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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신씨(愼)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거창신씨)

 

본관(本貫): 거창(居昌)

시조(始祖): 신수(愼修)

유래(由來):

 

신씨(愼氏)는 중국 천수(지금의 감숙성 위천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된 성씨이며, 우리나라 신씨는 1068(고려 문종 22) 개봉부 출신인 신수(愼修)가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 후 수()는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수사도(守司徒)와 좌복야를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가문의 중요 인물

 

신집평(愼執平)

?1258(고종 45).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거창(居昌). 몽고의 끈질긴 출륙요구에 대한 부응조치로서 1250년 강화도 대안(對岸)인 승천부(昇天府)의 임해원(臨海院) 구지(舊址)에 궁궐을 조영하게 되자, 장군으로서 대장군 이세재(李世材)와 함께 역사를 주관하였다.

그 뒤 대장군에 올랐으며, 1256년에는 나주에 내려가 몽고의 침략군 사령관인 자랄타이(車羅大)와 화의조건을 협의하기도 하였다. 1258년 동북면병마사로 재임 중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소관지역인 고주 ( 高州 화주 ( 和州 정주 ( 定州 장주 ( 長州 의주 ( 宜州 문주 ( 文州 ) 15주 백성을 이끌고 인근섬에 입보(入保)하였다.

처음 저도(猪島)로 들어갔으나 중과부적으로 보다 작은 죽도 ( 竹島 )로 옮겼으나,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조휘(趙暉)와 탁청 ( 卓靑 )의 반란으로 등주부사(登州副使) 김선보(金宣甫)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신성(愼成)

지평의 외아들 신성(:군기감사를 역임)은 아버지가 죽자 정든 개경을 떠나 남쪽지방인 거창으로 내려가 살면서 거창(居昌) 신씨(愼氏)의 시원을 이루었다.

 

신이충(愼以衷)

조선초에 판이주현사(判利州縣事)를 지낸 이충(以衷)이 숭록대부(崇錄大夫)로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증직되고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거창 신씨의 백파(1중파(2계파(3)의 파조가 되어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신기(愼畿)

이충의 아들 중 장남 신기()는 조선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사(忠淸都事)와 이조 정랑(吏曹正郎)을 거쳐 성주 목사(星州牧使)를 지내고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이르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에 추증되었다.

 

신언(愼言)

이충의 차남 신언()은 서령(署令)을 역임하였다.

 

신전(愼詮)

이충의 세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한 신전()은 전주 판관(全州判官)과 예조(兵曹)의 정랑(正郎)을 거쳐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호조 참의(戶曹參議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등을 지내고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고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에 추봉되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신승선(愼承善)

1436(세종 18) 1502(연산군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계지(繼之) · 원지(元之), 호는 사지당(仕止堂). 판서 인도(仁道)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충(以衷)이고,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전()이다. 어머니는 안강(安剛)의 딸이다. 연산군의 장인이다.

1454(단종 2) 사마시에 급제하고 돈녕부승(敦寧府丞), 정랑 등을 거쳐 1466(세조 12) 1월 당상관에 승진하면서 병조참지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3월 식년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병조참판에 승진, 그 해에 다시 발영시 ( 拔英試 )3등으로 급제하고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였다.

1467년 이조참판 겸 예문관제학, 공조참판, 1468년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1468(예종 즉위년) 남이 ( 南怡 )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 翊戴功臣 ) 3등에, 1471(성종 2) 성종등위에 끼친 공으로 좌리공신 ( 佐理功臣 ) 3등에 각각 녹훈되었다.

1472년 자헌대부 ( 資憲大夫 ) 거창군(居昌君)이 되고, 147648월 천추사 ( 千秋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9년 지돈녕부사 ( 知敦寧府事 ), 1481년 행동지돈녕부사(行同知敦寧府事)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어 성절사 ( 聖節使 )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의금부사 ( 知義禁府事 )를 겸임하였다.

1484년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대, 1486년 병조판서 겸 특진관(兵曹判書兼特進官)이 되었다. 1487년 딸이 세자인 연산군의 빈()으로 뽑히자 그를 계기로 좌참찬, 1488년 한성부판윤, 1489년 예조판서, 1491년 사소대장(四所大將)을 겸대,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1492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1494년 우의정, 1495(연산군 1) 좌의정 · 영의정, 14973월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에 봉해졌다. 1495414992월에 걸쳐 영춘추관사 ( 領春秋館事 )로서 성종실록 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 ( 臨瀛大君 ) ( )의 딸과의 사이에서 수근(守勤) · 수겸(守謙) · 수영(守英)을 두었다. 시호는 장성(章成)이다.

