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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신씨: 영월신씨(辛)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영산:영월신씨)

 

본관(本貫): 영산(靈山): 영월(寧越)

시조(始祖): 신경(辛鏡)

유래(由來):

 

()씨의 선계는 중국 농서성 출신인 신시랑이 당나라 현종 파락사로 신라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하며, 고려 중엽에 중국 8학사의 한 사람인 신경(辛鏡)이 동래하여 1138(인종 16)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자신이 살았던 중국 강서성 대유현에 있는 천축산과 산세가 비슷한 지금의 창녕 영취산 아래에 뿌리를 내린 것이 우리나라 신씨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 경()이 처음 정착한 영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다.

 

9세손에 와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천(추밀원사 지화의 맏아들)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와,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에 봉해진 혁()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 중정대부(中正大夫) 성렬(成烈:공근의 아들)을 파조로 하는 중정공파로 갈라졌고, 지화의 세째 아들로 영월부원군(寧越府院君)에 봉해진 온()을 파조로 하는 부원군파와 이부 판서(吏部判書)를 지낸 한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의 후손들은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신인거

회헌(晦憲) 안 향(安 珦)의 문인으로 스승과 함께 우리나라의 성리학을 개척한 덕재공파 천의 아들 인거가 백이정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문장과 학행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충숙왕 때 정순대부(正順大夫)로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와 경주 판관(慶州判官)을 거쳐 충묵왕조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했다.

 

신경행(辛景行)

1547(명종 2)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산 ( 靈山 ). 자는 백도(伯道), 호는 조은(釣隱). 자전(自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주(世胄)이고, 아버지는 습독(習讀) ( )이다. 1573(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7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에 한산군수가 되었고, 1596년에 충청도순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 때 관내 홍주에서 이몽학 ( 李夢鶴 )의 난이 일어나자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웠다. 다음해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고, 1604년에 청난공신 ( 淸難功臣 ) 삼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608(광해군 즉위년)에 충청도병사가 되었으나 시정이 바르지 못하다는 암행어사의 지적을 받았다. 뒤에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신예(辛裔)

? 1355(공민왕 4). 고려 후기의 간신. 본관은 영산 ( 靈山 ).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내고 좌정언(左正言)과 지신사 ( 知申事 )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다.

1342(충혜왕 복위 3) 지공거 ( 知貢擧 ) 김진(金 貰 )과 함께 지신사로 동지공거 ( 同知貢擧 )가 되어 진사 33인을 시취하였으며, 1343년에는 원나라에 갔다가 매서인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와 함께 돌아왔다.

이 해 충혜왕을 잡으러 원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환관 고용보와 함께 원사(元使)를 도와 왕을 잡아가게 하였다. 그 뒤 충목왕이 즉위하자 전 첨의참리(僉議參理)로서 서연 ( 書筵 )에서 시강(侍講)하였으며, 1345(충목왕 1) 정방 ( 政房 )을 복치하였을 때에는 참리로 그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충목왕 때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매부인 고용보의 세력을 믿고 남의 재물을 강탈하고, 벼슬을 파는 등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지목하여 신왕(辛王)이라 하였다. ” 한다. 특히, 전숙몽 ( 田淑蒙 ) 등과 더불어 친척과 친구에게 경상(卿相)의 자리를 주고 정권을 농락하였다.

 

신부(辛富)

?1360(공민왕 9). 고려 후기의 무신. 1355(공민왕 4) 취산군(鷲山君)에 봉하여졌으며,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재임중이던 1359년 홍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출전하였다.

이 때 평양 서쪽의 함종 ( 咸從 )에서 쌍방간에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싸움에서 장군 이견(李堅)과 함께 전사하였다.

 

신유정(辛有定)

1347(충목왕 3)1426(세종 8).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영산 ( 靈山 )인데 영월(寧越)로도 쓴다. 아버지는 판개성부사 부()이다.

