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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손씨(孫)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평해손씨)

 

본관(本貫): 평해(平海)

시조(始祖): 손순(孫順)

유래(由來):

 

평해손씨(平海孫氏)는 밀양(密陽경주(慶州청주 손씨(淸州孫氏)와 더불어 동원(同源)으로 신라 (新羅) 흥덕왕(興德王) 때의 국효(國孝)인 손순(孫順)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의 손자 익담(翼淡:이부 상서 부의 둘째 아들)이 평해군(平海君)에 봉해진 연유로 익담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본관(本貫)을 평해(平海)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손경상(孫景尙)

익담의 아들 경상(景尙)이 고려조에서 나라에 공()을 세워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짐.

 

손술조(孫術祖)

익담의 손자 술조(術祖)가 병부 상서(兵部 尙書)로 평해군(平海君)에 봉군되어 가세(家勢)가 융성하게 되었다.

 

손기정(孫起貞)

도진(道津)의 아들 기정(起貞: 평해군 익담의 현손)이 병부 상서를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이르러 크게 명성을 떨쳤다.

 

손인량(孫仁亮)

고려 원종(元宗) 때 임 연(林 衍)의 난을 평정시켜 기성후(箕城侯)에 봉해진 인량(仁亮)이 뛰어났다.

 

손영(孫永)

득부(得富)의 아들 손영()은 충숙왕 (忠肅王) 때 가정대부(嘉靖大夫)로 형조 참판(形曹參判)을 지내고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

 

손밀(孫密)

정선 군수(旌善郡守)를 역임하고 의정부 좌찬성(議 政府左贊成)에 추증된 손밀(: 병조 판서 유례의 아들)이 유명하다.

 

손인효(孫仁孝)

군수(郡守) ()의 맏아들 인효(仁孝)는 단종 (端宗) 때 생원시(生員試)에 일등(一等)으로 올라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 이 어린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며 절의(節義)를 지키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동방청절사(東方淸節士)라 불렀다.

 

손순효(孫舜孝)

1427(세종 9) 1497(연산군 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 ( 平海 ).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 · 칠휴거사(七休居士).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례(有禮)이고, 아버지는 군수 밀()이다. 어머니는 정선군사(旌善郡事) 조온보(趙溫寶)의 딸이다.

1451(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53(단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 1457(세조 3)에는 감찰로 문과중시에 정과로 각각 급제하였다. 이어 경창부승에 발탁되고, 병조좌랑 · 형조정랑 · 집의 · 전한 등을 역임하였다.

1471(성종 2) 17조의 시무책을 올려 채택되어 형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직무상 과오가 있다 하여 상호군으로 전임되었다. 그 뒤 장례원판결사가 되어 소송 문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였다. 1475년 부제학을 거쳐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승지를 지내고, 1478년 도승지가 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호조참판 · 형조참판을 지내면서 왕비 윤씨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1480년 지중추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판서 · 경기도관찰사 · 대사헌 · 한성부판윤 ·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85년 임사홍 ( 任士洪 )을 두둔하다가 왕의 비위에 거슬려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가 연해안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이어 우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고령으로 사퇴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궤장( 廓 杖)을 하사받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중용 · 대학 · 역경 등에 정통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대나무 그림에 능하였다. 세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찬서(撰書)식료찬요 食療撰要 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손주(孫澍)

1539(중종 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 ( 平海 ). 자는 여림(汝霖). 유례(有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밀()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순효(舜孝)이며, 어머니는 신자의(申子儀)의 딸이다. 1492(성종 2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과 홍문관의 수찬·부제학 등을 거쳤다.

