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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송씨-1(宋)

청남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에서 인용한 것임.

 

(신평송씨-1)

 

본관(本貫): 신평(新平)

시조(始祖): 송구진(宋丘進)

유래(由來):

 

신평(新平)은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성군(洪城郡)에 속해있던 옛 지명(地名)이다.

 

신평 송씨(新平宋氏)는 여산 송씨(礪山宋氏)의 시조(始祖) 송유익(宋惟翊)12세손 말선(末善)이 홍주(洪州)의 신평(新平)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며 여산 송씨에서 분적(分籍)하였으나 병화로 인하여 중간계대(中間系代)가 실전(失傳)되자 후손들이 홍주(洪州)와 신평(新平)으로 갈라져서 각각 달리 세계(世系)를 잇게 되었다.

 

연산(連山)에 세거(世居)하며 고려조에서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서운관정(書雲觀正) 겸 습사도감 판관(習射都監判官)을 지낸 구진(丘進)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신평 송씨(新平宋氏)는 그의 6세손 희경(希璟:기주관 현덕의 아들)이 조선 세종(世宗)때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에 이르러 병조참판(兵曹參判) ()의 증손인 흠(:찰방 가원의 아들) 희경의 현손(玄孫) () 등과 함께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가문의 중요 인물

 

송흠(宋欽)

1459(세조 5) 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신평 ( 新平 ). 자는 흠지(欽之), 호는 지지당(知止堂) · 관수정(觀水亭). 영광 출신이다. 참판 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좌랑 처은(處殷)이고, 아버지는 문소전참봉(文昭殿參奉) 가원(可元)이다. 어머니는 생원 정필주(鄭弼周)의 딸이다.

1480(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있다가 연산군의 포학한 정치로 물러난 뒤 후진 교육에 전심하였다. 1516(중종 11)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 복직, 저작 ( 著作 ) · 박사 · 수찬 ( 修撰 ) · 정언 ( 正言 ) · 헌납 ( 獻納 ) · 병조정랑 · 전라도도사 · 지평 ( 持平 ) 등을 역임하였다.

1528년 담양부사, 1531년에 장흥부사를 지내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전임, 뒤에 광주목사 ·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노모의 봉양 외에는 처자와 노복이 굶주림과 추위를 겨우 면할 뿐, 벼슬이 갈려 돌아오는 날에는 집에 한 섬의 곡식도 없었다 한다.

가는 곳마다 청렴하기로 소문이 나서 상사(賞賜)를 받았다. 1534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다시 노모를 위해 왕의 특허를 받고 집에 돌아갔다. 101세를 산 노모로 인해 전후 7회에 걸쳐 효렴 ( 孝廉 )으로서 상을 받았다.

1538년 청백리 ( 淸白吏 )에 녹선(錄選)되고, 그 뒤 한성부우윤 · 이조판서 · 병조판서 · 우참찬 등을 역임, 1534년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사에 이르렀다.

기묘사화 뒤에는 한때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觀水亭 이라는 액자를 걸어서 자기의 뜻을 붙였다. 수학(數學)에 정통했다고 한다. 영광의 수강사(壽岡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송순(宋純)

1493(성종 24) 1582(선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신평 ( 新平 ).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 潭 仰亭). 담양 출신. 증 이조판서 태()의 아들이다. 면앙정가단( 潭 仰亭歌壇)의 창설자이며 강호가도 ( 江湖歌道 )의 선구자이다.

1519(중종 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1520년 사가독서 ( 賜暇讀書 )를 마친 뒤, 1524년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가 되고 1527년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533년 김안로 ( 金安老 )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송순은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된 뒤 5일 만에 홍문관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집의에 올랐다. 이어 홍문관부제학, 충청도어사 등을 지냈고, 1539년 승정원우부승지에 올라 4월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오자 선위사가 되어 서행(西行)하였다.

