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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성씨


광주안씨(安)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광주안씨)

 

본관(本貫): 광주(廣州)

시조(始祖): 방걸(安邦傑)

유래(由來):

 

안씨(安氏)의 도시조(都始祖) 안원(安瑗)은 본래 당()나라 종실(宗室)인 이씨(李氏)였는데, 807(당나라 헌종2, 신라 애장왕8)에 신라로 건너와 개성(開城)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정착해 살면서 아들 지춘(枝春), 엽춘(葉春), 화춘(花春) 3형제를 두었다. 그 후 경문왕(景文王) 때 와서 갑신란(甲申亂)이 일어나자 이들 3형제가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나라에서는 편안안() 자로 성()을 내리게 되었으며, 맏아들 지춘(枝春)이 안방준(安邦俊)으로 개명(改名)하고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져서 죽산 안씨(竹山安氏)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 엽춘(葉春)은 안방걸(安邦傑)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져서 광주 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셋째 화춘(花春)은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

 

<부기>

광주 안씨 시조에 대해서는 의론이 있는데 시조를  <안방걸> 공으로 한 것은 다음 등

공개된 많은 문서를 보고 기록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1790년 경술보(庚戌譜)

始祖 安邦傑 仕高麗太祖 官大將軍 封廣州君諸譜 麗朝時 廣州人弑主 公倡義討平之 拜大將軍 封廣州君 因爲貫鄕 或云以州吏出顯 而嶺譜云 公嘗奏捷平壤 授元帥 封廣陵君 墓在廣州 連三世四君 襲世祿云 而族系殘缺 其詳未知 此本出於司諫諱覯 家藏舊草 苔巒去古未遠 其言可信 今以此爲正 按嶺本雖云封廣陵君 恐爽實廣陵是漢陽別號 故今改從諸本作廣州君 [傳疑] 按諸譜 或言墓在廣州渴馬峙 或言開城府東十五里 有兩眼村 今屬長湍 有廣州安氏始祖墓 有齋宮名安齋宮云 今皆未詳

 

시조 안방걸(安邦傑)은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벼슬하여 관직이 대장군(大將軍)으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여러 족보를 보니 고려 때 한 광주(廣州) 사람이 성주(城主)를 죽이자, ()이 의병을 일으켜(倡義) 토평(討平)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되었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져 이로서 관향(貫鄕)이 되었다. 혹은 광주 지방의 관리(州吏)로 뛰어 났다고 한다. 영남지방 족보(嶺譜)에는 "()이 일찌기 평양(平壤)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원수(元帥)의 직을 받고,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 묘는 광주(廣州)에 있다. 3()를 연이어 4명의 군()이 세록(世祿)을 이어 받았다고 하나 족보(族譜)가 없어져 상세한 것은 알수 없다."고 하였다. 이 내용은 사간(司諫) () ()의 가장(家藏) 구초(舊草)에서 나온 것으로, 태만(苔巒)은 옛날로부터 멀지 않으니 그 말이 믿을만하므로, 이제 이를 옳은 것으로 한다(以此爲正). 영남본(嶺本)에서 비록 광릉군(廣陵君)에 봉해졌다고 하나, 광릉은 한양(漢陽)의 별호(別號)로 사실과 어긋날까 두려워 이제 여러 기록을 따라(從諸本) 광주군(廣州君)으로 한다. 전의[傳疑] 여러 족보를 살펴보니 혹은 묘가 광주(廣州) 갈마치(渴馬峙)에 있다고 하고, 혹은 개성부(開城府) 동쪽 15리에 양안촌(兩眼村)이 있는데, 지금은 장단(長湍)에 속하며, 광주안씨(廣州安氏) 시조묘(始祖墓)가 있고, 안재궁(安齋宮)이라는 이름의 재궁(齋宮)이 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미상(未詳)이다.<따온 글>

 

 

가문의 중요 인물

 

안완경(安完慶)

?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호는 정암(貞菴). 사충(社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처선(處善)이며, 어머니는 구홍 ( 具鴻 )의 딸이다. 1423(세종 5)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병조좌랑·종부시소윤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436년 집현전직제학으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한 뒤, 우사간대부·병조참의·좌부승지 등을 거쳐, 1450년에는 형조참판으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1(문종 1)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주문사 ( 奏聞使 )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서, 1453(단종 1)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이 해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 ( 安平大君 )의 일파로 몰려 양산에 유배되었다가 곧 적소에서 사사되었다.

