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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심씨(沈)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청송심씨)

 

본관(本貫): 청송(靑松)

시조(始祖): 심홍부(沈洪孚)

유래(由來):

 

 

청송(靑松) ()씨는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룰 시조로 받들고, 그의 증손 덕부(德符)가 우왕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러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가 청성충의백(靑城忠義伯)에 진봉되어 후손들이 청송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덕부(德符)는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에 공을 세우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판문하부사(判門下府使)와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정종 즉위년에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청송(靑松)을 관향으로 계대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심원부(沈元符)

덕부의 아우 원부(元符)는 고려 말에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판사(典理判事)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다.

 

심온(沈溫)

? 1418(세종 즉위년).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중옥(仲玉). 할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郞) ()이고, 아버지는 개국공신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이다. 세종의 장인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조선 창업에 참여, 간관의 직무를 맡아보았다. 1408(태종 8) 그의 딸이 충녕군(忠寧君:뒤에 세종)의 비가 되면서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 벼슬도 높아졌다. 1411년 풍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성을 침탈하고 병기 관리에 소홀한 수군첨절제사 박영우 ( 朴英祐 )를 파직시키고, 이어 대사헌이 되어서는 관기 확립에 힘썼다.

1414년 변정도감제조(辨正都監提調) · 형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고려 후기에 권세가들에 의하여 천민으로 바뀐 양민들의 신분정리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이어서 호조판서 · 좌군총제 · 판한성부사를 역임했는데, 세자인 양녕대군 ( 讓寧大君 )의 행동에 연루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 ·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양녕대군을 대신해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이어 세종으로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의정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가까이하기에 이르렀다. 1418년에는 사은사 ( 謝恩使 )로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 때에 그의 동생 정( )이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함께 상왕인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 사사되었다.

이 사건은 그가 국구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朴 賻 )의 무고로 밝혀져, 뒤에 세종은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죽기 전 유언으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도록 당부하니, 오랫동안 지켜졌다.

 

심종(沈淙)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할아버지는 용()이고, 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郞) 좌의정 덕부(德符)이며, 태조의 차녀 경선공주(慶善公主)의 남편이다. 1398(태조 7) 8월에 청원군(靑原君)으로 봉하여졌다가 그 해 다시 청원후(靑原侯)로 개봉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다시 청원군으로 봉하여졌다. 같은 해 이방원 ( 李芳遠 )이 정도전 ( 鄭道傳 남은 ( 南誾 ) 등 고려 말의 구신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뒤의 태종)을 도와 난을 성공시킨 공으로 정사공신 ( 定社功臣 ) 2등에 책록되었다.

그는 또한 동복형제 사이에 일어난 방간과 방원의 싸움인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중립적인 처신을 하였기 때문에 무사하였다. 그러나 1416(태종 16) 전주에 유배중인 방간과 은밀히 사통하면서 선물을 받은 것이 탄로나 벼슬이 깎이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자원안치(自願安置 : 스스로 안치형을 받음)되었다

 

심순문(沈順門)

1465(세조 11)1504(연산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경지(敬之). 영의정 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청송부원군 회()이고, 아버지는 내자판관 원()이며, 어머니는 부사정 ( 副司正 ) 이의구(李義坵)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연원(連源)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 학업에 뜻을 두지 않고 방황하였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여 엄히 훈계하고 교육하니, 마침내 깨달은 바가 있어 열심히 학문을 닦게 되었다.

1486(성종 17)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5(연산군 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임되었다. 이어서 박사에 승진되어 성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성균관전적·감찰이 되고, 이해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어서 부수찬 ( 副修撰 정언 ( 正言 부교리 ( 副校理 지평 ( 持平 )을 거쳐, 1503년 장령 ( 掌令 )에 올랐으며, 이어 검상 ( 檢詳 )·(舍人) 등을 지냈다. 이 때 국왕 의복의 장단을 지적하여 연산군의 미움을 사고 이듬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개령현(開寧縣)에 유배되었다가 참수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직언을 잘하여 연산군의 폐정을 자주 지적하였다. 중종 때에 복관되었다.

 

심연원(沈連源)

1491(성종 22)1558(명종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맹용(孟容), 호는 보암(保庵). 영의정 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원()이고, 아버지는 사인 순문(順門)이다. 어머니는 감찰 신영석(申永錫)의 딸이다.

김안국 ( 金安國 )의 문인으로, 1516(중종 11) 생원이 되고, 152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 대교 ( 待敎 봉교 ( 奉敎 )를 역임하였다. 감찰(監察)과 공조·예조·이조의 좌랑을 거쳐, 152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531년에는 검상·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을 거쳐 진휼경차관(賑恤敬差官)에 뽑혀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으며, 1533년 의주부사에 올랐다.

1537년에는 동부승지가 되고, 2년 뒤 예조참판으로 진향사 ( 進香使 )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병조참의·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541년에 대사성, 이듬해 특진관 ( 特進官 형조참판, 1543년 한성부판윤, 다음 해 호조참판이 되었다. 1545(명종 즉위년) 호조판서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이 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위사공신 ( 衛社功臣 ) 2등에 녹훈되고, 청천군(靑川君)에 봉해진 뒤 감춘추관사 ( 監春秋館事 )인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1547년 좌참찬·예조판서·우찬성·판의금부사·좌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른 뒤 좌의정을 거쳐 1551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며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진봉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일처리에 세밀하였다. 특히 중국과 우리 나라의 지리에 밝아서 혹 남의 질문을 받으면 직접 자신이 목격한 것처럼 막힘없이 응대하였다. 일찍이 그가 탐라목사로 있을 때 그곳 산천을 살펴 지도를 그려두었는데, 1555년 남해변에 많은 왜구가 침입했을 때, 가장 요충 지역이던 탐라가 당시 그가 그려둔 지도에 의거하여 대응책을 세워 이를 막아내자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했다한다.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혜(忠惠)이다.

 

심봉원(沈逢源)

1497(연산군 3)1574(선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희용(希容), 호는 효창노인(曉窓老人우송(友松). 영의정 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원()이고, 아버지는 사인 ( 舍人 ) 순문(順門)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 감찰 영석(永錫)의 딸이다.

영의정 연원(連源)과 좌의정 통원(通源)의 동생이다. 어려서는 악동들과 어울려 놀기를 즐겼으나,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공부에 힘써 20세에 성균관에서 학문을 익혔다. 1537(중종 3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어 의정부사록(議政府司錄)을 겸하였다.

