 수졸(戍卒)을 목베어 죽였다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의 한직으로 전보되었다. 15902월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가 내직인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항상 군비(軍備)의 부족함을 논하여 조정의 신임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그를 삼도순변사로 임명하고 보검을 하사하였다. 이에 그는 특청(特請 : 특별히 요구사항을 청함.)하여 유성룡 ( 柳成龍 )의 막하에 들어가 부장 김여물(金汝 幢 ) 80명의 군관과 시정백도(市井白徒 : 일반 시민으로 군사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 수백 명을 모병하여 충주로 떠났다.

이어 부장 몇 사람을 거느리고 조령 ( 鳥嶺 )으로 내려가 지형을 살폈다. 이 때 군관 60여 명과 군졸 4,000여 명을 이끌고 남하했던 순변사 이일 ( 李鎰 )이 경상도 상주에서 왜군에게 패하여 쫓겨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죽여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일의 재주를 아껴 용서하고 오히려 선봉장으로 삼았다. 이일은 왜군의 정세가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대군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김여물 등이 아군의 수가 열세임을 들어 지형이 험한 조령에서 잠복, 전투를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병의 활용을 극구 주장하여 군대를 돌려 충주성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 ( 彈琴臺 )에 나아가 배수진을 치고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해 428일 배수의 진을 친 아군을 향하여 고니시(小西行長)를 선두로 한 왜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오자 중과부적으로 포위되어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 아군의 힘을 믿고 미처 피난을 하지 않았던 충주의 사민(士民)과 관속들이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아군이 섬멸되자 김여물 · 박안민(朴安民) 등과 함께 남한강물에 투신, 순절하였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신경진

1575(선조 8) 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군수(君受). 서울 출신. 기묘명신(己卯名臣)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화국(華國)이고, 아버지는 도순변사 ( 都巡邊使 ) ()이다. 경유(景裕) · 경인(景 匪 )의 형이다.

임진왜란 때 전망인(戰亡人 : 전쟁에 참여하여 죽은 자)의 아들이라 하여 선전관으로 기용되었고, 오위도총부도사로 전보되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태안군수 · 담양부사를 거쳐 부산첨사가 되었으나 일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왜사(倭使)의 접대를 거부하여 체임되었다.

이어 갑산부사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우후(咸鏡南道兵馬虞候)로 전보되자, 체찰사 이항복 ( 李恒福 )의 요청으로 경원부사와 벽동군수가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북파(大北派)가 정권을 장악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중 1620(광해군 12) 김류(金 濫 ) · 이귀 ( 李貴 ) · 최명길 ( 崔鳴吉 ) · 구인후(具仁 譽 ) 등과 모의, 그와 인척 관계에 있는 능양군(綾陽君 : 仁祖)을 추대하기로 하였다.

그 뒤 기회를 노리다가 1622년 이귀가 평산부사가 되자 그 중군 ( 中軍 )이 되기를 자원하여 거사 준비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어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쫓겨나 1623년의 인조반정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였다.

반정 직후 왕의 특명으로 공조참의 · 병조참지에 임명되었고, 곧 병조참판이 되어 훈련도감 ( 訓鍊都監 ) · 호위청 ( 扈衛廳 ) · 포도청의 대장을 겸하여 왕실 안전의 책임을 맡았다.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 때 제일 먼저 반정계획을 세웠다 하여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일등공신(奮忠贊模立紀明倫靖社一等功臣)에 녹훈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졌다.

1624(인조 2) 이괄 ( 李适 )의 난 때는 훈련대장으로 어가 ( 御駕 )를 호위하였다. 평정 후 역도에 의하여 추대되었던 흥안군 제(興安君 笙 : 선조의 열째아들)를 처형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이듬해 부원군 ( 府院君 )에 봉해졌다.

그러나 공을 믿고 탐오(貪汚)하여 남의 집터 수천칸을 빼앗아 이 때문에 언관의 탄핵을 받았다. 1635년에는 목릉 ( 穆陵 ) · 혜릉 ( 惠陵 )의 봉심관(奉審官)으로 보수를 소홀히 하여 파직당했다가 곧 복직되어 형조판서에 훈련대장을 겸하였다. 1636년 병조판서를 겸하도록 했으나 질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수하의 군사를 인솔하여 적의 선봉부대를 차단,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여유를 주었으며, 청나라와의 화의 성립 후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637년 좌의정 최명길의 추천으로 우의정이 되어 훈련도감제조를 겸했는데, 이 때 난 후의 민심수습책을 논하고 수령의 임명에 신중을 기할 것을 개진하였다.

이듬해 사은사 ( 謝恩使 )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돌아와 좌의정으로 승진하자 영의정 최명길과 의논하여 승려 독보(獨步)를 은밀히 명나라에 파견,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그간의 사정을 변명하도록 하였다.

1641년 다시 사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구금되어 있던 김상헌 ( 金尙憲 ) 등을 옹호하였다. 1642년 청나라의 요구로 최명길이 파직되자 그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다가 병으로 사퇴한 후 이듬해 재차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열흘도 못 되어 죽었다.

무인가문 출신의 손꼽히는 장재(將材 : 장군이 될만한 인물)로서 인조반정을 처음부터 계획, 주도하여 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항상 훈련도감 · 호위청 등의 친병(親兵)을 장악했으며 왕의 신변을 책임졌다.

상신(相臣 : 삼의정 즉, 영의정 · 좌의정 · 우의정 등을 이름.)으로 있으면서 특별히 이루어놓은 시책은 없으나, 외교 교섭에 능해 청나라의 과도한 징색(徵索)과 잦은 내정 간섭을 철회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반정 후 서인이 훈서(勳西) · 청서(淸西)로 분열하자 김류 · 이귀 · 김자점 ( 金自點 ) · 심기원 ( 沈器遠 ) 등과 함께 훈서의 영수가 되었으나 무신임을 들어 조정의 시비에 간여하기를 극력 회피하였다. 또한 송시열 ( 宋時烈 ) 등의 사림을 천거하고 장용(奬用 : 장려하여 등용)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공을 믿고 탐오한 면도 있어 식자층의 비난을 받았다. 무인이면서도 김류 · 이귀 · 최명길 등의 문인들과도 널리 교유했는데, 특히 김류와는 선대의 인연( 의 아버지 金汝 幢 申景 所 의 아버지 從事官으로 충주에서 같이 전사하였다.)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651(효종 2)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문이 전한다.

 

신흠(申欽)

1566(명종 21) 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 · 상촌(象村) · 현옹(玄翁) · 방옹(放翁). 증판서 세경(世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참찬 영()이고,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다. 어머니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기수(麒壽)의 딸이다.

송인수와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585(선조 18)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 ( 承仕郎 )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 ( 宋應漑 )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 ( 士林 )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 ” 고 하였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黨與 : 정치적인 견해를 같이하는 집단 또는 사람)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그 뒤 곧 경원훈도(慶源訓導)로 나갔으며 광주훈도(廣州訓導)를 거쳐 사재감참봉이 되었다.

1589년 춘추관 관원에 뽑히면서 예문관봉교 · 사헌부감찰 ·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 ( 申砬 )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이어 도체찰사 ( 都體察使 ) 정철 ( 鄭澈 )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그 공로로 지평 ( 持平 )에 승진되었다.

1593년 이조좌랑에 체직, 당시 폭주하는 대명외교문서 제작의 필요와 함께 지제교 ( 知製敎 ) · 승문원교감을 겸대하였다. 1594년 이조정랑으로서 역적 송유진 ( 宋儒眞 )의 옥사를 다스리고 그 공로로 가자되면서 사복시첨정으로 승진했으며, 곧 집의 ( 執義 )에 초수(超授 : 뛰어넘어 제수됨)되었다. 같은 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 윤근수 ( 尹根壽 )의 서장관 ( 書狀官 )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군기시정에 제수되었다.

1595년 함경도어사와 의정부사인을 거쳐 장악원정(掌樂院正) · 성균관사예(成均館詞藝) · 종부시정 ·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 홍문관교리 · 홍문관응교 · 의정부사인 ·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되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형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병조참지 · 우부승지 · 이조참의 · 예조참의 · 대사간 ·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01춘추제씨전 春秋諸氏傳 을 합찬(合纂)한 공으로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승자되고 곧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602년 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거쳐 예조참판에 발탁되었다.