 

신수근(愼守勤)

1450(세종 32)1506(중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근중(勤仲경지(敬之). 호는 소한당(所閑堂). 이충(李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이고, 아버지는 영의정이자 거창부원군 승선(承善)이다. 어머니는 임영대군 ( 臨瀛大君 )의 딸이다. 연산군의 처남이며, 중종의 장인이다.

1484(성종 15) 음보(蔭補)로 장령에 기용되고, 1492년 우부승지로 승직된 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495(연산군 1)에 도승지가 되고, 이해에 선위사 ( 宣慰使 )가 되어 평안도를 순무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다가 곧 파직되었다.

1504년에 다시 돈녕부첨정(敦寧府僉正)에 기용되고, 이듬해 우의정이 되어 등극사 ( 登極使 )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6년 좌의정으로 있을 때 박원종 ( 朴元宗 ) 등이 장차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晉成大君 : 중종)을 임금으로 추대할 뜻을 품고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인 그에게 넌지시 누이와 딸 중 그 어느 편이 더 중하냐고 물어보자,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서면서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총명한 세자를 믿고 살겠다고 하였다.

박원종 등이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중종반정 때 맨 먼저 역사인 신윤무 ( 辛允武 이심(李瀋) 등을 보내어 수각교(水閣橋)에서 그를 살해하였다. 그 때 그의 시종(侍從)도 몸으로 막다가 함께 죽음을 당했고, 그의 아우인 유수 수겸(守謙)과 판서 수영(守英)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반정으로 임금이 된 중종이 수근의 딸을 왕비로 책봉했으나 화를 두렵게 여긴 박원종 등에 의하여 폐출되었다. 1739(영조 15) 딸인 단경왕후(端敬王后)의 능후가 온릉(溫陵)으로 추복(追復)됨에 따라 그도 왕의 장인으로서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에 추봉 ( 追封 )되었다. 시호는 신도(信度)이다.

 

신수영(愼守英)

?1506(중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이충(以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승선(承善)이며, 어머니는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딸이다.

연산군의 처남. 1500(연산군 6)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이 되어 왕으로부터 중미(中米) 20석을 하사받고, 이어 동부승지·우승지를 거쳤다. 1501년 우승지·좌승지가 되고 1502년 도승지가 되었다.

1504년 호조참판을 거쳐 1506년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이해 중종반정 ( 中宗反正 )으로 형 수근(守勤), 아우 수겸(守謙)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신수겸(愼守謙)

영의성 승선(承善)의 아들 수근(守勤수영(守英수겸(守謙) 3형제는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의 정치일선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많은 치적을 남겼으나 중종반정 주역들의 보복으로 모두 피살되는 불운을 맞았다.

수겸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이충(以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거창부원군 승선(承善)이며, 어머니는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딸이다. 수근(守勤)의 동생이며, 연산군의 처남이다.

누이가 왕비로 책봉되자 형 수근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였다. 부호군·우부승지 등을 거쳐, 1505(연산군 11) 공조참판에 승진하였다. 이어 지돈녕부사를 역임, 형조판서에 올랐다가 개성부유수로 부임하였으나, 1506년 중종반정 때 임지에서 금부도사에게 살해당하였다.

 

신자건(愼自健)

1443(세종 25)1527(중종 2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표직(杓直). 판이천군사(判利川郡事)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관찰사 기()이고, 아버지는 예조참의 후갑(後甲)이다. 어머니는 판이천군사 오구양(吳具揚)의 딸이다.

1459(세조 5)17세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명성을 떨쳤다. 세조가 대간에 명해 등용할만한 학자를 천거하게 하니 사헌부에서 그를 천거했으나 학문에 뜻을 두고 나아가지 않았다. 30세 무렵 여러 번 문과에 응시했으나 과운(科運)이 없었다. 늙은 어버이를 생각하여 처음에 영릉참봉(英陵參奉)의 벼슬을 하였다.

