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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심씨(沈)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풍산심씨)

 

본관(本貫): 풍산(豊山)

시조(始祖): 심만승(沈滿升)

유래(由來):

 

풍산(豊山) ()씨의 시조(始祖) 심만승(沈滿升)은 중국 오흥(吳興:지금의 절강성 북부와 태호 남쪽 기슭에 위치한 지명) 출신으로 천성이 총민하고 박학다능(博學多能)했으며, 1110(예종 5) 동료 호종단(胡宗旦:복주인유 재(劉 載안신지(安愼之) 등과 함께 상선(商船)을 따라 동래하여 태백산 아래인 풍산현에 정착하였고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예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청환직(淸宦職)에 발탁되어 상서봉어(尙書奉御 )를 거쳐 태자첨사부 첨사(太子詹事府詹事)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풍산(豊山)에서 세거(世居)하면서 만승을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 풍산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심승경(沈承慶)

시조 만승의 8세손 승경(承慶)이 고려 말에 전농시사(典農寺事)와 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난정(亂政)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시서로 자오(自娛)하며 여생을 마쳤다.

 

심귀령(沈龜齡)

승경의 아들 귀령(龜齡)이 조선 초기에 크게 현달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1398(태조 7)에 제1차 왕자의 난에 대장군으로 방원(芳遠)을 도와 박원길(朴元吉)과 정도전(鄭道傳)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던 귀령은 제2차 왕자의 난에도 방원에게 가담하여 태종(太宗:방원)이 즉위하자 좌명사등공신(佐命四等功臣)으로 풍천군에 봉해졌으며 1408(태종 8)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전라도 연안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여 크게 무명(武名)을 떨쳤다.

 

심보(沈寶)

귀령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심보()는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심실(沈實)

귀량의 차남 심실()은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심치

귀량의 막내 치는 목사(牧使)를 역임하여 가통을 이었다.

 

심주(沈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올랐던 주는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개탄하여 벼슬을 버린 후 김포로 은거, 두견가(杜鵑歌)를 부르며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심응(沈膺)

목사(牧使) 치의 둘째 아들 심응()은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으로 풍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심형(沈亨)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풍창군(豊昌君)에 봉해졌다.

 

심정(沈貞)

1471(성종 2) 1531(중종 2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 ( 豊山 ). 자는 정지(貞之), 호는 소요정(逍遙亭). 구령(龜 狗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 )이고, 아버지는 부사를 지내고 적개공신 ( 敵愾功臣 )이었던 응()이다. 어머니는 서문한(徐文翰)의 딸이다.

1495(연산군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수찬 ( 修撰 )이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 정국공신 ( 靖國功臣 ) 3등에 녹훈되고 화천군(花川君)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사은사 ( 謝恩使 )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 해에 남곤 ( 南袞 ) · 김극성 ( 金克成 ) 등과 함께 모의, 김공저(金公著)와 조광보 ( 趙光輔 )를 제거하기 위한 옥사를 일으켜 인망을 잃었다.

1509(중종 4) 성천부사 등의 외직을 거쳐, 1515년 이조판서까지 승진했으나 삼사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다시 1518년에 형조판서의 물망에 올랐으나 조광조 ( 趙光祖 ) 등의 사류(士類)로부터 소인(小人)으로 지목되고, 이조판서이던 안당(安 揆 )의 거부로 임명되지 못하였다.

이에 한강변에 정자를 지어 울분을 달래던 중, 아들 사손(思遜)마저 사류의 탄핵으로 파직되자 조광조 등의 사류에 대한 원망이 골수에 맺혀 틈만 노리게 되었다.

마침 1519년 조광조 등이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 반정공신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게 되자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통하여 조씨전국(趙氏專國 : 조씨가 나라를 오로지 한다.)의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남곤 · 홍경주 ( 洪景舟 ) 등과 모의,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사류를 일망타진하였다.

그 뒤 남곤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다가 1527년 남곤이 죽은 뒤 좌의정 · 화천부원군(花川府院君)에 올라 수하에 이항 ( 李沆 )과 김극핍(金克 臻 )을 두고 권력을 독점, 동궁(東宮 : 후일의 인종)과 인척관계에 있으며 권력경쟁자였던 이조판서 김안로 ( 金安老 )를 귀양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경빈 박씨의 동궁저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관련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김안로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김근사(金謹思), 대사간 권예(權 畝 )의 탄핵으로 강서로 귀양갔다가 이항 · 김극핍과 함께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사사(賜死)되었다.