이어서 병조참판 · 홍문관부제학 · 성균관대사성 · 도승지 · 예문관제학 · 병조참판 · 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04년에 자헌대부 ( 資憲大夫 )에 오르면서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그 뒤 병조판서 · 예조판서 · 상호군 ( 上護軍 ) · 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8(광해군 즉위년) 선조애책문(宣祖哀冊文 : 선조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짓고 한성부판윤 ·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세자의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공로로 숭정대부 ( 崇政大夫 )가 되었으며, 1610년에는 동지경연사 · 동지성균관사 · 예문관대제학을 겸대하였다.

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 ( 永昌大君 )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인 까닭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 (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 ( 金悌男 )에의 가죄(加罪 : 죄를 더함)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으며 1621년에 사면되었다.

1623(인조 즉위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 · 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념,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을 떨쳤다.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사림의 신망을 받음은 물론, 이정구 ( 李廷龜 ) · 장유 ( 張維 ) · 이식 ( 李植 )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 : 바른 종통)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 : 月沙 이정구, 象村 신흠, 谿谷 장유, 澤堂 이식을 일컬음)으로 칭송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다. 1651(효종 2)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 및 편서로 상촌집 · 야언 野言 등과 현헌선생화도시 玄軒先生和陶詩 · 낙민루기 樂民樓記 ·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 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 · 황화집령 皇華集令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신감(申鑑)

1570(선조 2)1631(인조 9) 조선 전·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명원(明遠), 호는 소선(笑仙만옹(慢翁). 증 참판 세경(世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참찬 영()이고,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기수(麒壽)의 딸이며,영의정 흠()의 형이다.

1597(선조 3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599년 평안도평사로 나갔다가, 1601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등을 지내고, 이듬해 예조·병조정랑을 거쳐 1603년 행용양위부사직 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실록의 재간에 참여하였다.

1605년 봉산군수로 나갔으며 광해군 때는 원주목사를 지냈다. 인조 초에는 충청도관찰사로서 공주산성을 수축하여 국난에 대비하였다. 그 뒤 형조참판을 역임하였고, 남원부사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1628(인조 6) 강화부유수가 되었다.

 

신상(申尙)

철저한 배청숭명주의자인 민일(敏一)의 아들 신상()은 병자호란 때 왕족의 호위직을 맡아 강화도에 피난갔는데 적이 임박해오자 호의의 신들이 모두 도망가고 혼자 세자빈을 지키고 있었다.

이 때 청병이 세자빈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장신에게 배례시킴으로써 굴복의 예를 갖추도록 강요하자, 표정하나 흐트리지 않고 서있던 그는 빈의 시종에게 화구를 달구어 오라시키고 그것을 빈이 협박받고 있는 연(: 임금이 타는 가마의 하나) 속에 넣어주며 자결을 권하였다. 그리고 빈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 자기도 따라 자결할 작정이었다.

많은 부녀자들의 자결을 보아온 청병은 이에 겁을 먹고 그 굴욕배례를 단념하고는 그저 신변만을 보호토록 시켰다.

이렇게 세지빈을 구제해낸 상()에게, 세자빈에게 죽음을 강요했다는 모략까지 곁들여 죄목을 씌우려 하자 스스로 유배 길을 택하여 원주로 내려가 초가 두 칸을 짓고 사람의 내왕을 사절했다고 한다. 그는 그 곳에서 부음록 3권과휘언두 편을 저술하여 후손에게 전했다.

 

신명규(申命圭)

1618(광해군 10) 1688(숙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원서(元瑞) 또는 군서(君瑞), 호는 묵재(默齋) 또는 적안(適安). 첨정 ( 僉正 )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성 민일(敏一)이고, 아버지는 부사 상( )이며, 어머니는 이흥인(李興仁)의 딸이다.

1662(현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665년 지평 ( 持平 ) · 장령 ( 掌令 )을 지내고 이듬해인 1666년에는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바 있으며, 이어 정언 ( 正言 ) · 헌납 ( 獻納 ) 등을 거쳐 1667년 남해로 유배되었다. 1669년 집의에 이르고, 이어 사간 · 부수찬 등 주로 대간을 역임하였다.

1673년 산릉도감낭청(山陵都監郎廳)이 되어 영릉 ( 寧陵 )을 옮길 때 석역(石役)의 감독이 태만했다는 죄로 박천 · 강진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1683(숙종 9)에 풀려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25(영조 1) 진도 유생 박제현 ( 朴齊賢 ) 등의 상소로 봉암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묵재기문록 默齋記聞錄 이 있다.

 

신완(申玩)

1646(인조 24) 1707(숙종 3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공헌(公獻), 호는 경암(絅庵). 영의정 경진(景 所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준()이고, 아버지는 목사 여식(汝拭)이며, 어머니는 공조판서 이기조(李基條)의 딸이다. 삼촌 여정(汝挺)에게 입양되었다. 박세채 ( 朴世采 )의 문인이다.

1672(현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언 ( 正言 )이 되었다. 1680(숙종 6) 경신대출척이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남인 권대운 ( 權大運 ) · 민희 ( 閔熙 ) 등을 공격하였다.

1684년 강양도(江襄道 : 지금의 강원도)의 관찰사에 제수되었고 이후 도승지 · 대사헌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을 때 태조의 시호를 덧붙이는 것에 반대한 박태유 ( 朴泰維 )의 상소에 편들었다 하여 삭탈관직되었다. 1688년 경기도관찰사에 기용되었다.

1694년 예조판서를 거쳐 1700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처벌완화를 주청하였고 시무(時務) 8조를 올렸으며, 일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북한산성의 축성을 건의하여 윤허를 얻었다. 1703년 영의정에 오르고 평천군(平川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1706년 유생 임부(林簿)로부터 앞서 1701년 세자에 대한 모해설이 있었을 때 추국(推鞫 : 임금의 명에 의해 국문함.)에 참여하여 사건규명을 잘못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저서로 경암집 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신만(申晩)

1703(숙종 29) 1765(영조 4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여성(汝成) · 성백(成伯). 집의 ( 執義 ) 명규(命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단( )이고, 아버지는 영중추부사 사철(思喆)이며, 어머니는 이규일(李揆一)의 딸이다.

1726(영조 2) 알성문과에 별과로 급제하여 정자가 되고 이듬해 실록청도청낭청(實錄廳都廳郎廳)이 되었으나 이해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득세할 때 파직당하였다.

1729년 검열로 다시 등용되어 헌납 · 지평 · 정언 · 이조참의 · 대사성 · 부제학 · 도승지 · 이조참판 등을 거쳐 1741년 개성유수, 1743년 경기관찰사, 1747년 예조판서, 1748년 이조판서, 1753년 호조판서 · 병조판서를 지냈다.

1755년 찬수당상(纂修堂上)으로 천의소감 闡義昭鑑 을 편찬하였다. 1756년 우의정, 1758년 좌의정을 거쳐 1762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해 사도세자 ( 思悼世子 )가 뒤주에 갇히는 현장에서 방관하였다는 이유로,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한 왕에 의하여 파직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동생 회()와 함께 형제가 정승직에 오른 흔하지 않은 경우의 인물이다. 그러나 재직시 송명흠(宋明欽)을 정중히 대접할 것을 청한 외에는 별다른 건의사항이 없었다. 시호는 효정(孝正)이다.

 

신유한(申維翰)

1681(숙종 7)? 조선 후기의 문신·문장가. 본관은 영해 ( 寧海 ).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靑泉). 경상북도 고령 출신. 증조가 구년(龜年)이고, 아버지는 태래(泰來)이며, 어머니는 김석현(金碩玄)의 딸이다.

태시(泰始)에게 입양되었다. 1705(숙종 31)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9년 제술관(製述官)으로서 통신사 홍치중 ( 洪致中 )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봉상시첨정에 이르렀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시에 걸작품이 많고 사()에도 능하였다. 최두기(崔杜機)와 친하였다. 저서로는 해유록·청천집·충서난록 奮忠難錄등이 있다.

 

신위(申暐)

영조 때 대사헌을 역임.

 

신대겸(申大謙)

어영대장(御榮大將)을 거쳐 공조 참판을 지냄.

 

신작(申綽)

청아(淸雅)한 문장과 서예로 명망이 높았다.

 

신위(申緯)

1769(영조 45) 1845(헌종 11). 조선 후기의 문신 · 화가 · 서예가.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한수(漢 馬 ), 호는 자하(紫霞) · 경수당(警修堂). 석하(錫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 )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대승(大升)이다. 어머니는 이영록(李永祿)의 딸이다.