 

안윤손(安潤孫)

1450(세종 32)1520(중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홍조(弘祖). 참찬 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섬시령(司贍寺令) 철산(鐵山)이고, 아버지는 현감 극변(克辨)이며, 어머니는 사성 김최(金最)의 딸이다.

1474(성종 5) 생원·진사시에 잇달아 합격하고 147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478년 예문관검열이 되었다.이어서 기사관이 되어 한명회 ( 韓明澮 )가 남효온 ( 南孝溫 ) 등 재야사림을 비방 탄핵하려 하자 이를 변호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전경 ( 典經 )이 되어 수렵의 폐단과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1482년 검토관 ( 檢討官 )으로 경연에 참여하면서 내수사 장리(長利)의 혁파를 건의하였다.

이듬해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가 되어 왕명을 받고 궐군(闕軍)을 적발하였고, 곧 이어 전주에 내려가서 수령의 불법행위와 교육 현황을 조사, 감독하고 왔다. 1484년 지평 ( 持平 )이 되어서는 안주판관 이빈(李濱)의 비행을 고발하여 처벌하였고 충청도관찰사 이공(李拱)이 무능하다고 탄핵, 체직시켰다.

그 뒤 장령 ( 掌令 )이 되어 언론의 창달과 기강확립에 힘쓴 뒤 1494년 회령통판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1500(연산군 6) 전라북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나, 때마침 침입해온 왜구를 막지 못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곧 복직되어 1502년 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이듬해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청백리로 이름났다. 중종반정 이후 한성부우윤과 좌윤을 지내고 1507(중종 2) 대사헌에 이르렀다. 그 뒤 함경북도절도사·한성부좌윤을 역임하고, 1512년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아들 자문(子文)의 부정행위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안팽로(安彭老)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종생(從生)의 아들 5형제 중 장남 팽로(彭老)는 안동 판관(安東判官)을 역임했다.

 

안팽조(安彭祖)

종생의 4남 팽조(彭祖)는 승사랑(承仕郞)에 올랐다.

 

안팽명(安彭命)

1447(세종 29)1492(성종 2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덕보(德甫).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 ()이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종생(從生)이며, 어머니는 이조정랑 배소 ( 裵素 )의 딸이다.

1468(세조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뒤 1472(성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75년에 예문관봉교(禮文館奉敎)를 거쳐 1488년 장령 ( 掌令 ), 1490년 집의 ( 執義 ), 1491년에 사간을 역임하며 주로 대성(臺省 :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14928월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이 되어 왕명으로 평해 ( 平海 )에 다녀오다가 강릉에서 일생을 마쳤다.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고, 청백리 ( 淸白吏 )에 녹선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였다.

 

안윤덕(安潤德)

1457(세조 3)1535(중종 3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선경(善卿). 참판 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생(從生)이고, 아버지는 안동판관 팽로(彭老)이며, 어머니는 복천군(福川君) 참판 권개(權愷)의 딸이다.

1483(성종 14)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등용되었다. 그 뒤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거쳐 박사가 되고, 1487년에 종부시주부, 1488년에 정언 ( 正言 )을 거쳐 지평 ( 持平 )이 되고, 이어서 병조좌랑이 되었다. 1495(연산군 1)에 형조정랑이 되고, 1497년에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인 ( 舍人 지제교 겸 사관(知製敎兼史官)이 되었다.

1498년에 사간이 되고, 이어 상례 ( 相禮 직제학을 거쳐 1500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다음해에 도승지가 되었다가 경상도·경기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형조참판을 거쳐 1503년에 예조참판이 되었으며 그 해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 해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김제에 유배되었다.