1508(중종 3) 형조참판이 되고, 이어 대사헌·한성부좌윤·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1512년 소릉(昭陵 : 문종왕후 권씨의 능)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시키자는 논의가 조정에서 일어났을 때, 신용개 ( 申用漑 강혼(姜渾)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으로서 남곤(南滾심정 ( 沈貞 고형산(高荊山) 등과 함께 조광조 ( 趙光祖 ) 등 신진사류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뒤에 이조참판에 올랐으며, 1521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조판서로서 하존시사(賀尊諡使)의 임무를 띠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가 되었으며, 경기관찰사·한성부좌윤·예조참판이 되었다. 1528년 호조참판으로 향교에 제사를 드렸으며, 특진관 ( 特進官 )으로 학교교육의 강화를 주장하였다. 1530년 과거의 시험관이 되고, 이듬해 예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 때 나이가 많고 쇠약함을 이유로 치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1532년에 우참찬을 지내고, 좌참찬을 거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공정하면서 정직하여 두루 벼슬을 거치면서도 의리에 합당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았고, 가정에 거처할 때도 검소하였다. 시호는 희질(僖質)이다.

 

손부(孫溥)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손식(孫軾)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손윤선(孫胤善)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손필대(孫必大)

1599(선조 32)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 ( 平海 ). 자는 이원(而遠), 호는 세한재(歲寒齋). 할아버지는 원()이며, 아버지는 진사 몽열(夢說)이다. 1615(광해군 9)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624(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0년 공청도도사(公淸道都事)를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통례지제교(通禮知製敎) 등을 역임하였다. 1660(현종 1) 시관 ( 試官 )을 지냈으며 시문에 능하였다.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평해 손씨(平海孫氏)는 남한(南韓)에 총 2,831가구, 11,4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孫舜孝(손순효) 선생 일화.

 

성종 때의 일이다.

포은의 사당이 경상도 영천에 있었다. 경상도 안칠사 孫舜孝(손순효)가 여러 고을을 순시하러 가던 , 술에 취하여 에서 졸다가 포은촌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비몽사몽간에 머리털수엽이 몹시 희고 의관이 점잖은 노인이 나타나 간곡히 부탁 했다.

 

나는 圃隱(포은)이다. 내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 피폐하여 비바람을 을 수 없도다.”

孫舜孝(손순효)가 깜놀라 눈을 떳다.

길로 마을 노인을 찾아가 圃隱(포은)의 옛 사당을 물었다. 그리고 군민들을 동원하여 피폐해진 그의 사당을 깨끗이 장장했다.

 

孫舜孝(손순효)는 시당을 새로 단장하고 제사를 지냈다. 이 날도 술이 몹시 취해 시당의 벽에글을썼다

자기의 한 몸을 잊고 인간의 기강을 확립했으나, 천세 만세에 크게 우러러 마지않으리로다. 요직 이익만을 쫓아 고금의 사람들이 분주한데, 요로지

공만은 청상 백설에 송백이 창창하듯 하였도다. 이제 한 칸의 집지어 드러오니, 이로서 바람을 막을 수 있을 것이외다.

공의 영혼! 편안해야 나마음도 편하옵나이다.

 

손순효는 성종 때의 재상으로 청렴하기로 이름난 성리학자 였다.

성종이 죽자 총애를 받던 그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주야로 통곡한 충신이었다.

 

 

 

 

 

孫舜孝(손순효) 선생의 일화.

 

149412월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순효는 밤낮으로 슬피 울었.

제왕다운 풍채를 이제 어디에서 다시 볼 수 있으리오.”

그는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통곡했다. 그는 늘 이런 말을 입에 담았.

내소원은 병 없이 죽는 것이다.”

손순효가 71되던 14973어느 날 여러 대신들과 술을 시고 밤늦도록 얘기를 나누었다. 새벽에 잠에서 깬 손순효가 이내를 깨웠다.

내가 이제 기운이 없소. 여러 이들을 부르고 어서 밥상을 차려 오시오.”

이 꼭두새벽에 밥상을 차려 외요?’

부인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시구려.”

부인이 하인을 깨워 아침상을 치려다 주었다. 손순효는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 사이에 자식들이 모였다.

내가 젊었을 책을 끼고 스승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흉내를 내고 싶구나.”

그는 권을 끼고 섬돌 층계를 두서너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방에 돌아와 누웠다.