이듬해 탁영시 ( 擢英試 )에 병과로 발탁되어 사과 ( 司果 )에 제수되었고, 그 뒤 정언 ( 正言 )을 거쳐 인종이 즉위하자 헌납 ( 獻納 )이 되어 경연에서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처단된 조광조 ( 趙光祖 )의 신원을 진언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 ( 小尹 )의 편에 서서 대윤(大尹)의 거두인 유관 ( 柳灌 유인숙 ( 柳仁淑 ) 등을 탄핵, 숙청하였다.

이어서 장령 ( 掌令 교리 ( 校理 사간· 사예 ( 司藝 전한 ( 典翰 )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53(명종 8) 승정원에 들어가 왕의 측근에서 오랫동안 보필하였다. 그뒤 예조참의·동지돈녕부사를 역임하다가 노환으로 사임하였다. 음률(音律의술(醫術서법(書法)에도 밝았다.

 

심통원(沈通源)

1499(연산군 5)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용(士容), 호는 욱재( 泮 齋). 영의정 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원()이고, 아버지는 순문(順門)이며, 어머니는 신영석(申永錫)의 딸이다. 영의정 연원(連源)의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불렸으며 1537(중종 32)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또한 1546(명종 1)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부응교 ( 副應敎 )로 등용된 뒤 시강관 ( 侍講官 )으로 임금의 학문을 돕다가 직제학이 되어 조정의 공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다. 그 뒤 병조참지가 되어 국방에도 관여하였다.

1548년에 우승지 · 좌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1550년에 예조참판이 되었으며, 이어서 대사헌 · 형조참판 · 한성부판윤을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같은 해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기로소 ( 耆老所 )에 들어갔다. 이듬해 권력남용과 뇌물을 받은 혐의로 삼사의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그 뒤 아부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심강(沈鋼)

1514(중종 9) 1567(명종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유(伯柔). 아버지는 영의정 연원(連源)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김당(金 揆 )의 딸이다. 명종의 장인이다. 1543(중종 3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가 되었다. 명종이 대군으로 있을 때에 그의 큰딸과 혼인하였다.

1546(명종 1) 영돈녕부사에 임명되고,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이 되었다. 1548년 오위도총부도총관이 되고, 1563년 기대항(奇大恒)과 함께 권신 이량 ( 李樑 )의 세력을 제거하고 신진사류인 박순 ( 朴淳 ) 등을 구하였다. 임금의 장인으로서 전택(田宅)을 많이 가져 부유하였으나 남에 대한 시기심이나 해치려는 마음은 없었다. 시호는 익효(翼孝)이다.

 

심의겸(沈義謙)

1535(중종 30) 1587(선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 · 간암(艮菴) · 황재(黃齋). 사인 ( 舍人 ) 순문(順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연원(連源)이고, 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증판서 대( )의 딸이다.

족부인 감찰 홍()에게 입양되었다. 어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 仁順王后 )의 동생이다. 이황 ( 李滉 )의 문인이다. 1555(명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청요직에 임명되었다.

1563년 사림들이 이량 ( 李樑 )으로부터 화를 입게 되자 외숙인 양을 탄핵하며 권세와 간계를 배척하는 등 사림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힘썼으나 도리어 왕의 외척으로 일을 꾸민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1564년 지평 ( 持平 ) · 검상 ( 檢詳 ) · 사인(舍人)을 거쳐 이듬해 사간 · 부응교 ( 副應敎 )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1566년 집의 ( 執義 ) · 군기시정(軍器寺正) · 직제학 · 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69(선조 2) 좌부승지 · 대사간을 지내고, 1572년 이조참의 등을 지내는 동안 척신 출신으로서 사림들간에 명망이 높아 선배 사류들에게 촉망을 받았다.

이 때 김종직 ( 金宗直 ) 계통의 신진세력인 김효원 ( 金孝元 )이 김계휘 ( 金繼輝 )에 의하여 이조정랑으로 천거되었는데, 김효원이 일찍이 명종 때 권신이던 윤원형 ( 尹元衡 )의 집에 기거한 사실을 들어 권신에게 아부했다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다.

1574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에 발탁되었는데, 이번에는 1575년 그의 아우 충겸(忠謙)이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김효원이 전랑 ( 銓郎 )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하여 반대,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구세력은 그를 중심으로 서인 ( 西人 ), 신진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 ( 東人 )이라 하여 동서분당이 발생하였다. , 김효원이 한성부의 동부에 산다 하여 그 무리들을 동인이라 하고, 심의겸이 서부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서인이라 하였다.

당시 정승 노수신 ( 盧守愼 )과 이이(李珥)가 사림간의 분규가 격화될 것을 우려하여 올린 소에 의해 개성유수로 나갔다가 전라감사를 거쳐,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 뒤 한때 낙향하여 은퇴했으나, 1580년 예조참판으로 함경감사를 역임하였다. 이 때 장령 ( 掌令 ) 정인홍 ( 鄭仁弘 )이 그를 질투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이이의 상소로 무사하여 전주부윤이 되었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이발 ( 李潑 ) · 백유양 ( 白惟讓 ) 등이 일을 꾸며 동인과 합세하여 공박함으로써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고, 세습으로 청양군(靑陽君)에 피봉되었다. 효성이 지극하고 검소하였으며, 외척으로 있으면서도 권세를 함부로 부리지 않았다. 나주의 월정서원 ( 月井書院 )에 제향되었다.

 

심충겸(沈忠謙)

1545(인종 1) 1594(선조 2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공직(公直), 호는 사양당(四養堂). 사인 ( 舍人 ) 순문(順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연원(連源)이고, 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이다.

어머니는 효령대군 ( 孝寧大君 )의 후손인 이대(李 鶯 )의 딸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이다. 서인의 영수인 의겸 ( 義謙 )의 아우이며 인순왕후(仁順王后 : 明宗妃)의 동생이다.

1564(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2(선조 5)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후 전적으로 등용된 뒤 호조 · 병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 ( 正言 )이 되었다. 이어 수찬 ( 修撰 ) · 직강 ( 直講 )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157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일찍이 그의 형인 의겸에 의해 이조정랑이 되지 못한 동인 김효원 ( 金孝元 )이 이조의 중요한 정랑자리가 척신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며 반대하여 그 자리에 등용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동서당쟁은 더욱 심해졌다.

그 뒤 지평 ( 持平 ) · 교리 ( 校理 )를 거쳐 1578년에 헌납 ( 獻納 )이 되고 이어서 첨정 ( 僉正 ) · 사예 ( 司藝 ) ·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이 되었다. 1582년에 춘천부사, 1584년에 군자시 ( 軍資寺 ) · 내섬시 ( 內贍寺 )의 정(), 1588년에 여주목사 · 호조참의 · 병조참지, 1590년에 대사간 · 형조참의, 이듬해 형조참판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참판 겸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가 되어 선조를 호종했고, 세자 호위의 명을 받아 왜적 방비에 힘썼다. 1593년에 호조와 병조의 참판으로 군량미 조달에 공헌했으며, 이듬해 병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글씨에도 능했다.