1506(중종 1) 중종반정 후 형조참판에 등용되고, 이어서 병조참판을 거쳐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510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지중추부사에 오르면서 경상도 도순찰사 겸 부원수가 되어 왜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한성부윤·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15년에 평안도관찰사로 나가서 단군과 기자의 사당을 수축하여 경조정신(敬祖精神 : 선조의 숭배정신)과 유풍(儒風)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 한때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1519년에 공조판서로 복직, 세자책립을 위한 원접사 ( 遠接使 )가 되었다. 1526년 기로소에 들고, 1527년에 좌참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안구

1458(세조 4)1522(중종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사중(思仲), 호는 태만(苔巒). 할아버지는 시직(侍直) 숙량(淑良)이고, 아버지는 진사 보문(普文)이며, 어머니는 사인 ( 舍人 ) 정지주(鄭至周)의 딸이다. 김종직 ( 金宗直 )의 문하생으로 그 영향을 받았으며, 1494(성종 25)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505(연산군 11)에 예조정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선 뒤, 1506(중종 1) 정국공신이 되어 헌납 ( 獻納 문학 ( 文學 지제교 ( 知製敎 )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부모 봉양을 위하여 청도군수로 전임되어 치적을 쌓고 청렴한 관리로 뽑혔으며, 국왕의 포상을 받았다.

그 뒤 사간에 제수되고, 1517년 집의 ( 執義 )에 제수되었으나 직언을 하다가 남원부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중앙으로 들어와 종부시정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초에는 예조좌랑이 내려졌으나 사의한 연유로 무오사화 때 화를 면하였다.

 

안담(安曇)

조광조(趙光祖)의 고제(高弟)로 효행(孝行)과 글씨에 뛰어났다.

 

안사웅(安士雄)

1529(중종 24)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위백(偉伯). 현감 극변(克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참판 윤손(潤孫)이고, 아버지는 자흠(子欽)이며, 어머니는 신순승(辛舜昇)의 딸이다.

1542(중종 3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46(명종 1) 왕의 즉위를 경축하기 위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장령 ( 掌令 집의 ( 執義 )를 거쳐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친형제가 일찍 죽었으므로 그 자녀들을 함께 양육하였는데, 먼저 형제의 자녀들을 혼인시키고 나서야 자신의 자녀들을 혼인시킴으로써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또한, 청백리 성()의 후손으로서 가풍을 유지하였으므로 집안이 가난하였다. 승지로 있을 때 왕십리에서 출근하였는데 지각이 잦아, 이를 왕이 알고서 특별히 낙산 ( 駱山 )에 집 한채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들과 함께 죽었다

 

안대흥(安大興)

선조(宣祖) 때 학행(學行)으로 감찰(監察)에 천거되다.

 

안민학(安敏學)

(牙山)의 현감(縣監)을 역임하고 필명(筆名)을 떨쳤다.

 

안정복(安鼎福)

1712(숙종 38) 1791(정조 15). 조선 후기의 역사학자 · 실학자.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 · 한산병은(漢山病隱) · 우이자(虞夷子) · 상헌(橡軒). 제천(提川) 출신.

시망(時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서우(瑞羽)이고, 아버지는 증 오위도총부부총관 극()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익령(益齡)의 딸이다. 이익(李瀷)의 문인이다.

가 문고려조에 태조를 도와 가문을 연 안방걸(安邦傑)로부터 대대로 중앙의 고급관료를 지냈으나 안정복의 가까운 선조에 이르러 영락하였다. 즉 그의 고조 시성(時聖)은 현감을 지냈고, 증조 신행(信行)은 그 보다도 못한 종8품의 빙고별검(氷庫別檢)이었으며, 조부대에 이르면 남인의 정치적인 입지에 따라 더욱 영락한 환경으로 전락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다. 또 할아버지의 잦은 관직 이동과 일생을 처사(處士)로 지낸 부친 극의 입지에 따라 오랜 동안 정주지가 일정하지도 않아 늦게 학문을 시작하였다. 10세가 되어서야 소학 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 뒤 일정한 스승이나 사문(師門)도 없이 친 · 외가의 족적인 범위 내에서 학문 활동이 이루어졌다.

조부가 벼슬을 그만두고 무주(茂朱) 적상산에 들어가자 그도 그곳에서 생활하는 한편 외가인 전남 영광에도 부친과 함께 자주 왕래하였다. 그는 외가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인 관계로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안정복은 어머니 증 정부인(贈貞夫人) 이씨(李氏)가 역사에 대한 식견이 깊었다고 회고하였다.

1726(영조 2)부터 무주에 복거하던 그의 일가는 1735년 조부의 사망으로 이듬해 고향인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慶安面 德谷里 : 현재 광주군 경안면 덕곡리, 일명 텃골)에 정주하였다. 텃골로 돌아온 그는 순암(順菴) ’ 이라는 소옥(小屋)을 짓고 학문 생활에 몰입하였다.