그 뒤 광흥창봉사(廣興倉奉事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감찰·형조좌랑·상의원판관· 지평 ( 持平 전라도도사·형조정랑·의금부경력·한성부판관·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예빈시정(禮賓寺正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 뒤 품계가 통정대부에 올라 중추부첨사(中樞府僉事장례원판결사를 지내고, 벼슬이 강원도관찰사에 이르렀다. 64세에 몸이 쇠하고 세상의 헐뜯음을 싫어하여 벼슬을 사임하고 교하 ( 交河 ) 심악산(深岳山) 아래 살만한 곳을 가려 정하고, 산수의 경치와 시문과 서화로 즐기며 살았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쓰고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잘 터득하였다. 성종이 글씨에 탄복하여, 창덕궁 요금문(曜金門)의 세 글자를 써 바치게 했으며, 노년에는 글씨를 청한 자들로 저자를 이루었다. 또한, 이재(吏才)에도 뛰어나 송사(訟事)를 들어 재판하는 일을 물흐르듯이 하되 모두 사리에 합당했다 한다.

 

신희복(愼希復)

1493(성종 24) 1565(명종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양숙(養叔), 호는 관천자(觀川子) · 매천(梅川). 황해도관찰출척사 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호조참판 승명(承命)이고, 아버지는 부여현감 돈례(敦禮)이고, 어머니는 직장 유팽수(柳彭壽)의 딸이다. 조광조의 문인이다.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명종이 대군 ( 大君 ) 때 사부(師傅)가 되었다. 1548(명종 3) 명종이 즉위한 뒤 사부 때의 은공으로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이 되고, 1550년에 호조정랑으로 승직되어 내승 ( 內乘 )을 겸직하였다. 1553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당시 가뭄피해가 극심한 금산군에 군수로 나아가 굶주린 백성을 구제, 민심을 수습하고 돌아온 뒤 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조참판이 되어 임금으로부터 품대(品帶 : 품계에 따른 혁대)를 하사받았다. 경기도관찰사를 맡고 있을 때는 외직으로서 임금이 참여하는 서총대(瑞 升 臺) 향연에 동참하는 특혜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개성유수를 거쳐 우참찬이 되었다. 시호는 장정(莊靖)이다.

 

신희남(愼喜男)

1517(중종 12)1591(선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길원(吉遠), 호는 영계(瀯溪). 증좌통례 후경(後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명(榮命)이고, 아버지는 우장(友張)이며, 어머니는 평시령(平市令) 김제(金濟)의 딸이다. 이이(李珥박순 ( 朴淳 ) 등과 교유하였다.

1543(중종 38)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선무랑 ( 宣務郎 )이 되고, 1555(명종 10) 선교 ( 宣敎 )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70(선조 3) 수찬 ( 修撰 장령 ( 掌令 ) 등을 거쳐,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부교리·사간·교리(校理집의 ( 執義 좌승지 등을 지냈다.

1576년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조·예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1581년 당시 극심한 동·서의 붕당을 싫어하여 자청해서 금산군수로 나갔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여생을 마쳤다. 성품이 후덕하고 근면·온화하였으며, 시와 글씨에 뛰어나 한호(韓護)에게 서예를 가르쳤다

 

신천익(愼天翊)

1592(선조 25) 1661(현종 2).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백거(伯擧), 호는 소은(素隱). 참의 희남(喜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경(餘慶)이고, 아버지는 진사 인( )이며, 어머니는 이용(李溶)의 딸이다.

진사시에 합격, 1612(광해군 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615년 홍문관정자를 거쳐,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 사직, 전라남도 영암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홍문관 · 사간원의 요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54(효종 5)에 다시 나와서 홍문관부제학을 지내고 대사간 · 이조참의가 되었다. 1659년에 당시 이조판서 송시열 ( 宋時烈 )이 종2품관직에 인물이 부족하다 하여 당상관 중에서 등용할 수 있는 네 사람을 추천하였는데, 신천익이 그 중 한 사람으로 이조참판에 서임되고, 이어 한성부우윤에 특제(特除)되었다.

그 뒤 관직을 버리고 귀향한 뒤로는 시정(時政)과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문장과 시부(詩賦)에 능하여 송시열도 찬탄한 바 있으며, 아우 해익(海翊)과 더불어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나랏일보다 사사로운 일에 더 힘을 기울였다 하여 당시 선비들 사이에 비난도 적지 않았다. 영암 영보사(永保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소은유고 가 있다.