후일 김안로가 죽은 뒤에도 그만은 사림의 미움을 받아 신원되지 못하고 남곤과 함께 곤정(袞貞) ’ 으로 일컬어져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길이 매도되었다. 형제간에 우의는 지극하여 곤경에 처한 동생 의()를 끝까지 보살펴주었다고 하며, 교묘한 꾀를 잘 내어 지혜주머니 智囊 라 불렸다고 한다.

 

심의(沈義)

1475(성종 6)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 ( 豊山 ). 자는 의지(義之), 호는 대관재(大觀齋). 구령(龜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치( )이고, 아버지는 풍산군(豊山君) ()이며, 어머니는 서문한(徐文翰)의 딸이다. 좌의정 정()의 동생이다.

1507(중종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형과 달리 모사를 모르고 직언을 잘하였다. 1509년 윤대(輪對)에서 당시의 정세는 군약신강(君弱臣强)임을 진언하였다가 공신들에게 미움을 사서 여주부 교수 ( 敎授 )로 좌천되었다.

이 때 정치의 도리를 밝힌 일의잠 一宜箴 을 국왕에게 올려 신임을 받고 사헌부감찰에 발탁되었으며, 이어서 공조좌랑이 되었으나 관물을 절취하였다고 하여 탄핵, 파직되었다. 행동이 광패하고 언동이 직선적이어서 사람들의 호감을 받지 못하였다. 다만, 서경덕 ( 徐敬德 ) · 성세창 ( 成世昌 ) 등은 그의 뜻을 이해하고 친히 지냈다.

 

심사손(沈思孫)

1493(성종 24) 1528(중종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 ( 豊山 ). 자는 경(). (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정()이며, 어머니는 허당(許塘)의 딸이다. 1513(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7년 별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사관 ( 史官 )으로 오래 있으면서 사실대로 기록하였다. 1523년 비변사낭관으로 서북면의 야인정벌에 공을 세우고, 예조좌랑 ·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어서는 군무에 숙달함을 인정받아 중대한 일은 반드시 도맡아 처리하였다.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 ( 修撰 ) · 응교 ( 應敎 )를 지내고, 1525년 경상우도어사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전한 ( 典翰 ) ·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528년 다시 서북 변경의 야인들의 준동이 심해지자 당상관에 올라 만포진첨절제사가 되어 변방방어에 정력을 쏟다가, 야인의 기습을 받아 살해되었다. 그의 나이 겨우 36세로서, 중종은 명신을 잃은 것을 매우 슬퍼하였다.

 

심원(沈元)

()의 셋째 아들로 백부인 심원()에게 출계한 사순(思順)은 중종 때 등과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올랐으나 익명서(匿名書) 사건으로 김안로의 무고를 받아 고문중에 죽었다.

 

심수경(沈守慶)

1516(중종 11)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 ( 豊山 ). 자는 희안(希顔), 호는 청천당(聽天堂). 좌의정 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적개공신 응()이고, 아버지는 사손(思遜)이며, 어머니는 참의 이예장(李禮長)의 딸이다.

1546(명종 1)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사가독서 ( 賜暇讀書 )하였다. 1552년 검상 ( 檢詳 )을 거쳐 직제학을 지냈다. 1562년 정릉(靖陵:中宗陵)을 이장할 때 경기도관찰사로 대여(大輿)가 한강을 건너는 선창(船艙) 설치를 하지 않은 죄로 파직되었다. 뒤에 대사헌과 8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90(선조 23) 우의정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체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이듬해 영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98년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 저서로는 청천당시집·청천당유한록 聽天堂遺閑錄이 있다

 

심연(沈延)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였다.

 

심익한(沈翊漢)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심청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역임하였다.

 

심운식(沈雲植)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여기에 사진 설명을 넣으세요.

 

 

 

항렬(行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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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풍산심씨(豊山沈氏)는 남한에 총 2,772가구, 12,02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자료를 사용하실 때에는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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