그는 가학(家學)을 기본으로 경사(經史) 이외에 음양(陰陽) · 성력(星曆) · 의약(醫藥) · 복서 ( 卜筮 ) 등의 기술학(技術學)과 손자 ( 孫子 ) · 오자(吳子) 등의 병서, 불교 · 노자(老子) 등의 이단사상, 그리고 패승(稗乘) · 소설 등에 이르기까지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역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 때문에 방술가(方術家)라는 비칭을 듣자 스승 이익(李瀷)으로부터 이름을 바꾸라는 충고를 듣기도 하였다.

생애 및 저술1737년에는 삼대문화의 정통설을 기본으로 한 치통도 治統圖 와 육경(六經)의 학문을 진리로 하는 도통도 道統圖 를 지었다. 이듬해는 치현보 治縣譜 를 저술했으며, 이어 동약 ( 洞約 )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향사법 鄕社法 을 지었다.

그 뒤 174029세에는 그의 초기 학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하학지남 下學持南 · 하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그의 경학(經學)에 대한 실천윤리적 지침서로서 그가 온 정렬을 기울여 저술했던 관계로 말년에 이 책을 펴 보면서 감회에 젖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해설한 정전설 井田說 을 내 놓았고, 1741년에는 주자의 사상을 모방한 내범 內範 을 짓기도 하였다. 1744년에는 유형원(柳馨遠)반계수록 磻溪隨錄 을 입수하였다. 이는 유형원의 사상을 계승하는 학자들과의 교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1775년에 반계연보 磻溪年譜 를 찬하였다.

1746년에는 광주 안산면 성촌리(安山面 星村里 : 현재 안산시 성포동)에 거주하던 이익(李瀷)을 처음 찾아 문인이 되었는데, 이는 이전부터 연분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익과의 만남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그는 이익의 문인들을 이 때부터 알게 되었다.

윤동규 ( 尹東奎 ) · 이병휴 ( 李秉休 ) 등은 동료나 선배로서 권철신 ( 權哲身 ) · 이기양(李基讓) · 이가환(李家煥) · 황덕일 ( 黃德壹 ) · 황덕길 ( 黃德吉 ) 등은 후학 또는 제자로서 연을 맺은 인물들이다. 이들과의 교류에서 어느 정도 사상적인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35세라는 장년기를 가학(家學)으로 보낸 탓에 여기에서 형성된 자기 나름의 학문체계(學問體系)와 사유구조(思惟構造)는 성호를 비롯한 그의 문인들과의 교류에서도 쉽게 변화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그가 다른 실학자들 보다 개혁적인 면에서 참신성이 덜 하고 가장 보수적인 입장인 것도 이러한 가학의 분위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1749년 문음 ( 門蔭 )직인 만녕전참봉(萬寧殿參奉)으로 처음 벼슬을 시작해 이듬해 의영고봉사(義盈庫奉事)가 되고, 1752년에는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를 역임하였다.

이어 이듬해는 사헌부감찰에 이르렀으나 부친의 사망과 자신의 건강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 동안 준비해온 저술들을 정리해 1756이리동약 二里洞約 을 짓고, 이듬해 이를 바탕으로 임관정요 臨官政要 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그의 생애를 대표하는 동사강목 東史綱目 175948세라는 중년기에 일단 완성하였다. 그리고 계속해 1767년에는 열조통기 列朝通紀 를 저술하는 한편, 1753에는 스승 이익의 저술인 도동록 道東錄 이자수어 李子粹語 로 개칭해 편집하였다.

1762년에는 이익이 일생 정열을 바쳐 저술한 성호사설 星湖僿說 의 목차 · 내용 등을 첨삭, 정리한 성호사설유선 星湖僿說類選 을 편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학문은 더욱 깊어 갔으며, 이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1772년부터 1775년까지 세자익위사의 익찬 ( 翊贊 )과 위솔(衛率) 등이 되어 세손(뒤에 정조)의 교육을 맡았다.

이 때 그는 세손이 성리학에 대해 질문하자 이이 ( 李珥 )의 학설은 참신하기는 하지만 자득(自得)이 많고, 이황(李滉)은 전현(前賢)의 학설을 존중해 근본이 있으므로 이황의 학설을 좇는다. ’ 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조가 즉위하자 1776년에는 충청도의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가 자신이 쌓아온 성리학자로서의 경학지식(經學知識)을 마음껏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3년 동안 그곳에서 수행한 주요 치적은 동약(洞約) · 향약(鄕約) · 향사례 ( 鄕射禮 )의 실시, 방역소(防役所)의 설치, 사마소 ( 司馬所 )의 복설 등이다.