1604년에 좌찬성 · 대제학에 추증되고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에 책록, 청림군(靑林君)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저서로 사양당집 이 있다.

 

심열(沈悅)

1569(선조 2) 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학이(學而), 호는 남파(南坡). 아버지는 부사 예겸(禮謙)이며,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로 첨지중추부사 숙( )의 딸이다. 충겸(忠謙)에게 입양되었다.

1589(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 검열에 기용되었다. 뒤에 성균관전적 등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고 경기도 · 황해도 · 경상도 · 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1623년 호조판서로 승진하였으며, 1638(인조 16) 염철사(鹽鐵使)가 되어 중국 심양(瀋陽)에 가서 물물교환을 하였고, 그뒤 강화유수 · 판중추부사 · 우상 · 영상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탁지(度支)에 대한 뛰어난 경륜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또한,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는데, 특히 시는 심오전아(深奧典雅)하면서 호상활달(豪爽豁達)하였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며, 저서로는 남파상국집 6권이 있다.

 

심희수(沈喜壽)

1548(명종 3) 1622(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 혹은 수뢰루인(水雷累人). 장령 ( 掌令 ) 순문(順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동녕부사 봉원( 駱 源)이고, 아버지는 정자 ( 正字 ) ()이다. 어머니는 이연경(李延慶)의 딸이다.

노수신 ( 盧守愼 )의 문인으로, 1570(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 해 이황 ( 李滉 )이 죽자 성균관을 대표하여 장례에 참여하였다.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 承文院 )에 보임되고 1583년 호당 ( 湖堂 )에 뽑혀 사가독서 ( 賜暇讀書 )하였다.

1589년 헌납 ( 獻納 )으로 있을 때 정여립 ( 鄭汝立 )의 옥사가 확대되는 것을 막으려다 조정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했다가 이듬해 부응교 ( 副應敎 )가 되었다. 1591년에는 응교로서 선위사 ( 宣慰使 )가 되어 동래에서 일본사신을 맞았으며, 이어 간관이 되어 여러 차례 직언을 하다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사성 ( 司成 )으로 전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여 도승지로 승진하고, 대사헌이 되었다. 때마침 명나라 조사(詔使)가 오자 다시 도승지가 되어 응접했는데 이는 그가 중국어를 잘 했기 때문이다. 이 해 겨울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가 되어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접반사 ( 接伴使 )로서 오래도록 서도(西道)에 있었으며, 송응창을 설득하여 관서의 기민 구제(飢民救濟)에 진력하였다.

1599년 예문관제학 ·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홍문관 ·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서 안으로 사명(辭命 : 왕명의 전달)을 장악하고 밖으로 외국 사신의 접대에 힘썼다. 좌찬성 · 우찬성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으며, 청백리 ( 淸白吏 )에 뽑혔다.

1606년 성균관에서 익명의 투서가 나왔는데, 선조가 이를 색출하기 위해 유생들의 심문을 고집하자 그 불가함을 말해 뜻을 관철시켰으며, 그 해 가을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하려 하자 예전(禮典)에 어긋남을 강력하게 표하여 논의를 중지시켰다.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재상에 올랐다. 그러나 권신 이이첨 ( 李爾瞻 ) 등이 국정을 장악하여 임해군 ( 臨海君 )을 극형에 처하려 하자 그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1613(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 부원군 김제남 ( 金悌男 )이 죽고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 ( 永昌大君 )을 옥사의 주모자로 몰아 해치려 하자 이항복 ( 李恒福 ) · 이덕형 ( 李德馨 ) 등과 강력하게 그 부당성을 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듬해 영창대군의 처형은 인륜에 어긋나며, 그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 ( 鄭沆 )을 참수하라고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산 정온 ( 鄭蘊 )을 적극 변호, 귀양에 그치게 하였다.

1615년 영돈녕부사 ( 領敦寧府事 )로 있을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허균 ( 許筠 )과 중국 야사 ( 野史 )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가 궐외로 축출되고 이듬해 폐모론이 다시 일자 둔지산(屯之山)에 은거하여 주역 을 읽고 시를 읊으며 자신의 지조를 지켰다.

1620년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 일송집 이 있다. 상주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심지원(沈之源)

1593(선조 26) 1662(현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 감찰 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천부사 종침(宗 甚 )이고, 아버지는 감찰 설( )이다. 어머니는 청원도정(靑原都正) 이간(李侃)의 딸이다.

1620(광해군 12)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의 족조(族祖)인 종도(宗道)가 대북파(大北派)인 이이첨 ( 李爾瞻 )의 심복이었던 관계로 대북에 가까웠으나 대북 정책에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듬해 검열 ( 檢閱 )에 등용된 뒤 저작 ( 著作 ) · 겸설서 ( 兼說書 ) · 정언 ( 正言 ) · 부교리 ( 副校理 ) · 교리 · 헌납 ( 獻納 )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630(인조 8)에는 함경도안찰어사(咸鏡道按察御史)로 파견되어 호인(胡人)에게 매마매인(賣馬賣人:말과 사람을 매매함)한 자를 적발하는 동시에 육진 ( 六鎭 ) 방어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함경도에서 돌아온 뒤에도 응교 ( 應敎 ) · 집의 ( 執義 ) · 교리 · 부수찬 ( 副修撰 )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노모 때문에 뒤늦게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조익 ( 趙翼 ) · 윤계(尹啓) 등과 의병을 모집하려 했으나 윤계가 죽어 실패하였다.

이에 강화도로 들어가 적에 항거하려 했으나 강화마저 함락되자 죽을 기회도 잃게 되었다. 이것이 죄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때 벼슬길이 막혔다. 1643년 그의 억울함이 용서되어 홍주목사로 기용되었으며, 1648년에는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동부승지 · 대사간 · 대사성 ·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효종 초에 대사간으로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갔으나 대사헌으로 돌아와 병조 · 이조의 참판을 역임하고 1652(효종 3)에는 형조판서에 올랐다. 특히 그의 아들 익현(益顯)이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듬해 1653년에는 이조판서로서 국왕의 언행이 몹시 급함을 때때로 경계했으며, 11월에는 정조사 ( 正朝使 )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4년 우의정에 승서되고 이듬해에는 좌의정으로 옮겼다. 1657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에 영의정에 올랐다.