몹시 피곤하구나, 조금 쉬겠다

식구들은 그가 잠시 잠든 줄로 일었다. 한참 그의 안색이 매우 수상쩍어 코에 귀를 대어 보나 그는 숨을 쉬지 않았다. 숨을 거둔지 한참이었다.

그가 생전에 자식들에게 누누이 부탁한 말이 있었다.

내가 죽거든 맛좋은 소주 한병을 무덤 앞에 묻어 다오.” 자식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주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孫舜孝(손순효) 선생의 일화.

 

손순효가 좌찬성으로 대제학을 겸직할 때였다.

성종은 그의 재주를 몹시 사랑하여 매우 소중히 여겼다. 그가 항상 술을 많이 미시므로 성종은 따로 영을 내렸다

경은 이제부터 술은 석잔 이상 마시지 말라!”

전하 명령대로 따르겠사옵니다.”

손순효는 임금과 군게 약속을 했다.

 

어느 성종이 승정원에서 올린 표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 손순효를 불렀다. 그런데 어찌 영문인지 내관을 명이나 보냈는데도 그가 오지 않았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손순효가 성종 앞에 나타났다. 머리카락은 망건 밖으로 나와 헝클어져 있고, 얼굴은 취기가 돌아 불그스레했다. 그를 보고 성종이 몹시 화냈다.

표문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경을 불러 고치려고 했거늘, 이처술에 취해 나타났단 말인가! 과인이 그대에게 술은 잔 이상은 마시지 밀라고 했거늘 어찌하여 실행하지 않는가!”

전하, 신에게 시집간 딸이 있사온데 오랫동안 보지 못했사옵니다. 오늘 아침 딸의 집 앞을 지나게 되어 잠시 들러 술을 마셨사온데, 다만 세잔을 미셨을 뿐이옵니다.”

술잔이 무엇이었소?’

놎쇠 주발이었사옵니다. 전하께서 주신 술잔을 크게 늘렸사옵니다.”

경은 술이 취했으니 제학을 불러 표문을 함께 짓도록 하시오.”

전하, 제학에게 폐를 끼칠 없사옵니다.”

성종은 할 수 없이 친히 쓰던 지필묵을 가져다주도록 했다. 손순효는 정신을 가다듬고 표문을 지은 다음 붓을 거꾸로 쥐고 한번 훌 어보고는 성종에게 바쳤다.

 

성종이 읽어 보았다. 글자 자 고칠 데가 없는 훌륭한 표문이었다.

성종은 그의 글재주에 깜짝 놀라면서 술상을 내렸고, 손순효는 취하도록 마셨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孫舜孝(손순효) 선생의 일화.

 

손순효의 집은 한양의 명례방 위쪽에 있었다.

어느 날 성종이 느지막이 내관과 함께 경회루에 올라 멀리 바라보았다. 남산 옆에 두서너 사람이 사이에 이마를 맞대고 아있었다.

성종은 그 한 사람을 알아보았다. 손순효였다. 곧장 내관을 보내 확인했다. 손순효가 손님 사람과 함탁주를 미시고 있었다. 안주는 누렇게 익은 참외 한 개 뿐이었다. 내관의 말을 들은 성종은 즉시 술과 안주를 하사히고 경계의 말을 전했다.

내일 조정에 들어오면 과인에게 절대로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

 

손순효는 임금의 뜻밖의 하사품에 손님과 함께 머리를 조아려 감 격하여 울었고, 성종이 내린 술과 안주를 양껏 포식했다. 이튿날 손순효는 성종을 뵙고 사은의 예를 올렸다.

이때 성종이 꾸짖었다.

과인이 경에게 분명 사은 히지 말라고 했거늘, 경은 어이하여 과인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게요!”

손순효가 울면서 대답했다

신은 다만 전하의 은혜를 감사하게 여길 뿐 다른 뜻이 없사옵니다.”

성종은 빙긋이 웃었다. 그의 순수한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孫舜孝(손순효) 선생의 일화.

 

孫舜孝(손순효)가 정성감사 시절, 동래에 시찰을 나갔다. 그 이튿날 현령이 연회를 베풀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현령이 손순효의 형인 인효의 죽음을 알고도 숨기고 알리지 않았다.

