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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직손씨(孫)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일직손씨)

 

본관(本貫): 일직(一直): 안동(安東)

시조(始祖): 손응(孫凝)

유래(由來):

 

일직 손씨(一直孫氏)는 안동 손씨(安東孫氏)라고도 칭() 하며, 그 선계(先系)는 고려(高麗) 때 중국(中國) ()나라의 난세를 피하여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해 온 손응(孫凝)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본성(本姓) 이 순씨(荀氏)였으나 고려 현종(顯宗: 8대 왕, 재위기간: 10091031)의 이름이 순()이어서 그 음()이 같다고 하여 손씨(孫氏)의 성()을 하사(下賜)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 (世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은 고려 때 장군(將軍)을 지낸 간()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군 일직면 송리동)에 자리잡아 살면서 본관(本貫)을 일직(一直)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중요 인물

 

손홍량(孫洪亮)

1287(충렬왕 13) 1379(우왕 5).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일직 ( 一直 ). 본래의 성은 순씨(筍氏)였으나 현종의 이름과 같아서 그것을 피해 5대조 응() 때 손씨로 고쳤다.

충선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충숙 · 충혜 양조에 벼슬하고 1348(충목왕 4)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하정사 ( 賀正使 )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349(충정왕 1)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에 봉해지고,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복천부원군(福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51년 치사(致仕)하였다. 1362(공민왕 11) 홍건적의 난으로 왕이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난할 때 중도에서 평복으로 왕을 맞아 치하를 받았다.

1364년 난의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가서 왕으로부터 궤장( 廓 杖)과 자신의 초상화를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 이제현 ( 李齊賢 ) · 이색 ( 李穡 ) 등 학자들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손득수(孫得壽)

홍랑의 맏아들 득수(得壽)는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밀직사 좌대언(密直司左代言) 등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초계군수(草溪郡守)를 지낸 아들 웅발(雄發)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

 

손득령(孫得齡)

홍랑의 차남 득령(得齡)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전공 판서(典工判書) 겸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지냈다.

 

손관(孫寬)

조선조(朝鮮朝)에서 복주부원군 홍량(洪亮)의 증손 손관(: 영유의 아들)이 진성 현감(眞城縣監)을 지내고 밀양(密陽)의 용평리(龍坪里)로 이거(移居)하여 그 곳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어 오늘날 밀양군 산외면 다원리(密陽郡山外面茶院里)를 비롯한 영천(永川김해(金海) 등지에 취락(聚落)을 이루게 되었다.

 

손조서(孫肇瑞)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일직 ( 一直 ). 자는 인보(引甫), 호는 면재(勉齋격재(格齋). 득수(得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유(永裕)이고, 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관()이며, 어머니는 김흡(金翕)의 딸이다.

학문과 시문의 대가로서 김종직 ( 金宗直 )과 친교가 있었고, 김굉필 ( 金宏弼 정여창 ( 鄭汝昌 ) 등의 제자를 두었다. 1432(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35(세종 17) 식년문과에 동진사 ( 同進士 )로 급제하였다. 그 해 예문관검열을 거쳐 집현전에 보직되었으며, 지봉산군사(知鳳山郡事)가 되었다.

1451(문종 1)에 병조정랑을 지냈다. 1456(세조 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 ( 成三問 ) 등이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둔,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격재집이 있다.

 

손처눌(孫處訥)

1553(명종 8)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일직 ( 一直 ).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 할아버지는 현감 치운(致雲)이다. 성주(星州) 출신. 정구 ( 鄭逑 )의 문인으로 장현광 ( 張顯光 서사원 ( 徐思遠 )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군과 투쟁하려다가 친상을 연이어 당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난 후 향교의 재건에 앞장서서 후진양성에 노력하였고, 정인홍 ( 鄭仁弘 )의 이황 ( 李滉 ) 배척에 대항하여 척사부정(斥邪扶正 : 사악함을 물리치고 바르고 옳은 것을 세움.)의 글을 지어 도내사림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손인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지내고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의병장(義兵將)으로 활약한 인이 유명했다.