1659년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효종이 죽자, 원상(院相 : 왕이 병이 들거나 사후 어린 왕이 즉위할 때 왕을 보좌하는 원로대신이 맡는 임시 관직)으로서 국정을 맡고 총호사(摠護使)로서 효종 상례의 책임을 졌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왕대비(慈懿大王大妃)의 복제 문제(服制問題)로 서인의 영수로서 송시열 ( 宋時烈 )의 뜻을 쫓으면서도 남인 조경 ( 趙絅 )을 적극 신구(伸救:억울함을 펴도록 구원함)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김홍욱 ( 金弘郁 )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신구하지 못했다든가 강화설진(江華設鎭)을 반대했다든가, 혹은 양역 ( 良役 )의 폐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족(士族)에 대한 수포(收布)에 적극 반대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고 하겠다.

저서로 만사고 晩沙稿 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과천의 정창연비(鄭昌衍碑)가 남아 있다. 영천의 송곡서원 ( 松谷書院 )에 제향되었다.

 

심사정(沈師正)

1707(숙종 33) 1769(영조 45).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이숙( 蓬 叔), 호는 현재(玄齋) · 묵선(墨禪). 포도를 잘 그렸던 정주(廷胄)의 아들이며 익창(益昌)의 손자이다.

영의정을 지낸 지원(之源)의 증손이자 포도와 인물을 잘 그렸던 정유승(鄭維升)의 외손자로 친가와 외가가 서화를 잘하였다. 명문 사대부 출신이면서도 과거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화업(畵業)에 정진하였다.

사직 ( 司直 )으로 있던 원경하 ( 元景夏 )의 상소문(조선왕조실록 영조 24)에 의하면 1748(영조 24) 삼성진전(三聖眞殿)의 어진모사중수도감(御眞摸寫重修都監)에 조영석(趙榮 例 ) · 윤덕희 ( 尹德熙 )와 함께 화사(畵事)의 감독격인 감동(監董)으로 발탁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생을 그림에 몰두했던 만큼 많은 양의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가 다룬 화제(畵題)도 여러 방면을 두루 섭렵하고 있다. 산수화에는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산수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는 18세기 화단에서 유행하였던 진경산수(眞景山水) 쪽보다 전통적인 중국 화풍에 관심이 컸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이인상 ( 李麟祥 ) · 강세황 ( 姜世晃 ) 등과 함께 당시 화단에 남종화풍을 유행시키고 뿌리내리게 한 주역으로 등단하였다.

그의 회화는 여러 후배 화가들을 자극하였다. 최북 ( 崔北 ) · 이방운 ( 李昉運 ) · 이인문 ( 李寅文 ) 등은 그의 영향이 엿보이는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그가 정선 ( 鄭敾 )에게 그림을 배웠다 하나 정선과는 화풍을 달리하고 있다.

심사정의 회화경향은 그의 화첩에 적은 강세황의 제발문(題跋文)대로 중국 명나라 오파(吳派)의 비조인 심주(沈周)의 화풍을 배워 피마준법(披麻 齧 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북송(北宋)의 문인화가인 미불(米 連 )의 대혼점(大混點) 등 남종화풍을 구사하였다.

중년에 이르러서는 전형적인 북종화법(北宗畵法)인 대부벽준(大斧劈 齧 )도 즐겨 사용하였다. 또한 원말 사대가(元末四大家 : 중국 원나라 말기에, 남종 화가인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 네 사람을 이르는 말) 화풍의 수용도 엿보인다.

특히 그의 아호를 현재(玄齋)라 한 것은 명나라 말기의 남종화가인 동기창(董其昌)의 아호인 현재(玄宰)를 따른 것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선배들의 화법을 다양하게 섭렵하고 남 · 북종화풍을 모두 수용하여 대륙적 면모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은 당시 중국에서도 인정받았으며, 신위 ( 申緯 )는 심사정이 옛 것을 따랐지만 자운(自運 : 글씨본을 보지 않고, 쓰는 사람의 마음대로 붓을 움직이는 일)이 모자란다는 혹평도 하고 있다. 그러나 세련되고 능숙한 필치와 묵법으로 자신의 개성 있는 회화 세계에 도달하였다.

그의 현존하는 작품은 역시 그가 정열을 쏟은 산수화가 가장 많다. 그리고 진경산수 · 풍속화도 남기고 있으며 도석 인물(道釋人物) · 화훼 초충(花卉草蟲) · 영모(翎毛) · 사군자 ( 四君子 ) 등 모든 그림에 능숙한 필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의 회화들은 대담하고 활달한 담묵(淡墨 : 엷은 먹)과 농묵(濃墨 : 짙은 먹)의 사용에서 세필(細筆)의 정교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수묵(水墨 : 빛이 엷은 먹물)과 담채(淡彩 : 엷은 채색)를 다양하게 구사하였다.

산수화의 대표작으로는 강상야박도 江上夜泊圖 · 파교심매도 秧 橋尋梅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촉잔도 蜀棧圖 (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손꼽힌다.

1747년 그가 만 40세 때에 그린 강상야박도 는 북송의 미불, 원말 사대가인 예찬(倪瓚), 명대(明代)의 오파 화가(吳派畵家)들을 따른 흔적이 뚜렷하다. 그리고 이미 40대에 남종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개성화한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1766년에 그린 파교심매도 는 만년의 전형적인 남종화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1768년 말년에 그린 촉잔도 는 그가 영향받은 남 · 북종 대가들의 화법을 종합한 대작이다.

송나라 때 화원 화가인 이당(李唐)의 작품을 재해석하여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부벽준법 등에서 이당의 필법이 엿보인다. 그러나 피마준법 등 남종화풍도 겸용하고 있음이 눈에 띄며 화의는 남종화에 가깝다.

금강산경도 金剛山景圖 · 한양근경도 漢陽近景圖 등의 작품 및 명경대 · 만폭동 등 금강산 그림과 서울 주변을 그린 경구팔경도 京口八景圖 가 전한다.

그런데 화법에서 각이 진 먹선, 부벽준 등 자신의 필법이 강하게 눈에 띄어 동국 진경다운 맛은 적다. 또 그의 도석인물화는 생동감 넘치는 필치가 구사되었고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로서 하마선인도 蝦 錄 仙人圖 등은 능숙한 화경(畵境)을 느끼게 한다.

사군자 역시 사의(寫意)에 치우치고 대담한 필법을 보여 주고 있다. 그에 대한 강세황의 화평(畵評)에 의하면 화훼 초충을 가장 잘 하였고 영모 · 산수 순으로 잘 그렸다고 하였다. 실제로 부드럽고 밝은 채색의 화훼 초충과 영모화들이 전한다.

 

심육

영조 때 영의정으로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 달력을 만드는 신법을 연구해 오게 했던 수현(壽賢: 응교 유의 아들)의 아들 육( : 찬선을 지냄)은 효자로 이름을 떨쳤다.