1799(정조 23)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 : 당하관 중에서 제술과 강독에 의해 특별히 뽑힌 문신)에 발탁되었다. 1812(순조 12) 진주 겸 주청사(陳奏兼奏請使)의 서장관 ( 書狀官 )으로 청나라에 갔는데, 이 때 중국의 학문과 문학을 실지로 확인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넓히는 기회로 삼아 중국의 학자 · 문인과 교유를 돈독히 하였다.

특히, 당대 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의 교유는 그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14년에 병조참지를 거쳐, 이듬해 곡산부사로 나갔다. 이 때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확인하고 농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조정에 세금을 탕감해달라는 탄원을 하기도 하였다.

1816년 승지를 거쳐, 1818년에 춘천부사로 나갔다. 이 때 그는 그 지방의 토호들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맞서다 파직까지 당하였다. 1822년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당쟁의 여파로 다시 파직된 뒤, 곧 복관되어 1828년에는 강화유수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윤상도 ( 尹尙度 )의 탄핵으로 2년만에 또다시 물러나 시흥 자하산에서 은거하였다.

1832년 다시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벼슬 생활에 환멸을 느낀 끝에 사양하였다. 다음 해 대사간에 제수되어 이에 나갔으나 경기암행어사 이시원 ( 李是遠 )이 강화유수 때의 실정을 거론, 상소하다가 평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복직되어 이조참판 ·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글씨 · 그림 및 시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시에 있어 한국적인 특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없어져가는 악부 ( 樂府 )를 보존하려 했는데, 한역한 소악부 小樂府 와 시사평(詩史評)을 한 동인논시 東人論詩 35수와 우리 나라의 관우희 ( 觀優戱 )를 읊은 관극시 觀劇詩 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를 가리켜 김택영 ( 金澤榮 )은 시사적(詩史的)인 위치로 볼 때 500년 이래의 대가라고 칭송하였다. 이러한 그의 영향은 강위(姜偉) · 황현 ( 黃玹 ) · 이건창 ( 李建昌 ) · 김택영에 이어져 우리 나라 한문학을 마무리하는 구실을 하였다.

또한, 그림은 산수화와 함께 묵죽에 능하였다. 이정 ( 李霆 ) · 유덕장 ( 柳德章 )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힌다. 강세황 ( 姜世晃 )에게서 묵죽을 배웠던 그는 남종화(南宗 怜 )의 기법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 남종화의 꽃을 피웠다. 그의 묵죽화풍은 아들 명준(命準) · 명연(命衍)을 비롯, 조희룡 ( 趙熙龍 ) 등 추사파(秋史派) 화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 작품으로 방대도 訪戴圖 묵죽도 가 전한다. 또한, 글씨는 동기창체(董其昌體)를 따랐으며, 조선시대에 이 서체가 유행하는 데 계도적 구실을 하였다. 저서로 경수당전고 와 김택영이 600여 수를 정선한 자하시집 紫霞詩集 이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다.

 

신재식(申在植)

1770(영조 4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중립(仲立), 호는 취미(翠微). 사건(思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소()이고, 아버지는 판관 광온(光蘊)이며, 어머니는 송익흠(宋益欽)의 딸이다.

1805(순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의 벼슬을 거쳐 1818년 대사간에 이어 강원도관찰사·이조참의를 지내고 1826년 동지사 ( 冬至使 )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이조참판을 지내고 1831년에 부제학으로 재임시 함경도 마천령 ( 摩天嶺 ) 이북에서의 전화(錢貨) 사용의 금지를 상소하여 실시되었다. 그 뒤 개성유수·지경연사(知經筵事공조판서· 우빈객 ( 右賓客 )을 역임하였다.

1835(헌종 1) 대제학에 오르고 다음 해 익종 ( 翼宗 )의 태실가봉(胎室加封) 때 제조 ( 提調 ) 겸 서표관(書標官)이 되고 동지사(冬至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조판서·실록총재관(實錄摠裁官)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취미집이 있다. 시호는 문청 ( 文淸 )이다

 

신명순(申命淳)

1798(정조 22)1870(고종 7).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경명(景明). 좌찬성 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로 영원(泳源)의 딸이다. 경사에 능통하고 문예에 뛰어났다.

1820(순조 20) 음보(蔭補)로 남행선전관(南行宣傳官)이 되었고, 같은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1826년 함흥부사가 되어 빈민이나 이재민을 잘 구제하였고, 병적처리와 범죄다스리기를 엄정하게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1838(헌종 4) 봉산군수가 되어 유생들에게 강무 ( 講武 )할 것을 부과하였으며, 흉년이 크게 들자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1851(철종 2) 전라우도수군절도사, 1860년 좌변포도대장과 총융중군(摠戎中軍)을 지냈으며, 1862년 진주의 황지(潢池) 일대에서 민요(民擾)가 일어나자 절도사로 파견되어 백성을 위무하고, 곡식을 내어 곤궁함을 구원하여 안정시켰다.

흥선대원군의 신임이 두터웠으므로 1864(고종 1) 어영중군(御營中軍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官훈련도감중군을 지냈고, 1865년 한성부우윤·홍문관특진관·의금부동의금부사·훈련도정·좌변포도대장 등을 거쳐, 1866년 어영중군이 되었다.

좌변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금위영군졸의 치사사건이 일어나 중화부(中和府) 유배가 결정되었으나 곧 용서받았다. 뒤이어 지의금부사·행대호군(行大護軍형조판서·총융사·한성부판윤을 지냈다.

1867년에는 판의금부사와 우변포도대장을 지냈고, 1868년 삼군부 복설에 따라 행지삼군부사(行知三軍府事지돈녕부사 등을 지냈으며, 1869년에는 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신응조(申應朝)

1804(순조 4)189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유안(幼安), 호는 계전(桂田구암(苟菴). 동지돈녕부사 ( 同知敦寧府事 ) 상현(常顯)의 아들이다. 대유학자 홍직필 ( 洪直弼 )의 문인이다.

1852(철종 3)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조정랑·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1866년에 이조참판·대사헌, 1871년에 강원도관찰사, 1873년 형조판서·이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18827월 판부사(判府事)로 있으면서 왜양일체(倭洋一體)의 처지에 서서 사학(邪學)과 양술(洋術)을 배격하였는데, 특히 인천개항은 삼남과 서북의 이권을 침탈당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군사·지리상의 요지이기 때문에 최대의 우려가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수교 및 통상을 제한하려는 척사적 처지를 정책적 측면에서 주장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재집권하게 된 대원군에 의하여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뒤에 좌의정에 올랐으며, 연로하여 퇴임한 뒤에는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구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신헌(申櫶)

1810(순조 10)1884(고종21). 조선 후기의 무신·외교가. 본관은 평산 ( 平山 ). 초명은 관호(觀浩).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금당(琴堂우석(于石). 훈련대장 홍주(鴻周)의 손자, 부사 의직 ( 義直 )의 아들이다. 전형적인 무관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당대의 석학이며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김정희 ( 金正喜 ) 문하에서 다양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학문을 수학하였다. 그리하여 무관이면서도 독특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 유장(儒將)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또 개화파 인물들인 강위 ( 姜瑋 박규수 ( 朴珪壽 ) 등과 폭넓게 교유하여 현실에 밝은 식견을 가질 수가 있었다.

정약용의 민간자위전법인 민보방위론(民堡防衛論)을 계승, 발전시켜 민보집설 民堡輯說·융서촬요 戎書撮要등과 같은 병서를 저술, 자신의 국방론을 집대성시켰다. 김정희로부터 금석학(金石學시도(詩道서예 등을 배워 현재에는 전하지는 않지만 금석원류휘집 金石源流彙集이라는 금석학 관계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예서(隷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지리학에도 관심이 높아 김정호 ( 金正浩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제작에 조력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유산필기 酉山筆記라는 역사지리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1843(헌종 9) 전라도우수사로 재임하던 시절에 해남 대둔사 ( 大芚寺 )의 초의선사(草衣禪師)와 교유하면서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두었다. 이 밖에 농법에도 관심을 가져 농축회통 農蓄會通이라는 농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1827(순조 27) 할아버지 홍주의 후광을 업고 별군직 ( 別軍職 )에 차출되고, 이듬해 무과에 급제,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순조·헌종·철종·고종조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헌종 때에는 왕의 신임을 받아 중화부사·전라우도수군절도사·봉산군수·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849년에는 금위대장 ( 禁衛大將 )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헌종이 급서하고 철종이 등극하자 안동김씨 일파에게 배척받아 한동안 정계에서 유리되었다.