 

손명대(孫命大)

1675(숙종 1)1733(영조 9).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일직 ( 一直 ). 자는 측천(則天). 동아버지는 지중추부사 필억(必億)이다. 1697(숙종 23)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진도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여산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27년에 운봉의 영장 ( 營將 )으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 3월에 이인좌 ( 李麟佐 )의 난이 일어났다. 이 때 안음 ( 安陰 )에서 기병한 이인좌의 일당 정희량 ( 鄭希亮 )이 거창을 함락시키고 함양을 거쳐 전라도 지역으로 진군하려 하였다.

그러자 감사·병사에게는 미처 알리지도 않고 급히 인근 속읍의 군사들을 모아 운봉천총(雲峰千摠) 정후교(鄭後僑)와 함께 전라도의 관문인 팔량치 ( 八良峙 )를 지켜 반군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이에 정희량의 반군은 전라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하루 만에 다시 거창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들은 선산부사 박필건 ( 朴弼健 )과 성주목사 이보혁(李菩赫)에 의해 토벌되었다.

이 때의 공로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으며, 훈련도감별장·선천방어사 등을 거쳐 1733년에 제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도중 강진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 뒤 1763년에 2품직에 추증되었다.

 

손처신(孫處愼)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손단(孫湍), 손좌랑(孫佐郞), 손숙(孫璹)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孫洪亮(손홍량)공의 묘비명

 

 

 

孫洪亮(손홍량) 忠烈王 13年 丁亥(1387)~ 禑王 5年 己未(1379) 93. 一直人 諡 靖平

 

고려사절요 우왕 5(1379) () 7월조에는 전 판삼사 孫洪亮(손홍량)이 졸하였다,라고 있다. ()一直縣(일직현) 사람으로 지금의 一直面(일직면) 松里洞(송리동)에 옛 유적이 남아 있고 공이 손수 심은 은행나무가 경상북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구에는 연조 때 세운 유허비가 있으며 공을 제향 하는 陁陽書院(타양서원)도 있다. 공은 1309(충성왕 1)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삼사에 이르고 1349(충정왕 1) 福州(복주) 부원군에 봉하여 졌으며 공민왕이 안동에 몽진하였을 때는 고령인데도 왕을 극진히 맞이하여 ()이 평정된 뒤에 왕은 공의 초상을 친히 그려 하사하였는데 그 畵像(화상)이 영가지 기록에 의하면 臨河寺(임하사)에 전한다 하였으나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리고 공의 묘소도 중년에 실전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여 사회에 변혁이 일어나서 후손들이 일직현에 계속 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靖平公遺墟碑 陰記

公諱洪亮福州陁陽縣人福州今之安東府也本姓荀始祖幹奉新羅王次一直郡遂爲一直人後避高麗顯宗諱賜姓孫氏曾祖世卿尙衣直長同正祖衍典客令父滂閤門祗候贈金紫光祿大夫門下評理上護軍母安東曹氏密直副使上護軍松之女忠烈王丁亥公生于一直里第幼雋穎長益䧺偉慨然有經世之志忠宣朝登第歷事忠肅忠惠至忠穆王時拜相公忠藎盡節爲政務寬大得大臣體忠定王辛卯致仕歸永嘉從山水之樂時年六十餘恭愍王壬寅紅巾亂作王奔福州公以野服迎於道王嘉之甲辰公入都賀平亂王喜手寫公眞並几杖以賜令二子扶掖出端門皆異恩也及歸傾朝出餞一時名碩如牧隱益齋諸公爲詩文以張大辛禑五年己未七月公卒年九十三官至推誠保節佐理功臣三重大匡判三司事上護軍直誠君贈謚靖平公公以令德崇勳爲六朝元老亨大耋以終顧家藏文獻所傳其見於東史者大畧如此也公配陁陽郡夫人陽城李氏開城尹梴之女生二男二女男得壽密直代言得齡典書女適興海君裵佺通禮門副使金悟內外子孫多名賢不可盡書也公之眞佚於兵火獨公遺址在一直士林想慕公無窮將樹石以表之嗚呼公告老歸十二年而有紅賊之變公沒十四年而麁運訖公之進退存沒關國家治亂興亡盖可見矣抑公年未至而退若有以見於幾先者而又能以壽考先圃牧諸賢以沒身與名俱全詩云旣明且哲以保其身又曰愷悌君子神所勞矣公之謂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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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洪亮(홍량)이며 복주 陁陽縣(타양현) 사람인데 福州(복주)는 지금의 안동부이다. 본래의 성은 ()이고 시조는 ()이며, 신라왕을 받들어 일직군에 왔다가 드디어 일직 사람이 되었다.