이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 의빈부도사(義貧府都事) ·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 등을 역임한 뒤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으로 보냈다.

그는 고향 덕곡리에 선영이 있는 영장산(靈長山) 아래 여택재(麗澤齋)라는 청사(廳舍)를 지어 춘추로 제사를 지냈으며, 평시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여택재는 그 뒤 소실되었으나 1970년대에 다시 정부의 도움으로 재건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말년에는 정주학 이외의 이단사상(異端思想)의 배척에 앞장섰다. 서학, 특히 천주교에 대해 철저히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천주교의 도전이 사회문제로 다가오자 1785(정조 9)천학고 天學考 천학문답 天學問答 을 저술해 천주교의 내세관(來世觀)이 지닌 현실부정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는 곧 현실세계의 명분론적(名分論的)인 위계질서의 옹호이며, 이러한 사상은 일체의 반질서적인 사상이 담긴 도교나 불교, 심지어는 양명학까지도 부정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보수적인 사회사상은 당시 정주학으로 재무장한 노론 독주의 정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생전 노론 천하인 1790년에 종2품인 가선대부 ( 嘉善大夫 )에 올랐다. 사후인 1801년에도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 노론 벽파 ( 僻派 )로부터 천주교 비판의 공을 인정받아 정2품의 자헌대부 ( 資憲大夫 )로 광성군(廣成君)에 추봉되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성호학파의 남인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관료로서 현달(顯達)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직생활이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 듯하다. 부친의 평생 처사 생활로 종답(宗沓)을 팔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팔아버린 종답을 다시 사기 위해 노비와 함께 숯을 굽기까지 한 사실은 그의 생활이 어떠했던 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학문 사상그는 18세기 동안 대내외적인 변화기에 살면서 전통적인 주자학의 실천적인 측면의 고양과 서구문물 가운데, 특히 천주교 배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가 이익을 만나기 전인 1746년까지는 자신의 학문적인 경지를 스스로 형성해 갔던 일개 선비에 불과하였다.

스스로 학문 연마과정에서 이룩한 임관정요 하학지납 은 그의 초기 사상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전자는 뒷날 유형원의 반계수록 의 영향과 이익의 견해로 보완되었지만 중심 사상은 청년기의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임관정요 는 후대 정약용(丁若鏞)목민심서 牧民心書 의 저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하학지남 은 주자의 소학 을 모방한 것으로 저술의 기본이념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 이라고 밝히면서 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 학행일치(學行一致)를 통해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공리공담의 이기논쟁을 직 · 간접으로 반박하였다. 1744년에 접한 유형원의 반계수록 은 그의 학문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현실의 개혁문제 관심을 경주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이는 그가 스스로 이익을 직접 찾게 되었다고 이해된다.

1746년 이익을 방문해 그의 문인이 되면서 안정복의 학문과 사상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이 무렵 이익의 문하에는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 운집하였다. 특히 안정복과 깊은 교류관계를 가진 사람은 인천에 살던 윤동규와 충청도에 거주했던 이익의 조카인 이병휴 및 경기 안산의 이익의 자인 이맹휴(李孟休), 그리고 이인섭(李寅燮) · 이구환(李九煥)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경기 남부와 근기와 충청도에 거주했고, 전통적으로는 퇴계학통을 이었다. 이들은 영남남인들과도 교류를 유지했는데, 이상정(李象靖)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이익의 문인이 된 뒤 그의 학문과 사상에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역시 성리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역사학에 대한 시각, 그리고 서구사상의 접촉이라 할 수 있다.

이익이 1715년경에 쓴 사칠신편 四七新編 을 이 때 접한 그는 이 책을 보고 성리학에 대한 자신감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이후 성리학을 논할 때는 이익의 견해를 바탕으로 퇴계와 정주로의 계제적인 이론의 근원성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하였다.