그날 손순효의 꿈에 조카가 상주 차림으로 나티나 울음을 뜨렸다.

형님이 돌아가셨구나. 이를 어찌할꼬.”

이튿날 손순효는 현령에게 연회를 취소하고 소찬을 차리게 했다.

감사니리, 어인 일이시옵니까?’

곧 형님의 부고가 올게요.”

나리, 실은 어제 받았습니다.

이때 손순효는 현령을 나무라지 않았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孫舜孝(손순효) 선생의 일화.

 

그가 경상감사로 있을 때였다.

관할 구역인 영해에 읍령이 있었 다. 그곳 백성들은 읍령을 몹시 꺼려했다.

사신이 처음 이 재를 넘어오면 반드시 흉한 일이 있다.”

백성들은 모두 이 재를 피하여 돌아서 다녔다. 마침내 어느 날 손순효가 읍령에 이르러 고목을 깎고 거기에다 시를 썼다.

 

녀는 화산읍하고 만세를 부르며

나는 왕명을 밤들어 뭇 백성을 위로한다.

그 가운데 정중을 누가 알리요

밝은 해가 환하게 두 정상을 비춘다.

그러고 읍령을 파괴한(요괴한 것을 티파히는 재)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 후엔 백성들이 읍령을 마음대로 넘나들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孫舜孝(손순효) 선생의 일화.

 

그가 경상감사로 있던 시절이었다. 효자 · 열녀문을 지나면 그는 반드시 앞에서 말을 내려 절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이것을 지켰

어느 오는 날 열녀문 앞을 지니다가 손순효는 말에서 내려 절했다. 때마침 도사 李集(이집)이 도롱이를 입고 밭고랑 사이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손순효가 물었다.

자네, 거기서 지금 무얼하고 있는가?’

나는 영감보다 먼저 절했소이다.”

그의 멀쩡한 거짓말에 좌우의 사람들이 웃었다

 

손순효가 평양에 들렀을 때였다. 기자의 앞에 말에서 내려 절하고 나서 일행에게 말했다.

동방 사람들이 예의바른 것은 오로지 태사(기지)의 가르침 덕이다.’,

그는 벼슬이 높이도 마음가짐은 더욱 검소하여, 손님의 술상을 준비할 적에 누런 콩 · 채소 · 벼섯 · 나물뿐이었고 고기는 전혀 없었다. 그는 아들들을 항상 경계했다.

우리 집은 초야에서 일어났으므로 대대로 내려온 물건이 없다. 다만 청렴하고 결백한 것을 전해 주면 만족하느니라.”

그는 술에 취해 드러누워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속에는 조금도 더러운 물건이 없다.” 라고 하였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孫舜孝(손순효) 선생의 일화.

 

옛 사람의 삼휴 사휴를 모아 스스로 칠휴거사라 일컬은 손순효는 자가 경보이며, 호는 물재였다. 그는 사람됨이 매우 순실하고 몹시 근신했다.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하고 풍속과 나라의 기강에 관계되는 일은 깊이 생각하였다.

그는 술에 취하면 호기스러운 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그가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였다. 크게 가물어 비기 오기를 기원하며 기우제를 지냈으나 별로효험이 없었다.

비를 얻지 못함은 감사인 내가 정성을 쏟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성심으로 하늘을 감동시킨다면 하늘이 반드시 보답할 것이다.”

손순효는 목욕재계하고 다시 제단을 쌓고 기우제를 정성껏 지냈다.

이때 한밤중에 비가 내렸다. 그는 너무나 기뻐 외쳤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니 어찌 감사지 않겠는가!”

그는 가운데 나가 하늘을 향해 여러 차례 절을 했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이때 아전이 우산을 가지고 나왔다.

내가 높으신 하늘 앞에 어찌 우산을 쓰겠느냐.”

그는 조복을 흠빽 적시며 하늘에 절을 하고 몹시 고마워했다.

                                          <출전: 한국대표 야사 집 >

 

 

출전 <한민족대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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