 

신해익(愼海翊)

1592(선조 25) 1616(광해군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중거(仲擧), 호는 병은(病隱). 참의 희남(喜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여경(餘慶)이고, 아버지는 인( )이며, 어머니는 이용(李溶)의 딸이다.

1613(광해군 5) 22세로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시작에 뛰어나, 일찍이 왕이 탄 수레 앞에서 시를 읊으니, 그 단정한 풍채와 낭랑한 음성을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비선(飛仙) 같다고 감탄하였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었으나 홀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몇 년 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서울로 왔다가,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갑자기 악화하여 25세로 요절하였다.

 

신이의(愼爾儀)

숙종 때 학행으로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천거되었다.

 

신명익(愼溟翊)

1676(숙종 2)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의병.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남거(南擧). 거창 향임으로 1728년 이인좌 ( 李麟佐 )의 난 때, 정희량 ( 鄭希亮 )의 반란군이 거창으로 들어오자 반군의 기밀을 탐지하여 병영 ( 兵營 )에 정보를 제공하여 적을 무찌르는 데 크게 공을 세웠으나 적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1788(정조 12) 좌승지에 추증되고 거창에 경충사(景忠祠)를 세워 제향하였다. 저서로 보만재집 保晩齋集이 있다.

 

 

신수이(愼守彛)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를 역임했다.

 

신후담(愼後聃)

1702(숙종 28) 1761(영조 3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이로(耳老), 호는 하빈 ( 河濱 ) · 돈와(遯窩) · 금화자(金華子).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일(之逸)이고, 아버지는 통훈대부 구중(龜重)이다. 어머니는 우계 이씨(羽溪李氏)인 정관(正觀)의 딸이다.

1723(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그 뒤 과거를 포기하고 오로지 성리학 ( 性理學 )의 연구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였다. 17241월에 이익 ( 李瀷 )을 처음 찾아뵙고 그 뒤부터 변함없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처음 이익을 만나본 그는 이익의 실학적인 학풍에 깊이 감동하였다. 그가 뒷날 실학자로 성장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익과의 만남은 서학 ( 西學 ), 곧 천주학에 관한 미지의 학문세계를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곧 서학에 관한 서적들을 구하여 열심히 연구하여 이 해에 천주교를 철저히 비판한 서학변 西學辨 을 지었다.

이 무렵에 그는 건강이 나빠져 잠시 책을 멀리하고 일상 생활의 실천윤리에 힘을 썼다. 이에 소학 에 관심을 가지게 된 뒤 소학차의 小學箚疑 를 저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자 1728(영조 4)부터 다시 활발한 연구와 저술 활동에 들어갔다.

그는 이익을 찾아가거나 편지를 통해 의심나는 분야를 확인했고, 새로운 지식도 얻으면서 주로 중용 역경 의 연구에 힘썼다. 1734년에는 그동안 연구해온 주역 에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붙인 주역사신편 周易辭新編 7권을 4년 만에 완성하였다.

1742년에는 대학후설 大學後說 · 중용후설 中庸後說 를 저술하였다. 그는 대학 , 중용 을 연구해온 결과 장절(章節)에 대해서 주자(朱子)와 견해를 달리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주목되는 것이 서학변 이다. 이 책은 명나라 때 중국에서 활동한 야소회(耶蘇會, Societas Jesu) 신부들이 지은 책들 가운데서 영언여작 靈言 起 勺 · 천주실의 天主實義 · 직방외기 職方外記 를 차례로 비판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서양의 스콜라 철학에서 내세우는 영혼과 신(Deus)을 성리학의 견지에서 비판하였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 영혼은 없어진다고 하여 영혼불멸설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이는 스콜라 철학에서 말하는 영혼(anima)이 성리학에서 말하는 본성(本性)에 가까운 것이라는 점이 그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곧 천주에 대해서도 그는 천주가 만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만물을 다스릴 뿐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천주를 상제 ( 上帝 )라고 이해했는데, 이는 상제와 만물의 관계는 사람의 마음과 몸의 관계와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몸을 낳지 않고 다만 다스릴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천주와 영혼의 불멸을 내세우고 또 천당과 지옥을 믿는 서학은 어디까지나 불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한 종파라고 보았다.