음보(蔭補)로 산원 ( 散員 )이 되었고 용맹이 뛰어났다. 1386(우왕 12)에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어 족형인 충청도도원수 이승원 ( 李承源 )의 휘하에서, 남해에 출현하여 노략질하는 왜구를 무찔러 크게 용맹을 떨쳤다. 그 뒤 이성계 ( 李成桂 )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워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조선 태조가 즉위하자, 그는 곧 태조를 시종한 공으로 원종공신 ( 原從功臣 )이 되어 크게 총애를 받았다. 1397(태조 6)에 이산진첨절제사(伊山鎭僉節制使)가 되었고, 1400(정종 2)에 왕세제가 된 방원(芳遠 : 후의 태종)의 추천으로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이 되었다.

이어서 공조·예조·형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403(태종 3)에 강원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공으로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겸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07년에 의주도병마사가 되었고, 1410년에 야인 우디거(兀狄哈)가 경원에 침입하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조연 ( 趙涓 )과 함께 출정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그 뒤 충청도병마도절제사·평안도도안무사가 되었다. 1415년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으며,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하루 두끼만 먹었다고 한다. 시호는 무절(武節)이다.

 

신인손(辛引孫)

1384(우왕 10)1445(세종 27).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산 ( 靈山 ). 자는 조윤(祚胤), 호는 석천(石泉). 원경(原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개성부사 부()이고, 아버지는 유정 ( 有定 )이다.

1408(태종 8) 식년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판서·대제학에까지 올랐다. 처음 사관 ( 史官 )에 보임되고, 1413년에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에 전임되어 항상 여러 대군 ( 大君 )과 함께 경전(經典)과 사기(史記)를 강론하였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를 각별히 대접하여 난죽(蘭竹) 병풍을 친히 그려주었다. 이어 예조정랑에 오르고 1420(세종 2)에 사인 ( 舍人 ), 1428년에 집의 ( 執義 ), 1430년에 종부시판사 겸 형조지사, 1432년에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고, 곧 형조우참의,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434년에 병조좌참의가 되고 이내 승정원우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승진하였다. 1438년에 병조참판, 1444년에 한성부판사·병조판서에 이르렀다. 1445년에 예문관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고,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몸이 쇠약해지고 병도 깊어 62세로 죽었다.

성질이 강직하고 아첨하지 못하며, 남의 과실을 보면 참지 못하고 기탄없는 말로 내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신석조(辛碩祖)

1407(태종 7)1459(세조 5).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산 ( 靈山 ). 초명 석견(石堅). 자는 찬지(贊之), 호는 연빙당(淵氷堂).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마절제사 유정 ( 有定 )이고, 아버지는 병조판서 인손(仁孫)이다.

1426(세종 8) 생원시에 일등으로 합격하고,이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집현전저작랑·직제학·우사간·부제학 등을 지냈다. 1452(문종 2) 세종실록을 시찬(始撰)하였으며, 이듬해 이조참의가 되었다.

1456(세조 2) 공조참판 때에 정조사 ( 正朝使 )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조참판·대사헌·중추원사·경기도관찰사를 지냈으며, 1459년 한성부윤을 거쳐 개성유수로 있을 때 죽었다.

성품이 온순, 근엄하며 학문에 뛰어나고 문장이 능하였으며, 의방유취 醫方類聚·경국대전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연빙당집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신영희(辛永禧)

1442(세종 24) 1511(중종 6).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영산 ( 靈山 ). 자는 덕우(德優), 호는 안정(安亭). 서울 출생. 참판 석조(碩祖)의 손자이며, 현감 수담(壽聃)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감찰 맹렴(孟廉)의 딸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김굉필 ( 金宏弼 ) · 정여창 ( 鄭汝昌 ) · 남효온 ( 南孝溫 ) · 이원(李 復 ) 등과 교우를 맺고 학문을 깊이 강마하였다.

1483(성종 14)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그해 가을 승려의 도첩(度牒)을 허여하는 왕의 교지가 내리자 성균관유생들과 함께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제진(製進)하였다.

그뒤 사림으로 자처하며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497(연산군 3) 김굉필로부터 시국이 어지럽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받고 이내 직산 ( 稷山 )에 은둔, 죽림의 학자들과 벗하며 학문에 정진,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학덕과 문장으로 학자들로부터 크게 추앙받았다. 저술로 사우언행록 師友言行錄 과 약간의 시문이 안정실기 安亭實紀 에 실려 있다.