 

심우승(沈友勝)

1551(명종 6)1602(선조 3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진(士進), 호는 만사(晩沙). 사인 ( 舍人 ) 순문(順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통례(通禮) 달원(達源)이고, 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 전()이며, 어머니는 이한(李翰)의 딸이다.

1573(선조 6) 진사가 되고, 158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나아갔다. 1586년 감찰이 된 뒤 예조좌랑·호조좌랑과 경상·경기 양도의 도사를 거쳐, 형조정랑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는 도중에 정언 ( 正言 지평 ( 持平 )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진주사 ( 陳奏使 )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구원을 청하고 돌아와 승지·춘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6년 호조참의가 되었다가 호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나, 이때 서울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의 행패가 심해지자 이를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에게 항의하고, 그 시정을 촉구하다 파직되었다. 1600년 한성부우윤으로 비변사유사당상을 겸하였다. 죽은 뒤 1604년 호성공신 ( 扈聖功臣 ) 2등에 책록되고, 청계부원군(靑溪府院君)으로 추록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심우신(沈友信)

1544(중종 39) 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공택(公擇). 영의정 회()5대손이고, 아버지는 곡산부사 수( )이며, 서인의 영수였던 의겸 ( 義謙 )6촌형이다.

1577(선조 10) 무과에 합격, 선전관을 역임하고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정리하여 의병을 모집, 수원성에서 적병의 진격을 막았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 ( 金千鎰 )을 만나 사생을 같이 하기로 맹세하고,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가 힘을 합쳐 이를 수호하였다. 성이 함락되어 김천일이 먼저 전사하자,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화살이 다하자 북향재배하고 남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뒤에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전라도 영광의 장천사(長川祠)에 배향되었다.

 

심기원(沈器遠)

? 1644(인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수지(遂之). 아버지는 군수 간()이다. 권필(權 億 )의 문인이다. 유생으로 이귀 ( 李貴 ) 등과 협력하여 1623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 ( 靖社功臣 ) 1등에 책록되고 청원부원군(靑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판에 특진되고, 1624(인조 2) 이괄 ( 李适 )의 난이 일어나자 한남도원수(漢南都元帥)가 되어 난을 막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경기 · 충청 · 전라 · 경상도의 도검찰사(都檢察使)가 되어 종사관 이상급(李尙 肱 ) · 나만갑 ( 羅萬甲 ) 등과 함께 세자를 모시고 피란하였다.

그 뒤 풍정연(豊呈宴)을 빨리 중지하고 분위사(奔慰使)를 보낼 것, 왕이 정전(正殿)에서 거처하는 것을 피할 것, 음악을 철폐할 것 등의 소를 올렸다. 1628년 강화부유수를 거쳐, 1634년 공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의 방어책임을 맡았고, 1642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성절사 ( 聖節使 )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644년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 ( 守禦使 )를 겸임하게 되자 이를 기화로 심복의 장사들을 호위대 ( 扈衛隊 )에 두고 전 지사(前知事) 이일원(李一元), 광주부윤(廣州府尹) 권억(權 迅 ) 등과 모의하여 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을 추대하려는 반란을 꾀하였다.

이 모의는 왕이 믿고 의지하는 무신이나 재상을 초청하여 술에 취하게 한 뒤 죽이고 거사하려는 것이었는데, 부하 황헌(黃 零 ) · 이원로(李元老) 등이 훈련대장 구인후(具仁 譽 )에게 밀고, 탄로되어 거사 전에 죽음을 당하였다.

 

심환지(沈煥之)

정조 때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였다.

 

심상규(沈象奎)

1766(영조 42) 1838(헌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 학자. 본관은 청송(靑松). 초명은 상여(象輿). 자는 가권(可權) · 치교(穉敎), 호는 두실(斗室) · 이하(彛下). 정조의 지우(知遇)를 받은 뒤 상규라는 이름과 치교라는 자를 하사받았다. 이조판서 성희(聖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헌(公獻)이고, 아버지는 규장각직제학 염조(念祖)이다. 어머니는 이조판서 권도(權 款 )의 딸이다.

1789(정조 13)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했고, 강제문신(講製文臣)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96년에 문체가 순수하고 바르지 못하다 하여 웅천현감(熊川縣監)에 외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의 재주가 지나치게 나타나는 것을 걱정한 정조의 배려로서 후일 크게 쓸 재목을 만들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아버지 염조에 이어 사명(賜名)을 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정조가 죽은 뒤 신유년(1801) 정치 파동 때 채지영(蔡趾永) 등의 무고로 홍원(洪原) · 남원(南原)에 잠시 유배되기도 하였다. 1804(순조 4) 안동 김씨 세도정권이 들어서자 정조실록 편수당상관에 임명되었다. 이조 · 호조 · 형조 참판과 전라도관찰사를 거쳐서 1809년 예조판서 · 홍문관직제학에 올랐다.

2년 뒤에는 병조판서로서 홍경래 ( 洪景來 )의 난을 수습하였다. 다음 해 성절사 ( 聖節使 )로서 연경(燕京)에 다녀왔고 1821년 대제학이 되었다. 그 뒤 예조 · 이조 · 공조 판서를 거치면서 궁방전 ( 宮房田 )의 면세지 5,000결을 감축하기도 하였다. 1825년 우의정이 되어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으로서 기강과 풍속교정을 말하여 경장(更張)보다 운영의 측면을 강조하였다.

1827년 세자(翼宗으로 추존됨. )의 대리청정시 대사간 임존상(任存常)의 탄핵으로 면직되어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기간 동안 장단에 퇴거하였다. 1832년 다시 우의정으로 기용되어 절검과 사치 금지 · 공시규제정책(貢市規制政策)을 시행하였다. 순조가 죽자 원상(院相 : 국왕이 병이 나거나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원로대신이 승정원에 주재하면서 국정을 맡은 임시관직)으로서 헌종 초년의 정사를 관장하였다.

순조실록 편찬총재관을 지내고 정조 · 순조 · 익종의 어제(御製)를 찬진하였다. 평생을 김구주 ( 金龜柱 ) 당여와 반대 입장을 지켰다.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질을 보였는데 그의 시문은 내용이 깊고 치밀하여 18세에 이미 타인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문장은 간결하고 자연스러웠는데, 이는 아버지가 모은 수만 권의 장서를 어려서부터 즐겨 읽은 때문이라 한다.