헌종이 위독할 때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했다는 죄목으로 1849년에 전라도 녹도 ( 鹿島 )에 유배되었다. 1853년 감형되어 무주로 이배되었다가 철종의 배려로 1857년에 풀려났다.

철종대에는 1861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고, 이어 형조판서·한성부판윤·공조 판서·우포도대장 등을 두루 지냈다. 고종 초기에도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병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로 강화의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난이 끝난 다음 좌참찬 겸 훈련대장에 임명되고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한 공으로 가자(加資)되어 숭록대부 ( 崇祿大夫 )에 올랐다.

그 뒤 어영대장·지행삼군부사(知行三軍府事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1874년 진무사 ( 鎭撫使 )에 임명되었다. 이 때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 연해의 요해지인 광성(廣城덕진 ( 德津 초지(草芝) 3()에 포대를 구축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운양호(雲揚號) 사건 이듬해인 1876년에는 판중추부사로 병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강화도에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黑田淸隆)와 협상을 벌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때의 협상 전말을 심행일기 沈行日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1878년에는 병으로 총융사를 사직하고 한동안 노량진에 있는 은휴정(恩休亭)에서 요양하기도 하였다. 1882년에는 경리통리기무아문사 ( 經理統理機務衙門事 )로 역시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Shufeldt, R.W.)와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시호는 장숙(壯肅)이다.

 

신재효(申在孝)

1812(순조 12) 1884(고종 21).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 · 개작자 · 후원자.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전라남도 고창 출생. 아버지 광흡(光洽)은 경기도 고양 사람으로 한성부에서 직장 ( 直長 )을 지내다가 고창현의 경주인 ( 京主人 )을 하던 선대의 인연으로 고창에 내려와 관약방(官藥房)을 하여 재산을 모았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절충장군 상려(常礪)의 딸이다. 신재효는 어려서 총명하였고,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그런 이름을 지었다 한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수학하였고, 사십이 넘어서 부근에 살던 대석학과 학문을 의논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고창현의 향리와 서민들과 깊이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 여러 향반(鄕班)들이 만장을 써 보낸 것으로 보아, 신분을 넘어선 폭넓은 교유를 맺었으리라 추정된다.

그는 아버지가 마련한 기반을 바탕으로 35세 이후에 이방이 되었다가 나중에 호장 ( 戶長 )에 올랐다. 1876(고종 13)에 기전삼남(畿甸三南)의 한재민(旱災民)을 구제한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을 거쳐 가선대부에 승품(陞品)되고,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를 겸하였다.

신분 상승을 꾀하면서도 한시가 아닌 판소리에서 정신 세계를 찾은 그는 판소리를 즐기는 동시에 자신의 넉넉한 재력을 이용하여 판소리 광대를 모아 생활을 돌보아 주면서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직선적이고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성음을 갖추면서 박자가 빨라 너름새를 할 여유가 없는 동편제(東便制)와 유연하고 화려한 성음을 갖추면서 박자가 느려 너름새가 쉽게 이루어지는 서편제(西便制)의 장점을 조화시키면서, 판소리의 듣는 측면에 덧붙여 보는 측면을 강조하였다.

또한 진채선(陳彩仙) 등의 여자 광대를 길러 내어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춘향가 를 남창과 동창으로 구분하여 어린 광대가 수련할 수 있는 대본을 마련하기도 하여, 판소리의 다양화를 시도하였다. 광대가 를 지어서 판소리의 이론을 수립하였는데, 인물 · 사설 · 득음(得音) · 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하였다.

인물은 타고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으며, 사설의 우아한 표현, 음악적 기교 및 관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판소리는 상스럽지 않고 한문학과 견줄 만한 예술임을 은연중에 드러내었다. 만년에는 춘향가 · 심청가 · 박타령 · 토별가 · 적벽가 · 변강쇠가 의 판소리 여섯마당을 골라서 그 사설을 개작하여, 작품 전반에 걸쳐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구성을 갖추게 하고, 상층 취향의 전아(典雅)하고 수식적인 문투를 많이 활용하였다.

그래서 하층의 발랄한 현실 인식이 약화되기도 하였으나, 아전으로서 지닌 비판적 의식이 부각되고, 사실적인 묘사와 남녀 관계의 비속한 모습을 생동하게 그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판소리가 상하의 관심을 아우르면서 신분을 넘어선 민족 문학으로 성장하는 데 진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고창읍 성두리에 묘가 있으며, 1890년에 한산시회(寒山詩會)에서 송덕비를 건립하였다.

판소리 사설 외에도 30여 편의 단가 혹은 허두가 ( 虛頭歌 ) ’ 라고 하는 노래를 지었다.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다룬 치산가 治産歌 , 서양의 침입이라는 시대적 시련을 걱정하는 십보가 十步歌 · 〈 ○ 심한 西洋되놈 , 경복궁 낙성 공연을 위해 마련한 방아타령 , 그 밖에 오섬가 烏蟾歌 · 도리화가 桃梨花歌 · 허두가 등이 대표적이다.

 

신두선(申斗善)

비서원승(秘書院丞)과 동지돈령원사(同知敦零院事)를 지냄.

 

신기선(申箕善)

1851(철종 2)1909. 조선 말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평산 ( 平山 ). 자는 언여(言汝), 호는 양원(陽園노봉(蘆峰). 희조(羲朝)의 아들이다. 1877년 대과별시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해 1878년 사간원정언, 1879년 홍문관부교리, 1881년 시강원문학 등을 지냈다.

1882년 통리기무아문주사를 거쳐, 다시 시강원문학이 되어 기무처 ( 機務處 )에 나가 수시로 영의정과 국정을 의논하였다. 관제개혁 때 통리내무아문참의가 되었다. 개화당 인물들과 밀접하게 교류했기 때문에 1884년 갑신정변 때 개화당 내각에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1886년 전라도 여도(呂島)에 유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 : 죄인을 配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둠.)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풀려나 호조참판을 거쳐 김홍집 내각(金弘集內閣)의 공무대신이 되었다. 1895년 군부대신에 임명되면서 육군부장(陸軍副將)이 되었고, 중추원부의장을 거쳤다.

1896년 항일의병항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지방에 내려가 선유활동을 하였다. 학부대신이 된 뒤에 단발, 양복 착용, 국문과 태양력 사용, 청나라에 대한 조공폐지 등을 반대하다 독립협회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얼마 뒤 사직하였다.

1897년 다시 중추원부의장을 지냈다. 1898년 법부대신이 되었을 때 나륙법(拏戮法)과 대역참형(大逆斬刑)을 복구하려다 다시 독립협회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고 고발, 탄핵되어 면직되었다. 이듬 해 1899년 학부대신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의정부참정, 1900년에 궁내부특진관·중추원의장, 1901년에 비서원경(秘書院卿법부대신·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1902년에 군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1903년에 철도원총재가 되었으며, 1904년 보안회 회장이 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의정부참정을 거쳐 1905년 함경도관찰사, 1906년 홍문관학사, 1907년 장례원경(掌禮院卿수학원장(修學院長) 등을 지냈다. 같은 해에 민병석 ( 閔丙奭 이용직 ( 李容稙 ) 등과 함께 유도 ( 儒道 )로써 체()를 삼고 신학문으로 용()을 삼아 신구사상(新舊思想)의 합일을 목적으로 하는 대동학회 ( 大東學會 )를 창립, 회장이 되었다. 저서로는 양원집 陽園集≫ ≪유학경위 儒學經緯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신돌석(申乭錫)

1878(고종 15) 1908.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평산 ( 平山 ). 본명은 태호(泰浩), 자는 순경(舜卿), 이명은 돌석(乭錫) · 태홍(泰洪) · 태을(泰乙) · 대호(大浩). ‘ 태백산의 호랑이 라는 별명으로 널리 불렸다. 경상북도 영해 출신. 석주(錫柱)의 아들이다.

그가 태어난 영해지방은 1871(고종 8)에 이필제 ( 李弼濟 )가 중심이 되어 부사를 죽이고 관아를 불태운 농민봉기가 일어났던 곳으로 봉건체제에 항거하는 기질이 강한 지방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반봉건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아울러 일제의 침략으로 강렬한 항일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세의 젊은 나이로 1896(건양 1) 313일 영해에서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거사를 일으켰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재개되자 1906313일 의병 100여 명을 모아 그가 사는 마을에서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재차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에 울진 장흥관(長興館)에 이르러 일본군의 배 9척을 기습 파괴하고, 6월에는 원주의 병정들을 습격해 항복을 받았다. 이어 삼척 · 강릉 · 양양 · 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무찌르고 또 그들의 전선 가설을 방해하였다.