한편, 역사학은 유형원의 동사강목범례 東史綱目凡例 를 효시로 하여 이익의 조언으로 편찬된 동사강목 은 유형원 이익 안정복으로의 계보를 잇는 것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그가 반계수록 을 통해 이익을 찾았고, 이익을 통해 유형원을 더욱 자세하게 배운 결과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익을 통해 학문과 사상의 깊이와 폭을 더했고, 이에 자신의 학문은 더욱 견고해져 나름의 경험적인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동사강목 은 대표적 저술이라 할 수 있다. 이익이 죽은 뒤부터 그는 자신이 이익의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신념에서 동료와 후학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표방하였다.

말년에 이르면서 정치권은 정적인 노론의 전권시대로 접어들었고, 이익의 문인들 사이에도 천주교의 만연과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전통적인 정주학의 가치관의 쇠미를 드러내면서 사상적인 갈등을 보였다. 이에 그는 이단사상의 배척을 표면화하고 이론적인 무장과 정치참여를 통해 행동으로도 실천하려 하였다.

1785년의 천학고 천학문답 의 저술은 천주교의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그리고 이기양 · 권철신 등이 양명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자 이들에게 서찰을 보내 이단성을 경계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인들의 천주교 입교를 막는 한편, 천주교리의 이단성을 서찰로서 간곡히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제자이면서 사돈지간인 권철신과 사위이자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 ( 權日身 )에게 수많은 서찰을 보낸 것도 이러한 측면의 하나였다. 따라서 그의 역사상의 위치는 정주학의 전통이 내재적으로 발전되는 과정과 대외적인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세계관의 확대에 따른 근대 사상의 전개가 요구되는 과도기에 해당된다.

평 가그는 이 시기 참신한 개혁사상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기보다는 전통적인 질서를 고수하려는 근기남인(近畿南人)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인물이었다. 이러한 위치에 있던 그는 정치적인 업적이나 경세적인 실천보다는 학문적 · 사상적인 측면에서의 공헌이 더욱 컸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인 성과는 많은 저술로 나타났는데, 위에서 언급한 저술 외에 잡동산이 雜同散異 史論 등은 일정한 형식을 갖춰 정리된 저술은 아니더라도 그의 경학관이나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그의 저술은 여러 기록에 따라 일정하지 않아 정확한 수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20여 편 이상으로 파악된다.

 

안정대(安鼎大)

1754(영조 30)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이조(吏曹)의 낭관(郎官)을 거쳐 승지(承旨)에 올랐다.

 

안경열(安景說)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안종화(安鍾和)

1860(철종 11)1924.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광주 ( 廣州 ). 자는 사응(士應), 호는 함재(涵齋). 홍양(洪陽) 출신. 기원(基遠)의 아들이다. 1894(고종 3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궁내부낭관(宮內府郎官법부참서(法部參書세자시강원시독(世子侍講院侍讀)을 거쳐 중추원의관 등을 지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최익현 ( 崔益鉉 )의 상소에 이어 이우면 ( 李愚冕 박봉주(朴鳳柱윤두병(尹斗炳) 등과 함께 조약폐기와 5적의 주살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역사에 밝았으며 특히 100여종의 문헌을 이용하여 조선시대 인물의 전기를 약술한 국조인물지국조문헌 國朝文獻등과 함께 조선시대 인물연구에 관한 귀중한 자료로서 일제시대 총독부 중추원의 조선인명사서편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로는 동사절요 東史節要가 있다.

 

 

安鐘和(안종화)  선생의 일화

부하를 다치지 않고 계도

안종화가 관아를 순시하는데 한 아전이 몰래 비단을 빼돌리는 것을 보았다.
안종화는 그 아전을 일부러 창고에 다시 들어가게 했다. 그 아전은 창고에 들어 갈 때 마다 비단을 빼돌렸는데, 안동화가 세 번 반복시키니, 잘못을 알아차리고 비단을 놓고 나오더라고 한다.

아전을 다치지 않고, 또한 아전의 원망을 사지 않고 관물을 잘 지킨 안종화의 지혜는 우러러 본 받을 만하다.

1860(철종 11) ∼ 1924.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廣州(광주). 자는 사응(士應), 호는 함재(涵齋). 홍양(洪陽) 출신. 기원(基遠)의 아들이다. 1894년(고종 3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궁내부낭관(宮內府郎官) · 법부참서(法部參書) · 세자시강원시독(世子侍講院侍讀)을 거쳐 중추원의관 등을 지냈다.

 

 

표 출전<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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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남한(南韓)에 총 12,486가구, 53,4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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