그는 이용후생 ( 利用厚生 )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백성의 생활 근본을 제작(製作)에 두어야 한다고 늘 말하였다. 건릉지장속편 健陵誌狀續編 을 편찬했고, 해박한 지식으로 만기요람 萬機要覽 을 편찬, 국왕의 지침서가 되게 하였다. 저서로 두실존고 斗室存稿 16권이 전하며, 글씨로 경춘전기 京春殿記 가 남아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심현(沈然)

1568(선조 1)1637(인조 1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화(士和). 목사 우정(友正)의 아들이다. 후릉참봉(厚陵參奉)을 거쳐 여러 군현의 수령을 지내고 돈녕부도정에 이르렀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사(宗社)를 따라 강화에 피난, 가묘의 위패를 땅에 묻고 국난의 비운을 통탄하는 유소(遺疏)를 쓰고 부인 송씨와 함께 진강 ( 鎭江 )에서 순절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심경택(沈敬澤)

1805(순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자여(子輿). 서울 출신. 건지(健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능적(能迪)이고, 아버지는 의복(宜復)이며, 어머니는 이정규(李鼎奎)의 딸이다. 1833(헌종 4)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53(철종 4) 대사성을 지낸 뒤 이듬해 예방승지를 거쳐, 1855년에는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857년 독직사건으로 인하여 중화부에 유배되었다가 안변부에 찬배(竄配)되었다. 1859년 다시 복직되어 이조참판·행도승지·한성부판윤·공조판서 등을 거쳤다.

1860년에는 형조판서를 역임한 뒤, 이듬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1862년 다시 한성부판윤을 거쳐, 1865(고종 2) 대사헌·한성부판윤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그 뒤에도 대사헌으로 오랫동안 활약하였다. 저서로는 건연장 巾衍藏이 있다.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심의면(沈宜冕)

1808(순조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주경(周卿). 참봉으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842(헌종 8) 황해도암행어사, 1848년 응교를 거쳤고, 철종의 즉위와 함께 승지가 되었다. 1855(철종 6)에 이조참판, 1860년에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러나 안동김씨의 그늘에서 김씨(金氏)세도에 추종하거나 아부하면서 권세를 유지하였으며, 일찍이 파락호(破落戶)로 행세하던 흥선대원군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으로 불러대며 조롱하였다. 그러다가 대원군의 집권과 함께 거세당하고 말았다.

1864(고종 1) 숙종계비 인현왕후의 옛집을 함부로 개축한 죄목으로 삭직되어 향리방축(鄕里放逐)되었으며, 그의 아들 이택(履澤) 역시 암행어사의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削奪)당하였다

 

심의원(沈宜元)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

 

심순택(沈舜澤)

1824(순조 24)? 조선 말기의 문신. 자는 치화(穉華). 본관은 청송(靑松). 1862(철종 13) 예방승지(禮房承旨), 1874(고종 1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1878년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881년에는 개항 이후 개화자강정책(開化自强政策)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신설, 개편하였던 통리기무아문 ( 統理機務衙門 )의 경리통리기무아문사 ( 經理統理機務衙門事 ), 곧 율례사(律例司)의 당상경리사가 되어 사무를 관장하였고, 다시 기계군물함선당상(機械軍物艦船堂上)이 되어 신무기 제조 및 군사훈련을 청나라에 의뢰하는 한편 일본 군사시설의 시찰을 장려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에 도봉소당상(都捧所堂上)으로 있었고, 군란의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1884년 우의정, 그뒤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새롭게 조직된 수구당내각에서 영의정에 올랐다.

조선에 대한 이권을 둘러싼 청일 양국의 분쟁 사이에서 정치적 고충을 겪었고, 오토리(大鳥圭介)공사의 강압적인 내정개혁요구에 직면해서는 사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1896년 아관파천 ( 俄館播遷 ) 직후 보수적 새 정부에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1897년 대한제국의 수립과 함께 새로이 의정(議政)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공홍식(孔洪植) 옥중살해사건이 계기가 되어 독립협회의 탄핵을 받고, 체직처분을 받기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심이택(沈履澤)

1832(순조 32)?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치은(稚殷). 의린(宜隣)의 아들로 의면(宜冕)에게 입양되었다. 이로 ( 李魯 )의 외손이다. 1857(철종 8) 왕대비의 5(五旬)을 경축하는 경과정시문과에 병과로 등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1864(고종 1) 의주부윤으로 재직 당시 부당하게 재물을 모아, 아버지 의면과 암행어사 이응하 ( 李應夏 )에게 적발당하였다. 그로 인해 삼사가 모두 중벌을 주장하여 아버지 의면은 찬배지전(竄配之典), 그는 가극지전(加棘之典)에 처해 유배당하였다.

1873년에 방면되어 18742월에 이조참의에 올랐다가 같은 해 7월 동지사 ( 冬至使 )의 부사로 임명되어 정사 이회정 ( 李會正 ), 서장관 이건창 ( 李建昌 ) 등과 함께 이듬해 4월 청나라를 다녀왔다.

1876년 성균관대사성에 오르고, 다음 해 11월에는 개성부유수로 외관직에 나아갔다. 1878년에는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8788월 사계(辭陛)한 이래 188012월까지 3년여에 걸쳐, 전라도 지방의 수반으로 장계를 통해 지방사정을 조정에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 자연 재해를 당한 전라도 지방민의 진휼 문제, 서해안 지방의 이양선 출몰 상황, 수세(收稅)에 따른 애로 사항 등을 일일이 기록하여 조정에 보고, 조정에서 실정에 맞는 시정(施政)을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한편, 1880년에는 전라관찰사 재임시의 공을 인정받아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로 뽑히었다.

1882년에는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진하사은 겸 세폐사(進賀謝恩兼歲幣使)로 임명되어 그 해 11월 부사 민종묵 ( 閔種默 ), 서장관 정하원 ( 鄭夏源 )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1884년을 전후해 이조·예조·형조·호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이듬해에는 민종묵· 민영환 ( 閔泳煥 ) 등과 함께 협판내무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군무국협판(軍務局協辦)을 거쳐 8월에는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86년에는 판의금부사·판돈녕부사·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지냈고, 1887년에는 의정부우참찬·시강원우빈객·예문관제학을 지냈다.