1907년 울진 매화당(梅花堂)에서 수동(壽洞)으로 돌아와 다시 의병을 모집, 영덕의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원구(元邱)에 진을 쳤을 때 일본군이 청송에 집결해 있었다. 이를 공격하기 위해 의병을 청부역(靑鳧驛)으로 진군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지방민 3,000여 명이 가세하자, 영양의 주실 注谷 로 퇴각하는 주둔병을 추격해 격전 끝에 물리쳤다. 이 곳에서 10여 일간 머물면서 주민들을 안정시키고, 진보 ( 眞寶 )의 삼위(三危)에서 또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이어 경주의 대산성(垈山城)에서 연일 전투를 벌이다가 다시 청하 ( 淸河 )로부터 영덕의 조현(鳥峴)에 이르러 적과 싸워 이기고 소항(所項)을 지나 대동(大洞)에 이르렀다.

10월에 영해경무서를 습격하고, 수동으로 돌아와 군량을 조달하였다. 12월에 의병장 이인영 ( 李麟榮 )을 중심으로 13도의병이 연합해 서울을 공격하기로 해 전국의 의병부대가 양주로 모여 들었다.

이 때 신돌석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해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올라왔다. 그러나 13도연합의병의 서울 침공계획은 실현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진호(鎭護)와 부서 개편에서 신돌석 부대는 제외되고 말았다.

당시 13도연합의병부대의 각도 의병대장은 양반 · 유생 출신의 의병대장으로만 편성되었다.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을 비롯하여 홍범도 ( 洪範圖 ) · 김수민(金秀民) 등을 참여시키지 않아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는 부하 장병을 이끌고 경상도 영해로 되돌아와 19081월에 평해의 독곡(獨谷)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2월에 영양읍에 진을 쳤다가, 3월에 수비(首比)로 돌아와 안동 · 울진 · 삼척 · 강릉 등지의 의병과 합쳐서 군세를 강화해 춘양 ( 春陽 ) · 황지 ( 黃池 ) · 소봉동(小鳳洞) 등지의 적을 격파하였다.

4월에는 울진 도곡(道谷)에서 적의 무기를 다수 빼앗았으며, 7월에 평해 한곡(寒谷)에서, 9월에는 희암(喜巖)에서 싸웠다. 10월에 안동 재산 ( 才山 )으로부터 영양 검정여점(黔丁旅店)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추워져 이듬 해 봄을 기약하고 장병을 돌려보낸 후 눌곡(訥谷)의 부하 김상렬(金相烈)의 집에 은신했는데, 이들 형제의 계략에 빠져 암살당하였다.

신돌석은 한말 의병투쟁에 있어서 평민 출신의 의병대장으로는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민중적 기반 위에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그는 교묘한 게릴라 전법으로 장기간 전투를 계속하였다.

이것은 그의 의병부대가 군율이 엄격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민중들의 환영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양반과 유생 출신 의병장들의 봉건적인 신분질서 관념은 평민출신인 그를 백안시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지도자 간의 이념적인 차이는 의병부대간의 통일전선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고, 평민 출신 의병장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태식(申泰植)

1864(고종 1)1932. 조선 말기의 의병장·독립운동가. 본관은 평산 ( 平山 ). 일명 철회(哲會).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도산(島山). 경상북도 문경 출신. 한말에 내부의 주사 ( 主事 )와 의관 (醫官)을 역임하였다.

1895(고종 32) 거의(擧義)하여 밀정혐의가 있는 가은면의 김골패(金骨牌)와 상주에 사는 강용이(姜龍伊)를 농암시장(籠巖市場)에서 사살하였다.

그 뒤 190783일 단양에서 의병 수백명을 모집하고 도대장(都大將)에 취임해, 울진·평해·영양·영월·산동·제천·원주·홍천·춘천·철원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그러는 중에 그 해 9월 일본 경찰에 의해 본가가 불태워지기도 하였다.

1908년에는 홍천전투에서 패하여 횡성으로 퇴각할 때, 적의 총탄에 어깨를 부상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주의 산안전투(山安戰鬪)에서 왜장 조(長三郎)를 생포하여 주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뒤 1214일 영평 ( 永平 )의 이동전투(裡洞戰鬪)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붙잡혔다.

190919일 경성감옥에 수감되어 그 해 420일 경성공소심에서 교수형이 언도되었으나, 영해면민들이 입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던 사실을 들어 진정하여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918119일 출감한 뒤, 3·1운동에 참가했으며,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경상도지방에서 조선독립 후원을 위한 의용단 ( 義勇團 )을 조직하고 단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김찬규(金燦圭이응수(李應洙김돈희(金敦熙김동진(金東鎭) 등의 동지를 규합해 서로군정서 ( 西路軍政署 )와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기밀이 누설되어 이듬해 가을에 붙잡혔다. 19221228일 대구감옥에 재수감되어 다음 해 12월에 징역 1년을 언도 받았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팔균(申八均)

1882(고종 19)1924. 조선 말기의 무관·항일독립운동가. 본관은 평산 ( 平山 ). 호는 동천 ( 東川 ). 충청북도 진천 출신. 석희(奭熙)의 아들이다.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 1902년 제2기생으로 졸업하고 육군 참위(參尉)로 임관되었다. 1904년에 부위 ( 副尉 ), 1907년에 정위(正尉)로 진급, 강계진위대(江界鎭衛隊)에 근무하였다.

그 해 8월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당하자 통분하여, 항일구국군을 조직하기로 결심하고 낙향하였다. 향리인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老院里)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주고 항일애국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이월청년학교(梨月靑年學校)를 설립하였다. 이때부터 각지에 있는 동지들과 긴밀한 연락을 하며 적극적인 항일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09년 안희제 ( 安熙濟 이원식(李元植김사용(金思容윤병호(尹炳浩) 80여 명의 동지와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 활동을 하였다. 1910년 일제에게 주권이 강탈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동지 규합에 나섰고, ·북만주는 물론 북경·시베리아·상해 등지를 전전하였다.

1918년 동삼성(東三省)에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에 서명하였다.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으로 일반에 알려진 이 독립선언은 신팔균과 여준 ( 呂準 정안립(鄭安立박성태(朴性泰박찬익 ( 朴贊翊 정신 ( 鄭信 유동열 ( 柳東說 김동삼 ( 金東三 나우(羅愚서상용 ( 徐相庸 황상규(黃尙圭서일 ( 徐一 ) 39명이 서명한 것으로, 3·1독립운동의 서막과도 같았다.

1919년 서로군정서 ( 西路軍政署 )에 관계하기 시작해 신흥무관학교 ( 新興武官學校 ) 교관으로 지청천(池靑天김경천(金擎天오광선 ( 吳光鮮 )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종사하였다. 19228월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던 89(八團九會)의 독립단체가 통합되어 대한통군부 ( 大韓統軍府 )로 통합되고, 2개월 뒤 다시 대한통의부 ( 大韓統義府 )로 이름이 바뀐 뒤 사령장(司令長)이 되었다.

이어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일본군과의 수십차 교전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의군부 ( 義軍府 )가 분리되고 참의부(參義府)가 이탈하여 세력이 약해진 대한통의부를 현익철 ( 玄益哲 김창환 ( 金昌煥 ) 등과 힘을 모아 재건,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2472일 독립군의 훈련지인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興京縣旺淸門二道溝) 밀림 속에서 무관학교 생도와 독립군 합동군사훈련을 시키던 중, 장쭤린군(張作霖軍)으로 가장한 일본군과 장쭤린군 및 경찰대에 포위, 습격당해 전사하였다. 그 때 부하들에게 정의의 죽음을 택하라고 유언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석구(申錫九)

1875(고종 12) 1950. 감리교 목사 · 독립운동가. 본관은 평산 ( 平山 ). 호는 은재(殷哉). 재기(在綺)2남이다. 충청북도 청주 출신.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서울 서대문 밖의 협성신학교 ( 協成神學校 )에서 3년간 수학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었다.