뒤에 고려 현종의 휘자를 피해 ()씨로 사성하고, 증조 世卿(세경)尙衣直長同正(상의직장동정)을 지냈고 조부 ()典客令(전객령), 부친 ()은 합문지후증금자광록대부문하평리 상호군을 역임하였다. ()는 안동 ()씨인데 밀직부사상호군 ()의 딸이다.

 

충렬왕 정해년 공은 일직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자람에 따라 더욱 雄偉(웅위)하여졌으며 개연히 세상을 경영 할 뜻을 세웠다.

충성왕조에 등과하고, 충숙왕, 충혜왕과 충목왕조에 이르기까지 봉직하였으며, 공의 충절과 지조는 굳었으나 政務(정무)에는 관대하여 대신들의 예우를 받았다.

충정왕 신묘년에 사직하고 永嘉(영가)현으로 돌아와 산수를 즐기며 살았는데, 그때 나이 60쯤 되었다. 공민왕 임인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이 복주로 피난을 왔는데, 공은 평복을 입고 길가에서 왕을 맞으니, 왕은 기뻐하였다.

갑진년 공이 도성에 들어가, 난이 평정되었음을 하례하자 왕은 기뻐하며 공의 眞影(진영)을 그리고 함께 几杖(궤장)을 하사하고, 두 자식에게 명하여 부측해서 나가라고 하니 모두 은혜에 감사하고, 돌아와 다시 아침에 나가 전별하였다.

한때는 이름이 높은 牧隱(목은), 益齋(익재)와 같은 많은 사람들과 詩文(시문)을 하며 이름을 널리 펼쳤다.

辛禑(신우) 5년 기미 7, 공은 93세로 졸하였는데, 관직은 추성보절좌리공신 삼중대광판삼사사상호군직성군 이었고 시호는 靖平公(정평공)이다.

공은 덕과 공훈으로 육조의 원로가 되었으며 큰 어른으로서 끝을 잘 마쳤다.

 

집에 전해오는 소장된 문헌으로 살펴보니 대략 다음과 같다.

공의 ()陁陽郡(타양군)陽城(양성) 李氏(이씨)인 개성윤 ()의 여식이다. 아들 둘 딸 둘을 두었는데, 장남 得壽(득수)는 밀직대인, 차남 得齡(득령)은 전서, 딸은 興海君(흥해군) 裵佺(배전)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동례문부사 金悟(김오)의 처가 되었다. 내외손 중 많은 명현이 나와 다 기록 할 수 없을 정도이다. 士林(사림)은 공을 그리워하고 추모함이 무궁하여 장차 樹石(수석)으로 표를 하려 했다.

오오! 공이 늙어서 귀향한지 12년이 딜 때, 홍건적의 변고가 생겼고, 공이 죽은 지 14년에 불운이 닥쳤다. 공의 진퇴와 存沒(존몰), 국가 치란과 흥망이 가히 같이 한다고 보였다.

공의 나이에 은퇴하지 아니하지 못하고, 앞일을 미리 예견한 다음, 마땅히 목숨을 생각해야 한다. 먼저 圃隱(포은) 등 많은 현인들은 이미 죽었지만, 몸은 죽어도 이름은 모두 온전하다.

시경에 이르기를 밝고 분별력 있게 행동하여 자기 몸을 보전하며..라 했고 또 말하기를 화락한 군자는 신명이 위로해 준다.라고 공은 말하였다.

 

 

 

 

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항렬자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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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일직·안동 손씨(一直, 安東孫氏)는 남한에 총 5,289가구, 22,21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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