그런데 당시 그의 스승인 이익은 서학의 정연한 논리나 주의주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깨우쳐주었는데, 이 때 그는 이익에게서 서학을 소홀히 보아 넘기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는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서학변 을 저술하였다.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하여 천문략 天問略 · 곤여도설 坤輿圖說 · 영언여작 · 천주실의 · 직방외기 등의 천주 서적을 탐독하고 이를 철저히 검토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자연히 종교 · 철학 · 문물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리학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더구나 이익의 가르침은 한층 더 그를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그랬듯이 전근대적인 성리학에 물들어 있어서 서학에 대해서는 너무나 이단시했기 때문에 서학 연구에서 얻은 새로운 지식들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중용 이나 역경 의 해석에 그의 독자적인 견해가 있기는 했지만, 그러한 새로운 해석이 성리학을 극복하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 업적은 스승인 이익의 눈에 들지 못했고, 심지어 10년 아래이기는 하지만 이익의 제자 안정복 ( 安鼎福 )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실제 그가 학계에 알려진 것은 이만채(李晩采)가 찬한 벽위편 闢衛編 1931년에 간행된 뒤의 일로서 여기에 서학변 이 실려 있다.

단지 서학을 비판했다는 것만으로 실학자라 평가할 수는 없으며, 이러한 점은 그의 성리학적인 저술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서만 밝혀질 것이다. 특히, 중용 이나 역경 의 해석에서 주자와 달리 해석한 점에서 그의 학문적인 성과가 드러나리라 본다.

 

 

신의학(愼宜學)

1798(정조 24) 문과에 급제한 의학(宜學)은 공조 참의와 흥양 현감(興陽縣監)을 거쳐 종성 부사(鍾城府使)를 역임.

 

신상흠(愼尙欽)

순조 때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하였다.

 

신시휘(愼始徽)

문천군수(文川郡守)를 역임했다.

 

신규성

홍문관 교리(弘文館校里)를 역임했다.

 

愼致得(신치득)  선생의 일화.

 

계모를 잘 모신 효자 신치득(愼致得) : 제주시(濟州市)

신치득(愼致得)의 집안에 1830넌(순조 30) 부역(負役)을 면제하는 상을 내리었다 .
탑라기년 또는 삼강록 등 사료문헌(史料文獻)에 따르면, 공은 본시 도련동(道連洞) 사람인데 일찍이 그 생모(生母)를 여의고 계모(繼母)에게 양육(養育)되어 자랐는데 계모의 마음에 들어서 계모가 낳은 세 아들이 있는데도, 공이 계모를 도맡아 봉양하였다. 집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정성을 다하여 계모를 받들어 만일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얻게되면 반드시 품에 품어와서 어머님께 드렸다.
신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아내와 힘을 합하여 한마음 한뜻으로 성의껏 어머니를 간호하였고, 더구나 눕히고 일으켜 부축하기에 10년을 하루 같이 간호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어머니가 돌아가시매. 명당을 택하여 안장(安葬 )하였다.
이와 비슷한 실례로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고사(故事)가 있는데 향교(鄕校)에서 공문(孔門) 10철(哲)로서 봉향(奉享)되고 있는 공자의 제자에 민손(閔損)이라는 사람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를 맞이하여 계모가 두 아들을 낳았다.

세 형제는 같이 자라는데 큰아들인 민손이 계모에게 극진한 효성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계모는 민손을 그리 사랑하여 주지 않았다.  

어느 겨울이었다.
추운 날 민손이 하도 추워하므로 그 아버지가 민손이 입고 있는 옷을 살펴보니 계모가 낳은 형제에게는 면(綿) 솜옷을 입히고 민손에게는  갈대솜 옷을 입혔으므로 아버지는 계모를 몰아내려 하는지라, 민손이 극구 말리면서 아버지께 맡씀 드리기를 「새어머니가 계시면 저 한사람이 추우면 되오나 새어머니가 가시면 세 아들이 외롭게 되옵니다」하고 더욱 새 어머니를 받드니 새 어머니가 게계 회개하여 세 형제를 똑같이 사랑하여 인자(仁慈)한 어머니가 되었다고 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착한 것이지마는 어쩌다가 비틀릴 때가 있는 것으로 부모님이나 낮 모르는 타인이라 할지라도 내가 먼저 성의로써 대한다면 반드시 언젠가는 상대방이 그 성의를 알아준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신치득은 모든 사람들이 여러 차례의 천거에 의하여 효자의 표창을 받았다.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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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거창 신씨는 남한에 총 9,616 가구, 40,013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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