그 뒤 서울 · 개성 · 춘천 · 원산 · 남포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3 · 1운동 때에는 오화영(吳華英) · 이필주 ( 李弼柱 ) · 박희도 ( 朴熙道 ) · 최성모 ( 崔聖模 ) · 이승훈 ( 李昇薰 ) · 박동완(朴東完) · 김창준(金昌俊) · 이갑성 ( 李甲成 ) · 함태영 ( 咸台永 ) 등과 회합,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재판 도중 조선인의 행복과 자유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 조선사람으로서는(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해도 그러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 ” 라는 질문에도, “ 항상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 ” 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검거,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 가서 시무하다가, 19452월 이른바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해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공산당과 대결, 3 · 1절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基督敎民主黨)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949년에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피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정백(申正栢)

1877(고종 14)1909.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별명은 신우(申隅). 자는 정우(正宇), 호는 남강(南崗). 전라남도 곡성 출신. 19083월 전라남도 의병장 조서화(趙書華)의 부대에 입대하여 지휘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4월 전라남도 구례에서 일본군 및 일본 기병경찰대와 교전하였으며, 6월에는 마륜산(馬輪山) 속에서 일본기병대 소속 군인 2명을 기습 공격하여 사살하였다. 9월에는 곡성 목사동(木寺洞)에서 일본수비대 10여 명과 교전하였는데, 이 때 병력 130명 중 의병장 조서화 이하 2명이 전사하였다.

의병장의 전사로 인하여 이후부터 독립하여 구례·곡성·낙안·남원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1월에는 목사동 평리에서 40명의 동지를 지휘하여 일본군과 교전 끝에 패하여 부하 5명을 잃고 동미동으로 피신하였으나 붙잡혔다.

구금중 조금도 굽히는 기색이 없이 일본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의거의 당연함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10월까지 구례·광주·목포를 거쳐 대구로 이감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덕균(申德均)

1878(고종 15)1908.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관은 평산 ( 平山 ). 초명은 덕순(德淳정회(正會), 자는 정효(正孝), 호는 몽암(蒙庵). 광주(光州) 출신. 태수(泰洙)의 아들이다. 일찍이 기우만 ( 奇宇萬 )과 전우 ( 田愚 )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에 뛰어났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최익현 ( 崔益鉉 )의 창의격문을 받아 동지를 규합, 기회를 엿보던 중 1907425일 고광순 ( 高光洵 )의진이 동복 ( 同福 )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촌아우인 상철(相徹)과 같이 달려갔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집으로 돌아와 재거를 계획하였다.

19078월 고광순의진에 입대하여 참모가 되었으며, 전라남도 창평 제심리를 중심으로 대규모 거사계획을 숙의하였다. 1907914일 고광순의진은 신덕균의 제의에 따라 일본인이 많다고 알려진 동복읍을 습격하여 적들을 궤산시키고, 하동 화개동으로 들어갔다.

그 뒤 구례 연곡사에 본영을 정하고 의진의 부서를 개편하였는데 참모로 유임되었다. 같은 해 1017일 광주에 주둔하였던 일본수비대의 기습공격을 받아 대장 고광순과 부장 고광훈(高光勳)이 붙잡혔으나, 그는 참모인 윤영기(尹永淇)와 소모(召募)하기 위하여 외지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

그 뒤 가산을 팔아 무기를 갖추고 의병 100여명을 모아 재기하여 운봉·함양·순창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전라북도 순창 회문산(回文山)에서 왜군에게 붙잡혀 그해 11월 정읍 고부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신덕영(申德永)

1890(고종 27)1968. 독립운동가. 일명 백한(伯漢이평(李平), 호는 하관(何觀). 서울 출신. 1910년에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1914년에 만주로 건너가 통화현(通化縣)의 신흥무관학교 ( 新興武官學校 )에 입학, 이듬해 졸업하였다.

1916년에는 간도의 교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17년 북만주 동녕현(東寧縣)에 호분중학교(虎賁中學校)를 설립하고 학감으로 재직하며 군사교육을 전담하였다.

1920년 이동녕 ( 李東寧 박은식 ( 朴殷植 )으로부터 군자금 모금의 사명을 받고 귀국,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이후 대외용으로 만주농림주식회사(滿洲農林株式會社)를 설립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내기 위해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독립자금을 모금할 때는 만주농림주식회사의 주식모집원으로 가장하여 활동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8월 하순 신종선(申鍾善)으로부터 대동단 명의의 군자금 모금에 관한 권유문을 받아서 광주(光州)에 내려가, 노형규 ( 盧衡奎 )가 지명한 정인채(鄭麟采양사형(梁士亨) 등 여러 사람에게 우송하고 상경하였다.

그 뒤 대동단 총재 김가진 ( 金嘉鎭 ) 명의의 포고문과 대동단 조선총지단(朝鮮總支團) 부장 한부(韓扶)의 이름으로 된 경고문을 전라남도 부호인 노종승(盧鍾升정해붕(鄭海鵬양재국 (梁在國국채웅(鞠採雄) 등에게 발송하였다.

같은 해 10월 광주에서 이윤호 ( 李允鎬 노석정 ( 盧錫正 김정련 ( 金正連 ) 등을 부한청년단에 가입시키고, 신유선(辛有善정호필(鄭鎬弼정원채(鄭遠采) 등에게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군자금 모금원을 여러 반으로 나누어 1반은 박일봉(朴日鳳이윤호로 편성하여 화순과 나주 방면을 맡기고, 2반은 신덕영과 최양옥 ( 崔養玉 노기준(盧基準)으로 편성해 담양과 곡성 방면을 맡겨서 많은 군자금을 모아 상해의 임시정부로 보냈다.

한편 임시정부의 특파원 한준호(韓俊鎬박문용(朴文容정용택(鄭容澤)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던 중, 같은 해 11월 최양옥·노기준이 광주에서 붙잡혀 그도 담양경찰서원에게 붙잡혔다.

19215월 광주법원에서 징역 8년을 언도받고 복역중 19235월 신병으로 가출옥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다가 탈출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7년 최양옥· 안창남 ( 安昌男 김정련과 공명단 ( 共鳴團 )을 조직하고 북만주에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해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최양옥·김정련을 국내에 파견, 설립 기금을 모금하려다가 두 사람이 모두 붙잡혀 좌절되었다.

그 뒤 하얼빈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26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전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193410월 출옥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재외이재동포원호회(在外罹災同胞援護會)를 설립하고 독립투사들의 원호사업에 힘썼으며, 광복단 ( 光復團 )을 부활시켜 광복단중앙총본부 단장, 대한독립운동자동맹의 대표로서 건국사업에 노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신현구(申鉉九)

1882(고종 19)1931.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논산 출신. 19193·1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의 지시로 서울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애국단 ( 大韓獨立愛國團 )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 조직확대를 위하여 권인채(權仁采)를 통하여 김재근(金載根)으로 하여금 강원도 철원에 지단(支團)을 설립하게 하였으며, 충청남도·전라도 등지에도 지단을 조직하였다. 그 해 6월에는 상해임시정부에서 특파한 김태원(金泰源)과 함께 국내연락망을 확보하기 위하여 연통제 ( 聯通制 )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 해 11월에는 김교선(金敎善안교일(安敎一신봉균(申鳳均신상균(申相均)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위한 비밀결사 혈복단 ( 血復團 )을 조직하였으며, 한편 안교일 등과 독립선언서를 인쇄, 배포할 것을 계획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혔다.

그 뒤에도 애국단의 활동을 주도하였는데, 1920년 이 단의 조직이 일본경찰에 발각됨으로써 붙잡혀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출옥 뒤 1927년 잡지 심경 心鏡에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글을 싣는 등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다시 잡혀 징역 36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병을 얻어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곧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익희(申翼熙)

1894(고종 31)1956. 정치가·독립운동가. 호는 해공(海公). 경기도 광주 출생. 조선시대 때의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다섯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한학을 익혔고, 1908년 한성관립외국어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유학하였다.