그 뒤 경상도 관찰사 · 사간원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 윤원형과 황헌 ( 黃憲 ) 등에 의하여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547(명종 2)에는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중종실록 을 찬수하였다. 그해 5월에 주문사로 북경에 다녀와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50년 대사헌 ·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과 이기(李 咬 )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갔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 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 때 기대승이 면앙정기 를 쓰고 임제 ( 林悌 )가 부()를 쓰고, 김인후 ( 金麟厚 ) · 임억령 ( 林億齡 ) · 박순 ( 朴淳 ) · 고경명 ( 高敬命 ) 등이 시를 지었다. 이후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70세에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과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고, 1568(선조 1) 한성부좌윤이 되어, 명종실록 을 찬수하였다.

이듬해 한성 판윤으로 특승하고 이어 의정부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여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박상 ( 朴祥 )과 송세림 ( 宋世琳 )을 사사하였고, 교우로는 신광한 ( 申光漢 ) · 성수침 ( 成守琛 ) · 나세찬 ( 羅世纘 ) · 이황 ( 李滉 ) · 박우 ( 朴祐 ) · 정만종 ( 鄭萬鍾 ) · 송세형 ( 宋世珩 ) · 홍섬 ( 洪暹 ) · 임억령 등이 있다. 문하 인사로는 김인후 · 임형수 ( 林亨秀 ) · 노진() · 박순 · 기대승 · 고경명 · 정철 ( 鄭澈 ) · 임제 등이 있다.

면앙정은 그가 41세 때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임제 · 김인후 · 고경명 · 임억령 · 박순 · 이황 · 소세양 ( 蘇世讓 ) · 윤두수 ( 尹斗壽 ) · 양산보 · 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면앙정가단은 그 후에 나타난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 영남의 경정산가단 ( 敬亭山歌壇 ) · 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 등의 선구이며, 영남의 가단이 전문 가객 중심이라면 면앙정가단은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이 중심이었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 · 면앙정제영 潭 仰亭題詠 등 수많은 한시(505, 1)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 자상특사황국옥당가 自上特賜黃菊玉堂歌 · 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문집으로는 면앙집 이 있다.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신주가 모셔졌다. )

 

송해용(宋海容)

()의 아들 해용(海容)이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부(父) 송순(宋純) 자(字) 수초(守初), 성지(誠之)  호(號) 면앙정(면仰亭), 기촌(企村)

모(母) 설씨(薛氏) 우후(虞侯) 설남중(薛南仲)의 여(女)

형(兄) 송해관(宋海寬) 참봉(參奉). 형제(兄弟) 최세윤(崔世胤) 현감(縣監)

 

송익침

()의 아들 익침()은 병조 참의를 역임.

 

송지원(宋之遠)

공조참의를 역임했다.

 

송해령(宋海寧)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했다.

 

송석과(宋碩果)

감찰(監察)를 역임했다.

 

송덕미(宋德美)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을 역임하였다.

 

송징(宋徵)

문절(文節)의 아들 송징()은 현종(顯宗) 때 파당(派黨)의 분쟁이 격렬해지자 벼슬을 단념하고 사림(士林)에 묻혀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자는 신지(信之), 호는 율옹(栗翁). 아버지는 증공조참의 문절(文節)이다. 송정순(宋庭筍)의 문인이며, 정철(鄭澈)과 가까이 지냈다. 1612년(광해군 4)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91년(선조 24)정철이 파출(罷黜)되었을 때 신구소(伸救疏)를 올렸다가 연좌되어 10년 정거령(停擧令)을 받았다. 그는 형벌 및 부세(賦稅)를 경감할 것과 문교진흥에 힘쓸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정책에 반영하기도 하였다.

고용후(高用厚)가 무고를 당하여 계옥되었을 때에는 신무소(伸誣疏)를 올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순국한 고경명(高敬命) 3부자의 충효를 들어 석방을 청하였고, 1612년에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성균관유생으로 항소를 올렸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율옹유고』가 있다.

                                     <출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송상문(宋尙問)

현종(玄宗) 때 전시문과(展試文科)에 급제하여 찰방(察訪)을 역임하였다.

 

송환국(宋煥國), 송한욱(宋漢旭)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송생식(宋生植)

한재(漢在)의 아들 생식(生植)은 참의(參議)를 역임.