 

신종원(辛宗遠)

인손의 6세손 종원(宗遠:군수 진의 아들)은 선조 때 금부 도사(禁府都事)와 연천 현감(連川縣監)을 거쳐 호조 좌랑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신중석(辛仲碩)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의 후손에서는 광정대부(光靖大夫)로 문하시중에 오르다.

 

신염(辛廉)

홍주목사(洪州牧 使)로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익찬 공신(翊贊功臣)에 책록(策錄)되다.

 

신숙거(辛叔据), 신윤문(辛允文)

온의 6세손으로 영원군(寧原君)에 추봉된 숙거(叔据)의 아들 윤문(允文)과 윤무(允武) 형제가 뛰어났다. 이들 형제는 중종반정 때 무신인 박원종(朴元宗)과 더불어 반정행동대로 공을 세워, 형인 윤문은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영월군(寧越君) 봉해지고 아우 윤무는 정국공신으로 병조 판서와 좌찬성을 거쳐 영천군(寧川君)에 봉해졌으나 무신반정을 음모하고 있는 천인 정막개의 무고로 억울하게 대역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당했다.

 

신응시(辛應時)

1532(중종 27) 1585(선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군망(君望), 호는 백록(白麓).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형(尹衡)이고, 아버지는 부사 보상(輔商)이며, 어머니는 민거(閔 綱 )의 딸이다. 백인걸 ( 白仁傑 )의 문하에서 배웠다.

1552(명종 7) 진사가 되고 155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하였다.

156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예조 · 병조의 좌랑, 교리 ( 校理 ) 등을 거쳐 선조 즉위 초에 경연관 ( 經筵官 )이 되었다. 그 뒤 어머니상을 입고 있을 때 주자대전 朱子大全 중에서 예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 주문문례 朱門問禮 를 간행하였다.

전라도관찰사 · 연안부사 · 예조참의 · 병조참지를 거쳐, 대사간 · 홍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그가 경연에 임할 때면 고금의 사례들을 적절히 인용하여 막힘이 없었으며, 지방수령으로 재직시에는 풍속을 바로잡고 교육을 진흥시켰으며, 사사로운 일에는 청렴하여 집안에 가재도구가 거의 없었다.

성혼 ( 成渾 ) · 이이(李珥)와 특히 교분이 두터웠다. 저서로는 시집 한 권이 남아 있다. 배천의 문회서원 ( 文會書院 )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신경진(辛慶晉)

1554(명종 9) 1619(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월(寧越). 자는 용석(用錫), 호는 아호( 冥 湖). 윤형(尹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보상(輔商)이고, 아버지는 부제학 응시(應時)이며, 어머니는 정기(丁琦)의 딸이다.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73(선조 6) 진사가 되고, 158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 예문관 등에서 여러 벼슬을 지낸 뒤 1591년 병조좌랑으로서 진주사 ( 陳奏使 ) 한응인 ( 韓應寅 )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평이 되어 왕을 호종, 평양에 가서 체찰사 유성룡 ( 柳成龍 )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왜란 후 강릉부사 · 사간을 거쳐 이조참의 · 성주목사 · 충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609(광해군 1) 경상도관찰사로 승진하고, 다시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

그러나 1612(광해군 4) 사돈인 황혁 ( 黃赫 )이 이이첨 ( 李爾瞻 )의 음모에 걸려 화를 입게 되자 파직되었다. 다시 등용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그는 문무재(文武才)를 겸비하여 명성이 높았고,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응시 · 경진 부자의 시문집인 백록유고 白麓遺稿 가 전한다. 이재 ( 李縡 )가 신도비문을 지었다.

 

신비

판서 한의 후손에서는 그의 손자 비(군재의 아들)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태자시윤을 지내고 내성군(奈城君)에 봉해졌다.

 

신거

비의 증손 거는 충혜왕 때 등과하여 광대부(光靖大夫)로 지문하찬성사(知門下贊成使)에 이르렀다.

 

신보안(辛保安)

한의 7세손 보안(保安)은 세종 때 선공판사(繕工判事)와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역임했다.