문명이 높아서 교태전 ( 交泰殿 ) 등 왕실의 중요 건물을 증축하거나 개축할 때 제술관이나 서사관이 되기도 하였다. 1889년 홍문관제학·내무독판을 거쳐 다음 해 형조판서·이조판서·판의금부사·한성부판윤 등의 요직을 다시 거쳤다. 그 해 9월 일본국 사신을 접견하는 원접사 ( 遠接使 )가 되어 대일본외교에도 종사하였다. 1891년 시강원의 좌부빈객을 거쳐 좌빈객에 올랐다

 

심상학(沈相學)

생몰년 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1881(고종 18) 신사유람단의 정식 위원으로 파견되어 4개월 동안 일본의 근대적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 뒤 통리기무아문 ( 統理機務衙門 )이 개편되어 7() 가운데 동문사(同門司)의 부경리통리기무아문사(副經理統理機務衙門事, 약칭 부경리사)에 임명되어 개화적인 혁신정책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1884년 예조참판에서 협판내무부사로 전직,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벨기에 등 5개국의 특파전권대신(特派全權大臣)이 되어 전권대사로 있다가 병으로 사퇴, 다시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로 재직 중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심상훈(沈相熏)

1854(철종 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순가(舜歌). 1882(고종 19) 수구당의 한 사람으로 임오군란 때 장호원 ( 長湖院 )에 은거하고 있던 민비에게 대원군의 납치소식을 비롯, 왕궁의 근황과 청·일 양국의 출병사실 등 서울의 형세가 호전될 것을 전달해주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고종 일행이 경우궁 ( 景祐宮 )에 임시 거처하고 있을 때, 경기도관찰사로서 경우궁에 들어와 개화당에 합세하는 척 가장하고 몰래 왕에게 정변의 기밀과 개화당의 진상 등을 알려주어 왕과 민비에게 밀통하였고, 사대당 인물들과 모의하여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우차오유(吳兆有) 등을 움직여 행동을 개시하도록 하여 독립당의 혁신정부를 무너뜨렸다.

같은해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동학교도의 탄압에 앞장섰고, 1893년 이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에 올랐다. 1895년 삼국간섭 이후, 친러적 경향을 띠던 수구당내에서 궁내부특진관의 직책을 맡았다.

1896년 아관파천 ( 俄館播遷 ) 이후, 탁지부대신으로 재직하였으나 악화(惡貨)인 백동화 ( 白銅貨 )와 같은 보조화(補助貨)를 주조하여 유통질서에 혼란을 초래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독립협회로부터 탄핵의 대상이 되었다가, 1898년에 체직처분을 받았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심훈(沈薰)

19011936. 소설가·시인·영화인. 본명은 대섭(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 출생. 아버지 상정(相珽)31녀 중 3남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 번안의 장한몽 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 ( 李守一 )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각색·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그 뒤 1928년 조선일보사에 다시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 ( 京城放送局 )으로 옮겼으나 사상 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영화 먼동이 틀 때가 성공한 이후 그의 관심은 소설 쪽으로 기울었다. 1930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 당하였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 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 당하였다. 같은 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이는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조선중앙일보 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1월 신동아). 1934년 장편 직녀성 織女星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 장편 상록수 常綠樹동아일보창간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동방의 애인·불사조등 두 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닌다.

 

沈溫(심온)  선생의 일화.

 

자손에게 남긴 유언

세종의 장인이면서도 상왕인 태종의 비위에 거슬려 끝내 왕명으로 죽음을 당했던 온(溫)은 청성군 덕부의 다섯째 아들이다.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한 뒤 병권만을 장악하고 있었다.

온의 막내 아우인 청이 군국의 대사를 상왕이 쥐고 흔드는 것을 부당하다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습(朴習)에게 불평한 것이 상왕의 귀에 들어가 옥사가 일어났다.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박은(朴 : 당시 좌의정)이
「沈溫(심온)에게 인심이 쏠린다]고 고변하여, 영의정(領議政)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한양에 압송된 후 수원에서 사사되었다.
죽음에 임하여 溫(온)은 「내 자손들은 대대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후 심씨는 대대로 그 유언을 지켜 박씨와 혼인을 논하지 않다가 온의 현손 의(부사맹의창의 아들)와 융(경력 의겸의 아들)이 박씨와 혼인했는데, 조상의 원한이 묻어나서인지 후손에 아들이 없거나 자손이 융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沈天範(심천범)의 효행.

 

정화수에 담은 소망

 

지금부더 150여 년 전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서 태어난 심 천범은 일찌기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 계신 아버님을 모시고 자랐다.

아버지는 심 천범이 어릴 때부터 중풍으로 기동을 못 하시므로 어린 심 천 범은 밥하는 일, 나무하는 일, 농사짓는 일을 혼자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아버지의 밥도 먹여 드려야 하고 일어나고 눕는 일도 도와드려야 했다.

 

어린 천범은 열심히 일하고 또 정성을 다해 아버지를 섬겨 왔기에 어릴 때부터 이웃 간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엣말에 오래 앓는 병에 효자 없다고 하였는데 이무리 부자지간의 정이 두텁다 한들 가난한 집안의 어린 몸으로 먹고 살기조차 힘겨운데, 하루 이틀 도 아닌 50여 년을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여 아버님을 모시니 참으로 하늘 이 내린 효자라 하겠다.

 

그의 아내 최 씨도 어린 몸으로 시집을 와서 남편의 뜻을 잘 받들어 시아버님을 극진히 모셨다.

날마다 시아버님의 얼굴을 씻어 드리고, 머리를 빗겨 드리며, 사흘이 멀다 하고 옷에 설사를 하여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항상 깨끗한 새 옷을 입혀 드리고 맛있는 음식으로 공양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사와 길쌈을 부지런히 하여 몇 해 안가서는 가산을 일으켜 궁하지 않은 살림을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고맙고 갸륵한 일이라 하겠다.

시아버지의 나이가 100 세가 되고 며느리의 나이 64 세가 되던 임오년 (1822)에 전염병이 유행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며느리 최 씨는 행여나 아버님이 병에 걸릴세라 집안을 깨끗이 하여 전염이 되지 않도록 애를 썼지마는 불행히도 병에 걸리니, 날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정화수를 떠 놓 고 우리 시아버님은 아무 죄가 없사오니 이 몸과 죽음을 바꾸게 하여 주옵 소서하고, 수개월을 정성을 다해 기도하였더니 마침내 시아버지는 원기를 회복하고 살아났다.

 

계미년(1823) 3월 그믐날에 또 시아버님이 병이 들어 입맛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되었는데 꿩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셨다.

봄은 꿩이 새끼를 치는 시기 이므로 국법으로 꿩을 잡지 못하게 하여 구할 도리가 없어 들며나며 걱정하고 애쓰다가 집에서 기르는 개를 보고 네가 비록 말 못하는 짐승이나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아 온 식구가 아니냐? 지금 시아버님이 병이 드시어 미음조차 잡숫지 못하고 돌아가시려 하니 네가 산에 가서 꿩을 잡아 올 수 없느냐?’하고 타이르니 개가 즉시 산속으로 달려가 꿩 한 마리를 잡아 오므로 국을 끓여 드렸더니 맛있게 잡수시고는 정신이 들고 힘이 난다고 하셨다.