1913년 와세다대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동학교 ( 中東學校 )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7년부터는 보성전문학교 ( 普成專門學校 )의 전신인 보성법률고등학교에서 비교헌법 등의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T.W.)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됨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만주·북경·상해 등지를 드나들면서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을 맡아보고, 안으로는 민족지도자들과 독립운동의 방법을 토의하여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기는 데 일역을 담당하였다.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그는 19193월 다시 상해로 떠나 그로부터 26년간의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상해에 있는 동안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 뒤 내무총장·법무총장·문교부장·외무부장 등을 두루 맡았고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을 겸임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에 몸담기 시작하면서부터, 독립운동이 처음에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시작되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군사행동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임시정부에 있으면서도, 정부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할 뿐 실력은 저항군에 있다는 믿음 아래,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국청년들에 의한 군대조직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당시 상승기에 있던 중국혁명군과 연결하여 한중합작에 의한 군사행동의 실현을 추진해 보기도 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광복이 된 뒤 194512월 임정요인의 한 명으로 귀국한 그는 곧바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만들어 부회장을 맡았으며, 국민대학 학장과 자유신문사 사장직도 맡았다. 그 뒤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거쳐, 정부수립과 함께 제헌국회에 진출하였고, 대통령으로 뽑힌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대한국민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혔다. 그 동안 그는 3선국회의장으로 정치적 비중을 더해갔으며, 권력의 연장을 위하여 사사오입개헌까지 자행한 이승만한테서 민심이 등을 돌리자,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그 해 52일 한강백사장에서 열린 그의 유세에는 무수한 인파가 모여 그의 인기를 실증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흘 뒤인 55일 호남지방에서의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에게는 추모표로서 185만여 표가 던져졌으며, 5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서울 우이동에 안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申崇謙(신숭겸장군의 일화.

1)

고려건국에 공이 큰 신숭겸은 목사동면 구룡리 뒷산 비래봉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 신숭겸이 보성강의 용탄여울에서 목욕을 하는데 큰 바위굴에서 龍馬(용마)가 굴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그는 즉시 이 말을 타고 5리 정도 떨어진 유봉리의 산을 날았다.이로부터 그 산 이름을 신유봉(申遊峰)이라 부르게 되었고, 용마가 나온 바위는 용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뒤에 신숭겸이 王建(왕건)을 대신해 죽게 되자, 용마는 땅에 떨어진 신숭겸의 머리를 물고 고향 가까운 태안사의 뒷산에 와서 3일간을 울다가 굶어죽었다고 한다.그곳에 장군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매년 316일 산제와 함께 신숭겸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2)

      왕건을 죽음으로 구한 충신927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오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신라를 도우러 경주로 오던 중 동수(桐藪: 지금의 지묘동)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왕건군은 먼 길을 온데다가 견훤군의 동태를 잘 몰랐기 때문에 견훤의 군대에 포위당해 마침내 왕건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다.이 때 왕건의 심복장수인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왕건인 것 처럼 위장하고 달아나자, 견훤군이 신숭겸을 쫓아 그리로 몰려가는 바람에 군졸로 변복한 王建(왕건)은 무사히 위기를 모면하였다.왕건은 그 뒤 자신을 대신해 전사한 신숭겸을 위해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위로했으나, 지금은 후손들이 쌓은 표충단(表忠壇)만 남아 있다.

 

 

申師任堂(신사임당)의 일화. 평산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들다.

李珥(이이)1536년 외갓집인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좌찬성 이원수를 아버지로 사임당 신씨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태어나던 날 사임당 신씨가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오는 꿈을 꿨다. 이이가 태어난 방을 夢龍室(몽룡실)이라고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

<출전: 인물 왕조실록 >

 

 

 

師任堂(사임당) 신씨의 일화.

13세 때 이이는 진사시험에 훌륭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15세 때 아버지 이원수가 수운판관이 되어 관서지방으로 장을 가게 되었다.

길에 불편하실 터이니 아이들을 데리고 가시지요. 아이들에게는 산 공부가 될 테니까요.”

사임당 신씨가 남편에게 말했다.

이이는 맏형 이선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관서지방으로 떠났다. 삼부자를 떠나보낸 사임당 신씨는 그 벙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둘째 아들과 넷째 아들이 지성으로 간호했으나 사임당 신씨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師任堂(사임당) 신씨의 일화.

 

, 글씨, 그림에 능하였던 사임당 신씨

사임당 신씨는 1504(연산군 10)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났다. 율곡집에 의하면 사임당 신씨는 어릴 때부터 경전을 읽고, 글을 잘 썼을 뿐 아니라 바느질 자수에도 능했다. 7세 때 벌써 安堅(안견)의 필치를 본받아 산수도를 그렸다.

19세 때 이원수와 결혼했다.

사임당 신씨는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없었기에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댁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상을 마친후 한성으로 올라가 시어머니에게 인사를 올리고 눌러 살았.

시댁의 고향인 파주로 내려가 살다가 다시 한성으로 올라가 살기도 하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 년간 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했다.

38세에 시집 살림을 주관하기 위하여 아주 한성으로 왔다. 이원수가 사임당 신씨의 시당숙인 우의정 李沂(이기)의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李沂(이기)尹元衡(윤원형)과 결탁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혔던 사람이다.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 가겠어요. 그집에 발을 들여놓지 마세요.”

사임당 신씨가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의 당숙이긴 하지만 어진 선비를 모해하는 사람이니 내 앞으로 가까이 하지 않겠소.”

아내의 말을 받아들인 이원수는 뒤에 회를 당하지 않았다.

내가 죽거든 당신은 다시 장가를 들지 마세요. 이미 아들이 넷이나 있으니 공연히 후시를 많이 구하여 禮記(예기)’의 가르침을 어기지 마세요.”

사임당 신씨가 말했다.

공자가 아내를 내쫓은 것은 ()에 맞는 거요?” 남편이 물었다.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리를 만나게 되어 제나라 이계란 곳으로 피란을 가게 되었을 때에 그 부인이 함께 가지 않고 혼자 송나라로 갔기 때문에 공자가 그 뒤로는 같이 기거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아내를 내쫓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

그러면 증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입니까?”

증자의 아버지가 찐 배를 좋아했는데 배를 찌지 못해서 그 아버지를 공양하는 도리에 어긋나 부득이 했던 일이오. 그러나 짝이 된 의리가 중하다 하여 평생토록 다시 장가를 들지 않있다 하오.”

그러면 주자가례에도 이런 예가 있소?”

. 주자가 마흔 일곱에 그 부인 유씨가 죽고, 이들 ()도 아직 미처 혼인하지 않아서 음식 만들 사람도 없건마는 주지는 다시 장가들지 않았습니다.”

사임당 신씨가 한문 서적을 두루 읽었다는 사실이 부부 사이의 대화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어머니기에 아들 이이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출전: 인물 왕조실록 >

 

 

 

師任堂(사임당) 신씨의 일화.

 

사임당 신씨가 남긴 예술 작품

사임당 신씨가 남서예 작품은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남아 있고, 그림으로는 채색화 묵화 등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문학 직품은 시가 3있을 뿐이다.

사임당 신씨의 그림은 풀벌레 · 포도 화조 · 어죽 · 매화 · 난초 · 산수 등이 주된 畵題(화제)였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사실화를 그려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햇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풀벌레인 알고 쪼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임당 신씨의 작품은 모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 있다.

 

대관령을 념으면서 천정을 바라보다

늙으심 어머니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떠나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평은 아득도 한데

흰구름은 날고 산은 져무네.

 

·*어머니를 생각하며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언마는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 외로이 뜬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랍

갈애매기는 모래밭에 헤이락 모이락

고깃배는 바다위로 오고 가리니

어느 때나 강릉길 다사 밟아가

색동입 곱고 입고 바느질할고.

<출전: 인물 왕조실록 >

 

 

 

 

申休(신휴) 선생의 효행.

 

장님이 부는 퉁소

 

신휴(申休)의 본은 평 산(平山)이며 , 신 숭겸 (申崇謙)의 후손이다.

그의 벼슬은 통진(通津) 현감에 이르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환으로 자리에 누워 계실 때, 병세를 대변의 맛으로 알아보았으며 소변이 불통하자 빨아서 통하게 하였다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몹시 슬퍼하여 상사의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나라에서 이 일을 듣고 그 마을에 정문을 세워 포상하였다. 신 휴가 어느 시대에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청도 김씨의 세보에 의하면 통제사 김 시성의 증조모가 신 휴의 딸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중종(15061544) 당시에 생존하였다고 추측되며, 구 하양 읍지(河陽邑誌)에 실기의 한 토막이 실려 있다. 이 얘기는 읽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며 효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신 휴의 나이가 겨우 여덟 살 때 아버지 참의공이 억울한 누명을 써 강화 도에 귀양살이를 간 지 10여 년이나 되었다. 그 동안 신 휴는 계모를 모시 고 있었는데, 그 계모는 신 휴를 몹시 미워하고 학대하였다. 하루는 계모가 아버지 참의공의 편지를 거짓으로 꾸며 신 휴에게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 펀지에 적혀 있기를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한데 사람의 생눈을 먹으면 낫는다고 되어 있었다. 신 휴는 아버지의 병환을 걱정하여 즉시 한쪽 눈알을 빼서 계모에게 드렸다. 며칠 후 계모가 또 편지를 꾸며 보여 주었다. 그 편지에는 눈알 하나를 먹고 나니 효험이 약간 있었으나 더 먹으면 완쾌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신 휴가 아버지의 병환이 나아짐을 크게 기뻐하며 한쪽 눈알마저 계모에게 바쳤다. 신 휴가 장님이 된 후 계모의 미움과 학대가 날이 갈수록 심하여 마침내 집을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부득이 아버지가 귀양살이하는 강화도를 향하여 먹고 잠잘 곳을 구걸하며 헤매면서 찾아가게 되었다. 걷고 또 걷는 휴는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하루는, 밤은 깊고 앞길이 막막하여 바위 위에 앉아, 귀양살이 떠날 때 아버지가 그에게 준 퉁소를 소매자락에서 꺼내 불었다. 잔잔한 달빛 아래 퉁소 소리가 어찌나 처량하고 슬픈지 듣는 사람의 애를 끊는 듯하였다.