 

신사천(辛斯薦)

상장군파에서는 성렬의 손자 사천(斯薦)이 고려 말에 전공 판서(典工判書)를 지내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곡강으로 낙향하여 절의를 지켰다.

 

신희수(辛希壽)

조선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용궁 현감(龍宮縣監)과 성주 목사(星州牧使) 겸 판관을 지냄.

 

신초(辛礎)

1568(선조 1) 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무신 · 의병장. 본관은 영산 ( 靈山 ). 자는 우수(友 馬 ), 호는 문암(聞巖). 아버지는 현감 희수(希壽)이다. 1583(선조 16) 이탕개(尼湯介)의 반란을 평정할 때 공을 세우고, 무과에 급제하여 1591년 천성만호(天城萬戶)가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성도(天城島)가 고도(孤島)이므로 김해성(金海城)으로 들어갔다가 성이 함락되자 적의 포위망을 돌파, 합천군수 이숙(李潚), 박진영(朴震英) 등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 곽재우군(郭再祐軍)과 합류하여 활약하기도 하였다.

공위겸(孔 敖 謙)이 적에게 항복하여 영산에 웅거, 경상도관찰사를 자처하며 위세를 떨치자 단신으로 그의 진영에 잠입, 계략을 써서 사로잡았다. 15927월의 영산전투에서도 공을 세워 곽재우의 천거로 현풍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안집하여 목민관으로도 영남에 명성을 떨쳤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의 화왕산성 ( 火旺山城 )에 주둔하고 있던 곽재우군에 합류하여 화왕산성전투에서 조전장(助戰將)으로 활약하였다. 난이 끝난 뒤 보성군수을 역임하였다.

죽은 뒤 병조판서로 추증되었고, 창녕의 문암정(聞巖亭), 영산의 도천서원(道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문암집 이 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신균(辛均)

성종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에 오름.

 

신윤(辛崙)

명종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낸 신윤(:참의 필주의 아들)이 유명했다.

 

신경연(辛景衍)

응성의 아들 경연(景衍)은 평안 도사(平安都事)를 역임.

 

신광업(辛光業)

광해군 때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교리(校理)와 사간을 지냄.

 

신응망(辛應望)

인조 때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거쳐 파주 목사(坡州牧使)를 역임했다.

 

신응명(辛應命)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응명(應命),

 

신필형(辛必馨)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辛道澄(신도징) 설화

 

한때 중국 당나라에 살던 辛道澄(신도징)野人(야인)으로있다가 발탁되어 漢州(한주) 지방 縣尉(현위)에 임명되어 임소로 가다가 진부현(眞符縣)에 이르렀는데, 때마침 심한 눈바람을 만났다. 그래서 더 나갈 수가 없어 눈바람을 피하려 어느 초가집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부모와 함께 사는 아름다운 처녀를 만났다.

그녀는 허름한 차림으로 있었지만 살결은 곱고 얼굴은 매우 아름다웠다. 신도징은 그 집에서 하루를 묵는 동안에 늙은 주인의 후대를 받고, 辛道澄(신도징)에게 호감을 갖은 늙은 주인은 딸을 그에게 주어, 처녀와 혼인의 예를 올려 그 집의 사위가 되었다.

그 뒤 辛道澄(신도징)은 그 처녀를 데리고 임소에 이르렀다. 봉록은 매우 적었으나 그의 아내가 힘써 살림을 잘 꾸려 나갔고, 또한 11녀를 얻어 그녀는 현모양처가 되었다. 신도징은 임기가 끝나자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아내가 고향을 그리워하여 함께 처가에 갔다. 그러나 처가의 식구는 아무도 없었다.

아내는 부모를 생각하며 종일토록 울다가 벽 모퉁이에서 호피 한 장을 보고는 크게 웃으며, 그 호피를 머리에 쓰자 순식간에 아내는 호랑이로 변하여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에 놀란 辛道澄(신도징)이 두 자녀를 데리고 쫓아가 숲속을 찾아보았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끝내 아내의 행적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 사진 설명을 넣으세요.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연산신씨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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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영월 신씨는 남한에 총 25,602 가구, 105,977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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