 

송진우(宋鎭禹)

한말(韓末)의 독립투사로 이름을 남겼다.

1890. 5. 8 전남 담양~1945. 12. 30 서울. 정치가·독립운동가·언론인.

호는 고하(古下). 어렸을 때의 이름은 옥윤(玉潤)이고, 7세 때부터 15세가 되던 1903년까지 성리학자인 노사(蘆沙) 기정진의 친척인 기삼연(奇參衍)으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고하라는 아호도 그가 지어준 것이다.
러일전쟁이 일어나던 1904년 당시의 조혼풍습에 따라 정읍의 유씨와 결혼하여 딸을 하나 얻었다. 그러나 그 딸이 3세 때 죽고 이후 자식을 얻지 못해 후사가 끊기게 되자 큰형의 아들을 양자로 맞이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자 전라남도 장성군의 백양사에 들어가 다시 한학을 닦다가 부친의 권유로 1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와 신학문을 배울 것을 결심했다.
그의 부친은 그를 창평(지금의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 신학문학교인 영학숙(英學塾)에 보내 신학문을 배우게 했다. 비록 이곳에서의 수학은 3개월 만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곳에서 평생지기인 김성수를 만나게 되었다.

1908년 가을 당시 도쿄[東京] 다이세이 중학교[大成中學校] 유학생이었던 홍명희의 강력한 권유로 김성수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라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를 거쳐 1910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했으나, 그해에 한일합병이 되자 충격을 받고 귀국했다.
이듬해 다시 도일(渡日)하여 와세다대학을 자퇴하고 메이지대학[明治大學]으로 옮겨 법학을 공부했다. 대학 재학중 '유학생 친목회'를 조직하여 최남선·현준호·신익희·조소앙·김준연·장덕수 등과 깊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또한 '유학생 친목회'의 산하단체로서 '호남유학생 다화회(茶話會)'를 만들어 회장직을 맡는 한편, 이들 단체가 단순한 사교모임으로 그치는 것을 막기 위해 김병로 등과 함께 유학생회의 기관지인 〈학지광 學之光〉을 펴내기도 했다.
1915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 이듬해 김성수가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를 인수하자 학감으로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데 주력했다. 3·1운동 때는 이 운동의 뒷일을 맡은 48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검거되어 1년 반의 구금생활을 했다.
1921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한 이후 김성수와 함께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민립대학 설립운동, 충무공 유적 보존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을 전개했으며,
1925년 6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범(汎)태평양회의에 신흥우와 함께 참석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한민족의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동아일보사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그의 직책은 사장·고문·주필 등 시세와 상황에 따라 달라졌지만, 김성수를 대신하여 그는 언제나 〈동아일보〉 간행의 중추역을 담당했으며 이로 인해 투옥되기도 했다.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자 동본사(東本社)를 설립하여 동아일보사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일본의 패망이 거의 확실시된 1945년 8월 10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 인수 교섭을 받았으나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해방직후 여운형이 주축이 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맞서기 위해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국민대회준비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이후 고려민주당과 조선민족당 및 한국국민당의 결합체인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가 되어 우익세력의 규합에 앞장서는 한편, 미군정에 적극 협력하여 주한미군사령관인 J. R. 하지의 행정고문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환국지사후원회를 조직하여 이승만과 임시정부 요인들의 국내생활의 편의를 도모함과 아울러, 이들과 함께 정부수립을 위해 노력했고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언론보국의 활동도 재개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27일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한국 신탁통치안에 대한 찬반양론의 첨예한 소용돌이 속에서 12월 30일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에게 암살당했다.

                     <출전: 좋은 사람들 정묘까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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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한민족대성보>

 

 

 

항렬(行列)

담양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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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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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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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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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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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파

항렬자

항렬자

항렬자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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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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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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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1985년에 실시한 인구 조사 결과 신평 송씨(新平宋氏)는 남한(南韓)에 총 98가구, 5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곳의 자료는 청남선생님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소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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