 

마침 근처에 사는 심 참의란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찾아왔다. 그리고는 너는 어찌된 아이냐?”고 물었다. 신휴가 모든 사정을 이야기 하였더니, 심 참의가 다듣고 난 후 매우 불쌍히 여겨 신 휴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다. 거기서 신 휴는 며칠 동안 후한 대접을 받으며 머물다가 심 참의가 주는 노잣돈까지 얻어서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불행한 일이 또 있을까 ! 신 휴는 산중에서 도적을 만나 심 참의에게 얻은 노잣돈을 다 빼앗겼을 뿐 아니라,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다. 다시 빈털터리가 되어 이곳저곳을 헤매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밤중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애달프게 통소를 불게 되었다. 그는 슬프거나 괴로울 때 아버지를 생각하며 퉁소를 불었다. 때마침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던 신 휴의 아버지가 퉁소소리를 듣게 되었고, 가까이 가보니 자신의 아들이 아닌가 !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지난 일들을 다 듣고 통탄해 마지않았으며,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서는 계모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휴는 계모에게 조 금의 원망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 계모를 용서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리하여 계모는 쫓겨나고 계모가 숨겨둔 눈알을 상잣속 주머니에서 찾아내어, 휴 의 효행을 칭찬하는 큰 잔치에 모인 손님들로부터 감동의 눈물을 모아 두 눈 알을 불리어 눈 속에 다시 넣었다.

 

그런데, 지극한 효성에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기적이 일어났다. 장님이 된 신 휴가 다시 광명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출전경산군 하양 여자중학교 정 교사

참고 문헌 花城誌, 河陽邑誌, 慶山觀誌,

 

 

 

 

申吉元(신길원)의 출절과 효행.

 

관인을 입에 물고

 

영남에서 한양을 오르내리던 길목으로 많은 전설과 애환이 서린 문경 새재의 제1 관문을 못 가서 오른쪽에 말끔히 단장된 비각이 보인다. 이 비각을 충렬비라 부르며 그 주인공은 이 곳 현감을 지내신 신 길원이다. 숙종 때 대제학 이 제가 묘비에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가장 크다고 하나 이것은 충효가 있기 때 문이다. 이 둘은 본디 두 가지가 아니고 한 소치인 것이다. 그러나, 만나는 바에 따라 성취함이 다르고 혹은 드러나고 감추어짐이 같지 않으니 두 가지가 온전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한 사람 있음을 아노니 그가 바로 신 길원이다.’

라고 적었다.

 

공은 평산인으로 1548(명종 3)에 국량과 이씨 부인 사이 한양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초 이름은 길원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지극한 성품으로 매사에 성실하였고, 특히 부모에게 지성으로 대하고 웃어른에게 겸손하였다. 어릴 때부터 바르지 못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으며 예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옛 성현의 가르침을 적은 책을 즐겨 읽고 규범으로 삼았다.

 

아홉 살 때에 어머니가 몹쓸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자, 어린 길원은 병 간호에 잠시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사방으로 물어 좋다는 약은 다 구해 드렸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하늘에 울면서 기도하기를

하느님 ! 불쌍한 저의 어머니를 구해 주세요. 원하옵건데 어머니의 고통 을 제가 대신 받게 해 주시고 어머니는 병석에서 일어나게 해 주셔요.”

하며 매일같이 빌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은 차도가 없었다. 부모에게 대 한 정성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 드렸더니 오랜 병석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길원은 하늘이 내린 효자다. 지극한 효성에 감탄한 신령님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였다.”

하며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하였다.

 

14 세 때에 부친이 세상을 떴다. 어린 상주이지만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르고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죽을 먹고 심히 애통해 하니 조문하는 이 모두가 눈물을 흘리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뒤 홀로 계신 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조석 문안은 물론이고, 밤이 늦도록 이야기 벗이 되기도 하고, 재미있는 책도 읽어 드렸다. 겨울에는 따뜻한 잠자리로, 여름에는 시원하게 하여 불편함이 조금도 없도록 하였다. 어쩌다가 편찮으셔서 뒤 본 빨래가 있으면 남에게 시키지 않고 자신이 빨래를 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늘 부족한 것이 많았으나 어머니께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드려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후에 선조대왕께서 이 선행을 아시고 효자 정문을 내리시고 해마다 무명과 곡식을 내리셔서 모친 봉양에 불편함이 없었다.

 

신 길원은 29 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여려 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노모 를 모시고 갈 형편이 안 되어 사정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43 세가 되어 문 경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모친을 모시고 있었다. 부임한 지 3 년이 지난 임 진년에 왜란이 일어나 위험이 미구에 닥칠 것 같아서 노모를 본가로 모시어 병난을 피하게 하였다. 자신은 이며 죽음을 각오하였지만 늙으신 어머니마 저 함께 할 수는 없었다.

 

이때에 동생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다가 이제 죽을 때를 얻었으니 다시 무엇을 한하겠는가? 너는 돌아가서 노모에게 고하되 어머니가 계시는데 자식이 죽는 것은 더 없는 불효이오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또한 충이 라.’고 여쭈어라.”

또 이어서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집 사람에게 말하되 우리 어머니를 잘 봉양하여 내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다름이 없게 하도록 하라.’고 일러라.”

이 말을 들은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 없었다.

 

1592년 봄에 15만의 대병력으로 침공한 왜적은 서울을 향해 북진 중에 문경을 지나게 되었다. 현감 신 길원은 모친을 본가로 보낸 뒤 곧 적군이 진격 중인 대구로 달려가는 도중에 부성(대구)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문경에 돌아와 보니 고을이 매우 어수선하였다. 주민들은 현감에게 피란하기를 권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을 크게 꾸짖고 듣지 않았다. 426일 이윽고 적병이 몰려들었을 때는 현감과 관병 십여 명만이 관아를 지키고 있었다.

 

왜병이 이미 잡아갔던 백성을 시켜 성문을 열고 노도같이 밀어 오니 관병도 숨어버리고 현감만이 왜병과 맞섰다. 활로 세 사람을 쏘아 죽이고 말을 달려 십수 명의 목을 베었으나 왜병 조총의 집중 공격을 받아 적에게 사로 잡히고 말았다.

감영에 끌고 온 왜장이 칼날을 번뜩이며 항복하기를 재촉하였으나 공은 적장을 노려보면서

내가 너희를 만 토막으로 잘라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속히 죽이 어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였다. 또 왜장이 관인만 내 주면 살려 주겠다고 달래기도 하였으나 공은 육신은 쓰러질지언정 나의 우국충절은 죽지 않는다. 죽어서라도 너희 놈들 원수를 갚겠다.”

하며 벽력 같은 호령을 하였다. 외장은 더 이상 설득할 방법이 없자 칼을 번쩍 들어 관인을 들고 있는 그의 오른손을 잘라 버리자, 현감은 왼손으로 관인을 잡아 쥐었다.

 

왜장이 왼손마저 잘라 버리자 이번에는 엎드려서 입으로 그것을 물자 화가 난 왜장은 그의 목을 베었다. 그 날이 4Z7일 그의 나이 45 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대왕께서는 벼슬을 높이고 충신 정려를 명하였으며, 그의 행적이 삼강행실도에 수록되어 만인의 귀감이 되었다.

 

출전문경군 조령초등학교 홍 교감

참고 문헌 壬辰戰亂史, 東國新續三網行實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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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평산 신씨는 남한에 총 110,558 가구, 460,238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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