 

이튿날도 개를 보고 꿩 한 마리만 더 잡수시면 병이 나을 것 같으니 한 마리만 더 잡아 오너라했더니, 이번에는 두 마리를 잡아 왔기에 계속해서 끓여 드렸더니, 차츰 병이 나아 완쾌되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101 세의 나이로 시아버님이 돌아가지니 천범 내외는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 년을 하루같이 애통해 하니 살아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천범이 죽은 지 25 년이나 지나는 동안 그 지극한 효성이 입에서 입으로 전 파되어 온 고을에 칭송이 자자하였으나 집안에 글 잘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 라에 알리지 못해 포상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보고, 울진의 선비 주 명 환 외 26 명이 연명으로 효행 상신서를 순리사를 통해 임금께 아뢰니 철종 임금께서 면포 100 필을 효행 상으로 내리시고 효자 효부 비를 세우게 하시니 현재 북면 두천 1리에 있는 비가 그것인 것이다.

 

출전울진군 죽변초등학교 한 교감

참고 문헌 孝烈行誌, 蔚珍郡誌

 

 

 

沈義(심의)의 일화.

 

쥐구멍을 보고 형을 생각한 심의(沈義)

 

 

조선조 중종(中宗) 때에 천하를 한손에 쥐었다 폈다 할 만한 세력을 가져, 누구 하나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정송 한 분이 있었으니 얼굴은 관옥 같은 미남자요, 말씨와 모습이 너무나 정중하여 더욱 이름을 날렸다.

 

하루는 정승 집에 후리후리한 몸맵시에 헙수룩한 망건과 갓을 쓰고 고은 때가 묻은 구지레한 도포를 엽은 선비 한 사람이 아무 말도 없이 대문으로 들어와서 서슴지 않고 대청으로 올라오더니 큰 사랑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때 녹사(錄事 ; 지금의 비서와 비슷함)가 그 광경을 보고 호령을 하면서 그 선비의 앞 을 막았으나 선비의 억센 손에 녹사는 그만 뒤로 밀리고, 선비는 거리낌 없이 정승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윗목에 털썩 주저앉아서 다짜고짜로 울어대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주인 대감은 아무 말 없이 그 선비의 손을 붙잡고,

 

너는 무슨 일로 이다지도 섧게 우느냐? 형이 새로 정승이 되었는데 무엇이 슬퍼서 우느냐?

하였다. 그 말에 선비는 대답하기를,

 

밤에 꿈을 꾸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나를 보시고, 내가 죽을 때 말이 막혀서 네게 주려던 것을 미처 주지 못한 것이 지금껏 한이 된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꿈을 깨고 보니 아버지 어머니 생각이 새삼스레 간절해서 형님한테 온 것업니다.

 

하면서 목을 놓고 우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던 정승도 눈물을 흘리면서,

 

대관절 무엇을 주시지 못해서 한이 되신 다더냐?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부를 것이니 형님이 적어 보십시오.

그럼 불러 보아라.

하니, 선비는 이것저것 부르기 시작하였다.

 

적은 것을 손에 든 정송은 즉시 청지기를 불러서 다락문을 열고 아우가 부른 것을 꺼내 주었다. 그리고 술을 내다가 먹이며 좋은 말로 위안을 하니 그 선비는 먹는 퉁 마 는 둥 하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 청년은 바로 당시의 간신이던 남곤(南袞)과 홍경주(洪景舟)와 공모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정인일파를 모함하여 죽이고 남곤과 같이 세도하던 심정(沈貞)이요, 그 아우는 그러한 형의 부도덕함을 그르게 생각하고 자주 다니지도 아니하는 정직군자(正直君子) 심의(沈義)였다.

 

심의(沈義)가 그 형이 새로 정승된 것을 보고 한 번 속여 보려고 그런 장난을 하고, 빼앗아 온 물건은 모조리 팔아서 곤궁하고 가난한 여러 선비들을 구제하였다.

 

원래 간사한 심정이지만 그 아우에게는 우애가 지극하였고, 그 아우가 자주 오지 않는 것만 섭섭히 생각하던 중 뜻밖에 아우가 찾아와서 꿈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깜빡 속았던 것이다.

 

아우가 돌아간 뒤에서야 비로소 속은 줄 알고 며칠 후에 그 아우를 불렀다.

 

아우는 아우대로 형이 처음에는 속았다가 나중에 깨닫고 부르는 줄 짐작하고 가 보지 않았다가, 몇 달이 지나서 그 부친 제사 때 비로소 형을 만나게 되니, 심정이 아우를 보고,

 

얘야, 이상도 하지. 나도 어젯밤 꿈에 아버지를 뵈었다.

 

하면서 꿈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 것을 심의는 뒤미처 말을 막으며,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마는 세상에 춘몽(春夢)을 어찌 다 믿겠습니까.하고 태연히 앉았다가 다시 형을 쳐다보면서,

 

형님, 그때 가져갔던 것은 모두 없어졌습니다. 노비 복단이만은 돌려보내지요.할뿐이었다.

 

그 뒤로 심정의 하는 짓이 점점 더 고약하여 가니, 심의가 은근히 채근하였으나 심정은 끝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그 후 심정의 생일이 되어 만조백관(滿朝百官)이 다 모이고 풍악이 종일 질탕하였으나, 심의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니 해가 서산에 넘어갈 무렵에서야 심의는 갓을 삐뚤게 쓰고 형의 집에 나타났다.

 

심의는 형에게 절을 하고 나더니 바로 아랫사람들이 먹고 있는 상으로 가서 술을 서 너 잔 마신 다음, 귀빈들과 같이 앉은 형 앞에 가서 마당에 뜰린 쥐구멍을 가리키며,

 

형님, 술만 잡숫지 말고 저 구멍으로 들어가 보시오. 거기 앉은 분들도 한 번 들어 가보시오.

 

하면서 소리쳐 우는 것이었다.

 

뜻밖의 봉변을 당한 손님들은 홍이 떨어지고 창피한 생각이 나서 모두 흩어져 버렸다.

 

몇 해가 지난 뒤에, 남곤·심정 ·홍경주 일파를 몰아내고 조정이 다시 정리가 되니, 심정은 멀리 귀양을 가고 가산은 몰수당하였다.

 

멀리 가 있던 심의(沈義)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서울로 와서 형의 집으로 달려드니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고 집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쥐구멍만은 여전하니, 심의는 이 쥐구멍을 내려다보고

 

쥐구멍은 여전히 있는데 우리 형님은 어디를 가시고 안 계시나.

 

하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후인들이 말하기를

쥐구멍을 보고 형을 생각한 심의(沈義).라고 하였다.

 

출전< 불교설화전서>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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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청송(靑松) ()씨는 남한에 총 44,446가구, 186,3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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